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김시현(金始顯, 1883-1966) 선생은 경북 안동 출신으로 아호는 하구(何求)다.
아호가 재밌다. 그가 일제의 고문을 받으면서 비밀을 지키기 위해 혀를 깨물었다 한다.
검사가 “도대체 무엇을 구하려는가? 차라리 하구(何求)가 좋겠다”고 빈정대었다고 한다.
이후 본래 학우(鶴右)였던 호를 하구로 바꾸어 버렸다.
29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 전문부를 거쳐 법학과를 만학으로 다니다가 1917년 귀국하여 1919년 만세시위 때 경북 상주에서 상주헌병대에 체포되었다가 탈옥한 후 상하이로 망명했다. 일단 지린(吉林)으로 가서 의열단에 가담하면서 본격적으로 광복 활동을 펼쳤다. 자금과 단원 모집을 위해 국내외를 드나들며 거사를 벌이고 체포 투옥되는 일을 광복 때까지 반복했다. 당시 의열단장 김원봉으로부터 최대의 신임을 받았다 한다.
1920년 9월경 의열단이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할 목적으로 국내에 폭탄반입
시도에 가담하다 대구에서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년간 투옥되었다.
출옥하자마자 다시 상하이로 망명하여 안병찬의 소개로 고려공산당에 입당하고,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참가하였다. 거기서 평생의 동지요 연인이 된 신여성 권애라(權愛羅)를 만나 상하이로 돌아온 후 결혼했다.
당시 본부인은 고향에서 집을 지키다 1930년 사망했다. 14살 연하의 권애라는 개성 호수돈여학교를 다니면서 1919년 만세시위에 참가하다 체포되어 6월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망명하여 상하이 애국부인회 등에서 활동하다 1945년 신징(新京)감옥에서광복을 맞이하였다.
1973년 작고하였으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1922년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저격사건에 가담, 1923년 3월 조선총독을 비롯한
고관 암살과 주요 관공서 파괴를 목적으로 당시 경찰간부이면서 의열단원이었던 황옥(黃鈺)과 공모하여 무기와 화약을 들여오려 한 소위 ‘황옥 사건’으로 체포되어 1930년에 출옥했다. 황옥은 당시 경부(警部)로서 의열단원이었다는 설과 의열단에 포섭되었다는 설이 있다.
1930년 조선독립동맹에 가담하여 난징 비밀 군관학교를 설립하여 활동하다
1933년 베이징에서 체포되어 5년간 투옥되었다. 1943년 다시 체포되어 1년간 복역,
1944년 또다시 체포되어 복역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여 출옥하였다. 출옥하면서
고려동지회 회장으로 활동하여 1950년 2대 민의원(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 19년을 감옥에서 보냈던 그는 1952년 백범 암살 배후로 이승만을
지목하여 저격을 시도했다. “이것은 분명 이승만의 짓이다. 함께 고생하며
독립운동을 한 처지에 정적이라고 죽이다니 그냥 놔두지 않겠다. …
민족을 버리고 간 놈이 무슨 대통령이냐, 역적이지. 죽여 버리겠다. …
한번도 진실로 애국자가 되어 본 일 없는 그이니 이번에 자기 목숨을
내놓음으로써 비로소 한번 애국자 노릇 하라고 하지.” 1952년 6월 25일
유시태((柳時泰, 당시 62세)를 통해 부산에서 이승만을 저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승만 저격 계획이 실패하여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후 1960년 4・19혁명으로 석방되었다. 이승만 저격 사건으로 아직까지
독립유공자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유시태(柳時泰, 1890-1965)는 이상준(李相俊), 유시창(柳時昌) 등으로
불리웠던 독립운동가였다. 그 또한. 경북 안동 출신이며, 의열단원으로서
1923년 ‘황옥 사건’이 터졌을 때 서울 내자동 부호에게 독립자금 5000원을
요구하다 검거된 적이 있다. 1952년 6월25일 김시현(金始顯)과 공모하여
당시 62살의 나이에 부산에서 이승만을 저격하려다 실패했다.
부산 공설운동장 6・25 기념식에서 식사를 하던 이승만에게 두 차례나 권총 방아쇠를 당겼으나 불발하여 실패하였다.
백범 암살에 대한 최초의 응징이었다. 이후 백범 암살에 대한 역사적
응징은 암살범 안두희를 12년간 집요하게 추적했던 권중희와, 안두희를 직접 처단한 박기서에 의해 이루어졌다. 역사적 처벌은 그만큼 집요한 법이다. 신은 인간을 용서하지만 역사는 인간을 용서하지 않는 법. 형벌보다 무서운 것이 역사의 심판이다.
