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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서 박선장의 생애와 시문학 정신
이원걸(문학박사)
수서의 모친 신안주씨가 수서를 가르치기 위해 지은 몽화각(경북 봉화군 봉화읍 화천리)
Ⅰ. 머리말 Ⅱ. 생애 Ⅲ. 문집의 체제와 내용 Ⅳ. 시문학 전개 양상과 함의 1) 정심의 성정 미학 2) 효우 실천의 수신 3) 애민 정서의 형상화 4) 충절 인물 형상과 의미 5) 「오륜가」의 윤리 강상 정립 정신 6) 수서 시문학의 함의 Ⅴ. 시문학 표현 미학 1) 시 창작 정신 2) 농촌 서정의 표현 3) 서경 묘사의 미학 4) 풍유를 통한 우의 Ⅵ. 마무리 |
Ⅰ. 머리말
본고는 봉화 선비 문화 연구의 일환으로 수행되었다. 연차적으로 이를 진행하여 봉화 선비 문화 연구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함이다. 이 글에서 교육과 효제를 실천한 수서 박선장을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 수서에 대한 연구를 보면, 국문 시조 「오륜가」를 다룬 연구, 그의 시문학에 대해 개괄적으로 정리한 바 있다. 하지만 수서의 전 생애와 학문․사상․문학을 통합해서 157제 176수의 시작품을 정치하게 분석해 내지 못한 한계가 있다. 개별 작품 분석에 앞서 철저한 작가의 주변 탐색이 이루어져야 작품에 녹아 있는 작가의 심미 의식과 시대정신을 충실하게 이끌어낼 수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그의 생애와 문집의 체제 및 내용을 우선 면밀히 검토한다. 이러한 토대 위에 수서에 대한 진지한 탐색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의 시문학 유산을‘정심의 성정 미학’․‘효우 실천의 수신’․‘애민 정서의 형상화’․‘충절 인물 형상과 의미’․‘오륜가의 윤리 강상 정립 정신’․‘수서 시문학의 함의’로 검토한다. 그리고 그의 시문학 표현 미학으로 ‘시 창작 정신’․‘농촌 서정의 표현’․‘서경 묘사의 미학’․‘풍유를 통한 우의’로 겸토한다. 이로써 수서 시문학이 갖는 고유한 의미를 정리한다. 이로써 수서의 전 생애를 거쳐 실천한 성리 철학 사유와 문학 정신의 일치점을 확인하게 되고 수서 시문학의 단서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Ⅱ. 생애
수서水西 박선장朴善長(1555-1616)의 본관 무안務安, 자는 여인汝仁, 호는 수서水西이다. 그의 선대先代를 소급한다. 상세上世는 고려 때 국학전주國學典酒를 지낸 진승進昇이다. 이 분이 좌복야左僕射 섬暹을 낳았는데 현종顯宗이 난리를 피해 옮겨 다닐 때 시종始終 한결같은 절개를 지켰다. 오세五世를 지나 재신宰臣 문오文晤가 면성군綿城君에 봉해졌다. 조선조에 들어와 의룡義龍은 병조판서兵曹判書․호조판서 戶曹判書․형조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올랐다. 의룡義龍은 강綱을 낳았다. 강綱은 형조참판刑曹參判을 역임했다. 강綱이 곧 수서水西의 육대조六代祖이다.
고조高祖는 해解인데 세종 때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했으나, 그 뒤 세조世祖가 조카인 단종端宗으로부터 왕위찬탈王位簒奪하는 것을 보고 벼슬에 뜻을 버리고 여주驪州로 퇴거하여 유유자적하게 일생을 마쳤다. 증조曾祖는 지몽之蒙으로 내외종內外從 간이었던 권신權臣 임사홍任士洪이 권세를 업고 방자放恣하게 행동하여 동사同仕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준연峻然히 척지斥之하여 세인世人이 칭송하였다. 후에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하고 통훈대부贈通訓大夫로 증직되었다. 그는 원래 한양에서 살았는데 영해부寧海府로 장가를 들어 거기서 살게 되었다. 조부祖父는 원기元基로 성균진사成均進士를 역임했다. 부친 전全은 1546년(세종25)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호조정랑戶曹正郞을 거쳐 북평사北評事를 역임했다. 모친은 웅천주씨熊川朱氏로 사직司直을 지낸 행幸의 따님이며 전적典籍 선림善林의 손녀이다.
수서水西는 1555년(명종10) 5월 11일에 경북 영해부 익동리翼洞里 집에서 태어났다. 모친이 수서를 잉태孕胎했을 때 꿈에 이인異人이 하늘에서 내려와 지팡이 하나를 주면서“이 지팡이는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다”라고 하였는데 이윽고 수서를 낳았다. 수서는 태어나면서부터 영리하여 일반 아이들과 달라 부친이 매우 기특해 하며“우리 집안은 대대로 일찍부터 덕을 쌓았더니 이제 그 보답이 있으려나보다”라는 시를 지었다. 또“자식 없으면 없는 대로 걱정하고 있으면 가르치지 못할 까 걱정스럽네”라는 시를 지었다. 수서는 자라나서 매번 이 시를 읽고 슬피 울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수서가 네 살(1558) 때 당시 부친은 호조정랑戶曹正郞직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한양漢陽에서 별세하여 영해부 여현輿峴 오향午向 언덕에 반장返葬했다.
모친 주씨는 수서가 어려서 부친을 여의어 교육을 받지 못해 학문을 이루지 못할 까 마음 아파했다. 남편의 삼년상을 마치고 친정인 울진蔚珍으로 이주해 오라버니에게 부탁하여 수서를 가르치게 했다. 이로부터 몇 해가 지나 수서가 10세(1564) 때 어느 날 밤에 남편이 꿈에 나타나“영천榮川 고을 남모南某가 글을 잘하고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 아들을 가르칠 만하다. 그가 사는 마을에 산단화散丹花가 피어 있고 그 자손들이 매우 많이 살고 있으니 그를 찾아가 학업을 청하라”고 알려주었다. 이에 모친은 뜻을 굳히고 현재 구역상 경북 영주榮州인 영천榮川으로 이주했다. 이 때 삼송당三松堂 남몽오南夢鰲(1528-1591)는 그곳에서 서당을 열었고 수많은 학동學童이 몰려들었다.
수서는 삼송당 문하에 나아가 가르침 받기를 시작하였다. 삼송당은 수서의 재주가 기특하여 소학을 주면서 매일 학습 과정을 독려했다. 12세(1566) 때에 삼송당이 ‘연기 연[烟]’자字로 연구聯句를 지으라고 했다. 수서는“산골 두어 집에서 연기 피네”라고 했다. 삼송당은 또 서리 상[霜] 자로 연구를 지어보라고 했다. 수서는“서리 힘으로 어찌 할 수 없어도 언덕이 절로 비네”라고 하니 삼송당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삼송당은 수서가 지은 연구를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1517-1587)에게 보여주자, 소고는“기이하도다! 시의 기상이 시원하고 시 의미가 맑고 깨끗하니 장차 크게 되리라”며 감탄했다. 소고는 이후로 수서를 이전보다 더욱 어여삐 여겨 다른 학동보다 먼저 가르쳐 주었다.
13세 때(1567)에 「지녕초指侫草」 시를 지었는데 이를 지은 계기는 일찍이 고문 「격사홀명擊蛇笏銘」을 읽다가 ‘요임금 때 지녕초가 있었다’는 대목에 이르러 감동을 받아 시를 지었다. 14세(1568)에 삼송당의 장녀長女에게 장가를 들어 화천花川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17세(1571)에 심경心經과 소학小學을 읽고 느낀 바가 있어 시를 지었다. 당시 수서는 15세(1569)부터 사장詞章에 뜻을 두지 않고 유교 경전의 가르침을 연구하며 실천했다. 그는 삼송당을 통해 선비가 지닐 몸가짐의 큰 방도를 배웠고 모친으로부터 몸가짐과 삼가는 행동의 가르침을 받았다. 19세(1573)에 장남 경璥이 태어났다. 22세(1576) 10월에 차남 한(王/旱)이 태어났다.
23세(1577)에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1542-1607)을 배알하며 도의로서 교유하였다. 이에 앞서 부친이 북변에서 공무를 수행할 때 관찰사 류중령柳仲郢(1515-1573)이 감군어사監軍御使로 북변을 순무巡撫했다. 부친은 매일 그와 함께 종유하면서 시를 주고받은 적이 많았다. 당시 서애는 의정부검의議政府檢議를 역임하면서 휴가를 내어 양친을 뵈러 왔기에 찾아가 뵈었다. 25세(1579)에 이산서원伊山書院에 가서 독서하고 오는 길에 백암栢巖 김륵金玏(1540-1616)․취수醉睡 박록朴漉(1542-1632)․죽유竹牖 오운吳澐(1540-1617)을 방문했다. 이 무렵 수서는 ‘위기지학爲己之學’ 공부에 충실하였다. 특히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심도 있게 연구해 전체 내용을 이해했으며 요지를 터득하는 학문 성취가 커서 동류배同類輩로부터 공인을 받았다. 백암․취수․죽유 제공도 당시 수서의 학문 경지 ‘노성老成하다’고 인정했다.
26세(1580)에 봉화현감奉化縣監을 역임하던 월천月川 조목趙穆(1524-1606)을 찾아뵈었다. 돌아오는 길에 두릉서당杜陵書堂에 들러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1541-1596)을 방문하고 심경心經을 강론하며 의심나는 것을 질의했다. 28세(1582) 8월에 여현輿峴 선산에 성묘하러 가는 길에 경북 영덕군 창수면과 영양군 경계에 읍령泣嶺에 이르러 감회시를 남겼다. 33세(1587)에 심경心經을 힘써 읽었다. 일찍이 퇴계退溪도 이 심경心經을 ‘신명神明처럼 믿었으며 엄한 부친의 훈계처럼 여겨 가슴 깊이 간직하며 실천했다’고 전한다. 36세(1590)에 셋째 아들 로璐가 태어났다.
37세(1591) 봄에 향해鄕解 진사시進士試에 장원壯元했다. 그해 7월에 스승 삼송당이 별세했다. 수서는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모친으로부터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의 가르침에 따라 삼송에게 가르침을 받은 지 20여 년이 되었는데 스승을 잃자 산이 무너지는 슬픔을 겪었다. 심상心喪 3년과 초하루와 보름 삭망일에 참례하여 추모의 예를 다했다. 38세(1592) 봄에 삼송당 스승의 장례를 치렀는데 수서는 「제문」과 「만사」를 지어 스승을 잃은 슬픔을 표현하며 애도하였다. 그 해 겨울에 왜구들의 침략으로 주상께서 서쪽 지방으로 파천播遷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쪽 땅을 바라보며 통곡했다. 당시 수서의 재종再從 동생 병사공兵使公 박의장朴毅長(1555-1615)이 큰 고을에서 군사를 모아 동경東京을 수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멀리서나마 격려하고 축하한다는 글을 써서 보냈다.
39세(1593)에 명나라 장군과 군사들이 길을 나누어 남쪽 지방 백성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방자하게 행동하였다. 이에 본 고을 영주를 지나게 되었는데 수서는 이산서원에 있었다. 한 장교가 수서가 단정히 앉아 꼼짝도 않고 있자 성을 발끈 내며 구리 화로를 들고 수서를 향해 던졌는데 빗나가 화로의 재와 숯덩이가 온 좌중에 쏟아졌다. 하지만 수서는 조금도 동요되지 않고 태연히 앉아있으니 명나라 장교가 멍하니 바라보다가 공경의 예를 표하고 떠나갔다. 40세(1594)에 이산서원으로 가서 도내 각지로 창의倡義를 독려하는 격서檄書를 써서 보냈다. 왜구들이 닥치는 대로 약탈하는 만행을 저질러 무자비하게 성을 함락시켰다. 수서는 고을에서 동지를 규합하여 의병 일으키기를 합의하고 각 고을 선비들에게 격서를 보내 의리를 들어 적개심을 일으키자 격문을 읽는 이마다 눈물을 흘렸다.
41세(1595)에 스승 삼송이 진사에 급제했던 기록의 책자를 보고 감회가 있어 시를 지었다. 42세(1596) 7월에 호여皥如 금복고琴復古(1549-1632)․공제公濟 김개국金蓋國(1548-1603)과 함께 모임을 가졌다. 당시 김개국은 영서嶺西 좌막佐幕으로 병사를 훈련시키고 병기 사용 방법 등을 교육했는데 수서는 그와 함께 왜적 무찌르는 현안을 의논하고 기획하였다. 43세(1597) 향시鄕試에서 장원을 차지했다. 44세(1598) 이산서원에 가서 향내 유생과 함께 명나라 장수에게 글을 올리는 사안을 의논하였다. 45세(1599) 에 「가학시假鶴詩」를 지었다. 당시 내암萊菴 정인홍鄭仁弘(1535-1623)의 명성이 자자했는데 자호를 ‘야학野鶴’이라 했다. 그가 사헌부司憲府 관원으로 영주 고을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수서는 단 한 번 그를 보았지만 단번에 그의 사람 됨됨이를 알고 이 시를 지어 풍자하였다.
47세(1601) 가을에 향해鄕解 생원시生員試에서 장원하였다. 48세(1602)에 이산서원에 가서 임란 역사 기록물 1권과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1538-1593)이 사실에 근거를 두고 초안草案한 상소문上疏文을 보았다. 49세(1603) 2월 14일에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1552-1617)를 찾아가 만나고 시를 지어 주었다. 이 때 망우당은 곡기穀氣를 끊은 지 넉 달째여서 얼굴 모습이 매우 수척했다. 벽에 ‘호흡呼吸’ 두 글자와 ‘오행五行의 상생 법칙’을 써서 붙여 두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곽재우 장군을 도가道家쪽 인물이라고 부르기에 수서가 이 시를 지어 주었다. 그해 5월에 이산서원에 가서 죽유竹牖 오운吳澐과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의 문집을 수정하였다. 이어 8월에는 병난 때 ‘사적事蹟’ 한 권을 편찬했는데 당시 경상도순찰사가 수서에게 이 책을 편찬케 했다. 9월에 둘째 아들 한(王/旱)이 과거에 급제하였다.
50세(1604) 4월에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의 신원소伸寃疏를 올렸다. 당시 학관學舘 유생들이 오현五賢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해 줄 것을 상소했다. 이 때 조정에서 회재를 폄하貶下하여 그 여파가 퇴계退溪(1500-1570)에게까지 미치게 되어 수서는 서애西厓․월천月川에게 가서 아뢰고 소회疏會를 개설하여 상소문을 올렸다. 수서는 그 해 12월에 증광동당增廣東堂 향시鄕試에 급제하였다.
51세(1605) 봄에 증광별시增廣別試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다. 3월 9일 복시覆試에서 「궁양달시책窮養達施策」을 지어 올렸으며 3월 19일 정대廷對에서 「교양인재책敎養人材策」을 지어 올림으로써 합격했다. 수서가 이렇게 늦은 나이에 과거에 응거하여 급제한 이유는 본인 자신은 과거를 통해 입신출세하기를 즐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들 한이 과거에 급제한 뒤에 모친께서 “너의 아들이 과거에 급제했지만 너 자신이 친히 급제하는 것만 같겠느냐?”라고 하시자, 수서는 부득이 과거에 응거하여 급제를 거쳐 벼슬길에 나선 것이다. 당시 모친은 88세였다. 여름에 서애를 방문했다. 5월에 약포藥圃 정탁鄭琢(1526-1605)을 방문하고 영해부寧海府 선영先塋에 참배했다. 7월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제수되었다. 11월에는 이조판서吏曹判書인 부훤負暄 허욱許頊(1548-1618)을 방문했다. 이는 허 판서의 모친께서 수서 모친과 동갑이셨기 때문이다.
52세(1606)에 하도河圖․낙서洛書․역도주해경계사易圖註解經繫辭․예경禮敬․심경心經 성리서性理書 등 여러 책을 두루 읽었다. 수서는 학문에 뜻을 둔 이래 특히 성리학 관련 서적을 많이 읽었지만 항상 공부에 전념하지 못했다고 여겼다. 급제한 이후에도 심혈을 기울여 성리 서적을 탐독했으며 시간이 넉넉하지 못함을 아쉬워했다. 밤이 되어도 독서를 그만 두지 않았는데 매번 마음에 닿는 문구가 있으면 거기에 맞춰 시를 지어 읊었다. 이어 「정양시靜養詩」, 「자경잠시自警箴詩」를 지었다. 스스로 기록한 ‘자기自記’를 보면 ‘성질이 편협해 극복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가장 이겨내기 어려운 곳에 처하더라도 식욕食慾과 색욕色慾을 이겨내기는 가장 어렵기 때문에 잠箴을 지어 스스로 경계한다’고 해명했다. 이어 「욕천시浴川詩」를 지었다.
53세(1607) 6월에는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에게 편지를 올렸다. 이 당시 한강은 이산서원 伊山書院 원장을 맡고 있었는데 한강이 조만간 안동부사 임기를 마치게 된다는 말을 듣고 편지를 써서 소고嘯皐의 문집 발간 경비를 보조를 요청했다. 7월에 하회河回로 가서 서애西厓의 장례에 제문을 지어 조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월천月川도 조문했다. 54세(1608) 정월正月에 단산서원 丹山書院 상량문을 지었다. 5월에 예안현감禮安縣監에 제수되어 6월에 부임했다. 예안현에는 묵은 병폐病弊가 많았다. 수서는 부임 즉시 그 병폐를 조목별로 정리해 감사에게 보고하고 변통變通하여 바로잡아나갔다. 수소는 향교鄕校의 제기가 파손되고 더러워진 것을 새것으로 교체하고 주민의 송사를 공정히 처리하여 이속吏屬이나 주민에게 인심을 얻는 등 큰 치적治積을 남겼다. 순찰사가 현에 이르러 수서에게 “부임 이후 공무를 부지런히 처리하여 큰 위안이 된다”고 칭찬했다. 10월에 월천月川의 제문을 지어 조문했으며 12월에는 도산서원陶山書院으로 가서 퇴계의 경서석의經書釋義 교정 작업에 참여했는데 순찰사가 종이․붓․먹을 보내와 이 책의 간행을 도왔다.
55세(1609) 4월에 임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6일에 말을 타고 출발했는데 예안현 주민들이 길 왼쪽에서 배웅하면서 “어진 현감께서 돌아가시니 우리에겐 복이 사라졌습니다”라고 했다. 그 때 계암溪巖 김령金坽(1577-1641)이 송별시 세 수를 지어 주었다. 수서가 집으로 돌아왔지만 집의 쌀독이 비어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예안현 선비들은 쌀 석 섬을 모아서 보냈다. 소학小學․주자서朱子書와 퇴계의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읽었다. 어떤 이가 “자네는 왜 이렇게 고생을 해가면서 책을 읽는가?”라고 묻자, 수서는 “공직에 임하면 부지런히 공무를 수행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책을 읽는 것이 나의 일인데 이것 외에 내가 어디에 힘을 쏟을 건가?”라고 답했다.
56세(1610)에 심경心經을 읽고 감회가 있어 「자도시自悼詩」와 「자서사自誓辭」를 지었다. ‘기記’에 의하면 ‘가난하게 사는 것이 가장 어렵지만 ‘느긋하게 살며 천명을 기다린다[居易俟命]’는 네 글자를 항상 염두에 둔 연후에야 ‘분수에 따라 편안하게 산다[安分]’는 의미를 지니게 되기에 스스로 마음을 다짐하는 글을 지었다’고 밝혔다. 57세(1611) 9월에 현 행정구역상 봉화읍 화천리인 구만龜灣 위에 서당 지을 터를 잡았다. 수서는 마을의 아이들이 배울 만한 곳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도은陶隱 권호신權虎臣․송음松陰 금복고琴復古․생원 이흥문李興門과 함께 의논하여 강당을 세워 학문을 닦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장소를 마련하고자 적합한 곳을 정하고 이 일을 운영토록 기획했다. 11월에 서당의 상량문을 지었다.
58세(1612)에 퇴계의 문집을 읽었다. 8월에는 구만서당龜灣書堂이 완공되어 「오륜가五倫歌」를 지어 어린 학동을 경계시켰다. 수서는 국문으로 시조를 지어 마을 학동들에게 노래를 부르면서 자신을 경계하는 방침을 삼게 하였다. 이어 「십물잠十勿箴」을 지어 고을 사람들을 교화시켰다. 모친의 장수를 축하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당시 모친의 연세는 95세였으며 둘째 아들 한이 예안현감으로 재직하면서 잔치 준비를 했다. 9월에 「청성서원봉안문靑城書院 奉安文」을 지었다. 당시 수서는 이산서원 원장을 역임하면서 서원의 땅이 낮고 습하여 건물이 넘어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여러 유생들과 의논하여 이산서원을 현재 이산면인 임구林丘로 옮겨 지을 계획을 하고 대지를 마련했다. 10월에 서원을 세울 「개기제문開基祭文」을 지었다. 이어 단산서원의 좨주[祭酒]인 역동易東 우탁禹倬(1263-1343)의 「봉안제문奉安祭文」을 지었다. 아울러 소수서원紹修書院에서 소학을 읽었다.
59세(1613)에 심경을 읽었다. 수서는 만년에 이 책을 더욱 즐겁게 읽었으며 책의 내용대로 실천하고자 했다. 11월에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에 임명되었다. 조정에서는 그 무렵 수서의 모친이 연로해 수서가 매일 조석으로 모친을 보살펴드리는 일을 비울 수 없음을 알기에 본도本道 아사亞使[都事]로 천거했다. 모친은 당시 96세였다.
60세(1614) 정월에 대궐에 들어가 주상의 은혜에 감사했다. 지나는 길에 상공相公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1553-1634)을 방문했다. 오봉은 수서에게 지팡이 하나를 주면서 “이것은 중국의 보배로 세상에서 일컫는 ‘무당산武當山 선인녹옥장仙人綠玉杖’일세. 모친의 연세가 96세시니 공경하며 드리니 이것으로 모친께서 더욱 오래 사시기를 바라네”라고 했다. 2월에 부임하였으며 3월에 말미를 얻어 집으로 돌아와 모친을 뵈었다. 고을의 「계약문契約文」 힘쓰기를 권하고 금지해야 할 규제 조목을 고쳐 다시 정한 「약정문발문約定文跋文」을 지었다.
이와 함께 병산서원屛山書院에 서애西厓를 봉안할 때 제기를 만들어 보냈다. 가을에 우도시右道試를 주관했다.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1571년-1637)이 부시관副試官이었는데 수서와 주고받은 시가 많았다. 9월에 휴가를 얻어 집으로 돌아와 모친의 장수를 빌며 잔치를 벌였다. 모친은 97세였으며 순찰사巡察使 무위당無爲堂 중명仲明 권반權盼(1564-1631)이 인근 고을 수령에게 수서 모친의 장수를 축하하는 잔치를 수서의 집에서 베풀게 주선하라고 했다. 이 때 경정敬亭 이민성李民宬(1570-1629)․단곡丹谷 곽진郭瑨(1568-1633)이 시와 서문을 지어 수서의 효행을 칭찬하며 모친의 장수에 대해 감탄하였다. 우도右道의 천재지변으로 인한 농사 작황의 피해를 자세히 살폈다.
