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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시절 나는 아득히 솟은 팔공산(1,192m)을 우르러 볼 때면 경외심이 들었으며, 아련한 슬픔이 밀려왔다. 어쩌면 어린 내게 무시로 다가왔던 팔공산의 아득했던 유년의 정감이 내 몸 속에 그리움으로 허물어져 이순耳順의 이 나이가 되도록 바람 따라, 달빛 따라, 별빛 따라 산을 찾아 헤매는지 모르겠다.
누구에게나 돌아가고 싶은 그런 소중한 시간과 순간과 장소가 있으리라. 내 역시 몸은 비록 도시의 밀림숲을 들락이지만 정신은 내가 나서 자란 들판과 냇물과 산천을 무시로 떠돌아다닌다. 내가 태어난 탯자리는 경북慶北 영천시永川市 신녕면新寧面 연정리蓮亭里다. 그 탯줄인 팔공산八公山 동쪽 산자락에 둥지를 튼 신녕은 마늘과 양파의 산지로 이름 난 곳이다. 신녕은 새신(新)자에 안녕할 녕(寧)자를 쓰며, 자자손손 평안하게 살라는 풍수의 염원을 오롯이 담고 있다. 연정은 연꽃 연(蓮)자에 정자 정(亭)을 쓰며, 그 뜻은 정자에 앉아 연화의 세계를 바라보는 삶의 이상향을 지닌다. 여명이 틀 때면 웅부한 팔공산 비로봉毘盧峰을 중심으로 동봉과 서봉으로 펼쳐지는 장엄한 나래는 서라벌徐羅伐 천년 사직을 호령했던 눈부신 백마의 갈기를 닮았으며, 때론 탈속한 고승이 학鶴의 나래를 타고 영원으로 흐르는 눈부신 자태를 빼닮았다. 신녕은 그 품에 든 길지吉地다. 이 땅의 뿌리였던 신라가 숭상했던 5악 중, 그 심장부였던 중악의 팔공산이 있어서 서라벌의 장구한 천년 사직이 가능하였으리라. 이 세상 그 어느 왕조가 감히 천년이란 망각의 세월을 거슬러 그 사직을 면면히 이어왔으며, 조선 천지 그 어디에 이만한 이상향의 지형지세가 또 있을까.
▲. 좌측 우뚝 솟은 봉우리가 동봉(東峯)이며, 능선 저멀리 원통 모양의 둥그런 형상이 유년시절 늘 마주했던 레이더 기지다.
오늘은 깊은 장맛 같은 고우故友들과 함께 탯자리 팔공산을 종주 산행을 하는 날이다.
그간 나는 20여년 간 내놓으라는 국내의 명산들을 바람처럼 떠돌아다녔다. 그것도 부족했던지 바다 건너 우리와는 생김새가 전혀 다른 낯선 땅까지 기웃거리며 혼을 팔고 다녔다. 그런 내게 탯자리 저 산은 얼마나 섭섭해 하였으며, 얼마나 상심해 하였을까. 어쩌면 인간 만사, 세상만사가 꿈같고, 허망한 것일지도 모를 진데, 나는 한평생 불빛에 허기진 불나방처럼 상드리에 불빛 화려한 도회지를 속물처럼 떠돌며 살아왔는지도 모르리라. 이제 저무는 육신에 처연한 산그늘이 내리니, 흐릿한 망막에 옛정이 맺히고 마음에 아리던 정한情恨이 꽃물처럼 드는 걸까. 그런지도 모르겠다. 흙냄새 정겹고 아련한 옛 풍경 옛 정 가슴 겨운, 그 세월을 거슬러 유년의 품으로 달려간다. 지금쯤 그곳엔 탯자리 종주 산행을 함께할 구수한 장맛 같은 잊지 못할 고우故友들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이윽고 바람을 가르며 내달리던 열차는 동대구역에서 나를 얌전히 내려놓는다.
