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역사를 품다 8」 - 《시조21》 2023. 여름호 연재
자산어보의 길을 찾아
김덕남
“몸은 위아래로 납작하고 위에서 보면 마름모꼴이며 길이는 약 150cm, 빛깔은 등쪽이 갈색, 배쪽은 희거나 회색이다. 머리는 작으며 주둥이도 작으나 돌출되어 있으며, 눈은 작고 분수공은 눈의 뒤쪽에 가깝게 붙어있다. 난생이고 20~80m의 깊은 곳에서 살며 봄에 산란한다.”
200여 년 전 『자산어보』를 쓴 손암 정약전이 유배살이를 했던 흑산도 사리마을에 조성된 ‘자산어보원’의 돌에 새겨놓은 홍어에 대한 글이다.
1801년 11월(음) 찬 바람이 몰아치는 나주의 율정점이다. 아우 다산과 하룻밤을 새운 이른 아침 금부도사의 독촉에 형제는 언제 만날지 모를 이별을 해야 했다. 그 이별의 발자취를 찾을 수 있을까. 수소문하여 나주시 대호동 사거리에서 ‘율정교차로’란 교통표지판을 겨우 찾았을 뿐이다. 이별의 아픔도 역사의 현장도 사라졌다. 개발에 밀려 소로는 대로가 되고 삼거리는 사거리가 되었다. 율정栗亭이라면 밤나무가 많이 있었다는 뜻일 텐데 밤나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여기가 그때의 삼거리인가? 그렇다면 율정점이라는 주막도 여기쯤 있었을까? 오열을 참고 헤어지던 자리에는 바람만 불어댄다.
1.
아우님, 자네가 먼저 길 나서시게
배교의 쓰라림도 / 반역의 캄캄함도
화로 위 / 해당화 꽃잎 / 불타오른 저녁 해
2.
형님, 이번이 마지막은 아니겠지요
밤새워 우는 말 / 낮닭의 홰 소리
죄 없이 / 죄를 지어서 / 육자배기 / 휘어진 길
- 고성만 「율정점에서의 이별」 전문
“아우님, 자네가 먼저 길 나서시게.”
“형님, 이번이 마지막은 아니겠지요.”
“죽어 욕된 것은 만회할 길이 없지만 살아 욕된 건 만회할 길이 있네, 버틸 때까지 버텨보세.”
손을 차마 놓지 못하는 아우를 위로하고 돌아서는 가슴 위로 진눈깨비 흩날린다. 글썽한 눈을 들어 손암은 아우와 헤어진 후 영산포에서 배를 타고 우이도(소흑산도)로 향했다.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이었다. 거친 파도를 헤치면서 앞을 예측할 수 없는 바닷길로 나아갔다. 지금이야 목포에서 쾌속선 2시간의 뱃길이지만 그때의 돛배는 영산포구를 빠져나와 서남해로 향했기에 수일이 걸렸다고 한다.
3월 21일 07:50. ‘남해 퀸’ 쾌속정으로 목포항을 출발했다. 고하도 등 섬과 섬 사이를 돌아 잔잔한 물결 위를 미끄러지듯 떠간다. 김, 미역, 전복 양식장을 지나니 먹장구름이 드리워진 하늘이 무겁다. 새들이 먹이를 채는 동안 안좌도 옆을 지난다. 1004의 섬이라는 말이 실감 나듯 푸른 산 고물고물 물을 베고 누웠다. 도초도 비금도 사이를 지나 흑산도로 향한다. 이 바닷길을 가면서 손암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끔찍한 현실과 불안한 미래에 몸을 떨었을 것이다.
바로 손아래 아우 정약종이 천주학과 관련된 물건들을 농에 넣어 옮기려다 발각된 ‘책농사건’으로 신유박해(1801년)가 일어났다. 위기를 느낀 황사영(형 정약현의 사위)은 천주교 박해 실상과 군함을 동원하여 박해를 막아달라는 청원 내용 1만3천여 자를 명주에 깨알같이 적어 청국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되었다. 이로 정약종은 아들과 함께 참수되고, 황사영은 능지처참 되고 어머니와 아내는 노비로, 2살 된 아들은 추자도로, 숙부는 함경도 경흥으로, 하인들도 사방으로 유배되었다. 그의 집은 불태워져 웅덩이가 되었고.
