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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상실된 불립의 언어들
-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중심으로
박철영(시인, 문학평론가)
1. 우울한 과거 시간 스케치
기형도의 시는 전체적으로 유년기 체화된 기억으로부터 채취된 시다. 그만큼 시인에게 흐르고 있는 우울한 비극적 세계인식은 보다 일찍 형성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기억 상태는 백 프로 사실과 부합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기형도의 시에서는 회상을 통해 서술된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 해도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거의 그 시대에서는 일반적 사회 현상이었고 다들 가난이라는 일상을 끼니처럼 알고 살았기 때문이다. 감상이 시속에서 생생하게 발화되어 성장기를 넘어선 청년기에도 반복적으로 시화詩話하고 있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 기억들은 즐겁고 기쁜 회상이 아닌 슬프고 좀더 비극에 가깝다.
대부분 누구나 유년기의 슬프거나 가난한 추억은 있기 마련이다. 그런 유년기의 체화된 기억은 일시적이거나 도래하는 미래의 시적 세계에서는 열린 의식으로 환기된다. 전체적으로 기형도의 시속에서 관류하고 있는 슬픔과 고통의 주류는 가족사적 가난과 깊숙하게 연관된 이별의 반복에서 오는 질량이다. 이어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가난에서 비롯된 슬픔이나 이별이 청년기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물론 그런 연유가 분명하게 있을 수 있다고 하지만, 청년기 기형도의 시속에서는 어느 정도 탈색의 징후가 나타났어야 했다. 안타깝게도 그러하질 못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성장기 이면에 놓인 굴곡된 삶을 좀더 입체적으로 감각해낼 필요가 있다. 물론 생활의 폐허에서 길어 올린 괜찮은 서정시 마저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시어에 대한 감수성이 더해져 오히려 <病>에서처럼 사물事物로 다가온 풍경을 많은 고민 없이 죽음의 이미지로 전환하는 생리에 있다.
내 얼굴이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
시작한 이후, 나는 主語를 잃고 헤매이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
가끔씩 숨이 턱턱 막히는 어둠에 체해
반 토막 영혼을 뒤틀어 눈을 뜨면
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이 곱게 접혀 있는
단단한 몸통 위에,
사람아, 사람아 단풍든다.
아아, 노랗게 단풍든다.
-<病>전문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똑같은 풍경이 때론 낯선 때가 있다. 따라서 매일 익숙한 풍경도 낯설지만 문득 거울 앞에 선 자신의 얼굴과도 낯설어 한참 되묻고 싶을 때가 있다. 어쩌면 매일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자신을 아예 잊고 살아가는지 모른다. 시인은 그런 자신을 인지하는 순간 가혹할 정도로 낯설어한다. “主語를 잃고 헤매”는 나라는 사람은 정체성을 잃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각박한 세상에 놓여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런 일상을 바라보면서 기형도 시인은 매번 풍경속 사물들을 죽음과 연관 짓는다. 그의 모든 시는 과거의 기억 위에 고통이란 사물을 투사하기 때문이다. 매번 부딪치는 풍경 앞에서 또 다시 심각한 자신속 내재된 과거를 주저하지않고 게워내 되새김질한다. 낯선 사물을 통해 긍정적으로 변화하려는 자신의 의지나 변곡점을 찾으려고도 노력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제의 오늘로 비친 얼굴에서 “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어버린 자신에 대해서도 일말의 거부감 없이 이내 긍정하고 만다.
