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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계절의 책꽂이- 홍성란 시조집 『즐거운 징후』]
위버멘쉬, 관조와 달관의 대위법
임채성(시인)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친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하는 존재다.
그대들은 인간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독일 철학자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선지자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했다. “불완전한 인간들이여, 초인이 돼라!”. 니체가 말한 ‘초인(혹은 초월자)’은 원어로 위버멘쉬(Übermensch)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Overman’ 또는 ‘Superman’으로 번역되곤 한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은 영화 속에 나오는 슈퍼맨이나 원더우먼처럼 초능력을 가진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초월적 정신을 가진 존재,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인간상을 의미한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고 인간의 본성과 투쟁하며 끊임없이 더 나은 존재로 진화해 가는 사람이 니체가 말한 초인이다. 이는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아모르 파티(Amor Fati)’나 삶의 고통과 혼돈을 도취와 창조의 에너지로 긍정하는 ‘디오니소스적 삶’의 태도와도 닮아있다.
홍성란 시인의 시조집 『즐거운 징후』에도 니체가 말한 ‘초인’ 개념이 중요한 사유의 기반으로 작용하고 있다. 시인이 그려내는 초인은 주어진 운명을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온전히 보듬어 안은 채 그 안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찾거나 만들어가는 초월적 인간상이다. 과거의 행적과 세상의 기준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는 자기 혁신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 나가는 인간, 즉 위버멘쉬의 자화상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세상의 편견과 변덕, 무관심을 탓하기보다 응시와 성찰이라는 관조의 자세로 그것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임으로써 달관과 초월에 이르는 것이다. 현실을 긍정하고 자아를 바로 세워 발전적인 미래로 나아가려는 삶의 철학, 그것이 이번 시조집을 관통하는 키워드라 할 수 있다.
또한, 발문처럼 쓴 ‘후기’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인공지능(AI) 시대를 넘어 스스로 학습하고 응용할 수 있어, 할 수 없는 게 없을 것 같은 AGI 시대로 가는 지금, 우리 시대에 단정하고 반듯하게 정감을 펼쳐 ‘아적雅的 의취意趣’를 담은 시조가 다시 그립다. 그 힙한 시조가 그립다.”고 말한 것처럼, AI 시대에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가치는 무엇이며, 시조가 취해야 할 미학적 지향점은 어디여야 하는가에 대한 모색과 탐구도 들어있다. 그런 점에서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야말로 AI 시대 우리가 지향해야 할 표상이 아닐까 싶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에 소요를 등지고 고요를 찾는 구도자의 모습으로 자신을 이미지화함으로써 무상無上의 기쁨과 평온을 되찾고 있기 때문이다.
물처럼만 흐른다면 이르지 못할 길 없으리 빙 돌아가더라도 막아서 넘치더라도
장쾌壯快한
폭포처럼 닿으리, 나 아닌 나에게
- 「너에게 가는 길」 전문
획일화된 생각으로 모두가 한 방향만 지향하는 세상에서 다르게 생각한다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외로움에 몸부림치거나 소외의 고통 앞에서 방황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시대, 그런 사람들에게 시인은 묻는다. 나는 나 자신이 되었는가? 나 자신이 될 수 있는가? 얽히고설킨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끝까지 지켜야 할 존재는 누가 뭐래도 자기 자신이다. 현실이 아무리 삭막하고 냉혹해도, 세상이 아무리 흔들어도 중심만 잡고 있으면 내가 머무를 오아시스는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구도자적 태도가 엿보이는 「너에게 가는 길」은 세상의 기준이 흔들리고 복잡할수록 나만의 기준을 세워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는 것 같다. 시인이 세운 기준은 “물처럼 흐르”는 것이다. 물은 장애물을 만나면 돌아갈 줄 알고, 막다른 길에서는 부딪쳐 길을 열며, 한곳에 머물러 때를 기다릴 줄 알며, 상황에 따라 자신의 속도를 조절할 줄 아는 존재다. 이는 노자 철학의 핵심인 ‘상선약수上善若水’의 지혜이기도 하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내 맘과 같지 않다고 하여 문제나 상황을 인위적으로 바꾸려 하기보다 자연스럽게 순간의 흐름에 맡겨 두는 것이 때로는 가장 좋은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시인은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결국 “나 아닌 나에게” 닿는 길이기도 하다. 그래서 화자는 “오려거든 오렴, 말 모르는 꽃처럼”(「너」)이라는 기다림의 자세에서 “너 오길 기다리다 너 만나러 간다”(「좋은 일」)며 적극적으로 ‘너’를 찾아 나서게 된다. 껍데기로서의 ‘나’와 초월적 존재로서의 ‘나’는 아직 동격(동일자)에 이르지 못했기에 제목을 ‘나에게 가는 길’이 아닌 ‘너에게 가는 길’로 붙여 놓았으리라.