그 시각이 7시 10분을 지나고 있었다. 역 광장에 첫 발을 딛자 싱거러운 가을바람이 마중을 한다. 광장 저만치서 고우들이 늙수그레한 모습으로 반긴다. 고우를 만나는 일은 삶의 시간들이 피워내는 가장 즐겁고 정겨운 일 중의 하나일 터. 활짝 웃으며 반가움에 손을 잡는 기룡이, 광수, 동길이, 태호, 원근이, 석기 그리고 오늘의 홍일점 정남 낭자와 순희 낭자 모두 9명이다. 옛날은 가고 없어도 오늘처럼 흐르는 이순의 강변에서 함께 손잡고 그윽한 머루향기 같은 옛정을 나누는 일이 얼마나 따뜻하고 고마운 일이랴. 어쩌면 삶의 의미란 것도 이런 작은 일 하나에서 그 희망의 새싹이 트는 것이 아닐까. 특히 한 집안인 "동길"이는 마음의 결이 남달리 고왔다. 까맣 유년시절부터 늘 그루터기처럼 함께 했던 그는 그 후 열사의 사막 같은 목마른 도상의 사업 영역에서 돌올한 빛을 발하며 일찍이 화려한 입신立身의 꽃을 피워, 오늘날 그 어느 누구 못지않은 탄탄하고 단아한 재력의 후광을 발한다. 어찌 보면 그것은 그의 강인한 집념과 결고운 품새의 두 포자의 힘이 아니었을까 싶다.
가을의 스산함 탓일까. 옛정 곡진한 고우들마다 세월의 음영이 짙다. 세상만물에 청춘이 지나간 흔적이란 비슷하기 마련이지만 이순의 강 언저리에 어리는 고우들은 다들 허름한 초로初老의 모습들이다. 비바람에 꽃이 시들고 우리가 알게 모르게 늙듯, 그 모습을 볼 대면 까닭 모를 쓸쓸함과 처연한 연민이 든다. 말 없는 바위가 바람을 부르고, 바람이 구름을 부르며, 구름이 비를 부르고, 비가 목마른 대지를 적시듯, 마음 편히 너와 나의 안부를 잊고 살면서 결코 잊지 못하는 친구들, 사그라질 듯 사그라질 듯 하면서 쉬 사그라지지 않는 아련한 추억의 불씨들, 어느 날 문득 흩어지는 구름 사이로, 바람이 쓸고 간 텅 빈자리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정겨운 얼굴들, 흐르는 세월이 때론 슬프지 않은 것은 가슴에 품고 가는 너와 나의 따뜻했던 추억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 탯자리 산행 대원들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한 구.장터 내 <어부지리 해물탕>. 밑반찬을 젖가락으로 집어 맛을 보는 순간 그 옛날 그 맛이 느껴졌으나, 내 입맛이 나도 모르게 너무나 많이 변해 있는 것을 알았다.
우리를 태운 차는 와촌을 빠르게 밀어내며 청통을 바람처럼 훑는다.
고향 떠난지도 언 40여년의 세월, 그 긴 시간의 이끼와 무게는 과연 내게 무슨 말을 걸어올까. 상념에 젖은 사이 차는 청통면 계지리 야트막한 2차선 고갯길을 넘는다. 어제 홍안의 소년이 머리에 하얀 서리를 이고 나타났다. 그러나 변한 시간의 무게에 어리둥절했다. 달리는 차는 당연히 역사驛舍 앞을 지나리란 내 생각을 저버린 채 한들(莞田)을 가로지르며 내달리고 있었다. 그 길은 말쑥하게 단장된 새로 난 도로였다. 늘 금의환향하듯 버선발로 맞아주던 역사驛舍는 보이질 않았고, 한들의 기킴이였던 선돌의 안부가 궁금했다. 혹시나 하여 고개를 두리 번 거려도 보이질 않은 채 차는 벌써 옛 장터의 예약된 식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기룡이”가 저 위에 건물이 옛날 “문화상회”입니다, 라며 손끝으로 가리켰으나, 그것마저도 내건 어리둥절하고 희미했다. 문득 강물처럼 흘러버린 시절의 그리움은 시작과 끝도 없이 찾아와 손끝에 닿지도 않고 그리움만 안고 흘러가는지 모를 일 같았다.
