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내림. 산은 김대우(金大木禹·43)에게 신내림이었다. 신바람이 불면 훨훨 날 듯 좋았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다가도 신과의 관계가 멀어지면 곧 죽을 듯 아파왔다. 멀쩡한 집을 떠나 당집을 차렸다. 한동안 뜻대로 되는 듯하다 점점 엉망이 되어갔다. 그래서 열정이 식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졌다.
신내림을 받은 곳은 포항 내연산이었다. 선배 손에 이끌려 얼떨결에 내연골로 들어섰다. 신들의 거처라는 착각이 일 만큼 기암괴봉이 골을 장식한 내연골에는 이미 신내림을 받고 칼춤 추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분위기에 휩싸여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칼 위에 올라섰다.
고교 2학년 때 눈봉 등정 사진 보고 감동받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5년 입사한 포스코에 고향 선배이자 학교 선배가 있었어요. 저를 무척 아껴주었죠. 입사한 지 1년쯤 지나 그 선배가 산에 가자는 거예요. 한글날이었어요.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갔죠. 기암절벽이 멋졌어요. 그런데 그 바위로 올라가는 거예요. ‘너도 해봐’라 하는 말에 바위에 붙긴 했지만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면서 무서웠어요. 묘하더군요. 등반을 마치고 골짜기를 빠져나오는데 손끝이 짜릿해오는 거예요. 바위를 잡고 긴장했을 때의 느낌이 뒤늦게 온 거죠.”
그렇게 입산하고, 미친 듯이 다녔다. 바위를 탄 지 석 달쯤 지나 앞장섰다. 자신이 생겼다. 이후 그는 밤 11시 근무가 끝나면 오토바이를 타고 달렸다. 그렇게 들어선 곳이 내연골이었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하거나 골 안이 환할 만큼 둥근 보름달이 떠 있거나 홀로 비박하고, 이튿날 날이 밝기 무섭게 바위에 올라붙었다.
“그래 봤자 어려운 데는 하켄에 걸린 슬링 잡고 오르는 에이드 등반이었어요. 그래도 열심히 다녔던 것 같아요. 보경사 진입로에 있는 돌멩이 하나 하나를 다 기억할 정도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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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밀양 백운산 백운슬랩 앞.
- 그가 등반에 한창 빠져들 무렵은, 어려운 데는 확보물에 의존해 오르던 스타일의 등반이 인공보조물의 도움 없이 오르는 자유등반으로 바뀌어가던 시절이었다.
“1987년 가을 내연골에서 전국등반선수권대회가 열렸어요. 이름난 클라이머들이 다 모여들었죠. 정말 명성답게 귀신 같은 솜씨를 보여줬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하켄에 걸린 슬링을 잡아가며 오르는 수준이었어요. 그런데 대회 루트를 만드는데 오히려 박혀 있는 하켄을 뽑아내는 거예요. 그런 루트를 정말 기가 막힐 만큼 절묘한 자세로 오르지 뭐예요.”
그도 대회에 참가했다. 결선에 올랐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결선에서 한계가 드러났던 거죠. 그래도 그때 자유등반의 매력을 발견했어요. 그때까지 해온 등반은 보조물의 도움을 받아서 시간에 구애될 필요가 없었지만 자유등반은 상황에 맞는 정확한 자세를 취해야 해요. 체력의 한계가 빨리 나타나기 때문이죠. 섬세함의 차이인 것 같아요.”
그는 이렇게 자유등반에 심취하면서도 어릴 적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고향인 상주를 떠나 포항공고 2학년에 재학 중 포스코 사보를 보는 순간 가슴이 벅차왔다.
“‘쇳물’이란 사보를 보고 감동을 받았어요. 톱 기사에 사원 한 명이 회사 깃발을 들고 정상에 서 있는 거예요. 눈봉 정상에 선 고상배 선배였어요. 너무나도 큰 감동에 가슴이 쿵쾅거렸어요. 이미 그때 본 흰 산이 제 마음 깊이 파고들었던 것 같아요.”
