산행정리:2002.10.27
05:40중산리주차장-06:20아지트갈림길-08:10조식-09:00써리봉갈림길-11:30천왕봉-12:30개선문-13:15로터리대피소-15:00순두류-15:35중산리
최근 인터넷이 보급된 후 사람들 삶의 질이 달라졌다. 원하는 모든 정보를 웹상에서 마우스로 클릭 한번 하는 것으로 얻을 수 있으니, 지리산 또한 그 예외는 아니다. 오프라인에 묻혔던 산꾼들이 서서히 인터넷 무대로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그들에 의해 지리산은 신비함을 잃은 채 그 옛날의 지리산이 될 수 없었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측의 주장은 한마디로 네티즌 지리산 마니아에 의해 지리산은 파괴된다는 것인데, 그것은 이미 예상된 수순이었다.
내가 O드리지님의 필명을 들은 것은 3년 전 라O락님의 지리산 홈페이지에서이다. 지금은 라O락님의 홈페이지가 사라지고 없지만, 지리산을 오르는 산꾼들의 즐겨 찾는 사랑방 역할을 한 바로 그곳이었다. 간결하고 깔끔한 문체에 정확한 답변으로 지리산에 입문하는 초보 산꾼들에게 지리산에 대한 안내를 친절히 해주는 답글을 보고, 지리산에 대하여 많은 경험과 해박한 지식을 갖춘 지리 산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O드리지님과 지리산 산행을 하게 된 것은 나에게 행운이었다. 특히 O드리지님과는 과거 한겨울 천왕봉 하산길과 이른 봄 덕두산 바래봉 샘터에서 스쳐 지나간 아쉬운 인연도 있었다. 마침 서로 산행할 코스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같은 날 지리산행 계획이 있는 것을 서로 알게 되어 첫 만남이 이루어지니, 며칠 전부터 O드리지님과의 약속에 마음이 설레며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홍샘을 밤 10시 반에 온수역에서 만나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하여 진주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은 시간은 토요일 자정이었다. 홍샘과 떠나는 지리산행길은 언제나 언제나 술. 버스 뒷좌석에서 도란도란 세상 사는 이야기를 나누며 술잔을 나누다 보니, 양주 1병이 대전도 채 지나지 않아 금세 바닥이 난다. 서울에서 진주까지는 고속도로의 개통으로 불과 4시간 남짓 소요. 4시 20분에 O드리지님이 진주 터미널에 도착한다고 했다. 우리 일행과의 산행시간을 맞추기 위해 창원에서 새벽 3시에 출발한다고 하니 고맙기도 하다. 진주 터미널에 도착하여 잠시 기다리니 핸드폰 벨이 울린다. O드리지님의 반가운 목소리. 바로 길 건너에서 O드리지님이 손을 흔든다. 처음에는 O드리지님의 일행이 4명이라 들었는데, 여자 한 분만 눈에 보인다. 반가움에 인사를 나누고 O드리지님의 차량에 탑승하여 진주에서 산청 시천면으로 들어가는 새로 생긴 신작로를 따라 들머리 중산리에 도착하니 아직도 캄캄한 5시 30분쯤이었다.
차에서 내리니 차갑고 건조한 바람이 몸을 얼어붙게 만든다. O드리지님의 패킹을 기다리며 담배를 하나 태운다. 아직 취기가 빠지지 않아 머리가 멍하다. 새벽 지리산 자락은 영하의 날씨이다. 전국적으로 추운 날씨와 약간의 비를 뿌린다고 뉴스는 들었었다. 작은 눈발도 바람에 날려 지리산은 시월임에도 벌써 겨울인가 착각하기에 충분하였다. 오늘의 코스는 O드리지님의 제안에 따라 중봉골로 오르기로 한다. 주차장에서 순두류 청소년 수련원까지는 시멘트 포장길로 1시간 정도 올라야 한다. 처음에 군사작전용으로 뚫린 이 길은 상당히 아름다운데, 지금 이 시간 어둠에 파묻혀 아무런 느낌과 감동도 받지 못한 채 그저 무덤덤하게 오를 뿐이다. 앞장서고 있는 O드리지님과 홍샘이 비추는 헤드 랜턴 불빛 사이로 눈이 제법 내리는 것을 선명히 볼 수 있다. 굽이굽이 방향을 바꾸며 이어지는 이 순두류 포장길의 끝에는 로터리 산장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어느새 포장길이 끝나고 부드러운 숲길을 따라 오른다.
