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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아직도 울고 있구나 - 지리산 촛대봉 산행기
산행일시 : 2014. 6. 3 산행코스 : 백무동 - 한신계곡 - 세석 - 촛대봉 - 세석산장 - 거림 산행시간 : 6시간
(사진 - 오락)
지리산,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하는
지리산을 여러 차례 오르내렸는데 그 모습 모르고만 다녔다 이 골 저 골 이 등성이 저 등성이 많이 더투고 헤집고 돌아다녀도 그 산은 저를 보여주지 않았다 함께 잠자며 뒹굴며 살 섞어 땀흘려보아도 거듭 알 수 없었다 어느 해 겨울 기진맥진 청학이골 내려와서 강 건너 남쪽 보았더니 크낙한 산줄기 또 하나 무겁게 버티고 있었다 이듬해 겨울 한달음에 그 남쪽 산 올랐더니 비로소 옆으로 누운 지리산 긴 몸뚱어리 한꺼번에 보이더라 빛나는 큰 보석 병풍 펼쳐져서 내 그리움 달려가 북받치게 하더라 사랑하는 것들 멀리 떨어져 바라보아야 더 잘 보이느니 - 이성부 ‘보석 - 내가 걷는 백두대간 72’
5월 하순, 세석에 철쭉이 물들 무렵이면 내 마음은 한신계곡 그 언저리를 맴돈다. 세석의 철쭉은 수 백리 산 아래 사는 나를 봄마다 흔들어 놓는다. 연산홍 철쭉이 많은 세석의 철쭉을 일컬어 핏빛으로 피어난다고 말할 수 없지만, 마음의 눈으로 보는 세석의 철쭉은 바래봉 철쭉보다 붉다. 그것은 황홀경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가슴 저린 아픔으로 다가온다. 아름다움과 아픔이 등을 맞대고 있는 곳, 그곳이 늦봄의 세석평전이다. 우리들의 상상력 속에서 지리산은 영원한 모성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를 넉넉하게 감싸주고, 짐승처럼 제 자식의 상처를 핥아준다. 우리가 어머니의 아픔을 알아차리기까지 오랜 성숙의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지리산 연봉과 골마다 배어있는 아픔을 제대로 인식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날들이 필요했던가? 지리산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여행이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 바로 그 중심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역사를 객관화시켜 보는 거리와 인식을 지닐 때 지리산은 비로소 실상, 진면목을 드러낼 것이다.
백장암(百丈庵), 한국 선종의 근원
무더위를 식혀주는 비가 전국적으로 내리고 있다. 공교롭게 지리산 산행을 계획하면 비가 자주 온다. 작년 삼신봉 등반의 경우도 종일 비가 내렸고, 5월 20일 하동 성제봉 산행은 비로 인해 과천 청계산으로 행선지를 변경해야만 했다. 6월 3일, 오늘 가게 되는 촛대봉의 경우 거림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마천 백무동으로 하산하기로 계획(5시간 30분)을 세웠지만, 우중산행임을 고려하여 한신계곡을 올라 거림으로 하산(6시간)하기로 산행 코스와 시간을 수정했다.
지리산 휴게소에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차에 오른다. 휴게소 옆에 우뚝 솟아 있는 지리산 전적비에 시선이 쏠린다. 날카로운 칼 모양을 하고 하늘을 찌를 듯해서 지리산의 상처를 자꾸만 헤집는 것 같아 안타깝다. 지리산 도처에 세워진 6․25 관련 조형물과 기념관, 추모공원이 분단극복,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한 상징공간이 되길 바란다.
