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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삼연, 수연산 석수암에서 의병을 일으키다
홍순권(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기우만의 장성의병이 해산된 이후 기삼연은 장성에 은거하면서 새로운 기회를 엿보았다. 그는 1896년 장성 거의에 함께 참여했다가 흩어진 동지들과 뜻있는 인사들을 자주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여 시국에 관하여 의논하였다. 그러한 와중에 그의 집에는 화약을 구하는 사람, 실탄을 구하는 사람, 말, 창, 칼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졌다. 이를 눈치 챈 장성 관아에서는 기삼연에게 국법을 어기는 일은 하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하였다.
1902년 2월 8일은 기삼연의 막내딸이 시집가는 날로 하남 마을이 떠들썩하였다. 보룡산(步龍山) 중턱에 자리 잡은 기삼연의 집 큰 마당에는 널따란 차일이 쳐지고 많은 하객이 몰려들었다. 정오 쯤 신랑이 당도하여 대문 안으로 들어서고, 이제 막 혼례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대문 밖이 소란하더니 갑자기 진위대 군사가 기삼연의 집에 들이닥친 것이다. 군사를 지휘한 사람은 전주 진위대장 김한정(金漢鼎)으로 관찰사 조한국(趙漢國)의 명령을 받고 기삼연 선생을 모시러 왔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기삼연은 딸이 시집가는 경사 날 전주감영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가 전주 진위대에 의해 체포된 혐의는 1894년 갑오농민전쟁 당시 동학의 우두머리였던 김문행(金文幸)이란 자와 통모(通謀)하여 반정부운동을 꾀하였다는 것이다. 영학당과 동학당에 이어 활빈당의 출현으로 정국이 시끄러울 때였던 만큼 과거 동학이나 의병에 가담했던 자에 대한 관의 감시가 끊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이 사건은 두 사람이 편지를 주고받는 단계에서 기밀이 누설되었다. 이 사건의 내막에 대해서는 1903년 2월 평리원 재판장 이남희(李南熙)가 법부대신 이재극(李載克)에 보낸 ‘피고 김문행의 안건’에 대한 질품서(質稟書)에 그 내용이 비교적 자세하다. 그 요지는 아래와 같다.
첫째, 피고 김문행을 심문였더니 그는 1896년 호남 유림의 소수(疎首 상소인의 우두머리)인 기우만과 영남 유회(儒會)의 소수인 노인구(盧仁球)가 개최한 장성 모임에 참가한 자이다.
둘째, 김문행의 자백에 의하면 그는 이후 어떠한 정치적 활동도 하지 않았으며, 단지 체포되기 전 기삼연으로부터 복수거의(復讐擧義), 즉 왜적을 복수하기 위해서 의병을 일으키자 라는 내용의 서신을 받았으나, ‘지금은 망동해서는 안된다.’는 취지로 답장을 보냈다.
셋째, 평리원에서 전주 진위대에 알아본즉, 피고 김문행은 1894년 금구 및 태인 지방에서 벽보를 붙여 백성을 선동한 인물이었다.
넷째, 전라북도 태인군의 보고에 의하면 김문행은 동학교도로 갑오농민전쟁 당시 김개남 휘하의 대접주(大接主)였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평리원 재판장은 김문행에 대해서 태(笞) 1백에 종신징역을 법부대신에게 청구하였다.
김문행과 함께 연루된 사건으로 체포된 기삼연은 전주로 끌려가 전주옥에서 10여 일 동안 머물다가 서울 평리원으로 옮겨갔다. 평리원은 한말의 재판소로 1895년 의금부를 고등재판소라 고쳐 부르다가 1899년 평리원으로 개칭하였다. 장성의 기삼연이 평리원에 이송되었다는 보고는 평리원장 이용태에게 곧 바로 전해졌다.
이용태는 갑오농민전쟁의 발단이 된 고부 농민봉기(고부민란) 때 장흥부사로 있으면서 안핵사로 파견되어 사건을 수습하던 과정에서 동학교도를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봉기 가담자를 무차별적으로 처벌 학살하여, 이른바 3월 무장 봉기(제1차 농민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인물이었다. 그는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태리 프랑스 등 5개국 공사관의 참사를 지냈던 인물로 기삼연과는 평소 잘 아는 사이였다고 한다.
기삼연이 평리원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관에서 죄수들의 머리를 깎으려 하였다. 그러나 옥리가 기삼연의 머리를 깎으려 하자, 그가 ‘머리카락 대신 목을 베라’고 꾸짖으며 저항하는 바람에 옥리는 그의 머리를 깎지 못했다. 이 일이 평리원장인 이용태에게 알려진 직후 얼마 안 되어 기삼연은 풀려났다.
기삼연이 출옥할 수 있었던 데는 평리원장 이용태의 도움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실제 내막은 명망 유생으로서 기삼연의 신분과 장성 지역사회에서 기씨 가문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 등을 감안하여 방면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김문행에 대해서는 이미 8~9년이나 지난 갑오농민전쟁 전후의 일을 가지고 죄목을 붙여 중벌을 내렸다.
오준선이 쓴 <의병장 기삼연전>에는 기삼연이 1896년 의병 해산 이후 동지들과 비밀리 거사를 도모하다가 적에게 누설되어 전주로 잡혀 간 일이 있다고 했는데, 이는 바로 위 사건을 두고 한 말이다. 기삼연이 유생이면서도 동학에 대해서도 우호적으로 접촉했기에 관의 감시망에 포착된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기삼연은 평리원 감옥에서 풀려 난 뒤 곧장 장성의 고향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수개월 동안 떠돌이 방랑생활을 하였다.
기삼연이 평리원 옥에 갇혔다가 풀려나올 즈음 한반도의 정세는 날로 급변하였다. 몽금포 사건 이후 러시아와 일본 간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1904년 2월 일본의 선제공격으로 러일전쟁이 터지고, 한반도는 일본군의 군화와 말발굽에 의해 주권이 유린되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그 여세를 몰아 고종황제의 재가도 받지 않은 채 이른바 을사오적을 앞세워 1905년 11월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이를 흔히 ‘을사늑약’이라고 한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일제의 보호국이 되어버린 대한제국은 이제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나 다름없게 되었다.
을사늑약의 소식이 전해지자 일제의 국권 침탈에 분노하며 을사오적을 규탄하는 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애국적 유생들과 전직 관리들의 상소가 조정에 빗발쳤다. 그 중에는 78세의 노구를 이끌고 상경하여 상소를 주도하였던 전 좌의정 조병세와 시종무관장 민영환 등이 있었다. 두 사람은 결국 우국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고 말았다. 이들 외에도 전 참판 홍만식, 전 참판 송병준(宋秉濬) 등 수많은 인사들이 잇달아 분노 끝에 자결을 택하였다.
상소운동과 자결 등으로 반일감정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러일전쟁을 계기로 재기한 의병들의 항쟁은 을사늑약으로 인하여 더욱 확산되었다. 1906년 3월에는 경북 영덕에서 평민의병장 신돌석이 의병을 일으켰고, 그 해 5월에는 전 참판 민종식이 충남 홍산(鴻山)에서 행동을 개시하여 홍주성에 입성하였다. 민종식의 뒤를 이어 최익현이 전북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강회를 열고 거의하였다. 민종식 의병부대는 홍주성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배하여 흩어졌고, 최익현 의병부대 역시 순창에서 전주 및 남원진위대에 포위되어 진용을 해산하고 말았다.
민종식과 최익현 같은 명망가들의 의병 봉기가 실패로 끝난 다음에도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일어나 항쟁을 멈추지 않았다. 앞서 언급했듯이 호남에서는 그 해 11월 전 주사 백낙구가 고광순, 이광선 등과 공모하여 구례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곧 체포되었다. 이어서 12월에는 남원에서 양한규가 봉기하여 진위대를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다. 이듬해 1907년 1월에는 창평에서 고광순이 ‘창평의진’을 결성하였다.
방랑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기삼연은 그동안의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을사늑약 있기 얼마 전 은밀히 일을 도모할 목적으로 일본인과 관가의 눈을 피해서 거처를 송계(松溪)로 옮겼다. 송계는 수연산(隨緣山) 기슭의 산골로 낮에도 산짐승이 나타날 정도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현재 장성군 서삼면 축암리이다.
수연산 송계로 거처를 옮긴 기삼연은 낮에는 저자에 나아가 술꾼 행각을 벌려 관아와 경찰의 눈을 속이면서 ‘일심계(一心契)’를 조직하여 김용구 등과 은밀히 거사를 논의하였다. 이와 동시에 뜻을 같이 할 사람들을 모았다. 거사를 위해서는 사람도 필요했지만 무엇보다 적을 무찌를 수 있는 병기와 군량미가 충분히 확보되어야만 했다.
