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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보고] 카라코룸 트랑고타워 &십튼스파이어
선각자들의 경이로운 등반에 감탄한다. 기다림· 추위· 매달림에 지쳐 십튼스파이어는 중도포기
우리의 등반계획은 이러했다. 트랑고타워을 등반한 후 고소적응을 마치면 십튼스파이어와 그레이트타워를 속공으로 오르려는 것이다. 암봉들이 같은 산군에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싶었다. 트랑고타워는 짐을 끌어올리며 등반하고, 십튼스파이어와 그레이트타워는 짐을 최소화해서 빠르게 오르는 방식을 택했다. 등반방식 때문에 상대적으로 십튼스파이어와 그레이트타워 루트들이 트랑고타워에 비해 쉬웠다.
고소에서 쉽다는 것이 정말 쉬운 것은 아니지만, 자유등반이든 인공등반이든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전하고 빠르게 오르는 것이다. 물론 고소적응이 문제이긴 하다. 하지만 고소의 어려움이 등반의 변수일 순 없다. 가장 큰 변수는 날씨이고, 날씨 때문에 변수가 생기면 비록 모두 오르지 못해도 갈 때까지 가보자는 것이었다.
파란 하늘과 눈 덮인 침봉들 배경으로 트랑고 등반
▲ 트랑고타워 상단벽 마지막 암벽등반 피치를 등반중인 대원들. 크랙들이 여러 갈래여서 길 찾기가 어려웠다.
베이스캠프에 도착해 트랑고타워 등반 이후 11일 동안 해놓은 거라곤 하단 벽 2피치에 장비와 식량을 걸어놓은 것뿐이다. 베이스캠프와 ABC를 오르내린 횟수는 세 번이지만, 두 번은 예측할 수 없는 날씨 때문에 쫓겨 내려왔다. 그리 춥지 않은 기온 덕분에 적당히 습기를 먹은 눈은 쉽게 녹아내리며 등반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베이스캠프는 언제나 푸근한 휴식처이긴 하지만 날씨가 좋아지기만을 기다리는 지루하고 재미없는 곳이기도 하다.
그동안 베이스캠프에는 각국 원정대들이 떠나고 들어왔다. 미국, 스페인 팀이 떠났고 스위스, 폴란드, 독일팀은 트랑고타워와 그레이트타워를 등반하려고 들어왔다. 우리밖에 없어 한적하던 트랑고타워가 혼잡해질 듯하다. 스위스팀은 우리와 등반루트가 같아 서로 눈치를 봐야했다. 우리가 먼저 등반을 시작하였으니 그리 크게 혼잡할 것 같진 않았지만, 포터들을 이용해 하단 벽까지 짐을 올리는 그들의 등반 포진으로 보아 며칠 뒤면 우리와 거의 같은 위치까지 오를 듯했다. 게다가 그들은 자국에서 기상정보까지 받고 있었다. 베이스캠프로 내려온 이틀 뒤 스위스팀이 ABC로 올라갔다. 그 날 오후에 또 비가 내렸지만 저녁이 되면서 서서히 좋아졌다. 스위스팀은 날씨 정보를 알고 미리 출발한 듯하지만, 우리는 내일 새벽하늘을 보고 날씨가 좋다면 숄더까지 올라가기로 결정했다.
▲ 상단벽 제2피치를 등반중인 임동순. 멀리 울리비아호타워 보인다.
8월9일, 베이스캠프의 새벽 하늘이 맑다. 날씨에 또 속더라도 세 번째 시도를 하기로 했다. 등반 떠나는 날 아침식사 때는 쿡인 임란에게 미역국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아침부터 힘차게 움직여야 하니 부드러운 음식이 적당하다 싶어서였다. 그의 한국음식 솜씨는 좋아 미역국도 맛을 잘 냈다. 날씨가 나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뜻에서 서로 “인샬라”를 외치며 그는 우리를 배웅했고, 우리는 그에게 나흘 후에 보자고 했다.