88올림픽 고속도로 지리산 IC를 빠져 나와 인월(引月)에서 60번 국도를 따라 마천을 향한다. 백장골 쌈지농원 간판이 눈에 들어오자, 실상사 백장암(百丈庵)이 그리워지기 시작한다.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산 28번지에 있는 백장암, 백장선원은 실상사의 부속암자, 선원이면서 실상사의 뿌리가 되는 공간이다. 연기암이 훗날 구례 화엄사가 되었듯이, 홍척선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먼저 참선 도량인 백장암을 건립하고, 이를 확대하여 실상사를 세웠기 때문이다. 풍수지리학자들은 백장암터가 국운을 좌우할 명당이라 한다. 백두대간이 지리산을 만들고, 그 산기운이 백장암터에 모인 다음 지리산 천왕봉을 거쳐 일본 후지산(富山)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으로 빠져나갈 기운을 막기 위해 실상사 동종(1694년에 주조)에 일본 지도가 있어 이를 때리고, 천왕봉을 바라보고 계신 약사여래좌상(보물 제41호)을 철불로 조성해서 이 기운을 누르고 있다고 한다. 호국불교와 연관지어 실상사와 백장암을 비보사찰로 부각시키고 있는 풍수설화이다. 하지만 도법스님은 ‘호국’에 가려진 불교의 진리를 안타까워 하면서, 한반도와 일본 지도가 함께 그려진 것으로 보아, 한국인에게는 ‘정신 차리라’, 일본인에게는 ‘경거망동 말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고 해석한다. 그런 관점에서 백장암, 실상사의 의미를 한국 불교사적 관점에서 부각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우선 백장암이라는 명칭이 예사롭지 않다. 중국 선종은 1대조사 보리달마(菩提達磨, 숭산 소림사)로부터 시작하여 2대 혜가(慧可) - 3대 승찬(僧璨) - 4대 도신(道信) - 5대 홍인(弘忍, 황매산 동선사) - 6대 혜능(慧能, 조계산 보림사)으로 이어진다. 남능북수(南能北秀)라 하여 홍인 조사의 두 수제자가 있었는데, 신수(神秀)의 북종(北宗), 즉 점오(漸悟)를 강조하는 가르침은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을 중심으로 성행했다. 이와 달리 혜능의 남종(南宗)은 돈오(頓悟 - 수행의 단계에 구애받지 않고 곧바로 깨닫는 것)를 강조한다. 한국 조계종은 선의 황금시대를 연, 6조 혜능을 계승했다고 표방하고 있는데, 이는 한국 선종의 비조에 해당하는 도의, 홍척, 혜철선사의 법통이 결국 6조 혜능에서 발원하였기 때문이다. 혜능의 법통은 5대 제자 중 남악 회양(南嶽懷讓, 677~744)을 거쳐 8대 조사 마조도일(馬祖道一)로 이어진다. 마조도일은 스승에게서 이심전심으로 불도를 전수받았고, ‘생명의 진상과 실상을 꿰뚫어 보기 쉬해서는 어떠한 형식에도 구애받아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또 그는 ‘평상심이 도’ ‘마음이 부처’ 등을 강조하며 일상생활에 철저할 것을 강조했는데, 그의 마조선은 중국 전통선으로 전해 오고 있다. 8대조사 마조도일은 중국선종의 역대 조사 중 가장 많은 제자를 길러 낸 분으로도 유명한다. <경덕 전등록(景德傳燈錄)>(1004)에는 마조도일 제자의 이름이 117이나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특히 백장산의 회해선사(百丈 懷海)의 문하에서 117명 중 30명이나 나왔다. 백장 회해선사(百丈 懷海禪師, 749∼814)는 서당 지장선사(西堂 智藏禪師,(735∼814)와 더불어 마조도일의 2대 제자로 불린다. 백장은 참선에, 서당은 경전 해석에 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찍이 마조는 “경(經)은 서당의 것이고, 선(禪)은 백장의 것이고, 남전은 오직 물외(物外)에 초연하구나”고 제자를 평했다고 한다. 백장청규(百丈淸規)로 유명한 백장선사는 선종의 규율과 체계를 확립한 분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율원(律院)과 禪院(禪院)을 분리하고,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고 하여 노동을 통한 경제적 자립을 강조했다. 이러한 백장의 가르침으로 인해, 선불교는 수많은 난관 속에서도 지속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있게 된다.