이때 노론과 정순대비는 손암과 다산을 황사영 백서사건에 얽어 죽이려 하였다. 이미 신지도와 장기에 유배 중인 형제를 압송하여 조사하였으나 혐의가 없자 손암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다시 유배를 보냈다.
승선 두 시간 만에 흑산항에 닿았다. 동백, 후박, 소나무 등 상록수가 사철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인다는 흑산도다. 이미자 ‘흑산도 아가씨’ 노래가 울려 퍼진다. 택시로 진리, 심리 등 열두 구빗길을 돌아 사리(모래미)마을의 정약전 유적지에 닿았다.
사리 ‘유배문화공원’에서 돌담을 따라 오르니 ‘본향안치’ ‘절도안치’ ‘위리안치’라는 유배 거주가옥을 재현해 놓았다. ‘위리안치’ 뒤 후박나무숲에서는 휘파람새 울음이 유배인들의 넋을 위로라도 하는 듯 애절하다. 복성재復性齋 내 ‘사촌서당’은 문이 잠겨 있어 적막하기 그지없다. 모래가 많아서 사촌이라 불리던 사촌서당은 손암이 섬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자산어보』 등을 집필했던 곳이다. 툇마루에 앉아 섬에서 느꼈을 절대고독과 그 고독을 벗어나 새로운 길을 찾아간 손암의 정신을 생각해본다.
눌러 쓴 문장들이 포말로 흩어진다
거세당한 홍어가 꿰미에 걸린 저녁
한사리 먹빛 바다가
달을 집어 삼킨다
투망질 같은 상소에도 서울은 멀고멀어
검질긴 겨울 숲에 초록을 덧씌우며
바람에 붓끝을 세워
파도를 재우는 섬
어디나 끝점이란 돌아서면 시작이다
포구마다 홰를 치는 바닷새 울음 따라
날치 떼 잠을 잊은 채
물마루를 넘는다
소인 없는 답신처럼 새벽이 오려는가
노송의 그림자가 난바다로 드리울 때
스칠 듯 내리는 별빛
해배의 길 열고 있다
- 임채성, 「흑산도」 전문
황사영 백서 사건 이후 처음 유배된 곳은 우이도牛耳島(소흑산도)였다. 가장 많은 기간을 보낸 곳이 대흑산도였기에 여기에다 유배공원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다양한 저술 활동을 펼친 곳도 여기다. ‘눌러 쓴 문장들이 포말로 흩어’지고 ‘바람에 붓끝을 세워 / 파도를 재우는 섬’에서 ‘해배의 길’을 기다렸지만 우이도 – 흑산도 – 우이도에서 유배 16년의 생을 마감했다.
손암은 흑산도에 거주하면서 우이도에서 온 홍어장수 문순득으로부터 1802년부터 1805년까지 3년 2개월 동안 그가 겪은 얘기를 듣고 『표해시말漂海始末』을 쓴다. 문순득 일행 6명은 흑산도의 홍어를 사서 우이도로 돌아가다 풍랑을 만난다. 유구(오키나와), 여송(필리핀)에 표류하다 일행 중 두 명이 마카오, 난징, 베이징, 의주를 거쳐 돌아오게 된다. 손암은 문순득의 표류 여정과 그 지역의 언어, 풍속 등을 세세하게 받아 적었다. 112개의 유구어와 여송어는 현지에서도 민요나 고전에서만 접할 수 있는 언어로 귀중한 연구자료가 된다고 한다.
‘유배문화공원’ 안내판에는 흑산도에 130여 명이나 유배 왔다고 적혀있다. 제주, 거제, 진도 다음으로 빈도수가 높은 유배지였다니 놀랍다.
