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룡상회 간판은 우리 아부지 이름에서 땄어. 내가 동아대 대학생 시절인 스무 살 때부터 아부지랑 이 일을 시작했으이까 하마 40년 가차이 돼가네. 내가 학교 다닐 때도 맨날 일만 하이까 친구들 사이에 고학생이란 소문이 나돌 정도였제. 처음 여게 가게를 시작할 때는 당연히 임대라, 우리 부친이 '한전'에 다니셨는데 그때야말로 쥐꼬리만 한 월급 받아 다섯 형제를 키우기가 힘드이까 작심하고 사표를 낸 기제. 원래 아부지는 피란민도 아이고 동란 때 참전한 장교였어. 죽기 몇 년 전부턴가 연금이 나왔는데 처음 5만원에서 인상돼 8만원인가 받다가 작년에 돌아가셨제. 뭐 철원 8사단에서 근무하셨다카더만. 돌아가시니까 참전용사라고 보훈처에서 태극기를 보내주긴 하데. 그거 관에 고이 넣어 드렸지만 좀 서분하긴 했제, 국가를 위해 헌신한 군인연금이 너무 작아서 말이라.
"장사한 기 40년인데도 지금처럼 장사 안 되는 거는 처음이라 카이!… 어느 미친 부모가 밑지는 장사를 하라고 자식한테 물려주겠노? 차라리 장사보다는 쥐꼬리만 한 봉급이라도 직장생활을 하라 그카지."한전 퇴직한 아버지 가게 열어고향은 함안 군북이라, 아부지 직장 때문에 내 나이 열여섯 되던 해에 여로 이사를 온 기지. 아이들 교육문제며 당시만 해도 농촌에서 일곱 식구 먹고 살기에는 힘들 때였으니 도시로 올 수밖에 없었제. 아부지는 원래 전기기사였는데, 무씬 맘을 먹었는지 퇴직을 하고선 배관자재를 취급하는 가게를 낸 기라. 배관자재에도 선박용과 육상용이 있는데 아매 어느 걸 취급해도 당신 나름대로는 비전이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라. 하긴 뭐 육군 중위 출신이니 누가 말렸어도 들을 양반도 아니었고, 고집이 진짜 대단했거든. 내가 젊었을 때, 월남에 지원할까 해서 지원서를 보여주이까 장교 출신이면서도 역성을 냄서 지원서를 사정없이 째삐리더라 카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시절지금처럼 여게서 두 평 반 가게로 시작했제. 지금이야 코딱지만 하지만서도 당시만 캐도 엄청 큰 가게였거든. 개업을 딱 하고나이 아부지 판단은 옳았다 싶데.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뿌게 돌아갔으이 말이라. 직원만 캐도 열 명이 있었다면 말 다한 기지, 웬만한 중소기업이었다고. 그때처럼 힘들면서도 보람 있던 적은 내 인생에 아매 없었을 끼라. 학교 강의시간 되몬 쫓아가 수업 듣고 빈 시간이면 달려와가 일하고. 그래도 하나도 피곤한 걸 못 느낏지. 지금으로 치자몬 일종의 알바였던 셈인데, 그렇다꼬 용돈을 준 것도 아이라. 그양 학비만 받은 기지. 하긴 그때만 해도 월급은 안 받아도 재워주고 멕여줘도 일꾼이 널렸을 때였으이, 그것도 고맙다 캐야제. 지금 생각하몬 그때가 그립제, 진짜 쥑이줬던 시기였으이까.
흑자도산에 사기까지 당하고돈도 애북 벌었지만 번 돈이 전부 어디 갔겠노? 식구들 입에 말캉 들어가삐릿제. 생각해보라꼬, 두부 한 모를 혼자 묵으면 많겠지만서도 나놔 묵어봐, 그기 얼마 안 되잖아? 그 와중에 힘든 일도 두 본이나 겪었으니 볼 장 다본 기지 뭐. 한 본은 '흑자도산'을 맞았제. 거래하던 보일러 회사가 부도가 나가 문을 닫다보니 새 제품인데도 팔지도 몬하고 폐기처분할 수밖에 없었거든. 팔다가 걸리몬 그것도 불법이었으이까. 또 한 본은 사기를 당했어. 광주 사람이었는데 1천700만원인가 한꺼번에 왕창 떼였제. 그때가 아매 80년대 촌가 그랬을 끼라. 헌데 잡고 보니 전과 7범인가 하는 완전 사기꾼이더구만. 집어넣는다고 대금을 받을 방법도 없더라고, 기가 꽉 차데. 믿고 어음을 받은 긴데 그기 완전히 딱지어음인 기라. 그 금액이몬 시내 아파트 한 채였으이 집 한 채 홀라당 까묵고 만 기지, 단돈 십 원도 몬 건졌어, 부정수표방지법인가 뭔가 하는 경제사범으로 처넣어도 몇 개월이면 끝나는 걸, 뭐. 그렇게 손해보고 나이까 일할 맛이 안 나데, 떠그랄. 이후, 해마다 장사가 내리막길을 타는가 싶더이 여까지 오고 말았삐릿네. 인자 말년이니 어데 다른 업종을 해볼라 캐도 뾰족한 수가 없고 다리 힘 있을 때까지 이 일을 할 수밖에. 시대가 그렇게 흘러가는 걸 우야노, 세월이 대형화, 공장직거래로 변하이 우리 같은 중간 소매상인은 설 자리를 없으이 말이라.
