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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웅4집 작품해설
성찰의 토양 위에 핀 서정의 꽃
- 철인鐵人에서 철인哲人으로』 -
김 석 철
전 한국문인협회 이사
시조는 우리 민족이 7백 년이 넘도록 다듬고 가꿔온 민족 고유의 전통시가이며 겨레시이다. 시조는 그렇게 우리 민족이 다듬고 가꿔오는 동안 3장 6구 12마디의 정형성을 이루게 되었으며, 중국의 한시, 일본의 하이쿠, 서구의 소네트 등 각국 전통시와 비견되는 한국문학사가 낳은 가장 짧은 형태의 정형시이다. 따라서 고시조는 창의 가사이고 1900년대 이후부터의 시조는 문학의 한 갈래가 되어 현대시조가 된 것인데,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향가, 고려가요, 경기체가, 가사문학 등 수많은 문학 양식이 나타났다가 사라졌지만, 시조만은 현재까지도 면면히 꽃을 피워오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석하 이재웅 시인이 네 번째 시조집 『철인鐵人에서 철인哲人으로』를 펴내게 되니, 이 또한 우리 시조의 계승 발전을 위한 값지고도 귀한 몸부림의 일환이라고 생각되어 응원의 박수를 보내며 이 글을 쓴다.
1. 순리를 따라서
이 시인은 주로 인간의 본향인 순수 서정적인 정서와 휴머니즘을 노래하는 작품을 많이 쓰는 편이다. 주조를 이루는 것은 바람과 꽃, 계절, 산, 들 등과 같은 자연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순리를 따라서 시인의 따뜻한 눈길이나 정을 곁들이고 있는 가운데 일상적인 생활과 평범한 정서를 노래하는 작품들이 보다 공감을 주고 있는 것이다.
시계추 왔다 갔다
반복하는 일상에서
하루 하루 그날 그날
참기 힘든 일과인데
마음은
새날을 그리며
하늘 바라 길을 연다.
바람 따라 살아온 길
후회 반 기쁨이 반
참고 또 참으며
앞길을 열어 간다
주어진
숙명을 안고.
최선으로 가는 길.
- 「주어진 길」 전문
「주어진 길」 은 두 수 연시조로 한 장을 1련 2행으로 배열하면서 종장만은 별도로 첫 마디를 구분하여 한 수 7행의 기사법을 취하고 있다. 이는 요 근래 현대시조에서 많이 선호하고 있는 행가름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인은 행가름에 운율성, 의미성, 이미지 등에 중점을 두면서 특히 종장에 주제를 함유시키는 수법을 적용하고 있음이 나타나고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누구에게나 주어진 길이 있다. 하지만 그 주어진 길을 나름대로 어떻게 디자인해 나가느냐 하는 것은 각자의 인생관에 따라 다르기 마련이다. 이 작품에서 보면 명命은 태어나면서 한 번 타고났기에 바꿀 수 없지만, 운運은 살아가면서 노력하면 바꿀 수도 있다는 성현의 어록이 언뜻 상기되기도 한다.
먼 훗날 후회 없게
촘촘히 일궈간다
정성스레 땀 흘리며
사랑 실어 쌓는 보람
이 하루
지내고 나면
다시 못 올 소중한 날.
- 「오늘 하루」 전문
현대시조의 특성인 함축미, 정제미, 운율미가 잘 나타나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 시인은 하루하루의 시간을 정말 소중하게 여기며 충실한 일과를 수행하는 모범생으로 보인다. 시간은 쉼 없이 흐르기 마련이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이 소중하다는 걸 알고는 있으면서도 실제 행동은 우선 당장 편의주의로 살려고 하는 게 일반적이다. 이 작품에서 시적화자는 오늘 하루는 세월의 연속이기에 먼 훗날까지도 후회스럽지 않게 정성스레 땀 흘리며 사랑을 실어 보람을 쌓아야 한다고 노래한다. 때마다 최선을 다하는 삶! 얼마나 아름다운 삶인가. 그렇다! 이 하루도 지내고 나면 또다시 오지 않는 소중한 날이니 말이다. 쉽게 읽혀지면서도 잠언적 경구처럼 교훈성으로 깨우침을 주는 가편이다.
가졌다고 기뻐 말고
못 가졌다 슬퍼말자
인생길 그런 거지
팔자소관 아니더냐
마지막 가는 길에는
너나없이 빈손인 걸.
인생길 희로애락
계절의 변화무쌍
봄여름 가을 겨울
순식간 휘익 간다
때마다 재미를 챙겨
보람 쌓는 인생길.
- 「인생길⸳2」 전문
‘인생길’이란 사람으로 태어나서 세상을 살아가는 길을 말한다. 사실 누구나 살아가는 ‘인생길’이지만 누구에게나 똑같은 ‘인생길’은 아닌 것이다. 이 시인은 이 ‘인생길’에 대한 연작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 두 번째 작품이 된다. 사소한 일의 의미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는 귀한 시상으로 다분히 잠언적인 성격의 작품이라 할 것이다. 두 수 연시조에 이 시인의 인생관이 녹아 있음을 인지할 수 있는 바, 그 첫수에서는 공수래공수거하는 인생으로 빈부귀천이 다 팔자소관이라 했고, 둘째 수에서는 인생은 희로애락의 변화무쌍한 길로써, 순식간에 지나가는 세월이니 그때그때 재미를 찾아 보람을 쌓아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체념과 달관의 긍정적 인생관이 바탕을 이루고 있으며 다분히 삶의 무게가 실리고 있다고 할 것이다.