중요한 것은 신라의 도의(道義), 혜철(惠徹), 홍척(洪陟)스님이 서당 지장선사(西堂 智藏禪師) 4대 제자에 속하였고, 이들이 귀국하여 도의는 전남 장흥 가지산 보림사에서 가지산문(迦智山門)을, 혜철은 전남 곡성 동리산 태안사에서 동리산문(桐裏山門)을, 홍척은 전북 남원 지리산 실상사에서 실상산문(實相山門)을 열었다는 사실이다. 홍척선사(洪陟禪師)는 서당에게서 경전해석을, 백장에게서 참선을 배운 듯한데, 지리산에 백장암을 세운 것으로 보아 백장 회해선사(百丈 懷海禪師)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백장암 3층석탑(국보 제10호)을 노래한 후배 복효근 선생의 시를 떠올린다.
연화문보다 보살상보다 도굴당할 때 얻은 흠집이 더 그윽한 탑
부서진 모서리는 그래서 그 안에 훔쳐갈 보배가 있었다는, 그것을 위해서 버텼다는 증거이므로
상처가 상처를 이고 탑 한 채 이루었구나 보배를 보려거든 상처를 보라
부서짐은 때로 저리 눈부셔서 나도 잘 익은 상처 하나로 서고 싶다 - 복효근 ‘백장암 삼층석탑 - 상처의 집’
실상사(實相寺) 가는 길
지리산 자락에는 유서 깊은 절이나 암자가 많다. 화엄사, 쌍계사, 천은사, 법계사, 대원사, 내원사, 연곡사 등. 나는 그 중에서도 실상사와 백장암을 으뜸으로 친다. 실상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선종 가람이라는 의미에 걸맞게 눈여겨보고 생각할 게 많은 절집이기 때문이다. 실상사는 절 이름부터 철학적, 문학적이어서 매력이 있다. 실상(實相)이란 ‘모든 존재의 참된 본성’ ‘사물이 가진 본래의 진면목’을 뜻하는 말이다. 우리의 삶과 여행 또한 ‘실상’을 깨우치기 위한 노력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나는 늘 실상사가 그립고, 실상사에 가는 길은 언제나 진행형, 미완성일 뿐이다. 오늘도 세석 등반이 목적이기 때문에, 지척에 실상사를 두고 실상사 석장승에도 채 이르지 못하고 비껴가고 만다.
어느 눈 덮인 논둑에서 비구니 사로 스님이 내게 물었다. 선생님, 사랑이 무언지 아세요? 나는 아득해져서 순간 멍하니 사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여고를 갓 졸업한 것 같은 사로가 말한다. 사랑은요오, 이렇게 추운 날 손을 꼭 잡아 주는 것이에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스님, 저기 남원 읍내에 가서 돼지고기 팍팍 썰어 넣은 짜장면이나 한 그릇 하고 가시지요. 그러자, 사로가 까르르 웃으면서 먼저 실상사 쪽으로 달려간다. 스무 해 전, 광주사태로 망가진 몸 추스르러 갔던 실상사. 약사전 철불의 매운 눈이 노려보는 마당 가득 다시금 눈이 쌓여 있고 먼저 다녀간 사로의 발자국이 여기저기 난분분했다. 하기야 사랑의 기억은 연탄재 위에 쌓인 눈 같은 것. - 황지우, ‘실상사 가는 길’ 전문
황지우 시인의 시 ‘실상사 가는 길’에서 시적 화자는 실상사에서의 추억을 떠올리고 있다. ‘나’는 몹시 추위를 느낀다. 광주항쟁으로 인해 몸과 영혼이 망가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로 스님과의 짧은 만남, 약사여래의 손길로 나는 재생, 회복을 맛보았으리라. 순결한 눈, 시대의 어둠을 부릅뜨고 쳐다보는 철불을 보면서, 시인은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김수영 ‘눈’)을 하는 존재가 자신의 실상(實相)임을 인식했으리라. 또 까르르 웃고 실상사 안으로 사라진 사로 스님이 자신의 상처를 어루만져 준 약사여래, 관음보살이었음을 깨달았으리라. 공(空),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를 올바로 인식하면 사랑과 혁명 뒤에 남는 상흔과 허무, 그 막막함을 달랠 수 있으리라. 사로(斜路?)스님과 나의 사랑이 그러하듯이, 욕망은 언제나 충족되지 않는 것. 혁명, 열린 세상에 대한 소망과 열정 또한 무상한 것. 사로의 발자국 위에 분분이 눈이 내리고, 그 뒤를 밟는 내 발자국도 이내 지워지듯, 사랑과 사랑의 흔적 또한 유한한 것. 그러나 충족되지 못한 욕망이 있기에 삶은 지속되는 법. 삶이란, 누군가 다녀간 길의 흔적을 바라보며 내 길을 가는 것. 한 생, 한 시대를 불사른 후 온기를 잃어가는 연탄재 위에 눈이 덮이듯, 허무가 나를 엄습해 올 때 그 허무감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해 주는 사랑의 기억이 있다면 행복하리라.
