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고려태묘단체대화방에 올려진 내용으로 고려역사서, 인터넷자료, 개성왕씨세보 등에서 자료를 인용하였습니다.] 고려32대왕과 33대왕인 우왕과 창왕의 출생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하다.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와 그의 추종자들은 조선개국의 필연성을 그리고 조선을 미화하기 위하여 많은 내용의 고려사를 왜곡하였다고 후세 역사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우리가 현재 알고있는 고려의 역사는 조선의 유학자 김종서, 정인지 등이 왕명을 받아 편찬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가 모두이다.
고려 34분의 왕중 유일하게 우왕과 아들 창왕의 시호가 없고 고려사에 우왕이 신돈과 반야 사이의 아들이라 적고 있으며 심지어 고려사절요의 경우 고려33대왕 창왕의 재위기간 1년 5개월을 인정하지 아니하여 우왕과 고려34대왕 공양왕의 재위기간에 나누어 포함시켰다. 누군가 역사는 승리자의 것이라 하였다. 1392년 7월 17일 패국의 아픔이 가시가 되어 600여년이 지난 오늘도 개성왕씨 후손들의 가슴을 찌른다. ----------------------------------------------------------- 1365년 7월 7일생인 우왕은 선왕 공민왕의 급사로 10살 되던 해인 1374년 9월 25일 당시 실권자 이인임의 추대로 등극하였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모니노(牟尼奴)이다. 생모는 반야이며 적모는 추존된 순정왕후 궁인 한씨이다. 기록에 의하면 공민왕 붕어 3년전인 1371년(공민왕20년), 7세의 나이로 비로소 입궐하여 공민왕의 친모인 명덕태후(공원왕후)전에서 지냈다한다.
1376년(우왕2년) 2월, 신돈의 비첩인 반야가 밤에 몰래 태후전을 들어가 울부짖으며 우왕의 생모임을 주장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지 아니하여도 궁에서 나고 자라지 않은 그의 출생에 대하여 의혹이 많았다. 이 일은 이성계 일파가 “그가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다”라는 빌미를 후일 제공하였다. 태후는 이인임을 시켜 그녀를 옥에 가두게 하였고 같은 년 3월, 연천 숭의전 앞 임진강에 수장하였다.
같은 년 7월, 홍산(부여)에서 최영의 고려군과 왜구와의 전투가 있었다. 왜구는 임진란에서 겪었던 왜의 정예병이 아닌 해적으로서 1350년(충정왕2년)부터 고려 연안과 도서 지역을 침략하더니 급기야 내륙까지 약탈과 방화, 수많은 인명을 해쳤다.
왕은 초기에 친할머니인 명덕태후의 훈계를 받아 학문에 매진하고 몸가짐을 바로하였으나 1380년 1월, 태후 승하 후 주색잡기에 빠져 고려의 국운을 쇠하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또한 신빙성이 결여된다는 지적이 많다. 즉위 초기에는 명덕태후의 섭정을 받다가 훙서 후는 이인임이 실권을 휘둘렀고 1383년(우왕9년) 비로소 친정하였다. 그러나 이 후에도 이인임이 왕의 총애를 바탕으로 전횡하였다.
1380년(우왕6년) 8월, 즉위 후 6년이 지나 근비 사이에 아들 창이 태어났다.
같은 시기, 최무선이 화약을 발명하여 진포(군산)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쳤다. 진포대첩은 세계해전사에서 처음으로 화포를 사용한 전투이고 30년만에 고려 수군이 거둔 최초의 승리이었다. 대왜구 투쟁에서 고려가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이었다.
같은 년 9월, 황산(남원 운봉)에서 이성계가 왜 적장 아기바투를 살해하여 승리를 쟁취하였다. 이 전투로 그의 입지가 한층 강화되었다. 홍산과 진포 그리고 황산대첩을 고려말 왜구를 격퇴시킨 3대대첩으로 불린다. 황산대첩에 있어 고려의 황산은 한자로 荒山이고, 백제의 황산은 黃山(논산지역)으로 달리 쓴다.
황산대첩비 비각은 남원군 운봉면 화수리에 위치하고 조선선조 10년인 1577년에 세웠다. 임진란 발생 15년전이다.
1388년(우왕14년) 1월, 이인임의 전횡을 더이상 방치할 수 없어 최영과 이성계가 결탁하여 이인임과 그 일파를 숙청하였다. 일족은 극형에 처하고 이인임은 경산으로 유배보냈다. 추후 공양왕 재위 시 이인임은 부관참시되었다.
같은 년 2월, 최영이 백관을 모아서 철령 이북을 명나라에게 바칠 것인가 의논하였더니 모두 불가하므로 왕은 비밀리에 요동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같은 년 3월, 최영의 후실 소생을 2비 영비로 봉하였다. 최영은 “딸이 정실 소생이 아니니 배필로 부족하다” 하여 극구 반대하였으나 후에 뜻을 꺾었다.