기어코 “가끔씩 숨이 턱턱 막히는 어둠에 체해/반 토막 영혼을 뒤틀어 눈을 뜨면/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이 곱게 접혀 있는/단단한 몸통 위에,/사람아, 사람아 단풍든다./아아, 노랗게 단풍든다.”며 계절적 변화의 풍경마저 비관적 인식으로 접근한다. 계절이 바뀌어 노랗게 물들어가는 단풍마저 시인은 고통스런 죽음으로 예단한다. 순수가 시의 본질을 탐하려는 의지를 벗어난 직관이라고 보았다면, 순수한 감성으로 사물에 다가가려는 노력마저 부정해서는 안된다. <10월>에서 마찬가지로 “한 때 절망이 내 삶의 전부였던 적이 있었다/그 절망의 내용조차 잊어버린 지금/나는 내 삶의 일부분도 알지 못한다/이미 대지의 맛에 익숙해진 나뭇잎들은/내 초라한 위기의 발목 근처로 어지럽게 떨어진다/오오, 그리운 생각들이란 얼마나 죽음의 편에 서 있는가/그러나 내 사랑하는 시월의 숲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떨어지는 나뭇잎을 통해 죽음을 예견한다. 쉽게 죽음으로 다가가는 것보다 시인이라면 최소한 자기 의지나 극복을 위한 예외적 고뇌도 있어야 함을 간과해서는 안되겠다. 따라서 문학 그 자체가 유토피아이고, 시도 그 범주에 드는 것은 당연하므로 유토피아로 접근하는 수단이거나 통로여야 맞다. 그렇지만 그런 전망에서는 벗어나 있다.
2. 풍경에 덧칠한 수채화
사람은 천명으로 일생을 살다 간다. 안타깝게도 인간은 천명의 의미를 죽음에 이르러서 무지했음을 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은 무력감으로 비통해한다. 따라서 죽음에 이르러 던진 그 위로의 짧은 말은 무의미할 뿐이다. 기형도 시인은 그가 남긴 시처럼 살다 홀연히 떠나갔다. 누가 뭐래도 스물 아홉의 생은 너무 짧은 생애다. 하기야 그러한 삶으로도 천명을 살다간 사람들보다 더 많은 의미를 시로 남겼고, 우리들에게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부채?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였는지 모르나 기형도 시인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이 한 동안 내 기억에서 잊혀졌다. 한참이 지난 뒤에서야 잊혀진 것이 아니고 가슴 한 켠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시인은 무슨 말들을 하고 싶었을까.
우선 기형도 시인의 시를 알기 위해서는 태생적 환경에 대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기형도 시인은 1960년 경기도 옹진군 연평도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어렵지 않은 생활을 했으나 아버지의 갑작스런 중풍으로 형편이 어려워진다. 아버지의 와병 이후 가족은 생계를 위해 연평도에서 육지로 건너와 도시 주변을 전전했다. 그러다 보니 어려운 생활 환경을 벗어나기 힘들었고 오랫동안 가난에 짓눌린 성장기는 이후 고스란히 시에 각인된다. 그런 시인의 삶은 시 곳곳에서 잔잔한 스토리처럼 쓰여져 애잔함과 때로는 슬픔 속에서도 무섭도록 냉정한 우울과 절망을 감각해내고 있다. 앞선 경험의 고유성으로 발화된 <안개> 에서도 예외일 수 없다. 안개라는 의미가 얼마나 오래 동안 먹먹하게 쓰여지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 부분
시집 첫 장에 실린 이 시를 그냥 넘길 수는 없다. 기형도 시인은 <안개>로 1985년에 동아일보 신춘에 당선되는 행운을 얻게 된다. 이후 기형도 시인의 대표적인 시로 자리매김되었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시는 이전에 많은 습작을 통해 얻은 결과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지만 시인의 의식 속에 굳어진 성장 속 환경은 온통 이 시가 바탕 그림처럼 존재한다. 안개는 산이나 바다나 작은 하천이면 어디든 살아있는 생명체로 존재한다. 그처럼 흔하게 볼 수 있는 안개를 시인은 예사롭게 넘기지 못한다. 안개는 육지의 샛강이나 산에서 서식하듯 형성된다. 유년기의 연평 바다의 해무가 아닌 샛강의 안개가 시로 발화되었는가를 고민해보게 된다.