61세(1615) 봄에 임기가 끝나 집으로 돌아왔다. 심경을 읽었다. 9월에 이산서원 위패를 옮겨 모시는 「이산서원봉안제문」을 지었다. 11월에 이산서원 원장이 되어 명륜당을 세웠다. 62세(1616) 3월에 작은 병세를 감지했다가 22일에 정침에서 별세했다. 모친은 99세였다.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가 문인을 보내서 조문했다. 4월 20일 도사都事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 겸 경연經筵 참찬관參贊官․수찬관修撰館․예문관藝文館 직제학直提學․상서원정尙瑞院正으로 추증되었다. 12월 19일에 군의 동쪽 성지동省知洞 오향午向 언덕에 장례 치렀다. 묘소는 수서가 살던 마을과 7리 정도 거리에 있고 조문객은 수백 명이었다.
슬하에 3남 1녀를 낳았다. 장남은 경璥으로 문장과 절행節行이 있었다. 차남 한王/旱은 문과에 급제했고 삼남 노璐는 첨추僉樞를 지냈다. 따님은 황이구黃以久에게 시집을 갔다. 경璥은 3남男을 두었는데 맏이는 휴복休復으로 장사랑將仕郞이다. 둘째는 광복光復이며 셋째는 도복道復인데 장사랑將仕郞이다. 한은 5남 2녀를 낳았는데 맏이 진복進復은 생원이며 둘째 안복安復은 사마시를 거쳐 문과에 급제해 좌랑佐郞을 역임했다. 셋째 내복來復은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넷째 인복仁復은 선교랑宣敎郞을 지냈으며 다섯째 견복見復은 종사랑從仕郞을 지냈다. 장녀는 정기학鄭基學에게, 차녀는 김종연金宗衍에게 시집을 갔다. 노璐는 3남 2녀를 낳았다. 장남 안문安文은 장사랑將仕郞을 역임했다. 차남은 안성安性이고, 삼남은 안신安臣이다. 장녀는 김상주金相周에게, 차녀는 금성琴筬에게 시집갔다. 황이구는 3녀 2남을 낳았는데 장녀는 김시직金是直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이외에 내 외 증현손 남녀 100여 명은 일일이 다 싣지 못했다. 모친 신안 주씨는 수서 사후 2년 뒤인 1618년(광해10)에 101세로 별세하여 아들 수서 묘소 뒤편에 안장되었다.
수서는 타고난 자질이 독실하고 지조와 행동거지가 단아했다. 나이가 들어서도 학문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성리학 관련 서적에 전심전력하여 매일 독서 과정을 정해 두고 연찬 활동을 지속했다. 수서는 공직을 수행할 때를 제외하고 여가가 있을 때나 집에서 한가히 지낼 때 손에서 책을 떼지 않고 평생 성리학 공부에 치중했다. 성품 역시 어질고 효심이 깊어 모친을 지극한 정성으로 모셨으며 집안사람들과 아래 사람들을 후덕하게 대했다. 이러한 수서는 선비의 전형이라 하겠다.
1628년(인조6) 11월 5일에 차남 풍기군수 한이 소수서원 문안 편지와 함께 송묵松墨 20자루를 보냈다.
1630년(인조8) 정월에 묘소 앞에 비석을 세웠는데 묘갈명은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1563-1633)가 지었다.
1631년(인조9) 4월에 차남 풍기군수 한이 소수서원에 쌀 1석을 보냈다.
1636년(인조14) 삼남 노가 소수서원에 다녀왔다.
1638년(인조16) 부인 영양남씨가 88세로 별세하여 수서와 합장했다.
1647년(인조25) 6월에 차남 한이 수서의 묘소에 지석을 묻었다.
1676년(숙종2) 12월 19일에 사림들이 모여 구만서당에 수서의 위판을 모시고 묘호廟號는 ‘기영사 耆英祠’로 정했다. 애당초 사당은 수서가 짓고 학문을 가르치던 곳이다. 예전에는 영천榮川 망년리 忘年里 옥봉산玉峯山 동쪽 기슭에 있었는데 지금은 순흥順興 땅이다. 묘호와 상향축문은 호옹湖翁 조정융曺挺融(1598-?)이 지었다. 수서 외에 삼송당三松堂 남몽오南夢鰲․송계松溪 금인琴軔(1510-1593)․도은陶隱 권호신權虎臣(1558-1629)을 배향하였다.
1766년(영조42) 겨울에 구만서당이 구만서원으로 승격하였다. 고유문과 봉안축문은 조은釣隱 이세택李世澤(1716-1777)이 지었다.
1774년(영조50)에 후손들이 수서와 숙인淑人 주씨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마을 뒤편 언덕에 ‘몽화각夢花閣’이라는 정자를 건립하였다.
1781년(정조5) 겨울에 구만서원을 옥봉산 동쪽으로 옮겨 짓고 묘호를 ‘상현사象賢祠’로 고쳤다. 옮길 때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1710-1781)이 「환안제문還安祭文」을 짓고 묘호도 그렇게 정했다.
1885년(고종22) 4월에 도승지에서 가선대부 겸 동지의금부사․홍문관제학․동지춘추관・성균관사․이조참판으로 증직되었으며 숙부인淑夫人 남씨는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되었다.
1901년(광무50 옥봉산 동쪽에 있던 구만서원이 불타 없어지고 노인봉 북쪽 남산 마을 뒤 언덕인 지금의 지리에 옮겨지었다. 이는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154호로 지정되었다.
1991년 구만서원에 배향된 네 선현의 유지를 받들어 그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인근 유림 100여 명이 뜻을 모아 ‘구정회龜情會’를 조직하여 운영해 가고 있다.
Ⅲ. 문집의 체제와 내용
1) 체제
수서선생문집水西先生文集은 목판본 4권 2책으로 현손 제안齊顔 등이 1810(순조10)년에 간행하였다. 「서문」은 김굉金(土/宏)이 1810년(순조10) 썼으며 이어 「연보」가 실려 있다. 권1의 시는 5언 절구 12제題 13수首․
7언 절구 40제 46수․5언 율시 4제 4수․7언 율시 11제 11수로 총 67제 74수의 시가 실렸다.
권2에 5언 절구 8제에 13수․7언 절구 26제 32수․5언 율시 18제 18수․7언 율시 12제 13수․5언 장편 14제 14수․7언 장편 5제 5수․장단구 7제 7수 등 권1과 권2의 시는 모두 157제 176수이다. 이어 권2에 「만사輓詞」 7수(金亨叔大人․金希益․河聖徵․仙槎老友金公應時․晩翠堂金公濟․黃會元兩親․郭靜叔)가 실려 있다.
권3에는 「사辭」(暮春辭)․「부賦」(鵄述嶺․舟中講大學․三光․笏囊․宰相先務在人材)․「서書」(鄭逑․李安訥․郭瑨
2)․「잠箴」(自警箴․自誓箴․十勿箴․一壺菴箴)․「명銘」(剪板銘)․「전箋」(誕日箋)․「봉안문奉安文」(丹山書院祭酒禹先生奉安文․伊山書院移安文․靑城書院權松巖好文奉安文․鶴峰金先生誠一奉安文․靈山鄕校五賢從祀祭文․伊山書院移安告廟文․伊山書院新基祭后土文․伊山書院明倫堂開基告廟文․食沙井祈雨祭文․鐵呑山祈雨祭文)․「제문祭文」(柳成龍․代伊山書院儒生․趙穆․南夢鰲․金泰時․權近․金隆․再從姪朴(王/炎)․「상량문上樑文」(伊山書院上樑文․龜灣書堂上樑文)․「책策」(問窮養達施․問敎養人才)이 실렸다.
권4에는 「잡저雜著」(洞契更約文․洞契讀法文․洞契更定約文跋)․「가歌」(薄薄田歌示璥․五倫歌)․「사우록師友錄」(郭瑨․李汝馪․權省吾作)․「제문祭文」(琴是諧․李成幹․李興門․洪(雨/陣)․裵尙益作)․「봉안문奉安文」(曹挺融作)․「상향축문常享祝文」․「고유문告由文」(權正澤․李世澤作)․「증유시贈遺詩」(李民宬․郭瑨作)․「습유拾遺」(權斗文․金(土/令)․金中淸作)․「묘표墓表」(鄭經世撰)․「행장行狀」(鄭宗魯撰)․「가장家狀」(朴齊顔撰)이 실려 있다.
2) 내용
권1의 시는 67제(5언 절구 12제․7언 절구 40제․5언 율시 4제․7언 율시11제) 74수(5언 절구 13수․7언 절구 46수․5언 율시 4수․7언 율시 11수)이다. 권2의 시는 90제(5언 절구 8제․7언 절구 26제․5언 율시 18제․7언 율시 12제․5언 장편 14제․7언 장편 5제․장단구 7제) 102수(5언 절구 13수․7언 절구 32수․5언 율시 18수․7언 율시 13수․5언 장편14수․7언 장편 5수․ 장단구 7수)이다. 시 내용을 일별하기로 한다.
첫째 수신과 근신을 통한 정심을 추구하는 시이다. 간신을 은유하며 경계하거나(「指侫草」)․ 성리학 관련 서적을 읽은 후 소회를 정리하면서 수신과 정심의 미학을 반영하거나(「讀小學」․「讀曲禮」․「讀心經有感二首」)․평소 행동거지의 수신 철학을 반영한 시(「記夢」․「偶吟二首」․「次李大中介立藏書樓韻」․「養蒙齋」․「浴川」․「靜養有作」․「呈無爲堂權公盼一絶」․「再題靜養詩後」․「寫懷」․「(王/旱)釋褐而來作此以爲戒」․「再用前雲憶克休」․「疊石樓」․「記病」)등을 들 수 있다.
둘째 애민 정서를 반영한 작품으로 가뭄이나 장마를 염려하며 농민들의 농사 작황 애로점을 동일시한 시(「七月久雨書懷二首」․「憫旱」․「五月十日不雨二首」)․일상 생활 가운데 농민들에 대한 애정 의식을 표현한 작품(「有所思」․「酌水灌園種諸葛菜記所見」․「送人昌樂求鷹」․「酌水灌園種諸葛菜」)․춘궁기를 맞아 모맥牟麥이 채 익지도 전에 베어서 배를 채워야 하는 실상을 담은 작품(「牟麥未熟刈靑而食吟成一篇」)․ 서북 지방 오랑캐의 창궐猖獗에도 무관심한 조정 관리들을 무관심을 책망하면서 애민 정신을 표현한 작품(「聞西北虜將有俱發兆有作」) 등이다.
셋째 추모심을 발휘한 작품이다. 선현이나 스승을 추모하며 유학적 유업을 지속해 나가길 다짐하거나(「敬次圃隱鄭先生韻奉呈守宰」․「八月九日泣嶺東路有感」․「十七日泣嶺西路」․「看癸酉南三松司馬榜目」․「次崔季昇晛晋州壁上韻」․「次德陽集末所附諸賢韻」․「才山歸路遇雨」․「送表叔還歸十二韻」)․거국적 의리를 실천한 분에 대한 추모 정서를 통한 의리 숭상 의식을 발휘한 작품(「贈郭兵使再佑」)․우의 수법을 차용해 추모 의식을 반영한 작품(「聞朱景顔日言成一律以寓感悵之懷」) 등이다.
넷째 소회를 담은 서정 표현의 작품은 병으로 괴롭거나 꿈에서 만난 인물을 그리워하거나(「述懷」․「病懷」․「夢中作」․「記病」․「無題」․病中有感」․流頭日病懷」․「夢得烏玉四丁白筆二尖作」)․계절감과 일상의 소회를 표현한 시(日暮有感」․「苦寒」․「秋暮有感」․「立春帖二首」․「秋風吟」․「閑居得雨」․「賞菊次權伯武韻」)․친분이 잦은 인물과 자연을 유람하기로 한 감회 서정 표현(「權陶隱伯夷虎臣以詩請玩菊花有故不赴因次其韻二首」․「南德潤衍以花時不稱貧爲歎遂吟一絶」․「待李德薰不至」)․개인적인 서정을 반영한 작품(「十五夜聞李養源棄官歸吟贈」)․「望洋亭」․「無題」․「度璥行到忠州有懷再用峽字韻」․「古意」․「才山早行」․「古人云事不如意者十常八九…」․「千梳後有騷思遂吟」․「詠野火」․「三五七言」) 등이다.
다섯째 다양한 인물과 교유한 시 작품인데 특정 인물의 부임에 전별하며 전도양양을 축원하며 지어 준 시(「送朴子澄漉赴京」․「送李生汝遠會試」․「送李德薰之碧沙」․「次黃會元汝一韻二首」․「送黃是之令公奉使天朝」․「送吳通判之蔚山」․「又贈吳通判」․「送李德薰月城提督」․「一善奉別閔佐郞赴燕京二首」․「送申將軍防禦湖南十九韻」)․화운하거나 차운하며 학문적 교류와 유학자로서 상호 수신과 권학을 강조하는 일련의 시를 통해 우의 증진과 성리학자로서 책무를 다짐하는 작품(「有懷李炊沙德薰汝馪」 ․「次李德薰韻」․「寄昌樂郵軒二首」․「連夜夢李德薰」․「權上舍士英俊臣新搆華堂…」․「次李仁伯榮門韻寄李大中二首」․「又次寄仁伯二首」․「再用前韻」․「吳竹牖澐尋遊早晩牢前計…」․「漫興」․「次五峯李相國好閔雲」․「申上舍獻之以金孝仲榮祖四韻…」․「又次前韻贈金子昷」․「次昌原壁上韻」․「聞韶館中詠五月十日雨追呈李東岳」․․「呈金亨叔會試之行」․「再呈東岳李公」․「題郭丹谷瑨幽居」․「吟贈李德薰」․「贈別金栢巖玏裵安村應褧赴天朝幷序」․「金勉飮賓琴上舍有感舊之作遂次」․「次柳塗鰲山孔巖韻」․「次柳塗題朴逍遙堂河淡仙巖韻」․「仙巖次蒼石埈韻」) 등이다.
여섯째 사실적 안목으로 자연 경물을 핍진하게 그려낸 작품(「十八日才山遇雨」․「妬花風問答」․「觀秧苗」․「英陽水邊大木偃于沙上開花」․「木/叔井次黃仲擧俊良韻」․「詠梨花」․「詠梨花帶雨」․「洞口前峯」․「東崖一角石衣正紅」․「山中雨後卽事」․「詠栗三首」․「望見小白山」․「八月初六日茂江道中」․「九日泣嶺西」․「詠楓」․「曉寒」․「次李克休雙碧堂韻」․「寄堂主金景望」․「時興二首」․「曉起」․「偶吟二首」․「次李五峯笣山壁上韻贈許使君」․「沒雲臺」․「曉雪卽事」․「卽事」․「有感」․「才山路遇雨」․「卽事」․「題仙巖六首」․「秋日卽事」․「才山遇雨」․「往權伯武家賞菊」․「詠雪」․「璥西行行過九馬遷有懷得峽字韻」․「松明花十二韻」)․시간적인 추이에 따라 삼라만상이 변화하면서 자연의 미적 자태를 발휘하는 현장을 생생하게 묘파한 작품(「驟雨」․「細雨」․「曉霜有感」․「詠雪」․「八月二十日才山道上」) 등이다.
일곱째 자연 생태나 동식물을 의인화하여 우의적으로 표현한 작품(「假鶴」․「病中吟」․「護菊花」․「秋蠅」․「有所思」․「雲霜不殺草」․「觀鶖攫雉有感」․「送友人」․「聞郭兵使被論」․「無題」․「蠅虎」․「看松」․「鷄避猫巢木末」․「老馬行」․「夢得大魚已具爲龍之狀…」․「詠匏寓意」․ 「無題」)에서 고도의 수법으로 작가 의식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경박한 세태에 대한 풍자와 유교 성리학 진작을 염원하는 작가 의식을 재치 있고 무게 있게 표현해 내었다.
여덟째 수서는 시 작품 과정에서 작시론에 대해 시를 통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作詩苦」․ 「作詩樂」․「自笑」). 시는 결코 안이한 태도에서 탄생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미적 대상을 시인의 감수성과 예리한 관찰력․ 문학 역량을 동원해 혼신의 열정으로 표현해 내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이러한 시인의 노력이 수반될 때 작품의 완성도가 높게 되며 감동을 주며 미학적 우수성이 제고된다고 했다.
권3의 「모춘사暮春辭」는 저무는 봄 계절 감각에 맞춰 애틋한 서정을 집약해 표현한 작품이다. 「치술령鵄述嶺賦」은 박제상朴堤上의 의리와 충절을 기린 작품이다. 문면 행간에 작가의 의리 정신과 유가에서 지향하는 충의 정신이 각인되어 있다. 투철한 선비 정신을 구현하고픈 작가의 내면세계가 투영된 작품이다. 제상의 충성심과 부인의 제상에 대한 절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주중강대학舟中講大學」 배에서 어린 학동들에게 「대학大學」을 강론하다는 설정으로 인생행로에서 세파에 휩쓸리지 않고 살아가는 선비 형상의 견지를 강조하였다. 세파에 휩쓸려 선비의 본분을 망각하지 않기를 바라는 심지를 드러내었다. 교훈과 경계를 담은 글이다.
「삼광부三光賦」 해․달․별이 천리의 운행 이법에 따라 운행해 만물에 혜택을 끼치는 유익한 의미를 강조하면서 주상으로부터 어진 정치 실현과 선비 정신이 구현되고 문장과 도덕이 찬란히 빛을 발하는 시대의 도래를 염원하였다. [홀낭부笏囊賦」에서는 홀을 차고 다니면서 행동거지를 단아하게 하고 항상 거경居敬하여 자신을 돌보는 계기를 삼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철저한 유자 의식을 반영한 작품으로 수신과 내면세계를 바르게 하는 학문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기를 강조했다. 「재상선무재인재부宰相先務在人材賦」는 국가 발전과 백성들의 안온한 생활 보장은 군주를 어질게 보필하며 정치․행정․ 입안의 핵심 인물인 인재 선발과 공정한 관리 체계를를 구축하여 이들이 역량을 한껏 발휘하게 해야 함을 역설한 글이다.
다음 「상한강정선생구서上寒岡鄭先生逑書」는 한강이 안동부사 재직 시에 올린 글로서 일상의 안부를 묻고 소고 박승임의 문집 발간에 즈음하여 안동부에서 일정 부분 지원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답이동악안물령공서答李東岳安訥令公書」는 동악 이안눌에게 장마철을 경과하면서 안부를 묻고 삼랑포三郞浦의 선박 운행으로 민페를 끼칠까 우려된다고 하고 지난번에 보낸 시를 고쳐 보내달라고 했다. 「답곽정보진서答郭靜甫瑨書」는 보내준 서찰을 받고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하고 학문을 권면한 글이다. 「답곽정보答郭靜甫」 역시 안부 편지글로서 제공諸公의 명시를 모아 시첩詩帖을 만들려고 하니 정서해서 보내달라고 했다.
「자경잠自警箴」은 마음이 외물에 의해 요동됨이 없어야 함을 간명히 정리한 글이다. 「자서잠自誓箴」은 빈천貧賤에 대해 거이사명居易俟命하기를 다짐한 글이다. 「일호암잠병서一壺菴箴幷序」는 암자 칭호에서 병 입구가 작은 것처럼 말조심을 해야 난세를 현명하게 살아간다는 원리를 터득했다는 글이다. 「전판명剪板銘」은 송판 자르는데 먹줄에 따라 바르게 켜지는 것처럼 사람은 경敬과 의義를 표준으로 자신을 바르게 세워나가야 한다고 강조한 글이다. 「탄일전誕日箋」은 주상의 탄일을 맞아 장수와 덕치 실현을 기원한 글이다.
「단산서원제주우선생봉안문丹山書院祭酒禹先生奉安文」은 역동 우탁의 강직한 면모와 한국 유학사상 그의 업적을 언급하면서 단산서원에 봉안하게 된 의의를 설명한 글이다. 「이산서원이안문伊山書院移安文」은 이산서원이 오래되어 낡아 안전한 곳으로 옮기면서 위패를 봉안하며 지은 글이다. 「청성서원권송암호문봉안문靑城書院權松巖好文奉安文」은 청성서원에 산림처사 송암 권호문(1532-1587)의 위패를 봉안하며 지은 글이다. 「학봉김선생성일봉안문鶴峰金先生誠一奉安文」은 청성서원에 학봉 김성일(1538-1593) 송암 권호문의 위패를 봉안하려는 애당초 사림의 발의에 따라 지은 것인데 뒤에 송암의 위패만 배향했다.
「영산향교오현종사제문靈山鄕校五賢從祀祭文」은 영산향교에 오현五賢을 추모하며 지은 제문이다. 「이산서원이건고묘문伊山書院移建告廟文」은 이산서원을 이건하면서 올린 고묘문告廟文이다. 「이산서원신기제후토문伊山書院新基祭后土文」은 이산서원의 새 터를 잡고 토지 신에게 올린 제문이다. 「이산서원명륜당개기고묘문伊山書院開基告廟文」은 이산서원 명륜당 새 터를 잡고 올린 고묘문이다. 「식사정기우제문食沙井祈雨祭文」은 부석사에 있는 식사정에서 비 내려 주기를 기원하며 태수를 대신해 지은 제문이다. 「철탄산기우제문鐵呑山祈雨祭文」은 철탄산에서 비 내려주기를 기원한 제문이다.
「제서애류선생성룡문祭西厓柳先生成龍文」은 서애 류성룡(1542-1607)을 추모하며 지은 제문이다. 이어지는 제문 역시 이산서원 유생을 대신해 서애 류성룡을 추도하며 지은 제문이다. 「제외구남삼송선생문祭外舅南三松文」은 스승이며 장인인 삼송당三松堂 남몽오南夢鰲(1528-1591)를 추도하며 지은 제문이다. 「제망우김상사형숙태시문祭亡友金上舍亨叔泰時文」은 벗인 김태시를 추모하며 지은 제문이다. 「제김물암도성륭문祭金勿巖道盛隆文」은 물암 김융(1549-1594)을 추도하며 지은 제문이다. 「제재종질수재염문祭再從姪秀才琰文」은 재종질 박염문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제문이다.