특히 총을 수집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던 중 종손(從孫)인 형도(衡度)의 사냥총까지 빌렸다. 형도가 기삼연에게 내준 총 가운데는 관아에 신고된 것도 있었다. 이 일이 있은 뒤 얼마 안 되어 관에서는 신고한 총의 관가 유치 명령을 내렸으나, 형도는 총을 분실하였다고 거짓 보고하였다. 이 일로 그는 일본군에게 끌려가 총의 소재를 묻는 일본병사으로부터 독한 고문을 당하였다고 한다.
기삼연은 총기를 수집하는 일 이외에도 믿을 만한 제약사로 하여금 화약을 직접 제조케 하고, 대장간을 꾸려 실탄을 제조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또 중형인 양연과 전 군수 이용중(李容中) 등으로부터 막대한 군자금을 얻어냈다. 당시 이용중은 기삼연의 거사 계획을 알고 선뜻 9백 냥의 거금을 내놓았다고 한다. 당시 쌀 한섬에 8냥이었다고 하니 적지 않은 액수임을 짐작할 수 있다.주1)
주1) 이 부분의 내용은 김동수, <의병열전>, 《광주일보》 1976년 12월 30일자의 내용을 참조한 것이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이용중은 고종 26년(1889) 12월 해남 현감에 오른 것으로 되어 있다.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
거사 준비가 상당한 정도 진척되자 기삼연은 우선 장차 스스로 의병을 일으킬 것임을 고하는 상소를 고종황제에게 올렸다.주2) 글의 내용은 오늘날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올바른 인재 등용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자신이 의병을 일으키려는 것은 사대부로서 나라의 위급한 상황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부득이하게 취하는 조치임을 역설하였다. 동시에 그는 오늘날의 위기에 대한 임금의 책임 또한 통렬히 지적하였다.
주2) 첩황(貼黃)이 첨부된 이 상소는 작성 일자가 명백하지 않다. 다만, 상소 내용 중에 “폐하께서 위에 오르신지 40년에.....”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1907년 7월 고종의 강제 퇴위가 있기 직전에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사태는 더욱 급박해지고 있습니다. 강토를 돌아보면 이것이 누구의 땅입니까? 아! 슬프도다. 이 강산은 단군· 기자의 옛 터전입니다. 국가는 조종(祖宗)의 홍업(鴻業)입니다. 폐하께서 앞 성인의 옛 물건을 가지셨고, 선조의 대업을 이어서 지키셨는데 하루아침에 버리는 것은 참으로 무슨 마음이옵니까? 혹시 폐하께서는 오늘 국가의 형편이 사람의 잘못이 아니고 운수의 소관이라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시어 구차스럽게 하루라도 임금의 자리를 누리실 뿐이옵니까?”
이처럼 기삼연이 본격적인 의병항쟁을 위해서 거병 준비를 진행하고 있을 즈음 일제는 1907년 7월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곧 이어서 일제는 8월 1일을 기하여 대한제국 군대마저 강제로 해산하였다. 군대해산 과정에서 상당수의 군인들이 총부리를 일본에 돌리고 저항하였다. 이들 해산군인들은 각지의 의병부대와 협력하면서 활동하다가 점차적으로 반일의병부대의 항쟁 대열에 합류하였다. 물론 기삼연의 거의는 군대해산 이전부터 오랫동안 계획된 것이었다.
1907년 9월 29일(음력 8월 9일) 기삼연은 마침내 수연산 중턱 석수암에서 수백 명의 동지들과 함께 ‘의를 들어 적을 토벌할 것(擧義討賊)’을 맹세하고 의병봉기의 횃불을 올렸다. 의병부대의 명칭은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라고 정하였다. 수연산은 영광, 장성, 고창을 경계로 한 산이다. 기삼연이 수연산을 거병의 본거지로 삼은 것은 이곳이 병력을 운용하기에 용이했기 때문이었다.
2. 고창 문수사에 진을 치다
홍순권(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장성 수연산에서 기삼연이 또 다시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듣고 뜻 있는 선비와 우국지사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대한매일신보사 여러분에게>라는 글에서 기삼연이 밝힌 바로는 그가 수연산에서 거의한 날자는 정미년(1907) 음력 8월 9일(양력 9월 16일)이다.
그런데 후은(後隱) 김용구(金容球)가 쓴 <<의소일기>> 정미 8월 8일(음력) 기사에는 “성재와 함께 나라를 찾고 원수를 갚고자 동맹하여 거의할 것을 하늘과 땅에 고하고 피를 마셔 함께 맹세하였다”고 되어 있다. 김용구는 기삼연과의 약속에 따라 음력 8월 11일 영광에서 별도의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거의하였다.
이를 종합해 보면, 8월 9일 기삼연이 먼저 호남창의회맹소의 결성과 동시에 수연산에서 거의하고, 이어서 김용구가 영광으로 돌아가 8월 11일 별도의 의병부대를 조직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한 8월 9일 수연산에 모여든 의병이 무려 5백 명에 이르렀다. 이 날 호남창의회맹소 대장으로 추대된 기삼연은 자신의 거의 사실을 전국에 알려 각 지방 의병세력의 봉기를 고무하고 호응을 기대할 목적으로 당시 대표적인 반일 언론인 대한매일신보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보냈다.
“나라가 부서지고 집이 망하였습니다. 조종의 국토에 함께 태어나서 부모의 몸을 각기 가진 자로서 누군들 자나 깨나 원통하고 울부짖으며 저 왜적에게 원수를 갚으려 하지 않겠습니까........조정에 가득한 것이 저 왜적의 노예 아닌 것이 없으며, 온 나라에 저 왜적의 점탈 없는 데가 없고, 심지어는 근왕한 것을 궁궐을 범하였다 하고 의병 일으킨 것을 반란이라 하여 드디어 충신 의사로 하여금 손발을 놀릴 수 없게 만들었으니, 나라 망한 원통함과 집을 망친 분함은 아마 피차가 생각이 같으리다..... 전라도 시골에 한평생 살아서 능히 당세의 대인군자를 두루 사귀어 면면히 가르침을 청하지 못하였고, 기특한 포부를 가지고 충의를 실천하는 선비들이 혹은 서로 알지 못하고 서로 듣지 못한 이도 있을 것입니다. 왜적들이 횡행함에 길이 막히어 끊어졌고 여기저기에서 새로 모여든 군사들이 되어 모든 일이 초창기에 있어 사방에 선전하여 포고할 방법이 었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여러 군자께서는 춘추의 대의로 곧은 붓을 잡아 신문사에 몸 담은 자의 손으로 역사의 일기를 기록하여 천지의 바른 윤리를 들어 인민의 귀와 눈을 넓히면, 인의로 성벽을 삼고 필묵이 무기가 되어, 시골군사 10만 명보다 나을 것이오니, 더욱 높고 깊게 힘쓰시오.
삼가 통고하는 글 하나를 올려 보내 드리오니 혹시 물리치지 마시고 신문에 기재하여 널리 유포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는 오직 신문사에 계신 여러 군자의 재량에 달렸으니, 밝게 살펴주십시오. 각주1)“
각주 1) <<성재기선생거의록 약초>>(권2) 「첩황(貼黃)」에 붙어 있는 이 글은 실제 첩황과는 별개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송사선생문집십유>>에는 <上大韓每日申報社諸位>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아마 별개로 작성된 글이 <<성재기선생거의록 약초>>(권2)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착오로 한 데 묶인 것으로 보인다.
기삼연이 수연산에서 봉기하여 격문을 날릴 당시는 러일전쟁 이후 재기한 의병들의 항일투쟁의 봉화가 전국 각지로 확산되어 가던 시기였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의 승리를 기화로 이른바 을사오적을 앞세우고 대한제국 정부를 압박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을 뿐 만 아니라, 조선 민중의 저항을 염려하여 대규모의 일본군 병력을 한반도에 주둔시켰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에 ‘한일의정서’의 체결을 강요하고, 이를 근거로 함경도 일대에 군정을 실시하였다. 이어서 청일전쟁 이래로 서울, 원산, 부산에 배치한 1개 대대의 한국주차대 조직을 해체하고, 대본영 직속으로 한국주차군사령부를 편성하여 병력을 증강하였다. 한국주차군은 ‘한국주차군사령부’ 아래 주차사단(수비대)과 주차헌병대를 주 병력으로 하고 기타 예하부대와 함께 편성되었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일제는 1904년 4월 3일 서울에 한국주차군사령부를 설치하여 사령관직에 소장급을 배속하였고, 1904년 9월 7일에는 사령부 조직을 확대하고 주차군사령관직에 대장(혹은 중장)급을 배속하였다.
일제는 러일전쟁 중 ‘군사경찰훈령’을 공포하여 조선의 치안을 일본군이 담당하도록 하고 열차운행을 방해하거나 전신줄을 끊는 사람은 군율로 다스리도록 하였다. 이때 일본군은 철도나 전신선을 파괴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조선인을 공개 처형하는 등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에 저항하는 조선 민중을 무참히 학살하였다. 이것은 이후 전개되는 의병 집단학살의 전주곡이었다. 러일전쟁 종결 후 일제는 한국주차군의 2사단 체제를 확정하고 제13사단과 제15사단을 한반도에 주둔시켰다. 이로써 의병 봉기에 대비한 일본군대의 한반도 주둔 계획이 일단 완료되었다.
