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도시》 기획특집 문학과 사유
DNA를 찾아서
김덕남
1. 전두엽을 열다
내 몸속 먼 조상은 새 혹은 뱀이었다
꽃길을 마다하고 길 아닌 길을 찾아
밤마다 불을 켜든다, 익명의 암호 캐는
구만리 장천 돌며 엿듣는 별의 대화
진창도 어둠속도 배밀이로 핥아가며
낱말의 부스러기 속 詩語 하나 찾아서
날개에 방점 찍다 위장술에 밑줄 긋다
낯설은 짜깁기로 구슬 꿰다 코를 꿰어
비몽과 사몽 사이에 찌 하나를 드리운다
- 「DNA를 찾아서」 전문, 《시조21》 (2017. 봄호)
어린 시절, 외로움이 고독을 키웠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생각이 많은 아이가 되고 독서에 눈을 뜬 게 오늘의 나를 만든 게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데 왜 시조시인인가? 세상 살다 보면 몇 차례 고비가 있다. 한 자리를 팠으면 무르익어야 할 나이다. 마음 깊숙이 숨겨진 내적 본능을 발현시키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언어구조는 대부분 2, 3마디로 되어 있으며, 여기에 토씨를 더하고 뺌으로서 3, 4조의 자연스런 율격이 되는 것이다. 이 율격에 이야기를 얹고, 그 이야기에 사상, 철학, 시대정신이 가미되면 시조가 되지 않겠는가. 나는 이 율격을 타는 재미를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내 몸속의 ‘DNA를 찾아’ 가는 길이니 어찌 멈출 수 있을 것인가. 더러는 ‘낯설은 짜깁기로 구슬 꿰다 코를 꿰어/비몽과 사몽 사이에 찌 하나를 드리’울망정 내 안에서 돋아나는 언어의 종유석을 캐지 않고는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문학은 살아온 인생만큼 그 깊이를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시는 체험이다’라고 릴케가 『말테의 수기』에서 말한 것처럼 직접체험이든 간접체험이든 체화된 언어로 시를 쓸 때 감동을 준다. 체험을 바탕으로 희망을 갖고 뇌의 전두엽을 열어 창작의 순간을 맞고 싶다.
2. 시대정신을 풀다
시조는 시대정신을 풀어가야 한다. 일찍이 다산선생은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시대를 아파하고 퇴폐한 습속을 통분히 여기지 않은 것은 시가 아니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특히 시절가조(時節歌調)라는 시조(時調)를 쓰는 입장에서야 더 말해 무엇 하리. 그래서 시인은 ‘세상의 부패를 막는 방부제’여야 한다지 않던가. 이 시대의 아픔은 도처에 깔려있다. 현실에 지치고 상처 받은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따뜻한 위로의 눈으로, 희망을 줄 수 있는 시어 하나를 찾는다면 밤잠을 설쳐도 글을 쓰는 보람을 찾을 수 있겠다.
거울 속 분칠하는 한 여자가 그를 본다
웃자란 눈썹 자르다 송두리째 파낸 기억
흐릿한 눈동자에 갇힌
새 한 마리 파닥인다
외계인이 찾아왔나, 어느 별을 헤맸더냐
눈시울에 얹혀있는 낯선 자식 바라보다
기억 속 창밖을 향해 더듬더듬 읊는다
꽃신을 신던 발이 자꾸만 재촉한다
뒷산의 뻐꾹새가 저리 운지 오래라고
철침대 난간을 잡고
허물 벗는 꿈을 꾼다
- 「요양원 일기」 전문, 《서정과현실》 (2014. 상반기호)
여기 요양원에서 생명을 유지하는 한 여인이 있다. 우리들의 어머니일 수도 언젠가 나의 모습일 수도 있다. 거울 속 분(粉)칠 또는 분(糞)칠하는 여인, 눈시울에 얹혀 있는 자식을 보고도 ‘외계인이 찾아왔나, 어느 별을 헤맸더냐’고 낯설어 하고 있다. 이미 세상의 분별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철침대 난간을 잡고/허물 벗는 꿈을 꾸’는 이 막막한 현실은 기억의 상실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현생을 벗고 재생의 길로 들어서는 몸바꿈의 과정이 아니겠는가. ‘이 시조가 쉽사리 비관적 정서에 물들지 않은 것은 존재의 틈을 벌리는 기억의 망실이 거추장스러운 허물을 벗고 새 생명으로 이전될 수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고 염창권 시인은 평을 한 바 있다. 힘들지만 긍정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자 하는 마음을 담았다. 나는 긍정의 힘을 믿는다.