지난날 돌아보면
깃털같이 많은 사연
바람 불면 부는 대로
구름에 달 가듯이
순리로 살아온 세월
흘러가는 나룻배.
가는 세월 하루 하루
별이 되고 시가 되네
가슴 속 애환 담고
괴롬 속에 세월 담아
희망끈 놓치지 않고
성실하게 쌓는 보람.
- 「세월⸳4 」 전문
누가 세월을 유수와 같다고 했던가! 역시 ‘세월’의 연작 중 한 편이다. “바람 불면 부는 대로/ 구름에 달 가듯이// 순리로 살아온 세월/ 흘러가는 나룻배”, 이 「세월⸳4 」 의 시적자아는 우주의 순리에 적응해 가는 모범적 인간상을 그려주고 있으며, 삶의 의미를 찾아 보람을 쌓아가는 성실한 인간상을 형상화하여 공감을 얻고 있다. 이 시인은 덧없이 흐르는 세월에 희망적인 의미를 부여하면서 삶에의 새로운 자극을 받고 있는 것이다. “가는 세월 하루 하루/ 별이 되고 시가 되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세월의 진가를 잘 알고서 뜻있게 살아가고 있다는 방증을 보여주고 있다. 둘째 수 종장에서도 “희망끈 놓치지 않고/ 성실하게 쌓는 보람”을 추구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인생론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대시조는 이렇게 언어의 미학적 측면보다도 자기 성찰의 태도에 의한 깨달음의 정신이 선행되는 경우가 많다.
바람결 흩날리는
반백송 정취 속에
삶의 법도 하늘의 뜻
조물주께 기도하고
초심을 잊지 말자고
뼛속까지 새기네.
- 「초심⸳1」전문
초심을 견지堅持한 채
중심을 잘 잡고서
희망의 깃발 들어
미지의 길을 연다
오늘도
아름다운 삶
창조하는 즐거움.
- 「초심⸳2」전문
‘초심’이란 ‘처음에 먹은 마음’이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요, 사유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때로는 마음이나 감정이 바뀔 수가 있다. 누구나 한 번 먹은 마음을 그대로 유지하기란 어려운 일로서 인내심으로도 버텨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작심삼일’이란 경구도 있지 않던가!. 헌데 이 작품에선 이 시인의 굳은 의지를 짐작하게 된다. 「초심⸳1」에서 “초심을 잊지 말자고/ 뼛속까지 새기네.”라고 했다. “삶의 법도 하늘의 뜻”을 지키겠다는 굳은 결심의 ‘초심’이다. 「초심⸳2」에서는 ‘초심’으로 살아가는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다. 삶의 법도와 하늘의 뜻을 받들고 정직하게 살겠다는 ‘초심’을 세우고,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참고 견디며 살아오니 “오늘도/ 아름다운 삶/ 창조하는 즐거움”이란다. 한결같이 ‘초심’을 지키면서 즐거움까지 느낀다니, 진정 보람의 삶, 긍정적인 삶을 살고 있는 올바른 시인이 아니겠는가.
하는 일이 꼬여져도
긍정으로 풀어가며
이성과 지성으로
시공간 초월하여
강물이
흘러가듯이
순리대로 살아가세.
- 「순리 인생順理人生⸳1」전문
순리란 하늘의 도道
느끼고 행하는 것
마음속 평정심에
맑은 하늘 바라보며
이웃과
통하는 마음
동행同行하며 사는 것
- 「순리 인생順理人生⸳2」전문
작품의 제목이 「순리 인생順理人生」으로 연작이다. 이재웅 시인의 순리를 따르는 삶의 정신은 대부분의 시조에서 그 바탕을 이루고 있음이 감지되고 있다. ‘순리 인생順理人生’,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순리를 따라서 실천하며 살아가기란 어려운 삶인데도 이 시인에게는 인생관이 ‘순리 인생順理人生’이요 좌우명이 ‘순리 인생順理人生’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작품의 제목은 사실 사람의 이름과도 같고 여자의 얼굴 이상으로 중요하다. 제목이 어떠하냐에 따라 그 작품이 눈길을 끌기도 하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이 작품에서는 내용의 의미를 함축하는 제목을 택하였으므로 제목만 보고도 작품의 내용을 대충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단시조 두 수가 각기 시조의 정형을 잘 지켜내고 있으며, 오로지 순수한 마음을 수사적 기교나 가식이 없이 맑고도 진솔한 언어로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위 두 편은 이 시인의 인생관이 녹아 있는 의미 깊은 작품으로 소박한 의지가 내재된 깨우침의 교훈을 주고 있다. 어쩌면 자기 신조이며, 자신에게 간구하는 경건하고도 소박한 기원일 수도 있다. ‘긍정’, ‘초월’, ‘순리’, ‘하늘의 도’, ‘평정심’, ‘맑은 하늘’, ‘통하는’, ‘동행’ 등의 시어가 ‘순리 인생’을 함축하고 있다. 이는 순수한 심성의 표출이요 긍정의 시학이 아니겠는가. 순탄치 않은 삶에서도 항상 밝은 면을 지향하며 순리의 인생을 작품에 반영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 시인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2. 들꽃 같은 삶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시조는 정해진 기본형을 지키며 함축된 언어로 예술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운문이다. 그러기에 시인은 항시 시상을 깊은 마음속에서 오래 묵히며 가다듬고 잘 발효시켜서 문학적 예술적으로 창작하여 완숙된 작품을 발표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따라서 시조는 가능한 한 음악성, 회화성, 정서성, 의미성, 압축성, 주관성, 예술성 등을 지니도록 해야만 보다 좋은 작품이 될 수 있다.