그것은 자신의 성장기 암울한 시절과 닮았기에 당연한 것이라고 본다. 또한 시인은 안개를 그 시대의 어두웠던 사회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는 것부터가 그래서 예사롭지가 않다. 샛강 주변으로 반복되는 생활의 고통을 페허처럼 인식한 시기는 연평도에서 살았던 어린 아이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소싯적 바다에서 보았던 해무는 그저 일상적인 현상으로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지 생활 속 샛강 주변을 통해 새롭게 인식한 일상은 하루의 시작과 끝이었다. 그 시작은 공교롭게도 안개 속에 갇힌 사회의 일상으로 부딪쳐 왔고 어린 몸으로 부담하기에는 버거웠을 것이다. 뿌연 안개에 가린듯 불안한 하루 같은 삶에 익숙해진 시인은 불편하지만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로 작정해버린다.
그 안개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다가온다. 맞닥뜨려야 하는 현실이고 피해갈수 없다는 것을 안다. 샛강은 그래서 단순히 넘겨버릴 수 없는 기형도 시인이 살아온 과거속 일상의 전형이다. 샛강을 둘러싼 안개에 덮인 그곳을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곳으로 긍정한다. “이 읍에 처음 와본 사람은 누구나/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며 당연하게 받아 들여야 한다. 그곳을 회피하거나 우회해서 피해갈 방도는 없다. 가장 먼저 이방인이 통과해야만 하는 샛강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수 불가결한 생의 출발지임을 내비치고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도 사람들은 묵묵히 적응하며 살아가는 법을 터득해간다. 안개가 걷힌 후 “쓸쓸한 가축들”처럼 “지난 겨울엔/방죽 위에서 취객(醉客) 하나가 얼어 죽었다”지만 그마저 전혀 개의치 않는다. 이어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그것으로 끝이었”던 것처럼 불편하지만 별반 대수롭지 않다.
그런 일상의 주체들은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떠오르면 안개가 사라져버리듯 주변에서 그 어떤 존재감도 없이 소멸되어 버린다. 사실 노랗다거나 샛노랗다는 것의 의미를 안다면 반색할 컬러는 아니다. 황달처럼 죽음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 같은 태양이 지나간 샛강 주변은 다음날에도 흐릿한 안개가 존재한다.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며 보거나 듣는 사람은 있지만 누구 하나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는 부정적 인식으로 긍정하고 만다. 그것은 부정적인 사회 인식으로 바라보면서 사회가 안고 있는 불편한 모습을 안개라는 배설물을 통해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샛강은 단순한 자연 지형물이 아닌 우리가 사는 시대의 한 단면임을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샛강의 의미는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임을 강하게 직유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이 살아가는 생을 감싸고 있는 안개 또한 전혀 불편하지 않듯 우울한 역설의 은유임을 암시한다. 안개라는 이미지를 통해 피부적 감각과 사고를 마비시켜 판단을 유보하고 긍정해버린다. 시인의 <안개>라는 이미지가 성장기 체험에서 비롯되었듯 <위험한 家系,1969>에서는 더 확연하게 볼 수 있다.
3
그때 아버지는 채소 씨앗 대신 알약을 뿌리고 계셨던 거예요.
5
방과 후 긴 방죽을 따라 걸어오면서 나는 몇 번이나 책가방 속의 월말고사 상
장을 생각했다. 둑방에는 패랭이 꽃이 무수히 피어 있었다. 모두 다 꽃씨들을
갖고 있다니. 작은 시앗들이 어떻게 큰 꽃이 될까. 나는 풀밭에 꽂혀서 잠을 잤
다.