산행을 하면서 길을 잃고 헤매면서 난감할 때가 있다. 이데아, 진리라 믿었던 것들이 허상임을 알았을 때, 삶의 길 찾기와 글쓰기는 참으로 막막하다. 양귀자가 ‘숨은 꽃’에서 형상화한 바와 같이, 이분법적 세계가 해체된 포스트모던 시대에 지식인의 길 찾기, 글쓰기는 얼마나 난감한가? ‘실상사’ 연작소설에서 정도상은 마르크스주의가 무너지고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광기를 부리는 시대에 진보적 지식인의 고뇌를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어딜까? 언젠가 한 번 와본 듯한 느낌의 길이 산속으로 뻗어 있었다. 길 옆의 손바닥만한 밭에는 노란 장다리꽃이 한창이었다. 뀡이 푸드덕 날아올랐다. 흰 소 한 마리가 느릿느릿 산길을 걷고 있었다. 흰 소를 따라갔다. 손만 뻗으면 잡힐 듯한 가까운 거리였지만 나는 흰 소를 잡을 수가 없었다. 흰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자꾸만 마음이 바빠졌다. 고삐를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흰 소는 숲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소를 찾아 칡덩굴만 무성한 숲속을 헤매고 다녔다. 햇살은 눈부셨고, 돌아보니 내가 왔던 길도 흰 소가 갔던 길도 사라지고 없었다. 순간 공포가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갑자기 뒤통수가 가려웠다. 돌아보니 아무 것도 없었다. - 정도상 연작소설 <실상사> 중 ‘가을 실상사’
이에 대해 시인 도종환은 이분법적 가치관의 해체를 통해 새로운 세계관(새로운 실상사)를 세우라고 격려한다. 이념은 우리가 꿈꾸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방편이므로 그것을 절대시해서는 흰 소(진리)에 이를 수 없으며, 서구 자본주의적 가치와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절망, 부정에 그치지 말고 변증법적 지양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네가 흰 소에 대해 말하는 줄 알지만 너는 불타는 집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찾고자 하는 궁극이 흰 소인 줄 알지만 흰 소도 방편일 뿐. 실상사 빈 방에 누워 불에 데이고 지친 몸을 식히기도 하고 스님이 건네주는 차 한 잔에 가벼운 평온을 얻어 마시며 불타는 집의 몸서리치는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실상사에 다녀온 것만으로 실상사를 만난 것은 아니다. 실상사는 네가 버리고 온 고향집 마당에도 있고 아직도 운동판을 떠날 수 없는 몇 명의 관음보살 얼굴에도 있다. 네가 만나야 할 것은 진여실상 매일 같이 네 안에서 너를 태우며 다시 살아나는 불길을 잡고 집을 태우는 불길마저 꺼버려 제법무아 거기까지 갔을 때 언덕 이쪽의 불타는 집과 저쪽의 교조적인 집까지 뛰어넘었을 때 너는 비로소 네 안에 실상사를 세우는 것이다. 네 안의 실상사 그리고 내 안의 실상사를. - 도종환 시 ‘실상사 - 정도상에게’ 전문
