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월은 아무래도 나에게는 김교신 선생의 달이다. 내가 김 선생을 처음 찾은 것은 1935년 봄이 아닌가 한다. 광주학생사건 참여로 말미암아 다니던 배재중학교를 그만둔 나는 1932년경부터 두어 명의 친구들과 더불어 서울 도화동, 세칭 토막민(土幕民) 마을에서 조그만 사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는 그 때 주로 가난한 아동들의 교육을 담당했다. 우리는 참 열심이었다. 나는 종종 야학반까지 끝내고 조용히 마당에 서서, 달빛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며, 만일 죽어서 좋은 성과가 나올 수만 있다면 동네와 아이들을 위해 죽어도 좋다, 그래 죽자, 하고 혼자 생각하곤 했다.
일이 피곤했지만, 나에게는 사명에 대한 만족감, 희생적인 노동에서 오는 내면의 평화가 있었다. 내 머리 위에는 동네 어머니들의 뜨거운 사랑이 있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어딘지 모르게 내 마음 속 깊이 충족치 못하고 불안이 감도는 자리가 있었다.
그때 나는 1주일에 한두 번 시내에 들어갈 때마다 종로의 박문서관(博文書館)에서 청색 표지의 『성서조선』을 접하곤 했다. 무의식적으로 이에 끌려 권두문과 성서연구, 일기 등을 읽고는, 내 심중의 평소 불안했던 그 부분에 깊은 위로를 받고 마음 전체에 힘이 솟는 듯한 것을 느끼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나의 마음은 차츰 신앙에 눈이 뜨기 시작했고, 또 성서를 공부하고자 하는 절실한 생각이 일기 시작했다.
마침내 나는 김 선생을 찾기로 했다. 박문서관에서 『성서조선』을 뒤진 지 1, 2년 후, 늦은 봄 어느 날 밤, 니고데모와도 같이 양정고보(養正高普) 숙직실로 향했다. 선생은 머리를 박박 깎고 이마가 유달리 빛나는 건장한 체구이셨다. 선생은 보리차를 손수 부어주시며 한 시간 이상 말씀을 들려주셨다.
나는 간단히 지금 하는 일에 불안이 따름을 말하고, 일본에라도 가서 신앙을 위해 성서를 공부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선생은 정 그렇다면 그게 좋겠다고 하시며, 인생 고민은 성서 이외에 해결의 길이 없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지도해 주셨다.
일본에 가면 우치무라(內村) 선생 문하의 선생 한 분을 찾아 일요성서연구회에 참석하여 성서를 배우는 한편, 영어, 독일어, 그리스어 공부에 열중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앞으로 성서 공부를 위해서는 히브리어도 필수지만 이는 사전으로 찾아 주해서를 읽을 수 있는 정도로 만족해야 할 것이라고도 하셨다. 영어, 독일어, 그리스어만 해도 나에게 큰 부담이 될 것이란 말씀이셨다. 그러나 사실 성서를 공부하려면 이 세 가지는 최소한의 것으로 더 이상 줄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선의 현실이 어느 부분이고 침체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나, 무슨 일이고 충분히 준비를 한 후에 착수한다면 그 타개가 결코 어렵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하시며, 우치무라 문하의 쓰카모토(塚本) 선생 같은 분은 취미로 하시는 단테 연구가 아마 세계 수준일 것이라고 부러운 듯이 말씀하셨다.
내가 줄곧 듣고만 있다가, 그래도 1주 1회의 성서 강의로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하자, 선생은 빙그레 웃으시며, 사실은 그 2시간 강의는 1주일에 다 이해, 정리하기 어려울 정도로 내용이 풍부하다고 말씀하셨다. (그 후 10년 이상이 지난 지금도 독일어나 그리스어는 차치하고 영어 하나 제대로 못하는 나의 불성실에 대해 실로 선생께 면목이 없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동안 선생의 가정에서 양정 담임반 학생 몇 명을 대상으로 열리고 있는 성서연구회에 특별히 출석을 해도 좋다는 말씀도 주셨다.
이리하여 나는 새로운 희망으로 그 다음 주일 활인동(活人洞) 선생 댁을 찾았다. 흰 두루마기에 짚신을 신으신 선생께서 직접 대문을 열고 나를 맞아주셨다. 그 때의 인상이 아직도 나의 눈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그 때 실로 참 조선 사람을, 아니 조선 그 자체에 접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선생의 성서 연구, 그것은 자연과학자이신 선생 특유의 풍부한 학식, 깊은 생활 체험, 진실한 신앙 체험, 그리고 신구약성서가 총동원된 것이었다. 그 위에 하나님께 대한 겸손과 신뢰, 복음에 대한 확신과 감사, 그리고 진리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합쳐져서, 성서 말씀 하나 하나의 내용과 진리를 밝히려는, 실로 깊은 땅속에서 광맥을 캐는 듯한 엄숙한 강의였다. 그리고 대개 강의 끝에는 진리가 개인, 국가, 사회에 어떻게 응용될 수 있는지를 말씀하시고 끝마치셨다.
선생의 신앙의 척골(脊骨)을 이루는 무교회 신앙, 그리고 선생의 인격의 중심을 차지한 조선 민족에 대한 깊은 사랑과 희망이야말로 이 진지한 성서 연구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러므로 생애를 통해 선생은 교회주의에 맞서 격심한 싸움을 하셨고, 또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벽에 걸린 조선지도를 바라보며 민족의 장래를 계획하셨다고 한다.
맨 처음 선생에게서 조선 사람과 조선 그 자체를 보았던 나는, 그 날 또한 선생의 성서 강의를 통해 참 신앙, 참 기독교, 그리고 교회 아닌 참 교회를 발견했던 것이다. 나의 감사와 만족은 차고 넘쳤다. 그 날부터 성서와 조선, 무교회와 조선, 이 둘이 나의 생애를 바칠 대상이, 아니, 나의 애인이 되었던 것이다.
『성서연구』 제13호 (1949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