백제의 세 왕자, 면암 최익현, 정순황후의 오라비 김귀주 등 당대의 지도층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1693년 나인 ‘정숙’이 ‘해괴한 짓’을 한 죄목으로 유배 왔다고 씌어 있다. 사람을 죽인 것도 역적질을 한 것도 아닌 ‘해괴한 짓’이 무엇일까? 여자에게만 덮어씌운 성리학적 성문화 편견의 피해자는 아닌지?
‘자산어보원’에는 까치상어, 환도상어, 홍어, 쏨뱅이, 쑤기미, 넙치, 거북손 등 『자산어보』에 등장하는 물고기의 어보를 돌에 그림과 함께 새겨 놓았다. 손암은 이 지역의 창대(본명 장덕순)의 도움으로 226종(비늘 없는 물고기 43종, 비늘 있는 물고기 72종, 껍질 있는 게류 66종, 해조류 등 잡류 45종)의 『자산어보』를 저술하게 된다. 물고기의 모양, 생태의 특성, 이동 경로, 맛 등을 기록한 해양백과사전이다.
그중에서도 흑산도 하면 홍어다.
흑산항의 홍어 횟집 앞에서 곱상한 여인이 손을 잡아끈다. “암놈이 수놈보다 큰 거이 뭐까잉? 입은 한 일자요, 꼬리는 돼지꼬리요, 모양은 연잎이라, 빛깔은 검붉지라. 쌍으로 올라오다 암놈은 바늘에 걸려 죽고 수놈은 사랑 때문에 죽지라. 찰지고 쫄깃쫄깃하여 한 번 입에 넣으면 살살 녹지라이. 연한 코에 날개, 몸통, 애도 최고의 맛이랑께.”
호객도 이쯤 되면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홍어전문 식당 식탁 늦은 저녁 다섯 사내 탁주잔에 묵은김치 삭은 살점 올려놓고 중국과 러시아 일본 미국까지 막 씹는다
굳은살 깊게 박인 꺼끌꺼끌한 손의 이력 때마침 TV속보 단속 경찰 순직 소식 “그랑깨 서해 바다가 뙤놈들 꺼여! 뙤놈들 꺼”
목소리가 식탁까지 우두둑 씹을 형국 “참말로 어쩌다가 요로코롬 되앗쓰까~이, 에라이 시불놈들아!” 부르르 떠는 술잔
죽어 향기 내는 일이 합일合一처럼 신성해서 미물도 냄새 뿜어 수무하게 풀라는데 “그랑깨 만만한 거이 홍어 조지라, 이거제이”
들쑤시던 삿대질이 창을 통해 쭉 빠지고 이번엔 6자회담 북한 핵을 막 씹는데 사내들 손바닥에선 삼합三合이 또 이루어진다
- 변현상 「군사설 – 홍탁」 전문
양반 표시를 내지 않고 섬 주민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던 손암이 이 자리에 끼었다면 어떤 말이 오갔을까. 그 시절 탐관오리들에 입은 폐해나 청나라 뱃사람들이 훑어간 바다를 한탄하며 분통을 터뜨리지 않았을까. 먹는 맛도 맛이지만 걸쭉한 전라도의 입말도 맛이다. 이곳 사람들의 어려움을 들어주고 글을 깨우쳐주며 흑산도 사람이 되어 살아가는 소탈한 손암이 눈앞에 그려진다. “귀양살이하는 사람이 다른 섬으로 옮기려 하는데, 그곳 사람들이 더 있으라고 애원하며 길을 막았다는 말은 우리 형님 빼고는 듣지 못했다.”(「유배지에서 보낸 정약용의 편지」 정약용 지음, 박지숙 엮음. p51)고 다산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적고 있으니.
손암은 『해족도설海族圖設』의 초고를 작성하여 다산에게 의견을 구하였다.
