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백제의 문화와 유적․유물
장성지역에 백제의 영향력이 미치기 시작한 것은 일러야 근초고왕대 말년(369년)이었다. 그나마 토착세력이 온존하는 중의 공납제적 지배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당시 백제의 문화가 장성에 끼칠 만한 영향이란 거의 없었다고 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듯싶다. 담로제에 의한 간접적인 지방통제에 머물렀던 웅진시기(475~522)에도, 장성지역에 대한 백제의 문화적 영향력은 그다지 보잘 것이 없었을 법하다. 적어도 성왕이 사비로 천도하고(538) 또한 방―군―성체제에 의해 지방을 직접 통치할 무렵쯤 되어야, 비로소 문화적인 측면에서의 그 영향이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게 되지나 않았을까 여겨지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우선 백제의 문화를 사상적인 측면에서 대략 개괄한 다음, 장성지역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백제시기의 유적․유물을 뒤에서 일괄하여 더듬어 보도록 하겠다.
백제는 일찍부터 중국과 교류하는 가운데 고도로 세련되면서도 우아한 문화를 발달시켰다. 신라의 초기사원이 백제기술로 건축되는 등 신라의 문화에 자극을 주었고, 멀리 바다 건너 일본에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중국 남조문화를 받아들여 다양하고 세련된 귀족문화를 발전시킴으로써, 삼국시기 우리나라의 문화가 성장 발달하는 데 불가결한 미개척의 분야를 담당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백제에는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한문이 보급되어 있었다. 근초고왕대에는 박사 고흥(高興)에 의하여 역사서인 서기(書記)가 편찬되는 정도였다. 유교 또한 높은 수준이어서, 5경박사를 두고 경․자․사를 읽었다고 전한다. 성왕 때 양나라에 표를 올려 모시박사(毛詩博士) 혹은 강예박사(講禮博士)를 구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유교에 대한 욕구가 매우 컸음을 알 수가 있다. 또한 백제는 유교를 일본에 전파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여, 한성시기에 아직기(阿直岐)와 왕인(王仁)이 일본에 건너가 한학과 유학을 전하였다. 또한 무령왕대에는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와 고안무(高安茂)가 일본에 파견되었으며, 성왕대에는 일본의 요청에 따라 다시 오경박사인 왕유귀(王柳貴)를 일본에 보내었다.
백제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침류왕 원년(384)이었다. 동진으로부터 인도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와서 불교를 전하였는데, 왕이 그를 맞아 궁중에 모시고 경배하였으며, 이듬해에는 한산에 사원을 세워 승려 10명을 거처하게 하였다. 호국사찰로서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는 등 호국불교로서의 성격이 강했던 백제에서는, 신라와 마찬가지로 계율종(戒律宗)이 성행하였다. 계율을 강조함으로써 인심을 중앙으로 귀일시키고자 하는 시대적인 요청에 따른 일이었다. 미륵불광사사적에 의하면, 겸익(謙益)은 성왕 4년(526) 인도에까지 가서 율부(律部)를 깊이 연구한 다음 범본5부율(梵本五部律)을 가지고 돌아와, 성왕의 명을 받아 국내의 명승 18명과 함께 율부 72권을 번역하였다. 그리고 담욱(曇旭)과 혜인(惠仁)은 그에 대하여 율소(律疏) 36권을 저술하였다. 그가 성왕의 열성적인 후원을 받았다든지, 혹은 성왕 스스로가 비담신율서(毘曇新律序)를 지어 계율을 힘써 행할 것을 강조했던 점 등으로 미루어, 겸익이 성왕의 국력 회복 운동에 크게 봉사했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계율종이 성행함에 따라, 백제에서는 자연히 율학도 발달하였다. 그리하여 위덕왕 35년(688)에는 일본의 대신(大臣 : 蘇我馬子)이 백제의 승려를 청하여 수계의 법을 묻는 동시에, 선신니 등을 백제로 보내어 이를 배워간 일까지 있었다. 또한 백제에서는 ‘공’을 내세우는 삼론학의 연구도 활발하였다. 무왕 2년(601) 일본에 건너간 관륵(觀勒)은 삼론학의 대가로서 일본의 초대 승정이 되었으며, 같은 시기에 혜현(慧顯)은 삼론의 강설을 듣고 법화경의 독송에 힘을 기울여 이름을 떨친 결과 중국에 건너가지 않고서도 속고승전 등에 그 전기가 수록되었다. 무왕 10년(609)에 도일한 도장(道藏)은 같은 중관파의 성실론소 16권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이상과 같은 백제의 학문이나 사상․종교가 장성지역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는 잘 알 수가 없다. 삼국시기 비교적 널리 보급되었던 것으로 알려진 불교마저, 노령산맥 이남지역에서는 아직까지 관련 유물이 발견되지 않고 있는 형편이다. 장성지역에 대한 백제의 문화적 영향이라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고분과 토기류 등에서 겨우 그 편린을 찾아 볼 수 있는 정도가 아닌가 싶다.