1994년 상문고 사태(공금횡령, 성적조작 - 영화 ‘두사부일체’의 모티프가 됨)가 발생했을 때, 나와 몇몇 동료 교사들은 실상사 선방에 계신 도법(道法)스님을 찾아 뵌 적이 있다. 도법스님은 2시간 남짓 우리에게 다공양을 베풀어 주시며 생태학적 세계관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94, 98년 조계종 사태가 터졌을 때 도법스님은 조계종단 개혁의 중추역을 맡아 사태를 수습한 후 실상사 산사로 돌아가곤 했다. 종단 권력에 초연한 도법스님의 모습에서 많은 사람들이 불교계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이 밖에도 도법스님은 선우도량, 인드라망 생명공동체, 실상사귀농학교, 천성산 문제, 새만금간척사업 삼보일배, 지리산 둘레길 조성, 지리산댐과 케이블카 건설 문제 등 실천적 불교운동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고, 근래에는 원효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을 화두로 삼아, 사회 구성원 간의 소통을 모색하고 계신다. 도법스님은 제주에서 태어났지만, 진표율사, 진묵대사, 탄허대종사, 월주스님이 태어나고 자란 김제에서 성장하여 18세에 금산사로 출가하여 훗날 월주스님의 상좌가 된다. 땅과 사람의 인연을 생각하게 한다. 도법 스님의 가르침이 그리울 때마다 나는 ‘길 그리고 길’ ‘청안청락하십니까?’ 등의 책을 꺼내 읽는다.
우리 모두는 지리산에서 만났다. 지리산은 그 누구도 외면하지 않는 큰 가슴이다. 그 무엇도 배척하지 않는 넉넉한 품이다. 너와 나, 지역과 지역, 세대와 세대, 계층과 계층, 좌익과 우익, 종교와 종교, 인간과 자연이 하나의 그물을 이루어왔다. 한결같이 한 몸, 한 생명으로 함께 어울려 희망을 가꾸며 살아왔다. 특히 생명이 화두가 되고 있는 지금, 대표적인 생명의 산으로 남아 있는 산이 지리산이다. 생명의 문제를 해결할 깨달음의 장도 바로 지리산이다. 지리산의 정신은 민족 화해의 길이요 생명 살림의 길이다. 민족 통합의 길이요 민족 희망의 길이다. - 도법, ‘지리산이 신음하고 있다’일부
채소에서 똥과 오줌을 보고, 똥 오줌에서 채소를 떠올릴 수 있을 때 우리는 성(聖)과 속(俗), 나와 너, 미와 추를 분별하는 미망에서 벗어나 생명의 참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상사를 지나며 하노이의 탑, 제석천의 인드라망(因陀羅網) 보석처럼 아름다운 생명의 공존 윤리를 생각한다.
백무동에서 한신계곡을 오르다
09:00 중백무동에 이르렀다. 비가 연신 내리고 있어 백무동탐방지원센터 주변에서 우중 산행 준비를 마친 후 기념 촬영을 한다. 일부 회원들은 가내소폭포까지 산행하고 생태탐방을 하기로 했고, 마음을 단단히 한 대부분의 회원들은 계곡물소리를 들으며 한신계곡 산허리를 오른다.
울창한 천연림 사이로 맑고 풍부한 계류가 소리치며 굽이쳐 내달린다. 비경, 선경이라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장관이 펼쳐진다. 첫나들이폭포, 바람폭포, 가내소폭포, 5층폭포, 한신폭포. 오공산(蜈蚣山-지네형상)과 강청리(江淸里)의 골짜기에서 쏟아지는 물줄기가 합쳐지는 근원을 탐색하듯 한신계곡의 깊은 골짜기를 더듬어 오른다. 한신계곡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한신폭포에 가까워질수록 수량은 줄어들지만, 마음은 어느덧 두류산(頭流山- 지리산의 옛이름. 백두산에서 흘러내린 산줄기란 뜻) 맑은 물에 씻긴 듯 청청하다.