-<위험한 家系,1969> 부분
이 시에 적시된 1969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시가 쓰여진 시기를 뜻한다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그 시기의 기억을 더듬어 쓴 자전적 시라는 의미일까. 난 후자일거라고 생각된다. 여하튼 시속에 끝없이 이어지는 실재하는 무대 속 담화는 연극처럼 끝이 없다. 절망의 끝이 보이지 않는 두려움과 암울 그 자체다. 여기에서도 샛강을 관통하는 안개 속에 덮인 가족의 하루하루는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미 <안개>에서 보여주었듯이 사실성에 근거한 시詩 이전 현실의 기록은 참으로 냉정할 만큼 담담하다. 누구보다 시의 본질에 충실한 리얼리즘에 입각한 사실적 묘사에 출중하다는 것이다. 아홉 살 아이의 눈은 맑고 진실하다. 그래서 진실에 가깝도록 가슴 아픈 사실일 수밖에 없다. “그 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고 이어 “풍병에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다며 샛강의 물길처럼 잘 흘러가던 가족사에 절망의 안개가 덮이고 있었다. 그것은 재앙이었다. 이어 그 재앙으로 말미암아 맑고 끝없이 행복을 향해 흘러가야할 샛강 같은 기형도 시인의 가족사는 더는 흘러갈 수 없음을 의미한다.
“아버지, 그건 우리 닭도 아닌데 왜 그렇게 정성껏 돌보세요. 나는 사료를 한 줌 집어 던지면서 가지를 먹어 시퍼래진 입술로 투정을 부렸다. 농장의 목책을 훌쩍 뛰어넘으며 아버지는 말했다. 네게 모이를 주기 위해서야.” 풍병으로 몸이 아픈 아버지마저 호구지책으로 일에 내몰려야 하는 절박함을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쉽게 이해되지 않았을 추억의 한 토막임은 분명하다. 가난을 인식하게 된다. “선생님, 가정방문은 가지 마세요. 저희 집은 너무 멀어요. 그래도 너는 반장인데. 집에는 아무도 없고요. 아버지 혼자, 낮에는요. 방과 후 긴 방죽을 따라 걸어오면서 나는 몇 번이나 책가방 속의 월말고사 상장을 생각했다. 둑방에는 패랭이 꽃이 무수히 피어 있었다. 모두 다 꽃씨들을 갖고 있다니. 작은 시앗들이 어떻게 큰 꽃이 될까. 나는 풀밭에 꽂혀서 잠을 잤다. 그날 밤 늦게 작은누이가 들어왔다. 아버진 좀 어떠시니. 누이의 몸에서 석유 냄새가 났다.”며 이미 세상 돌아가는 판을 읽을 줄 아는 아이가 되어 있다. 그런 아이의 마음에도 미래에 대한 불안한 징후를 떨칠 수 가 없다. “언제가 봄이에요. 우리가 모두 낫는 날이 봄이에요?”라고 묻는다. 하지만 가족을 억누르고 있는 안개는 쉽사리 걷히지 않는다. 오히려 시인을 둘러싸고 있는 생의 안개는 도무지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고 더 짙어감을 알 수 있다. 기형도 시에서의 안개는 불행의 지속이나 반복을 의미하고 쉽게 불행이 소멸될 기미가 없다. 그것은 점점 죽음의 이미지와 겹쳐 좌초한다.