김시현과 유시태가 공동으로 속해 있었던 의열단에는 ‘7가살(七可殺)’이라는 맹세가 있다. 1919년 만주 지린성(吉林省)에서 의열단을 창단할 때 처치해야 할 일곱 부류의 인간들을 규정했다. 총독부고관, 군 수뇌, 대만총독, 매국노, 친일파, 밀정, 반민족적 토호가 그 대상이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이승만을 그 대상으로 지목하여 암살을 시도했다. 의열단의 정신은 광복 이후에도 여전히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근현대 인물사전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최근 뉴스에서 정부가 '조상 땅 찾아주기' 사업을 통해 지난 한 해 동안 166명의 친일파 후손들이 110만평의 땅을 되찾아갔다는 사실을 듣는 순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피가 정말 거꾸로 뒤집히는 기분이었습니다.
일제 잔재가 청산되지 않아서 나타나는 정치적인 병리현상은 이 사회가 건전하게 클수 없는 환경을 후대까지 전수하는 모순을 남기고 있습니다.
왜 우리나라는 역사적인 불합리함이 아직까지 진행되어야 하는지, 왜 그들이 득세 하는지 정말 유감스럽고 안타까운 일 입니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에 여러분께 독립운동을 하시고도 빛을 보지 못한 하구 김시현님을 소개하고 싶습니다.이승만대통령 시해 미수사건 때문에 고초를 격으신 김시현님
그것이 과연 그 시대에 정당한 일이었는지 한번쯤 후대의 재평가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 봅니다.소개해 드리는 독립운동가 김시현님도 지금까지 빛을 보지 못했지만 남 모르게 나라를 위해 독립운동하신 분입니다. 무명 독립운동가님들의 진정한 애국심을 생각하며 지금의 나의 존재가 왜 존재 할 수 있었는지 한번쯤 독립운동가들의 순고한 애국정신을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다.
김시현의 테러활동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이른바 ‘황옥경부사건’이라는 폭탄 밀반입 사건이다. 상해에서 김시현은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을 폭파할 계획을 세우고 폭탄제조작업에 착수하여, 독일인 박사까지 초빙해 놓고 시한폭탄을 만들었는데 김시현을 추종하던 경기도경의 황옥 경부(당시 총경급)가 개성경찰서장, 신의주경찰서장 등을 속여 경찰의 호위아래 숨겨진 시한폭탄을 국내로 밀반입한 것이다. 국경수비대의 검문을 피하기 위해 김시현과 황옥 등은 당시 문을 연 <조선일보> 안동현 지국 개설 축하연을 빙자해 안동현 부영사, 신의주 경찰서장과 기생들까지 불러 잔치를 벌린후 2차는 신의주에서 하자며 인력거에 폭탄 36발과 권총13정, 유인물 1만장을 싣고 유유히 압록강을 건넜다.
삼엄한 경비를 펴던 국경수비대는 신의주 경찰서장을 보고 거수경례까지 붙였다고 한다. 그러나 서울에서 발각되어 김시현은 물론 황옥 등 11명이 모두 잡혀 실형을 선고 받았다.
그의 테러리스트 기질은 해방이 되어서도 멈추질 않았다.
1950년 2대 민의원선거에서 고향 안동에서 당선되어 정치에 뛰어들었지만 친일파 단죄를 하지않고 김구의암살사건의 배후에 이승만이 있다고 확신하고 유시태와 이승만 암살을 도모하였다. 평생의 의열단 동지인 유시태가 부산에서 6.25 2주년기념식장에서 이승만을 저격했지만 불발로 끝나 실패하였다.
4.19혁명으로 형집행 중지로 풀려나 5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지만 후배 박진목을 찾아가 “온 친일파가 다 장면 밑으로 기어들어오니 내가 국회의원 신분으로 국무회의에 들어가 폭탄하나 터뜨리면 친일파가 깨끗이 종말을 고할 것 아닌가?” 하며 거사비용을 마련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결국 시행하지는 않았다. 온 가족이 국가의 독립을 위해 힘썼지만 이승만 저격기도 사건 연류자로 포상심사기준에 미달하여 단 하나의 훈장도 받지 못했다.
“권동지 미안하오, 내가 그래도 조국 독립을 위해 몸바쳐 투쟁했는데 반쪽 독립밖에 이루지 못했소. 남은 여생을 조국통일 사업에 이바지해 주오”라는 유언을 부인에게 남기고 쓸쓸히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