이재웅 시인은 어쩌면 산야에 핀 들꽃과 같은 삶을 연상케 하는 주인공이라고 생각된다. 사시사철 갖은 풍상을 이겨내면서도 항시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인다. 체육인으로서 건강한 체력의 소유자이면서 동시에 순수하고도 참신한 시 정신을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건전한 인생관의 소유자로서 매사에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대처하는 선한 심성 또한 그의 강점이라고 할 것이다. 유독 ‘꽃’에 대한 작품이 많은 것도 이 시인의 시정신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루지도 못할 사랑 기다림이 애처롭다
곧게 뻗은 줄기 위엔 가을빛이 소슬하고
잎보다
먼저 피는 꽃
수줍은 듯 볼이 붉다.
- 「꽃무릇⸱1」 전문
봄에는 잎만 피고 꽃 못 핀 서러움에
한 여름 지내고서 외줄기 곧게 세워
구월에
피는 꽃무릇
불꽃놀이 장관이네.
- 「꽃무릇⸱2」 전문
곧게 뻗은 줄기 위에
외로이 홀로 앉아
어느 때 망울 맺어
불꽃을 피울 거냐
봄 여름 다 보내고서
너울춤을 추려나.
어쩌면 풍란 같고
어쩌면 수선화 같은
숙명적 외로움의
꽃무릇 꽃나무야
네 모습 애처로움에
눈시울이 맵구나.
- 「꽃무릇⸱3」 전문
순수한 꽃대공을
올곧게 높이 세워
한동안 잉결불을
화려하게 피우고서
순환의 숙명을 안고
눈물겨운 이별이네.
- 「꽃무릇⸱4」 전문
「꽃무릇」 연작 네 편을 소개하였다. 먼저 단시조 「꽃무릇⸱1」엔 사랑을 갈구하는 애처로운 마음이 어려있다.‘꽃무릇’은 여름에 잎이 자라 마른 후인 초가을에야 꽃대에 꽃이 피어 흔히‘상사화’라고도 부르는데 여기에선 꽃의 아름다움보다는 꽃의 의미가 돋보이고 있는 작품이다. 이루지도 못할 사랑임을 알면서도 못내 그리워하는 시인의 내향적인 성격을 감지하게 하며 안정감 있는 표현으로 의인화 수법을 취하여 주제의 심화를 꾀하고 있다.
다음 「꽃무릇⸱2」에서는 늦게 피는 꽃이지만 무더기로 군락을 이루어 만개했을 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어쩌면 서러움의 발현이랄까, 외로움의 발현 같은 불꽃놀이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꽃무릇⸱3」은 두 수 연시조의 구성이다. 앞의 단수와는 달리 아직 꽃을 피우기 이전의 형상을 그린 것이다. 사실 어떤 실체가 시 작품의 스크린을 통과하고 나면 그 실체보다 더 아름다워 보이기 마련이다. 마치 산이 물속에 비쳤을 때 그 그림자는 산, 그것보다 더 아름다워 보이는 이치와 같다.「꽃무릇⸱4」에서는 절정을 꽃피우고서 다시 이별을 맞는 자연 순환의 이치를 순리로 받아들이는 심성이 표출되고 있다. 시적 대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이 겉으로 보는 체육인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게, 마냥 여리고 순수하며 서정적임을 감지할 수가 있다. 이 시인의 내적 참신한 시 정신이 돋보이는 경지이다.
꽃망울 정을 담아
곱게곱게 피웠구나
순수의 향기로움
그 무엇에 비유하랴
가슴 속
향낭을 풀어
아낌없이 베푸네.
- 「꽃⸱1」 전문
꽃은 거의가 다 아름답기도 하려니와 그 향기 또한 일품이다. 꽃은 주로 관상용이나 장식용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축하를 하거나 선물을 할 때 쓰이기도 하지 않던가. 여기서 「꽃」은 의인화의 표현수법을 적용한 참신한 착상의 작품이다. 시각적 심상과 후각적 심상으로 영탄의 표현수법을 쓰고 있으면서 행간에 숨긴 내포의 의미도 깊다. 꽃망울에 정까지 담아 꽃을 피운다면 사실 꽃 자체도 아름답지만 그 향기로움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아무런 댓가를 바라지 않고 그 귀한 가슴 속 향낭을 풀어 아낌없이 베푸는 꽃이야말로 이 땅의 보배가 아닐 수 없다.
봄비에 젖은 땅속
파고드는 흙의 향훈
어느 새 파릇파릇
새싹이 눈을 뜬다
갈증도 한 때이구나
솟아나는 새 희망.