그러나 유년시절 내게 아련한 슬픔과 경외감을 들게 했던 팔공산은 저 멀리 초연히 솟아 선정禪定에 들어 있다. 천계天界로 흐르는 삼불의 저 지긋한 눈 길, 영겁永劫億으로 흐르는 저 탈속한 자태는 모든 것을 공空으로 보는 무상無想일지도 모르며, 일체의 상념이 없는 무상無相 인지도 모르며, 더할 나위 없는 상주불멸을 상징하는 무상無上 일지도 모른다. 아니, 저 초연한 자태는 한 줌 육신을 묻고 가야 하는, 이 처연한 목숨 앞에 삼라만상 그 모든 것이 덧없는 무상無常이라고, 현묵의 계시啓示를 하는지도 모르리라.
바람 불고 비 내린 숱한 세월, 풍광은 변했건만 그 길 위엔 강물처럼 흘러가버린 아련한 흑백 추억들은 그리움으로 목을 축인다. 그랬었다. 면내를 가로질러 흐르던 천변엔 희고 노오란 꽃들이 지천으로 피었고, 맑은 물 삼백예순날 땅을 적시며 흐르던 그곳엔 피라미들이 허연 배를 뒤집으며 은빛 찬란한 희열로 차올랐다. 하굣길이면 먼 산협 낭낭하게 적시던 뻐꾸기 소리며, 하얀 사과꽃이 그토록 깨끗하고 얌전하게 이울었으며, 한여름 매미들의 생명의 절규가 이어질 때면 세상은 죽은 듯이 정적으로 내몰렸다. 비슥이 기우는 햇살에 붉은 고추잠자리 어지럽게 군무를 출 때면 집집마다 저녁연기 가뭇하게 잦아들고, 축축히 젖은 날 기적소리 허공을 흔들 때면 사춘기 소년의 가슴까지도 송두리째 뒤흔들던 아련한 기적소리가 있었다. 읍내의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사방에서 봇물이 터진듯 흘러들던 숱한 사람들, 고단한 농사일에 잠시 허리를 펴고 탁주 몇 사발에 거나하게 취해 삶의 어느 경지에서 고달픈 심신을 달래던 사람들, 큰 흥정이 벌어지던 그 질펀하던 우시장牛市場이며, 등 뒤에 달덩이 같은 큰 북을 맨 채 뒷발로 북을 치며 구름과 바람을 몰고 다니던 동동구루무 아저씨, 모두들 제야의 촛불처럼 한세상 불꽃처럼 살다 갔을 사람들, 이제 강물처럼 흘러버린 그 시절이 꿈같다.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어느 날 하얀 첫눈처럼 내 안으로 들어와 설익은 내 가슴에 시리도록 뜨겁게 녹아 열병을 앓게했던 그 소녀, 천변 탱자나무 고즈넉한 길을 나란히 걸었던, 동그스럼한 어깨선에 잘록한 허리의 옆모습이 하얀 능금꽃처럼 곱고 얌전하던 그녀의 몸에서 은은하게 묻어오던 꽃향기 같았던 여자 내음. 손 한 번 잡지 못한 그녀에게 한사코 농익어가던 나의가슴은 한여름 뜨거운 그늘아래 혼자 터져나가는 산딸기 모양 얼마나 지순한 정情을 녹였던가. 첫사랑! 지금쯤 그녀도 얼마나 많은 삶의 애환의 강물이 지나고 영욕의 그늘이 지나 갔을까. 그녀도 나처럼 삶의 한 모퉁이를 돌아갈 때면 나를 생각할까. 사랑도 미움도 기쁨도 슬픔도 눈물도 원망도 흐르는 세월에 실려 가듯, 이제 그토록 지순하던 그 꽃잎 저물어, 하얀 서리 인 채 나타난 허름한 사내는 이 삶의 처연함에 잠시 목이 메인다. 지나온 삶의 본질이 이토록 처연한 것이라면, 생의 막다른 종착지에 이르렀을 땐 과연 어떤 빛깔과 어떤 무게로 다가올까. 잠시 상념에 젖은 사이 달리는 차는 왕산교를 지나 면내를 벗어날 쯤 좌측에 자리한 모교가 눈에 든다. 모교는 외관상 말쑥하게 단장하고 있었다. 그곳에“경북 식품과학 마이스터 고등학교”란 긴 학명이 내걸려 있었다. 일찍이 내가 고향을 떠나고 네가 떠나버린 자리에 그 누가 빈 둥지를 틀 것인가. 모교는 다 짜내고 없는 할머니의 쭈글쭈글한 젖가슴 같다. 문득, 그곳을 지날 때 애석하게 먼저 길 떠난 순백의 풋풋했던 흑백 고우들이 떠올랐다.