이제 고소적응이 어느 정도 됐는지 대원들 모두 걸음이 빨라졌다. ABC까지도 3시간이 채 걸리지 않고, ABC에서 하단 벽까지도 1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스위스팀은 하단 벽에 붙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벽 밑에 두었던 안전벨트, 헬멧 등 장비들을 보니 몹시도 반갑다. 마음이 더욱 가벼워지고 빨리 초크가루를 날리며 암벽을 오르고 싶을 뿐이다.
▲ [좌]트랑고타워 베이스캠프. 의자와 돌에 앉아 있는 조경래와 임동순앞에서 조규택이 깡 마른 몸매를 과시하고 있다. [우]트랑고타워 등정 후 베이스캠프로 내려오던 중. 뒤로 트랑고타워가 보인다.
고정시켜 놓은 로프를 이용해 제1피치에 도착하니 어제 올라온 스위스팀이 제2피치를 등반하고 있다. 스위스팀은 고소적응이 안돼서인지 등반속도가 많이 늦었다. 걸어놓은 장비를 정리하는 동안 스위스팀은 제3피치를 등반해 나간다. 그들은 제3피치까지만 오르고 베이스캠프로 돌아간다고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고소적응을 위해 좋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새로운 길은 간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날씨가 좋으니 바위하기도 즐거웠다. 자유등반이라 속도가 빠르다. 점점 상단 벽이 크게 눈에 들어온다. 숄더에 거의 올라선 듯했다. 하단 벽 마지막 피치가 조금 까다로운 슬랩이라서 그만 미끄러지고 말았다. 그래도 좋았다. 트랑고 암벽을 오른다는 게 그저 좋기만 했다.
▲ 트랑고타워 상단벽 스노레지 비박. 대원들이 따뜻한 아침 햇살을 맞고 있다. 좌측으로 발토로빙하가,
가운데 울리비아호타워가 보인다.
오후 6시쯤 숄더에 올라섰다. 캠프지는 아늑하고 전망도 좋다. 바람도 구름도 한 점 없다. 세상에 이처럼 좋은 전망대는 있을까. 우리만 이 벽에 달랑 붙어 있어 고요함이 더욱 좋았다. 갑자기 쏟아지는 고약한 눈을 경험한 우리는 텐트 한 동을 숄더까지 올리게 했다. 규택이는 밤하늘 별빛이 좋다며 텐트를 마다하고 밖에서 잔다. 날씨가 나빠진다 해도 문제될 게 없다. 상단 벽이 훤히 올려다보이는 숄더에 텐트를 쳤고, 우리가 보유한 식량과 연료만으로 닷새는 버틸 수 있겠다 싶다.
다음날도 날씨는 맑았다. 크랙이 잘 발달된 이터널 플레임을 따라 상단 벽을 오른다. 규택이가 선등을 서고 경래와 동순이 뒤를 따른다. 60m 로프 4동이 깔릴 때까지 숄더에 남아 그들의 등반모습을 비디오와 스틸 카메라에 담는다. 거대한 벽을 오르는 그들의 작은 모습이 너무 멋있다.
▲ 트랑고타워 정상. 무즈타그타워(왼쪽)와 브로드피크(가운데), 가셔브룸4봉이 보인다(왼쪽부터 조경래, 조규택, 임동순).
해가 벽을 정면으로 비치니 군데군데 바위틈새에 있던 눈들이 녹아 흐른다. 신발과 장갑이 젖지만 태양열 때문에 참을 만하다. 두 번째 비박지인 스노레지는 손에 잡힐 듯한데 가도 가도 나타나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만난 얼음 침니는 당황하게 했고, 눈 덮인 스노레지는 더더욱 황당했다. 1시간 가량 눈과 얼음을 깎아내 4명이 겨우 누울 잠자리를 만드니 오늘 등반에 대한 충만감이 밀려온다. 초롱초롱한 별빛을 바라보며 내일 등반을 위해 잠을 재촉해보지만 옹색한 자리와 추위가 잠들기 어렵게 한다.