- 「봄비」 전문
봄비! 봄비는 우선 단어의 그 어감에서 푸근한 정감을 느끼게 한다. 봄에는 많은 양의 비가 내리지 않고 대체로 부슬부슬 내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흔히 봄에 내리는 비를 ‘부슬비’라고 말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 있어 사계절의 순환은 다른 나라와는 달리 그 계절마다 뚜렷한 특성을 보이며 신기한 느낌을 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봄이면 봄대로 가을이면 가을대로 그 정서가 각기 다 다르다. 추운 겨울철이면 죽은 듯이 모습조차 안 보이던 이름 없는 풀들이 신기하게도 봄이 되면 금세 파릇파릇 부드러운 새싹을 내미는 것이다. 또 봄에 때맞추어 봄비라도 내려주면 마치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듯 새로운 생명체의 시작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봄비를 내려줌으로써 얼었던 땅의 영양소를 녹여주기 때문일까. 그래서 ‘봄비’를 ‘단비’라고 일컬어 왔던가. 이러한 순리적 자연의 이치에서 봄비는 은연중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이 솟아나게 하는 에너지를 제공해 주는 상징성을 띤다고 할 것이다.
밤새껏 내리는 비 빗줄기 줄지 않고
새벽에도 쉬임없이 근심처럼 내리더니
온종일
궂은 심사로
허전함을 적시네.
- 「가을비」 전문
가을은 우선 그 정서가 은연중 허전하고 쓸쓸함을 느끼게 하는 계절이다. 「가을비」는 점층적 연쇄법 표현으로 온종일 궂은 심사로 내리는 가을비의 정서를 그려내고 있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기도 하지만, 가을걷이를 끝내고 나면 마음 한켠이 뭔가 공허하고 쓸쓸해지는 게 인지상정 아니던가. 화자는 가을비가 근심처럼 내리고, 궂은 심사로 내리며 온종일 허전함을 적신다고 했다. 언뜻 쉽게 표현한 듯하지만 읽어볼수록 정서의 시적 형상화가 선명해 짐을 알 수 있는 작품이다.
3. 삶의 정신적 승화
문학의 미적 형상화는 작가에 따라서 다양하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이 시인은 삶의 정신적 승화를 꾀하며 아름다운 시조를 창작해내고 있다. 그는 고행의 육체적 삶에서 차원 높은 정신적 삶으로의 승화를 가져온다고 믿고 있는 것이리라. 승화는 어떤 현상이 한 단계 더 높은 영역으로 발전함을 의미한다.
온몸에 스친 세월 눈물로 시련 삼고
가슴속 뜨거운 피 꿈꾸는 세계정상
이슬 알
꽃망울 되어
얼맺히어 아롱인다
한평생 눈물겹게 애간장 다 태운 길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아예 없다
모든 게
내 삶인 것을
어느 누굴 탓하리요.
- 「눈물로 쓴 시」전문
이 작품에는 삶의 진지한 의식을 언어로 환치하는 묘미가 있고, 긍정의 시학을 읽을 수 있다. 철인鐵人의 정열적인 마음과 철인으로서의 어려움이 감지되는 작품이다. 작금의 세계 인구는 70억 명 이상으로 알고 있는데, 철인경기에서 세계 정상을 꿈꾼다면 그 많은 인구 중에서 1위를 차지한다는 얘기가 아닌가! 사실 기적 같은 일이 아니고선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시인은 세계 정상을 꿈꾸며 눈물의 시를 쓰고 있다.
어떤 분야나 마찬가지겠으나 특히 운동경기는 그야말로 피나는 노력과 눈물겨운 연습이 수반되어야만 그 성과를 올릴 수 있다고 판단된다. 첫수를 보면“온몸에 스친 세월/ 눈물로 시련 삼고// 가슴 속 뜨거운 피/ 꿈꾸는 세계 정상// 꽃망울 송이송이에/ 얼맺히어 아롱인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세계 정상을 향하여 노력하고 훈련하면서 흘린 땀과 눈물방울은 꽃망울로 변용되어 송이송이로 빛나고 있는 것이다. 강인한 정신과 혹독한 훈련이 뒷받침돼야 하니 그야말로 눈물겨운 삶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내용의 결론격인 둘째 수에서 “한평생 눈물겹게 애간장 다 태운 길/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아예 없다// 모든 게/ 내 삶인 것을/ 어느 누굴 탓하리요.”라고 노래하고 있다. 아직은 정상을 정복하지 못했지만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하지 않는 삶이란다. 최선을 다하는 삶, 역시 대범하고도 긍정적이며 사나이다운 성격이 느껴진다.
철인에서 철인으로
노년에 접어드니
미쳐미쳐 미친 세월
한생이 순간인 걸
젊어서 못 깨우치고
이제 듣는 죽비소리.
- 「철인과 철인」 전문
짧은 단수이지만 행간에 숨은 뜻이 깊고 상징성 또한 짙은 작품이다. 이 시인의 취미와 하는 일이 특이하고도 다양하다는 것은 서두에서도 잠깐 밝힌 바 있다. 따라서 이 시인은 현재 철인鐵人3종경기의 체육인이기에 이런 작품이 도출되었다고 본다. 이 작품의 제목인 「철인과 철인」에서 순 한글로만 쓰여 있어서 두 ‘철인’이라는 단어가 중의어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소리는 같으나 그 뜻이 전혀 다른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앞의 철인은 ‘몸이나 힘이 무쇠처럼 강한 사람’이라는 뜻의 ‘철인鐵人‘이요, 뒤의 철인은 ‘어질고 사리에 밝은 사람’이란 뜻의 ‘철인哲人’으로 쓰였다고 본다. 평소에도 이 시인은 어떤 일이든 한번 시작했다 하면 기어이 끝장을 보아야 하는 집념의 사나이로 알고 있다. 이 철인경기만 하더라도 어쩌면 철인경기를 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그 애착과 집념이 대단할 뿐만 아니라, 특히 철인으로서 항상 겸손하게 반성하고 깨우치는 생활에 열중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 ’철인鐵人‘에 미쳐 한 생을 바친 ‘철인哲人’이라고 해야 옳은 해석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한 조각 잎새 되어
파도에 출렁이며
힘차게 팔을 저어
숨 한번 몰아쉬고
창공의 갈매기와도
눈빛을 마주친다.