덜커덩거리며 쇳소리를 내는 철다리를 건너자 우측에 순두류 아지트라는 푯말이 서 있는데 바로 이곳이 중봉골의 초입이다. 한국전쟁 당시 경남도당 빨치산 본부가 있었던 곳으로써 국군토벌대의 기습에 대비하여 비트를 만들어 망을 보던 곳이 망바위이다. 곧바로 계곡에 들어서자 넓은 암반 위로 계류가 흘러내린다. 이곳에서 좌측은 로터리 산장과 법계사로 방향이다. 중봉골. 일명 마야 계곡이라 불리는 중봉골은 천왕봉과 중봉, 중봉과 써리봉에서 발원하는 계곡으로 비탐방 통제구역이다. 하지만 깊고 깊은 지리산의 감춰진 속살로 비경을 맛보고자 열망하는 지리산 마니아들이 간혹 파고들기도 하는 곳이다.
그제부터 기온이 급강하하였고, 밤새 내린 눈으로 계곡은 완전한 겨울이다. 계곡을 우측에 끼고 산죽 사이의 길을 걷기도 하고, 계곡을 건너기도 하며, 계곡을 직접 따라서 믿기지 않은 가을 속의 심설 산행은 이어진다. O드리지님은 지난여름의 산행에서 순두류 계곡과 중봉골을 연계하여 천왕봉을 오르는 데만 무려 9시간이 소요되었다고 했다. 숨바꼭질하는 기분으로 색바랜 비표를 찾아 O드리지님의 선등은 이어진다. 흰 눈이 이미 계곡을 덮었지만, 다행히 길은 미끄럽지 않다. 중봉골의 비경은 날이 밝아짐에 따라 서서히 벗겨지고 있다. 우측의 가파른 능선 위로 안개 속의 험준한 봉우리가 보이는데 아마도 써리봉 근처의 암릉일 것이다. 중봉골에 들어선 지 벌써 2시간이 지나간다. 적당한 장소를 찾아 바람을 피해 바위 밑에 버너를 설치하고 따뜻한 라면 국물과 함께 아침밥을 먹는다.
계곡을 계속 따라 오른다. 정면 방향에 폭포가 나타났고, 폭포의 우측으로 우회하여 올라선다. 이 폭포가 용추폭포인가. 그러면 마야 독녀 탕은 어디란 말인가. 계곡을 따라 계속해 나가자 골이 갈린다. 천왕봉과 중봉 쪽의 방향을 머릿속에 그리며 좌측의 골로 들어선다. 지도상에는 표기조차 안 되고 간단하지만, 실제로 계곡에 들어서면 작은 소계곡들이 실핏줄처럼 깔려있어 원하는 방향으로 오르기가 절대로 쉽지 않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랜 경험과 시행착오를 거치며 확고한 판단이 뒤따라야만 하는 것이다. 눈 속에 파묻힌 길을 찾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마침내 잡목으로 가로막은 마지막 갈림길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그곳에서 좌·우측의 눈이 덮인 너덜 주변을 유심히 살폈으나 더 이상의 비표와 길은 없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시간은 오전 11시. 산행을 시작한 지 5시간이 넘었는데 아직도 중봉 골짜기에서 헤매고 있으니 딱한 노릇이다.