그리고 8비로 왕흥의 딸을 선비로 봉하였다. 12세 전공판서공(왕흥)은 중시조 감정공(왕미)의 친아우로 개성왕씨세보에 출생일은 알 수 없으나 1401년(조선태종1년) 별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 감정공께서는 1365년(공민왕14년)생이시고 별세일을 알 수 없다. 비추어 보건대 전공판서공은 30대 초반 별세하신 걸로 추정된다.
세보에 의하면 판서공은 슬하에 2남2녀를 두셨는데 1383년(우왕9년) 9월, 우왕이 판서공의 집을 방문하였고 1385년에는 말 2필을 선물하였다한다. 왕흥의 딸은 원주변씨 시조 변안렬의 자제와 당시 약혼 상태에 있었으나 왕이 그녀의 학문과 용모에 반하여 후궁으로 삼았다.
같은 년 5월의 우왕폐위와 6월 이성계의 소청으로 판서공은 선비와 함께 유배되었다가 곧 복직되었고 1391년(공양왕3년) 이초의 옥사에 연류되어 청주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조선개국 후 문하평리를 거쳐 상의문하부사로 별세하였다.
이초의 옥사란 1390년 정5품 무관 중랑장인 이초가 이성계의 정변을 막고자 명나라 연경으로 건너가 이 사실을 알린 사건으로 명을 이용하여 이성계를 제거하고자 했다. 그러나 실패하여 고려유신과 왕족들이 청주 옥사에 하옥당한다.
대은 변안렬은 황산대첩에서 이성계보다 계급이 높았고 위화도 회군 이후인 1389년(공양왕1년) 10월 11일, 이성계 54번째 생일 좌석에서 이방원의 하여가에 불굴가로 답한 고려 충신이었건만 고려사 간신열전에 올려졌으니 역사 서술에 있어 편파성이 컸다. 만일 조선 개국을 긍정하고 동조하였다면 충신열전에 그의 이름이 올라가 있으리라.
불굴가의 내용은 이러하다. “내 가슴에 구멍 뚫어 새끼를 길게 꿰어 앞에서 끌고 뒤에서 당겨 몸을 갈리기는 네 뜻일지 모르지만 임을 빼앗고자 한다면 내가 누구인데 뜻을 굽힐 것 같으냐”
같은 년 5월, 원을 멸한 명황제 주원장이 철령 이북이 원래 원의 땅이라며 영토 반환을 주장하자 우왕과 최영은 요동정벌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출병한 5만의 군사가 압록강 위의 작은 섬 위화도에 도착하였지만 이성계와 조민수는 사불가론을 앞세워 왕명을 어기고 5월 22일 말머리를 개성으로 돌리니 개성왕씨 종사에 결코 잊을 수 없는 ‘위화도회군’사건이다. 위화도회군 후 이성계와 그의 추종자들은 최영을 숙청하고 우왕을 퇴진시켰다.
6월 8일 강화로 추방된 왕은 1389년(공양왕1년) 11월 강릉으로 유배되었고 12월 14일 시해되었다. 재위기간 14년에 어수 25세이었다. ----------------------------------------------------------- 창왕은 선왕 우왕이 추방된 다음 날인 1388년 6월 9일 이색과 조민수가 옹립하여 왕위에 등극하였다. 창의 나이 9세이었다.
1388년 12월, 최영이 살해되었다. 최영의 나이 16세 때 부친 최원직의 유언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금보기를 돌 같이 하라”. 선친의 유언을 받들어 평생 청렴하게 살았으나 성품이 우직하고 학문이 없어 자기 뜻대로 모든 일을 처리하는 것이 아쉬웠다고 역사는 전하고 있다. 사진은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최영장군 묘(합장)와 부친의 묘(뒤쪽)이다.
1389년 11월, 최영의 생질인 김저, 정득후 등이 이성계를 제거하고 우왕을 복위코자 하였으나 계획이 사전 발각되어 변안렬 등 신하들이 죽임을 당하였고 창왕도 물러나 서인이 되었다. 강화에서 선왕과 동일한 12월 14일 살해되었고 재위기간 1년 5개월인데 살해될 시 한국나이 10세이니 한국의 모든 군주중 가장 어린 나이에 죽은 왕이 되었다.
“나는 왕이 되기 싫었소이다.” 1392년 7월 16일, 왕대비 안씨(공민왕 4비)의 폐위교서를 받아 든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다음 주 펼쳐진다.
그리고 태조 이성계가 조선왕이 아닌 고려35대왕의 지위로 청룡포를 입고 7월 17일 수창궁에서 즉위한 사유를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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