최고만 고집하는 초읽기의 성과였어
묘수를 넘어서라 귀엣말이 쟁쟁했지
당신은 이미 알았어, 배신이 온다는 걸
당신을 빚어놓고 보기 좋다 하신 그분
선악과를 따먹어라 뱀들이 유혹할 때
그분은 모른 척했지, 당신 눈을 밝히려
알파가 가고나면 베타가 온다는 걸
칼에 베인다고 칼에 죄를 묻겠는가
진정한 고수를 향해 당신을 넘는 거야
- 「알파고」 전문, 《시조미학》 (2018. 봄호)
이 작품은 구글 딥마인드가 개발한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인 알파고(AlphaGo)가 이 시대 최고의 바둑기사인 이세돌과의 대국에서 승리하는 것을 보고 쓴 작품이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아래 평론가의 평으로 대신한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창조하신 이는 하나님이시기에 그 이상의 것이 탄생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인간은 과학의 기술이 언젠가는 인간을 뛰어 넘으리라는 의구심을 품고 발전시켜왔다. 그러던 중 알파고가 탄생되며 이세돌과의 바둑대결에서 알파고가 승리하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 했다.
김덕남 시인은 1연 종장에서 인간을 뛰어 넘으리라는 것을 ‘배신’이라 표현했다. 그것은 즉 신을 모독함이다. 아니 하나님은 태초부터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어 놓기 위해 뱀의 유혹을 모른 척했노라고 시인은 말한다. 인간의 눈이 밝혀짐은 인간에게 죄가 들어왔음을 말함이다. 하나님은 나는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과 끝이라고 말했다. 처음도 끝도 하나인 하나님 안에서 항상 첫째자리 알파만 오는 것이 아니요 그 다음 베타도, 그 다음도 경쟁은 끊임없이 이어지며 죄는 죄를 잉태할 수도 있음이리라. 이제 경쟁이 인간과 인간의 대결이 아닌 인간과 새로운 신기술과의 대결을 초래하는 문명사회임을 말해주는 현실에 도달했다. 시인이 말하는 진정한 고수의 세계의 끝은 어디일까? ‘당신을 넘는’다 했으니 인간이 만들어 놓은 만능의 세계가 인간을 위협해 오지는 않을까? 아름다운 별 안에서 바람을 노래하고 꽃을 노래하며 다른 행성을 행성이라 하지 않고 저 별은 나의 별 너의 별을 노래하는 우리의 가슴이 멍들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 《시조정신》 2018. 춘하 호. 시조 리뷰 (최도선)
시조는 함축미, 절제미, 균제미에다 시대정신을 담아야 하며, 그 이면에 많은 뜻을 담는 여백을 둔다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그 여백에서 독자들은 무한의 상상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시조가 창(唱)에서 비롯되었듯 그 리듬은 매우 중요하다. 리듬을 살리기 위해 한편의 작품을 써서는 책상 앞에 붙여 놓고 소리 내어 읽어본다. 물결이 흘러가듯 출렁출렁하는지, 걸리는 데는 없는지 읽고 또 읽어본다.
엄마의 엉덩이에 멍울진 몰핀 무늬
숨 끊는 통증 앞에 급히 찌른 하얀 수액
떨리는 내 손 껴안고
붉은 꽃잎 뚝뚝 진다
- 개양귀비꽃 전문, 《시와표현》 (2018. 1월호)
시조는 동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다. 자연과 더불어 인간은 살고 있다. 따라서 자연의 생태에도 관심을 갖는다. 현미경을 들이대듯 드릴로 이면을 뚫듯 생태를 들여다보고 그 소리에 귀 기울인다. 여기에 역사적 사실을 가미하고 재해석하여 인간을 둘러싼 생명체를 고루 아우르고 먼먼 후손까지도 생각한다. 생태시가 자칫 교훈적이거나 도덕적이 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으므로 설익은 서정으로 결론을 맺지 않으려 노력한다. 「복숭아, 탐하다」에서 보듯 ‘풍뎅이 헉헉거린다/ 속살을 파고든다’처럼 다소 관능적이고 익살스런 표현도 마다하지 않는다.
제 멋대로 자라나도 때 되면 연지 찍는다
엉덩이와 엉덩이가 춘화를 그리는데
노린재 더듬어간다
발칙한 더듬이
도화살 뻗쳤는가 단내 폴폴 풍겨댄다
풋고추 약오르는 칠월 땡볕 열기 속
풍뎅이 헉헉거린다
속살을 파고든다
- 「복숭아 탐하다」 전문, 《시조21》 (2014. 가을호)
3. 나와의 대화를 하다
수행자가 둘레를 깨끗이 하고 참선에 들 듯 시를 쓰는 과정도 수행의 과정이라고 본다. 고요한 가운데 마음을 하나로 모우고 자신을 들여다본다. 삼라만상이 잠들면 별들은 더욱 반짝거린다. 전두엽 후두엽 측두엽까지 최대한 열어놓고 심장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 내 전생과 후생까지도 끌어오길 마다하지 않는다. 그 극점에서 오두막에 살던 뒤뜰의 댓잎소리가 사운거리며 나를 찾아 올 때 나와의 대화가 시작된다.
