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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수카페]곧은터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수선재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 따뜻함이 새삼 그리워지는 겨울이면 이따금 아버지 생각이 난다. 어린 시절, 겨울에는 온 식구가 한 방에서 살았다. 밤에 잠들 무렵에는 방바닥이 따끈따끈했지만 새벽이면 방이 식어 몸을 웅크리곤 했다. 추위에 잠이 깰 듯 말 듯 하는데, 방바닥이 다시 따스해진다. 아버지가 일어나 군불을 지피시는 거다. 그러면 다시 잠 속으로 푹 빠져들곤 했다. 자라면서 아버지를 어려워했지만 이때만은 식구들 몸을 데워주시던 따뜻한 아버지로 기억에 남아 있다.
아버지는 식구들을 위해 추위를 참아가며 군불을 때셨다. 그런데 지금 나는 아버지와 여러 모로 다르다. 나는 해 떨어지기 전에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그러면 아침에 깰 때까지 방이 따끈따끈하다. 유리창에 성에가 하얗게 끼어 있으면 곧장 일어날 생각이 없다. 방바닥에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면서 생각에 젖기도 하고, 식구들을 은근슬쩍 깨우기도 한다. 구들의 온기는 낮까지 한동안 이어진다.
머리는 차게, 발은 덥게
사실 우리나라 난방 문화에서 구들방이 사라진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서민 난방은 대부분 구들이었다. 하지만 나무 대신 연탄을 때면서 가스 중독이 문제가 되는 데다가 사용하기 편리한 보일러가 들어오면서 구들 난방이 사라졌다.
그런데 요즘 들어 구들방이 건강에 좋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다시금 상품화되고 있다. 한의학에서는 두한족열(頭寒足熱)이라고 ‘머리는 차게, 발은 덥게 하라’는 말이 있다. 이는 구들방에 딱 맞는 말이다. 원적외선이 나온다는 이야기는 전문가가 아니어서 잘 모르겠다. 다만 날이 추워지면 몸이 따끈한 구들을 좋아하는 것은 분명하다.
산골에는 겨울이 길다. 10월초면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서 아궁이에 불을 지펴야 한다. 그리고 이듬해 늦봄까지 불을 때야 하니 여름 한 철 빼고는 내내 구들 신세를 지는 셈이다. 불이 잘 들고, 나무를 적게 때도 따뜻하고 열기가 오래 간다면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한 일이다.
살림집을 지으면서 아쉬운 게 구들이었다. 구들장이 할아버지를 모시고 안방 구들을 놓는 날, 나는 아랫마을에 초상이 있어 상여를 메러 갔다. 그 바람에 구들을 함께 놓지 못했다.
남이 놓아준 구들방에서 살아보니 불만거리가 생겼다. 불을 지피기 시작할 때 불이 아궁이 속으로 빨려들지 않고 오히려 밖으로 내쳐진다. 궂은 날에는 매운 연기 탓에 눈물을 흘렸다. 연기가 밖으로 나오니 아궁이 둘레는 물론 처마 서까래까지 온통 거뭇거뭇하다. 게다가 방바닥은 두꺼워 불을 때고 두세 시간이 지나야 따뜻해진다.
구들을 뜯어내고 새로 놓고 싶어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지금보다 더 잘되리라는 보장도 없을뿐더러 제자리조차 못 잡아주면 안 하느니만 못할 수 있다. 그러니 구들 놓기는 내게 큰 숙제로 남아 있었다. 이웃 누구네 구들방은 장작 몇 개비로도 방이 따뜻하다느니, 불 때고 30분이면 잠을 잘 수 있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은근히 부러웠다.
구들에 대해서는 전설적인 이야기도 많다. 칠불사라는 절에는 한 번 불을 지피면 온기가 두어 달이나 가는 아자방 구들이 있었다 한다. 그리고 요즘 구들장이는 옛날과 달리 현대 기술을 접목한다. 아랫목에 온수 통을 설치해 다른 방까지 난방을 하고, 실내에 아궁이를 둬 벽난로를 겸하기도 한다.
그런 정보를 접할 때마다 한달음에 달려가 배우고 싶었지만 인연이 닿지 않았다. 구들학교에 등록해서 배우려고 했지만 이것 또한 시간이 맞지 않았다. 구들에 대한 나의 관심은 오랜 세월 줄곧 ‘짝사랑’에 머물렀다.