「단산서원상량문丹山書院上樑文」은 단산서원을 건립하면서 지은 상량문이다. 「구만서당상량문龜灣書堂上樑文」은 수서가 향리 후학의 양성을 위해 동지들과 힘을 모아 지은 구만서당을 건립하면서 지은 상량문이다. 이는 후일 구만서원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이어 책문策文 두 편이 있는데 「문궁양달시問窮養達施」에서 선비로서 정주 성리학에 튼실한 기반을 두어 성정性情의 바름을 얻고 그 학문과 실천을 올바르게 이어갈 때 경륜의 학문을 실천해 나갈 수 있다고 했다. 「문교양인재問敎養人才」에서 인재를 양성하는 기반은 심득지학心得之學을 실천궁행實踐躬行하는데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글에서 수서는 ‘육덕六德’․‘육행六行’․‘육예六藝’로 인재를 양성하여 국정에 참여시킬 것을 역설하였다.
권4는 잡저雜著이다. 「동계갱정약문洞稧更定約文」은 동계 조직 및 독서 규약과 준행 법도를 조정한 약정문이다. 「동계독법문洞稧讀法文」은 준행할 법도 권면과 위약한 자에 대한 징계 등을 명문화한 글이다. 「동계갱정약문발洞稧更定約文跋」은 동계를 다시 정한 글에 대한 발문이다. 「박박전가시경가薄薄田歌示璥歌」는 척박한 땅을 옥토로 만든 성과를 들어 심성 수양을 은유한 한시이다.
「오륜가五倫歌」는 부자父子․군신君臣․부부夫婦․형제兄弟․붕우朋友 사이에 지킬 도리를 정리한 국문 시조 8편이다. 이 작품에 오륜 강상의 정립과 실천을 강조하고 성리 질서 확립을 위한 교훈적 내용을 담고 있다. 국문 시조를 창작해서 한문을 해득하지 못한 일반인을 위해 지은 것이다. 「사우록師友錄」은 단곡丹谷 곽진郭瑨․취사炊沙 이여빈李汝馪․권성오權省吾가 수서의 행적을 간략히 정리한 글이다. 「구만서당유생제문龜灣書堂儒生祭文」은 금시해琴是諧가 구만서당 창건의 내력을 언급하며 수서를 추모한 제문이다. 「동중유생제문洞中儒生祭文」은 이성한李成雗이 수서의 행적을 추모하며 애도한 제문이다. 이어 이와 같은 이흥문李興門․배상익裵尙益의 제문이 실렸다.
이어지는 「봉안문奉安文」․「상향축문常享祝文」은 조정융曹挺融이 수서의 유학자적 행적을 회고하며 후학들에게 끼친 영향력을 강조하며 지은 글이다. 「이건시환안고유문移建時還安告由文」은 권정택權正宅이 구만서당을 이건하면서 수서의 행적을 추모해 지은 글이다. 「승원시고유문陞院時告由文」․「승호축문陞號祝文」은 이세택李世澤이 구만서당이 구만서원으로 승격됨에 따라 지은 글이다. 「이건환안제문移建還安祭文文」은 대산大山 이상정李相靖이 구만서당 이건 때 수서의 위패를 옮겨 배향하며 지은 제문이다. 「선인장가봉증박수서선배仙人杖歌奉贈朴水西先輩」는 이민성李民宬이 수서의 효행과 전형적인 선비의 형상을 추모하며 지은 시이다.
「경증박도사자부인수석시병서敬贈朴都事慈夫人壽席詩並序」는 단곡丹谷 곽진郭瑨이 수서 모친의 장수와 수서 가문의 효행을 칭송하며 지은 시이다. 이어 권두문權斗文이 수서에게 지어 준 증별시와 수서가 예안현감 직을 마치고 돌아올 즈음에 김령金坽이 수서의 치덕을 칭송하며 이별의 아쉬움을 담은 시가 있다. 다음 김중청金中淸이 수서와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지은 시 한 수가 있다. 말미에 정경세鄭經世가 지은 「묘표墓表」와 정종로鄭宗魯가 지은 「행장 行狀」 및 박제안朴齊顔이 지은 「가장家狀」이 있다.
Ⅳ. 시문학 전개 양상과 함의
수서가 남긴 시는 모두 157제 176수로서 다양한 형식을 통해 교훈과 서정성이 풍부한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수서의 유려한 필치에 의해 진솔한 감정이 유감없이 표현되어 있다. 내용별로 시를 분석하면서 수서의 사유 의식과 시와의 상관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정심의 성정 미학
수신과 근신을 통해 정심을 지향하는 시에서 간신을 풍유하며 경계했다. 아울러 성리 서적을 읽고 난 뒤 수신과 정심을 다짐하는 성정性情 미학美學 사상을 담아내었다. 일상 가운데 형상된 수신 철학 지향의 작품을 보기로 한다.
선배들이 승경을 시로 다 읊었고 勝槪盡輸前輩詠
성과 연못은 후인들 기다려 완전해 지리. 城地更待後人完
강에 찬바람 불고 시절은 늦어 가는데 寒風吹水時將晩
석 줄 기생의 유흥 보고 싶지 않네. 紅粉三行不欲觀
촉석루를 유람하고 지었다. 촉석루는 정면 5칸․측면 4칸으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다. 남강南江가 바위 벼랑 위에 장엄하게 자리 잡고 있어 영남에서 가장 아름다운 누각으로 알려져 있다. 1365년(공민왕14)에 창건하여 여덟 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던 이 누각은 진주성의 ‘남장대南將臺’로서 ‘장원루壯元樓’라고도 하였다. 전쟁이 일어나면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 본부였고 평화 시절에는 과거를 치루는 고시장으로 쓰였다. 이 누각은 1725년(영조1) 목사 안극효安克孝에 의하여 여덟 번째 마지막으로 중수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6·25동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960년에 재건했다.
촉석루의 뛰어난 경관은 선배들이 시로 즐겨 읊었다면서 촉석루의 수련한 경관과 역사적인 배경의 우수성을 시로 담아내었다. 주변의 성이나 연못의 조경을 비롯한 관리는 후인들의 몫이라고 언명함으로써 역사적 유적에 대한 보존과 지속적 관심을 촉구하였다. 시절로 봐서 늦가을이 지나 초겨울이 임박해 오는 시점인 것 같다. 때마침 그곳에 한 바탕 흥겨운 잔치판이 벌어졌다. 기생을 동반한 춤사위도 펼쳐진다. 시인은 세 줄로 열을 맞춰 춤추는 기생들의 풍류 놀음에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더 이상 그 광경을 주시할 수 없어 자리를 떠났을 터이다.
이는 수서가 차남 한이 과거에 급제하고 왔을 때 자만을 경계시키며 지은 시에서 “풍류와 여색은 도끼날”이라고 경계한 점을 보면 이해된다. 여기에도 성리학적 수신 철학 논리가 지배적이다. 수서는 일상의 모든 생활 가운데서도 이렇게 철저히 자신의 심성이 외물에 유혹되거나 간여되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다. 평소 일상에서 철저한 수신 철학을 담은 작품을 통해 수신과 거경 정신을 살필 수 있다.
잡념 비워도 한 생각 깨어 있어 萬慮俱空一念醒
조용히 앉아 깨우침 얻어서 기쁘네. 蒲團靜處喚惺惺
맑은 물빛 영롱한 구슬처럼 반짝이고 水光炯炯沈珠彩
고운 달빛 쌓아둔 구슬 병 같구나. 月色如如貯玉甁
보이거나 들리지 않아도 고요한 성품 보존해 不睹不聞存性寂
잊거나 도움이 없어도 양심은 신령해지네. 毋忘毋助良心靈
닭 울어 깨면 연못 이르고 얼음 밟는 교훈 따라 鷄明每服淵氷訓
일어나 동터오는 창 아래서 성현의 글 읽네. 起向晴窓對聖經
성리학 심미 의식이 투영되어 있다. 일상생활에 따른 온갖 상념을 떨쳐내려고 부단한 수신을 한 결과 한 가지 깨우침을 얻는다. 조용한 사색을 통해 그 깨우침의 정도가 더욱 심화된다. 사색을 통해 잡념의 제거 과정을 거쳐 사색의 향연에 몰입한다. 구슬처럼 영롱히 비치는 맑은 물빛을 대하니 시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세상 영욕이 조금도 간여하지 못하는 고결성을 획득한다. 구슬 병에 담은 달빛은 한낮의 명상에 이어 밤까지 그런 경지가 지속됨을 반증해 준다.
그러한 고차원의 경지는 보이거나 들리지 않아도 조용히 성품을 보존하고 양심도 신령해 지는 것으로 파급된다. 이처럼 수신을 향한 노력은 밤낮을 이어 이튿날까지도 지속된다. 첫 닭이 울면 일어나 몸가짐을 단정히 하여 마음에 티끌만한 잡념도 침투하지 않게 마음을 다잡는다.
이러한 자세는 ‘깊은 연못에 임하고 살얼음을 밟는 전전긍긍의 자세’를 의미한다. 이는 시경詩經의 「소아小雅」 ‘소민편小旻篇’에 나오는 구절이다. “감히 범을 맨손으로 잡지 않고 감히 하수를 배 없이 건너지 않으나 사람은 그 하나만 알고 그 밖의 것은 알지 못한다. 두려워 조심조심하며 깊은 못에 다다른 듯하고 엷은 얼음을 밟는 것처럼 한다”는 것이다. 이 시는 포학한 정치를 한탄해서 지은 시이다. ‘범을 맨주먹으로 잡거나 황하를 배 없이 헤엄쳐 건너는 일을 하지 않지만 눈앞의 이해에만 눈이 어두워 그것이 다음날 큰 환란이 되는 것을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그 무서운 정치 속에서 마치 깊은 못가에 서 있는 듯, 엷은 얼음을 걸어가는 듯 불안에 떨며 움츠리고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거경의 자세를 잃지 않도록 경계하며 성현의 경전을 정독해 깊은 사색에 잠긴다. 이를 통해 수서가 성리 의식을 기반으로 한 치도 흐트러짐 없는 수신을 철저히 이행코자 했던 점을 엿볼 수 있다. ‘구도자’ 내지 ‘수도사’ 같은 느낌을 받을 정도다. 이는 일상에서 가난에 대처하고 물욕에 초연해 질 때 그러한 정신을 실현해 나갈 수 있다.
가난에 처하는 것 가장 어려운 법 處貧最難
편히 살며 천명 기다리라는 네 글자 須以居易俟命四字
거듭 생각하고 생각하면 念之不已
분수 편안케 한다는 저의가 있네. 然後有安分底意思
스스로 맹세해 이르길 因以自誓曰
선비 되거나 관리 되어도 가난하네. 爲儒貧爲官貧
가난해 누구와도 친할 수가 없다네. 貧無我與誰親
초하루부터 그믐까지 아침마다 불 지펴 朔而晦朝而炊
한 그릇 밥 짓기도 부족하네. 飯一盂猶不足
쌀 짊어지고자 해도 힘이 없고 欲負米無筋力
제사 지내려 해도 제물 없어 슬프네. 欲祭先無牲殺
가난에 처하는 어려움이여! 傷哉貧處之難
천명 기다리면 편안해 질 수 있으리니. 要俟命庶幾安
가난하게 살면서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것은 극난한 법이다. 편안히 지내면서 천명을 기다리는 것은 매우 중요한 명제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인으로 이를 지켜나가기란 쉽지 않다는 논리이다. 때문에 선비가 되거나 관료로 살더라도 가난에 직면해 초연히 살아가기는 힘든 것이라며 경계한다. 가난해서 밥 한 그릇도 넉넉하게 먹을 수 없는 궁벽한 상황을 설정하면서 제사를 모시고자 하나 제물이 없어 안타까워하는 절박한 심정도 그려내었다.
가난에 처하는 것이 이처럼 어렵고 힘겹지만 이것을 이겨내는 궁극적인 대안은 안분자족安分自足이라는 결론을 제시한다. 선비의 정신 철학이 가난과 궁핍을 초월해 안분지족의 생활을 실천할 때 주변 상황과 무관히 유학을 실천하는 선비로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수신을 일상에서 줄곧 유지하고자 했다.
앞내에서 목욕 마치고 옷을 터니 浴罷前川又振衣
피부 깨끗하여 나는 것처럼 상쾌하네. 肌膚淸潔勝翰飛
흰 눈으로 씻은 것 같은 자세로 공부하면 若爲澡雪工夫着
한 생각도 잘못 되지 않고 맑게 되리라. 淨盡靈臺一念非
냇물에서 목욕을 마치고 옷을 터니 가뿐하다. 맑은 냇가에서 목욕 후에 느껴지는 상쾌한 감정을 표현했다. 깨끗해진 몸가짐과 이로 인해 날아 갈 것만 같은 희열을 느끼며 문득 내면의 정화까지 생각하였다. 이렇게 몸 씻음을 단정히 하고 심성 공부에 주력한다면 마음에 한 가지 생각도 어김이 없이 온전해 질 수 있다.
주목되는 것은 치열한 내면 정화를 위한 심성 공부나 수양의 노력 못지않게 평소에도 제계의 상태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서는 ‘천 번 머리를 빗어도 가려운 생각이 있어서 쓴 시’에서 “빗질은 머리의 때를 없애고 기분을 유쾌하게 하지만 마음의 이치를 가다듬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사람은 마음의 티끌을 씻어내는 일을 중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 작품도 수신 의지를 집약한 것이다.
병든 신세 아득히 동래 선생 추억컨대 遐想東萊久病身
거칠고 포악한 내면이 새로워졌네. 却將粗暴一番新
비늘 갑옷 같은 것 벗기지 못해 애닯고 自憐未得除鱗甲
오랜 세월 혼미하고 어리석은 그대로였지. 長作昏庸舊樣人
돌아보건대 단전에서 한 치쯤 되는 곳에 自顧丹田方寸許
은미한 병폐가 산처럼 쌓여있다네. 隱微疵病積嵯峨
뿌리 찾아 제거할 겨를이 없으니 尋根除去吾無暇
공부 외에 다른 것 할 수 있으랴. 豈有工夫點檢他
병으로 찌든 몸이지만 동래 선생을 회고하니 그 분의 의리 정신과 단아한 형상을 흠모함으로 인해 거칠고 포악한 마음이 절로 정화되었다. 동래 선생은 중국 남송南宋 때의 학자인 여조겸呂祖謙(1137-1181)을 말한다. 그의 자字는 백공伯恭이며 호號는 ‘동래선생東萊先生’으로 여대기呂大器의 아들이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으며 임지기林之奇․왕응진汪應辰 등에게 사사했다. 주희朱熹․장식張栻 등과 사귀며 폭넓은 학식을 갖췄다. 1163년(효종원년)에 진사進士에 급제한 뒤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합격했다.
그는 주희朱熹․장식張栻과 함께 ‘동남삼현東南三賢’으로 일컬어지는 유명한 성리학자로 당시 가장 영향력이 있던 학파인 ‘무학婺學’을 창립했다. 장사랑將仕郎․적공랑迪功郎․우적공랑右迪功郎․엄주동려현위嚴州桐廬縣尉․태학박사太學博士․국사원편수관國史院編修官․실록원검토관實錄院檢討官․비서성시서랑秘書省秘書郎 등을 역임했으며 ‘경세치용經世致用’을 주장했다. 수서는 이처럼 유명한 동래 선생을 흠모하면서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였다. 세상일에 들뜨고 분주한 내면 심리의 상태를 돌아보며 자기 성찰의 기회를 모색한 것이다.
지난 시절 회고를 통해 새롭게 변모된 자신을 발견하며 흥분에 들떴다. 비닐 갑옷처럼 자신에게 착색된 어둠과 세속의 오염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혼미했던 경험을 반추하면서 새롭게 된 자신의 형상에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달라붙어 구각을 떨쳐내지 못한 안타까움을 토로하였다. 마음에 내재된 묵은 병폐를 완전히 제거해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한 병폐를 발본색원할 방도가 없다고 하며 결국 심성 공부에 주력할 때 이러한 병폐를 제거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간단없는 성리학 추구와 정심을 위한 수련 행위가 마음의 묵은 병폐를 제거하고 내면의 정화를 거쳐 성리학 사고 확립과 내면 청정의 세계로 전환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마음 ‘효우 실천을 통한 수신’의 성정 미학을 담은 작품을 보기로 한다.
2) 효우 실천의 수신
수서의 생애에서 보듯이 그는 빈틈없는 성리 학자로 ‘수신’과 ‘근신’을 최대 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부단 없는 노력을 경주했다. 이러한 행적은 가정의 ‘효우’ 실천에서 발견된다.
매년 한 차례 성묘 다녀오기 더딘데 一年一度歸來晩
이르는 곳마다 사람들 궁금한 것 물으시네. 處處逢人欲問疑
동쪽 길 점점 험하니 고향 마을 가깝고 東路漸窮桑巷近
서산에 해 지자 나무 그늘도 옮겨가네. 西山將暮樹陰移
단풍 고운 깊은 골짜기에 물이 떨어지고 風林深峽水初落
우거진 숲 언덕에 스산한 바람 부네. 高草荒原風正悲
작은 폭포 바위 위로 떠오른 저 달 一片龍湫巖上月
소년 시절처럼 오늘도 날 따라 오네. 相隨猶似少年時
영해의 부친 묘소를 다녀오면서 추모 서정을 그린 작품이다. 일 년 한 차례의 성묘 길에 이르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안부를 묻다 보면 어느덧 고향 마을이 가까워진다. 서산에 해는 지고 나무 그늘도 점차 옮겨가서 저물어간다. 시적 표현 미감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시간적 추이에 따라 나무 그늘이 옮겨지는 모습까지 세밀히 담아내었다. 단풍 가득한 계곡의 냇물은 졸졸 흐르고 숲 우거진 언덕에 가을바람이 분다. 함련頷聯에서 기우는 태양과 나무 그늘의 이동 과정을 시각적인 감각으로 그려내었고, 경련頸聯에서 청각 소재인 냇물 소리와 바람의 숨결까지 배합시켜 시적 구도를 완벽하게 처리하였다.
말미의 표현 역시 일품이다. 떠오른 달은 유년 시절을 회상케 하는 매체로 작용한다. 작은 폭포 위에 뜬 달은 소년 시절에 자신을 따라 오던 그 정겹던 달이다. 어린 시절에 느꼈던 자신을 따라 오던 달의 추억을 더듬으면서 동심의 미학도 담아내었다. 아울러 어린 시절 고향에서 지냈던 많은 추억을 떠올렸다. 아주 어릴 때 별세한 부친에 대한 사무친 정념을 달래며 고향을 향하는 정경을 그렸다. 물론 시의 행간에 직접 부친에 대한 애정 표현이나 그리운 정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수서의 내면 심정을 간파하게 된다. ‘효심’과 ‘추모 서정’이 드러난 작품이다. 이러한 ‘사부곡思父曲’은 ‘사모곡思母曲’으로 표현된다.
억센 두 병에서 깨어나니 纔驚二竪夢
홀연 깊은 병에 걸려 괴롭다네. 忽見苦痾嬰
창문 틈 문풍지에 바람이 윙윙거리고 風攪窓間障
벽 위의 갓 끈엔 먼지가 뿌옇네. 塵垂壁上纓
몸에 헌 솜옷 걸쳐 무겁고 絮衣加體重
목구멍에 약물은 가볍게 넘어가네. 藥椀到喉輕
이불 덮으시며 밤 내내 어떠냐 하시니 數被終宵問
어이 해야 어머님 정성 위로해 드리랴. 何由慰母情
병으로 신음하는 아들을 염려하는 노모의 지극한 마음에 감동 받은 아들의 심정이다. 수서는 두 가지 병마에 휩싸여 극한 어려움을 겪는다. 질병만큼 겨울 추위도 매섭게 다가온다. 거세게 몰아치는 바람은 창문을 뒤흔들다가 문풍지를 파르르 떨게 한다. 벽에 걸린 갓의 끈에 먼지가 쌓인 것을 보면 시인이 문밖출입을 삼간 지 꽤 오래 된 것 같다. 찬바람과 쌓인 먼지는 전체 시상을 어둡게 하여 시인이 처한 극한 상황 설정을 돕는 장치로 작용된다.
이어 따뜻한 솜옷마저 병을 앓는 수서에게는 부담을 준다. 솜옷마저 무게를 느끼게 한다. 병이 든 아들을 걱정하는 노모는 밤 내내 이불을 덮어주시며 아들의 건강 상태를 염려한다. 이에 감동한 아들은 어떻게 해야 노모의 마음을 위로해 드릴 지 번민케 된다. 어머니의 간호에 감격하는 효심을 발한 것이다. 자식이 되어 노모를 두고 병석에 눕게 되어 불효한 마음이 앞서며 노모의 간병도 감동적이다. 그리하여 이처럼 애틋한 ‘사모곡’을 노래한 것이다. 이는 다음에서 더욱 극명히 표현된다.
아이더러 흰 머리 족집게로 뽑게 하고 呼童鑷白髮
당에 올라 색동옷 입고 춤추네. 上堂舞班衣
육고기 올리긴 어려우니 三性難可得
어머니 뜻 어기지 않아야지. 但願志無違
어떻게 해야 백 척 긴 줄로 安得百尺絲
서쪽으로 기우는 해를 매어 둘까. 繫彼西日飛
연로하신 어머니에 대한 ‘사모곡’이다. 흰 머리 터럭을 아이를 불러 뽑는다. 당에 올라 중국 초楚나라의 효자로서 70세가 되도록 양친이 살아 있어 어버이를 즐겁게 하려고 어버이 앞에서 어린애 노릇을 하여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거나 물그릇을 들고 가다가 자빠져서 엉엉 울기도 하며 온갖 재롱을 부렸던 ‘노래자老萊子’처럼 색동옷을 입고 즐겁게 춤을 춘다. 세 가지 가축인 ‘소’․‘돼지’․‘닭고기’ 반찬을 매번 올려드리지 못해 송구하다. 모친의 마음을 헤아려 뜻을 어기지 않는 효성을 다할 뿐이다. 말미에서 천진난만한 발상을 해본다. 긴 동아줄을 구해 기울어가는 저 태양을 매어두고 싶었다.
수서는 진정한 ‘애일愛日’의 의미를 실천하고 싶어 이처럼 내심을 표백한 것이다. 조선 중기 문신인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1467-1555)가 모든 벼슬을 과감히 버리고 고향으로 귀거래歸去來한 후 부모에게 효를 실천한다는 의미로 지은 ‘애일당愛日堂’ 역시 동일한 효심을 반영한 사례이다. 농암은 시조 「효빈가效嚬歌」에서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말 뿐이오 간사람 없어 전원이 황폐해지니 아니 가고 어찌할꼬? 초당草堂에 청풍명월淸風明月이 나며들며 기다린다”라고 하며 「농암가聾巖歌」에서 “농암聾巖에 올라보니 노안이 더욱 밝아지는구나. 인간사 변한들 산천이야 변할까? 바위 앞 저 산 저 언덕 어제 본 듯하여라”라고 하며 귀향해 부모 봉양하기를 희망하였다. 농암은 은거귀향 후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애일당愛日堂’을 짓고 효행을 실천하였다.
