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부분에 우리 집안과 관련되는 내용이 있어서 여기에 올립니다.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갈라지는 경상북도 북부, 안동 영주 예천 봉화지역을 ‘양백지간’ 또는 ‘영중지방’이라고도 부른다. 영남지방이지만 태백산맥과 소백산맥 즉 양백산맥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지역이란 뜻이리라. 안동을 중심으로 한 영중지방은 전통 유교 문화가 가장 잘 보존되어 있고 유교적 가치를 고집스럽게 지켜나가는 독특한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 종가와 문중을 중심으로 씨족 단위로 결속하면서도 통혼과 사우관계를 통하여 다른 문중과 화합하는 등 숭조돈목의 정신과 봉제사 접빈객의 삶을 숭상하는 가장 조선다운 고장이 바로 이 영중지방이라고 할 수 있다.
영중지방에 집성 세거하는 씨족 집단 중 향촌단위로는 가장 많은 집성촌을 가진 거족이 의성 김씨라고 할 수 있다. 임하 천전, 임동지례, 임하 신덕, 서후 검제, 봉화 법전, 소천, 예천 구계에 세거하는 김진의 후예 청계공파를 비롯하여, 의성 사촌, 군위 노행, 청송 진보, 풍천 광덕, 일직 구미, 길안 송사, 예안 태곡, 녹전 둔번, 봉화 황전, 봉화 해저, 영주 지천, 예천 신당 등 영중지방 곳곳에 문호를 차리고 세거하고 있다.
의성 김씨는 고려 태조 왕건의 외손자이자 신라 경순왕의 제4子로 義城君에 봉해진 金錫을 시조로, 9세 龍庇․ 龍弼 ․龍珠 대에 3파로 갈린다. 龍庇는 벼슬이 고려 금자광록대부 태자첨사이며 의성군에 봉해졌다. 의성군민에게 크게 공덕이 있어 군민들이 鎭民祠를 세워 제향하였는데 후손들이 의성 오토산 묘하에 오토제와 진민사를 이건하고 춘추로 제향하는 의성김씨의 中祖이다. 역사에 이름이 있는 인물로는 龍庇의 후손으로 학봉 金誠一과 동강 金宇옹이 유명하고, 일송 金東三과 심산 金昌淑 등 애국지사와 건국유공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가문 또한 의성 김씨이다. 인종때 석학. 문장가였던 慕齊 金安國, 思齊 金正國 형제는 龍弼의 10대손이 된다.
영중지방에 세거하는 의성 김씨는 모두 9세 金龍庇의 후예들이다. 金龍庇는 네 아들( 宜․ 紘․ 英․ 世勒)이 있었는데, 宜의 후손들은 영중지방에, 紘의 후손들은 장성, 충주, 선산에, 英의 후손들은 성주에, 世勒의 후손은 전주, 정읍지방에 세거한다.
의성 김씨 후예들의 영중지방 입향은 크게 세 갈래가 있었으니,고려 충렬왕때 예안 사천에 입향한 평장사 金椿 ( 宜의 3남, 11세), 고려 공민왕때 안동 풍산에 입향한 공조전서 金居斗 (宜의 증손자, 13세), 성주에 세거하는 英의 후손으로 병자호란 이후 봉화 해저로 입향한 金聲久(개암 김우굉의 고손자, 24세)가 그들이다. 나머지 집성촌은 모두 이들의 후예들이 인근으로 이거해 나가서 형성된 문중이다.
① 의성 김씨 예안 평장사공파
녹전면 신평리 속칭 듬버리에 세거하는 의성 김씨 입향조는 용비의 손자 문하시중 평장사 金椿( 宜의 3남, 11세 )으로 충렬왕때 예안 비봉산 아래 沙川에 정착한 후 아들 金玉, 金瑜, 金衍 3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여 좌사간, 봉익대부, 평장사 벼슬을 지냈고, 金玉의 아들 金玄柱, 金瑜의 아들 金用堅, 金衍의 아들 金懷寶 등, 입향조의 손자들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고, 증손자인 김현주의 두 아들 김을방, 을보 형제가 문과에 급제하는 등 입향이래 대대로 과환이 이어졌다. (宣城誌 참조)
듬버리 마을은 둔번 金乙邦이 문과에 급제, 교찬의 벼슬을 지내다가 고려가 망하자 녹전 요성산 아래에 ‘遁煩草堂’을 짓고 ‘遁煩’으로 자호하며 숨어 살게 되니 신평리의 의성 김씨 세거지 마을을 ‘듬버리’ 라고 부르고 있다. 듬버리 마을은 600여년간 종자 종손으로 대를 잇고 다른 성씨가 단 한차례도 함께 살지 않았던, 독성 마을로 안동 일대에서는 가장 긴 역사를 자랑하는 터전이다.