유년의 기억은 성장하면서 사라지거나 일부는 자아로 확장되어 가치관이 된다. 그러나 사고의 성장판이 멈춘 기형도 시인은 끊임없이 가난한 기억속 과거에서 시를 채혈한다. 그런 유년의 토대는 죽음이나 우울로 재 기억되고 시를 통해 절망한다. <죽은 구름>에서도 한 사내의 죽음이 등장한다. “아무도 모른다. 저 홀로 없어진 구름은 처음부터 창문의 것이 아니었으니” 하기야 시인의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졌을 때도 주변의 사람들에게는 남의 일로 치부되어버린다. 그래서 그럴까 죽음과 가까운 시어들이 암묵적으로 반복 복제된다. 그런 이미지는 굳이 죽음이라고 쓰여지지 않아도 가난과 궁핍의 언저리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더 우울하고 현상은 있되 감성이 부재한 詩語는 음산하도록 괴기스런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런 시적 항로는 <진눈깨비>나 <백야>에서도 쉽게 유추해볼 수 있다. 그렇지만 기형도 시가 갖고 있는 죽음이란 동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문학적 의미를 전혀 무시해버릴 수는 없다. 시속에서 끊임없이 그림자처럼 비집고 나오는 죽음은 기형도 시인의 시적 인식의 세계이고 미완의 집이기에 그렇다. 그의 시 전반에서 보여준 유년의 생명에 대한 설레임은 그 어디에서도 진전되지 못한다. 그의 시는 오히려 <안개>에서 걷힌 불편함을 <백야>와 <진눈깨비>뿐만이 아니고 <鳥致院>에서는 무기력한 죽음으로 다가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밤, 빛과 어둠을 분간할 수 없는
꽝꽝 빛나는, 이 무서운 白夜
밟을수록 더욱 단단해지는 눈길을 만들며
軍用 파카속에서 칭얼거리는 어린 아들을 업은 채
-<白夜> 부분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을 다했다, 진눈깨비
-<진눈깨비> 부분
나는 그때 크고 검은 한 마리 새를 본다. 틀림없이/사내는 땅 위를 천천히 날고
있다. 시간은 0시,/눈이 내린다.”
-<鳥致院>에서
눈은 일정한 방향성을 갖고 있는 하강체다. 아래로 아래로 내려오다 보면 기어이 지평선이든 수평선이든 닿게 된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시간을 쫓아 내린다. 사람도 어딘가에 발을 붙일 때는 망설이거나 멈칫한다. 하늘에서 내린 눈도 마찬가지로 쉽게 땅으로 날아들지 못한다. <鳥致院>가는 길도 하강을 모티브로 한다. 서울 쪽에서 방향을 잡으면 아래로 내려간다. 눈과 마찬가지로 시인은 서울에서 아래 지방으로 내려가는 중이다. 내려가면서도 고단한 서울 생활에 대한 번민을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런 날 하필 을씨년스럽게 눈마저 내리고 있다. 그런 열차 안에서 시인은 0시를 맞이한다. 그 0시는 기형도 시인에게 아픔처럼 기억되고 있는 어머니와의 이별에서 해후로 가는 짧은 시간이다. 기차 안 모든 사람들에게 노곤한 휴식으로 빠져들 수 있는 0시는 시인에게 어머니의 따스한 품이다. 서울에서 내려갈 수 밖에 없는 열차 속 사람들처럼 함께 맞이한 0시 위로 눈이 내린다. “일기 예보에 의하면 1시쯤/열차는 대전에서 진눈깨비를 만날 것이다”라며 미리 움추러들 지상의 시간을 걱정한다. 1시라는 시간에서 0시로 다가가려면 지루하도록 긴 11시간의 기다림을 요구한다. 기형도 시인은 누구보다 기다림이 주는 고독과 두려움을 익히 체험했기에 고통을 안다. 어찌 보면 조치원으로 내려가는 남자처럼 서울에서의 긴 세월은 녹록치 않았다는 것이다. 기어이 “서울은 내 둥우리가 아니었습니다”라며 남 말을 하듯 자신의 고달픈 과거를 독백처럼 적고 있는지 모른다. 이방인 같은 자신의 처지가 차창으로 부딪쳐 떨어지는 눈처럼 겉돌아 더 쓸쓸해 보이는 “크고 검은 한 마리 새”같은 청년의 모습을 기어이 보고 만다. 그 새는 다름 아닌 자신의 머지않은 모습인 것이다.