▲ 좌로부터 필자, (고)임덕상 (고)손성호 (고)한영환.
각별이 정 깊은 벗들이었다. 다들 빛바랜 흑백사진 한 장만 내 손에 남긴 채, 꽃과 바람처럼 서둘러 떠나갔다. 덕상이는 치산에 살았는데, 눈매가 깊고 강했으며 말 수가 비교적 적어서 마음의 궁합이 잘 통했던 친구였고, 성호 역시 늘 웃는 얼굴에 마음이 선하고 눈매도 선했다. 하굣길이면 가끔 그의 방에서 뒹굴며 이유 없이 낄낄거리다가 해가 설핏해질 쯤 나 혼자 고갯마를 넘어 집으로 돌아오곤 했었다. 그리고 영환이의 마지막 모습은 아직도 선하다. 늦가을 어느 날, 그의 불길한 전화를 받은 나는 하던 일 밀쳐두고 달려가 그를 만났다. 세상 그늘이 다 내린 몹시 수척한 모습으로 나타난 그는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몇 차례의 사업 실패로 고통과 회환과 좌절로 속절없이 무너진 그는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받은 숱한 상처까지 덧씌워진 채 빗장 지른 가슴을 후려치며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었다. 나는 그의 통한의 심경을 말없이 들었다. "그래, 영환아, 우리 언제 식사 한 번 하자."란 토막말만 남긴 채, 그 스산한 가을 길을 우울하게 돌아섰다. 그런 뒤 어느 날, 식사 약속 대신 그의 부고장이 날아왔다. 어쩌면 "영환이는 가슴에 서리서리 맺힌 삶의 모든 울분을 내게 다 부려놓고 길을 떠난지도 모르겠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일은 죽는 일이다. 다들 이 세상과 적당한 타협을 하지 않은 채 서둘러 가버렸다. 꽃다운 나이로 먼저 떠나간 정 깊은 벗을 회억하는 일은 늘 안타까운 일이고, 가슴 아픈 일이다. 부디 나의 이 회억이 그들의 억울한 혼백魂魄을 조금이나 풀어주고 위안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성지 친구가 근무하는 치산 관광 단지 계곡쪽 풍경이다. 성지친구와 만나자 그의 아내는 약밥과 유정란과 그리고 찐밤을 산길 내내 드시라며, 마음 가득 정성 가득 건넨다.
오늘의 산행 들머리인 치산(稚山) 수도사修道士를 향하여 달리는 차는 봉화재를 넘어 간다.
봉화재는 산촌인 치산에서 면내로 통하던 길목이다. 사람들은 희노애락을 짊어지고 이 고개를 숨차게 넘나들며 농경시대의 삶을 살아왔다. 그것은 연정 고개와 신원골 고개도 만찬가지 였으리라. 치산의 치자는 꿩치자를 쓴다. 마을이 들어선 입지가 꿩의 형상을 닮아서 그 지명이 유래한다. 그러나 봉화재를 넘자, 알을 품던 산꿩의 모습은 흔적 없이 사라진 듯했다. 고속도로가 관통하고 있었다. 화려한 문명의 속도 앞에 허물어지는 것이 어찌 산천의 풍광뿐이겠는가. 우리를 태운 차는 협곡으로 들어간다, 그나마 계곡 깊숙이 들어가니 옛 돌담이 나타나고 점잖은 감나무가 우리 일행을 맞는다. 우리는 그곳에서 치산 캠핑장에 근무하는 성지 친구를 잠시 만난다.
▲ 수도사의 경내의 모습. 그간 숱하게 읊고 들었던 치산 수도사에 난생처음 발을 딛는다.
이윽고 수도사修道士다.