- 고상배씨는 그에게 어쩔 수 없는 인연이었다. 포스코 입사 후 연수 일정 중 하나가 30km 걷기 극기훈련이었다. 발바닥에 불이 날 즈음 선글라스를 낀 멋진 교관이 눈길을 끌었다. 고상배씨였다. 그런 인연으로 1986년 고상배씨가 몸담고 있는 향로산악회에 들어갔다.
향로산악회 회원으로서 열정적인 활동을 해오던 김대우는 1989년 여러 해 동안 가슴 깊이 간직해온 햐얀 산에 대한 꿈을 이뤘지만 그 등반에서 동료를 잃는 슬픔을 겪었다. 아직 감정의 기복이 심한 23세 때였다. 아이거·마터호른·그랑 조라스로 이어지는 알프스 3대 북벽 완등이 목표였다. 당시만 해도 알프스 3대 북벽은 이름난 클라이머들에게조차 꿈의 대상지였다.
석 달간의 훈련 끝에 나선 원정이었다. 포스코에 근무하던 그는 대장의 집에서 합숙하며 새벽마다 바닷가 모래밭을 달렸다. 체력 강화를 위해 동료 대원을 들쳐 업고 달리기도 했다. 퇴근하면 또다시 웨이트 트레이닝에 전념하고, 밤이면 아이거 북벽 사진을 바라보며 인도어클라이밍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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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왼쪽) 캐나다로키의 혼합벽을 오르려면 드라이툴링 등반은 기본이다. 김대우씨는 캐나다로키 빙벽 등반을 통해 혼합등반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오른쪽) 캐나다로키의 혼합 등반 대상인 하프너 등반.
- 특례보충역으로 포스코에 근무하던 터였기에 해외 여행은 군 미필자에게 더 어려웠다. 우여곡절 끝에 출국 당일 김포공항에서 여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도 즐거웠다. 스위스의 알프스 기슭 마을인 그린델발트에 도착해 첫 목표인 아이거 북벽을 바라보는 순간 만만해 보였다. 그러다 하늘을 날던 헬리콥터가 북벽으로 다가서다 사라지는 모습을 보곤 어마어마한 규모를 깨달을 수 있었다.
등반은 고집스럽게 했다. 남들은 등산열차로 등반 기점에 접근하지만 1년 선배인 조봉용과 함께 바닥부터 걸어올랐다. 때문에 오후가 돼서야 벽에 붙을 수 있었다. 시즌 막판이라 계절 변화가 심했다. 북벽은 안개에 가리기 일쑤였고, 툭하면 눈이 쏟아졌다. 그 신설 때문에 길을 잃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장갑을 잃어버려 예비용 양말을 손에 낀 채 올랐다. 우모복에 침낭 커버로 견뎌내야 하는 밤은 고통 그 자체였다. 무게를 가볍게 하려고 식량을 줄이다 보니 막판에는 건포도와 알사탕조차 아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등반기일이 3박4일에서 4박5일로 늘어나는 바람에 배고픔은 극에 달했다.
그래도 좋았다. 매일 저녁 등반을 마치고 시커먼 거벽에 매달려 그린델발트의 불빛을 바라보면 그렇게 포근할 수가 없었다. 닷새째 오후 두 사람은 아이거 정상에 올라섰다. 무전을 통해 약속한 대로 동기인 강현두와 신종덕이 그린델발트에서 먹을 것을 가지고 올라와 있었다. 두 사람을 만나는 순간 닷새 동안의 고행은 씻은 듯이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첫 원정에서 혈육 같은 산친구 잃어
김중석 대장은 체력과 기량이 뛰어난 김대우를 3대 북벽 완등자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이거 북벽 등반 중 장갑을 흘린 게 결정적이었다. 양말을 끼고 등반을 하기는 했지만 물을 그대로 빨아들인 양말은 보온력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동상에 걸린 손바닥은 허물이 벗겨지고 아려오는 등 등반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다 마터호른 등반 기점 마을인 체르마트에 도착해서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강현두와 신종덕이 등반 파트너로 결정됐다.