우선 눈이 감각적으로 상징하는 의미는 차갑다. 눈은 대기 중 수분의 급강하로 형성된 반응체다. 이러한 눈이 내리는 상황적 시기는 추운 겨울이어야만 한다. 연 중 볼 수 없기에 진귀한 가치를 충분히 갖고 있고 선물적 의미로 사람들에게 다가온다. 이것은 설레임이고 환희의 상징이기도 한 일반적 인식이다. 따라서 눈이 내리는 풍경은 보는 이의 마음을 지극하게 하거니와 몹시 들뜨게 한다. 그 눈이 진눈깨비던 펑펑 쏟아지는 눈발이던 관계없이 보통 사람들은 한층 기분이 고무 된다. 그런 들뜬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노래하거나 그날 만큼은 모든 고통을 잊고 눈빛처럼 환해지려 한다. 그렇지만 기형도 시인은 하늘에서 내린 눈을 보며 오히려 아픔같은 기억으로 환기한다. <白夜>는 어딘가를 지나가는 여정이었고 줄곧 퍼붓던 눈이 이내 그친다. 눈 덮인 주변을 통해 싸락눈의 비명을 떠올리고 빈 골목을 지나며 아무도 덮어줄 수 없는 쓸쓸한 빈방에 놓였던 담요를 떠올린다. 이어 익히 들었던 궁핍을 버티지 못하고 튀어나오는 받은 기침소리로 다가간다. 그런 것 마저 기어이 술병의 취기로 잊어야하는 사내는 시인의 자화상임이 분명하다. <白夜>와 <진눈깨비>를 통해 너무나 흡사한 자신의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들려주고 있다.
여기서도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며 그친 눈발이 시작된다. 시인 스스로도 “이런 귀가 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듯 낯설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런 시인은 <沙江里>를 “아무도 가려 하지 않았다.”며 자신의 속내를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기꺼이 추억으로 온전하게 존재하지 않은 장소가 <沙江里>다. 사람이 찾아가지 않는 <沙江里>를 기어이 찾아 나선다. 그런 곳은 항상 눈발이 죽음에 이를 듯이 사정없이 내리 꽂혔다. 묘지에 내린 눈발은 그곳을 찾아가본 사람만이 죽음처럼 차갑게 느낄 수 있다.
“어둠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사위어 있었다.”는 그곳을 통해 죽음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차갑게 얼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도무지 내린 눈을 녹여줄 수 있는 체온을 느낄 수가 없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 눈이 쌓여질수록 그나마 남아있는 체온 속 자의식마저 사라지고 만다. 더 안타까운 것은 <위험한 家系,1969> 에서는 “썰매를 타다 보면 빙판 밑으로는 푸른 물이 흐르는”실낟같은 희망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어느 곳에서도 고통을 극복하려는 희망이나 각성은 찾아볼 수 없다. 시인의 가장 애절한 유년 시절은 청년기 기형도 시인의 시적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 <엄마걱정>에서는 시인을 괴롭힌 엄마와의 이별이 주는 반복적 상처의 크기를 가늠하게 한다. 이어 체험한 고단한 우울은 시적 세계로 더 깊숙히 침투하고 내면화되어 기층을 이룬다. 유년의 우울과 불안을 야기한 가난을 정서적으로 극복하고 서정시의 전망과 지향성을 획득해가는데 매번 실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엄마걱정>전문
시인의 어려운 성장 환경을 우선 이해해야 된다. 그러나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며 속절없이 과거를 소환해 슬픈 유년을 자극한다. 과거의 반복적 의미를 벗어나지 못할 때 서정시의 울림의 농도는 약해질 수 밖에 없다. 열무 삽십 단은 절박한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가계수단이다. 그런 호구지책으로 장사를 나가는 엄마는 시인에게 무한한 기다림과 사랑이다. 그 부족한 사랑의 빈터는 항상 시인의 어린 몫으로 어둠처럼 어김없이 찾아왔다. 누구나 아이 때 심리 상태는 엄마의 품이나 주변을 쉽게 떠날 수 없다. 자아가 완성되기 전 아이에게 모성은 절대적 보호막이기에 그렇다. 아이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어느 정도 독립이 될 나이까지는 개별적일 수밖에 없는 보편적 정서일 것이다. 