분위가 고즈넉한 화엄(華嚴) 세계의 공간이다. 외람되나 그간 숱하게 읊었던 수도사에 발을 딛은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내가 줄곧 상상했던 절은 산골에 자리한 암자쯤으로 여겼으나, 그 규모는 상상 이상으로 말쑥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수림이 울창하고 노송들이 의젓한 의장까지 갖추어 우리 일행을 정중히 맞는다. 이 수도사는 은해사銀海寺의 말사末寺다. 이 사찰은 말 그대로 부처의 가르침대로 불도佛道를 닦는 절이다. 사찰의 중심부엔 아미타불을 봉안한 극락전이 정면 3칸 축면 2칸으로 단장하고, 그 우측으론 원통전이, 그 뒷편엔 삼성각과 산령각이 위치하며, 극락전 맞은편엔 사천왕문에 해당하는 누각이 서고, 그 좌우론 요사채 종무소가 자리한다. 차를 주차한 곳엔 약사여래상이 긴 법의를 드리우고 친히 우리 일행을 친히 맞았다. 여래는 한없이 온화하고 자비롭다. 이곳은 일반 사찰에서 보기 드문 관세음보살을 봉안하는 원통전이 자리하고 일주문이 없다. 스산한 가을바람 귀불을 스치는 이 고즈넉한 곳에 서니 시간도 더디 가는 것 같다.
▲ 탯자리 팔공산 종주 산행 산행대원 단체 사진, 모두들 4,50대의 혈기 왕성한 모습이다. 죄로부터 정동길 대원, 전태호 대원, 하기룡 대원, 김정남 대원, 이순희 대원, 양원근 대원, 김석기 대원, 배광수 대원, 우리는 설산의 히말라야를 드는 심정으로 쉼 호흡을 크게 하며, 출발 전 마음을 다진다.
우리 일행은 수도사를 뒤로하고 들머리에 든다.
그 시각이 오전 8시 50을 지나고 있다. 푸른 물빛이 세차게 흐르는 계곡물 소리를 들으니 가슴을 씻는 듯 삶의 노폐물들이 자정되는 느낌이다. 이곳이 얼마나 청정하고 깨끗하기에 나뭇잎이 그 잎맥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아기의 투명한 속살에 파란 핏줄이 살아나는 것처럼 한없이 맑다. 공산폭포의 삼단 폭포수가 은다발로 떨어진다. 그곳 망폭정에 앉으면 세상은 잠시나마 별천지에 온 느낌이 아닐까 싶다. 울창한 숲과 흙과 바위, 그리고 맑은 물과 싱그러운 공기, 온갖 천연의 색깔이며 풋풋한 내음, 뭇 생명의 함성과 고요, 솔잎 스거우는 바람소리들, 어쩌면 이 말없는 산천은 오늘도 욕망과 탐욕에 절어서 휘청거리는 인간에게 말 없는 처연한 보시報施를 베푸는 것인지도 모를 터. 숫제 세상은 이제 돈이 최고의 가치요, 절대적인 신앙이 된 이 사바세상을 향하여, 저 공산폭포는 머리 풀어 서리서리 온 몸을 던지며 절규하고 있는지도 모르리라.
▲ 진불암 경내 전경. 하기룡 대원이 적멸보궁에 봉안 한 뒤 신발끈을 조이고 있다.
그곳에서 계곡의 물소리에 취해 숲길을 오르자 이윽고 진불암真佛庵이다.
동봉 계곡 능선길에서 오른쪽으로 비켜 앉은 진불암은 참으로 고즈넉하고 정갈했다. 문득 환멸 나는 사바세상의 등을 돌리고 문 닫아 걸고 수행하기엔 이만한 터가 없을 법한 곳으로 다가왔다. 텃밭도 제법 잘 갖추어져 있었다. 이곳 진불암의 적멸보궁전은 측면 두 칸 정면 여섯 칸으로 뒤뜰에 5층 불탑이 법당의 불상을 대신하고 있다. 뒤뜰로 돌아 불탑을 마주할 때, 탑 속에 무엇이 봉안되어 있을까 싶은 생각이 스쳤다. 그곳에서 우리 탯자리 일행은 목을 축이며 잠시 숨을 돌린다. 그때 “원근이”가 어느 해 가을 동봉 드는 길에 이 진불암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곳 앞뜰에 홀로 앉아 가을로 물 드는 산능선을 바라 봤을 때, 무릉도원이 따로 없는 듯했다고 더듬었다. 그곳을 나서는 길에 “동길이”도 한두 달 이곳에 머물면 세상 때가 다 씻겨 내려갈 것 같다 라며, 암자의 고즈넉함에 매료되어 있었다.