그런데 1907년 7월 일제는 본국으로부터 1개 여단 병력을 긴급 증파하여 대구에 여단본부를 두고 남부수비관구를 보강하였다. 이는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 해산을 염두에 두고 해산 군인들의 저항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 때 증파된 제12여단은 일본군 23사단 중 최강을 자랑하는 정예부대였다.
1907년 8월 1일부터 9월 3일에 걸쳐 일제가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하자, 그들의 예상대로 다수의 해산 군인들이 결사항전에 돌입하였다. 우선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의 박승환 대대장이 일제의 강제적 군대 해산에 항의하여 자살한 것을 계기로 서울에서 군대 봉기가 일어났다. 이에 자극 받은 지방의 진위대에서도 많은 군인들의 봉기와 탈출이 잇달았다. 그 현저한 예가 민용호가 중심이 된 원산진위대와 지홍윤·연기우 등의 지휘하에 봉기한 강화도 진위대 병사들의 대일항전이었다. 항전이 진행되면서 각 지방에서 봉기한 진위대 병사들은 의병대열에 합류하였다.
해산 군인들이 의병부대와 연합하거나 또는 의병부대에 가담하는 방식으로 항일투쟁을 벌여나가면서 의병운동은 명실공히 전국적 차원 ‘항일전쟁’의 양상으로 발전하였다. 이처럼 해산군인과 의병들의 저항이 예상 밖으로 커지자, 일제는 1907년 10월 초 기병 1개 연대(4개 중대로 편성)를 더 추가하여 조선에 파견하고, 또 강릉과 인천에는 수뢰정까지 파견하여 연안의 의병 진압에 더욱 더 박차를 가하였다.
1907년 10월 초 파견된 기병연대는 한국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가 본국 정부에 증원 요청하여 파견된 부대였다. 이 기병대는 서울, 조치원, 대구, 전주 등 주로 남부지역에 배치되었다. 이는 의병 활동의 중심지가 강원에서 경북 그리고 점차 충청 이남의 호남지역으로 이동한 탓이었다. 기병대는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되는 의병들의 게릴라식 항전에 기동성 있게 대응을 위해서 필요하였다.
이후 의병들의 거점이 호남지역으로 이동함에 따라 전라남북도에 집중 배치되었다가 1909년 가을 ‘남한대토벌작전’을 수행하고 대토벌의 임무를 마친 직후인 1909년 11월에야 본국으로 철수하였다.
한국주차군은 1908년 5월 병력의 증파를 본국에 다시 요청하여, 보병 2개 연대를 더 지원받았다. 그 중 1개 연대인 제7사단 27연대는 원산에 상륙하고, 다른 1개 연대인 제6사단 23연대는 마산에 상륙하여 각각 북부지역과 남부지역의 의병 진압 병력을 보강하였다. 주로 화승총이나 창, 칼 등 구식의 원시적 무기로 무장한 의병 진압을 이처럼 많은 병력을 조선에 파견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일제는 군 병력만으로는 의병을 조속히 진압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보조 병력으로 헌병과 경찰력을 증강하였다. 1906년 당시 일본의 한국주차군헌병대 병력은 1,162명으로, 이들의 역할은 2,679명의 경찰을 보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07년에는 헌병을 2천여 명으로 두 배로 늘리고, 경찰도 4,952명으로 늘렸다. 1908년에는 다시 헌병을 6,608명으로 3배 이상이나 더 늘리고 경찰은 4,991명 선을 유지하였다. 1908년 6월에는 조선인 헌병보조원을 4천여 명을 모집하여 의병을 진압할 때 일본 헌병의 앞잡이로 삼았다.
이처럼 일제는 경찰보다는 군 병력이나 헌병 병력을 앞세워 의병을 ‘토벌’하였다. 이러한 의병 진압 방식은 모든 조선인에 대한 통치방식으로 적용되어 1910년 강제 병합 이후 무단통치의 수단인 헌병경찰제도의 모태가 되었다.
일제는 군과 경찰 병력 이외에도 일찍부터 일진회와 자위단 등 친일세력을 지원하고 조직하여 이들을 의병을 색출하고 탄압 학살하는 일에 이용하였다. 일진회는 1904년 8월 송병준이 조직한 뒤 이용구의 동학조직을 끌어들여 만들어진 한말의 대표적인 친일단체였다. 이들은 전국 각지에 지회를 두고 일제의 밀정 노릇과 ‘토벌대’의 앞잡이 노릇을 하였다.
자위단은 일진회의 청원에 의해 일제에 의해 1907년 11월 조직되었다. 일제는 자위단이라는 미명하에 지방에 거류하고 있던 일본인과 친일세력을 묶고 마을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이들을 무장시키고 일본군 ‘토벌대’의 보조병력 내지 지원부대로 활용하였다.
기삼연의 의병부대는 다른 의병부대와 마찬가지로 일본군대와 경찰을 공격하여 이들을 나라 밖으로 몰아내는 것을 최종 목표로 하면서도, 일진회원와 자위단원, 그리고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세금을 징수하는 공전영수원과 친일관리 등 조선인 친일세력에 대한 응징까지도 투쟁목표로 삼았다. 물론 호남지역에 거류하고 있던 일본인들 또한 주요한 공격 대상이었다.
이리하여 기삼연 의병부대는 1907년 10월 21일 영광과 무장(현 전북 고창)에서 전주(電柱)을 파괴하고 마을에 숨어있는 일진회원 1명과 천도교인 1명을 처형하고,각주 2) 바로 고창 문수사로 들어갔다. 기삼연이 문수사에 진을 친 것은 막장으로 있는 박영건(朴永健), 정원숙(鄭元淑) 등 고장 출신 간부들의 권고에 의한 것으로 고창성을 공략하기 위한 예비책이었다. 문수사는 현재 고창군 고수면 은사리에 있는 절이다. 의병을 이끌고 고창의 문수사에 기삼연이 입성하자, 이에 관한 정보를 입수한 일제는 우선 약간의 병력을 동원하여 선제공격을 가해 왔다.
각주 2) 이 사실은 <성재 기선생 거의록 약초>(권 3)에 실린 내용과 일제가 작성하여 편책한 <<전남폭도사>>의 내용이 일치한다.<<성재 기선생 거의록 약초>>(권 3)에서는 “동학당으로서 머리를 깍고 왜적의 창귀가 된자들”이라고 하였고, <<전남폭도사>>에서는 “천도교인 김모와 일진회원 최모”라고 적고 있다. <<전남폭도사>>는 1906년 1월부터 1909년 12월까지 전라남도에서 일어난 의병에 대한 일본군경의 진압 상황을 일지 형식으로 기록한 갑종 기밀문서로 1913년 일경(日警) 전라남도 경무과에서 편찬하였다. 이 자료는 1977년 <<비록 한말전남의병투쟁사>>(이일룡 역, 전남일보 인서관 간행)라는 제목으로 원문과 함께 번역 간행된 바 있다.
<<전남폭도사>>에 의하면, 당시 일제 측에서는 법성포주재소, 영광분파소, 고창, 무장의 각 분파소가 합동 수색하여 고창군 문수사에 웅거하는 기삼연의 부하 50명을 공격하였으나 탄환이 떨어져 퇴각하였다. 일제 측의 기록에는 피아간의 피해 상황이 나타나 있지 않으나, <<성재 기선생 거의록 약초>>(권 3)에는 적 수십 명을 베었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양측 간 치열한 교전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참고문헌
성재 기선생 거의록 약초<권1~권3>(기우만 편, <<호남의병장열전>> 所收)
김용구 편, <<의소일기>>
김동수, <의병열전>(전남일보, 1976년 12월 8일 ~ 1977년 1월 14일자)
강길원, <성재 기삼연의 항일투쟁>, <<한국독립운동사논총>>(수촌박영석교수화갑기념논총간행위원회 편, 1992)
홍순권, <<한말 호남지역 의병운동사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4
3. 고창읍성 전투(1907년 10월 31일~11월 1일)
홍순권(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문수사 전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인물이 있다. 김준(金準)이다. 김준의 자는 태원(泰元), 호는 죽봉(竹峰)으로 나주군 문평면 북동리 갈마지(渴馬池)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24세 되던 해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일시 동학농민군에 가담하기도 했었다. 을사늑약 이후 김돈(金燉) 등과 거의를 도모하던 중 기삼연의 거의 소식을 듣고, 동지 10여 명과 함께 문수사로 찾아갔다. 이 날 김준은 기삼연을 만나 허심탄회하게 장차 의병투쟁의 방략과 군무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그러던 중 가을비가 내리는 어둠을 틈타 몰래 잠입한 일병들의 기습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기삼연은 김용구, 김엽중(金燁中), 김익중(金翼中)으로 하여금 전투 준비에 나서게 했는데, 뜻밖에도 그 날 야간 전투에서 새로 찾아 온 김준이 큰 공을 세웠다. 갑작스런 적의 기습으로 의병들이 크게 당황하자 김준은 앞으로 나서며 다음과 같이 큰소리로 의병들을 고무시켰다.