“날짜도 잊혀지지 않아요. 사고가 난 날이 서양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13일의 금요일이었으니까요. 사고 예감이 있었던지 체르마트의 게스트하우스 할머니께서 등반을 말리기도 했어요. 두 사람은 회른리 산장에서 12일 새벽 2시 등반에 나섰어요. 첫날 600m 쿨와르 빙벽 등반은 무난히 마쳤어요. 그런데 이튿날 선등에 나선 종덕이가 길을 잘못 들고 만 거예요. 거기서 추락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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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왼쪽) 1989년 합판으로 만든 인공벽에서 훈련 중인 김대우씨. (오른쪽) 아이거 북벽 등반에 성공. 정상에서 향로산악회 깃발을 들고 있는 김대우씨.
신종덕은 60m나 추락했다. 추락 직후 오버행에 매달려 있었으나 헬멧이 깨져나갈 정도로 머리에 큰 부상을 입고 절명한 상태였다. 무전 교신이 이뤄지자 뛰어올라가고 싶었다. 하지만 강현두는 상황이 끝났다며 헬기 구조를 요청해왔다. 아이거 북벽 등반 중 여행객으로 놀러왔던 상업은행 취리히 주재원 덕분에 사고를 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유족들의 의사에 따라 동료의 시신을 화장하고 나자 모든 게 허망했다.
“현두는 자일을 잡고 있던 손목이 추락의 충격으로 부러졌어요. 맨날 부딪치며 살던 놈이 단지 하나에 담겨 있는데 등반 생각이 있었겠어요. 그런데 선배들이 대장은 유골과 함께 들어오고 나머지 대원들은 마저 등반하고 귀국하라는 거예요. 선배들은 산에 대한 도전 과정에서 희생이 따르기 마련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새로 자일을 구해 마터호른 북벽을 오르긴 했지만 그랑 조라스 북벽 등반은 시도도 못했어요. 의욕도 다 잃고 체력도 바닥난 상황이었으니까요.”
귀국 이후 한동안 의욕이 없었다. 남들의 시선이 더욱 힘들게 했다. 산에서 동료를 잃고 자신만 살아 돌아왔으니 죄인이다 싶었다. 그나마 열정적인 강현두가 옆에 있다는 게 큰 힘이었다. 게다가 포스코뿐만 아니라 포항 산악계의 대부나 다름없는 당시 포스코 김용운 이사가 의기소침해 있는 이들에게 “또 하나 준비해야지” 하며 의욕을 불어넣어 주었다.
- 1991년 그는 포스코 원정대원으로 파미르캠프에 참가했다. 당시만 해도 원정대가 목표로 삼은 코뮤니즘(7,495m)은 우리 산악인들에게는 낯선 고산이었고, 구 소련은 개발의 물결로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구 소련 입국 과정에서 등반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이 순조롭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코뮤니즘 등정이란 쾌거를 이뤘다. 그러나 그 등반을 끝으로 고산 등반에 대한 꿈을 접었다.
“고소적응도 힘들었지만 걷기만 하는 등반은 아무런 감동도, 자극도 주지 않았어요. 이런 등반은 내게 아니다 싶었죠. 저한텐 난이도 등반이 어울린다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았어요.”
귀국 후 한동안 평범한 생활이 지속되었다. ‘쇳물’을 보는 순간부터 키워온 고산에 대한 목표를 잃자 의욕도 없었다. 이태쯤 지났을까. 갑자기 머리가 번쩍했다. 스포츠클라이밍이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을 만하다 싶었다. 부산 실내인공암장 바위의 전당을 찾았다. 당시 부산 최초의 실내암장이었다. 한 시간 반 이상 가야 하는 거리지만 틈만 나면 찾아가 맹훈련을 거듭했다. 욕심이 생겼다. 바위의 전당과 같은 실내암장을 포항에다 만들고 싶었다. 재원 마련이 문제였다. 퇴직금이 해결책이었다.
“요즘 포스코 직원들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죠. 저나 강현두나 마찬가지였어요. 한번 해야겠다 마음먹으면 밀어붙이는 성격이니까요. 현두는 그 한 해 전 매킨리 원정을 가겠다고 회사를 그만두었어요. 현두는 거기서 또 헬기를 탔어요. 캐신리지 등반 중 고립돼 있다 구조된 거죠. 헬기 복이 참 많은 친군가 봐요.(웃음) 그리고 저는 이듬해 실내인공암장이란 헬기에 올라탄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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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왼쪽) 자신의 실내암장에서 등반에 몰입하고 있는 김대우씨. (오른쪽) 2005년 포항 인공암장 개막식에서 이인정 대산련 회장에게서 공로패를 받고 있다.