햇살이 그리운 아침, 등반 3일째 날이다. 다행히 오늘도 날씨가 맑다. 취사구, 식량, 침구류, 홀통을 남겨두고 장비만 가지고 오른다. 어제와 같이 오전엔 규택이가 선등이다. 그 뒤를 동순이가 따른다. 파란 하늘과 눈 덮인 침봉들을 배경으로 깎아지른 벽을 오르는 그들의 모습은 참으로 멋지다. 비디오와 스틸 카메라로 그들의 등반 모습과 주위 경관을 담는다.
▲ 트랑고타워 상단벽, 스노레지에서 시작하는 첫번째 피치. 조규택이 선등한 다음 임동순이 주마링을 하고 있다.
크랙이 잘 발달되어 있는 이 루트는 독일의 쿠르트 알버트가 만들었으며, 그의 동료이자 전설적인 암벽등반가 볼프강 귈리히가 자유등반으로 올랐다. 그들은 그 한 해 이 루트 오른쪽에 있는 슬로베니아 루트를 오르다가 등반선을 찾게 되었다. 난이도 5.9급에서 5.13급에 해당하는 크랙의 멋진 등반 선을 찾아 루트를 만들고, 이런 숨막히는 고도에서 자유등반을 해낸 그들이 경이로울 뿐이다. 물론 우리는 5.11급조차 자유등반으로 해내기가 어려웠다. 비록 암릉화와 장갑을 끼고 등반했어도.
크랙이 여러 갈래로 갈라진 지점에서 방향을 잘못 잡았다면 곤혹스러울 뻔했다. 그곳을 넘어서자 경사가 많이 눕고, 흔들거리는 돌과 눈이 발에 많이 밟힌다. 정상이 가까워졌나 보다. 이제 빙벽화로 갈아 신고 아이젠을 착용해야 할 상황이다. 다행히 넓은 테라스가 있어 장비를 재정비해 로프 한 동, 약간의 캠과 카라비나만 챙기고 나머지 장비는 놔두었다.
카나단 루트 대신 자유등반 가능한 선 택해
▲ 저녁 햇살을 받고 있는 트랑고타워(왼쪽)와 그레이트타워.
몸이 가벼워지자 호흡이 한결 수월해진다. 눈과 얼음이 덮인 좁은 바위통로를 이리저리 지나 오르니 정상의 안부가 보인다. 오른쪽 암봉과 왼쪽 암봉의 높이가 비슷하다. 오른쪽 암봉으로 올라가니 눈 덮인 정상 암각에 슬링이 몇 가닥 걸려 있다. 어느덧 해는 지지만 강렬한 빛은 사진 찍기에 너무 좋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바람결조차 느낄 수 없다. 너무나 황홀한 정상이다. 비록 어둠 속에 어려울 하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도 이 정상이 너무나 좋다. 8월11일이다.
스노레지에서 다시 비박한 후 다음날 베이스캠프로 내려왔다. 임란과 키친보이 알리가 마중나와 베이스캠프 주변에 있는 꽃으로 화환을 만들어 대원 모두에게 걸어준다. 어제 정상에 오른 우리를 이곳에서 봤다고 한다. 설마 했더니 시간까지 정확히 말했다. 우리에 대한 그의 관심에 다시 한 번 놀랐다.
트랑고타워 등반 일정이 길어져 십튼스파이어와 그레이트타워 등반 일정이 그만큼 줄어버렸다. 게다가 트랑고타워 등반 이후 날씨가 나빠져 5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베이스캠프에는 낮에는 비, 밤에는 눈이 내렸다. 휴식시간이 필요했지만 그래도 5일간은 너무 길었다.
18일, 날씨가 다시 좋아진다. 밀린 빨래도 많지만 십튼스파이어 접근로를 파악하기 위해 베이스캠프와 벽 밑까지 갔다 오기로 했다. 트랑고타워 베이스캠프에서 더 안쪽으로 우측 사면을 가로질러 오르다 빙하로 내려선 후 다시 우측 사면을 올라서면 베이스캠프가 있는데 2시간 남짓 걸린다.