▲. 뒷 모습의 주인공; 배광수 대원, 그 앞이 하기룡 대원.
동봉으로 드는 본 능선길에 접어든다.
동봉으로 드는 능선 길은 생각 보단 잘 정비되어 갖추어져 있었다. 10월 초순인데 수목은 아직 푸른빛으로 출렁이며 원시림으로 싱싱하게 살아 있다. 숫제 모든 산길마다 꽃이 피고 푸른 바람이 불 터이나, 명성 자자한 산길 치고 사람들의 발길에 주눅이 들지 않는 산길이 없을 진데, 이곳 동봉으로 드는 산길엔 아직 원시의 시원이 싱싱하게 살아 있는 느낌이다. 우리 일행은 중간 중간 엉덩이를 붙이고 목을 축이며 길을 간다. 내 역시 불혹의 나이부터 산을 가까이 했다. 산을 타는 일은 내 삶의 고뇌와 사념을 삭혀내는 일이기도 하였으며, 내 속에서 일어나는 천길 불덩어리를 다스리는 일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수월하게 산정에 든 기억이 없는 걸 보면 산은 늘 내게 극도의 고통의 한계를 요구했다. 그 고통의 한계를 딛고 일어서면 희열을 한아름 선물처럼 선사했다. 오늘은 아득한 탯자리의 뿌리를 찾아 육신의 고통을 산길에 뿌리며 그 희열과 의미를 찾아 가는 것이다.
▲. 약사여래입상. 동봉의 정상은 이미 가을로 가고 있었다.
이윽고 동봉東峯 아래 선다.
그곳에서 돌을 버리고 부처가 된 시간을 만난다. 약사여래입상이다. 중생의 모든 병을 치료하고 재앙으로부터 구원을 해주는 부처다. 그 여래가 기나긴 세월의 풍상에 마모된 채 윤곽조차 희미해졌다. 지금처럼 이끼 낀 장구한 세월의 부처를 보면 인간의 마음이 전해진다. 얼마나 절절한 염원을 품었기에 한 발 한 발 숨 쉬기도 버거운 이 가파른 산정까지 올라와 저 거대한 바위에 인간을 구원하는 불상을 새겼을까. 그리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절절한 염원을 안고 이 여래상 앞을 바람처럼 쓰러져 갔을까. 하지만 저 침묵하는 여래는 태고의 정적은 깨뜨리는 법이 없다. 어쩌면 여래상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결엔 숱하게 스러져 간 이들의 풀리지 않는 삶의 미궁과 미완의 염원들이 묻어 있을지도 모른다.
▲. 동봉 정상이다. 우리 모두 만세를 불렀다. 저 만세 삼창은 지난한 세상 삶에서 피워내는 삶의 희열이요 환희가 아니겠는가.
이윽고 동봉東峯(1.167m)이다.
오석의 정상비엔 초서체의 흰 글씨가 또렷하다. 이 동봉은 치산 수도사에서 약5.5km에 우뚝 솟은 암봉岩峰의 봉우리다. 세상이 발아래 펼쳐진다. 그러나 비로봉과 서봉으로 운무가 자욱이 밀려와 동봉가지 번지면서 시야를 가린다. 밀려 드는 운무의 농도를 보니 쉽게 걷혀질 것 같지 않다. 이 세상 모든 길은 산정으로 통하고 그리고 흩어진다. 죽음도 삶도 그리고 이승과 저승도 이 산정에서 만나고 헤어진다. 어찌 보면 산정은 하나뿐인 목숨의 길이요 명면의 길이다. 바람은 이승의 사연을 실어 나르는 이 목숨의 길에 서면 끊어질 듯 끊어질 듯 가물가물 이어지는 아련한 산 능선이 숨이 멎을 듯 가슴으로 쓸려 들어온다, 그럴 때면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밀려와 바람 따라, 달빛 따라, 별빛을 따라, 속절없는 그리움의 산 능선을 넘고 넘어서 하염없이 가고 싶어진다. 이곳 동봉에서 동화사 시설지구에서 올라온 강진호 동기회 초대회장과 만나 동봉 기념 촬영을 남기고, 그 아래 자리를 펴 푸짐하고 넉넉한 만찬을 함께 즐긴 뒤, 강회장과 헤어지며, 우리 일행은 다시 신녕재(新寧嶺)로 향한다.