금방 지나가도
시방 오듯이
이제 시작이야 너무 애쓰지 마
힘 빼고
구름 가듯 구름 가듯 봄볕에 새잎 나듯
- 「바람 부는 날 능수버들 읽는 법」 전문
순리와 세상의 흐름에 몸과 마음을 맡겨 보자는 시인의 마음은 자연물과의 교감을 통해 구도적 세계관과 삶의 알레고리를 확장한다. 능수버들은 가지가 아래로 축축 늘어져 있는 버들이다. 그 모양 때문에 수양버들과 자주 혼동되곤 하는데 능수버들은 우리나라가 원산지고 수양버들은 중국이 원산지라는 점과 잎이 돋아날 때의 가지 색깔이 다르다는 점 말고는 거의 같다. 김소월이 그의 시 「실버들」에서 ‘천만사千萬絲’로 표현했듯 그 늘어진 가지들 때문에 능수버들은 바람이 불면 머리를 풀어 헤치고 몸부림을 치는 것 같은 모습을 연출한다. 그런 모습을 보며 시인은 제 삶의 지향점을 읽는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잠언처럼 모든 것은 순간이라며, “너무 애쓰지 마”라고 당부하는 것이다. 능수버들이 바람에 맞서지 않음으로써 바람을 이겨내는 것처럼,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다 보면 “봄볕에 새잎 나”는 때가 올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여기서 능수버들은 시인의 페르소나라 할 수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는 약한 존재, 그런 내면의 자신에게 들려주는 자기 독백의 진술로 달관의 알레고리를 완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자세는 “무슨 바람에 다시 흔들릴까 몰라도// 그늘에/ 웃음을 지운 꽃처럼은 안 할래요”(「수목원에서」)라며 다른 나무들을 통해서도 발현된다.
무슨 인연이 너와 마주하게 했을까, 먼 지평선 너머 석양을 품게 했을까
누구도 움켜쥘 수 없다, 붙들 수 없다
흘러내리는 모래는 모래가 아니어서 부드럽다는 말보다 더 부드러운 시간
언젠가 너를 안다면 소멸도 그리 곱겠다
- 「사하라」 전문
구도자적 자세로 삶의 진실에 가닿고 싶어 하는 시인의 마음은 「사하라」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시조집 속 대부분의 시편들이 그렇듯이 이 작품은 시적 대상의 세밀한 서경 묘사보다 그것이 품고 있는 세계 해석의 품격을 잘 보여준다. 사하라는 억겁의 시간이 만들어낸 대자연의 총화다. 그 거대한 사막 앞에 선 화자는 “무슨 인연이 너와 마주하게 했을까, 먼 지평선 너머 석양을 품게 했을까”라며 느꺼워한다. 그러나 느꺼움도 잠시, “누구도 움켜쥘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며, 자신이 한 알의 모래 알갱이처럼 한없이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인식에 도달한다. 오랜 시간이 빚어낸 사막의 모래 한 알은 우주 속의 자기 자신과도 같기 때문이다. 너무 부드러워서 흘러내려 버리고, 흘러내림으로써 형체를 만들 수 없는 ‘모래’처럼 자신도 언젠가는 ‘소멸’에 이를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참 나’를 알게 된다면 “소멸도 그리 곱겠다”며 구도적 수행의 삶에 대한 의지를 피력한다. 존재의 실상을 응시하며 그 안에 숨어 있는 진실을 캐내려는 시인의 목소리는 나직하면서도 장중하다.