“책을 저술하는 한 가지 일만은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되니, 형님께서는 유의하심이 어떨는지요? 『해족도설』은 무척 새롭고 흥미로운 책입니다. 하찮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림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글로 쓰는 것이 그림을 그려 넣는 것보다 나을 듯합니다.”(위 책. p123)
위 편지의 내용대로 아우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림을 없애고 『자산어보玆山魚譜』라 하였다. 물고기에 대한 상식이 있는 사람은 설명만으로도 알겠지만 모르는 사람은 그림과 함께 보아야 이해가 빠를 것이다. 참으로 아쉬움이 크다. 손암은 흑산의 이름이 어둡고 두려워서 가믈하다는 뜻을 가진 ‘玆山’으로 바꾸어 표기하였다. ‘玆’는 ‘현’으로도 읽히니 ‘자산어보’보다는 ‘현산어보’라 불러야 한다는 박석무, 이태원, 박지숙의 주장이 솔깃하다. ‘자산’이 일차원적인 현실 세상이라면 ‘현산’은 삼차원적인 현묘한 세상처럼 느껴진다.
배편에 맞추어 도초도에서 자고 이튿날 06:20 도초항에서 우이도로 가는 배에 올랐다. 120명 승선용 ‘섬사랑 6호’에 승객은 단둘, 우리 일행뿐이다. 1시간 만에 우이2구 돈목 선창이 파손되었다는 안내방송과 함께 성촌 선착장에 배를 대었다. 손암이 기거했던 진리마을은 성촌의 반대편으로 두 고개를 넘어야 한다. 수만 년 바람이 만들어낸 80m 높이의 모래언덕(風成沙丘)을 지나 대초리 몰랑(고개)을 넘었다.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지 않았는지 대초리 마을은 전체가 신우대밭으로 변했다. 돌담 사이로 우물터가 남아 있고 빽빽한 신우대 사이 머위 잎이 파릇하다. 상산봉(해발361m)을 오르니 사방이 탁 틔었다. 수제비를 툭툭 던져넣은 것 같은 섬들이 저마다 우이도를 향해 꿈틀꿈틀 다가오는 것 같다. 손암도 이 봉우리에 올라 사방을 내려다보며 천리 먼 고향의 가족을 그렸으리라. 아우가 곧 해배되어 찾아올 것으로 생각하며 강진 쪽을 바라보았으리라. 또 하나의 고개 진리 몰랑을 넘어 진리마을 쪽으로 내려왔다.
산기슭 돌밭 가에 ‘정약전 서당터’란 팻말이 외롭다. 조금 더 내려오니 신우대숲과 밭으로 변해버린 곳에 ‘손암 정약전 유배 적거지’란 팻말이 보인다. 다 사라지고 돌담과 팻말만이 200여 년 전을 말해준다. 『표해시말』의 주인공 ‘문순득 생가’는 몇 년 전까지 후손들이 살았다는데 지금은 초가로 복원해 놓았다. 진리 선착장에는 손암과 문순득의 동상이 마을의 수호신인 양 서 있다.
1810년, 1814년 두 번에 걸쳐 다산이 석방될 거란 소식을 듣고 흑산도에서 우이도로 옮겼다. 강진의 아우가 조금이라도 찾아오기 수월하라고 옮겼던 것인데 홍명주, 강준흠 등의 방해상소로 석방은 무산되었다. 2년을 기다렸으나 끝내 해배 소식을 듣지 못하고 유배 16년 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환갑을 못 채운 59세였다.
성리학과 서학이 결코 맞서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야 할 벗이라며, 벗을 알면 내가 더 깊어진다던 손암이다. 바다를 바라보면서 바다생물을 연구하는 과학자로 섬 주민들을 사랑하는 뜨거운 인간애를 보여주었다. 목숨은 가볍고 의지는 무거워서 형극의 절망에도 혼불은 피어났다. 먹물향 흐르는 붓끝, 물비늘이 튀고 있는 『자산어보』의 붓길에 뭉클한 감정 감출 수 없다. 다산을 이끌어준 글벗이자 다정한 스승인 손암을 그리며 다만 고개를 숙일 뿐이다.
김덕남 : 2011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조집 『젖꽃판』 『변산바람꽃』 『거울 속 남자』 현대시조100인선 『봄 탓이로다』. 올해의시조집상, 이호우·이영도시조문학상 신인상, 오늘의시조시인상 수상 등
- 《시조21》 2023.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