그런 점에서 수서 역시 이러한 ‘애일’의 전통을 인지하고 노모의 장수를 기원했다. 수서는 연로하신 모친의 장수를 빌며 효성을 다하고픈 마음을 이처럼 표현했다. 이처럼 가정에서 효를 실천하는 수서의 자세는 어버이에 대한 효행을 통해 수신 철학 이념을 시로 나타냈을 뿐 아니라 자녀 교육과 경계를 통해서도 그러한 이념 지향을 표현하고 있다. 차남 한이 과거에 급제하고 귀가했을 때 경계하며 지어 준 시 가운데 일부이다. 분절해서 보기로 한다.
(…)
모두 좋은 벼슬 영화롭다고 하여도 人言好爵榮
좋은 벼슬 이미 사치스럽단다. 好爵斯已泰
모두들 잘 먹고 잘 살겠다 하지만 人言口腹養
먹고 사는 것은 큰 일 아니란다. 口腹非爲大
헛된 명성이 결국엔 무슨 도움 될까 虛名竟何益
빗방울 모이면 도랑물 가득 채운단다. 雨集盈溝澮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어사화를 받고 ‘금의환양’했다. 하지만 수서는 이에 앞에 차남이 이로 인해 선비의 절조를 잊고 경거망동할 까봐 우려하였다. 남들은 좋은 벼슬이 영광스럽다고 하지만 자신이 보기에는 사치스럽다고 하면서 벼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호의호식에 있지 않다고 했다. 선비로서 ‘경륜을 펼치고 경세제민을 실현하면 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헛된 명성도 역시 추구할 바가 아니라고 했다.
부질없는 명성을 찾다보면 결국에는 악행을 조장하여 패가망신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법이니 경계하라고 당부했다. 작은 악이 모여 걷잡을 수 없는 악행의 결과를 가져오게 되므로 애당초 악의 단초를 제거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권고했다. 이에 대한 대처 방안은 공자의 가르침에 근거를 둔 자기 수양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임을 힘주어 말했다.
공자님 지극한 가르침 있으시니 宣聖有至訓
바탕이 희어야 수놓는다 하셨단다. 質素乃可繪
인에 거하고 의로 말미암기를 居人與由義
엎어지나 자빠지나 늘 그렇게 하렴. 造次及顚沛
사람 마음 물질에 따라 옮겨지니 人心從物遷
지위가 높으면 교만하고 넘치게 된단다. 位不期驕汰
공자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사람의 근본 바탕이 바르게 된 다음에야 선비 혹은 관료로 바람직한 유도儒道를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직 ‘인仁’과 ‘의義’로 이를 실천하되 항상 그러한 마음가짐을 잃지 않고 실현해 나가야 된다고 했다. 누구나 물질에 따라 마음이 요동되고 지위가 높을수록 그러한 데 쉽게 노출되므로 경계하고 조심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고관대작이 될수록 교만해지고 거드름을 피워 자기 태만에 빠지기 쉬우므로 이에 대한 경계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풍류와 여색은 도끼날 聲色是斧斤
이욕을 부리면 마음의 해가 된단다. 利欲爲心害
악이 적다해서 결코 해서 안 되니 惡小不可爲
악이 커지면 재앙을 빌 데가 없단다. 災殃無所禬
추구해야 할 것은 선행이니 可欲之爲善
지극한 즐거움 가운데 이것이 으뜸. 至樂斯爲最
서두에서 ‘풍류와 여색이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임을 언명했다. 사사로운 이익 역시 탐내면 안 된다고 했다. 선공후사 정신으로 공직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작은 악행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것을 용인했을 때 더 큰 악행을 조장하게 되어 결국 빌 곳이 없을 만큼 확대되기 마련이기에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은 선한 행위이다. 상대방의 작은 장점도 인정해 주고 선행을 권장하라고 당부했다. 결국 이는 이른바 ‘성인지미成人之美’와 일맥상통하는 정신이다. 결론에 이르러 군자로서 마땅히 행할 바를 실천하기 위해 굳은 심지를 기르고 정심으로 나아가야 함을 강조한다.
텅 비고 밝은 데서 기운을 길러야 虛明氣須養
한밤중에 만 가지 소리 고요해진단다. 中宵寂萬籟
군자는 좇는 바를 삼가야 하는 법 君子愼所從
갈림길에서 스스로 혼미치 말지니. 臨岐毋自眛
마무리 단계에 이르러 벼슬길에 나서게 될 차남에게 군자의 행할 바를 소상하게 일러준다. 마음을 비우고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함양하며 선비로서 철저한 자기 수양을 이행하며 선비의 삶을 충실히 실천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참다운 선비 정신으로 바람직한 군자의 도리를 실천하며 벼슬길에 임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훈계와 교훈성을 제시한 가운데 수서의 성리학 이념 지향과 성리학 실천 의지가 여실히 투영되어 있다. 그는 철저한 자기 수양과 실천을 일삼은 전형이다. 다음 애민 정서를 형상한 작품을 보기로 한다.
3) 애민 정서의 형상화
수서의 성리학 사유 체계는 개인적인 수신과 대 사회적인 성리학 질서 체제 구축으로 확대되어 짐을 볼 수 있다. 그러한 수서의 정신은 백성의 일상을 주목해 그들과 애환을 함께하는 것으로 확대된다. 농촌 정감과 결부된 농촌 서정성에 근거한 애민 정신이 투영된 작품이다.
용은 앞 소에 누워 늙었고 龍臥前湫老
구름은 북쪽 잿마루에 머무네. 運歸北嶺屯
하늘 뜻 헤아릴 수 없나니 天心不可量
아침 해 밝게 또 높게 솟았네. 旱旱又朝暾
가뭄이 지속되는 농촌 현장을 보도했다. 바짝 마른 연못은 바닥을 드러내어 바닥이 갈라지는 형상을 보인다. 구름이 모여야 비가 올 기미가 형성될 것이지만 구름은 북쪽 잿마루에 머물러 종내 비가 내릴 조짐을 형성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시인은 내내 우울하다. 여름 내내 가물어 하늘의 뜻을 헤아릴 수 없다고 탄식하며 또 다시 붉게 떠오르는 태양을 맞으며 안타까운 마음을 금하지 못한다. 다음 역시 이러한 시각을 반영한 작품이다.
매년 열흘마다 틀림없이 비 오는데 旬雨年年若合符
올해처럼 비 오길 고대한 적 없었네. 如何此日憖霑濡
하늘이 비 내리고 안 내린 때문 아니라 應非陟降慳神貺
저 불쌍한 백성들 굶주릴까 마음 아프네. 哀哉黔黎祿自無
때 이른 가뭄에 온 대지 삶은 것 같아 蟲蟲早魃虐如煎
모두들 하늘 쳐다보며 비 오기만 고대해. 萬口喁喁戀在天
간절한 정성의 부족해 단비가 오지 않는 지 誠感不成甘霔洽
구름이 모이는가 하더니 언덕 가에 머무네. 愁雲飛遶獻陵邊
열흘에 한 번씩 비가 오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금년에는 그렇지 않은 점을 떠올리며 오늘이나 내일이나 비가 내려 온 대지를 흠뻑 적셔주길 고대하고 있다. 일기가 불순한 원인을 하늘 탓으로 돌릴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굶주릴 까 내내 염려하였다. 이른 가뭄이 찾아들어 온 대지와 초목 및 인명을 삶아대는 것 같은 느낌이다. 산천초목이나 인명 모두 하늘을 우러르며 비로 적셔주길 학수고대하고 있다. 안타까운 마음에 비를 기다리는 정성이 부족한 탓으로 돌리며 애타는 마음으로 언덕 가에 맴도는 구름만 응시한다. 가뭄에 허덕이는 농민을 애타게 하는 것은 이뿐만 아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가물어 백곡이 말라 春夏秋來百穀枯
백성들 입에 풀칠할 대책이 없어. 吾民無計口中餬
도랑에 굴러 떨어져 죽을 건 같은데 嗷嗷將轉溝渠裏
아전들 문에 들이닥쳐 세금 내라 아우성. 吏到門前更索租
봄에 이어 여름과 가을이 오기까지 가뭄이 이어져 온갖 곡식이 말라 버려 추수할 계획조차 할 수 없는 극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농민들은 당장이라도 호구지책을 면할 길이 없어 막막할 뿐이다. 농민들은 가뭄과 기근으로 조만간 도랑에 쓰러져 죽을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런데도 아전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세금 독촉을 하느라 안간힘을 쓴다. 이 때문에 농민들의 현 실정은 너무나 궁핍하다. 그런 광경을 목도한 수서의 서정 자아는 그들의 고통을 동일시하여 시로 형상하였다. 수서의 연민 정서가 집약되어 있다. 이런 연민 시각은 기우 제문에 선명히 드러난다.
(…)
올해 이 가뭄 때문에 今玆亢陽
근심이 크고도 심합니다. 𢥞𢥞孔酷
타들어간 게 몇 달째 如焚幾月
해를 거듭해 재앙이 이어졌습니다. 作災連歲
밭은 마르고 논바닥 터지고 田疇龜坼
냇물은 실처럼 가늘어졌습니다. 川流線細
보리 이삭 이미 말라버려 麥穗已枯
빽빽이 자라나길 바랄 수 없습니다. 無望油油
모는 늙어 이앙하지 못하니 秧老未搬
가을걷이 어떻게 할 수 있으리. 將焉有秋
연속되는 가뭄으로 인해 근심과 걱정이 태산이다. 논밭은 타들어가서 거북 등처럼 갈라 터지고 냇물마저 말라 실오라기처럼 가늘게 흘러가는 참상이다. 춘궁기를 지탱해 줄 보리 이삭도 말라 버려 농민은 입에 풀칠할 수도 없다. 이앙을 해야 할 벼의 모종은 묘판에서 늙고 시들어버려 가을 추수를 기대할 수 없는 현실 앞에 무능한 자신을 돌아보며 농민을 향한 애타는 심정만 가중되었다. 찬 겨울바람 속에서도 백성을 향한 수서의 연민 시각은 동일하다.
억세고 거친 찬 기운 엉켜서 奰贔凝寒氣
사나운 바람이 그치질 않네. 饕風無歇時
서리는 고운 계수나무 손상시키고 霜摧芳桂色
눈은 묵은 소나무 가지를 눌렀네. 雪壓古松枝
공중에 새벽달 오른 지 오래 曉月當空久
아침 해 바다에 떠오른 것 느리네. 朝暾出海遲
너덜너덜 갖옷 모두 해어졌으니 蒙茸裘盡弊
추위에 떠는 아이 덮어 줄 수 있을까. 那得庇寒兒
매서운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시절이다. 서리가 내리고 이내 찬 겨울이 들이닥쳐 묵은 소나무 가지를 누른다. 눈의 무게만큼 백성의 고충은 점증되어 시인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추운 겨울밤을 지새우는 수서의 근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시간이 너무 늦게 흘러간다. 새벽을 지나 아침이 오기까지 그 시간의 추이가 늦어짐을 느낀다. 갖옷이 해어져서 추위에 떨고 있는 아이를 덮어줄 수 없게 되어 조바심이 탄다. 이 역시 수서의 연민 정서가 녹아든 작품으로 주목된다. 다음은 수서의 연민 의식이 강렬히 작용한 작품이다. 익지 않은 보리 이삭을 베어 연명하는 민초의 곤궁한 삶을 사실적 안목으로 담아낸 것이다. 분절해서 보기로 한다.
갑진년 여름 유월 甲辰夏六月
보리 이삭 간간이 푸르고 누렇네. 麥穟間靑黃
마을 아낙 보리 베어 들고 와 村婦刈麥歸
푸른 낱알 작은 솥에 찌네. 碧粒煮滿鏜
부엌 연기 가랑비와 뒤엉켜 廚煙和細雨
큰길과 마을의 농토를 가로지르네. 橫逵一村庄
갑진년(1604) 지독한 가뭄 끝에 여물지도 않은 보리 이삭을 식용으로 대처하는 촌부를 형상함으로써 농민의 궁핍한 실상을 현장 보도했다. 유월에 보리 이삭이 아직 추수할 시점이 안 되어서 푸르고 누른 형상이다. 하지만 식구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는 이를 베어 이른 추수를 할 수밖에 없어 푸른 낱알을 쪄서 굶주린 배를 채워야 한다. 가랑비 내리는 속에 푸른 연기가 신작로와 농토를 휘두른 정경도 포착했다. 가랑비와 푸른 연기의 고운 색채감도 낭만적이지 않다. 궁핍에 찌든 농민의 참상을 보는 시인의 입장에서 도리어 애처롭고 안타깝다. 그나마 이로써 며칠을 버텨봤지만 보리도 더 이상 베어낼 게 없어지자 곤궁한 삶은 이어진다.
며칠 지나자 밭이랑 텅 비어 數日田畝空
새벽엔 밥 지었어도 저녁 끼니 걱정. 晨炊夕無粻
사람들 만나면 저마다 하는 소리 逢人何所說
매년 흉년이라 죽을 지경이라네. 但苦年年荒
참으로 하늘 뜻 알기 어려우니 天意固難知
검은 구름 부질없이 해만 가릴 뿐. 密雲謾遮陽
설익은 보리 이삭을 추수해 버린 보리밭은 황량하다. 아침 한 끼는 겨우 때웠지만 더 이상 거친 보리밥도 지을 도리가 없어졌다. 사람들끼리 서로 만나도 모두 흉년 때문에 살 길이 막연하다고 하소연하며 탄식만 늘어놓는다. 이처럼 흉년을 들게 하는 하늘의 뜻을 헤아리기 어렵다고 하면서 해를 가린 구름만 바라보며 하늘을 원망하는 농민의 심정을 대변했다.
백성들 곡식 사려고 야단이고 濟民告糴急
아전은 세금 독촉으로 날뛰네. 官吏催租忙
늙은이 마음 하도 슬퍼서 老夫心怛怛
무력하게 푸른 하늘 바라보네. 無力念穹蒼
가뭄 든 농토 보며 근심만 하랴 豈但百畝憂
힘든 시절 생각하니 눈물이 핑도네. 念時淚滂滂
백성은 연명하려고 곡식을 구하느라 야단이지만 아전들은 여전히 세금 독촉을 하느라 혈안이 되어 있다. 이러한 현실 앞에 무력한 늙은이의 마음은 한없이 구슬프다. 하늘만 쳐다보면서 탄식을 발한다. 힘겹고 찌든 현실 위기를 느끼며 힘겨운 인생살이를 돌아보니 눈물이 솟구친다. 극난한 농민들의 삶을 목도한 수서의 심정은 농민들의 참상 못지않게 핍진하다. 사대부로서 이러한 시각을 확보한 것은 수서가 연민 의식을 투철히 지녔기에 가능한 일이다. 수서의 수신과 정심의 성리학 이념 지향이 백성들의 삶을 면밀히 관찰하고 그들의 고통과 어려운 현실을 그들의 시각으로 주목했다. 다음 ‘충절 인물 형상과 의미’에 드러난 수서의 문학 정신을 살펴보기로 한다.
4) 충절 인물 형상과 의미
수서는 충절 인물 형상화를 통해 성리 미학 이념을 표출하였다. 한국 유학 도입 과정에서 지대한 역할을 수행한 안향과 국가 대란을 극복해 낸 인물에 대한 찬미와 절의를 기렸다.
유학의 도가 남쪽으로 내려온 이후 吾道南來後
죽계는 깊고도 그윽한 곳 되었네. 竹溪深且長
우러러 참으로 즐거운 뜻 생각하니 仰思眞樂意
천 년 동안 남긴 빛 자취 있다네. 千載有遺光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의 연원과 회고 정서가 반영된 작품이다. 백운동서원은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1495-1554)이 1542년 고려 말 성리학을 전래한 안향安珦(1243-1306)을 제사하기 위해 만든 우리나라 서원의 효시로 선현에 대한 제사와 학문 연구를 비롯하여 사림의 자제 교육 등의 역할을 수행했다. 주세붕은 안향이 살던 경상도 순흥면의 백운동에 그를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우고 자제들의 교육 장소로 삼았다. 그 후 명종 때는 이황의 건의로 ‘백운동서원’이 ‘소수서원’으로 사액되고 국가로부터 서적과 토지․노비 등을 받고 면세와 면역의 특권을 받아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다.
이후 각 지방마다 많은 서원이 생겨났다. 서원은 향교와 달리 각기 다른 선현들을 제사지냈으며 그 운영에서도 독자성을 지닌다. 이처럼 서원이 확대된 배경에는 퇴계와 그 제자들의 노력이 컸다. 선조 때는 편액을 하사받은 사액 서원만 100개가 넘었다. 18세기에는 700여 개소, 고종 때는 1,000여 개소나 되었는데 그중 사액 서원이 약 1/3을 차지하였다. 이 서원은 영조 때와 대원군 때 대폭 정리되었다.
수서는 이 시에서 유학의 한국 정착 연원에 대한 감회와 백운동서원의 유래 및 역사성을 강조했다. 아울러 유학 연원과 전통에 대한 자부심으로 상기된 목소리를 제시하였다. 고려 말에 도입된 성리학 연원과 그 정통성을 그대로 간직한 백운동서원의 유구한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면서 당당한 우월감을 드러내었다. 다음 시는 그 역사의 주인공 안향을 추모하며 지은 작품이다.
죽계의 맑고 얕은 물 竹溪淸淺水
쉬지 않고 흐르는 소리. 源源水流聲
무궁한 취미 실어 보내며 輪盡無窮趣
현인 추앙하며 다시 정자 세웠네. 景賢更立亭
백운동서원 죽계의 속성을 들어 유학의 지속성을 강조했다. 냇물이 마르지 않고 쉼 없이 흘러가듯이 유학의 정통성이 영구적으로 이어갈 것임을 암시하였다. 이러한 유학 정신 지향을 염원하는 작가는 이곳에서 한국 서원의 시초를 이룬 안향의 업적을 회고하며 그 정신 기맥을 지속해 나갈 것을 스스로 다짐했다. 안향의 본관 순흥順興이며 자는 ‘사온士蘊’이며 호는 ‘회헌晦軒’이다. 그의 초명은 ‘유裕’였지만 뒤에 ‘향珦’으로 고쳤다. ‘회헌’이라는 호는 만년에 송나라의 ‘주자朱子’를 추모해 그의 호인 ‘회암晦庵’을 모방한 것이다. 안향은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최초로 도입하였
다.
1260년(원종1)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郎이 되었으며 이어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자리를 옮겼다. 1270년 삼별초의 난 때 강화에 억류되었다가 탈출하였으며 1272년에 감찰어사가 되었다. 강화 탈출로 인해 그는 다시 원종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1275년(충렬왕1) 상주판관尙州判官에 부임하여 미신을 타파하고 풍속을 쇄신시켰다. 판도사좌랑版圖司左郎·감찰시어사監察侍御史를 거쳐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올랐다. 1288년에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를 거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다. 1289년에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원외랑員外郎에 제수되었다가 좌우사낭중左右司郎中 및 고려유학제거高麗儒學提擧가 되었다. 그해 11월 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원나라에 가서 주자서朱子書를 손수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그려 가지고 이듬해 돌아왔다. 그해 3월에 부지밀직사사가 되었다.
1294년에 동남도병마사東南道兵馬使를 제수 받아 합포合浦에 출진했다가 곧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그해 12월 지밀직사사 제수를 거쳐 이듬해 밀직사사로 승진하였다. 1296년에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옮겨 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다시 원나라에 갔다. 이듬해에 첨의참리세자이보僉議參理世子貳保가 되었다. 그해 12월 집 뒤에 정사精舍를 짓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모셨다. 1298년에 원나라의 간섭에 의해 충렬왕이 물러나고 세자인 충선왕이 즉위하자 관제가 개혁되어 집현전태학사集賢殿太學士 겸兼 참지기무동경유수계림부윤參知機務東京留守鷄林府尹을 거쳐 첨의참리수문전태학사감수국사僉議參理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가 되었다. 그해 8월 충선왕을 따라 또다시 원나라에 들어갔다. 그 해에 충렬왕이 다시 복위되고 이듬해 수국사가 되었다. 이어 1300년에 광정대부찬성사匡靖大夫贊成事에 올랐고 얼마 뒤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이 되었다.
1303년에 밀국학학정國學學正 김문정金文鼎을 중국 강남江南에 보내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畵像․제기祭器·악기樂器․육경六經·제자諸子·사서史書·주자서朱子書 등을 구해오게 하였다. 또한 왕에게 청하여 문무백관으로 하여금 6품 이상은 은 1근, 7품 이하는 포布를 내게 하여 이것을 ‘양현고養賢庫’에 귀속시켜 그 이자로 인재 양성에 충당케 하였다. 그해 12월 첨의시랑찬성사판판도사사감찰사사僉議侍郎贊成事判版圖司事監察司事가 되었다. 1304년 5월에 섬학전贍學錢을 마련하여 박사를 두어 그 출납을 관장하게 했다. 그해 6월에 대성전大成殿이 완성되자 중국에서 구해온 공자를 비롯한 선성先聖들의 화상을 모시고 이산李㦃·이진李瑱을 천거하여 경사교수도감사經史敎授都監使로 임명하게 하였다. 이 해에 판밀직사사도첨의중찬判密直司事都僉議中贊으로 관직생활을 마쳤다.
수서는 이처럼 한국유학사에서 유학 도입 과정상 지대한 역할을 했던 안향을 추모하면서 그 정신 지향을 길이 이어가야 함을 역설하였다. 임란의병장으로 주목받는 곽재우의 기개를 찬미한 작품을 보기로 한다.
붉은 옷의 늠름한 곽재우 장군 紅衣凜凜郭將軍
산 바깥 쓸쓸한 초당에 계신다네. 山外蕭然一草堂
적송자 비결 아는 이 없지만 赤松秘訣無人會
천고토록 마음으로 통하는 자방일세. 千古知心是子房
홍의장군으로 널리 알려진 곽재우郭再祐(1552-1617) 장군의 초상화를 보면서 추모와 역사 회고 정서를 담았다. 곽재우의 본관 현풍玄風이며 자는 ‘계수季綬’, 호는 ‘망우당忘憂堂’으로 경남 의령 출신이다. 34세(1585)에 별시別試의 정시庭試 2등으로 뽑혔지만 지은 글이 국왕의 뜻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발표한 지 며칠 만에 전방全榜을 파해 무효가 되고 말았다. 이후 그는 과거에 나갈 뜻을 접고 남강南江과 낙동강의 합류 지점인 기강岐江 위의 돈지遯池에 집을 짓고 평생을 은거했다. 그 곳에 머문 지 3년이 지난 1592년에 임란이 일어나 관군이 대패하자 4월 22일에 의병을 일으켜 관군을 대신해 싸운 공으로 7월에 유곡찰방幽谷察訪을 제수되었으며 이어 형조정랑에 올랐다. 10월에 절충장군折衝將軍, 이듬해 12월 성주목사에 임명되어 삼가三嘉의 악견산성岳堅山城 등 성지城池를 수축했다.