대체로 이번 시조집에 사용된 언어는 부드럽고 진술은 간명하다. 조형적인 비유가 없이 평면적이며 서술적인 이미지로 가득 채워져 있다. 시의 분위기 또한 고요하고 차분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를 통해 시인은 조락과 소멸, 고요와 평안의 시공간을 정관적인 태도로 응시한다. 그 정관적인 응시를 통해 시인의 내면은 빈 공간으로 활짝 열리면서 그 자리에 알레고리의 사물들을 가득 채운다. 쉽게 읽히는 평이한 진술 속에 범우주적 삶의 철학이 녹아 있는 깊이와 여운의 감동을 획득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처럼 외부 세계를 부드럽게 수용하면서 그 안에 자신의 세계 해석이나 정서적 상황을 자연스럽게 덧입혀 가는 양상은 홍성란 시조미학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새가 울며 나는 건 기쁘기 때문이다
나무도 기뻐서 꽃 피우고 열매 맺는다
내일은
무슨 일에 기쁠까, 무슨 일에 슬플까
- 「신비神祕」 전문
정신적 충만을 추구하며 “마음엔 못 받을 선물이 없다는 걸 알”게(「좋은 귀」) 된 시인은 세상만사가 경이驚異이자 신비라는 것을 깨닫는다. 새가 우는 것도, 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도 기쁘기 때문이란다. 이는 “날 데리고 가는 강물이며 구름이며// 날 데리고 노는 물까치며 토룡이며// 가문 날 못비 오시니 고개 드는 풀잎이며”라며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내적 충만을 표현한 「소만小滿」의 마음과도 같다. ‘소만’은 24절기 중의 하나를 뜻하는 말이지만, 본뜻은 ‘사물이 생장하여 가득 찬다’는 의미이니 봄이 한창 무르익는 ‘소만’이 곧 시인의 현재 마음인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자신의 신념을 위해 싸우다 죽어가면서 “세상은 충분히 싸울 만한 가치가 있는 아름다운 곳”이라고 읊조리는 주인공 로버트 조던의 독백과도 비슷하다. 남이 정한 정답이 아닌 스스로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주체적인 자아, 그것이 시인이 바라는 시인의 자화상이자 초인의 초상이기 때문이다.
「신비」에서 새나 나무의 기쁨은 기실 시인의 마음이다. 화자가 기쁨을 느끼기 때문에 세상 만물도 기쁨에 들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는 곧 이전에는 그러한 기쁨을 누리지 못했다는 반어적 표현이기도 하다. 그 반전의 계기가 무엇이든 지금의 화자는 긍정의 힘을 통해 세상의 경이와 생활의 발견을 체현한다. 종장의 결구가 “무슨 일에 슬플까”라고 했지만, 그것은 두려움이나 경계의 감정이 아니라 슬픔조차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수용의 의지이자 달관의 자세다. 이는 “너라는 빈 자리 그리움도 아득하니// 편안한/ 슬픔이라고 널 불러도 좋을까”(「향낭香囊」)에 깃들어 있는 ‘편안한 슬픔’과도 같다. 이번 시조집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가 나만 아는 비극, 홀로 외로이 견디는 고통도 나만의 고유한 경험으로 치환되는 것이라고 할 때, 그 정서를 대변하는 작품이라 할 만하다. 대상과 내면을 응시하는 시선의 낙차는 곧 비관적 요소를 긍정적 아름다움으로 탈바꿈하는 무한한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시인은 계산적이고 몰인정한 현실의 구석구석에 ‘신비로운 것들’이 있으리라는 믿음과 용기를 건넨다. 그것이 비록 지극히 개인적이고 폐쇄된 믿음이라 할지라도, 그 고유한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나’가 있다면 충분히 괜찮다는 위로인 셈이다.
해안가 거미집도 저런 집은 처음이라 지나가던 대충大蟲이 들여다보고 있으니, 잘생긴 저 호랑거미 들인 공 있었네
발길 붙들어 맨 건축술 하며 처세술 하며 사로잡힌 대충이야 보건 말건 자는 시늉, 우주의 누가 또 알까 바닷가 이 소식을
알고도 속아주는 그 즐거움이 즐거워 범[虎]은커녕 벌레도 날벌레로나 낚여서, 고요한 호랑거미 가까이 거듭 돌고 돌았네
- 「즐거운 징후」 전문
표제작으로 쓰인 「즐거운 징후」는 시인이 내적 충만에 이르게 된 계기를 이해하는 데 단초를 제공해 준다. ‘징후’라는 말에서부터 변화의 낌새를 담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화자는 ‘바닷가’ 어느 집 앞에 서 있다. ‘일러두기’에 따르면 해남군 송호리 해변이다. 그 집은 ‘호랑거미의 집’이다. 그런 집은 “처음이라” 감탄하며 바라보는 그는 한 마리의 큰 벌레, 즉 ‘대충’이다. 화자가 자신을 벌레로 낮추고 있는 것은 그가 바라보고 있는 호랑거미보다 더 나은 존재가 아니라는 역설이기도 하지만 광대무변의 ‘우주’로 시선을 확장하면 인간도 벌레에 지나지 않는다는 은유이기도 하다. 이는 인간 역시 고정된 자아가 없고 업과 인식의 흐름 속에 놓인 존재라는 점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시인은 아직 완전히 깨닫지 못한 존재이자 동시에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로서 ‘대충’이라는 시어를 만들어낸 것이다. 결국 화자가 호랑거미와 대비되는 ‘대충’을 통해 본 것은 하찮은 존재 자체가 아니라, 벌레와 다름없어 보이는 자신의 참모습이다.