나 죽어 한 필부의 젓대로나 태어나리
노래로 한세상을 달래어 살다가도
그리움 지는 달밤엔 가슴으로 울리라
그 다음 생 또 있다면 빗자루로 태어나리
티끌 먼지 쓸어내어 이 세상을 맑히다가
해 지면 거꾸로 서서 면벽수행 하리라
화살이나 죽창은 내 뜻이 아닌 것을
속 비워 어깨 서로 기대며 다독이다
생애에 단 한 번 꽃으로 경전 피워 보리라
-「대竹의 기원」 전문, 《시조세계》 (2013. 봄호)
시의 재료가 고갈될 때는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여행을 간다. 소설이나 영화로 다양한 삶을 접해 보는 것도 나를 자극하는 계기가 된다. 여행은 정신을 살찌게 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주산지로 문학기행을 간 적이 있다. 왕버들이 물속에 몸을 담근 채로 수백 년을 수행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물 위에 비친 그림자는 물속에 또 다른 신비한 세계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 중 다 썩고 밑둥치만 남은 나무에서 순탄치만은 않았을 나무의 길을 생각해 봤다. 단지 정경만으로는 시의 정신을 살리지 못한다. 물속에 몸통을 내린 정진의 길을 생각하니 나무도 저렇듯 ‘눈비도 달게 받고 달빛도 고이 받아/향기는 나비에게 뿌리는 버들치에게/마지막 남은 한 획에 물잠자리 앉’히는 길을 걸어가고 있구나. 그렇다, 너와 나의 구별도 욕망도 자아도 다 내려놓고 왕버들처럼 살아 갈 수 있기를 소원해 보며 얼른 메모를 했다.
몇 백 년 순례의 길 마침내 돌아와
벼루에 먹을 갈아 물 위에 선시를 쓴다
뼛속을 텅 비운 소리,
새들도 잠잠하다
저렇듯 하늘 품어 몸통 내린 물속이다
손발이야 짓물러도 날마다 빗는 머리
한세월 삭여낸 가슴 구멍마다 화엄이다
눈비도 달게 받고 달빛도 고이 받아
향기는 나비에게 뿌리는 버들치에게
마지막 남은 한 획에 물잠자리 앉힌다
- 「주산지 왕버들」 전문, 《좋은시조》 (2015. 겨울호)
4. 죽은 자와 소통하다
나는 신들의 도시, 경주에서 나고 자랐다. 경주는 죽은 자와 산 자가 어울려 소통하며 살고 있다. 수많은 고분이 오늘도 산 자를 불러 모은다. 때로는 산 자가 죽은 자를 불러내어 역사를 재생하기도 한다. 역사물에 관심이 많은 것은 태어나고 살아 온 곳과 무관치 않으리라. 핏줄의 내력인지도 모르겠다. 꽃다운 나이에 국가의 부름을 받고 산화한 아버지라는 그 이름은 역사의 산 증인이자 명치끝에 매달린 가족사의 통증이다. 그래서 ‘볼 붉은 혼’을 찾아 탐방하듯 순례하듯 역사의 현장을 찾기도 한다.
뉘 고르듯 잡풀 뽑는 왕릉 위의 저 여자
켜켜이 쌓인 시간 호미질로 불러낸다
한 생이 소금꽃 피어 속살이 내비치는
솔향 담뿍 풀어 어질머리 앓는 한낮
베이고 뜯겨져도 감싸는 풀잎처럼
비바람 끌어안는다면 다시 천년 못 가랴
굽 높은 접시 가득 제단에 올리는 땀
스란치마 한 자락을 찰찰 끄는 그날 바라
덩두렷 봉분에 앉아 알 하나를 품는다
- 「알과 여자 – 오릉에서」 전문, 《서정과현실》 (2015. 하반기호)
오릉은 난생신화를 간직한 박혁거세와 그의 왕비 알영부인 등 신라 초기 박 씨 왕들의 무덤이다. 현재의 여인은 신성한 봉분에 앉아 잡풀을 뽑지만 실은 알을 품고 있는 것이다. 죽음과 삶을 하나의 선상에 놓으니 풀 뽑는 여인이 알영부인으로 현신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즉 신화적 모성으로 역사를 재생한 것이다. 지금은 풀을 뽑아 하루하루 살아가지만 ‘스란치마 한 자락을 찰찰 끄는 그날’이 다시 오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고자 하였다.
이렇듯 내 시조는 자연 속에서, 삶의 현장에서, 때로는 역사 속에서 의식과 무의식의 체험 공간을 산책하면서 태어난다. 그러나 두렵다. 내 시에 영혼이 따라오지 않을까봐. 몸만 불쑥 나가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나를 다독이며 채근한다. 몸과 영혼이 함께 가자고. 또한 사물에 현미경을 들이대듯 드릴로 이면을 뚫듯 시의 세계를 확장하면서 깊이를 갖고 싶다. 그리하여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만날 때까지 시조를 향한 내 발걸음, 나의 DNA를 지켜보고 싶다.
*위 글은 현대시조 100인선 『봄 탓이로다』 (2017. 고요아침)의 자전적 시론에서 일부 가져와 정리하였음.
약력 : 2011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시조시학 젊은시인상, 한국시조시인협회 올해의시조집상 및 신인상 수상. 시조집 『젖꽃판』 『변산바람꽃』, 현대시조100인선 『봄 탓이로다』
- 《문학도시》 2018.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