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 나의 쉼터 평택항 / 송미희
평택항이 내려다보이는 사무실, 나는 창가에 기대어 따뜻한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오늘따라 바다위로 번지는 은빛 잔물결이 더 힘차게 반짝이고 있었다. '오늘 따라 파도가 거칠다...' 푸른 가로수가 세차게 나부끼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띠링' 하는 휴대전화 소리가 울렸다. 메시지였다. "강풍으로 인한 항만 통재로 00 여객선의 입항 시간이 15시 이후로 변경되었습니다." 오전에 들어와야 하는 중국 여객선이 오후로 미뤄졌다는 소식이었다. 출장 가려던 발걸음을 돌렸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나는 따뜻한 커피를 여유있게 마실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꼬여버린 업무 일정으로 심란한 마음을 다잡으며 컴퓨터 전원을 켰다. 바탕화면에는 해야 할 일들이 줄지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오히려 잘 된 거야, 모니터 화면 뒤편으로 은빛 바다는 여전히 힘차게 출렁거렸다.
나의 직업은 식물검역관, 평택항을 드나드는 수많은 배에는 바나나, 키위, 양파 같은 세계 각지의 농산물도 실려 있는데, 그 농산물에 병과 해충이 있는지 없는지 검사하는 일을 맡고 있다. 서해대교를 바라보며 일한 지도 벌써 5년, 누군가에게는 관광명소로 유명한 이곳이 나에게는 일상이 되었다. 영화에서 볼법한 알록달록한 컨테이너가 층층이 쌓인 컨테이너부두, 외체차가 즐비하게 진열된 자동차부두, 바다 건너편 서쪽 부두의 옥수수와 밀을 보관하는 싸이로 등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두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이색적인 광경이 이곳에 펼쳐진다. 멋진 풍경을 뒤로하고 작열하는 태양빛을 막기위해 블라인드를 내렸다. 밀린 업무 시작! 해충이 검출된 배추의 소독 장소를 옮기고 싶다는 요청을 승인해 주고, 최근 운영을 마친 특별검역 기간 보고서를 작성했다. 금지 식물(병해충 유입우려로 우리나라에 오면 안되는 식물)의 폐기 절차를 민원인에게 안내하고 틈틈이 관리도 마쳤다. 평택항의 거센 바람처럼 나의 시간도 빠르게 흘렸다.
"후유!" 크게 숨을 들이켜고 내쉬며 양팔로 기지개를 쭉 켰다. 뻐근한 어깨를 매만지며 창가의 블라인드를 올렸다. 항구의 동쪽과 서쪽 부두가 마주하는 좁은 항로를 따라 익숙한 실루엣의 배 한 척이 속도를 내며 달리고 있었다. 드디어 왔구나! 나는 출입증을 목에 걸고 여객터미널로 향했다.
식물 검역대에 앉자마자 입국객이 몰밀듯 들어왔다. 건대추, 팥, 녹두, 검은콩 등 중국 농산물을 카키색 포대에 둘둘 말아 포장해 온 소상공인부터, 화려한 옷으로 한껏 멋을 낸 중국 관광객, 가벼운 배낭의 일반인과 등산복 차림의 한국 관광객 등 수많은 인파가 물결처럼 넘실거렸다.
"국내 반입이 안되는 과일은 자진신고 해주시고요, 농산물은 검역 받고 통과해 주세요." 나의 안내에 사람들은 바삐 움직이는 듯 했다. 내가 물건을 확인한 후 세관신고서에 'PASS' 도장을 쾅쾅 찍어주고 있을 때였다.
"삐익 삐익 삐이이익!" 날카로운 벨 소리가 귀에 꽂혔다. 세관의 엑스레이 통관부서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였다. 아, 누군가 검역을 받지않고 그낭 나갔구나........... 하던 일을 급하게 멈추고 세관으로 달려갔다. 이미 엑스레이 앞은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전 아무것도 몰랐어요." "어휴, 이거 여행 갔다가 오면서 산 건데..." 모여있던 사람들은 나를 보자마자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세관 검색대 위에는 검사받지 않은 잣, 목이버섯, 참깨 등 온갖 중국 농산물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아무도 들을 수 없게) 조용히 한숨을 쉬고, "앞으로는 꼭 신고하시고 검역 받으셔야 해요." 라고 가장 친절한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물건 확인후 도장을 찍었다.
"당신, 이거 검사 안해서 나 버스 놓치면 책임질 거야?" 성난 아저씨 한 명이 나를 보더니 목청을 높였다. "그러니까요. 빨리빨리 좀 합시다." 같은 일행으로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도 그 말을 거들었다. 혹여 버스를 놓치고 국민신문고에 나를 신고하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에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변명할 수도, 싸울 수도 없었다. 그저 내 일만 묵묵히 해야 할 뿐이었다.
"여기 물건 보여주시고, 신고서 써 주세요." 재촉하는 관광객과 새치기하며 도장을 받으려는 상인들로 인해 내 앞은 사람들로 넘쳐흘렀다. 한참 뒤, 밀물 들어오듯 우르르 들어왔던 사람들은 입국심사, 검역, 세관 통과와 함께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리고 검역대 위에는 누군가 누군가 한 입 베어먹은 사과 한 개만 덩그러니 남았다. 금지된 과일을 들고 국경을 넘으려던 누군가의 조바심이 사과에 고스란히 묻어 있는 듯했다.
숨 가빴던 터미널을 뒤로하고 사무실로 향하는 길, 차 창밖으로 서해대고 너머 넓게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빛이 노랑, 주황, 다홍...., 그리고 불타는 듯한 붉은빛이 겹겹이 번지고 있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노을빛이 바다 위로 스며들었다. 하늘이 저리 많은 빛깔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이곳 평택항에서 알게 되는구나.
팽팽했던 긴장감이 스르르 풀렸다. 복잡하고 치열했던 나의 일터를 아름답고 황홀한 나의 쉼터가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내일도 수십 대의 선박이 오고 갈 것이고, 수많은 과일과 채소가 평택항에 도착할 것이다. 하지만 두렵지 않다. 눈부신 윤슬과 찬란한 노을이 위로를 건네는 이 항구에서 나는 국경을 지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