“의병이라 이름하고서 적을 만나 도망하는 것은 계책이 아니다. 더욱이 험한 산길에서 살아나기를 바랄 수도 없으니 기왕 죽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래도 싸우다 죽는 것이 나지 않겠는가.”
의병들의 동요를 잠재운 후 김준은 자신이 직접 앞장서서 돌담에 기대어 침착하게 총을 쏘아댔다. 의병들이 전의를 회복하고 반격하자 마침내 적들이 오히려 당황하여 마침내 퇴각하고 말았던 것이다.
문수사 전투 후 김준의 군사적 지식과 대담성을 높이 산 기삼연은 그를 선봉장으로 임명했다. 김준이 가세한 호남창의회맹소의 군진은 다음과 같다. 주1)
주1) <의소일기> 9월 24일자에는 호남창의회맹소의 군진이 정해지고 그 날 의병들이 함께 불렀다는 다음과 같은 노래가 전해진다.“우리 2천만 예의민족이 어이 왜적에 굴하며, 우리 3천리 금수강산을 어이 왜적에게 주랴. 아아! 우리 동포형제들이여, 불공대천의 원수들을 멸하고, 우리 성상 모시세 만만세.”
호남창의회맹소 대장 기삼연 / 통령 김용구 / 참모 김엽중, 김봉수(金鳳樹) / 종사 김익중, 서석구(徐錫球), 전수용, 이석용 / 선봉 김준 / 중군 이철형(李哲衡) / 후군 이남규(李南奎) / 운량(運糧) 김태수(金泰洙) / 총독(總督) 백효인(白孝仁) / 감기(監器) 이영화(李英華) / 좌익 김창복(金昌馥) / 우익 허경화(許景和) / 포대(砲隊) 김기순(金基淳)
조직을 정비한 기삼연은 막하 장수들과 향후 전략과 일정을 계획한 후 전국에 격서문(檄書文)을 띠웠다. 위의 호남창의회맹소의 간부 명단도 이 격서문에 실려 있었다.
“호남창의회맹소 대장 기삼연, 통령 김용구(이하 군진 명단 생략) 등은 삼가 격문으로 국내 여러 동포들에게 고하나이다. 대저 왜노란 섬 한가운데 조그만 오랑캐로서 천지간에 사특한 기운을 타고난 자들이다. 옛날 수길(토요토미 히데요시)이 제 임금을 죽이고는 감히 명나라에 범할 마음을 가지더니 지금 박문(이토 히로부미)이 제 임금을 죽이고는 다시 방자히 이웃나라를 삼킬 꾀를 내었으니 팔도강산에 초목이 모두 놀래고 이릉(二陵, 임진왜란에 성종의 능과 중종의 능을 왜놈들이 발굴했음)의 바람, 비에 귀신도 또한 울었도다. 3호만 남아도 초나라가 반드시 진을 망칠 것이라던 옛날의 예언도 있었는데, 9대의 원수인 기국(紀國)을 토벌하는 제나라에 세월은 더디었네.(중략)
이집트 민족이 멸망한 것은 서방에 밝은 전감(前鑑)이 있고, 유구(琉球, 오키나와)가 일본의 고을이 되고 만 것은 동양에 엎어진 전철이 있도다. (왜노는) 오라로 묶이고 형틀에 매어서 서묵(西墨)주2)의 귀신이 되고 말았으니 수레로 실어가고 배로 운반하여 장차 동해 같은 깊은 욕심을 채우리로다.
주2) 서묵은 서양과 아메리카의 뜻으로 풀이된다. 당시 묵국은 멕시코를 지칭하였는데, 문맥상 아메리카를 상징한 표현으로 보인다.
죽을 때를 만나 울부짖기보다는 시기를 타서 일제히 일어남만 같지 못하다. 아 저들은 (제도의) 변경과 개혁을 마음대로 하고 임금을 폐하고 세움도 저들의 손에 달렸도다. (중략) 우리 임금은 어디에 있는가. 28대의 현성(賢聖)이 서로 계승하였으며 본국이 비록 쇠하였다 하나 삼천여리의 산천은 그대로일세. 대신이란 자는 적의 앞잡이 노릇하지 않는 자 없고, 머리 깎고 얄궂은 말을 하는 놈은 모두 왜놈의 창자를 가진 자들이다. 비록 오랫동안 하늘의 징벌 피했을지 모르나, 어찌 잠깐인들 의병들의 베임을 비껴나랴.
우리들은 조상의 피를 받아 이 문명한 나라에 태어났으니 차라리 바다에 빠져 죽을지언정 남의 속국인 작은 조정에는 살지 못하겠으니, 우리에게는 오로지 태황제가 계실 뿐이다.(중략)
각기 반드시 죽을 각오로 분발하여 나중에 죽음을 후회하는 일이 없게 하라. 조선에 살고 조선에 죽어 아버지와 스승의 교훈을 저버리지 말 것이요, 적을 죽이거나 적에게 붙거나 반드시 국법에 따라 상벌을 시행할 것이다. 이 격문이 도착하면 풀이 바람을 따르듯 하라. 복심을 헤쳐 널리 고하노라.“
기삼연은 이 격문에 다음과 같은「고지문」을 붙여 왜놈의 머리 1개를 베면 돈 1백냥, 순검이나 일진회원이 왜놈 1명의 목을 베면 죄를 면해주고, 2명의 목을 베면 상으로 1백냥을 주겠다고 공고하였다.
여러 고을에 격문을 발한 기삼연은 대오를 정비하여 문수사에서 10여리 떨어진 덕산으로 진을 옮겼다. 이는 재차 있을 수 있는 적들의 예봉을 피해 고창읍을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기삼연은 사람을 고창(옛 이름, 모양) 읍내로 보내어 적정을 살피게 했다. 이 때 고창읍에는 의병과 내통하는 아전과 군민이 많았다. 정탐 결과 고창읍에는 분파소의 일병 외에는 다른 지원부대가 전혀 없으며 분파소의 병력도 얼마 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기삼연은 의병들을 이끌고 고창에 입성하였다. 10월 31일(음력 9월 25일)의 일이었다.주3)
주3) <전남폭도사>. 1907년 10월 28일~11월 1일자 기사에는 10월 28일 기삼연이 이끄는 의병 4백명이 왕녀봉(현 장성군 삼계면 수옥리 수각 앞산)에 둔집하였고, 10월 31일에는 다시 석수암에 모였다. 11월 1일에는 고창을 습격, 일인 2명을 참살하고 고부경찰서원과 교전한 1백명의 의병이 영광분파소를 치려고 함에 함평, 영광, 법성포가 합동 경계했다고 하였다. 또 일본군 보병 제14연대의 <진중일지> 11월 1일에는 광주수비 제2대대장 후와(不破)소좌로부터 ‘목포, 전주 간의 전선이 또 고창 부근에서 불통이 되었다’는 전보 보고가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일본측의 기록은 같은 기간 김용구가 쓴 <의소일기>의 기록과 거의 일치한다. 단, 일본측 기록에는 고창 전투의 전개 상황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술이 없다. 본문에서 적은 적의 사망 기록은 의병측 자료에 의거한 것이다.
의병들이 고창읍에 입성하자 일병들은 반격에 나섰으나 수적으로 의병군의 위세에 눌려 도망치고 말았다. 의병측의 기록에 전투에서 사망한 적병 수가 20명에 달한다고 했으니, 다소 과장된 숫자일지는 몰라도 적의 피해가 컸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기삼연은 통령인 김용구를 불러 일병의 병기고를 접수토록 하였다. 일병의 병기고에서는 수십 자루의 총과 탄약이 나왔다. 여기서 획득한 양총은 선봉장 김준에게 주었다.
기삼연의 의병진이 입성하자 고창읍민들은 술과 고기를 가져와 이들을 대접하였다. 의병들은 오랜만의 푸짐한 음식에 마음껏 마시고 또 취했다. 모든 병사가 곤히 잠들어 있는 사이 일병 첩자가 살며시 성을 빠져나가 적에게 성안 의병들의 동향을 밀고하였다. 새벽녘 일병 한 부대(고부경찰서원으로 추정)가 어둠을 뚫고 고창성 안으로 기어들어왔다. 성안에 들어선 일병은 의병진지에 근접하여 포대를 설치하고 무차별로 사격을 가하였다.
갑작스런 적병의 공격으로 의병들이 당황하여 이리저리 넘어지는 등 어찌할 바를 몰랐다. 가까스로 기삼연, 김용구, 김준, 김익중, 이남규, 유인수 등이 수십 명의 병사들을 수습하고 이들을 지휘하며 혈전을 벌였다. 날이 밝자 그간 당황하던 의병진은 점차 전열을 정비하고, 이에 주민들마저 가세하여 적을 공격하니, 의병군을 제압하려던 적병들이 도망하기 시작했다. 2~3시간여에 걸친 대혈전이었다. 이 때 의병측의 기록은 적병 중 죽은 자가 수십 명이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의병측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종사인 김익중이 전투를 지휘하다 적탄에 맞아 숨졌고 의병측 병사도 2명이 전사했다.