내 어린 시절 짝사랑했던 가시네가 커서 당골네 되었다는 소문을 떠올리며 백무동 골짜기 내려간다 이리저리 차이는 돌밭길에 거친 인생에 발가락 아픈 것도 잊어버린 채 문득 우리 할매도 당골네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내려간다 됫박에 쌀 담아 들고 놋그릇에 쏟아 부어 삼배로 감싸 내 아픈 배 문질러주시던 할매 (중략) 조선 팔도에 흩어져서 모든 고을 당골네가 되었다는 백무(百巫) 가운데 내 어린 시절 가시내도 우리 할매도 피를 이어받은 이 있을지 모르겠네 - 이성부, ‘백무동 - 내가 걷는 백두대간 23’
지리산은 신앙의 산이다. 이 산은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방장산(方丈山)이라 일컬어졌다. 박혁거세 어머니 선도성모,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를 남악(南嶽)인 지리산의 산신으로 모신 데서 알 수 있듯이,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지리산을 신성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천신의 딸 성모 마고(聖母 麻姑-1973년 사진에는 천왕봉에 마고석상이 모셔져 있었음)가 지리산에 하강하여 딸 여덟 명을 낳아 모두 무당으로 길러 팔도에 보냈다고 하며, 천왕봉 성모석상이 석가여래의 어머니 마야부인을 산신령을 모셨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민간신앙과 불교와의 연관성을 뜻하는 전설이다.
백무동은 현재는 白武洞이라 표기하는데, 옛날에는 百巫洞, 혹은 白霧洞(늘 운무가 자욱한 마을)이라 했다고 한다. 百巫洞은 이 마을에 많은 무당들이 살면서 천왕봉 성모여신을 모셨다는 이야기와 연관된다. 이와 유사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는데, 지리산 산신인 천왕봉 성모여신이 남성을 유혹해서 100명의 딸을 낳아 세상으로 내려 보냈는데, 무당이 된 100명의 딸들이 이곳 백무동에서 팔도로 퍼져나갔다는 것이다. 백무동(百巫洞) 전설은 천왕봉의 신성성과 천왕봉 자락 백무동이 조선 민간 신앙의 요람임을 강조하는 이야기라고 해석해 본다. 천왕봉 기상을 이어받은 인근의 남원 실상사가 조선 선불교의 요람으로 자리잡음에 따라, 토착 민간신앙은 마천 백무동 골짜기로 더 깊이 파고든 것은 아닐까 상상해 본다. 하지만 근대 이후 무속신앙이 퇴조함에 따라 어감이 좋지 않은 마을 지명을 白武洞으로 바꾼 듯하다. 검푸른 물줄기가 굽이치는 마을을 뱀사골이라 부르는 것처럼, 맑고 흰 폭포와 물줄기가 무인의 기상처럼 차갑게 굽이치는 마을이라는 뜻을 담고자 함이었으리라.
(사진 - 오락) 세석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오르막길이 가파라진다. 백무동은 이미 봄이 무르녹았고, 신록이 나날이 짙어져가고 있다. 그 신록의 향연 속에서 함박꽃이 함박웃음을 웃고 있다. 그 웃음에 피로가 잠시 풀린다. 연초록 잎사귀 위에 하얀 꽃잎을 다소곳이 얹고 있어 청순하기 그지없다. 스치고 지난 후에야 비로소 은근한 향을 느낄 수 있는 여인. 한신계곡 길섶에 조용히 피었다가 연꽃 지듯 그렇게 떨어져, 잠시 잎새에 머물다가 바람에 내려앉아, 이윽고 물길 따라 먼 길을 가리라.
(사진 - 최병남)
세석평전에서 촛대봉까지
세석평전에 가까워지니 산길이 더욱 가파라진다. 등산로 주변에 병꽃나무들이 불그레한 꽃들을 피워내고 있다. 비가 와서 바위가 미끄럽지만, 조심조심 다가가서 마지막 계류에서 기념촬영을 한다.
떡갈나무 사이로 세석의 하늘이 조금씩 비쳐든다. 오를수록 나무들의 키가 작아진다. 섬진강 강바람, 불일폭포 골바람에 부대낀 까닭이리라.
