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태백산맥, 토지, 임꺽정, 장길산, 객주는 대하소설이자 우리 시대의 고전이다. 그것은 어느 한 지역이나 특정 인물이 주인공이 아니라 마치 수백 리 거침없이 흘러가는 대하(큰 강)를 배경으로 각양각색의 사람들 모습이 담겨있다. 여는 소설처럼 주인공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주인공을 받쳐주는 엑스트라나 조연으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당당히 또 다른 주인공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주인공들은 지위와 계급과 학벌이 높은 양반 계층의 사람이 아니라 백정과 광대 보부상 노비이거나 소작농 등 소외당한 사람들로 이들의 공통점은 혁명으로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바라고 있다는 점이다. 천한 백성들이 주인공 역할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맛깔스러운 구수한 고유어나 사투리가 등장하고 애환과 한이 소설 전반에 깔려 있다. 특히 객주는 단순한 보부상들의 삶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등장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철저하게 얼개처럼 숙명의 끈으로 묶여있다는 사실이다. 젊고 잘생긴 주인공과 하룻밤 풋사랑 관계를 맺은 주모는 처음엔 색녀 같은 이미지였으나 그와의 인연을 맺기 위해 몸을 팔며 재산을 축적하는 여자 보부상이 된다. 그러나 더 많은 돈을 벌려다가 장사꾼의 꾐에 빠져 재산을 몽땅 털어버리고 감옥에 갇히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 그러다가 복수를 위해 스스로 무당이 되더니 나중에는 명성황후의 총애하는 신하가 됨으로써 주인공의 운명을 쥐락펴락하기도 한다. 주인공과 또 다른 여인은 어릴 적 헤어진 오누이 사이지만 서로를 모른 채 죽이려 하는 것 역시 숙명의 대표적 예이다. 또는 권력과 돈을 위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동료를 죽이거나 배신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비명횡사하나 주인공은 누구보다 보부상의 정과 의리를 내세우며 자기 이익을 바라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임하니 모두가 감동하여 따라온다는 전형적인 사필귀정의 교훈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글 전체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화두는 집념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쳐진 복수를 하기 위한 여인의 집념이나 스스로 죽음마저 미련 없이 버린 채 윗사람을 보호하려는 그녀의 희생은 읽는 이의 눈물을 적시게 한다. 이처럼 객주는 빈부귀천 할 것 없이 인간의 흥망성쇠를 고루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참으로 무게감 나가는 소설이었다. 젊은 시절 10권의 책을 읽은 후 기억이 가물거리다가 만화로 된 객주를 읽음으로써 한 번 더 추억에 빠져들기도 했다. 만화라지만 고전이 주는 감동은 이렇게 큰가 보다. 2011. 09. 04 내용을 고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