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변한 동강의 모습
“이번 주에 좀 내려와야겠다.”
늘 이런 식이다. 본인 하고 싶은 말만 하면 그걸로 끝이다. 애당초 상대의 대답을 바라고 자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 말에 또 쪼르르 내려가는 나도 바보 등신이다. 그런데 안 내려가면 또 어쩔 건가. 아버지 없이 할아버지 혼자서 젊은 사람들을 상대하며 민박 일을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올해 초 신정(新正)을 새고는 며칠 안 되어 짐을 싸 서울로 향했다. 입학 즈음에 올라가면 되지 미리 가 방값만 축낸다는 아버지의 잔소리를 짜증스럽게 받아치고는 그대로 집을 나와 버렸다. 언제부터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던가. 영월 깡촌에서 아침저녁으로 부지런을 떠는 아버지도 동강도 동강상회도 모두 싫었다. 그래서 나는 죽을 둥 살 둥 공부에 매달렸다.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가는 것만이 되도록 빨리 그곳을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머리가 그리 나쁜 편이 아니어서 언제나 결과가 좋았다. 반년이 넘도록 한 번도 내려가지 않았다. 한 달 전쯤 종강을 했는데도 내려갈 마음이 도무지 들지 않았다. 며칠 전 걸려온 아버지의 전화만 아니었어도 어쩌면 이번 여름을 구렁이 담 넘듯 은근슬쩍 넘겨버렸을지도 모른다.
안채는 큰 방 하나에 작은 방이 두 개로 민박집으로 쓰고 바깥채는 작은 방이 하나 딸린 상점. 그곳이 내가 나고 자란 동강상회다. 동강상회가 그곳에 있은 지는 아주 오래되었다. 내가 나기도 전부터라고 했으니까. 처음에 안채는 민박집이 아니라 그냥 세를 주어 주로 탄광촌 인부들이 살곤 했었는데 사람들이 하나 둘 영월을 떠나가면서 민박집으로 변했다. 몇 년 전부터는 래프팅을 하러 오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나면서 민박 장사도 꽤 할 만해졌다.
하지만 그마저도 나는 싫었다. 무리 지어 놀러 오는 사람들이 조용히 놀다 갈리 만무했고, 도시에서 왔다는 꼴값으로 모양을 부리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래프팅만 해도 그렇다. 누군가는 목숨을 바쳐 다녔을 그 물길이 그들에겐 한낱 놀이거리에 불과해진 것이다.
할아버진 팔당에 댐이 들어서면서 뗏목일을 그만두셨지만 그전까진 20년이 넘게 뗏목일을 하셨던 우리나라 마지막 뗏목꾼이시다. 난 할아버지의 거칠고 무뚝뚝한 손을 무척 좋아한다. 그 손으로 머리를 쓸어주시며 “원준아”하고 부르는 순간이 아득하게 좋았다. 나는 어릴 적 자주 열이 오르는 편이었는데, 그러면 할아버진 늦도록 내 머리맡에서 부채질을 해주시며 나지막하게 아라리 소리를 들려주셨다. 그러면 온몸에 지르르 퍼진 미열도 그만 가라앉는 듯했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뗏목꾼이 그 자리를 떠나고 잊혀져 가던 동강에 또다시 에너지가 넘쳐흐른다.”
그렇게 시작된 옛이야기
아른아른 피어오르는 모기향이 영월 밤공기를 타고 흐르며 묘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러면 그 익숙한 풍경이 낯설어지고 귓전에서 왕왕대던 풀벌레 소리도 아득하게 멀어지고 만다. 이게 영월의 여름이다. 사람을 희미하게 만들어버리는 아득함.
“야, 아까 급류 탈 때 기분 죽이지 않았냐?”
아스라이 출렁이던 달콤한 공기가 깨졌다. 안채에는 오늘 낮에 민박을 하러 온 무리가 래프팅을 마치고 난장을 치고 있었다.
자꾸만 울화가 밀려왔다. 남자 둘 여자 둘이 아까부터 안채 평상에서 한바탕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 모양새를 보는 것이 처음도 아니고 모르는 척 지나치고 말 것을 무엇에 그렇게 화가 났는지. 아무렇게나 침을 뱉고 시끄럽게 노는 꼴이 거슬려 계속 성난 염소 같은 얼굴로 쳐다봤다. 그새 혀가 굳어가는 소리로 이죽거리는 꼴을 보니 괜스레 부아가 치밀었다.
“겨우 그걸 타고, 꼴값은.”
“뭐야? 어이, 거기 나 보고 한 말이야?”
“귀는 밝네.”
술기운이 뻗친 남자가 단 번에 내 멱살을 잡았다. 훅 내뱉는 술냄새에 나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화가 치민 남자가 뾰족하게 한 마디를 뱉었다.
“깡촌에서 민박이나 하는 주제에.”
순간 머리가 새하얘졌다.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잡아 끌었다. 할아버지였다. 맥 빠진 한 숨이 입에서 새어 나왔다. 할아버진 남자에게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를 했고,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자꾸만 눈 끝에 빗물 같은 것이 맺혔다.