운무 자욱한 세석평전에서 고산 평원을 장식하는 화관의 장관을 만끽하지는 못했지만, 6월의 초록 숲과 어우러진 연산홍 철쭉의 자태는 여전했다. 천왕봉 일출, 노고단 운해, 피아골 단풍, 반야봉 낙조, 벽소령 명월, 불일폭포, 연하선경, 칠선계곡, 섬진청류와 더불어 지리산 10경 중 하나로 꼽히니, 철쭉이 핀 6월에 세석에 오른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다. 세석평전. 해발 1,680m. 지리산 주능선 촛대봉(1,703.7m)과 영신봉(1,651.9m) 사이의 30여만평에 달하는 고산평원지대다. 북은 마천 백무동, 남은 산청 거림, 남서쪽은 하동 청학동으로 이어지는 잔돌고원. 남향으로 15도 경사를 이루어 남녘의 개마고원이라 불리고 있다.
세석 철쭉 전설에 따르면, 대성계곡에 살던 연진이라는 여인이 아들을 낳기 위해 영신봉 음양수를 마셨다가 산신령의 노여움을 사서 남편 호야와 생이별한 채 철쭉밭을 가꾸는 형벌을 받았다고 한다. 연진은 촛대봉에서 촛불을 켜고 천왕봉 산신령에게 용서를 빌다 돌로 굳어졌고, 촛대봉에서 흘러내리는 연진의 피로 세석의 철쭉이 더 아름다워졌다고 한다. 하지만 역사적 상상력으로 지리산을 바라보면, 세석의 철쭉은 세상에서 응어리진 한으로 피어난다. 세석의 철쭉은 해마다 봄날이 되면, 한국 현대사의 상처를 터뜨리며 아프게 피어난다. 알프스 회원들에게 문순태 소설 ‘철쭉제’ 이야기를 들려주며 촛대봉에 오른다. 세석 철쭉의 꽃잎에 지리산 골짜기를 떠돌고 있는 박쇠 부부의 원혼, 판돌의 슬픈 유년, 박검사의 매지매지 맺힌 한이 서려 있다고.
무지개빛으로 찔러 오는 햇살 사이로 온통 산에 붉은 물을 뿌려 놓은 것 같은, 세석평전의 철쭉꽃밭이 질펀하게 펼쳐쳐 있었다. 나는 손으로 눈곱자기를 뜯어내며 꽃밭의 찬란함에 바보처럼 입을 벌렸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하늘 끝까지 붉게 물들여져 있는 듯했다. 암․수 원앙이 어울려 비비꼬는 비단 금침이불 하나로 세석평전 30여 리를 덮어 버린 것 같은 꽃밭은 불난 것처럼 이글이글 타올랐다. - 문순태, ‘철쭉제’일부
찬비가 내리는 촛대봉에 올랐다가 다시 세석으로 내려온다. 김일성 대학이 있었다는 세석평전. 이제는 그 흔적을 찾을 길 없다. 세석의 풀들 속에서 흘린 피보다 끈끈한 붉은 꽃들이 들불처럼 번져 있을 뿐.
산악대장께 연산홍 철쭉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달라 부탁한다. 이념이 광기를 부린 역사의 질곡 속에서 스러져간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 산첩첩 골첩첩 꽃첩첩. 이 골짜기에서 흰옷 입은 백성들이 얼마나 많이 피흘렸을까? 그들은 지금도 왼편과 오른편으로 나뉘어 묻혀 있을까? 이제 살아남은 자들은 새로운 역사를 써 가야 한다. 죽은 사람의 역사는 죽은 사람과 함께 무덤 속에 묻어 두어야 한다. 타인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끌어안을 때 상호용서가 가능해진다.
빗속에서 늦은 봄 뻐꾸기가 울음 우는 환청이 들린다. 지리산 영신봉, 촛대봉이 진양조 가락으로 느릿하게 운다. 그 소리를 받아 연하봉, 제석봉, 천왕봉도 핏빛 울음을 토해낸다. 지리산이 진양조, 중종모리를 거쳐 자진모리 휘모리 가락으로 울음을 토해낸다. 그 울음으로 소리없는 강이 열리리라. 섬진강 물줄기가 남해 군도의 작은 섬들을 밀어 올리리라.