1597년에 경상좌도방어사로 제수되어 현풍의 석문산성石門山城을 쌓았다. 1599년 9월에 경상좌도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으며 이듬해 봄에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귀향했다. 이 때문에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영암靈巖으로 귀양 갔다가 2년 만에 풀려났다. 그 뒤 현풍 비슬산琵瑟山에 들어가 곡식을 금하고 솔잎으로 끼니를 이어가다가 영산현靈山縣 남쪽 창암진滄巖津에 집을 짓고 ‘망우정忘憂亭’이라는 현판을 걸고 여생을 보내려고 했다.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1604년(선조37)에 찰리사察理使가 되었으며 이어 선산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08년(광해군1)에 경상좌도병마절도사·용양위부호군을 거쳐 이듬해 경상우도병마절도사·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되었다. 1612년(광해군4)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았다.
의병 활동 초기에는 의령의 정암진鼎巖津과 세간리世干里에 본부를 설치하고 의령을 고수하는 한편 이웃 고을 현풍·창녕·영산·진주까지 작전 지역으로 삼고 유사시에 대처했다.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하여 적군과 아군의 장졸에게 위엄을 보였다. 단기單騎로 적진에 돌진하거나 위장 전술을 펴서 적을 직접 공격했다. 적을 유인해 매복병으로 하여금 급습을 가하거나 유격전을 펴서 적을 섬멸하는 전법도 구사했다. 수십 명으로 출발한 의병은 2,000명에 이르는 큰 병력으로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2년 5월 하순경 함안군을 완전 점령하고 정암진 도하작전을 전개한 왜병을 맞아 대승을 거뒀다. 이로써 경상우도를 보존해 농민들이 평상시처럼 경작할 수 있게 했으며 왜구의 호남 진격도 차단했다. 곽재우의 의기와 충절 정신을 기리며 임란 때 의병을 모아 신출귀몰한 전략으로 왜적을 교란시키고 보급로를 차단하는 한편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안전하게 살아가도록 했던 공로를 치하하며 숭고한 정신을 기렸다.
다음은 신라 박제상朴提上(363-419)의 충절 정신을 추모하며 의리와 절개를 고양한 작품이다. 삼국사기 「열전」을 보면 박제상은 신라 눌지왕 때의 충신으로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왕의 아들을 고국으로 탈출시키는데 성공했다. 이어 일본에 건너가 볼모로 잡혀 있던 왕의 아우를 고국으로 탈출시키긴 했지만 본인은 왜군에게 잡혀 유배되었다가 살해당했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박제상의 부인이 남편을 그리워하며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鵄述嶺’에 올라가 왜국 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어서 ‘치술신모鵄述神母’가 되었다는 설화가 부기附記되어 있다. 이 이야기와 비슷한 것으로 그의 부인이 고개에서 남편을 기다리다가 돌이 되었다는 ‘망부석望夫石’ 설화가 민간에 전해진다. 박제상의 충절 시화는 이러한 역사 배경이 있다. ‘치술령 노래’는 다음처럼 전개된다.
바닷가 터럭만한 것이 濱滄海之一髮
천추에 높은 절개 싣고 있네. 戴高節於千秋
부상에 검푸른 빛 떠오르고 黛色浮兮扶桑上
목도 물가에 원통한 기운 이어졌네. 寃氣接兮木島洲
천길 높이 반짝이는 빛 남겨 屹千仞兮遺耿光
반공에 우뚝 솟은 정렬 늠름하여라. 參半空兮凜貞烈
고개 마루 청 단풍 혼자 고운 것 아니니 嶺靑楓兮罔專美
쌍절 이룬 것 보기 드문 일일세. 雙節義兮此惟一
애당초 제상이 왜국으로 떠날 때 부인이 이 소식을 듣고 쫓아왔으나 따라잡지 못하자 망덕사望德寺의 문 남쪽 모래사장 위에 이르러 쓰러진 채 울부짖었다. 부인은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을 참을 수 없어서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鵄述嶺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고 통곡하다가 죽어 치술신모鵄述神母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시인은 치술령에 올라가 전망하였다. 박제상의 높은 절개와 부인의 남편을 향한 정절 정신을 우러르며 애상스런 감정을 누를 길 없었다.
부인의 원통한 기운이 목도木島까지 뻗혔다고 하면서 애통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박제상의 ‘애국충정’이 길이 빛나며 부인의 정절 역시 애상의 감정을 넘어 늠름하게 느껴진다. 이 때문에 박제상의 ‘충의忠毅’ 정신과 부인의 ‘정절貞節’은 쌍벽을 이루어 천추만대에 빛나고 있음을 체감했다. 이제 역사의 현장을 반추하며 새삼 박제상의 기절氣節을 되새겨본다.
머리털 곤두서며 우러러 공경컨대 余髮兮仰止
남긴 자취 신라 때를 회상한다네. 想遺跡於羅代
눌지왕 처음 등극하여 王訥祗之初立
고구려에 갇힌 형제를 생각했네. 憶具爾於海岱
볼모 귀국케 할 계책 없이 시름타가 念還質之無術
어진 선비 만나 달래 보길 바랐다네. 冀得士而往說
삽량주 절개 굳은 박제상이 堤上良州之介士
높은 의를 지고 사신이 되었네. 負高義而應幣
한 몸을 왕사에 맡긴 채 委一身於王事
필경 죽을 것 맹세하였네. 指九死而爲誓
박제상은 박혁거세의 후손이자 파사婆娑이사금의 5세손이며 파진찬 물품勿品의 아들이다. 벼슬길에 나아가 삽량주歃梁州의 간干으로 있던 중 눌지왕으로부터 실성왕 때 고구려와 왜국에 볼모로 간 아우들을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박제상이 외국에 볼모로 잡혀 있는 눌지왕의 아우와 아들을 구해 오라는 어명을 받드는 순간이다. 박제상의 충의는 일신의 안일을 돌보지 않는다. 오직 대의명분에 따라 어명을 순행할 뿐이다. 박제상은 어명을 받는 순간 순국할 것을 맹세한다. 이에 먼저 고구려로 행보를 향했다. 이에 제상은 눌지왕 2년(418)에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눌지왕의 아우 복호卜好를 무사히 귀국시켰다. 결국 박제상은 고구려 장수왕을 설득해 왕의 아우를 무사히 귀환시켰다. 이로써 그에게 맡겨진 첫 번째 임무는 완수했다. 다음은 왜국에 잡혀가 있는 왕자를 구출해 오는 임무 수행 과정 묘사이다.
아침에 신라에서 명 받들어 朝受命御鷄林
저녁에 일본에 닻을 내렸네. 夕解纜於日本
말로 회유하기 어려운 것 알고서 知口舌之難諭
신라에 반역한 것처럼 둘러댔다네. 佯處身於逆反
흉포한 왜적 추장에게 신임 받아 桀賊酋之見信
왕의 아우 배타고 오게 하였네. 載王弟而回棹
두 번째 과제는 일본에 잡혀 있는 왕의 아우를 데려 오는 일이다. 박제상은 그 해 다시 왜국으로 가서 신라를 배반하고 도망쳐왔다고 속인 후 눌지왕의 아우 미사흔未斯欣을 빼돌려 신라로 귀국하게 하였다. 삼국사기의 내용을 보면 구출 과정이 보다 긴밀하게 정리되어 있다. 박제상은 왜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 신라의 왕이 죄 없는 자신의 부모 형제를 죽여 피신해 온 것처럼 속이고 매번 새 사냥을 하여 왜왕에게 올려 신임을 얻고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워 왕의 아우를 구출해 환국시키는데 성공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박제상의 충정은 빛난다. 극난한 구출 과정에서 계략과 기지를 발휘하여 왜왕의 눈길을 따돌리고 목적한 바를 달성시켰지만 그는 자청해서 인질로 남아 의기를 발한다.
왕의 두 아우 주상 품에 넘겨주고 連二臂於玉體
외로운 충신 절도에 남겨졌네. 滯孤忠於絶島
스스로 금석처럼 절개 굳었으니 節自堅於金石
몸을 불로 지진 들 굴할쏘냐. 身豈屈於灼鐵
연기구름 참담해 햇빛도 얇은데 雲煙慘兮日色薄
돌아오지 못해도 혼백은 반짝이네. 魂耿耿兮歸未得
왜왕은 그를 목도로 유배 보냈다가 곧 불에 태운 뒤 목을 베었다. 이제 외로운 충신으로 목도에서 순절하는 박제상을 형상한다. 박제상은 왜왕으로부터 신라를 배반하고 왜국의 신하가 되길 강요한다. 하지만 박제상은 갖은 고문과 악독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전혀 흔들림 없이 신라의 신하로 죽기를 자원한다. 제상을 굴복시킬 수 없음을 인지한 왜왕은 제상을 화형에 처하는 잔인한 행위를 그치지 않았다. 제상의 의리 실천 정신을 서술하면서 그의 의로운 행적을 고양시켰다. 제상의 육신을 죽여도 강인한 의리 정신을 굽히지 못했다고 하며 그의 혼백은 한없이 고귀하게 반짝이며 귀국한다고 강조하였다. 이 작품에서는 제상의 의리 정신 형상화에 초점이 있기에 미사흔의 귀국 장면은 생략했다. 미사흔의 해후 광경을 일연은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제상의 순절 소식을 접한 눌지왕은 제상에게 대아찬大阿飡 관품을 추증하고 제상의 둘째 딸을 미사흔의 아내로 삼게 했다. 수서는 박제상의 순국과 절의 정신을 드높이면서 다음에서 박제상 부인의 슬픈 심정을 그려내었다.
홀로 서있는 그의 아내 슬프나니 哀厥婦之孑立
내 마음 길이 애절하고 답답하구나. 憫我儀之永絶
심장과 장부가 터져도 못 따르니 摧心腑兮追莫及
세 딸 이끌고 슬피 부르짖었네. 挈三嫏兮悲號泣
하늘 아득해 부르짖음 듣지 않고 天茫茫兮籲不聞
바다 질펀해 요기가 막혔도다. 海漫漫兮妖氛隔
모씨의 복수 하지 못해 슬프니 痛不能毛氏之復讐
결국 산머리 돌이 되고 말았네. 寧效夫山頭之化石
이에 높은 언덕에 올라 于以陟兮高岡
멀리 아득하게 바라볼 뿐일세. 寄遠望於渺茫
한눈에 먼 섬나라 바라볼 데 섰지만 接遠島於一矚
만경창파 바다가 앞을 막았네. 隔萬頃之洋洋
찬 눈에서 피눈물 섞여 흐르니 血交流於寒眼
원통히 부르짖어 쓸개가 터질 듯. 膽欲裂於叫寃
박제상 아내의 애절한 사연 묘사다. 「치술령가鴟述嶺歌」의 내용은 전하지 않고,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그 유래만 실려 전한다. 신라 박제상朴堤上이 볼모로 잡혀 있는 왕의 아우 미사흔未斯欣을 구출하러 왜국에 갔다가 왕제王弟를 구해 귀국시켰지만 자신은 왜왕에게 잡혀 죽음을 당하였다. 이에 박제상 부인이 세 딸을 데리고 현재 울산과 경주 경계에 있는 ‘치술령’에 올라가 슬픔과 그리움에 겨워 통곡하다가 죽어 치술령 신모가 되니 뒷날 백성들이 이 노래를 지어 슬퍼하였다고 전해진다. 위 작품의 행간에서 처절하게 지아비를 그리워하며 울부짖는 여인의 애절한 심정 묘사 배경을 읽을 수 있다. 수서의 문학적 정교함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남편을 잃은 지어미의 처절한 통곡과 원한에 사무친 내밀한 서정 세계를 극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부부 애정의 고결함을 강조했다. 아울러 부부 애정을 희생하면서까지 대의를 위해 순절한 박제상의 의리 정신을 함께 조명하여 ‘충忠’과 ‘열烈’의 함의를 동시에 부각시켰다.
고개 마루에서 난초 혜초 꺾어 摧蘭蕙於嶺頭
바다 위의 충혼을 따르려네. 追海上之忠魂
푸른 가을 하늘에 원통한 심정 맺혀 結哀痛於蒼旻
청백한 절조 가을 서리와 같네. 橫素節於秋霜
강상의 대도를 지켜 扶綱常之大道
아름다운 덕 끝없이 밝혔다네. 昭令德於無彊
높은 의열 늠름하여 卓義烈之凜凜
일월과 빛을 다투네. 與日月兮爭光
부인의 애통한 심정과 제상의 충정을 동일시함으로써 윤리 강상 수립이 절실함을 강조하였다. 부부의 아름다운 행적은 천추에 길이 빛날 것이라고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의열義烈’에 초점을 두어 제상의 ‘의리義理’와 제상 부인의 ‘정렬貞烈’은 ‘하늘의 해와 달처럼 천추에 대대로 빛날 것’이라고 했다. 결론 부분에 이르러 두 부부의 숭고한 정신은 비할 데 없는 귀감이라고 매듭짓는다.
아! 하늘이 준 아름다운 덕 噫天賦之懿德
사람마다 똑같이 얻었건만 固人人之同得
의에 처해 죽음으로 지킨 이는 然處義而守死
전대 역사에 한둘뿐이었지. 纔一二於前史
저 계림의 정렬이 夫豈若鷄林之貞烈
부부가 쌍절 이룸과 같으랴. 乃能成匹耦之雙美
남편은 충의로 죽어 부끄러움 없었고 夫無愧於死忠
아내는 절개로 죽어 빛나도다. 婦有光於死節
충성과 절개가 열렬해 忠與節其烈烈
지금까지 그 향기 사라지지 않네. 芬至今猶未滅
옛 도읍지의 높은 고개 마루 然古都之一嶺
동해에 벽으로 우뚝 섰구나. 也東溟之壁上
청구 백성 모두 공경해 우러르니 係靑丘一邦之欽仰
그때처럼 늠름한 청풍 일으킨다네. 凜淸風兮如昨日
길손들 지나가다 유촉에 읍하며 兮挹遺矚
마음으로 탄복해 머리털 쭝긋해진다네. 歎服兮髮竪竹
박제상 부부가 이룩한 정신 지향은 조선의 윤리 강상 수립에 지대한 영향력을 줄 것을 신념하였다. 부부의 정신적 유산이 이 땅에 강상 재정립과 유교 성리학 문화의 개화에 커다란 등불이 되어 시대를 초월하여 옷깃을 여미고 공경심을 유발시킨다고 확신하였다. 이처럼 수서는 유교 성리학 토양 위에 윤리 강상의 수립과 유교적 문화의 개화를 염원하였다. 때문에 의리 실천 인물의 시적 형상화로 그러한 내면의 심지를 드러냈다.
노래해 이르기를 歌曰
바다 바람 불어 쓸쓸하고 海風吹兮蕭颯
고개 마루 구름 처량하여라. 嶺雲鎖兮淒悲
천만년 토록 千齡兮萬代
영령 사모하여 따르리라. 想英靈兮相追隨
수서는 장편 서사시의 말미에서 박제상의 의리 실천 정신과 부인의 충절은 쌍벽을 이루어 세인들로 하여금 추모와 공경심을 일으키게 하고 그 정신 기맥은 천 년을 지나고 만대에 이르기까지 영구불멸의 고귀한 것이라고 매듭지었다. 수서의 이러한 의리 지향 정신의 문학적 표현은 ’산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늙은 말의 발걸음이 마치 한양 길을 가는 것 같다면서 그래도 가야 할 길을 잃지 않고 절의를 지키니 미덥다’고 한 것에서도 포착된다. 그런 점에서 박제상과 부인의 쌍절雙節 절의 정신을 포착한 이 작품은 수서의 문학적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수서의 성리 미학 이념이 수준 높게 이룩된 것으로 평가된다. 수서의 성리학 문화 정착을 염원한 윤리 강상 재정립의 이념적 지향이 집약된 작품이라 하겠다. 이 작품의 의의는 결국 수서의 성리학 문화 정착과 윤리 강상 정립 정신이 투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역시 위에서 검토한 일련의 수서가 지향하는 성리학 관점에서 ‘수신을 통한 정심 지향’․‘효우 실천으로 성리 이념 실천’․‘애민 정서의 형상화’․‘충절 인물 형상과 의미’에 드러난 ‘성리 윤리 실천’까지 아우르는 ‘성리학 이념 지향의 문학적 형상’이라는데 그 의미를 둘 수 있다. 다음 국문 시가에 반영된 그의 성리 철학 이념 지향을 보기로 한다.
5) 「오륜가」의 윤리 강상 정립 정신
수서 시문학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국문 시조를 통해 성리 이념을 계몽하고 학습시켜 성리 질서가 구현되는 사회 건설을 열망했다는 점이다. 이 시조는 수서가 58세 되던 해인 1613년에 지은 것이다. 수서는 그 해 8월에 구만서당이 완공되자 이 시조를 지어 학동들이 노래하며 저마다 행동을 조심하며 경계하도록 교육했다. 한문 원전 해독이 불가능한 주민을 위해 알아듣기 쉬운 한글 시조를 창작했다.
나는 말세의 인심이 날로 각박해 지는 것을 탄식하며 밤에 천장을 올려 보며 생각하건대 옛 성현의 교훈을 배우려 는 자가 물욕에 가려 양심을 잃었다가도 옛 성현이 쓴 글을 펴서 읽어 보고 즉시 두려워 깨닫게 된다. 하지만 성현의 글을 읽고 해독하지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물욕에 휩싸여 결국 하등 인간이 되어 버리니 이는 매우 슬픈 일이다. 때문 에 졸렬한 회포를 써서 「오륜가」를 짓고 세 수의 가사를 덧붙여 착한 일은 권면하고 악한 일은 징계하는 뜻을 보이고 자 지금 이렇게 강론하는 저녁에 외람되게 내어놓으니 원컨대 살펴보시고 채택해 주시기 바랍니다.
속세에 찌들어 양심이 가려졌더라도 성현의 글을 접하면 본래의 양심을 회복할 수 있다. 하지만 원전을 독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성현의 글을 접할 도리가 없다. 해서 양심 회복의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 「오륜가」를 짓고 세 수의 시조를 덧붙여 ‘착한 일은 권면하고 악한 일은 징계한다’는 목적을 두고 이 시조를 창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예문에서 수서의 성리 철학 존중과 성리학 수양을 통한 주민 교화의 열의를 읽을 수 있다. 첫째 수는 ‘어버이 은혜’이다.
한 치도 못 되는 풀이 봄 이슬 맞은 뒤에 寸만도 못ᄒᆞ푸리 봄 이슬 마ᄌᆞᆫ 後에
잎 넓고 줄기 길어 밤낮으로 자라났다. 닙 넙고 줄기 기러 밤자ᄌᆞ로 부러낫다
이 은혜 끝이 없으니 갚을 줄을 몰라라. 인 恩惠 하 罔極ᄒᆞ니 풀 줄을 몰ᄂᆞ라
한 치도 되지 않는 풀이 봄 이슬을 맞아 잎과 줄기가 자라난다. 여기서 ‘봄 이슬’은 ‘어버이 은혜’를 은유한다. 연약한 자식들은 어버이의 지극한 보살핌 속에 생장하지만 어버이 은혜를 망각하고 살아가는 경우는 없는 지 자신을 살펴보라는 교훈적 메시지를 전했다. 작가는 ‘풀’과 ‘봄 이슬’의 비유를 들어 연약한 자식이 어버이의 보살핌을 받아 ‘잎’과 ‘줄기’가 성장해 가는 과정처럼 자식들이 성숙해 가는 과정을 쉽게 비유했다. 일반 백성 누구라고 공감하며 쉽게 이해시키도록 비유와 상징을 동원해 부모님 은덕을 설명했다. 이처럼 자식을 애지중지 길러 준 어버이 은혜를 망각하는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논지를 드러내면서 부모에게 효성을 다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제시했다. 둘째 수는 ‘임금님 은혜’이다.
임금님 날 먹이시고 임금님 날 입히시니 이님이 머기시고 이님이 입피시니
아무리 어려운들 임금님 덕 잊을쏘냐. 十生九死ᄒᆞᆫᄃᆞᆯ님의 德을 니ᄌᆞᆯᄂᆞ냐
혹여 이 큰 뜻을 모른다면 머슴이나 다를까. 萬一에 大義을 모ᄅᆞ면 厮養이나 다ᄅᆞ랴
주상을 만백성의 어버이로 설정하여 주상께서 먹이고 입힌 은덕을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나라님의 존재 의미를 명확히 인식시키며 아무리 나라 형편이 어렵더라도 임금님의 덕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는 점을 경각시켰다. 아울러 나라님에 덕을 잊어버리면 무지렁이 머슴과 다를 바 없다면서 신료로서 ‘충의’를 다할 것을 당부한다. 일반 백성들이 나라를 위해 ‘충의’를 다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논리 이면에는 임금으로 백성들과 나라의 안녕을 책임 지우고 그 책무를 강조하는 메시지도 다분히 함유되어 있다. 결국 수서는 왕의 책무를 강조하는 동시에 백성들로 하여금 군주를 신뢰하고 든든한 힘이 되어 주는 역할 수행을 강조함으로써 ‘군주’와 ‘신료’의 공존 방식은 상호 강상綱常과 윤리 질서 확립을 통한 덕치 실현에 있다고 보았다. 수서는 강상과 윤리 질서의 회복이 바람직한 성리학 질서가 균형을 이룬 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셋째 수는 ‘부부 사랑 노래’이다.
두 성씨 한데 모여 함께 늙어 죽자 하니 두 姓이 ᄒᆞᆫᄃᆞ모다 함ᄁᆞ 늘거 죽쟈ᄒᆞ니
끈끈한 정분이야 이보다 더하려마는 百年情好야 이예셔 더랴마ᄂᆞᆫ
그래도 공경할 줄 모르면 물수리 금실 배워라. 그려도 恭敬ᄒᆞᆯ 줄 모ᄅᆞ면 雎鳩 아니 인ᄂᆞ냐
각각 남남의 두 성씨가 만나 해로하기를 다짐했으니 이보다 더 큰 정분은 기대하기 어려운 법인데 서로가 공경하며 인격을 존중해 나가야 함을 강조했다. ‘물수리’를 들어 부부 사이 금슬을 회복하고 부부애를 돈독히 할 것을 주지시켰다. ‘물수리’는 암수가 서로 만나면 날개를 편 채 휘돌며 정겹게 지내다가 떨어지면 서로 다른 곳에 처하는 ‘친밀’하면서도 ‘분별’을 유지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 때문에 시인은 ‘부부’는 지극히 ‘친밀’하면서도 ‘공경’과 ‘분별력’을 지닌 관계라는 것을 명시한다. 상호 인격을 존중하며 ‘애정’과 ‘존중’을 병행하여 아름다운 부부 관계를 지속해 나가야 함을 강조했다. 넷째 수는 ‘형제 사랑 노래’이다.