“굽이굽이 우리네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동강줄기엔
지금도 아련한 추억이 방울방울 맺혀있다.”
아버지가 동강상회로 들어선 것도 그쯤이었다. 할아버지가
젊은 남자에게 열심히 허리를 굽히고 내가 그 옆에서 멀뚱히
자리를 지키고 서있을 즈음.
“무슨 짓이야! 아버지 동강축제 때문에 바빠서 할아버지 도와
일 좀 하랬더니, 이게 대체 무슨 짓거리야? 집에 들어설 때부
터 부은 얼굴이더니 이러려고 온 거냐?
“아까 하는 말 못 들었어요? 깡촌이랍니다. 깡촌에서 백날 축
제해봐야, 깡촌축제 밖에 더 돼요?”
“뭐, 이놈아? 대체 너 언제 철들 거냐?”
입술을 질끈 씹으며 그 길로 집을 뛰쳐나왔다. 내가 잘못했다
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결단코 듣고 싶지 않
은 말이었다. 영월이, 동강이, 동강상회가 깡촌의 별 볼 일 없
는 곳이라도 그건 나만 할 수 있는 말이지 남들 입에서 듣고
싶진 않았다. 도시 사람들에게는 더욱. 내 귀로 그 말을 듣는
순간, 그것이 진실이 되고 말 것 같아서 언제나 두려웠다.
새카만 동강을 보고 있자 더 우울해졌다. 막걸리 한 병을 들
고서 할아버지가 곁에 앉았다. 꼴꼴 사발에 막걸리가 채워졌
다. 할아버진 한참을 말없이 사발만 비우셨다. 그 사이 내 마
음도 차츰 비워졌다. 그리고 또 한참.
“장관이었지. 10여 대가 넘는 떼가 강을 헤치는 모습이…….
거친 여울을 죽을힘을 다해 헤치고 나면 그때부턴 여유가 조
금씩 생겼지. 그러다 나루에 가까워오면 색주여인들이 그 모
습을 보고 달겨들곤 했다.”
할아버지가 희미하게 웃는다. 문득 궁금해졌다. 수십 년 전
저 동강엔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막걸리 한 사발을 쭉 들이
켰다. 이야기가 솔솔 새어나갈 것만 같은 막걸리의 달큰한 끝
맛에 뒤통수가 은근히 달아올랐다. 할아버지의 아라리 노랫
가락이 동강 위를 둥둥 떠다녔다.
“목숨을 걸고 동강의 여울을 헤치던 뗏목꾼의 그래질 대신,
지금은 래프팅을 즐기는 현대 사람들의 보트가 그 풍경을 대신하고 있다.”
“떼돈 번다’의 유래
강물이 며칠 사이 허벅다리까지 차올라 있었다. 원도는 “이번엔 힘 좀 들겠는데’라고 속으로 한번 내뱉고는 그 길로 돌아서 김씨에게로 향했다. 오늘은 나가야 한다. 장맛비로 뗏목 띄우는 것이 쉽지 않아 며칠 미루었지만 잠시 비가 그친 지금이 뗏목을 띄워 격한 여울을 넘기에 적기이다. 목상 어르신의 채근을 더 이상 모른 척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또 이렇게 물이 불었을 땐 서울까지 보름이던 것이 열흘이면 족하다.
“원도야, 오늘부턴 문씨 빼고 둘이 타자.”
원도가 아직 떼를 타는 것이 익숙지 않았던 처음엔 3인 1조로 뗏목을 탔지만 이젠 원도가 어느 정도 이력이 붙었고 하니 둘이 타도 너끈하다는 것이다. 처음 원도가 뗏목일을 시작하게 된 것은 김씨 덕택이다. 원도에게 뗏목을 엮는 법, 띄우는 법에 그래질까지 가르쳐준 것도 모두 그다. 형처럼 아비처럼 젊은 원도는 김씨를 따랐다.
원도가 처음 떼를 탄 것은 스무 살쯤이었다. 집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지만, 강원도 산골 농사로는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기도 어려웠다. 그때 김씨가 떼를 타면 목돈을 손에 쥘 수 있다고 일러주며 원도에게 일을 가르쳤다. 뗏목을 엮어 동강과 남한강을 타고 서울 마포나루까지 한 번 다녀오면 운행삯으로 소 한 마리 값은 너끈히 건질 수 있었다. 해방 전에는 군수월급보다도 뗏목꾼들 1회 운행삯이 훨씬 많았으니 오죽했으면 “떼돈 번다’는 말이 뗏목일에서 비롯되었을까.
김씨가 둘이서 타자고 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여태 셋이 타며 운행삯을 셋으로 나누었는데, 얼마 전 원도의 아내가 아이를 가진 데다 몸이 약해 잘 먹여야 한다며 마음을 쓴 것이다. 더군다나 색주가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김씨로서는 문씨와 어울려 돈을 색주가에 퍼주는 것이, 딴짓거리엔 관심도 없는 원도에게 새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매년 같은 자리에 피어나는 소박한 민들레, 멀리 퍼져나가는 민들레 홀씨처럼
동강에서 시작한 뗏목꾼들의 꿈은 새로운 희망이 되어 동강줄기를 타고 흐른다.”