망망한 푸른 바다
가슴에 품어 안고
두둥실 파도 헤쳐
전진하는 무아지경
자연과 동화되어서
빛이 되고 시가 되네.
일렁이는 파도 위에
목숨을 맡겨두고
하늘 한 번 쳐다보며
천심을 읽어간다
오로지 혹독한 훈련
세계정상 꿈꾸며.
- 「철인3종경기•5 - 바다수영 ②」 전문
철인3종경기는 사실 악조건 속에서 엄청난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두려움과 공포심을 억누르며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무척 어려운 체육종목으로 알고 있다. 이 ‘철인3종경기’의 연작시조 중에서 ‘바다수영 ②’의 부제가 붙은 한 편을 골라본 것이다. ‘철인3종경기’는 한 사람이 하루 동안 수영, 사이클, 마라톤의 세 종목을 잇따라서 치루는 경기라고 하는데, 아주 강한 체력과 인내력이 필요한 경기로서 트라이애슬론이라고도 한단다. 기록에 의하면 자연을 즐기며 체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이 경기는, 2000년 시드니대회부터 올림픽 정식 경기종목으로 채택되었다고 한다. 사실 일반인들에겐 다소 생소한 종목인데, 그동안 이 시인은 전북지회를 창립하여 그 발전을 위해 무진 애를 써왔으며, 특히 선수육성과 경기력 향상, 올림픽 출전 문제까지 연구하고 노력하며 애써 왔다고 하니 그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불굴의 사나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게 열정을 가지고 매진할 수 있는 대상이 있을 때 본인의 나날은 더욱 생기를 반짝이게 된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실제로 거년의 전국체전에서 난생 처음으로 이 철인3종경기를 직접 관람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실제 참가선수들은 무척 힘들어 보였지만 곁에서 지켜보는 관중의 입장에선 꽤나 스릴이 있고 흥미도 넘치는 매력 있는 종목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내 고장 명예 걸고
펼치는 전국체전
온 국민 사랑 속에
선의의 체력경쟁
열광의 성원 받으며
기록경신 이룬다.
사랑과 우정 속에
온 겨레 하나 되어
고난의 역사 속에
묵묵히 함께 해온
역사적 전국체전이
감동으로 넘친다.
함성도 우렁차게
장하다 대한민국
끈기의 세월 넘어
일백 회에 이르렀네
체력은 국력의 상징
밝은 앞날 펼친다.
- 「전국체전 100주년」 전문
전국체전 100주년에 기념으로 지은 작품으로 판단된다. 전국체전은 매년 개최되지만, 우리나라 체육사에 있어 특히 전국체전 100주년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전국체전은 일제 강점기인 1920년 조선체육회가 창립되면서 시작되었다고 하며, 그동안 6·25 동란을 거쳐 대한민국 근대사와 함께, 국민들이 힘들고 지칠 때 환희와 기쁨, 용기와 희망을 주며 지금까지 이어왔다고 한다. 지난 시절 전국체전은 어려웠던 살림으로 힘들었던 국민들에게 체육을 통해 ‘불가능도 가능으로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의 정신을 안겨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 작품에서는 끝수 종장의 결미가 전체 의미를 요약하며 강조하고 있다고 본다. 그렇다! “체력은 국력의 상징/ 밝은 앞날 펼친다.” 이 시인이 체육인이기에 이렇게 감개무량한 마음으로 이 뜻깊은 축시 성격의 기념시조를 썼으리라고 유추해 본다.
불가의 청정함이 아름다이 흐르나니
옥천사 쇠북소리 한없이 깊은 여운
은혜의
그윽한 음향
지친 마음 달랜다
청동에 새긴 문양 예술미 어려 있네
보장각 청동범종 귀중한 문화유산
꽹과리
징의 원조로
온고지신 창조풍물
- 「옥천사 범종소리」전문
‘옥천사’는 경남 고성에 소재한 절로서, 이 절의 보장각에 고려 때 청동으로 빚어진 범종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관되고 있다고 한다. 절에서 사용하는 법구 가운데 가장 큰 울림을 갖고 있는 범종은 보통 동銅과 주석을 녹인 합금으로 만든다고 한다. 표면에는 대개 비천상과 연꽃문양을 새기기도 하는데, 사실 범종은 불교 금속공예의 꽃이라고 전해온다. 여기서 ‘범梵’이란 ‘brahman’을옮긴 말로서 ‘청정’을 의미하며, ‘청정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종’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특히 첫 새벽 산사에서 들려오는 맑은 범종소리는 누구에게나 울림을 주기 마련인데, 이 작품에서 역시 맑은 범종소리가 한없이 깊은 여운으로 속인의 마음을 적셔 주고 있는 것이다.