고창읍성을 점령할 때에도 김준은 선두에 서서 의병을 지휘하였다. 하지만 곧바로 일본군경의 역습을 받아 고창읍성을 내주고 말았다. 기우만이 쓴「박영건전(朴永健傳)」에는 이 때 성 밖으로 빠져 나와 퇴각하는 도중에 적의 유탄을 맞아 서너 명의 희생자 발생했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퇴각하는 와중에도 적의 집요한 추격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삼연은 전사한 의병군을 장사지내고 고창에서 철수, 장성으로 향하였다. 이 때 남은 군사는 겨우 18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즈음 함평의 진사로 후군장(後軍將)이었던 이남규가 고창 용두촌(龍頭村)에서 유숙하다가 적에 체포당하고 말았다.
참고문헌
- <성재선생 거의록>
- <의소일기>
- <전남폭도사>
- 홍영기 편저, <義重泰山 –한말의병장 죽봉 김태원·청봉 김율자료집->, 죽봉 김태원 의병장 기념사업회, 1998
4.
법성포, 장성 공격과 백양사 약사암 전투
홍순권(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이남규를 체포한 일본군은 고창읍 점령을 보고 받고 출동한 고부수비대 제6중대 소속 스스무(進) 소위 이하 35명의 부대원이었다. 이들은 고창성을 점령 중이던 의병들이 자신들의 공격을 받고 퇴각을 결정하자, 퇴각하는 의병대원들을 추격하던 중 이남규를 체포하였다.
스스무 소위는 이남규를 심문한 결과 고창읍 내습 당시 의병의 총 병력은 50명이었고, 기삼연의 지휘 하에 이진사(이철형), 김유성, 이대극 등이 가담하였으며, 11월 1일 고창분파소를 습격하여 무기를 약탈하고 일본인 2명을 살해했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이남규는 그 날 밤 군아에서 잠을 자던 중 일본군의 습격을 받고 도주하던 중 성벽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해 체포되었던 것이다.주1)
주1) <진중일지> 1907년 11월 15일자「고부수비제6중대장 중원대위 보고의 요지」 참조. 또 <진중일지> 1907년 11월 12일자 전과 보고에 의하면 고창 전투에서 일본군은 적 2명을 죽이고, 10여명을 부상시켰으며, 화승총 10정을 노획하였다고 하였다.
이후 일병들은 의병의 고창읍 내습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영광군 관동 이진사의 가옥과 동군 수각동(水閣洞) 이진사 아버지의 가옥, 동군 마촌면 남산리 이대극의 가옥, 동군 마촌면 남산리 김유성의 가옥을 불태웠다.주2)
주2) <진중일지> 1907년 11월 23일자
고창읍성 전투 후 기삼연은 장성 수연산으로 되돌아왔다. 여기서 대오를 정비한 뒤 진을 다시 백양사로 옮기었다. 백양사로 돌아온 기삼연은 김준 등과 더불어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고 전열을 가다듬으며 새로운 전략의 수립에 고심하였다. 기삼연 등은 여러 지역에서 의병이 일어나 함께 호응해주기를 기대했으나, 그렇지 못한 상황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또 훈련이 되지 않은 병사들을 대부대로 운영하는 것도 기동성이 떨어져 무모하다고 판단하였다. 결국 기삼연과 김준은 의병부대를 서로 나누어 분산, 활동하기로 결정하였다. <후석유고>주3)에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성재가 준과 상의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의병을 일으킨 지 수 월이 되었는데도 서로 호응하여 일어나는 자가 없으니 그대는 부하 군사를 거느리고 영광. 나주. 함평. 무안 등지로 가서 사림들을 설득하고 움직여서 군무(軍務)를 장하게 하라. 나는 장성, 순창 등지로 가서 의병을 모집할 터이니, 우리가 서로 호응하면 적을 반드시 쳐부술 수 있으리라.”
주3) <후석유고(後石遺稿)>는 후석(後石) 오준선(吳駿善 1851~1931)이 남긴 글을 그의 조카 오동수가 1934년 후석의 문인들과 함께 간행한 문집이다. 오준선은 노사 기정진의 문인으로 한말 일제시기 호남의 대표적인 유학자 중 한 사람으로서 호남 의병장에 관한 여러 편의 전기(의병전)와 의병 활동에 관한 다양한 기록을 남겼다. <후석유고>는 1991년 경인문화사에서 <후석선생문집>의 이름으로 영인하였다.
기삼연은 김준 등과 회합한 뒤 마침내 영광을 공략할 계획을 세웠다. 당시 영광에는 수백 섬의 쌀이 모아져 있었고 이것은 법성포를 통해 일본으로 운송된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12월 5일 기삼연부대는 영광읍 공격을 위해 수각산(水閣山)에 이르렀으나 영광은 일제 측의 수비가 삼엄하였다. 마침 쌓아두었던 쌀도 법성포로 운반돼 그 길로 계획을 바꿔 말머리를 법성포로 돌렸다. 야밤중에 기습을 받은 법성포 주재소의 보조원들은 반격조차 제대로 못하고 도망하고 말았다. 기삼연 등 의병들은 병기를 회수하고 일본인이 사는 집 여러 채를 모두 불살라버렸다. 또한 일본으로 운반키 위해 쌓아둔 창고를 열어 곡식을 주민들에 나눠주었다. 이 사실을 <전남폭도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고 있다.
“12월 7일 오후 13시 기삼연이 이끄는 약 70명의 비도가 법성포를 습격해왔다. 사건이 돌발적인데다가 야밤중이어서 주재소 보조원도 응전할 겨를이 없어 허둥지둥 급히 피신했다. 주재소 건물과 재류방인(일본인) 가옥 7동, 그리고 가구 물품이 모두 불에 타 없어졌고, 방인 1명이 실수하여 익사했으며, 조선인 1명이 부상당했다. 영광주둔 수비대장 이하 14명이 20리를 추격하였으나 종적을 알 수 없었다.”주4)
주4) <진중일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12월 8일 불효(拂曉) 폭도 약 백명이 법성포를 습격한다. 상보(狀報)를 득하고 오전 3시 출발 토벌을 위해 하사 이하 14명을 솔하고 법성포로 급행하여 오전 7시 도착했으나, 적은 작야 12시 경 일본인 가옥에 불을 놓고 오전 2시 지나 무장 방향으로 돌아간 뒤여서 곧장 이를 추적했으나 마침내 그 행방을 알수 없다. 오후 7시 귀대함.”
법성포에서 회군한 기삼연은 장성 백양사에 진을 치고 곧 바로 장성읍을 공략할 계획을 세웠다. 마침 장성읍내 일본인들의 횡포가 심하다는 보고를 들어왔기 터였다. 그리하여 기삼연은 사람을 보내 하사리(下沙里)에 살고 있는 중형 양연(亮衍)에게 이러한 뜻을 알렸다. 형 양연이 물심양면으로 기삼연의 활동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즈음 고창전투에서 흩어졌던 포수들이 다시 모이고 기타 병기도 고창의 관리와 읍민들에 의해 백양사에 은밀히 반입되었다.