▲.정남 낭자의 발걸음이 다부지고 매웠다. 그 뒤 순희 낭자의 발걸음 역시 엄청난 저력을 보였다. 그 뒤 동길이와 태호, 석기, 원근이, 광수 모두 명산꾼의 반열에 오른 탄탄한 힘과 기량을 갖추고 있었으며, 기룡이 역시 산걸음이 한결 가벼워 산꾼의 반열에 올랐다.
동봉에서 신녕재까지는 대체로 완만한 사면으로 이어져 산길이 수월하다.
산정은 이미 가을로 가고 있었다. 조급한 성미를 가진 이파리들은 이미 물기가 말라 수척해졌고, 어떤 성미 마른 이파리는 붉고 노오란 옷으로 갈아입고 있고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신녕재 못 미쳐 가을 햇살 한 자락 타는 곳에 구절초꽃이 마알갛게 피었다. 가을 구절초꽃은 어머니의 구구절절한 마음의 꽃이요, 그 담백한 기품은 화단의 요란한 화초들에 비할 바가 아니어서 고절한 선비를 닮았다. 지난 몇 해 동안 나는 저 꽃에 반하여 해를 거르지 않고 한나절 함께하곤 했었다. 그 때마다 저 꽃은 내게 조용하고 깨끗이 늙어 가는 법을 내게 가르쳐 주곤 하였다.
▲.. 신녕재에서 단체 사진. 맨 좌측이 필자.
이윽고 신녕재에 도착한다.
이정표엔 이곳에서 치산 수도사까지 4.5km 표시돼 있고, 동화사까지 3.8km, 갓바위까지 4.6km를 알린다. 그곳에서 신녕봉을 돌아 나와야 했으나, 자욱히 내린 운무로 인하여 아쉬운 마음을 접는다. 한 사람 한 사람 우리 일행 모두 이순耳順이란 적지 않은 연륜임에도 불구하고 지친 기색 없이 푸른 바람처럼 싱싱하다. 어찌 보면 산행이란 자산과의 독한 싸움이 아닐까 싶다. 숨이 멎을 듯 차오르는 가파른 산길을 오르고 오르다 보면 포기 하고픈 자신과의 갈등 속에서 얼마나 많이 흔들렸던가. 우리는 이곳 신녕재에서 마지막 기념촬영을 남긴 뒤, 동화사로 하산 길에 든다. 유년시절 나는 밤 부엉이 울음소리 삼경三更의 적막을 삼키는 겨울이면 하얀 눈을 머리에 인 영봉의 장결한 모습에 가슴 시렸고, 연둣빛 생명의 향유를 산천에 뿌리는 봄이면 꽃이 터지고, 노랑나비 흰나비 나를 때면 어린 가슴에도 희열이 차올랐다. 여름 밤 찬란한 별무리들이 보석처럼 쏟아질 때면 황홀하였고, 칠보의 아롱지는 색채미를 수놓는 푸른 생명의 궁전 위로 자욱한 운무의 비구름이 숨 막히게 비켜 갈 때면 나는 숨이 막혔다. 푸른 달빛 골골이 젖어드는 가을밤 산천을 적시는 소쩍새 울음소리는 어린 가슴을 쓸어내렸고, 붉은 노을이 온 천지에 불길처럼 번질 때면 아련한 슬픔은 더없이 깊어졌던, 탯자리 팔공산은 내게 경외의 동경심을 심어준 산이었고, 아련한 슬픔에 젖게 했던 산이었다.
뒤돌아보니, 그 큰 산이 저만치 멀어진다. 내게 하나뿐인 생명을 터전을 마련해준 탯자리 산이 저만치 멀어진다. 탯자리는 내 요람이요, 내 정신이 머무는 영원한 거처다. 이 길 돌아서면 탯자리 그리움은 달처럼 뜨리라. 그 그리움은 하염없는 달맞이꽃이 되리라. ^^ *
탯자리 팔공산 종주 산행기._2019.10.05._ 석등._ 정용표.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