- 포항 죽도동의 신축 건물 지하에 실내인공암벽을 만들고 포항 산악계에서 내로라하는 산 선후배들을 초대해 거창하게 개장식을 열었다.
“포항클라이밍센터였어요. 몇 달간은 그럭저럭 됐어요. 예의상 등록한 선후배들이 40명은 됐으니까요. 석 달쯤 지나니까 한 명 한 명 빠져나가더군요. 회원을 한 명이라도 더 유치하려는 마음에 ‘교차로’ 같은 데에다 홍보도 했어요. 그래도 좋았어요.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맘껏 운동할 장소가 생겼으니까요.”
겨우 세를 얻고 합판에 인공홀드 붙일 정도의 재력으로 시작한 실내인공암장 운영이었으니 결과가 뻔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가 밀리기 시작했다.
“2년도 못 버텼어요. 오늘이 마지막이다 생각하며 암장 문을 나서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더군요. 많이 울었어요. 아내가 아니었다면 그때 서울로 이사 갔을 거예요. 어차피 이렇게 된 거 큰물에서 노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한동안 산을 멀리했다. 먹고사는 일을 해결하는 게 먼저였다. 1995년 12월 포항클라이밍센터 골방에서 살림을 시작한 아내 김인숙(37·요가 강사)씨와 백년가약을 맺은 이후 더욱 생활에 매달렸다.
“사람 마음이 참으로 묘하더군요. 생활이 안정되니까 또다시 인공암벽에 대한 열정이 살아나지 뭐예요. 안 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그래서 제게는 등반이 신내림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는 거예요.”
이름을 걸면 더욱 책임 있게 하리라는 후배들의 충고대로 1997년 김대우암벽교실이란 명패를 달고 실내인공암장을 열었다. 지하와 견줄 수 없을 만큼 환기가 잘 되는 2층이었다. 그런데 몇 달 뒤 자리를 잡을 만하니까 건물 주인이 바뀌고, 임대료도 대폭 인상되었다. 몇 명 안 되는 회원으로 비싼 임대료를 치르는 건 무리였다. 월세가 적당하면서도 눈에 잘 띄는 1층으로 옮겼다. 이번에는 종교단체에서 건물을 구입했다. 버틸 수가 없었다. 그래서 2001년 또 자리를 옮긴 게 지금 위치한 대잠동의 김대우암벽교실이다. 장소를 이전할 때마다 암장을 꾸미는 데 보름 이상 걸리고, 공사비 또한 만만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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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치는 대로 일을 했어요. 발전기 기사로 일하다 발전기 대여업도 하고, 백화점 건물에 이벤트 홍보용 플래카드를 매달기 위해 동아줄에 매달리기도 했어요. 5년 전까지도 홍보물 부착하는 일을 했죠. 그래서 승합차 트렁크에 밧줄이니 윈치니 별별 장비를 다 싣고 다녔던 거예요.”
몇 해 전부터 그는 경관조명 설비업을 하고 있다. 포스코 포항공장 내 굴뚝 외관을 아름답게 장식한 조명이 그의 작품이다. 김대우씨는 이렇게 자신의 생활과 암장 운영에 쫓겨 지내면서도 2005년 국제규격의 인공벽인 포항암벽장 건립에 주도적인 역할도 했고, 2006년부터 지난해 말까지는 경북산악연맹 사무국장으로서 산악계 발전에 이바지해왔다. 청송에서 열린 전국체전과 스포츠클라이밍, 빙벽대회 등을 별 탈 없이 진행시키고, 2007년 청송빙벽대회에는 인공등반 루트를 접목시켜 대회의 격을 한층 드높이기도 했다.
“올해 경북연맹과 포항연맹이 분리되면서 포항연맹 전무이사를 맡게 되었어요. 포항등산학교 강사도 하고 있어요. 제가 가르친 고등학생 중 몇 명은 등산을 특기로 대학에 입학했어요. 전문 클라이머를 배출하고자 하는 꿈은 없어요. 자식 하나 올바르게 키우기도 힘든데 제대로 된 클라이머를 키운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이겠어요? 전문가를 양성한다는 게 부담스럽기도 해요. 클라이밍에 전념하면서 산다는 게 현실적으로 힘들잖아요. 나처럼 힘든 길을 걸을까봐 걱정스러운 거예요.”