12월 9일 한밤중 백양사 쪽에서 함성소리와 말발굽소리가 요란했다. 이날 의병부대는 장성분파소를 소각하고 우편국을 강타, 파괴해 버렸다. 또 우편소장 남베(南部龍五郞)을 처형했다.주5) 남베는 의병의 기습에 놀라 부엌으로 도망 아궁이 속으로 기어들어가 의병군에게 발각되어 처형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주5) <전남폭도사>에는 12월 7일 장성읍내에서 10리 떨어진 곳에서 전 장성우편취급소장 남베(南部龍五郞)가 기삼연의 부하 40명에게 총살당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기삼연 장성읍 공격 일자는 <진중일지>의 기록이 훨씬 자세하고 구체적이며 여러 차례 반복되고 있는 사실로 미루어 <진중일지>의 12월 9일이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장성읍 전투가 있었던 그 날 오후에 기삼연 의병부대는 광주에 주둔하고 있던 또 다른 와 일본군 부대와 큰 전투를 치렀던 보인다. 일본군의 <진중일지>에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와타니(岩谷) 참모장 호위를 위해서 광주에 이른 하야시 군조(林軍曹) 이하 수명은 귀도 중 12월 9일 오후 4시 장성 남방 약 2천 미터 지점에 달했을 때 약 150명의 ‘폭도’와 만나 교전하여 약 20분 후 이들을 격퇴하였다. 적은 오동리(梧洞里)를 거쳐 그 반은 동북방으로 그 반은 동남방으로 흩어졌다. 일행은 이들을 추격했으나 해가 지면서 종적을 잃어버렸다. 이 전투에서 적이 버리고 간 사체(死體) 13(제1대장 이윤화李允化, 제4대장 김문행金文行을 포함), 노획품 화승총 11, 화약, 철환 약간. 금건(金巾) 1 반(反), 망토 1매, 죽망제(竹網製)모자 6개, 잡품 십수 점(이상 소각)이다. 우리 측의 손해는 없고, 전투 중 소비한 탄약은 326발이다. 장성우편국장은 이 ‘폭도’들에 의해 참살되었다.”주6)
주6) <진중일지> 1907년 12월 19일자
이튿날 광주 주둔 수비대의 지원을 받은 장성의 일병들은 곧 바로 기삼연 의병부대를 추격하기 시작하였다. 기삼연은 장성 기습 후 일단 진을 삼서면(森西面)으로 옮겼다가 다시 백양사로 돌아왔다. 그러나 일병의 추격은 집요해서 백양사에 미처 군진을 풀고 재정비도 하기 전에 기습을 당했다. 12일 불효에 일병들이 백양사에 기습 공격을 감행해 왔던 것이다. 이 때 기삼연은 백양사 양 계곡에 포대를 설치하고 일병과 대치하였다. 백양사에 잠입하던 일병과 의병 사이에 치열한 교전이 있은 끝에 일병들은 퇴각하였다. 이 때 의병 측과 교전한 일본군 보병 제14연대 제8중대 소속 요시다(길전) 특무조장은 당시의 전투 상황을 보면,주7) 그 때 있었던 전투의 치열함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주7) <진중일지> 1907년 12월 21일자. 또 <진중일지> 동년 12월 28일자에 의하면, 12월 11일 장성 백양산 약사암 전투에서 승리한 공로를 인정받아 8중대 특무조장 요시다 이하 16명이 일본군 보병 제14연대장 키쿠치(菊池主殿)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1> 12월 10일 오후 3시 반, 대대장으로부터 지난 밤 장성을 습격한 ‘폭도’ 백여 명을 소탕하라는 명령을 받고 하사 이하 15명을 인솔하여 오후 5시 출발하였다. 동일 오후 11시 30분 장성에 도착했더니 적은 이미 도주한 후여서 여러 곳으로 밀정을 보내어 11일 ‘폭도’들이 샛길로 빠져나가 백양산에 집합해 있음을 알아냈다.
<2> 12월 11일 오전 10시 장성을 출발하여 덕치(德峙)를 거쳐 약수정에 이르러 토인(土人)으로부터 ‘폭도’는 70~80명이며 무기를 휴대하고 백양산 약사암(藥師庵)에 있음을 알아내고, 그곳으로 급히 진격하였다. 오후 4시 30분부터 약 40분간 3면에서 이들을 공격했으나 원래 약사암은 단애절벽의 바위 위에 있어 적은 이 곳 천험(天險) 요새를 사수하였다. 마침내 일몰에 이르러 야습하기로 결정하고, 백양산을 우회하여 적의 좌측배(左側背)를 공격하여 오후 10시 약사암을 점령하였다. 적의 일부는 순창 방향으로 일부는 정읍 방향으로 흩어져 도주하였다. 적이 버리고 간 사체 10, 부상자 불명이나 12명을 내려가지 않는다. 아군의 손해는 없다. 소모 탄약은 450발이며, 노획품은 총 10정과 탄약 및 화약 약간(소각함)이다.
전해오는 바로 이후 일병은 백양사에서 승려 한 명을 붙잡아와 심문 끝에 당시 일본군과 교전한 의병대장이 기삼연임을 알아내고, 그의 형, 기양연을 일병부대 군막으로 불러 취조하면서 기삼연의 행방을 캐물었으나 끝내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한 채 결국 양연을 방면하고 말았다고 한다.
백양사마저 적에 의해 기습을 당하고 패퇴한 기삼연은 그 진을 입암산성(笠岩山城)으로 옮기고 여러 부장들과 논의 끝에 중대 단안을 내렸다. 즉 의병부대를 소단위로 나눠 유격전을 펴기로 한 것이다. 이로써 호남창의회맹소 의병부대는 각자 소규모 부대로 나뉘어 함평, 광주, 장성, 담양, 고창, 무안 등으로 분산하였다.
참고문헌
- <성재선생 거의록> 외.
- <후석유고>
- <의소일기>
- <전남폭도사>
- <일본군 제14연대 진중일지>
5. 의병투쟁의 확산과 일본군의 대응
홍순권(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겨울에 접어들면서 기삼연은 광고문(격문)을 써 각 고을에 띄웠다.
<호남창의대장이 널리 각 고을에 고함>
이웃나라와 외교한다고 핑계하고 통상에 대한 방책이 없었던 것이 실로 화단이 되었다. 처음에는 음란하고 부정한 물건을 만들어서 우리 민속을 문란케 하고 마침내는 매국하는 무리에게 뇌물로 매수하여 백성과 사직에까지 가만히 옮기니 화의 근본이 끊어지질 않는다.
본 의소는 큰 일을 일으켜서 강토(국권)를 회복하기를 맹세하였으나, 병을 얻은 근원을 살펴서 명현(瞑眩 병이 치유될 때 일어나는 현기증 현상)이 일어날 정도의 약을 쓰지 않으면 한갓 군사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이에 화의 근본과 병의 근원 몇 가지를 대략 들어서 본 의소가 정한 일도양단의 방침을 통절히 보이노니, 각기 마음을 씻어 영을 따르라. 그렇지 않은 자에게 본 의소는 장차 형벌의 절차 없이 즉시 살육하여 후환 없는 법을 시행하겠노라.
1. 곡식의 매매에 제한과 방지가 없음은 실로 우리 백성의 목숨을 여위게 하고 가만히 우리 국가의 명맥을 해치는 것이다. 소민들은 무지하여 작은 이익을 엿보고 큰 해독을 잊어버리니 그들에게야 논할 것이 있으랴. 간악하고 교활한 상인들이 실로 창귀 노릇을 하는 것이니 이 종류를 베이지 아니하면 나라가 장차 빈터가 될 것이다. 마땅히 처자까지 벌을 주리라.
1. 부정하고 교묘한 물건은 실로 순박한 풍속을 깨뜨리는 것이다. 감히 매매하는 자가 있으면 그 물건을 불태우고 그들도 죽이리라.
1. 왜노와 가만히 통하여 우리의 기밀을 누설시키는 자는 용서치 않고 죽이리라.
위 세 가지는 그 중 심한 것만 들은 것이다. 이후 게시하여 널리 고하고 한 결 같이 삼가하고 두려워할지라.
정미 10월 24일(양력 11월 29일)
위 광고문에서 세 번째로 지적한 왜노의 앞잡이 중 기삼연 등이 가장 큰 병폐로 꼽은 것은 당시 통감부가 새로 임명한 세무 관리인 세무주사와 공전영수원(세금징수원), 일제가 의병 활동의 방해와 밀고를 목적으로 각 고을에 조직한 자위단원, 친일매국노 송병준 등이 조직하여 만든 일진회원 등이었다.
이미 앞서 살펴보았듯이 기삼연 등은 이른바 ‘토왜(土倭)‘로 지칭되는 이들을 국권 상실의 근본 원인으로 인식하고, 일인이나 일본군경 관리 못지않게 의병부대의 주요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실제로 기삼연 등이 마을에 나타나 배일격문을 돌리고, 심지어 일인과 관리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던 사실이 일제의 정보 보고서에도 등장하고 있다.
1907년 12월 한 겨울의 추위가 계속되자 이를 견디지 못하고 대열을 이탈하는 의병들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되자 기삼연은 동짓날에 장성의 수연산에 모여 장성과 영광읍을 공략할 계획을 세운 다음, 각 예하부대에 전령을 내려 그 사이 의병들이 충분히 쉴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휴식을 마친 기삼연은 1907년 12월 22일 부대를 이끌고 영광을 공략키 위해 행군을 시작하였다. 도중에 그들은 황량면(黃良面) 산삼리(山三里 현 묘량면 삼학리) 주막에서 저녁을 먹고 있던 일인 순사 한 명과 마주쳤다. 그는 영광분파소 후꾸다(福田) 순사로 저 나름대로의 일을 보고 귀임하다가 의병부대를 조우한 것이다.
<전남폭도사>에 의하면, 당시 기삼연의 부하는 50여 명이었으며, 쌍방 교전 중 가옥이 불에 탔다고 한다. 후꾸다는 이 틈을 이용해 주막에서 빠져나와 마을에 들러 주민의 옷을 빼앗아 변복하고 영광으로 도주하였다. 얼마 후 영광수비대 하세가와(長谷川) 소위 이하 11명과 분견소순사가 후꾸다 순사를 앞세워 기삼연 의병부대에 반격을 가해왔다. 어둠 속에서 쌍방은 얼마간 교전 후 별다른 피해 없이 흩어졌던 것으로 보인다.주1)
주1)일본군 보병 14연대의 <진중일지>에는 이 날 밤 하세가와 등이 현지에 도착하기 전 먼저 적의 사격을 받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기삼연이 이들의 반격을 예상하고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의병대는 교전 얼마 후 어둠을 이용하여 퇴각함으로써 큰 피해는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일이 있은 후 1월 3일에는 김준의 동생 김율이 부하 1백여 명을 이끌고 함평주재소를 기습하였다. 이 때 순사 2명, 우편취급소장 및 재류일본인 2명이 응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이들은 무안군 학교(鶴橋 현 함평군 학다리)로 달아났다. 곧 이어 순사와 헌병으로 구성된 ‘토벌대’가 추격해와 양측이 나산(羅山)에서 회전했으나 김율은 끝내 종적을 감추었다.