이러한 인식은 설악무산 대종사이자 시인이었던 조오현의 여러 시편들과도 궤를 같이한다. 그러니까 여기서의 ‘대충’은 「내가 나를 바라보니」에서 “온갖 것 다 갉아먹으며 배설하고 알을 슬기도” 하는 한 마리 벌레와 「산에 사는 날에」 속에 표현된 “하루는 풀벌레로 울고 하루는 풀꽃으로 웃”는 마음이나 「아득한 성자」의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의 비유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동식물을 대하는 시인의 이러한 태도는 자신을 ‘어린 고라니’나 ‘달팽이’에 비유하는 것으로도 나타난다. 인간이라는 우월감, 사회적 지위와 명성, 도덕적 자아를 벗겨냈을 때 남는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의 단순한 실존 말이다. 이는 곧 육안으로 보는 ‘나’와 심안으로 보는 ‘나’의 존재가 다르다는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인간 중심의 눈높이를 낮추고, 생명을 보다 단순하고 원초적인 방식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화자의 마음이 자연과의 공감을 이루고 내적 충만에 이르게 했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어둠을 지켜본다는 건 어둠을 받아들이는 일
지켜보는 것만으로 어둠은 물리칠 수 있다
아침 해 솟아오르자 나는 빛이 되었다
- 「방房」 전문
일상의 발견과 체험을 단순한 묘사로 끝내지 않고, 고요한 사유와 존재에 대한 들여다봄을 통해 달관과 자기 긍정을 이끌어온 시인은 「방」에서 초월의 경지를 보여준다. ‘방’은 자아와 세계가 분리된 폐쇄적인 공간이다. 방 안에 들어있는 ‘나’는 세계와 분리된 채 웅크리고 있는 자아이고, 방 밖의 공간은 자아가 비상의 꿈을 펼칠 수 있는 욕망의 무대이다. 작품 속에서 화자는 어둠의 현실을 받아들인다. 폐쇄적 공간에서 열린 사회로 나오기 위한 마음의 준비다. 현실은 쓸쓸하고 무상한 것이지만 그것을 똑바로 마주할 수 있을 때 달관과 초월에 이를 수 있다는 의미다. 시인은 ‘기다림’을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향한 막연하고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라 능동적이고 역동적인 준비 자세로써 받아들이는 것이다. “둘레길 방담放談에도 웃어넘길 일 있으니 가끔은 그렇게 지고도 이기는 거다”(「소살笑殺」)라며, 시인이란 지는 것으로서 이기는 자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사람을 괴롭히는 건 사건이 아니라”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렸다”(「아침 사경寫經」)는 ‘일체유심조’의 초월심으로 “우주에 가득한/ 생기를 안아 노래합니다// 넉넉하니 이 순간 온몸으로 미소 지으며// 거룩한/ 이 하늘 이 땅 우러릅니다, 절합니다”라며 「나마스떼」의 인사를 전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비관적인 현실 앞에서도 자신의 세계를 긍정하며 있는 그대로를 응시하는 태도를 보이는 시인은 존재의 심화를 통해 초월의 경지에 이르는 자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속에는, 인간은 언제나 불완전한 존재라는 명제가 들어 있다. 실수하고 넘어지고 상처받고 흔들리며 사는 것이 인간이며, 그런 불완전함 때문에 발전과 초월을 이룰 수 있는 존재라는 인식 말이다. 홍성란 시인의 시조집 『즐거운 징후』에는 세상의 편견과 그에 따른 존재의 소외감을 대하는 시적 화자의 초연함이 잘 담겨 있다. 시인은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자아를 끊임없이 깨우고 일으키면서도 결코 격정적으로 달아오르지 않는다. 감상성이나 감정적 서술을 배제한 채, 부단한 자기 갱신을 절제된 언어로 그려낸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자기만의 신념으로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초월적 존재, 위버멘쉬의 초상을 그렇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임채성>
200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시조) 당선, 2006년 《불교문예》 신인상(동시) 및 《불교문예》 신인문학상(동화) 당선. 시조집 『세렝게티를 꿈꾸며』 『왼바라기』 『야생의 족보』 『메께라』 및 시조선집 『지 에이 피』가 있음.
- 《정형시학》 2026. 가을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