먼저 나고 후에 나고 순서야 다를지라도 몬져 나니 後에 나니 次序야 다ᄅᆞᆯ 지라도
앞뒤로 매달려 한 젖 먹고 자라났다. 압뒤혜 매달려 한압뒤혜 ᄃᆞᆯ녀셔 한 져 기러낫다
사람이 이 뜻을 모르면 금수만도 못하리라. 사ᄅᆞᆷ이 이뜻들 모라면 禽獸마도 못ᄒᆞ리
먼저 태어나고 뒤에 태어나는 차이는 있겠지만 한 어머니 젖가슴에 매달려 같은 모유를 먹고 자란 한 핏줄임을 강조하면서 우애를 권고했다. 사람으로 이러한 도리를 저버린다면 금수보다 못한 하등 인간이라고 질책하였다. 형제는 한 부모의 핏줄을 이어 받고 어머니의 체온을 느끼며 모유를 먹고 자랐기에 생명의 근원이 같다. 이렇게 정해진 동기간에 우애를 잊어버리는 행위는 금수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형제 사이에 우애를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다닥다닥 친하게 붙은 꽃인 ‘상체常棣’는 ‘형제’를 비유한다. 형제간의 두터운 정을 아가위 꽃이 활짝 피었다는 데에서 ‘체악지정棣卾之情’이라고 한다. 이밖에 형제를 나타내는 표현으로는 ‘한 몸에 난 팔과 다리’라는 데에서 ‘수족手足’이라 한다. 형제가 서로 화합하여 가는 모습이 ‘기러기와 같다[行則雁行]’는 데에서 ‘안항雁行’이라고도 하며 나무에 비유하여 ‘같은 뿌리에서 나오는 서로 다른 가지[同根異枝]’라는 데에서 ‘동근同根’이라고 한다. 또한 물에 비유하여 ‘근원을 같이하되 흐름이 다르다[同源異流]’고 하여 ‘동원同源’이라고도 하며 밥을 먹을 때 ‘같은 밥상에서 먹고 자랐다[食則同牀]’는 데에서 ‘동상同牀’이라고도 한다. 다섯 째 수는 ‘벗 사랑의 노래’이다.
남으로 태어나 이토록 친밀할까? 남으로 삼긴 거시 이ᄃᆞ도록 親厚ᄒᆞᆯ샤
술잔 잡고 말할 때 어깨만 두드리랴 술 잡고 말 ᄒᆞᆯ졔 억게만 두드리랴
아무리 세상 변해도 벗의 믿음 잊지 마라. 桑田이 바닷물 되어도 信을 닛디 마로리라
남남으로 태어나 이렇게 친밀한 관계는 없다. 술잔을 기울이며 다정스런 우정이 담긴 말을 주고받으면 그 소중한 벗의 믿음은 참으로 소중하다. 상전벽해의 세월이 흐르고 인심이 변해 간다 해도 ‘우정’은 변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임을 강조했다. 이제 위에서 언급한 ‘오륜’을 요약하면, 부모님을 향한 ‘효행孝行’․군주 사이에 지녀야 할 ‘충의忠義’․부부 사이에 간직해야 할 ‘공경恭敬’․형제간의 ‘우애友愛’․친구 사이에 간직해야 할 ‘신의信義’이다. 이제 남은 세 수를 보기로 한다. 여섯 째 수는 ‘인간의 도리 지키기’이다.
당우 나라 망하고 한당송 이었으니 唐虞 머러디고 漢唐宋이 니어시니
세월 흘러가면 세도는 변하는 것이라. 天地 오라거니 世道 아니 變ᄒᆞᆯ너냐
그래도 사람이면 오륜을 익혀라. 그려도 닐곱 구모 가자시니 五倫이야 모ᄅᆞ랴
세월이 흘러가고 인심이 변해도 사람으로 지켜나가야 할 도리를 잊지는 말아야 한다. 중국의 역사 변천 과정을 언급하면서 세월의 변천과 함께 세도 역시 변질되어가는 것이 당연한 현상이다. 하지만 인간으로 지켜야 할 도리는 이것과 무관하게 지켜져야 할 소중한 것이다. ‘당우唐虞’는 ‘도당씨陶唐氏’와 ‘유우씨有虞氏’를 함께 부르는 것으로 곧 ‘요순堯舜 시대’를 의미한다. 중국 대표적인 태평성세였던 성군 요․순 임금의 시대를 지나 한漢나라(BC.2020-AD.220)․당唐나라(618-907)․송宋나라(960-1279)를 이어왔다고 하면서 유구한 역사 가운데 흥망성쇠의 반복 가운데 세도의 변화가 변화무쌍했던 점을 회고하였다. 그런 반면에 인간으로 지켜야 할 도리인 오륜을 바로 배워 실천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일곱 째 수는 ‘궁핍해도 배우기를 힘쓰자’는 내용이다.
옷과 밥이 부족하니 에의 차릴 겨를 없어 옷밥이 不足ᄒᆞ니 禮義 ᄎᆞ릴 겨를 업셔
글방도 서당도 필요 없다 여기느냐. 家塾黨序을 不關이 너기ᄂᆞ냐
그래도 보고 들으면 배울 이 있으리라. 그려도 보고 들으면 ᄇᆞ호리 이시리
의식주가 부족하면 예의와 염치를 차릴 겨를이 없어 글 배울 필요조차 없다고 여기는 것에 대한 반박이다. 아무리 궁핍한 상황이 주어지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인간의 도리를 깨닫고 배우는 과정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즉, ‘경제적으로 빈곤하다고 해서 예의 차릴 엄두를 내지 못하며, 집의 글방과 마을의 서당조차 필요 없다고 하느냐?’고 호통함으로써 가르침을 통해 얻는 교육의 유의미한 효과를 긍정하고 있다. 교육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역설했다.
수서는 1605년 문과에 급제하여 1608년에 예안현감禮安縣監에 제수되고 5년 뒤 경상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에 노모를 봉양하고자 향리에 돌아와 후진 교육과 저술 활동에 전념했다. 몽매한 주민들을 위해 권호신權好臣·금복고琴復古 등과 함께 구만龜灣에 서당을 지어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향약을 규정하여 주민들을 계도하였다. 아울러 「십물잠十勿箴」을 지어 사람들의 마음을 경계시켰다. 그래서 수서는 동지들과 힘을 모아 ‘구만서당’을 창건하여 후학을 지도하며 계도했다. 현실 제반 조건이 열악할 지라도 교육적 환경 조성과 교육 시혜를 멈출 수 없다고 천명했다. 그런 점에서 수서는 훌륭한 교육 철학을 지닌 교육자였다. 여덟째 수는 ‘이웃끼리 화목하게 지내기’ 노래이다.
이웃을 미워마라 이웃 미우면 갈 데 없나니 이우즐 미이디 마라 이웃 미오면 갈데 없서
한 고을 피폐하고 한 나라 기울 것이라. 一鄕이 ᄇᆞ리고 一國이 다 ᄇᆞ리리
백 년도 못살 인생이니 화합하며 살지니라. 百年도 못살 人生이 그러그러 엇뎌리
이웃을 미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이웃과의 관계 개선과 신뢰 회복이 소중함을 일깨웠다. 마을 단위의 화합과 단결 정신이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했다. 마을의 신뢰 회복과 공동 번영 추구 의지가 결집되면 곧 한 고을 번영의 기반이 되고 이는 결국 한 나라 발전의 기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백 년도 못살 인생인 만큼 상호 화합하며 신뢰를 회복해 나가는 것이 매우 긴요한 문제이다. 개인 가정의 윤리 덕목인 ‘효’에서 이제 이 작품을 마무리하면서 ‘우리’ 라는 공동체 연대 의식 구도 속에서 ‘공동 번영’과 ‘공동 화합’의 결속을 다짐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개인과 가정에서 유교 성리학 질서의 구축과 이에 대한 완비는 종국적으로 사회 번영과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여 함께 번영하는 성리학 질서가 개화된 세상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한 세상의 도래를 염원하면서 수서는 생활 전반에 걸친 윤리 강상 회복을 통한 건전한 유교 성리학 문화가 이룩된 조선의 건설을 염원했다. 다음 수서 시문학이 갖는 의의를 정리해 보기로 한다.
6) 수서 시문학의 함의
위의 수서 시문학 전개 양상을 통해 ‘효우를 통한 수신의 실천’․‘수신과 근신을 통한 정심의 추구’․‘국문 시조 「오륜가」에 반영된 윤리강상 수립 정신’․‘애민 정서의 형상화’․‘기절 인물 형상화’를 정리했다. 결국 수서 시문학의 특성은 ‘성리 이념 지향의 형상화’라고 요약된다. 수서는 개인적 ‘수신’ 개념을 확대하여 ‘윤리 실천’․‘애민’․‘의리 인물의 형상화’를 했다. 그러므로 이들 명제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동일 선상의 개념 확대’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수서의 성리학 이념 추구 의지가 시문학을 통해 이처럼 확대 표현된 것이다.
이러한 수서의 성리 지향 정신은 「잠명箴銘」에 집약되어 있다. 「자경잠自警箴」에서 마음이 외부 요인에 의해 요동됨이 없어야 함을 강조했다. 「자서잠自誓箴」에서 빈천貧賤에 대해 거이사명居易俟命하기를 다짐했다. 「일호암잠병서一壺菴箴幷序」에서 암자 칭호에서 병 입구가 작은 것처럼 말조심을 해야 난세를 현명하게 살아간다는 원리를 터득했다. 「전판명剪板銘」은 송판 자르는데 먹줄에 따라 바르게 켜지는 것처럼 사람은 경敬과 의義를 표준으로 자신을 바르게 세워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패 따라 반듯하게 하고 隨準而方
먹줄 따라 곧아지게 한다네. 從繩而直
물건도 그러한데 사람이야 더 심하니 物則然人爲甚
공경과 의리로 스스로 삼가야 하리. 盍敬義以自飭
목수가 목재 공정을 심성 수양 과정에 적용시켰다. 먼저 대패로 울퉁불퉁한 나무 표면을 매끄럽게 처리하고 이어 나무를 바르게 톱으로 썰어내는 데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먹줄을 바르게 튕기는 것이다. 목수가 먹줄을 바르게 튕김으로써 형성된 먹줄에 따라 바르게 나무를 켤 수 있다. 목제 제작 과정을 심성 수양에 빗대어 사람의 심성을 바르게 하는 과정에서 ‘공경’에 주력하는 ‘거경생활’과 ‘의리실천’의 노력을 반복해야 한다. 이러한 수서의 성리학 정진 의지는 스스로 경계하는 글을 지었다는 「자경문自警文」에도 보인다. “오는 것이 맹분과 하육 같을 라도 거역하지 못하고, 가는 것이 석가여래 같을 지라도 오히려 미칠 수 있다. 오고가는 것이 무상하여 아득히 가슴 속에 오가지 않으면 나 역시 성현의 경지로 돌아갈 것을 기대하겠네.”라고 했다. 수서의 성리 지향 이념의 구체적 실상은 「십물잠十勿箴」에서 실천 강령으로 제시된다.
어버이 뜻 어기지 말지니 勿違親志
증자의 가르침 어기는 죄인되리. 曾之罪人
우애 저버리지 말지니 勿替友于
상처럼 인륜 거역한 사례되리. 象之悖倫
자포자기 말지니 勿自暴棄
낮고 어리석음 벗어나지 못하리. 下愚不移
조상 제사 잊지 말지니 勿忘祭祀
갈백 같은 위인이 되리니. 葛伯同歸
임금의 무능 탓하지 말지니 勿謂不能
우리 임금의 적이 되리라. 吾君之賊
권귀에게 빌붙지 말지니 勿附權貴
내혜 같은 위인이 된리라. 來惠之匹
손해 되는 벗 사귀지 말지니 勿近損友
따르다보면 무너지게 되리라. 從之如崩
활쏘기 즐기지 말지니 勿逐佩鞢
추한 것 벗이 되리라. 麤雜爲朋
장기 바둑 즐기지 말지니 勿事博奕
돼지 기르는 종이 될 터. 牧猪之奴
윗사람 섬기기 게을리 말지니 勿怠供上
벌 개미만도 못하게 되리니. 蜂蟻不如
수서는 57세(1611)에 마을의 아이들이 배울 만한 곳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도은 권호신․송음 금복고․생원 이흥문과 서당 신축을 기획하여 이듬해 8월에 구만서당을 완공했다. 「오륜가」를 지어 어린 학동이 경계시켰으며 위의 「십물잠」을 지어 고을 사람들의 마음을 교화시켰다. 이처럼 수서는 자신을 경계하는 의미를 확대해 동기간이나 후학들에게 권면하는 열 가지 조목을 통해 유교적 질서의 실천을 강조했다. 첫째 부모에게 효도하기를 권면하였다. 증자曾子(BC505-436)의 가르침을 따라 어버이에게 효도하기를 권고했다. 증자는 공자의 문하생이며 대학大學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대학大學은 예기禮記의 한 부분이며 사서四書 가운데 하나이다. 증자는 이 책에서 유가儒家의 주요 덕목인 ‘충忠’과 ‘서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유가에서 강조하는 ‘효孝’를 재확립하는데 힘썼다. “부모를 기리고 부모를 등한시하지 않으며 부모를 부양한다”고 하여 효를 세 단계로 열거했다. 어버이에게 불효하게 되면 증자의 가르침을 어기고 증자의 사상을 저버리는 행위라고 함으로써 효의 절대 가치와 우위를 강조했다.
둘째 형제 사이의 우애를 강조했다. 순舜 임금 시절에 배다른 동생으로 순임금을 살해하려고 했던 상象을 들어 그러한 악행을 일삼는 무리는 되지 말라고 했다. 순은 전욱 고양의 후손으로 성은 ‘우虞’, 이름은 ‘중화重華’이다. ‘우순虞舜’ 또는 ‘제순유우帝舜有虞’로도 불린다. 제왕의 후손이나 여러 대를 거치면서 지위가 낮은 서민이 되어 가난하게 살았다. 부친 ‘고수瞽叟’는 장님으로, 순의 모친이 사망한 후 계비를 들여 아들 ‘상象’을 낳았다. 고수는 상을 편애하여 순을 죽이고자 하였다. 순은 부모가 죄를 짓지 않도록 하려고 이 위기를 잘 피하면서 효도를 다하였다. 20세 때 효자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30세에 요가 순을 후계자로 삼고자 순을 시험하기 위해 여러 가지 임무를 맡기고 두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순이 여러 임무를 잘 수행하고 두 딸과의 가정생활도 원만하자 요는 순을 등용하여 천하의 일을 맡겼다. 순은 선대 제왕들의 신하들의 후손을 찾아 적재적소에 임명하였으며 악한 후손은 멀리 변방으로 유배시켜 악인을 징계하였다. 수서는 이런 역사 배경을 지닌 점을 유의하면서 형제의 우애를 강조하며 우애를 손상시키지 말아야 할 것임을 경계시켰다.
셋째 자포자기의 인물이 되지 말라고 했다. 주어진 현실 여건을 극복하고 난관을 극복해 나가길 당부한다. 자포자기는 스스로를 해치고 스스로를 버려 결국에는 절망에 빠져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을 말한다. 에에 대한 출전은 맹자孟子이다. “스스로 자기를 해치는 사람과 함께 이야기할 수 없다. 스스로 자기를 버리는 사람과 함께 일할 수 없다. 말로 예의를 비난하는 것을 스스로 자기를 해치는 것을 ‘자포自暴’라고 하며, 내 몸이 인仁에 거하고 의義에 따르지 못하는 것을 스스로를 버리는 것을 ‘자기自棄’라고 한다. 인은 사람의 편안한 집이고 의는 사람의 올바른 길이다. 편안한 집을 비워 두고 살지 않고 바른 길을 버리고 행하지 않으니 안타깝다.” 이는 맹자가 강조한 말로 ‘자포’와 ‘자기’가 합해져 ‘자포자기’가 되었다. ‘자포자기’하는 사람은 어리석고 품계 역시 낮은 등급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넷째 조상 제사를 폐기하는 ‘갈백葛伯’ 같은 무례를 범하지 말라고 했다. 갈백은 상商나라 때 사람으로 희姬씨 성을 가진 제후소국의 국군國君이었다. 탕도湯都인 박亳과 이웃해 있었다. 성격이 광방불기狂放不羈했으며 예법을 존중하지 않았다.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자 탕 임금이 토벌했다. 이때부터 탕 임금이 사방을 정토征討하기 시작했
다. 조상 제사까지 폐기하는 갈백 같은 위인으로 패행을 일삼아서는 결코 용인될 수 없다면서 조상 추모를 강조했다. 이는 ‘신종추원愼終追遠’의 의미를 띈 것으로 ‘부모의 장례를 엄숙히 하고 조상의 제사를 정성스레 올린다’는 의미와 통한다. ‘신종愼終’은 ‘부모의 임종을 신중히 하다’라는 말로 ‘장례를 극진하게 모신다’는 뜻이다. ‘추원追遠’은 ‘먼 조상을 추모한다’는 뜻으로 ‘정성스럽게 제사를 올린다’는 뜻이다. 이는 결국 유교에서 효의 연장으로 ‘장례’와 ‘제례’를 강조한 말이다. 그러한 유교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말고 각별히 이행해 갈 것을 주문한 것이다.
다섯째 임금의 무능함을 비방하는 행동을 하지 말라고 했다. 여섯째 권귀들에게 아첨하고 빌붙는 행위를 삼가라고 했다. ‘내혜’와 같은 위인이 되어 역사상 오명을 남기게 된다고 했다. 일곱째 손해가 되는 벗을 사귀지 말라고 당부했다. 유익한 벗과 교유를 통해 유익을 더하는 계기를 삼으라고 했다. 이는 공자가 언급한 ‘무우불여기자友不如己者’에 근거한 것으로, ‘자기보다 재능이나 재산이 못하거나 신분이 낮은 사람을 벗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행실이 바르지 못하고 생각이 건전하지 못한 친구를 벗하려고 하지 말라’라는 의미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유익한 친구’로 ‘정직한 벗’․‘신의 있는 벗’․‘견문이 있는 벗’을 들었고, ‘해로운 친구’로 ‘겉치레만하고 곧지 못한 벗’․‘아첨 잘 하는 벗’․‘빈 말 잘하는 벗’을 들었다. 여덟째 활 쏘는 일을 일삼지 말라고 했다. 아홉째는 장기와 바둑을 즐기지 말라고 했다. 돼지 기르는 종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다. 열 번째는 윗사람을 법도에 따라 공경하며 순종하라고 했다.
이처럼 수서는 유교적 실천 윤리를 조목조목 설명하면서 그러한 윤리와 도덕이 회복된 선비의 나라를 염원했다. 실제로 그는 이러한 실천 덕목을 근거로 실천하며 교화와 도덕적 회복과 양심의 실천을 위해 솔선했던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수서는 단아한 선비요 성리학을 실천하며 토착화를 위해 헌신했던 인물로 평가된다.
수서는 시종 성리 이념의 재무장을 통해 온 고을과 나라 민심을 통합하여 성리학 이념 토착화와 성리 문화의 만개가 이루어진 선비의 나라 조선의 건설을 염원했다. 그런 데서 수서 시문학의 고유한 의의를 찾아내야 하고 그러한 수서의 내면 심리 정서를 파악해 내는 것이 수서 시문학 이해의 관건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수서 시문학의 함의는 결국 ‘성리 실천 의식의 문학적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Ⅴ. 시문학 표현 미학
수서의 시문학 창작 능력은 매우 탁월하다. 그는 타고난 시적 감수성이 탁월했으며 사물을 예리하게 관찰하여 시에 담아내는 능력이 남달랐다. 그러한 문예 창작 역량이 시문학 표현 과정에서 다양한 표현 기법 구사로 가시화된다. 시 창작에 대한 그의 생각을 보기로 한다.
1) 시 창작 정신
그는 시 창작 과정에서 공력을 기울이고 심혈을 쏟아낼 때 훌륭한 시 작품이 생산된다고 하였다. 객관 사물에 대한 흥감을 시적 감수성과 결부시키되 치열한 문예 창작 정신을 발휘해서 훌륭한 시 작품을 남겨야 한다는 논리이다.
시원하지 않은 막걸리 마시기 어렵고 杯醪非冽不過喉
힘써 운 얻지 못하면 시 짓지 못해. 得韻非强不作詩
곁의 벗은 늙은이 버릇 알지 못하고 傍人不識衰翁癖
술잔 잡고 시 논하며 어리석다 말하네. 把酒論詩謂我癡
막걸리 마시는 비유를 하였다. 막걸리가 시원해야 목에 잘 넘어가듯이 시를 짓는 데도 적절한 ‘운자’를 얻어야 원만한 시작 활동이 가능하다고 전제하였다. 그러한 시 창작 논리를 터득한 그의 의중을 알 턱이 없는 이웃 영감의 핀잔이 쏟아진다. 이 시에서 수서의 시 창작 정신이 간명하게 드러난다. 시 창작에서 ‘흥감’에 따라 시를 짓되 객관 대상과 상황에 맞게 ‘운자’를 선택하여 안배함으로써 보다 우수한 시문학 작품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하게 시구를 안배하거나 기교를 부리는 것은 삼가야 한다.
쓸개와 간 토하듯 참으로 괴로운 법 吐腎彫肝幾許苦
구법 안배하되 진부한 말 피해야 하리. 按排句法避陣言
거문고 줄 끊어지면 아교로도 붙이지 못해 古琴絃絶膠難續
옥의 티 감추려고 다듬다보면 흔적 드러나. 良玉藏瑕琢見痕
시 창작에서 심혈을 쏟아 내는 작업의 과정이 수반되어야 우수한 시 작품이 태어난다는 논리를 개진했다. 훌륭한 시를 만들기 위한 작가의 노력을 ‘쓸개를 토하고 간에 무늬를 새긴다’고 비유함으로써 시 창작에서 정신을 집중하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서 주옥같은 시작품을 탄생시킨다. 이는 흡사 산모가 모진 산통 끝에 아기를 탄생시키는 것과 같다. 이러한 과정에서 ‘참신하고 독창적인 시어를 안배’해야 하며 ‘기존의 상투적이고 진부한 표현을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아교풀로 붙인 흔적’이나 ‘옥에 있는 작은 티’도 없어야 훌륭한 시가 완성될 수 있다고 하였다. ‘다듬고 꾸민 흔적이 없어야 훌륭한 시 작품’이라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인간의 성정이 표현되고 진솔한 문학적 정감이 표현될 때 우수한 시 작품이라고 평가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이 시에 수서의 시문학 정신이 집약되어 있다. 첫째 ‘치열한 시 창작 과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투철한 작가 정신의 반영과 함께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시구 안배 과정에서 ‘진부한 표현을 벗어나 참신한 표현’ 추구를 통해 시의 생명력을 살려내야 한다고 했다. 셋째 ‘수식과 과장의 꾸밈이 없는 자연스러운 성정과 정감의 표현’이 절실하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다음과 같은 자연스러운 시가 이뤄질 수 있다.