불을 다루면 자연을 다룬다?
그러다가 구들과 만나는 계기가 왔다. 올봄부터 짓던 아래채(‘신동아’ 9월호 518쪽 참조)에 자그마한 구들방을 두기로 했는데, 내 손으로 놓고 싶었다. 구들을 놓자면 기술 이전에 근본 원리를 먼저 알아야 했다. 그건 바로 불이다. 구들은 불을 다루는 것이다.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의 뜻을 거역하고 인간에게 전해주었다는 불. 불은 자연의 일부다. 불을 다룬다는 건 곧 ‘자연을 다룬다’는 뜻이다. 이건 어마어마한 일이다. 불을 아는 만큼 자연이 주는 혜택을 누릴 것이다. 잘 모르고 쓰다 보면 고생은 물론 돌이킬 수 없는 화(禍)를 불러올 수도 있는 게 불이다.
그러니 불에 대해 상식으로 알던 것보다 광범위한 공부가 필요했다. 동양 사상인 음양이론은 물론 물리학도 알아야 했다. 불은 위로 올라가고, 찬 공기는 아래로 내려온다. 아주 간단한 상식이지만 이를 구들에 적용하자면 만만한 게 아니다. 우선, 위로만 가려는 불을 옆으로 골고루 가게 해야 한다. 불을 모르고 사람 뜻대로 하면 헛고생이 될 수밖에 없다. 또 땅에서 올라오는 찬 기운과 집 밖에서 굴뚝을 통해 들어오는 찬 공기를 막아주어야 한다. 열의 전도, 복사, 대류는 물리학의 기본. 학창 시절에 배운 벤투리 효과(유체는 넓은 곳에서 좁은 곳을 지나면서 이동 속도가 빨라진다는 이론)를 다시 공부했다.
구들에 관한 책을 찾아보니 겨우 두어 권뿐인데, 그나마 전문 학술서적이라 원론적인 걸 언급하는 수준이었다. 그밖에 흙집 건축에서 다루는 구들은 집 전체 공정에서 맛보기로 언급하는 정도다. 그것만 가지고는 손수 구들을 놓기에 설명이 부족했다.
자료는 아무래도 최근 것이 쉽고 생생하다. 사진이 수록되거나 그림이 그려져 있어 백 마디 말보다 눈으로 보는 것에서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참고한 잡지가 전국귀농운동본부에서 발간하는 계간지 ‘귀농통문’에 실린 ‘전통 구들 놓기’다. 그 다음은 인터넷을 뒤져 필요한 부분을 참고했다.
자료보다 더 생생하고 귀중한 건 구들을 놓아본 사람들의 경험담이다. 다행히 우리 이웃 중 구들을 잘 아는 분이 몇 있다. 본인들이 손수 구들을 놓았기에 그분들의 말은 실제적인 도움이 됐다. 구들을 전문으로 놓는 사람도 알게 됐다. ‘능구’라는 별명을 가진 30대 중반의 젊은이인데, 그저 한 해 서너 집만 구들을 놓아주고, 나머지는 자기 시간을 갖고 사는 아주 재미있는 총각이다. 여름에 우리 동네에서 태극권을 같이 배우면서 만났다. 그를 우리 아래채 현장으로 모셔다가 구들에 대해 자문했다. 좋은 이웃 덕에 구들을 놓기도 전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깊이 알수록 빠져드는 구들의 매력
구들은 그 원리와 구조가 단순하면서도 신비로운 부분이 많다. 구들을 흔히 ‘축열식 바닥난방’이자 ‘지속난방’이라고 한다. 아궁이에 불을 때면 열이 구들돌에 저장됐다가 오랜 시간 방바닥을 데워주는 원리다.
구들의 구조는 알면 알수록 흥미롭다. 말부터 그렇다.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이맛돌, 부넘기, 고래, 개자리, 내굴길 들이다. 처음에는 이 말들이 낯설었다. 그런데 구들을 놓아보니 아주 재미있고 살갑게 느껴진다. 구들이란 말은 불로 돌을 굽는다는 ‘구운 돌’에서 왔단다. 이맛돌은 구들돌 가운데 가장 큰 돌이면서 가장 먼저 놓는 돌이다. 불이 가장 먼저 닿는 돌이니 사람 이마에 해당한다고 하여 이맛돌이라 하나 보다. 듣기에도 좋고 정감이 넘친다.
