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게 무슨 샐까. 높다랗게 떠서 쌀 한 톨만치 작아진 새. 쓸어 담으면 한 됫박은 되지 싶은 새가 행렬을 지어 날아간다. 행렬이 용하다. 일자모양으로 가지런히 날아가다가는 한가운데를 구부려 삿갓모양이 된다. 일자모양 삿갓모양 새의 행렬이 천마산 너머에서 불쑥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고 바다 건너 영도 봉래산 너머에서 불쑥 나타났다가는 사라진다.
송도해수욕장 오른쪽 끝자락 포구 암남. 배는 우측통행이다. 오른쪽으로 들어오고 오른쪽으로 나간다. 갈매기 서너 마리가 들어오는 배 나가는 배 꽁무니를 기웃거린다. 높다랗게 떠서 날아가는 새의 행렬에는 끼일 염도 못 낼 갈매기다. 행렬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갈매기다. 배에서 활어를 퍼내자 그 소리를 어떻게 엿들었는지 갈매기가 또 기웃거린다.
"지금이 방어철 아닌교." 방금 퍼낸 활어는 방어. 뜰채에 한가득 담긴 활어가 파닥댄다. 옆에 대인 배에서는 모자를 눌러쓴 뱃사람이 소금에 절인 생선을 토막토막 썬다. 선착장 시멘트 바닥에 퍼지고 앉아 주낙채비를 차리는 뱃사람은 그게 '삼마'라는 고기란다. 꽁치 종류란다. 험한 일이라곤 안 해 봤을 선비상인데 손바닥은 온통 굳은살이다.
옆에 퍼지고 앉아 얘기를 나눈다. 전남 여수 사람이고 직장을 다니다가 뱃사람이 된 지는 이십여 년이다. 포구는 원래 송도 해수욕장 입구 거북섬 근처. 도로가 넓혀지고 매립되고 하면서 사오 년 전에 이리로 옮겨왔다. 잘 잡히는 고기는 붕장어와 납세미. 같이 주낙채비를 하던 할머니가 이 대목에서 끼어든다. "납세미 좋은 게 있는데 사 갈라요?"
나무섬 형제섬 외섬 빙섬. 어디서들 잡느냐고 묻자 섬이 들쭉날쭉 나온다. 태종대 주전자섬을 여기에서는 빙섬이라고 부른다. 주낙바늘이 어림잡아도 일이백 개는 되고 그런 채비를 한 번 출조에 일곱여덟 통씩 싣는다. 토막토막 썬 삼마를 이 바늘에 꿰어 붕장어도 잡고 납세미도 잡는다. 바늘마다 고기가 물리면 마릿수가 엄청나겠다는 공치사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이것 다 잡히면 부자 되게요? 한 마리 안 잡힐 때도 많아요." 배는 새벽 서너 시에 나가 오전에 들어온다. 고기를 잡을 때 따지는 것은 물때와 조류. 그것보다 더 따지는 것은 자리. 아무 자리나 고기가 있는 게 아니다. 좋은 자리를 찾아 더 일찍 나가고 더 멀리 나간다. 좋은 자리를 찾아도 파도가 세면 점찍은 곳에서 그물이 벗어나기도 하고 흉기를 들이대는 중국 철선에 쫓겨나기도 한다.
물이 들어 수위가 높아진다. 염려할 만큼 높지는 않지만 은근히 신경이 쓰인다. 어디까지 높아지려나. 뒤로 물러앉아야 하려나. 다행히 물은 발을 담그고 싶도록 맑다. 하수처리장을 옮기고 나서 물이 맑아졌다고 한다. 여기 물이 맑은 만큼 저기 해수욕장 물도 맑다고 한다. 저만치 송도해수욕장이 보인다. 철이 아닌데도 백사장을 걷는 이가 제법 보인다.
송도해수욕장. 어린 나의 귀에 물을 채운 해수욕장이다. 그로 인해 귓병을 앓고 그로 인해 육사진학을 접게 한 해수욕장이다. 바다 두려운 것을 맨 먼저 가르쳐준 송도. 낚시를 해도 물에서 멀찍이 떨어져 낚시한다. 그러나 탓할 일만은 아니다. 나이 서른 무렵부터 사람으로 인해 귀에 물이 차는 것을 삼가고 서른부터 사람으로 인해 허우적대는 것을 꺼렸으니 그것만 해도 어딘가.