그래서 “열무 삼십 단을 이고/시장에 간 우리 엄마”를 기다리는 유년기 수유적 모성 지향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고 본다면 그 또한 대수롭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런 어둠 속 기다림이 반복되면서 성장기 정서에 영향을 미친다. 유년기 어둡고 무서웠던 ‘빈방’이나 ‘빈집’의 적막함과 어둠처럼 밀려오는 ‘안개’같은 두려움이 시인을 수시로 괴롭힌다. 시인에게는 그런 환경에서 보듬어줄 어머니는 유일한 위안일 수밖에 없다. 하루 종일 열무 삼십 단을 팔기 위해 돌아다니다 지쳐 돌아오는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무겁게 짓누르듯 돌아오는 어머니다. 아이에게는 긴 하루 동안의 이별을 고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중풍으로 쓰러진 아버지의 묵음보다 더 진한 ‘빈방’에서의 고요는 시인에게 어둠보다 더 큰 두려운 시간이다. 이런 심리적 이별에서 오는 불안은 오랫동안 시인을 붙들어 놓아주지 않는다. <바람의 집>에서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며 다독이던 어머니를 쉽사리 떨칠 수가 없다. 열무 삼십 단을 팔아야만 돌아오는 어머니를 기다릴 때 소리 없이 흘리며 훔친 눈물이었다. 오히려 그런 눈물 대신 과거 속성을 성장 기제로 수용 확장하여 서정적 지평을 열어갈 절호의 시점이었다. 하지만 시인은 시의 미적 모험을 진전시키려는 노력의 결여로 말미암아 짧은 생애 동안 내면화된 슬픔은 더 깊어 <빈집>을 촉촉히 적시고 만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엷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빈집> 전문
어둠에 가려 나는 더 이상 나뭇가지를 흔들지 못한다. 단 하나의 영혼(靈
魂)을 준비하고 발소리를 죽이며 나는 그대 창문(窓門)으로 다가간다. 가축
들의 순한 눈빛이 만들어내는 희미한 길 위에는 가지를 막 떠나는 긴장한
이파리들이 공중 빈 곳을 찾고 있다. 외롭다. 그대, 내 낮은 기침소리가 그
대 단편(短篇)의 잠속에서 끼어들 때면 창틀에 조그만 램프를 켜다오. 내 그
리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 침묵(沈默)은 언제나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닌다.
그대는 아주 늦게 창문을 열어야 한다. 불빛은 너무 약해 벌판을 잡을 수 없
고, 갸우뚱 고개 젓는 그대 한숨 속으로 언제든 나는 들어가고 싶었다. 아
아, 그대는 곧 입김을 불어 한 잎의 불을 끄리라. 나는 소리없이 가장 작은
나뭇가지를 꺾는다. 그 나뭇가지 뒤에 몸을 숨기고 나는 내가 끝끝내 갈 수
없는 생(生)의 벽지(僻地)를 조용히 바라본다. 그대, 저 고단한 등피(燈皮)를
다 닦아내는 박명(簿明)의 시간, 흐려지는 어둠 속에서 몇 개의 움직임이 그
치고 지친 바람이 짧은 휴식을 끝마칠 때까지.
-<바람은 그대 쪽으로> 전문
사람은 누구나 나고 죽는 순간까지 누군가를 사랑으로 구속한다. 사랑을 통해 혼자가 둘이 되거나 또는 다수가 되는 자연 법칙을 이룬다. 그런 사랑은 죽음에 이르러서야 끝이 나는 것이다. 사랑은 홀로 이루어질 수 없다. 누구든 대상이 존재해야 가능하다. 그런데 기형도 시인은 그토록 가슴속으로 오매불망한 사랑을 잃고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빈집>안에 외톨이가 된 자신마저 가두고 만다. 시인은 지금껏 너무나 많은 것을 잃고 살아왔다. 아버지의 중풍으로 인해 가족의 행복을 잃었다. 이어 누이의 죽음으로 그나마 한 점 햇빛처럼 따스했던 누이의 사랑마저 잃었다. 이어 부족한 사랑을 메워줄 사랑까지 잃었다면 절망의 절벽에 내몰린 것이나 다름없다. 개인사로 본다면 비극적인 그늘이 너무 짙다. 하지만 세상사 생로병사는 만남과 이별로 예고된 것이 하늘의 이치다. 암울한 삶의 연속에서도 희망을 발화시켜 자기긍정의 서정적 주체가 되어 미적 원형으로 소환해낸 경우가 허다하다. 기형도 시인은 시에서 과거의 체험을 시의 미적 완성으로 발화하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시는 고유한 체험을 통해 건강성을 회복시키려는 인식이 무엇보다 우선해야 한다. 패배적인 자세로 물러서는 유약함은 시에서 더는 허락되지 않는다. 어둠 같은 고통을 비집고 들어오는 한줄기 빛은 지상에서 가장 강렬하다. 그런 빛으로 부조浮彫된 시는 건강한 정신적 주어이기 때문이다.