아름다운 초원을 이룬 베이스캠프에는 미국팀이 와 있었다. 십튼스파이어 접근로를 물어보니 그들도 잘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캐츠스파이어를 등반했다고 한다. 캐츠스파이어는 빙하 건너편에 가깝게 있는 고양이 얼굴처럼 생긴 암봉이다. 단지 그들이 그 동안 베이스캠프에서 보고들은 정보를 알려준다. 우리가 오르려는 십튼스파이어의 카나단 버트레스 루트는 올해 몇 팀이 시도했지만 벽과 아이스폴에 크레바스가 너무 많고 커서 접근조차 못했다 한다. 트랑고타워 등반 전에 다른 외국팀에게도 들은 얘기라 믿을 수 있었지만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계획을 수정할 수 없었다.
▲ 십튼스파이어에서 본 트랑고 산군, 가운데 뾰쪽한 암봉이 트랑고타워, 우측 사면에 눈 덮인 봉이 그레이트타워다. 오른쪽 가까이에 뾰쪽한 봉우리 2개가 캐츠스파이어다.
미국팀과 인사를 나누고 벽으로 향했다. 여기저기 난 발자국과 십튼스파이어 방향을 맞추어 드넓은 빙하지대를 이리저리 헤집고 앞으로 나갔다. 십튼스파이어 벽까지는 5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빙탑과 크레바스 사이를 이리저리 헤맸더니 시간이 많이 걸렸다. 가파른 사면을 조금 더 오르니 화강암 덩어리인 십튼스파이어 벽에 닿았다. 단단한 화강암벽에 촉감이 너무 좋다. 마치 요세미티 엘캐피탄 밑에 온 듯했다.
▲ 십튼스파이어 등반 중 만난 넓은 테라스, 이곳에서부터 세 피치를 더 올랐으며, 하루를 더 비박하려고 했던 곳.
하지만 우리가 계획한 카나단 버트레스는 좌측으로 많이 돌아가야 했다. 그것도 벽 밑으로는 불가능했고, 아이스폴 지대로 내려선 후 돌아가야만 가능해 보였다. 그래도 텐트를 한 동 칠 수 있는 장소도 발견했으니 오늘 정찰은 성공한 셈이다. 베이스캠프로 돌아오는 중 미국팀에게 카나단 버트레스 접근이 가능할 것 같다고 하니 그는 의아스런 눈으로 쳐다본다.
20일, 4명이 먹을 닷새치 식량과 장비, 그리고 텐트 2동을 챙겨 십튼스파이어 베이스캠프로 올라갔다. 트레킹 중 발목 부상을 입은 동순은 십튼스파이어 베이스캠프에 남기로 했다. 그는 아픈 발로 벽 밑까지 함께 짐을 나르겠다고 자원했다.
21일, 날씨가 흐리더니 벽 밑에 도착할 때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트랑고 베이스캠프에서 닷새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종일 내리는 눈비를 경험하다보니 텐트는 필수장비로 인식되었다. 비가 그치면 아이스폴 지대를 정찰하려 했으나 오후 늦게까지 내렸고, 동순이는 그 비를 맞으며 십튼스파이어 베이스캠프로 내려갔다.
▲ 베이스캠프에서 바라본 십튼스파이어, 왼쪽 스카이라인이 우리가 오르려했던 곳이며, 실제 등반한 곳은 오른쪽 벽이었다. 작은 숄더 밑까지 등반을 했다.
다음날, 비의 양이 줄었지만 오전까지 계속 내렸다. 등반일정과 식량이 한정되어 있으니 빗속에 아이스폴 정찰이라도 해야 했다. 아이스폴 지대는 깊이 들어갈수록 크레바스와 빙탑의 크기가 더했다. 큰 아이스폴을 돌아가거나 넘어가기란 그 자체가 등반이었고 위험한 구간이 대부분이었다. 아쉬운 건 우리에겐 단 한 개의 아이스스크류도 없다는 점이다. 카나단 버트레스쪽으로 접근하기 위해 아이스폴을 지나는 건 장비는 물론 시간상 무리라고 판단되었다.