아내까지 지병 얻어 걱정 태산하이고, 말도 마라카이, 오죽했으몬 때리치아뿌고 개인택시 몰 생각을 했을라꼬. 근데 그것도 생각보다 자격이 까다롭데. 그러이 이 나이에 다시 시작할 게 뭐 있노 말이라, 내 건강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은 내 몸피만 보고 잘 먹고 돈 마이 벌어 살쪘다 캐. 하긴 얼마 전까지만 해도 109㎏이나 나갔으이 그리 오해를 할 수도 있것제. 내 병은 아주 특이해서 병원에서도 병명을 모르더라 카이. 이상하게 몸이 점점 부어오르는 기라. 나중에야 혈액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 운동을 함서 16㎏을 빼긴 했지만서도 병이 고질이라서 말이제. 인자는 그냥 병과 함께 늙어가야 되는구나 생각하고 포기해삐릿어. 문제는 나만 지병을 가지고 있으몬 되는데 마누라까지 몸이 안 좋으이 그기 걱정이라.
시장 활성화, 주차 문제부터시장 활성화를 꾀한다 캐도 이런 식으로는 곤란하다꼬. 먼저 주차장 문제부터 해결해야 돼. 요즘은 다 차 끌고 댕기는데 접근성이 용이해야 사람이 들어도 들 거 아이라? 그러이 그것부터 시급한 문제라 이 기라. 거리에 붙어 있는 가게는 괜찮지만서도 안쪽에 위치한 우리 겉은 사람들은 골병이 이만저만이 아이라. 피프광장 등 도시 정비 사업으로 활성화 혹은 제2의 부흥기를 맞는다고 이바구를 해쌓는 모양인데, 내가 볼 때는 그거 다 곰보 얼굴에 화장하는 꼴이라. 일부분만 볼 기 아니라 시장 전체를 거시적으로 봐야 한다꼬. 일본관광객이 온다고 시장이 다 사는 건 아이잖아? 여게가 신창동인데 바로 국제시장 본가라. 동란 후 피란민들이 모여 가건물이 들어선 곳이고. 여게 건물이 화재가 나고 4년 뒤에 이 건물이 들어섰는데, 몇 년 뒤에 내가 들어왔으이 이 건물에서 장사한 기 40년인데도 지금처럼 장사 안 되는 거는 처음이라 카이!
속은 완전히 곪은 공구상들가게 시작할 때만 캐도 이웃에 피란민들이 쫙 깔렸었제. 상인 중 60∼70%가 이북사람들이었다고
|
이 상 섭
소설가 |
보몬 얼추 맞어. 저짜 용화상회도 이북사람이었는데 죽고 사람이 바뀌었고, 낙지골목 거게도 한 사람 있었는데 주인이 바뀌었고. 하긴 팔십이 넘었으이 장사하긴 힘들 나이제. 몰라, 한 10년 전까지만 해도 몇 분 남아있긴 했었는데…. 2세대가 물려받은 가게? 생각해 보라카이, 어느 미친 부모가 밑지는 장사를 하라고 자식한테 물려주겠노? 차라리 장사보다는 쥐꼬리만 한 봉급이라도 직장생활을 하라 그카지. 장사라 카는 기 생각보다 엄청 스트레스 받는 직업이라, 월급쟁이하고 스트레스 차원이 다르다카이. 돈 걱정에 종업원까지, 거기에 오는 손님에다가 집에 있는 식구들까정. 그러이 마음이 푹푹 썩제 썩어, 오죽하몬 장사하는 양반들 오래 못 살겠노 말이다. 근처에 있는 공구상들, 겉은 화려할지 몰라도 속은 완전히 곪았다카이. 어떤 가게는 견디다 몬해 업종을 식당으로 바꿨어, 묵고 살아야 한께. 하지만 그것도 죄다 죽 쑤는 꼴이라. 들리는 소문으로는 뭔가 살 길을 모색하기 위해 시장 세 곳을 연합해 법인화를 시도하고 있다 카는데, 각각 주인들이 제 생각이 있는데 그기 가당키나 하겠나, 어디? 다 뜬구름 잡는 셈이제. 이 장사는 인제 미래가 없어, 장사는 내 대로 끊는 기 '오야'라. 정말 피가 마른다카이. lsangsup@hanmail.net
취재 후일담
태룡상회는 현재 수도배관 부속품만 취급하고 있었다. 게다가 요즘은 부품만 가져가 간단하게 조립할 수 있도록 제품이 출시된단다. 그런데도 장사가 안된다고 했다. 정말 취재하는 내내 손님 하나 들지 않았다. 밖으로 나와 보니 공구상 골목은 사람 그림자가 드물었다. 그제야 인터뷰 내내 한숨만 내몬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나저나 자장면으로 때울 점심값도 못 버는 날이 있다니, 괜히 내가 미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