1908년 새해(음력 12월)에 접어들어 기삼연과 선봉장 김준, 그리고 김준의 동생 김율 등이 이끄는 호남지역 의병대들은 유격전을 전개하며 한층 더 반일투쟁에 열기를 불어넣었다. 그러한 가운데 1월 중순 광주경찰서장의 보고에 의하면 1월 13일 ‘폭도’ 약 50명이 광주군 국지면(局池面) 사쿠마(左久間) 농장을 습격하여 일본인 2명을 죽이고 1명을 부상케 하였으며, 2명은 행방불명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어느 의병부대의 소행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기삼연 의병부대가 아니면 그와 연계된 회맹소의 일원이 저지른 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1월 22일에는 기삼연, 김준, 김율의 연합부대 4백여 명이 또다시 함평 주재소를 기습, 일병과 경찰을 상대로 8시간에 걸친 총격전을 벌였다. 이 때 당시 격전 상황을 <전남폭도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월 22일, 거괴 기삼연, 김태원(金太元 金泰元의 오기), 김율의 연합집단 4백여 명은 다시 함평주재소를 습격했다. 순사 3, 헌병 1명이 즉시 응전하였는데 하다노(波多野) 순사가 전사하고 탄약마저 떨어져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때마침 목포분견소장 이하 10여 명이 응원해 와서 교전 8시간 만에 이를 격퇴했다.
이처럼 의병부대와 일병간의 전투가 격화되는 가운데, 1월 24일 광주군 천곡면(泉谷面)에 사는 일진회원 오경윤(吳京允)이 비아(飛鴉)시장에서 의병들에 의해 총살당하였고, 일진회원 김민홍(金敏洪)의 집이 불태워졌다. 이처럼 각지에서 의병들의 반일투쟁이 격화되고, 일본인과 친일세력의 피해가 늘어나자, 담양과 같은 곳에서는 사의(辭意)를 표하는 관리들이 생겨날 정도였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일제측은 1월 25일 광주수비대장 요시다(吉田)소좌를 대장으로 하는 ‘토벌대’를 편성하여 함평, 장성, 나주 일원에서 활동하는 의병세력의 진압과 수색에 나섰다. 요시다 토벌대에는 특별히 광주경찰서의 순사까지 배속시켰다.
물론 이번 ‘토벌작전’의 핵심 목표는 1907년 가을 이후 호남지역에서 의병투쟁을 활발히 전개하며 이를 호남 전역 확산시키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의병대장 기삼연을 체포하는 것이었다. 작전 개시 후 수일동안 이들이 벌인 ‘토벌’의 주요 성과를 <전남폭도사>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 장성 방면의 이마무라(今村) 종대(縱隊)는 1월 25일 밤 11시 장성군 약수정 박흥리(朴興里 현 북하면 약수리) 백양산에서 의병 10명을 죽이고 4명을 포로로 했으며, 화승총 13, 양총 2, 군도(軍刀) 1을 노획하였다.
(2) 요시다와 고오찌(河內)의 두 종대는 1월 26일 오후 4시 장성군 비치(非峙 현 서삼면 모암리 소재) 마을 부근에서 3백여 명의 의병부대를 공격하여 40분간 교전 끝에 32명을 죽이고 화승총 18과 기타 잡품을 노획하였다.
(3) 요시다 토벌대는 1월 28일 함평군 불갑산(현 영광군 소재)에서 의병 60명과 충돌하여 5명을 죽이고 화승총 2정을 노획하였다.주2)
주2) 이 외에도 <진중일지>>에 한 차례의 전투가 더 보고되어 있다. “25일 오전 3시 내정리에 도착하니, 적은 이미 사창(社倉 영광 동방 약 4리) 방향으로 떠났음을 정탐하여 알고 이들을 추섭하여 오전 11시 40분 사창 남방 약 천5백미돌에 도달하였다. 그 때 약 80의 적도는 동지 동방 및 서북방의 양 고지에서 진지를 점령하고(동방 고지에 약 30명, 서북방 고지에 약 50명) 척후를 향해 사격을 개시함으로써 2명을 동방 고지의 적을 향하게 하고, 나머지는 서북방 고지의 적을 향해서 응전하여, 약 1시간 30분 만에 드디어 동북방 장성 방향으로 궤주시켰다. 때는 25일 오후 1시 20분. 적의 사망 9, 부상자 10을 내려가지 않는다. 포로 4. 아에 손해 없다. 소모한 탄알은 162발이다.
한편, 영광을 공격하려다 물러난 기삼연은 또 다시 수연산으로 돌아와 다음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이 때 기삼연은 추운 날씨에 무리한 행군을 하여 발가락에 동상이 걸려 퉁퉁 부었다. 주위의 권고로 치료를 위해 약간의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기삼연은 장성 서우산(犀牛山)으로 들어갔다.
이즈음 기삼연이 많은 의병부대를 이끌면서도 군량미와 의복에 곤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광주관찰부의 관리 최상진(崔相鎭)과 담양의 관리 정상완이 사람을 보내왔다. 군자금 수만 량을 협조하겠으니 음력 12월 그믐 광주와 담양을 치고 무기고를 탈취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관찰사 신응희(申應熙)가 최와 정을 내장원에 공무 출장을 보내어 거사는 성사되지 못하였다고 한다.주3)
주3) 김동수, <의병열전>(광주일보 1977년 1월 22일자)
참고문헌
- 전남폭도사
- 일본군 보병제14연대 진중일지
- 성재선생거의록 약초(권2) 등
- <의병열전>(전남일보 1977년 1월) 등
6. 추월산성 전투와 기삼연의 죽음
홍순권(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신년 1월 하순 기삼연은 호남 일대에 배일격문을 돌리고 아울러 일본인 관민(官民)의 목에 현상금을 걸고 병사들과 주민들의 항일투쟁을 독려하였다. 그러나 한 겨울 추운 날씨에다 구정이 가까워 오면서 군사 활동이 한층 어렵게 되었다. 기삼연 또한 거동이 불편하였다.
그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새 은신처를 찾아 그 일생의 마지막 전장이 될 담양 추월산성으로 들어갔다. 성 주변 험한 산세가 믿을 만하여 이곳에서 설을 맞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밤이 깊어가자 뜻하지 않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노숙하는 병사들의 옷은 젖어 추위를 견딜 수가 없는데다 끼니조차 걸어 굶주린 상태였다.
이 때 수비의 허술함을 틈타 일병들이 기습 공격을 가해 왔다. 1908년 1월 29일 밤이었다. 일병들이 의병군을 바로 뒤따라 온 탓에 미처 싸움에 대비할 겨를 도 없었다. 공격을 시작한 적병들은 총을 요란하게 쏘아댔다. 의병군은 죽음을 무릅쓰고 힘을 다해 대항하였다. 전투는 밤새 계속되었다. 이때의 전황을 김용구의「의소일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날이 밝자 기삼연과 더불어 김용구, 유인수(柳寅壽), 김익병(金益秉) 등은 힘을 합쳐 적병과 종일토록 싸웠다. 적은 계속해서 응원병을 보내와 그 수효가 엄청났다. 총을 맞고 죽은 자 엄청나게 많았다. 아군 또한 죽은 자가 30여명이나 되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적이 먼저 퇴각하였다. 아군 또한 부대를 이동하여 추월산성 아래 현양동(見陽洞)에 진을 쳤다.”
기삼연의 마지막 격전지였던 추월산성 전투에 대해서 일제측은 두 가지 기록을 남겨놓았는데, 이 때 일병 측의 피해도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 중 경찰이 작성한「전남폭도사」는 다음과 기록하고 있다.
“1월 30일 거괴 기삼연이 이끄는 4백의 ‘비도’(의병에 대한 일제의 비칭)가 담양군 용면(龍面) 성문리(城門里, 현 산성리)를 점령하고 곧 담양을 습격하려고 함에 주재소 순사가 광주에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순창수비대와 협력해서 기선을 제압, 즉각 성문리의 적을 공격하여 궤란 시켰다. 적의 사망자 23, 부상자 30이다. 노획물은 화승총 5정이며, 야마니시(山西) 일등졸(一等卒)이 부상하였다.”