4. 귀한 인연으로
시조는 미적 감동을 주는 예술 작품이다. 따라서 작자와 독자가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 좋은 작품인 것이다. 시인의 감정은 섬세하고 예민할 뿐만 아니라, 가장 주관적인 것이어서 시적 대상에 대해서도 그 인식하는 정도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기 마련이다. 특히 시나 시조는 산문과 달리 사상이나 개념을 그대로 전달하는 게 아니라 감동적인 정서로 바꾸어 새롭게 일깨워주는 것이기 때문에 암시와 내포의 세계가 절대적인 매력이기도 하다. 이 시인의 작품엔 귀한 인연과 함께 야무진 꿈을 함유하고 있는 가편들이 눈길을 끌고 있다.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이 시인은 오늘도 인연을 귀하고 값지게 여기며, 꿈이 있기에 행복한 나날을 작품에 반영하고 있는 것이리라.
내 고장 바둑계의 참 스승 전영선 사범
아홉 살 꼬마제자 이창호의 첫 스승으로
비범함 읽어내고는 올곧게 내린 결단
창호는 내가 가르칠 재목이 아니라며
최고수인 조훈현 9단에게 추천하여
기어이 그의 애제자로 만들어 준 일화
제자의 미래를 위해 자존심도 버리시고
더 좋은 스승에게 보내줬던 전영선 사범
누구도 생각지 못할 그 세심한 배려심.
- 「참 스승⸱1 - 고 전영선 바둑사범」전문
* 전영선(1949〜2002) : 전주 출생. 한국기원 소속 프로 바둑기사 7단
어린 제자 이창호를 아예 집에 들여
숙식을 함께 하며 불철주야 바둑 지도
극진한 제자 사랑을 실천으로 보이신 분
타고난 잠재력을 계발하고 일깨워서
이 나라 최고수로 이끌었던 조훈현 9단
오로지 제자를 위해 자존심도 버리시고
자신의 타이틀까지 하나하나 물려주며
밝은 미래 열어준 그 갸륵한 가르치심
바둑계 전설을 만든 조훈현 국수님.
- 「참 스승⸱2 - 조훈현* 프로바둑 기사」전문
* 조훈현(1953〜 ) : 프로바둑 기사(9단), 9세 때 최연소 입단. 세계최다
바둑타이틀 보유기록. 이창호 바둑 9단의 스승으로 유명.
제자의 미래 위해 국위 선양을 위해
서서가 유비에게 공명을 천거하듯
더 좋은 스승에게로 추천해준 전영선 사범
제자의 잠재력을 일깨우고 길러내어
바둑계의 새 역사를 열어주신 참 큰 스승
이창호 바둑 9단을 성공시킨 조훈현 국수님
스승다운 스승이요 숭고한 두 스승님
스승의 귀감이 되어 길이길이 빛나리.
참 스승 전영선 사범, 참 큰 스승 조훈현 국수님.
- 「참 스승⸱3 -바둑계 이창호*를 성공시킨 두 스승님」
* 이창호(1975〜 ) : 한국 프로바둑기사 9단. 최연소 우승, 최연소 세계 챔피언, 역대 최장 기간 바둑 세계랭킹 1위 등 바둑 역사에 다양한 신기록을 세웠다.
위의 「참 스승」 세 편을 읽어보면 대체로 그냥 예삿말로 쓰인 이야기가 있는 시조라는 걸 알 수가 있다. 전후 문맥의 연결이 자연스럽고 행간의 여유도 안정적이란 걸 알 수 있다. 전달하고픈 메시지가 선명하게 드러나며 화장기 없는 순수한 시어의 사용이 장점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세 편의 시조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부연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기록에 의하면, 이창호는 전북 전주에서 태어난 대한민국 프로 바둑기사 9단이다. 한국기원 소속이며, 199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에 걸쳐 세계 바둑대회에서 21회나 우승하였고, 41연승으로는 세계 1위여서 세계 바둑 최강으로 불렸으며, 특히 16세에 최연소 국제바둑기전에서 우승하여 바둑신동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이창호의 바둑 스승으로는 바둑기사 조훈현 9단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이면에는 알려지지 않은 또 한 분의 바둑 스승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창호는 꼬마시절 처음, 집안 할아버지와 바둑을 두어보면서 취미를 갖게 되었고, 이어서 바둑을 배운지 6개월 만에 고향 출신의 프로기사 전영선 7단에게 처음 본격적인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바로 이 창호의 첫 스승인 것이다. 헌데 가르친 지 1년 여만에 이창호의 출중한 바둑 기량에 큰 감동을 받은 첫 스승 전영선 기사는 고민을 하다가 “창호는 내가 가르칠 재목이 아니다”라고 판단하여 당시 바둑계의 최고수인 조훈현 9단에게 보내기로 결심하고 자기보다 후배(전영선 7단이 조훈현 9단보다 4살 위)에게 자존심을 버리고 어렵게 부탁하여 우여곡절 끝에 이창호를 조훈현의 제자로 들어가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참 스승⸱2」에서 보면 조훈현 9단 역시 대단한 스승이었다는 사실을 잘 알 수가 있다. 훌륭한 스승 밑에서 훌륭한 제자가 나온다는 말이 실감되는 대목인 것이다. 현재 누적 우승경력으로 조훈현 9단이 한국 바둑기사 1위이고, 이창호 9단은 한국 바둑기사 2위라고 한다. 이창호 9단은 훗날 ‘바둑의 신’이라는 별칭까지 얻게 되는데, 이는 이창호의 집념과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전영선, 조훈현 사범 같은 참 스승들의 훌륭한 지도와 따스한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오늘날의 이창호의 명성이 있게 되었다고 하니, 자기가 발굴한 제자를 위하여 자존심도 꺾으면서 보다 더 좋은 스승에게 보내는 결단을 내린 전영선 스승, 제자의 출중한 기량을 찾아 주면서 대성하도록 정성으로 이끌어 준 조훈현 스승, 이 두 분이야말로 스승의 귀감이며 참 스승이요 큰 스승이 아니겠는가. 이 시조 세 편은 그냥 묻어두기엔 너무도 아까운 미담을 작품화한 것이다. 이 시인의 귀한 시심에 박수를 보낸다.