3 . 오랜 피로에 닫힌 결어結語
그러나 기형도 시인의 스물 아홉 나이에 갖는 패배의식에 젖은 시가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사람들의 호감적 기제로 기여하는 데 문제가 있다. 시는 서정을 근간으로 자아의 존재적 가치와 살아 생동하는 데 있는 것이지 여운으로 감성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렇다. 긍정적인 시를 통해 독자에게 삶의 아름다움을 고양하는데 목적성을 둔다고 해도 틀림이 없다. 따라서 우울한 정서나 자학에 의한 죽음의 이미지는 그 시대의 사회 이미지와 결부되어 정당성을 획득한다 해도 불편함을 감출 수가 없다. 물론 기형도 시가 자학이나 우울함, 이별, 가난 등을 내세워 극복하려는 의지가 전무했다고 하지는 않겠다. 시인은 주어진 사회에서의 죽음 같은 불편함을 극복하고자 했지만, 그 의지를 어디에도 일관되게 주장하지 못했고 죽음에 함몰되어 버렸다. 물론 그런 이미지가 갖는 역설적 의미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에서 시인은 “내 생 뒤에도 남아 있을 망가진 꿈들, 환멸의 구름들, 그 불안한 발자국 소리에 괴로워할 나의 죽음들, 오오 모순이여, 오르기 위해 떨어지는 그대,”에서 처럼 스스로 죽음의 그늘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바람은 그대 쪽으로>에서 “단 하나의 영혼(靈魂)을 준비하고 발소리를 죽이며 나는 그대 창문(窓門)으로 다가간다. 가축들의 순한 눈빛이 만들어내는 희미한 길 위에는 가지를 막 떠나는 긴장한 이파리들이 공중 빈 곳을 찾고 있다.”며 사랑을 복원하려는 간절함의 의지도 보여준다. 그런 의지마저도 확고하지 않아 “그 나뭇가지 뒤에 몸을 숨기고 나는 내가 끝끝내 갈 수 없는 생(生)의 벽지(僻地)를 조용히 바라본다. 그대, 저 고단한 등피(燈皮)를 다 닦아내는 박명(簿明)의 시간, 흐려지는 어둠 속에서 몇 개의 움직임이 그치고 지친 바람이 짧은 휴식을 끝마칠 때까지.”로 한정해 버린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오랜 상처가 된 외로움을 끝내 극복하지 못한다. 스스로 상처를 키우며 살아가는 시인은 영원히 치유되기를 거부하며 다시는 열릴 수 없는 문을 안에서 걸어 잠궜다. 시간이 흐를수록 빛나는 죽음의 촉수에 그 누구도 다가가 만질 수 가 없게 되어버렸다.
끝으로 나는 기형도 시인의 시속에서 내밀한 희망을 담은 비의를 읽어내지 못한 우를 범했는지 모른다. 사실 그렇기를 더 바랄 뿐이다. 시의 정치성은 궁극으로 서정의 생명성과 맞닿는다. 그것은 시가 아무리 현실과 불협하다해도 건전한 확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는 호흡을 통해 새롭게 사물을 인화해야할 의무가 시인에게 무한함을 잊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