나를 군인 대신에 시인이 되게 한 바다 송도. 바닥을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서 멀찍이 떨어지게 한 바다 송도. 내가 걸은 길과 걸을 뻔한 길을 본다. 지금의 나와 나일 뻔한 나를 본다. 길과 길이 엇갈리고 나와 내가 뒤섞인다. 앞날이 불안하던 연인과 건너던 불안의 구름다리는 이제 콘크리트 다리가 되어 흔들어도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불안하던 그때가 좋은가.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지금이 좋은가.
'오랜 기억의 흔적을 따라/ 송도 끼고 감천 가는 길// 해풍에 가슴 열고/ 기다림 풀어 출렁이는 곳// 여기는 옛 혈청소 모짓개 자리/ 태공은 낚대 드리워 꿈을 낚는데// 솔숲 푸른 바다의 향기/ 파도치는 젊은 날의 열정// 떠나도 떠날 수 없는 물빛/ 신기루 같은 남녘 바다여'-손화영 시 '암남공원'
암남공원은 포구에서 해안 산책로를 따라가면 나온다. 공원입구에 동물들을 검역하는 검역소가 있다. 검역소를, 이전에는 혈청을 검사하는 곳이라 해서 혈청소라 불렀고, 부근 마을을 모짓개 또는 모지포라 부른다. 내가 다닌 중학교는 송도. 학교에서 이곳까지는 차로 십 분 거리다. 빡빡머리 그 시절을 어디에서 찾으랴. 떠나도 떠나지 않은 물빛이 푸르다. 푸른 바다 푸른 물빛이 가슴을 출렁인다.
"백 프로 자연산 보장!" 삼마를 써는 뱃사람 안주인은 일흔의 김우강 할머니. 부부가 뱃일을 함께 한다. 이름을 한사코 밝히지 않으려다가 자연산에 의문을 품자 그제서야 밝힌다. 이름을 내걸고 여기 고기는 모두 푸른 바다 푸른 물빛이 키운 자연산임을 보장한다. 첫 번째 천막횟집 강 씨 아주머니도 마찬가지다. 당일 잡은 고기라 맛이 보통 자연산과는 다르단다. 수족관은 따로 없어 손님이 찾으면 배 물칸에서 꺼내온다. 이날 잡은 고기는 방어와 쥐고기. 한 접시에 만오천 원이다.
'감척만이 살 길이다 특별감척 실시하라.' 천막횟집에서 통화를 엿듣고 계장인 줄 안 황부복 어촌계장에게 감척을 요구하는 현수막에 대해서 묻는다. 뱃사람 연령이 많고 배도 노후되고 뱃일 여건도 안 좋으니 샀다 안 샀다 하지 말고 꾸준하게 배를 사 들이라는 요구다. 잡은 고기를 직접 팔도록 허가해 주기도 바란다. 포구에는 잡은 고기를 직접 파는 천막횟집이 세 집. 처음 집이 강 씨 집이고 둘째가 해녀 여섯 명이 같이 하는 해산물집, 그리고 형편이 딱해 주변에서 돌봐준다는 셋째집이다. dgs1116@hanmail.net
■ 송도해수욕장 - 1913년 일제가 단장한 국내 첫 공설해수욕장
부산 최초의 신작로는 어딜까? 충무동에서 송도로 들어가는 일명 송도윗길이다. 송도윗길 본래 이름은 샛디재. 목욕을 좋아하고 해수욕을 좋아하는 일본인 필요에 의해 1920년대에 닦였다. 송도아랫길은 이 일대 남항이 매립되면서 1939년 생겼다. 남항매립은 1천톤급 배가 접안하는 항구를 만들고 일본인 거류지를 넓히려는 공사였다.
송도는 원래 구름다리로 건너가던 거북섬. 섬에 소나무가 자라서 송도였다. 일본인이 섬을 허물어 수정(水亭)이라는 휴게소를 짓고 해수욕장으로 단장했다. 1913년 일이다. 이로써 송도해수욕장(사진)은 우리나라 최초의 공설해수욕장이 된다. 해방 이후 휴게소는 풍파에 쓰러지고 터만 거북등처럼 남아 거북섬이 되었다.
송도해수욕장 3대 명물은 케이블카와 구름다리와 다이빙대. 셋 다 세월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철거되었다. 태풍과 해일, 주먹구구식 개발 등으로 명성을 잃어가던 송도. 새 밀레니움 5년에 걸친 연안정비공사로 백사장은 곱절로 넓어지고 관광지 명성은 치솟고 있다. 태풍 셀마가 닥쳤을 때 상가 지붕에까지 날려 와 죽은 거북이 기억난다. 등이 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