정이란 묘한 거여
그 멀리 떨어져도
밤하늘 별빛처럼
가슴속 깊이 박혀
아무리
지우려 해도
그리움으로 남는 거여.
- 「정情이란」 전문
사실, 시조의 형식에 내용을 담는 기술과 방법은 심미적 기법이라고 할 것이다. 시나 시조의 세계는 사상이나 개념을 그대로 전달하는 게 아니라, 감동적인 정서로 만들어 새롭게 환기시키는 세계이며, 가슴 속에 있는 감성에 의식을 불어 넣어 형상화 시키는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기에 짧은 단수라고 해서 그냥 가볍게 얕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정情’은 사랑이나 친근감을 느끼는 마음을 뜻한다. 정은 인간 본성의 하나로서, 인간 내면의 속성이면서도 인간 행위의 형태이기도 하다. 한국인의 전통적인 정서 속에서 ‘정’은 ‘사랑’이라는 말과 거의 동의어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누구나 한번 정이 들면 그 정을 떼어내기란 그야말로 몹시 어려운 게 사실이다. 우리는 심지어 그 정을 목숨과도 바꾸는 경우를 가끔씩 듣고 보지 않던가. 사실 정이란 참 묘한 거여서 당사자 이외에는 이 ‘정’의 참 의미를 느끼기 어렵다는 것이다. 아무리 지우려 해도 그리움으로 남는 정, 이 작품에서 우리는 화자의 감성적 바탕 위에 꽃피운 정형의 멋과 맛을 만나게 된다.
금강정 올라서니 금빛 낙조 눈부셔라
철새들 구름 위로 나래 펴는 한가로움
자연 속 아름다움에 시 한 수가 절로 나네.
스치는 바람결에 상쾌함 휘날리고
철새들 군무 속에 노을이 익어간다
금강의 비단결 황혼 날 보는 듯하구나.
- 「금강정錦江亭에서」전문
‘금강정’은 전북 익산시 웅포면의 금강가에 세워진 정자亭子라고 한다. ‘정자’라 하면, 산이나 물가의 경치 좋은 곳에 놀거나 쉬기 위하여 지은 아담하고 작은 집을 말하며 벽이 없이 기둥과 지붕만으로 세워져 통풍이 잘되고 사방을 전망하기에 좋은 게 특징이다. 이 작품은 언뜻 조선시대 선비들의 풍류가 떠오르는 정경이다. 이 시인이 풍치가 아름다운 금강정에 올라, 한가로이 구름 위를 펼쳐 날고 있는 철새들의 군무도 감상하며, 비단결 노을을 바라보니, 노년에 접어든 화자로선 잠시나마 덧없이 흘러간 세월과 자신을 성찰해 보는 여유를 갖게 된다.
소슬한 바람결에
나뭇잎이 흔들린다
삶이란 시련이지
바람도 흔들림도
가을은 사유의 뜨락
시로 물든 마음결.
- 「가을⸱5」 전문
이 시인은 한 제목으로 연작시조를 비교적 많이 쓰고 있음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가 있다. 이 「가을⸱5」도 마찬가지 경우이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니, ‘사색의 계절’이니, ‘수확의 계절’ 등 등 하여, 그 수사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가을은 문학에서 뿐만 아니라 미술, 음악 등 예술적 모티브로도 제격이다. 그 정서가 그만큼 문학적이고 예술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고 착상한 작품으로 “가을은 사유의 뜨락/ 시로 물든 마음결.”이라고 하여, 문학성, 예술성의 표현으로 가을의 특성을 인간의 삶에 견주어 은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계절의 순환 이치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사실 각 계절마다 특징이 있고 장단점이 있어 유독 어느 계절만이 좋고 나쁘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가을은 역시 시적인 계절이다.
5. 자연과의 교감
시조는 기본 형식과 율격이 있는 정형시라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조가 형식면에선 일반 자유시와는 확연히 다르다. 즉 시조는 시이지만 시는 시조가 아니다. 다만 내용면에 있어선 시나 시조나 동일하게 어떤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러기에 우리 현대시조는 기본 형식의 틀에, 내용의 현대성, 문학성, 예술성을 갖추면 제격이 된다. 또 행간에 많은 의미를 숨겨두는 고도의 상징과 은유의 묘미를 살리면서, 감정의 절제와 질서화를 기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아울러 주제의식의 심화와 시혼이 깃든 간절한 울림의 시조로서 쉽게 읽히면서도 생각이 깊은 내용을 담은 시조라면 가장 좋은 현대시조라고 말할 수 있다.