장성의 여러 고분 가운데 백제시기에 축조되었음이 공인된 최초의 것은 영천리 고분이었다. 장성읍 영천리 산 152번지 구산마을 북쪽 구릉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보해양조주식회사 장성공장을 건설할 때 부지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1986년에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 결과 6세기 후반에 축조된 백제시기의 고분으로서, 지름 17m 높이 3m의 원형분임이 밝혀졌다. 출토된 유물로는 금제 귀걸이 1쌍, 구슬 38점, 뚜껑 접시, 굽다리 조각 등이 있다. 상무대의 장성 이전과 관련하여 1992년에 발굴 조사된 삼서면 학성리의 고분군도 백제시기의 것임이 확인되었다. 모두 19기를 발굴하였는데, 출토된 관못과 방추차 및 토기류 등으로 미루어 백제시기인 6~7세기대의 고분들로 밝혀졌다.
한편 지금까지의 보고 자료에 따르면, 장성지역에는 삼국시기 유물산포지가 6군데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성읍 청용마을에서 수습된 뚜껑접시 4점을 비롯하여, 남면 마령리 시정마을의 격자문․승석문․파상문 등의 문양과 투창이 있는 기대편 및 고배편, 동화면 서양리의 질그릇 단지 2점과 삼족토기 4점, 북이면 백암리 백암마을의 삼족토기와 곡옥, 북이면 만무리 만무마을의 세형동검과 굽다리접시․구멍단지․투겁창․말방울, 그리고 북이면 달성리 밀등의 뚜껑접시 1점과 기대편 등이 그것이다.
그밖에도 장성의 고읍치(古邑治)와 진원현(珍原縣)․삼계현(森溪縣)의 읍성지(邑城址)를 위시하여, 벽오산성(碧梧山城)과 망점산성(望岾山城) 및 이척산성(利尺山城)․삼성산성(三聖山城)․고성산성(古城山城) 등이 백제시기의 유적으로 추정된다는 보고가 있다. 그러나 문헌이나 혹은 발굴 조사에 바탕하여 확실한 증거를 제시한 것은 아니어서, 간단히 단정지어 말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지금까지 백제시기와 관련되는 장성지역의 유적과 유물을 살펴 보았다. 극히 영세한 데다 그 내용마저 그다지 보잘 것이 없는 수준의 것임을 확인한 셈이다. 그나마 본격적인 발굴 조사조차 별로 이루어진 적이 없어, 백제시기의 장성지역을 연구할 만한 유적과 유물 자료는 거의 없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삼국 내지 백제시기의 장성을 알 수 있는 문헌상의 기록이 전무한 상황에서,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라 할 물질적인 증거마저 체계적으로 수집 정리되어 있지를 않은 것이다. 유적과 유물에 대한 좀더 적극적인 관심과 투자가 요구되어 마지 않는다 하겠다.
(장성군청 홈페이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