부넘기는 아궁이와 고래 사이에 있는 작은 언덕으로 불이 고래로 잘 빨려들게 하는 장치다. 부넘기는 아궁이보다 구멍이 좁아 사람 몸으로 치면 목과 같은 기능을 한다고 해서 불목이라고도 한다. 고랑 또는 골처럼 생긴 고래는 방바닥 아래로 열기와 연기가 지나가는 길이다.
구들 구조에서 가장 신비로운 것은 아마 개자리일 것이다. 웅덩이처럼 깊이 팬 개자리는 다양한 역할을 한다. 아궁이 불이 고래 속으로 잘 들게 하고, 고래 속의 더운 열기는 오래 머물게 하며, 굴뚝 밖에서 들어오는 찬 공기는 와류(渦流)시켜 구들돌이 빨리 식는 걸 막아준다.
살림집 구들방에 몇 해 살면서 아주 신기한 현상을 발견했다. 한번은 방바닥 장판을 새로 한다고 서랍장이랑 책장을 들어냈다. 그때 뜻밖의 모습을 보았다. 서랍장을 두었던 한쪽 모서리는 곰팡이가 거뭇거뭇 피어 보기에도 흉하고 냄새도 아주 고약했다. 그런데 책장 아래는 거짓말처럼 말짱했다.
원인은 개자리였다. 안방 구들은 연기가 빠져나가는 굴뚝 쪽에만 개자리를 두었던 것이다. 개자리가 없는 방 모서리는 온기도 약한 데다가 방바닥 바로 위에 서랍장이 놓여 있었으니 공기가 제대로 순환되지 않아 썩어가고 있던 것이다. 이때의 경험과 이웃의 도움말을 참고로 아래채 구들방은 아예 사방을 돌아가며 ‘ㅁ’자로 개자리를 두었다.
구들을 놓는 사람마다 이론과 경험이 달랐다. 지역에 따라서도 많은 차이가 있다. 강원도 산간 지역의 구들과 제주도 구들이 다르다. 같은 지역이라도 집이 앉은 위치와 방 크기에 따라서 다 다르다. 구들돌은 자연 그대로이기에 모양이 제각각이다. 그러니 한 사람이 구들을 여러 번 놓는다 하더라도 똑같은 구들은 있을 수 없다. 어찌 보면 ‘자기만의 단 하나의 구들’이 정답일지도 모른다. 여러 사람이 해준 도움말을 내 나름대로 소화해야 했다.
그 과정을 여기서 다 설명하기에는 무리다. 대신 구들을 놓으면서 느낀 점과 고민과 설렘을 이야기할까 한다. 공부를 한다고 했지만 막상 손수 구들을 놓기가 쉽지 않았다. 구들 기초부터 고민이다. 우선 아궁이와 내굴길(연기가 굴뚝 쪽으로 나아가는 길)을 어디쯤에 얼마 크기로 해야 하나. 그림에 대략적인 구조만 나와 있지 가로, 세로, 높이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
내 몸에 남은 하나의 업(業)
보통 전통 구들의 경우, 아궁이 바닥이 마당보다 낮다. 그렇다 보니 장마 때면 아궁이 바닥에 물이 고이기도 하고, 평소에도 눅눅하다. 불을 사랑하자면 불이 싫어하는 걸 막아주어야 한다. 불은 찬 것과 습한 걸 아주 싫어한다. 고민하다가 아궁이 바닥을 마당보다 10cm 정도 높게 했다. 대신 아궁이 바닥에 동판을 깔아 단열처리를 단단히 했다.
그 다음은 내굴길 구멍 내기. 이 높이도 사람마다 제각기 다르다. 크게 두 종류다. 먼저 고래 바닥보다 아래에 둔다는 주장. 그럼 고래 열기가 오래 저장되는 효과는 있겠다. 하지만 궂은 날은 연기가 굴뚝으로 잘 안 나가고, 아궁이 밖으로 내쳐지기 쉽다. 또 하나는 내굴길을 고래 바닥보다 높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흔히 말하는 ‘굴뚝효과’로 당연히 불은 잘 든다. 하지만 이 경우는 열 손실이 많고 땔감이 헤플 것 같다. 고민하다가 두 가지를 절충했다. 그러니까 내굴길 윗부분을 고래 바닥보다 조금 높게 하고 구멍을 크게 했다. 나중에 벽을 깨기는 어려워도 큰 구멍을 메우기는 쉽기 때문이다.