둔번의 손자 훈도 김완은 농암의 구로회에 참여하였으며, 김완의 큰 아들 김영균의 후손은 듬버리와 영주 지천에 세거한다.
영주 지천에 세거하는 의성 김씨는 숙종때 김영균의 후손 恥恥齊 金秀三(25세)이 이거한 후, 손자 김직이 영조때 문과에 급제하여 경상도사를 지냈다.
한편 김완의 차자 김영권은 상운면 운계로 이거하였는데, 운계에 살던 김영권의 증손자 중, 훈련원 봉사 金欽이 봉화 황전에 거주하는 생원 南龜壽의 사위가 되어 황전마을을 열게 되었다.
봉화읍 가장자리에 있는 황전마을은 정자와 고택이 즐비한 의성 김씨 예안파의 지파 마을이다. 그 때 남구수가 지어 살던 경암헌 고택은 사위에게 물려져 지금까지도 황전 의성 김씨 종택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김흠의 손자로 黃坡 金宗傑은 당대에 학식과 덕망이 뛰어나 나중에 이조참판에 추증 되고, 이곳 봉산리사에 배향되었다. 동네 입구에 있는 도암정은 1650년에 황파가 세운 정자이다. 김흠의 황전 마을 입향과 관련된 구전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김흠이 시종을 데리고 이 마을에 있는 구봉산에 올라 매를 날리며 꿩사냥을 하게 되었는데 산에서 가만히 바라보니 매에게 쫓긴 꿩이 황전의 생원 남구수의 집으로 날아들어 갔는데, 그의 딸이 꿩을 감추어 두었다가 매가 가고 난 뒤에 그 꿩을 살려 보내는 광경을 보고 아주 후덕한 규수라 여기고 청혼을 했고, 마침내 이 남씨 가문에 장가를 들어 황전에 와서 처가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그 때부터 남씨가 한 집 두 집 이곳을 떠나 20년이 채 못 가서 남씨는 한 집도 남지 않고 의성 김씨 마을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황전에서는 지금도 외손이 들어오면 본손이 망한다고 해서 외손은 물론 타성도 큰마에 살지 못하도록 한다고 전해온다.
예안파 입향조 김춘의 또 다른 아들 김연의 후손에서도 문과 급제자가 쏟아졌으니, 김회보를 비롯, 김효우, 김흠조, 김윤석, 김양, 김택룡(1547-1627) 등이 문과에 급제하는 등, 과환이 이어졌다. 예안 태곡(한실) 마을 의성 김씨는 김연의 고손자 첨정 김효우(16세)가 정착한 이래 조성당 김택룡의 후손들이 예안 태곡(한실)에 계거하고 있다.
김효우의 아들 김흠조는 연산군때 문과에 급제, 장례원판결사를 지냈다. 戊午士禍때 화를 당한 金宗直․金馹孫 등을 伸寃케 하고, 李克墩의 관직을 추탈하고, 柳子光을 유배케 하는 등 士林派의 성향을 지녀 己卯士禍 이후 탄핵을 받았고, 뒤에 榮州로 이거하였는데 그 세거지는 분명하지 않다. 1997년 영주 안동 간 국도확장건설공사 중, 그의 묘가 발견되었는데 그가 예안 김씨 참판공파냐, 의성 김씨 예안파냐를 놓고 설왕설래가 있었으나, 결론은 의성 김씨가 분명하다고 보여 진다.
따라서 의성김씨 예안파는 평장사 김춘이 예안 사천에 입향한 이래 증손자 을방이 듬버리로, 또 다른 현손자 효우가 태곡(한실)로 이거하였고, 을방의 후손이 다시 영주 지천, 상운 운계로 분가하고, 상운 운계에서 다시 봉화 황전으로 분파된 마을이다.