점점 등로는 가팔라지고 험준해진다. 오르면서 자꾸 O드리지님께 현재 고도를 자주 묻는다. 고도가 이미 1700을 넘어섰지만, 아직도 남은 200의 고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시간이 더 소요될 것이다. 선두에 나서면서 틈틈이 뒤처진 일행들을 기다리며 바라보는 설화가 일품이다. 아래를 내려보니 써리봉에서 뻗은 능선이 장쾌하다. 철 이른 눈은 계속 내린다. 조밀한 잡목 군락을 양손으로 헤쳐가며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하고 몸으로 부딪치며 헤쳐나간다. 얼마나 더 올라야 주능 쪽에 붙을 수 있을까. 이 고난도의 길을 O정님은 잘 따라오는지 힐끔힐끔 돌아보았으나 홍샘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북쪽 좌우의 가파른 능선을 보며 이제 산정이 가까워졌다고 직감한다. 다행히 정면 방향으로 잿빛 하늘이 훤해 온다. 저 안부는 어디쯤일까. 일단은 그곳에 올라서야 우리가 걸어온 길을 헤아릴 수 있고, 위치 파악이 가능하다. 드디어 안부 위에 섰다. 예상외로 현 위치 파악이 불가하다. 하지만 곧 좌측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고. 우리가 오른 위치와 방향을 알 수 있었다.
예~ 아저씨~. 그리 내려가는 길은 어디요. 중산리 방향이란다. 헐~ 그러고 보니 천왕봉이 바로 정면에 우뚝 솟아 있지 않은가. 곧 홍샘이 도착하고 O드리리지님과 O정님도 올라온다. 오랜만에 오른 천왕봉에는 계절을 앞서간 하얀 눈으로 이미 많이 덮였다. 천왕봉에 오른 시간이 11시 30분이다. 장장 6시간의 오름길이다. 천왕봉에는 매서운 강풍이 불었고, 가스가 차올라 조망이 불가하다. 그 바람을 맞아보지 않은 사람은 지리산 추위의 무서움을 모른다. O드리지님과 간단히 사진 한 장을 남기고 하산을 한다. 정상에 오르자마자 하산이다. 시간이 벌써 정오를 지났으니 긴 하산 시간을 고려해야 한다.
천왕봉부터 시작되는 하산길은 그야말로 빙판이었다. 많은 사람이 오르고 내리며 정체 현상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뼛속을 여미는 강한 바람은 계속 불어오고 있다. 개선문에 닿는다. 몇 년 전에 벼락 맞아 주저앉은 돌기둥이 딱하다. 개선문을 지나서야 바람이 수그러든다. 경사가 가파른 곳에는 여지없이 산님들이 밀려서 기다려야 했고, 밧줄에 몸을 의지해야만 했다. 로터리대피소에 도착한다. 대피소의 좁은 취사장 안에는 먼저 온 산님들로 가득했기 때문에 들어서지 못하고 탁자에 음식을 내놓고 강한 바람을 맞아가며 요기를 한다. 로터리대피소는 작년에 이미 국립공원관리공단에 접수하여 그 권위적인 마크가 대피소 정문에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따라서 옛날의 정겹던 시절의 로터리대피소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산님들이 길이 미끄러워 칼바위 방향으로 하산하지 않고 순두류 방향으로 하산을 한다, 대피소의 직원들도 순두류로 권장을 한다. 다행히 그 길은 눈이 적었고 미끄럽지 않아 하산길이 원활하다. 순두류가 가까워질수록 가을의 서정적인 풍광은 고스란히 남아 그 아름다움을 느낀다. 계곡 가의 노랗고 빨간 단풍을 보며 설경 속의 가을을 만끽한다. 하산길 좌측의 황금능선 위로 반가운 햇살이 나왔으며, 파란 하늘의 흰 뭉게구름도 보인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묻혀 눈을 맞으며 걸었던 이른 새벽의 순두류 길은 마법을 부린 것처럼 아름다운 단풍 길로 전혀 다른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오르면서 눈밭에 구르며 젖었던 바지는 어느새 뽀송뽀송 말랐다. 오늘 날씨는 무척이나 추웠다.
법계교 다리에서 바라보니 천왕봉이 짙은 구름 속에 싸여있다. 홍샘, O드리지님, O정님과 인증샷을 오늘의 산행 추억 한 페이지로 남기기로 한다. O드리지님의 중산리 단골집 천O식당에 앉아 하산 주를 대접받았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먼저 따뜻한 어묵 국물로 추위를 달랬고, 동동주와 파전. 그리고 산나물에 오늘의 만남과 산행을 서로 자축하였다. 좋은 사람과 산행이어서 그랬을까. 중산리가 오늘따라 정감이 간 이유는 바로 O드리지님과의 만남에 그만큼 기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첫댓글 시간은 그대로 있고 사람들만 변하는건아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