샘물처럼 묘한 생각 떠올라 의경에 이르고 妙思泉涓知得意
공교롭기 바라잖아도 스스로 음률 이룬다네. 自成音律不須工
가을 강가에 붉은 꽃 피고 朱華秀出秋江上
여름 빗속에 푸른 대숲 빽빽해지네. 綠竹森抽夏雨中
이러한 시작품 창작 과정을 거쳐서 이룩된 시세계는 작가의 무한한 상상력과 시적 감흥이 충일해져서 기묘한 시상이 샘물처럼 쏟아져 나온다. 즉, ‘오묘한 생각이 샘물처럼 솟아나 의경意境에 이르러 굳이 공력을 들이지 않아도 저절로 음률을 이루’는 경지에 도달한다. 때문에 이렇게 지어진 시는 음률에 부합되어 감미로움을 더한다. 굳이 공교로움을 추구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시가 완성된다. 그러한 시 작품은 ‘가을 강가에 붉게 핀 꽃’처럼 아름답고 ‘비 내리는 가운데 푸른 대나무 푸른 싹트는’ 이른바 생명이 충만한 시로 가치를 지닌다. 이처럼 수서는 ‘시론詩論’을 통해 ‘치열한 창작 정신 발휘’에 근거한 ‘참신한 표현’을 통해 ‘자연스런 음률의 시 탄생’을 강조했다. 이제 작품을 통해 수서의 표현 미학을 검토하기로 한다.
2) 농촌 서정의 표현
서경 묘사에 드러난 심미 의식이다. 농촌 자연 경관에서 체감하는 시인의 감미로운 서정 표현이 많다. 이러한 시각은 단풍을 성성이 피에 비유한 데서도 드러난다.
그 누가 만 점 성성이 피를 가져와 誰將萬點猩猩血
가을 산 나무마다 단풍들게 뿌렸나. 遍洒秋山樹樹楓
사람들 조물주 신기한 공 알지 못해 造化神功人不識
형용을 부질없이 화공에 비유한다네. 形容謾比畵圖工
가을 산 화려하게 붉은 단풍을 바라보는 시인의 가슴도 붉게 탄다. 마음도 몸도 단풍과 동화되고 말았다. 붉은 정열 같은 덩어리가 가슴에 박힌 느낌을 받았을 터이다. 온 산에 붉게 물든 단풍을 보노라니 시인은 절로 흥분 상태에 몰입하고 말았다. 단풍마다 곱게 핀 잎을 보면서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붉게 물든 단풍은 성성이 피처럼 강렬하여 시인의 시각을 자극했다. 누군가 성성이 피를 온 산에 골고루 뿌린 것처럼 붉고 곱게 치장한 단풍 속에서 황홀감에 젖어 행복을 누린다. 세인들은 재능을 발휘해 이런 풍광을 그려낸 화공의 솜씨를 자랑하지만 자신은 그 이전에 이러한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빚은 조물주의 위대한 솜씨를 상기한다. 수서의 자연 경관 묘사와 지연 친애 사상이 복합된 작품이다. 다음은 농촌 목가 서정에 바탕으로 둔 청각과 시각 심상이 배합된 작품이다.
우수수 낙엽이 높은 나무에서 떨어지니 落葉簫簫下長梢
섬돌 낙엽 쓰는 소리 빗자루에 담겼네. 秋聲正在掃階箒
밤 비 내려 이끼 산뜻하게 씻겼고 新苔淨洗夜雨餘
새벽 서리 내려 늦가을 국화 고와라. 晩菊嬋娟曉霜後
흥겨운 시인의 시상 절로 맑아지니 幽人意思自淸越
석양에 홀로 앞 단에 우두커니 서있네. 日暮獨立前壇久
가을바람이 불어 높은 나무 가지에 매달린 나뭇잎을 떨어뜨린다. 하지만 스산한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고운 심상과 맑은 서정이 균형을 이뤄 낙엽 지는 가을이지만 상큼하고 고운 정감을 느끼게 하였다. 낙엽이 지고 빗자루로 낙엽을 쓸어내는 소리마저 정겹다. 낙엽 지는 소리와 낙엽을 쓸어 담는 대나무 빗자루의 청각 이미지가 밝은 시상을 유인한다. 이어 비가 내려 선명하게 씻긴 이끼와 섬돌의 고아한 자태 묘사도 퍽 아름답다. 섬돌과 이끼의 푸른 색상이 어울려 멋스러운 색감을 드러낸다. 이를 주시하던 시인의 가슴도 상큼해진다. 서리 맞은 노란 국화의 색감도 곱다. ‘흰 서리’와 ‘노란 국화’의 색상 배합으로 시각 이미지는 더욱 청아해진다. 이에 시인의 시상이 맑아져 시적 흥취가 고조되어 황혼 무렵 단에 홀로 서서 가을 정취를 만끽하고 있다. 잔잔한 시상 전개와 함께 청각․시각적 조화를 이룬 작품이다. 수서의 표현 미감이 탁월하게 성취되었다. 다음은 단풍과 어우러진 암벽의 자태를 형상한 작품이다.
모두 옥 세워놓은 듯 앞에 있어 좋다지만 人言玉立宜前案
난 채색 병풍으로 변하는 가을 풍경 좋아라. 我愛秋容幻彩屛
등나무 잎 언덕 뿌연 것 푸르게 감싸고 藤葉翠籠崩岸白
단풍 꽃 늙은 솔 푸르고 붉게 비치네. 楓花紅暎老松靑
새벽 안개 걷혀 쪽진 머리 더욱 솟아나고 薄暮烟凝態滿形
백 년 동안 오래 말없는 벗이 되어 長作百年無語伴
고운 기상 자주 보니 마음이 상쾌해져. 慣看佳氣爽襟靈
일반인과 미적 감성과 다른 수서의 심미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세인은 암벽의 우람한 모습만 보고 가슴 뿌듯해 하지만 수서는 절기마다 변하는 암벽의 역동적 변화의 풍광을 즐긴다. 그렇다고 해서 수서가 암벽의 웅장한 자태를 도외시한 것은 아니다. 일반인의 시각이 정적인 것에 비해 수서의 미감 의식은 동적이며 계절 따라 변하는 만물의 자태를 미학적으로 수용한다는 차원이다. 가을이 되어 채색 병풍처럼 아름답게 펼쳐지는 자연 경관을 즐겨 감상한다. 등나무 잎의 푸른 색상은 무너져 내린 언덕을 감싸 암벽 전체가 푸른 바탕을 조성한다. 푸르고 흰 색이 조화되어 우람한 암벽의 위세를 강조하는가 하면 신선한 이미지도 부각되었다. 이어 단풍의 붉은 자태와 푸른 소나무 색상의 대조적 배치로 색감을 미적으로 재현해 내었다. 적절한 색상 배치와 유동적 시상 전개로 안개가 걷힌 산 정상의 위용도 드러냈다. 이처럼 수서가 네 계절 고유의 빛을 드러내는 암벽 모습에 매료되어 말없이 교유하기에 흉금이 상쾌해 진다. 암벽의 유동적 미감을 색상 배치를 거쳐 미학적으로 그려내었다. 산수자연 미감을 체득한 시인은 전원적인 멋의 경지도 한껏 누린다.
새벽에 일어나 사립문 열었더니 曉起啓寒扉
저물녘 구름은 해 무리 감추네. 雲歸秘日暉
연못 개구리 비 오자 울어대고 池蛙迎雨聒
산새는 갠 빛을 따라 날고 있네. 山鳥帶晴飛
상에 오른 미나리 향기롭고 연하고 登箸芹芳軟
광주리 가득한 고사리 살이 졌구나. 盈筐蕨正肥
한거의 즐거움 여기 있나니 閑居樂在此
더욱 믿고 어김없기 바랄뿐. 益信願無違
전원 취향의 미감이 반영된 작품이다. 새벽부터 저물 때까지 전개된 농촌 목가적 정서를 충실히 반영하였다. 새벽 일찍 일어나 사립문을 열어 농촌 일상을 시작한다. 비 내린 뒤 연못의 개구리가 합창하여 시골 정경을 흥겹게 하였다. 산새는 비가 갠 뒤에 맑은 산 빛을 뒤로 하여 유유히 날고 있다. 울음 우는 개구리와 날고 있는 산새는 청각․시각 심상이 배합된 구도이다. 상에 오른 미나리는 부드럽고 연해서 향기가 우러나온다. 봄비를 맞아 파릇파릇 자란 고사리를 광주리 가득 꺾어 오는 농민의 마음은 넉넉하다. 미나리의 푸른 색상과 고사리의 짙은 고동색도 시각적 이미지 배치이다. 시인은 이처럼 한가로이 자연에서 지내기에 자연과 동화되어 평화롭고 안정된 삶을 이어가길 희망했다. 그러한 자연과의 약속을 어기지 않기를 다짐한다. 다음 시도 이러한 서정을 그리고 있다.
기이한 바위 절벽 솟아 모래 물가 누르고 奇巖陡起壓沙汀
넝쿨과 잎 층층이 퍼져 파리한 모양 감추네. 蔓葉層敷秘瘦形
붉은 것 냇물에 비쳐 수면은 영롱하고 紅照晴川光滿鏡
비낀 날 맞아 곱게 병풍처럼 단장했네. 彩迎斜日艶粧屛
비단 이불 펼쳐 놓고 보배롭다 자랑 말지니 錦衾重設誰誇寶
성성이 피 짙게 뿌려졌어도 비린내 없네. 猩血濃凝未嗅腥
늙은이 넉넉히 눈 뜨고 감상할 수 있으니 剩得衰翁開老眼
조석으로 바람결에 창 열려도 마다 않네. 不嫌晨暮啓風欞
기암으로 형성된 절벽이 고운 모래 물가에 우뚝 솟아 있다. 넝쿨과 잎이 층층의 울퉁불퉁한 절벽을 감추어 짙푸른 절벽을 선사해 준다. 높게 솟은 절벽과 백사장․비취색 강물은 산뜻한 이미지를 제공하는 시각 심상이다. 검은 절벽과 푸른 색상의 조화 역시 시각적 미감으로 시의 품격을 높여준다. 이어지는 구에서 붉은 단풍이 냇물에 비쳐 아름다운 물결을 이루는 광경을 포착했다. 절벽의 단풍 색감이 강물에 투영되어 강물도 붉게 하는 효과를 더했다. 석양 무렵 곱게 치장한 절벽은 멋스러움을 더했다. ‘붉은 색’․‘비취색’․‘검은색’․‘주황색’이 짙게 채색되어 황혼 무렵 단풍이 올라 검푸르고 붉은 물감들인 것처럼 황홀한 광경을 연출한다. 시인은 석양 무렵에 이렇게 펼쳐진 자연 경관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충실하게 시에 담았다.
이런 시상은 이어지는 시구에서 또렷하게 드러난다. 현재의 이런 광경은 비단 이불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화려하다. 붉은 단풍은 성성이 피와 같이 선명하여 미의 극치를 이룬다. 흡사 성성이 선혈을 뿌려놓은 것으로 착각케 한다. 하지만 ‘성성이 피의 비린내는 느끼지 못한다’고 함으로써 절정인 단풍의 미감을 사실적으로 표현해 내었다. 평온한 전원 속에서 지내는 시인은 무한한 평화와 희열을 누린다. 굳이 사립문을 여닫을 필요도 없다. 바람결에 사립문이 열고 닫히는 것을 그대로 둘 뿐이다. 자연에 귀의한 청고한 은일자로 평화와 자유를 누린다. 일련의 시를 통해 수서의 산수 자연 미감을 엿볼 수 있다. 시에 자연 대상을 핍진하게 그려내되 자연의 생동성을 곁들임으로써 자연을 ‘화석’처럼 피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생명력을 그대로 담아 독자로 하여금 ‘자연의 숨결과 동태’를 체감할 수 있게 했다. 수서의 투철한 시 창작 정신이 작품에 녹아 작품에 생명을 부여하여 살아 있는 시를 생산하였다. 이어 서경 묘사에 드러난 미학적 표현을 보기로 한다.
4) 서경 묘사의 미학
수서는 예리한 필치로 ‘생명력 있는 자연 경관 묘사’․‘시각과 청각적 배합을 통한 작품 구성도 제고’와 ‘사실적 묘사’․‘시간 추이에 따른 치밀 묘사’로 작품 내밀성을 강화했다. 이앙한 벼를 묘사한 작품에 치밀한 묘사력이 드러난다.
약한 줄기 물에 흔들려 거꾸러지고 弱莖搖水栽還倒
짧은 잎 진흙 묻어 빽빽하나 듬성듬성. 短葉黏泥密若疎
앞 들판에 비 내리길 고대하면서 更待前郊新雨遇
한 번 살아보자고 스스로 싹 틔우네. 一番生意自萌于
모내기 현장에서 묘의 성장 상태를 주목하였다. 연약한 줄기는 논에 잠긴 물에 흔들려 중심을 잃고 수면에 곤두박질했다. 짧은 벼의 잎은 진흙에 엉켜 붙어 있다. 이 때문에 논에는 벼의 성장 상태가 매우 듬성듬성해 졌다. 이런 상황 때문에 모내기 현장은 엉망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도저히 벼가 자라나길 기대하기 어려운 것 같이 난감하다. 하지만 한 가닥 희망은 그 와중에 거꾸러진 벼나 진흙에 엉킨 벼에서 새싹이 돋아난다는 것이다. 시인은 벼가 자라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생력으로 버티는 벼의 어여쁜 모습을 클로즈업했다. 이제 비만 오면 물기를 흡수하여 기운차게 살아나리라는 희망을 안겨 주었다. 이 작품 행간에도 수서의 자연 애호 정서가 반영되어 있다. 모내기 현장의 거꾸러진 벼와 진흙에 엉킨 벼를 사실적으로 그려낸 표현력이 탁월하다. 가랑비 내리는 정경 묘사에도 이러한 작가의 창작 정신이 발휘되고 있다.
앞 포구에 구름 몰려와 나무는 빗물 머금고 雲籠前浦樹含滋
진눈깨비 부슬부슬 가늘게 먼 변방 지나가네. 望見飛微度遠陲
오나라 여인 비단 짜듯 가벼운 올이 엷고 吳女職綾輕縷薄
오랑캐 아이 만든 담요처럼 연한 털 드리웠네. 戎兒作罽軟毛垂
거미줄 뚫어 명주실 합한 것 같고 蛛絲穿合明珠細
연잎 두드려 차가운 옥을 만든 게 더디네. 荷葉搏成冷玉遲
냇가 낚시 노인 미끼 끼우기에 정신 팔려 灘上釣翁眈設餌
옷 젖는 줄 모르고 서 있을 때 많구나. 不知衣濕立多時
포구에 부슬비가 내리는 한적한 정경을 담았다. 포구에 구름 기운이 돌자 나무는 이내 물기를 머금었다. 다시 말하면 살짝 비가 내렸다는 표현이다. 그래서 나뭇잎이 저마다 빗물에 젖었다는 의미이다. 이어 진눈깨비가 부슬부슬 내려 스산한 심상을 일으킨다. 진눈깨비 내리는 정경을 매우 섬세하게 그렸다. 진눈깨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모습을 ‘오나라 여인이 짠 비단처럼 올이 엷고 가볍다’고 하였다. 수서의 여성 정감적 표현 미학을 감지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광경을 ‘오랑캐 아이가 짜서 만든 담요 털처럼 부드럽다’고 함으로써 사실적 표현 기법의 우수성을 입증했다. 이어 ‘거미줄과 명주실을 합한 것 같다’고 함으로써 작가의 우수한 창작 기법을 보여주었다.
세밀한 작가의 예술적 안목이 이와 같이 정교한 정감적 한시 창작의 기저가 되었다. 가랑비 내리는 정경 묘사에도 이러한 작가의 창작 정신이 빛난다. 이 작품의 극치는 말미에 있다. 비단결이 내리는 것 같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낚시에 여념이 없는 노인은 연신 미끼를 끼우며 비에 옷이 젖는 것도 잊은 채 서있다. 눈비 내리는 한적한 공간에서 청적미를 즐기는 노인을 형상함으로써 대단원을 이룬다. 진눈깨비의 사실적 묘사와 한적한 시상 전개 및 청적미를 포착한 작가의 창작 능력이 독자에게 무한한 감동을 선사한다. 다음 시간의 추이에 따른 묘사 기법을 보기로 한다. 해지는 광경을 담았다.
대마도 바람 잦은 곳에 배가 연이어 있고 舟連馬島風恬處
부상의 해 뜨는 동쪽에 물결 출렁이네. 浪接扶桑日出東
해 지는 시간에 잠시 올라 눈 여겨 보니 落日登臨開眼路
아득하던 일곱 점이 청동화로처럼 드러나네. 茫茫七點露靑銅
몰운대는 현재 부산광역시 다대동 산144에 위치하며 1972년 6월 26일에 시도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었다. 부산시 중심가에서 남서쪽으로 16km 떨어진 다대곶 동편에 있다. 다대곶 일대는 해류의 영향으로 짙은 안개가 끼어 시야가 자주 가려지기 때문에 ‘몰운대’라 불렀다. 16세기 이전 ‘몰운대’는 섬이었다가 점차 낙동강에서 밀려온 토사가 쌓여 육지와 연결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은 대마도와 가까워 일본과 교역하는 주요 해상로로 이용되었으며 왜구들이 자주 출몰하여 해상 노략질을 일삼던 곳이다. 임란 때 이순신 장군의 선봉장으로서 이곳 앞바다에서 전사한 녹도만호鹿島萬戶 충장공忠壯公 정운鄭運이 이곳 지명을 듣고 ‘운雲’과 ‘운運’ 같은 음인 것을 따라 “내가 이 누대에서 죽을 것이다[我沒此臺]”라고 하였다는 고사가 있으며 정운의 순절을 기리는 유적비가 남아있다.
언덕 전체에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지만 예전에는 동백나무가 울창했던 곳이다. 대마도의 바람 잦아든 곳에 배가 줄지어 늘어서 있다. 동해는 큰 물결로 출렁댄다. 해가 떠오르는 동해 물결이 기운차게 일렁거리고 태양을 빛을 받아 금빛 물결을 일으켰다. 이러한 전제 하에 해가 기우는 시각에 몰운대에 올라 시야에 들어오는 광경을 조망하였다. 황혼에 물든 바다 위로 아득한 일곱 개 섬이 청동화로에 불을 담은 것처럼 붉게 솟아오른다. 해가 넘어가는 시간 추이에 따라 확보된 시야에 펼쳐진 경물을 회화적으로 그려내었다. 이러한 표현 기법은 폭우가 쏟아지는 광경 묘사를 통해 더욱 실감 있게 그려진다.
날던 구름 장대히 동서를 어둡게 하고 飛雲奰贔暗西東
바람도 어지럽게 사정없이 장대비 몰아치네. 雨脚縱橫亂逐風
위엄스런 우렛소리 넓은 들에 떨치고 威化震雷馳廣野
기세 꺾인 은하수 공중에 내리 쏟는 듯해. 勢傾河漢下長空
바다 누비는 고래 이보다 장하다 할 수 없고 奔鯨捲海難爲壯
힘센 장사 산 부러뜨리는 것도 웅장치 못하리. 力士摧山不足雄
갑자기 앞 계곡물 미친 듯 넘쳐흐르더니 忽見前溪狂潦溢
잠깐 사이 멈추어 신기한 모습 보았네. 須臾還解斂神功
폭우를 형성해서 폭우가 진행되기까지 과정을 빠짐없이 그려 내었다. 폭우가 형성되는 과정을 보면 검은 구름이 거센 바람을 따라 검은 일고 순식간에 하늘에 어두움이 깔리고 바람은 인정사정없이 몰아친다. 연이어 우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번개가 번쩍이는 긴박한 상황이 전개된다. 이와 함께 은하수 같은 장대 빗줄기가 거침없이 쏟아진다. 이즈음 힘센 고래라도 그 위세를 견뎌낼 재간이 없다. 힘센 장사가 산을 부러뜨린다는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그 위세는 대단하다. 연이어 쏟아지는 빗줄기가 골짜기로 모여 홍수를 이루는 순간을 포착했다. 수서는 잠시 동안 일어난 자연 현상 앞에 경탄하였다. 시간 추이에 따라 폭우가 형성되어 폭우 직전의 긴박한 상황을 만들더니 급기야 폭우가 쏟아지고 홍수를 발생시키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다음은 눈 내리는 광경을 시간 추이대로 그려낸 것이다.
어디엔가 작은 조각의 구름 일어나더니 一片雲起自何方
잠깐 동안 어지럽게 흩어졌다 이내 뭉쳤네. 頃刻紛紜散還積
하늘 가득 펄펄 흩날리더니 물에 들어가 녹아 漫天亂入水藏白
바람 따라 펄펄 날자 푸른 산 흰 산이네. 逐風飛過山掩碧
처마 뒤엔 솔가지 찢어지는 소리 但聞簷後松落枝
모래 벌 날던 해오라비 뵈질 않네. 不見沙邊鷺振翮
펄펄 내려 삼경 되어도 멈추지 않더니 霏霏未盡夜三更
바위 서쪽 절간의 벽이 반쯤 묻혔구나. 埋却巖西寺半壁
아침 되자 사방 행인이라곤 없는데 朝來四面絶行人
물 긷는 스님 한 분 맨 먼저 발자국 찍네. 汲水孤僧先印跡
나귀 타고 어깨 솟구치던 늙은이 어디 있나 騎驢聳肩翁何在
누워 안개 낀 다리에서 물 긷는 것 모르리. 臥汲煙橋應不識
검은 구름이 일고 눈이 내리고 눈 내린 이후 정경까지 소묘했다. 조각구름이 일어나 어지럽게 흩날리다가 다시 뭉쳐져 눈 뿌릴 채비를 하는 과정을 생동감 있게 그렸다. 이제 본격적으로 눈이 내린다. 하늘에서 펄펄 흩날리며 내리는 눈이 강물에 닿자 금세 녹는 광경을 세밀히 표현했다. 이어 시인의 시선은 산을 향했다. 바람에 따라 나부끼며 내리던 눈이 금방 푸른 산을 백색으로 뒤덮었다. 시간의 변화에 따른 강설의 정경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주목했다. 여태까지 묘사에서 다양한 시각적 이미지의 시어로 가득하다. ‘검은색’․‘흰색’․‘청색’ 시어로 꽉 채웠다. ‘강설을 동반한 먹구름’․‘펄펄 내리는 눈’․‘눈이 닿자마자 녹여버리는 강물’이 그러하다. 이와 함께 유동적 이미지와 촉감 이미지도 동반 작용을 일으켜 시에서 생동감을 증폭시켰다. 이어 소나무 가지가 앉은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부러지는 소리를 담았고 모래 벌에서 유유히 날던 해오라비의 종적을 숨김으로써 청각과 시각 이미지를 배합시켰다.