② 의성 김씨 안동 전서공파
의성 김씨 전서공파가 안동에 정착한 것은 공민왕때 공조전서를 지낸 김용비의 고손자 金居斗가 흥왕사의 변란때 아버지 金台權이 화를 당하자, 안동 풍산으로 입향한 후 아들 도만호 洊(천)이 안동시내로 이거하였다. 김거두가 안동으로 낙향하게 된 배경은 아버지 김태권이 상락군 김방경의 증손서가 되며(方慶-忻-承固-女 金台權), 김거두 역시 안동 권씨 좌정승 權漢功의 외손서(權漢功-女 柳總-女 金居斗)가 될 뿐 아니라 앞서 정착한 예안파 입향조 金椿은 김거두의 종조부가 된다. 따라서 이런 배경이 작용하여 안동으로 피란하게 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김거두는 가선대부로 경주부사에 부임하여 조선 태조 3년 1394년 삼국사기 3차 판각본을 발간하고 그 발문을 썼으니 조선조에도 계속 사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도만호 벼슬을 지낸 천(洊)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 영수는 사직이며 그 후손은 풍천, 남후, 풍산면 일원에 산거하고, 차자 영명은 세종때 사마시에 합격 신령현감을 지냈다.
신령현감 金永命은 3번 장가(광주 이씨 李之柔의 딸, 광산 김씨 제용 소감 金務의 딸, 안동 권씨 부정공파 權專의 딸)를 들었는데 외내 마을 광산 김씨 안동 낙남조 김무의 사위이자, 文宗의 국구 권전의 사위가 되었으니, 문종과는 동서지간이 된다. 4자를 두었는데 漢啓․漢哲․漢碩․漢仝이다.
한계(1414-1460)는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사가 되었으나 세조찬탈에 사임하고 은거했으며, 한철은 예종 1년에 문과에 급제 예조정랑이 되었고, 그 후손은 군위, 청송지방에, 한석의 후손은 영주 순흥, 남후 신석, 길안 묵계 등지에, 한동의 후손은 의성 사촌, 진보 등지에 산거한다. 승문원사 한계는 萬謹, 萬慎, 萬欽 세 아들이 있는데, 장자 만근은 임하 거주 해주 오씨 오계동의 사위가 되어 임하 내앞으로 이거하고, 만신은 퇴계의 조부 진성 이씨 이계양의 사위가 되어 그 후손은 노림에 거주하고, 3자 만흠은 연산군때 생원이 되어 그 후손은 예천 신당과 일직 구미에 정착하였다. 의성 김씨가 임하 천전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김만근이 처향따라 이거하여 정착하였기 때문이다.
만근의 장자 仁範의 후손은 선산으로 이거하고, 차자 禮範은 임하 천전에 계거하며 크게 번성하게 된다.
풍천면 갈전동 못골에 500년을 세거하는 순흥 안씨 입향조는 安建이다. 안건의 장자 安繼宗은 김만근의 사위가 되었는데 안계종의 처 의성 김씨가 1535년 자녀들에게 분재한 분급문기가 1993년 순흥 안씨 종가에서 발견(한국정신문화연구원 고문서집성 권43 수록 )되었다. 여기에는 전래별 재산항목이 열기되고 있는데, 이 분재기에서 의성 김씨의 동생 김예범(1479-1570)과 친정 조카 성균 생원 김진(1500-1580)이 증인으로 서명을 했고, 재주 김씨의 시동생 安承宗이 필집 서명을 하고 있는데, 분재기에는 노비의 출처별로 그 전래를 정확히 밝히고 있어 흥미롭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535년 안계종 처 의성 김씨 분급문
가옹별득신노비 : 남편인 안계종이 그 부모로부터 별급 받은 신노비
가옹양모변신노비 : 남편이 시양모 풍산류씨(석인의 딸)에게서 받은 신노비
의모변신노비: 재주 김씨가 어머니 해주오씨(오계동의 딸)로부터 받은 신노비
가옹부변노비 : 남편 안계종의 생부 안건(1444-?)으로부터 받은 노비
가옹모변노비 : 남편 안계종의 생모로부터 받은 노비
의부변노비 : 아버지 김만근으로부터 받은 노비
망녀기상노비: 김씨의 죽은 딸(장응필의 처)이 분재 받은 노비를 친정으로 되돌려준 노비
가옹결득노비 : 남편 안계종이 재판에서 승소 획득한 노비
예범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장자 璡은 1525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생원이 되었는데, 벼슬을 하기보다는 부모를 봉양하고 자제의 교육과 가사경영에 힘을 써서 다섯 아들을 퇴계 선생에게 수학하게 하여 세 아들은 문과에 급제하고, 두 아들은 사마에 합격하여 이때 이후로 조선말까지 청계의 후손에서 문과 급제 34명, 사마 64명, 문집발간 43명으로 학문과 과환이 대대로 이어지고 자손이 번성하여 영중지방의 명문벌족으로 등장한다.
청계 김진의 후예들의 성취에 대하여는 후에 별도 기술하기로 한다. 예범의 차자 珽과 3자 璲는 참봉이 되었는데 그 후손들은 천전에 거주하나 가세는 미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