봄 하룻날 그 눈물 다 슬리어서 지리산 하(下)에서 울던 한 마리 뻐꾹새 울음이 이승의 서러운 맨 마지막 빛깔로 남아 이 세석 철쭉밭을 다 태우는 것을 보았다. - 송수권, ‘지리산 뻐꾹새’5연
아, 정순덕
세석대피소에서 추위와 허기를 달랜 후 거림골로 하산한다. 세석대피소가 해발 1,560m, 하산지점인 거림마을이 해발 620m이니 1,000m 가까이 해발 고도를 낮추어야 한다. 이 깊고 울창한 골짜기에서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벌어졌던 것이다. 1948년 10월부터 1955년 5월까지 군경 토벌대와 빨치산의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어 2만명이 생명을 잃었다. 더욱이 이데올로기 대립과 무관한 지리산 주변 마을 사람들은 이 와중에 어처구니 없는 희생을 치르게 되었다. 지리산에 추연하게 내리는 비처럼, 지리산 자락 곳곳에 아픈 상처를 남겼던 것이다. 거림마을에 들어서자 이곳이 최후의 빨치산, 빨치산 여성대장 정순덕이 체포된 곳이라는 팻말이 서 있다.
16세의 어린 신부 정순덕은 지리산 자락이 눈과 얼음에 얼어붙은 섣달 보름날 밤 남편 성석조(17세)의 겨울옷을 준비하여 산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20일 만에 남편이 전투에서 죽었다. 마을로 내려갈 수도 없었던 막막한 갈림길에서 그녀는 남편처럼 산에 있다가 죽는 수밖에 달리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산생활 13년의 세월이, 인간의 극한 상황에서 살기 위한 온갖 행위와 온갖 어려움을 지리산 산골짜기마다 아로새기면서 흘렀다. 그리고 수천 수백 명의 빨치산이 그녀만 남겨놓고 모두 죽었다. 1963년 정순덕은 경찰의 총을 맞고 붙잡혀 왼쪽 다리 절단 수술을 받았다. 그녀를 이렇게 몰아넣은 상황은 그녀의 선택이 아니었다. 그녀는 천고의 지리산 자락에서 태어나서 자랐기 때문에 밀림의 요정으로 살고 싶었다. 산나물, 도토리묵을 이웃과 나눠 먹으면서 안개를 마시고 구름을 밟으며 솔바람 소리를 들으며 뻐꾸기를 벗삼아 살고 싶었다…… - 김경렬, ‘다큐멘터리 지리산’1권에서
지리산은 아직도 울고 있었다. 동서 냉전으로 국토가 나뉘고, 강요된 이념으로 민족이 찢긴 이 땅, 이 민족의 아픔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인간 보편의 감정, 휴머니즘이 싹트고 꽃피울 터전이 없다면 이 땅은 얼마나 척박한 세상인가. 거림마을을 떠나며 이성부의 시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이 길에서는 온통 그대 생각에 마음이 나를 떠나 낯선 곳으로만 달려가고 내 몸도 어지러워 안개자락이라도 붙잡아야 한다 산허리 굽이굽이 돌아 끝없이 가다보면 마침내 나타나는 우리네 살림살이 마을에 깔린 저녁 연기 내음 그러나 그대는 돌아와야 할 때 집을 떠나 죽음이 뻔히 내다보이는 길로 들어갔다 내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주저앉고 싶지만 내 정신은 새처럼 온 산골짜기 넘나들며 푸르구나 열여섯 어린 나이에 산에 들었다면 사상보다는 그리움의 키가 커서 더 먼 데 하늘 바라보는 눈망울 착한 한 마리 짐승으로 쓸쓸할 뿐 그대 젊음 써리봉 기슭 철쭉이거나 드러난 나무뿌리로 뒤엉켜 지금 나를 자빠지게 하는 것은 아닌지 무르팍 생채기 피를 흘리면 마음도 돌아와 나를 가득 채우느니 아 우리나라 지리산 서러운 하늘 내 태어난 숨결이구나! - 이성부, ‘정순덕에게 길을 묻다’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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