밝은 햇살 비춰주고
포근함이 감싸는 날
송이송이 새송이로
섬진강을 수놓으니
윤회의
세월이던가
속절없는 이 봄날.
꽃망울 고웁더니
어느 결에 꽃이 지네
흩날리는 하얀 넋이
강물 위로 떠나가네
비바람
견디지 못해
눈물겨운 이별이네.
- 「사월의 섬진강」 전문
이 시인은 자연의 섭리를 겸허히 따르고 인간의 순리를 긍정으로 따르며, 성찰하는 생활로 서정의 꽃을 피우며 살아간다.
「사월의 섬진강」은 얼핏 사월의 역사적 사건이 오버랩되는 작품이라고 느껴진다. 해마다 사월이면 섬진강변의 매화꽃이 만개하여 장관을 이루어 많은 관광객이 모여들지만, 이 시인은 관광의 취지와는 사뭇 다른 매화의 상징성을 그리며 애틋한 사념에 잠기는 것이다. 포근한 봄날 매화꽃 축제가 열리는 섬진강변에서 얻은 시상인 듯하다. 시적 상징성이 돋보이는 작품으로,“꽃망울, 꽃이 지네, 흩날리는 하얀 넋, 강물, 비바람, 이별, 햇살, 포근함, 속절없는”등의 시어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강물처럼 세월은 흐르지만 역사의 교훈은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봄의 시작 입춘 절기
유난히도 심한 한파
제 아무리 춥다 해도
돋는 새싹 어이 하리
터지는
봄날의 함성
두 팔 벌려 맞이하네.
- 「입춘⸱4 」 전문
이 시인은 본성이 순수한 감성의 시인이다. 계절에 대한 느낌과 소회도 남과 달리 예리한 편이다. ‘입춘立春’은 24절기의 하나로 ‘대한大寒’과 ‘우수雨水’사이에 들며, 이 때부터 봄이 시작된다고 한다. 입춘은 새해를 상징하는 절기로서 양력 2월4일 경으로 대개 이때를 즈음해서 설날도 다가온다. 입춘 때가 되면 겨우내 꽁꽁 얼었던 산천이 풀리고 기후가 봄기운으로 바뀌어 온갖 생물들이 활기를 찾게 되는 좋은 시기이다. 요 근래엔 이상 기후 영향으로 ‘입춘’이 다가와도 추위가 꺾이지 않을 때가 종종 있긴 하지만, 계절의 섭리는 거스를 수가 없다. 사실 겨울과 봄의 경계도 칼로 무를 베듯 명확히 구분할 수는 없을 일이기에, 입춘이 되어도 그 추위가 만만치 않음은 우리가 이미 체험으로 알고 있는 터이다. 입춘은 봄의 시작을 알리는 하루지만, 여전히 꽤 추운 날씨를 보여준다. 어떻든 이 입춘 때부터는 겨울에 비해 차츰 따스한 기운이 다가옴을 느끼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가슴속 뜨거웠던
한여름 지내고서
스치는 바람결에
가을이 실려 왔나
귀뚜리
밤을 지새워
누굴 찾고 있는가.
- 「입추」 전문
「입추」는 쉽게 읽혖지는 간결한 단시조이지만 순수한 우리말의 시어들이 이 작품의 순도를 높여 주고 있다. ‘입추’는 24절기 중 대서와 처서 사이에 들며, 이때부터 가을이 시작된다고 하는데, 양력으로는 8월 8일 경이다. 우리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기에 가을이 되면 왠지 모르게 쓸쓸한 정서를 느끼게 되는 게 인지상정이다. 조석으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결이 그렇고, 밤을 지새워 울고 있는 귀뚜라미가 더욱 우리의 정서를 자극해 준다. 종장의 “귀뚜리/ 밤을 지새워/ 누굴 찾고 있는가.”를 의인화의 설의법 표현으로 본다면 ‘귀뚜리’는 그리운 사람을 생각하며 밤을 지새우는 화자 자신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상으로 석하 이재웅 시인의 제4시조집 《鐵人에서 哲人으로》를 중심으로 눈길이 가는 작품들을 골라 살펴보았다. 작품마다에 그 인품의 됨됨이가 녹아 있었으니 철인으로, 서예가로, 시조시인으로서의 품격이 그것이다. 한결같이 성찰을 바탕으로 한 의지의 삶과 순수 서정의 메시지, 순수한 심성의 표출과 긍정의 시학,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시심 등이 이 시인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이다. “철인鐵人에서 철인哲人으로”의 의미와 그 상징성을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이 시인은 시조의 기본을 지키면서 비교적 밝고 맑은 시어를 활용하여 유연하게 표현함으로써 친근감과 함께 공감의 영역을 넓혀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참신한 착상과, 통일성 있는 짜임으로 시상을 자연스럽게 전개하여 주제의 심화를 꾀하면서 순수한 감정을 진솔하게 표현해내고 있는 것이 강점이라고 생각된다.
짧은 시조 한 편 속에 세상이 있고 우주가 담겨져 있다고 했다. 앞으로도 이 시인이 계속적이고도 투철한 노력을 기울여, 보다 차원 높은 예술혼이 깃든 시조시인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