이제 함실(아랫목 바로 아래 불이 활활 타오르는 곳)과 부넘기를 만들고 구들돌을 덮어가야 한다. 여기서도 오래 뜸을 들였다. 그림이 머릿속에서 뱅뱅 돌기만 할 뿐 손발이 나가지 못했다. 불 때기 좋으면서도 열효율을 극대화하자면 함실을 얼마 크기로 해야 하나. 높이는 얼마까지 올라가야 방바닥 마감이 순조로울까.
부넘기 역시 고민이다. 열기가 방으로 골고루 퍼지게 하자면 불구멍을 어디에다가 틔우고 어디를 막아야 하나. 또 그 구멍이 목처럼 좁아야 한다는 데 그 기준이 뭘까. 여기서 흔히 벤투리 효과를 이야기한다. 유체는 넓은 곳에서 좁은 곳을 지나면서 이동 속도가 빨라진다는 이론이다. 이론은 구체적이지 않으면 현장에 적용하는 데 소용없다. 방 크기와 아궁이 그리고 부넘기와 비례 관계를 학문적으로 정리해둔 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부분에서는 물리학자의 연구가 있으면 좋겠다. 혼자 주먹구구식으로 하자니 자나깨나 구들 생각이다.
그러다 몸에 뾰루지가 났다. 손등과 팔뚝 그리고 정강이 둘레에 좁쌀만한 종기가 돋았다. 머리에 가득 찬 생각을 손발로 풀어내지 않으면 몸 안에 독소가 되는 모양이다. 그만큼 구들 생각만 했다. 생각을 덜 하자고 해도 이게 내 마음대로 잘 안 된다. 자꾸 구들 생각이 난다. 연인을 지극히 짝사랑하는 꼴이라고 할까.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구들을 놓아본 경험이 없기에 몸이 구들에 반응하는 현상일 수 있다. 어쩌면 지금 겪고 있는 피부 발진은 내 몸에 남아 있는 하나의 ‘업(業)’이 아닐까 싶다. 구들 놓는 게 어느 정도 몸에 밴다면 구들 생각이 이토록 많이 나진 않을 것이다. 이 기회에 내 몸에 남아 있는 업 하나를 구들불과 함께 불사르고 싶었다. 방을 이리 보고 저리 보다가 눈을 감고 불길을 떠올리면서 명상을 했다. 내가 불이라면 어디로 먼저 갈 것인가. 어디가 빈 구석인가.
‘고단한 몸과 마음을 풀어주겠지?’
구들 관련 사진을 보니 대충 20cm 간격으로 구멍이 나 있다. 이를 본받되 나만의 방식을 취했다. 아궁이가 방 중앙에서 마루방 쪽으로 쏠려 있으니까 불이 넉넉히 갔으면 하는 곳은 넓게, 좀 적게 가는 게 좋겠다 싶은 부분은 좁게 했다. 그리고 부넘기 한가운데는 오히려 막았다. 안 그러면 불길이 방 가운데로 곧장 빠져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가운데를 막아 줌으로써 불길이 부넘기를 넘을 때 옆으로 골고루 퍼지지 않을까.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면서 뜸을 들이다 보니 한두 시간이면 될 일을 하루 종일 했다.
그 다음 이맛돌을 올렸다. 이맛돌은 워낙 크고 무겁기에 돌 한쪽은 땅바닥에 닿게 하고, 위를 굴리듯 구들방으로 끌고 왔다. 온힘으로 얹었다. 헉! 돌이 너무 두껍다. 구들장 높이가 방바닥 초벌 바르기를 할 높이만큼 올라와 있다. 이맛돌을 자로 재어보니 두꺼운 곳은 12cm다. 그대로 했다가는 방바닥이 얇아져 장판도 타고 사람도 타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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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난방 ..... 집짓기에 있어서 어쩌면.... 가장큰 고민이 아닐까 합니다 (방수가 서운 하려나요?)
저한테 가장 적절한 글입니다
촌목님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