또 다른 전투 기록인 광주수비 제2대대 요시다(吉田) 소좌의 전보 보고는 다음과 같다.주1)
“어제 30일 오전 5시부터 순창수비대 시마자키(島崎滿明) 군조 이하 7명은 담양의 서남 1리에서 기삼연이 솔하는 적 4백과 충돌하여 오후 3시까지 전투하여 30여명을 죽이고, 소 20두와 기타 수종의 물품을 노획하였다. 일등졸 마야니시(山西勝四郞)는 오른쪽 대퇴부에 관통총창(貫通銃創)을 입어 중상이다. 적의 대부분은 서북 백양산 방향으로 궤주한 것 같다. 내일 2월 1일 이마무라(今村) 중위의 1대(隊)를 해지(該地) 방면으로 파견하려 한다.”
주1)「진중일지」(일본군 보병 제14연대 편), 1908년 1월 31일자. 동 1908년 2월 5일자에 수록된 순창수비 제7중대 中條 소위의 보고 내용은 전과 사실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월 29일 오후 8시 담양 남방 약 1리에 적 수백이 집합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시마자키(島崎) 군조 이하 6명을 파견하였는데, 30일 오후 7시 귀래 보고는 좌와 같다.
<1> 담양으로 전진 도중 담양군성산(潭陽郡城山)(순창 서방 약 3리 반, 담양 동북방 약 1리 반 ; 추월산성을 지칭함) 산정에 봉화를 발견함에 따라 동지로 향해 전진함
<2> 30일 오전 8시 城山에 적 약 4백 집합해 있음을 발견하고 곧장 이들을 공격하여 전투 6시간 반의 후 총검 돌격하여 격퇴함. 적은 서방으로 도주함
<3> 차 전투에서 적의 전장에 유기한 사체 23(내 左翼隊長 및 六隊長을 포함함), 부상자 50을 내려가지 않을 것. 노획품 말 1두, 소 10두 한전(韓錢) 2관 8백문, 총 15정, 화약 5근, 기타 잡품 다수.
<4> 아군 부상 1, 소모한 탄약은 580발이다.
이상의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당시 일병 측에서는 담양군 주재소 경찰 병력과 인근에 주둔해 있던 순창수비대 병력이 합동으로 참가했음을 알 수 있다. 광주수비대에 지원을 요청한 이마무라 토벌대는 추월산성 전투가 종료된 이후에야 도착하였다.
캄캄한 밤안개까지 짙게 깔려 피아가 서로 분간할 수 없는 상황을 이용하여 무사히 성을 빠져 나와 현양동에서 진을 친 기삼연은 이튿날 다시 행군하여 순창군 복흥면 사창리로 진을 옮겼다. 기삼연은 부상당한 발의 환부가 악화되어 더 이상 행군이 불가능했다. 이곳에서 기삼연은 휘하 부장들을 불러 모으고 군무를 통령인 김용구에게 일임한다고 선언하였다. 부장들은 만류하면서도 결국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이제 발을 다쳐 종군하는 것이 불가능하니, 군무의 전권을 그대에게 맡기노니, 부디 신중히 임무를 다하여 나라의 원수를 갚아주기를 바라오. 또 칼과 인장을 주며 말하기를 그대의 경륜과 지략은 이미 내가 아는 바이니 무엇을 더 바라리오라고 하였다.”
김용구는 눈물을 흘리며 기삼연으로부터 칼과 인장을 받았다. 이들과 헤어진 기삼연은 순창 구수동(九水洞 순창군 복흥면)에 있는 재종제(再從弟) 구연(九衍)의 집에 머물렀다.
1908년 2월 2일 설날이었다. 기삼연이 막 아침상을 받고 숟가락을 드는 순간이었다. 일병 20여 명이 돌입하여 기삼연을 내놓으라며 주인에게 총칼을 들이대고 위협하였다. 기삼연은 순순히 나서서 그들의 오랏줄을 받았다. 당시 기삼연을 체포한 것은 광주수비대대장(보병 제14연대 2대대장) 요시다(吉田勝三郞)의 명령을 받고 추월산성에 도착하였다가 전투가 종료된 것을 인지하고 곧 바로 기삼연의 뒤를 밟고 따라온 이마무라(今村順吾) 중위의 휘하 부대였다.
이 날 선봉장 김준 부대는 창평 무동촌(無童村)에서 요시다가 파견한 가와미츠(川滿希建) 조장이 이끄는 일본군 토벌대와 싸워 토벌대장 가와미츠와 부하 2명을 죽이고 1명에게 부상을 입히는 등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날 길에서 기삼연의 체포 소식을 듣게 된 김준은 승전의 여세를 몰아 광주로 호송 중인 기삼연을 구출하기 위해 정병 30여 명을 선발하여 이끌고 달려 왔다.주2) 김준은 기삼연을 구하러 담양 애교(艾橋)를 거쳐 광주 경양역(景陽驛)까지 추격했으나 기삼연은 이미 수감된 뒤였다.
주2)「성재 기선생 거의록 약초(권3)」에서는 김준이 무동촌에서 적장 요시다(吉田)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착오에 의한 것이다.「진중일지」(일본군 보병 제14연대 편)에 의하면 당시 김준부대와 교전한 적장은 가와미츠조장(川滿曹長)임 명백하다.
기삼연이 담양에서 붙잡혀 광주로 실려 가는 모습을 본 연도의 주민들 가운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튿날 1908년 2월 3일 기삼연은 광주 사장(沙場 현 광주공원 앞에서 적에게 피살되었다. 일제가 기삼연을 이처럼 재판 절차도 없이 즉결 처형한 이유에 대해서 종손인 기광도(奇廣度)는 일본군 토벌대장이 선봉장 김준에게 살해당한 것에 대한 분풀이였다고 해석하였다.
추론컨대, 이밖에 날로 높아가는 호남의병의 항일 투쟁의 기세를 꺾기 위한 의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두 가지 요인 모두 작용했을 것이다.
기삼연의 처형 소식을 들은 광주부중은 애도를 표하기 위해 수일동안 불을 때지 않았다고 한다. 또 설인데도 불구하고 부녀와 아이들은 화려한 의복으로 거리에 나오지 않아 친척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 같았다고도 한다. 그만큼 호남지역 항일의병의 수장을 잃은 광주 민중들의 슬픔은 컸던 것이리라.
기삼연은 죽기 직전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出師未捷身先死, 谷日腹年夢亦虛
출사미첩신선사, 곡일복년몽역허
싸움터에 나가 이기지 못하고 먼저 몸이 죽으니,
일찍이 해를 삼킨 꿈은 또한 헛것인가.
어머니의 태몽을 상기한 이 시에는 일제와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한 기삼연의 한과 슬픔이 짙게 묻어난다.
기삼연의 시체가 그대로 광주천에 버려져 일인들에게 갖은 수모를 당해 수습마저 어려웠으나, 광주 선비 안규용(安圭容)이 관을 준비해와 광주 서쪽 탑동(塔洞)에 장례를 지내고 “호남의병장 기삼연”이라 새긴 목비(木碑)를 세웠다고 한다.주3) 뒷날 기산도가 기삼연의 묘를 장성군 황룡면으로 옮겼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기삼연의 공을 기리어 그에게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주3) 오준선이 쓴「의병장 기삼연전」에는 안규용이 광주 서쪽 탑등(塔嶝)에 기삼연을 장례하였다고 했으나, 탑등은 탑동의 오기인 듯하다. 종손 기광도가 쓴「성재공행록」에는 종손 기산도가 서울에서 내려와 광주 서쪽 탑동(塔洞)에 기삼연의 시신을 묻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기삼연의 사후에도 일본군은 호남지역의 의병세력을 진압하기 위해서 더욱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대규모의 토벌작전을 감행하였다. 특히 창평 무동촌 전투에서 김준에게 크게 패한 일제는 김준·김율 형제의 의병부대를 진압하는데 전력을 쏟았다. 기삼연에 의해 당겨진 항일투쟁의 횟불은 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더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1908년 2월 5일 대구에 본부를 둔 한국 주둔 일본군 남부수비관구사령관 츠네요시(恒吉忠道)는 광주지역 인근의 호남의병을 진압하기 위한 특별 명령을 제14연대장 키구치(菊池主殿)에게 하달한다. 이 작전의 요지는 연대장이 직접 대구수비대의 보병 2소대 및 공병 1분대(하사 이하 12명)을 이끌고 오는 7일 대구 출발 가능한 한 속히 광주에 도착하여 해지 부근의 각 수비대를 함께 지휘하여 의병을 소탕하라는 것이었다. 작전 기간은 3내지 4주간이며, 정황에 따라 목하 전라남도 부근에서 행동하고 있는 ‘기병중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특별히 허가하였다. 이에 따라 제14연대 연대장을 필두로 연대본부 제1중대, 공병 1분대와 함께 기병 1개 중대, 그리고 광주수비대대로 구성된 대규모 토벌대가 편성되었다.주4)
주4)「진중일지」, 1908년 2월 5일자.
이리하여 한일강제병합의 전주곡인 ‘의병학살’의 광풍이 무신년 벽두부터 호남일대에 다시 세차게 불기 시작하였다.
<참고문헌>
-「성재 기선생 거의록 약초(권3)」
-「의소일기」
-「진중일지」(일본군 보병 제14연대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