텐트로 돌아와 접근이 용이한 곳에서 등반할 루트를 찾아보았지만 대암벽 등반장비가 필요한 루트들뿐이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장비로 이 벽을 올라 정상에 간다는 건 무리였다. 그렇다고 그냥 돌아설 수도 없었다. 새로운 암벽을 올라본다는 일이 얼마나 큰 기쁨이며 즐거운 일인가. 올라갈 수 있을 만큼 등반하고 싶었다. 남은 오후 동안 무료한 시간을 등반으로 메우는 것이 좋을 듯했다.
▲ 십튼스파이어에서 조규택. 그 뒤로 고양이 얼굴 같은 캐츠스파이어가 보인다.
자유등반이 그나마 가능한 곳을 찾아 무작정 올랐다. 오랜만에 초크를 손에 바르고 바위를 잡으니 촉감이 너무 좋았다. 크랙도 잘 발달되어 있고 깨끗했다. 내일 이 루트를 따라 올라갈 수 있을 때까지 가보기로 했다.
다음날, 날씨는 맑았고 어제 고정시켜 놓은 로프를 이용하며 등반을 이어갔다. 루트이름은 알 수 없었지만 올라갈수록 크랙이 잘 발달되어 있고, 고정볼트 또한 잘 박혀 있다. 그런데 매 피치 등반거리가 거의 60m를 유지하니 확보물이 부족하였고, 피치마다 반침니가 있어 체력소모가 컸다. 그래도 즐거웠다. 12피치 정도 올랐을 때 하루해가 저물어 갔다. 마침 우리 세 명이 각자 비집고 잘 수 있는 비박지가 있다. 밤하늘의 별도 초롱초롱하니 내일은 날씨도 좋아질 것 같고, 어쩌면 우측 숄더까지 올라설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기다림, 추위, 매달림에 지쳐버려
다음날에도 60m 등반거리를 유지하는 피치들이 계속 이어졌고, 반침니는 더욱 길었다. 그로 인해 시간과 체력소모가 많고, 체력과 부족한 확보물로 인해 등반속도는 점점 늦어졌다. 그래도 벽의 각도가 많이 눕고 자유등반으로 쉽게 오를 수 있는 구간이 많아지니 숄더가 가까워진 듯했다. 넓은 테라스를 만났고, 그곳엔 물을 만들 수 있는 잔설도 조금 쌓여 있다. 이곳에서 하루를 더 비박하고 가야할 장소인 듯했다.
일단 배낭을 벗어놓고 정찰도 할 겸 좀 더 오르다가 다시 이곳으로 내려와 비박하기로 했다. 짧게 3피치를 더 오르니 오르기 좋은 크랙이 눈에 보였고, 크랙 중간에 확보지점이 아닌데도 볼트가 1개가 박혀 있다. 하지만 그 볼트를 조금 더 지난 곳에서부터는 등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게다가 낙석 위험이 있는 바위 덧장들로 얼기설기한 바위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아래쪽 넓은 테라스에서 더 왼쪽으로 돌아 올라갔어야 했는가 보다.
어느덧 또 하루해가 저물어 갔다. 이제 더 이상 등반은 무리였다. 확실한 확보지점을 찾아 다운클라이밍을 한 후 앵글하켄과 너트를 설치하여 하강했다. 규택이와 경래는 기다림에 지치고, 추위에 지치고, 매달림에 지쳐있는 듯했다. 빙벽화를 신은 그들은 허공에 매달려 허둥대기를 여러 차례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젠 그만 내려가야 할 것 같았다. 테라스에서 하루 더 비박하고, 내일 다시 계획을 잡아보려 했지만 때마침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적재적소에 적당한 타이밍이었을까? 그 빗방울은 우리의 마음을 저 밑 텐트에 미리 가 있게 했고, 어둠 속에 기나긴 하강으로 이어지게 만들었으며, 그로 인해 지친 몸은 그레이트타워 등반 열정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렸다.
/ 글 정승권 원정대장·정승권등산학교 교장(월간 산에서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