그래도 버리지 못한 강
셋은 황새여울, 된꼬까리 등 이른바 “골안떼’라고 불리는 난관을 돌파하고 흐름이 유장한 물줄기에 들어서 팔당 광나루까지 오면 꼭 하루씩 쉬어 갔다. 김씨는 곧장 자주 들르던 색주가로 향하곤 했다. 원도는 그곳에서 더운 두부와 막걸리 한 병으로 배를 채우고 나면 언제나 미련 없이 일어섰다. 뗏목일을 시작하고는 항상 그랬다. 색주가는 아찔한 분냄새와 술냄새가 섞인 그곳 특유의 냄새로 온 몸을 언제까지고 붙들고 늘어질 것만 같았다. 어찌된 것이 그곳만 시간이 느릿느릿 움직이는 듯 했다. 사십이 다 되도록 장가를 들지 못한 김씨에게는 그저 자기 한 몸 밖엔 없었다. 그래서 김씨는 그곳이 좋았고, 강을 떠나서는 살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몸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는데 보름 넘게 집을 비우는 것이 불안해서인지, 아내가 계속 원도에게 가지 말라 보채었다. 꿈자리가 뒤숭숭했다느니 별소릴 다하는 것이 여느 날과 다르게 굴었다.
“내 금방 다녀올 테니 몸조심하고. 메밀이랑 콩 좀 싸주고. 그거 팔아서 자네 분가루 사올 테니까. 응?”
원도는 아내를 겨우 달래어 집을 나섰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던가 보다. 한 해에 서너 명은 강에서 송장을 치렀다. 아무리 노련한 뗏목꾼이라도 한번 급류에 휘말려 중심을 잃으면 빠져나올 재간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강을 버리지 못했다. 눈 깜짝 할 사이의 일이었다. “대라! 틀어라! 박아라!” 목이 찢어져라 외쳤건만 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김씨는 이미 물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여울을 빠져나오자 온 몸은 후줄근하게 젖었고 목구멍에선 단내가 올라왔다. 시커먼 암초에 부딪쳐 떼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있었고 그 자리에 있던 김씨 역시 보이지 않았다. 그 모양새를 보자 원도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몇 날 며칠을 입을 다문 채 집에서 나오지 않던 원도는 다시 떼를 탔다. 몇 달 후 원산이 태어났고, 원산이 커서 중학교를 다닐 때까지 원도는 떼를 엮고 띄우고 그래질을 했다. 물론, 여울에 빠져 죽지도 않았다.
동강에 새겨진 삶의 흔적
한여름이어도 영월의 새벽은 한기가 느껴진다. 얇은 이불을 가슴팍까지 끌어올리다 말고 벌떡 일어났다. 어젯밤 할아버지의 마지막 말이 계속 귓전에서 맴돌았다.
‘내가 어떤 맘으로 떼를 탔는지, 네 애비는 안다.’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대문이 갸웃이 열려있는 것이 아버지가 나가시고 집에 안 계신 게 틀림없다. 동강축제 때 마을사람들이며 외지 사람들을 위한 뗏목타기 시연을 위해서 떼를 엮고 계시겠지. 아버지가 어디서 떼를 엮고 있을지 대충 짐작이 갔다. 발걸음을 재촉했다.
멀리 아버지가 보인다. 커다란 연꽃 봉오리가 부풀어 오르듯 마음이 이상하게 두근거렸다. 떼를 엮고 있는 아버지 곁으로 가 말없이 일을 도왔다. 나를 스윽 한 번 보시더니 다시 떼를 엮는다.
“더 자지 않고.”
뚝뚝한 음성에 나에 대한 걱정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안다.
굽이굽이 고단한 삶의 흔적을 새기며 떼를 실어 나르던 1,200 리의 물길. 격렬한 물길 속을 헤치며 할아버지가 보셨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버진 할아버지의 무엇을 이해하셨던 걸까. 사람들은 언제나 사물의 겉만을 보고 지나치기 마련이다. 속을 들여다보기에 우리들의 마음은 너무나 편협하니까. 그토록 오랫동안 아버지에게 화가 나 있던 이유가 뭐였을까. 아마도 고요해 보이기만 한 동강 곁에서 나도 언제까지고 조용하기만 한 삶을 살진 않을까, 두려웠었기 때문이겠지. 그러나 동강은 결코 고요하고 지루한 곳이 아니었다. 그것을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다.
강은 언제나 사람을 풍요하게 했다. 마른 땅에 꽃을 피우고 나무를 크게 하며 곡식을 여물게 했다. 흐르고 또 흐르는 강줄기 덕에 이곳에서 저곳으로, 저곳에서 이곳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음까지 흘렀다. 그래서 강엔 언제나 애잔한 향기가 흐른다.
*그래 : 뗏목의 앞뒤에 매다는 노
*목상 : 뗏목의 실제 주인
<주변관광지>
* 영월 별마로 천문대 033-374-7460
* 영월 곤충박물관 033-374-5888
* 요선정, 요선암 1577-0545
* 법흥사 033-374-9177
* 장릉(영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1577-0545
* 청령포 033-370-2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