그는 얼마 전 캐나다 로키에 다녀왔다. 후배 두 명과 나선 혼합벽 등반 여행이었다.
“18일 일정 중 15일이나 등반했어요. 새벽에 출발해 등반하다 숙소로 돌아오면 캄캄했어요. 캐나다 클라이머들이 세계 최난도 루트라 자부하는 무사시 같은 루트도 등반했어요. 좋은 후배들과 등반한다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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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왼쪽) 김대우암벽교실 참가자들과 금정산 무명리지 등반을 마치고 기념촬영을 했다. (왼쪽에서 세 번째). (오른쪽) 아내 김인숙씨, 맏딸 태희와 함께 내연산에서.
- 짧은 기간의 등반을 통해 깨달은 것도 많았다. 우리나라 빙벽의 한계도 느끼고, 순수 빙벽 등반이 재미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실내인공암장 관리 외에도 경관조명 설치업에 종사하고 있는 김대우씨는 UDU, 해병대를 대상으로도 교육을 하면서 등반대회에도 꾸준히 참가하고 있다.
“좋은 성적을 올리려고 하는 건 아니에요.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으려는 방편으로 대회를 목표로 운동하는 거예요. 저도 왜 이렇게 힘들게 지내는지 모르겠어요. 스스로 가만히 놔두지 않고 채찍질하는 것 같아요. 암장은 이제 제 몸의 일부나 다름없어요. 제가 스포츠클라이밍과 관련된 일을 할 수 있게 해주는 버팀목이자 계속 산에 다니도록 역할을 해주는 것 같아요.”
“신내림 받은 사람이 거부하면 죽을 듯 아프다 하잖아요”
아내 그리고 예쁜 딸 둘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김대우씨는 1989년 알프스 등반 때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무엇보다 악조건에서 도망치려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욱 깊은 수렁에 빠져들기 마련이기 때문에 동화되려 애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청춘을 다 바친 것 같아요. 등반은 긴 시간의 고통과 짧은 시간의 행복을 느끼게 하는 행위인가 봐요. 너무 힘들어요. 그래서 이제 클라이밍에 맛들인 사람들에게는 가벼운 등반을 하라 권하고 있어요. 등반의 좋은 면이 많이 있으니까요. 심성도 올바르게 되고 정서도 안정되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상대가 남이 아닌 자신이고, 자신을 이겨내는 과정이 등반이니까요.”
이제 그에게 등반은 단순한 클라이밍이 아니었다. 그의 암장이 당집이고, 그는 당집을 지키는 박수였다.
“신내림을 받은 사람이 신을 거부하면 죽을 듯이 아프다고 하잖아요. 저만 그런 건 아니겠지만 저도 등반이 제 인생이고 숙명이라고 생각해요. 아직도 하고 싶은 등반이 많아요. 그런데 자꾸만 거미줄처럼 엮여 있는 줄들이 많아 구속되고,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시간만 계속 흘러가는 것 같아 답답할 때가 많아요. 하나씩 버리고 자유로워지는 방법을 연구하는 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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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1년 그는 포스코 원정대원으로 파미르캠프에 참가했다. 당시만 해도 원정대가 목표로 삼은 코뮤니즘(7,495m)은 우리 산악인들에게는 낯선 고산이었고, 구 소련은 개발의 물결로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구 소련 입국 과정에서 등반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이 순조롭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코뮤니즘 등정이란 쾌거를 이뤘다. 그러나 그 등반을 끝으로 고산 등반에 대한 꿈을 접었다.
- 고상배씨는 그에게 어쩔 수 없는 인연이었다. 포스코 입사 후 연수 일정 중 하나가 30km 걷기 극기훈련이었다. 발바닥에 불이 날 즈음 선글라스를 낀 멋진 교관이 눈길을 끌었다. 고상배씨였다. 그런 인연으로 1986년 고상배씨가 몸담고 있는 향로산악회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