이로써 눈이 내리는 초기 과정과 수면과 대지에 현시된 제 현상과 미물의 동태를 녹화하듯 담아내는데 성공했다. 강
설 현상은 삼경이 지나도 그치지 않았다. 이에 암자 서쪽 절간의 벽은 절반이 눈 속에 파묻혀 버렸다. 급변하던 시상은 반전되어 평온히 전개된다. 엄청난 양의 눈이 내린 탓에 아침이 되자 사방의 행인들 발길이 끊겼다. 전반부에서 긴박한 상황 전개는 후반부에 이르러 평담하게 전개되어 한적한 미감 표현으로 이어진다. 눈을 헤치고 샘물 길으러 간 스님의 발자국만 눈 위에 찍혀 있다. 당나라 때 정계鄭綮가 파교灞橋의 ‘설경을 지나다가 나귀 등에서 시상詩想이 떠올랐다[詩思在灞陵橋上]’는 고사를 원용하여 굳이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눈앞에 펼쳐진 정경이 곧 시’라는 것임을 자부한다. 그래서 자신은 누운 채 설경을 감상하고 눈 속을 헤치며 물 긷는 스님의 한적한 미적 경지를 시에 절로 담는다며 행복해 한다. 태풍이 지난 뒤에 찾아 온 고요와 평안의 상태이다. 시상의 반전으로 극적 효과를 거두었고 시간 추이의 경물 묘사를 통한 작품 미학이 드러난다. 다음은 풍유를 통한 미학적 표현 양상이다.
4) 풍유의 미학
수서 시문학 표현 기법 가운데 미물에 인격체를 부여해 의인화하여 인정세태를 풍유한다는 점이다. 농촌 주변 사물을 들어 우의적 표현을 통해 작가 의식을 투영하며 세태를 풍자하고 인심을 경계했다. 식물을 의인화하여 풍유적 수법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서리 내린 뒤 귀한 것 드러나니 傲霜方見貴
꽃 보호하느라 왜 그리 분주해. 何事護花煩
애석하게도 이 내 마음을 雖然愛惜意
세인들에게 일일이 말하기 어려워. 難與俗人言
국화는 국화과에 속하는 다년생 초본 식물로 중국이 원산지이다. 조선 세종 때 강희안姜希顔이 지은 양화소록養花小錄에는 ‘고려 충숙왕 때 중국의 천자가 보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음력 9월 9일 중양절에 국화주를 가지고 등고登高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도 9월 9일에 민간에서 국화주를 담가 먹는 풍습이 있었다. 국화는 차나 술로 이용하기도 하고 말려서 베개나 이불에 넣어 향기를 즐긴다. ‘매화’·‘난초’·‘대나무’와 함께 ‘사군자’의 하나이다. 뭇 꽃들이 다투어 피는 봄·여름에 피지 않고 날씨가 차가운 가을에 서리를 맞으면서 홀로 피는 국화의 모습에서 고고한 기품과 절개를 지키는 군자의 모습을 상징해 왔다.
그래서 국화를 ‘오상고절傲霜孤節’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도연명陶淵明이 국화를 가장 사랑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주돈이周敦頤(1017-1073)는 국화를 ‘은일자隱逸者’에 비유했다. 그런 점에서 국화는 군자 가운데서도 ‘은둔하는 선비’의 이미지에 잘 부합된다. 서리가 내리면 세상의 초목은 모두 시들고 마는데 국화는 서리를 맞으면서도 고상한 절개와 은은한 향기를 잃지 않은 절개의 선비 형상을 하고 있다는 점을 극찬했다. 세인들은 저마다 뭇 꽃이 서리에 시들고 햇빛에 손상당할 까 염려하여 보호하느라 급급하지만 국화는 애써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속성이 서리가 와도 견디며 고상한 품위를 지녔기에 애호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여기에 등장한 국화는 고고한 선비 형상 구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선비 형상을 국화를 내세워 은유한 것이다. 난초를 은유한 다음 작품에도 동일한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깊은 골짜기에 자란 난초 蘭生幽谷裏
그 언제 봄 햇빛 받으랴. 何日見陽春
고고한 표상 바꾸지 않으니 孤標猶未改
설경 위 달빛 같은 정신일세. 雪月共精神
난초를 은유한 다음 작품에도 동일한 시각이 함축되었다. 난초는 난초과에 속하는 식물의 총칭으로 일반적으로는 난이라고 한다. 단자엽식물에 속하는 난초과는 국화과·콩과 다음으로 큰 과로 땅에서 자라난다. 나무나 바위 표면에 붙어서 자라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식물에 기생하는 것 등 다양하다. ‘금란’·‘은란’·‘풍란’·‘보춘란’처럼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이나 일본 등지에서 자라는 난초는 ‘동양란’이다. ‘아이리데스’·‘심비디움’·‘카틀레야’·‘반다’와 같이 온실에서 가꾸는 난초는 ‘서양란’이다. 동양란은 잎이 보기 좋고 서양란은 꽃이 크고 호화롭다. 꽃은 꽃잎이 3장으로 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 하나는 아주 발달하여 복잡한 모양을 이룬다. 수서는 위의 시에서 난초가 깊은 골짜기에서 햇빛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지만 고상한 표상은 변함이 없다고 했다. 그 고상한 품위는 설경 속에서 더욱 빛난다. 이 작품 역시 ‘고상한 선비’를 형상하며 은유한 작품이라 하겠다. 난초가 햇살을 받지 않더라도 고고한 품격과 자태를 잃지 않겠다는 것에서 은일을 자처하여 고상하게 살아가는 고절한 선비 형상을 드러내었다. 이는 다음에서 극명히 제시된다.
만 길 봉우리 천 길 절벽에 萬丈之峰千仞壁
공중 능멸하는 무쇠 줄기로 우뚝 서있네. 凌空鐵榦立亭亭
산속에 절로 지켜보는 벗이 있나니 山中自有看渠友
이름 난 정원에서 눈 맞고 서 있지 말지라. 莫向名園冒雪靑
소나무의 속성을 빌어 풍유한 작품이다. ‘소나무’는 ‘솔’·‘솔나무’·‘소오리나무’·‘송松’·‘송목松木’·‘송수松樹’·‘적송赤松’·‘육송陸松’․‘송유송松油松’·‘여송女松’·‘자송雌松’·‘청송靑松’ 등으로도 일컬어진다. 높고 굵게 크는 나무로 우리나라에서는 은행나무 다음으로 큰 몸집을 가지며 큰 것은 높이가 50m에 달한다. 또한 소나무는 은행나무 다음으로 오래 사는 나무로서 장수의 상징인 십장생의 하나로 삼았다. 나무껍질은 대개 위쪽은 적갈색이고 아래는 흑갈색이며 비늘 모양을 하고 있다. 노목은 나무껍질이 두껍고 거북의 등딱지와 같은 모양으로 갈라진다. 이와 함께 소나무는 사 계절 푸른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나무로 그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우뚝한 산 정상 천 길의 절벽에 고고하게 서있어 기품이 늠름한 소나무는 공중을 능멸이라도 하는 듯하다. 검은 몸매는 무쇠 줄기처럼 우람하다. 이러한 품위를 지닌 소나무는 응당 산 속에 있어야 제 품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인간들의 손에 의해 ‘정원수로 뽑혀가 정원에서 눈을 맞고 있는 처량한 신세가 되지는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소나무의 고고한 속성을 들어 산 속에서 고고한 절의를 지키는 것이 본래 타고난 성품대로 사는 것이라고 대변했다. 소나무가 단순한 관상용이 아니라 산수 자연 속에서 고고한 품격을 이어가며 제 수명대로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며 그런 소나무의 속성을 본받을 점이라고 은유하였다. ‘지조’와 ‘절개’를 지키며 고고히 살아가는 것이 선비의 도리요 자세라는 점을 강조했다. 산림처사의 한적하고 고품위 유지의 자세를 칭송한 작품이라 하겠다. 다음은 미물을 의인화해 경계 의식을 담은 작품이다.
가을 태양 따갑게 비쳐 여기저기 후끈거려 秋陽暴照太生溫
청파리 세상 만들려고 그런 건 아닐 텐데. 非爲靑蠅有別恩
종일 웽웽거리며 제멋대로 날지만 竟日飛鳴堪自恣
내일 새벽에 서리 내리면 어떡하니. 豈知明曉隕霜繁
청파리의 속성을 들어 우의적으로 빗댔다. 청파리는 ‘청승靑蠅’ 혹은 ‘금승金蠅’으로 불린다. ‘검정파릿과’에 속하는 곤충으로 광택이 나는 녹색이며 앞과 옆머리는 금빛 가루로 덮여 있다. 썩은 고기나 오물 따위에 모여들어 산란한다. 전염병을 옮기고 한국․중국․러시아 등지에 분포한다. 따가운 가을 햇살 때문에 대지가 달아오른다. 아직 여름이 채 가지 않은 시점이기 때문이다. 그런 날씨 탓에 여전히 청파리가 기승을 부린다. 청파리가 오물에 모여 들고 썩은 육류에 기생하며 전염병까지 옮기는 곤충으로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는 존재이다. 청파리가 종일 민가를 멋대로 날아다니며 해를 끼치기 때문에 이를 반길 이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가을이 곧 지나고 서리가 내리면 녀석은 더 이상 살아남지 못한다. 시인은 ‘청파리’의 방자한 행동은 이내 자연 박멸되고 말 것이지만 ‘청파리’는 겨울이 다가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결국 ‘청파리’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소인배’와 다름 아니다. ‘소인배‘의 일시적으로 기세를 부리지만 조만간 사멸된다는 것을 풍유한 것이다. 다음 ’가짜 학‘에 비유한 작품을 보자.
학이라 이름 붙인 새 한 마리 有鳥鶴爲名
반짝이는 눈으로 멀리 쏘아 보네. 星眸光遠射
한 번 울면 하늘까지 소리 들리니 一鳴聲聞天
듣는 이 어떻게 가짜인 줄 알까. 聞者焉知假
이 시는 수서가 45세(1599) 지은 작품이다. 내암萊菴 정인홍鄭仁弘(1535-1623)이 호를 ‘야학野鶴’이라 하고 위세를 떨던 시대이다. 당시 정인홍은 사헌부 관원으로 재직 중이었는데 영주를 지나게 되었다. 수서는 정인홍의 득세 현실을 분개하며 이 시를 지었다. 정인홍의 본관 서산瑞山이며 자는 덕원德遠, 호는 내암來庵이다. 경남 합천陜川 출신으로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수제자로서 최영경崔永慶·오건吳健·김우옹金宇顒·곽재우郭再祐 등과 함께 경상우도의 ‘남명학파南冥學派’를 대표하였다. 중국에서 ‘학’은 그 고귀한 자태나 하늘을 나는 모습이나 청청한 울음소리로 신선과 관계있는 ‘선금仙禽’으로 보았다. 중국에서 학은 ‘선금’으로서의 신선 취미가 강조되었기 때문인지 설화에 등장하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 수서는 정인홍의 당대에 득세하여 ‘학’의 고고한 속성을 빌어 ‘가짜 학’ 행세를 하는 작태에 분개한 내심을 위의 시에서처럼 우회 표현하였다. ‘반짝이는 눈’과 ‘울음’은 정인홍의 허장성세를 상징한다. 일반인들은 정인홍의 그러한 위장술에 휩쓸려 실체를 깨닫게 되지 못한다고 풍유했다. 다음 ‘지녕초’에도 이러한 풍유 방식이 담겨있다.
요임금 덕 밝아 만물도 요임금 같았고 堯德聰明物亦堯
요임금 죽자 사물도 떠나 간신배 교만 부려. 堯崩物去佞生驕
이제 궁궐 뜰에서 꽃을 피웠지만 如今縱秀王庭畔
사람들 이를 두고 요물이라 말한다네. 衆口囂囂定謂妖
간신배의 득세를 풍유한 작품이다. ‘지녕초指佞草’는 간사하고 아첨하는 사람인 ‘영인佞人’을 가리키는 풀로 ‘굴일초屈軼草’라고도 부른다. ‘요堯’ 임금의 조정에 났던 풀로 영인이 궁궐에 들어오면 잎을 숙여 그 사람을 가리켰다’고 한다. 이에 대한 용례는 헌종憲宗 14년 7월 17일 대사간 서상교가 상소하였다. “…온실의 나무를 말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굴일초屈軼草’가 반드시 이 사람을 가리킬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요임금의 덕치로 인해 만물이 요임금의 어진 덕을 본받아 태평스러운 시절을 맞았다. 하지만 요임금이 서거하고 태평스런 시대도 지나 간신배가 모략과 중상을 일삼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이에 ‘지녕초’마저 간신들이 입궐을 하면 그들을 향해 고개를 기울일 사태가 발생된 것이다. 간신배의 득세를 혐오하는 시각이 반영된 시로 ‘지녕초’의 속성을 들어 간신배의 득세 실태를 고발하고 이를 경계하였다. 다음 작품도 이러한 작가 의식이 투영된 작품이다. 다음은 ’뱁새‘와 ’봉황‘ 설정을 통한 풍유이다.
봉황새 오동나무 가지에 깃들어 鳳凰棲梧桐
깃을 펴서 울며 열매 먹네. 翽翽鳴且食
뱁새는 어떤 새인지 鷦鷯亦何鳥
짹짹 거리며 무리지어 嚶嚶擬同族
쑥대 아래 날면서 欲擧蒿下翼
구름 사이 나는 듯 착각해. 遠向雲間托
봉황에게 부탁컨대 寄言鳳凰群
뱁새처럼 하지 마시길. 莫如黃口逐
일반적으로 ‘뱁새가 봉황을 좇아가는 어리석음을 경계’하는데 여기에서는 ‘뱁새’와 ‘봉황’ 설정으로 ‘봉황이 뱁새의 작태를 따르지 않는다’는 논리를 적용하여 ‘봉황’의 우월한 권위 손상을 우려했다. 뱁새는 ‘오목눈잇과’의 하나로 등은 진한 붉은 갈색이다. 배는 누런 갈색이고 부리는 짧고 꽁지는 길다. 동작이 매우 민첩하고 4월-7월의 번식기를 제외하고는 30-50마리가 떼를 지어 관목 지대나 덩굴 등지에 서식하며 곤충이나 거미를 잡아먹는다. 우리나라에는 흔한 텃새이다. 지나친 욕심을 경계한 ‘뱁새나 굴뚝새 같이 작은 새들이 숲속에 집을 짓는데 나뭇가지 하나면 충분하다’는 명구가 있다. 흔히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진다’는 말도 이와 연관된다. 뱁새 입장에서 ‘현실의 주어진 직분에 만족하면서 분수에 맞게 살아가는 처세를 강조한 말’이다.
하지만 수서는 봉황의 입장을 견지한다. 봉황鳳凰은 동아시아의 신화 및 전설에 나오는 상상의 동물이다. 수컷은 ‘봉鳳’, 암컷은 ‘황凰’이다. 암수가 한 쌍으로 만나면 금실이 매우 좋다고 하며 성군聖君이 출현하거나 세상이 태평성대일 때 봉황이 나타난다. 서두에서 봉황의 고결한 생태를 소개하고 말미에 봉황으로 지녀야 할 품위를 잃지 말기를 당부한다. 중간 부분에서 뱁새가 쑥대 아래를 날아다니면서 구름 사이를 비상하는 착각을 한다고 명시함으로써 뱁새의 행위에 비해 봉황의 존재 의미가 별개임을 강조했다. 봉황은 ‘기개와 지조가 고결한 인간상’을 의미하며 그러한 인격과 품위를 지녀야 함을 풍유하였다. 다음은 계도 의식을 반영한 풍유 작품이다.
고운 꽃 피우는 건 의미가 있는 법 吹發瓊葩如有意
옥 수염 떨어지게 함은 무슨 뜻일까. 飄零玉蘂更何心
술 마시고 무궁한 한을 풀고 싶어 啣杯爲釋無窮恨
해 저문 난간에서 홀로 시 읊네. 落日欄干獨自吟
‘꽃’을 매개로 하여 풍유했다. 꽃을 의인화해서 문답한 시 가운데 물음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꽃을 피우는 건 의미가 있겠지만 꽃을 지게 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지 의아해 한다. 개화에 대한 설렘과 낙화에 대한 아쉬운 정을 동시에 표현하였다. 이 때문에 시인은 계절의 무상감에 젖어 술을 마신 뒤 해 저무는 난간에 기대어 홀로 읊는다. ‘개화’와 ‘낙화’가 공존하는 희비의 감정을 담아 자연 애호 정서를 표현했다. 다음은 꽃의 답변이다.
피고 지는 건 천기 따라 행해지는 것 動止皆隨天氣行
화하고 미치고 투기 재촉해 원성도 많아. 和狂催妬苦多名
모두 세인들이 보고 멋대로 분별함이니 摠是世人看自別
불어 피고 지게 하는 건 원래 무정하다네. 吹開吹落本無情
꽃이 피고 지는 것은 ‘천기’의 운행에 따를 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세인들은 저마다 자기 방식대로 ‘온화’․‘광기’․‘재촉’․‘질투’를 반복한다. 분명히 꽃은 시절을 따라 피고 지건만 이를 감상하며 즐기는 세인이 안목에 따라 제 방식대로 호오好惡를 결정한다는 점을 들어 꽃을 피우고 지게 하는 천기의 운행을 간파하지 못한 무지를 풍유하였다. 결국 수서는 인간 만사는 천리天理의 유행流行에 따라 운행되는 만큼 주어진 본분에 만족하며 본분을 실행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수서의 내면 의식은 성리학 심미 의식과 통한다.
어젯밤 부슬부슬 산비 내려 昨作霏霏山雨過
산천에 새 고사리 돋았다네. 人言新蕨滿山河
산엔 배고픈 호랑이 있어 山中更有飢鳴虎
가고 싶어도 호랑이 만날까 염려. 欲山山頭履尾何
간밤에 흡족한 비가 내려 대지를 적시자 산천초목이 생기를 찾았다. 고사리 새순이 돋아나 굶주림에 허덕이는 농민이 고사리를 꺾어 먹고 싶은 욕구가 솟구친다. 하지만 산 속에는 굶주린 호랑이가 있어 감히 접근하지 못한다. 작은 이익은 ‘고사리’이며 큰 손실은 ’호랑이 먹잇감‘이다. 이 시는 ’작은 이익을 탐내다가 낭패를 당하는 경우를 우의적으로 경계한 작품‘이다. 다시 말하면 ’소탐대실小貪大失‘을 경계한 것이다. 이처럼 수서는 평이한 시어를 소재로 채택하여 경계하며 경각시켰는데 성리학 사유에 근거한다. 다음 작품은 성리 지향 의식을 우의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남쪽 언덕 밭 뙤기 南坡有田
자갈 땅 무척 척박했네. 磽瘠無比
파종해도 싹이 안 나오니 種不見苗
이삭 기대할 수 있으랴. 矧見其穗
붉은 흙 툭툭 튀어나와 赤土兀兀
풍년 와도 곡식 자라질 않네. 年豊不稔
보는 이마다 손가락질 하며 見者指之
모두 하품이라 빈정대네. 咸曰下品
그 밭 주인이 賴厥主人
부지런히 가꾸고 키운 공 있었네. 稼穡是職
열심히 거름 주고 김매어 旣糞旣易
한 눈 팔 겨를 없이 했네. 靡有餘力
힘쓰고 부지런히 殷斯勤斯
삼 대째 그러했네. 三世于玆
금년 봄이 되자 以汔今春
밀 보리 수북이 자랐네. 麥牟離離
마을과 시정 사람들 鄕井之人
모두들 기이하다 말했네. 莫不異之
아! 이 밭은 嗟乎此田
전에도 이제도 땅은 같지만 前後地同
결국 좋은 밭 된 것은 卒爲良疇
힘쓰고 노력한 공 때문일세. 服勞之功
이 시를 보는 각도에 따라 권농 의식을 담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수서의 성정 미학 의식이 깊이 자리하고 있음을 읽어낼 수 있다. 여기서 ‘땅’은 곧 인간의 ‘심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남쪽 언덕 밭 뙤기는 자갈밭으로 매우 척박한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파종조차 할 수 없는 ‘하품’의 토질이다. 이러한 토양의 상태는 제대로 성리학 교육으로 학습되지 못한 인간의 심성 상태를 상징한다. 도저히 인간 구실을 할 수 없는 삭막한 인간 성정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보는 이마다 회생이 불가한 인간형이라고 비난한다.
하지만 밭주인은 척박한 땅을 그대로 버려두지 않았다. 돌과 자갈을 골라내고 밭을 다시 일구고 김을 주면서 토질의 자생력을 높였다. 척박한 토질은 점차 부드러운 흙으로 변하여 갔고 양분도 흡수하여 식물이 잘 자라나도록 하는 제반 여건을 형성하였다. 삼 대째 그러한 작업을 간단없이 수행했다. 드디어 금년 봄이 되어 보리와 밀이 수북이 자라나 이삭을 맺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감탄을 발한다. 부단한 인간 심성 계발 노력이 드디어 결실한 것을 은유한다. 수서의 성리학 사유 의식과 성리학 교육 효력에 대한 긍정적인 효과를 표현한 것이다. 결미에 이르러 척박한 땅이 기름진 땅으로 변모한 것은 힘쓰고 노력한 공이라고 함으로써 다시금 인간 심성 계발 교육 긍정과 끊임없는 공력 수행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수서의 성정 미학 의식이 작용하여 풍유적 수법으로 표현된 작품이라 하겠다. 유교 성리학 교육과 파급 효과를 은유적으로 상정한 작품이다.
Ⅵ. 마무리
봉화 선비 문화 연구의 일환으로 진행된 평생 수신과 근신을 실천하며 정심을 위한 노력으로 일관된 삶을 실천하며 효제와 교육을 통해 성리 문화 보급과 성리 문화 정착을 통해 성리 질서가 구현된 조선을 염원했던 선비 수서 박선장의 생애와 시문학 전반을 검토하였다. 수서는 평생 수신과 근신의 철학을 기반으로 효제와 교육에 전념한 선비 학자였다. 그의 작품마다 투영된 근신과 수신의 철학 사유가 농축되어 있었다.
수서선생문집은 목판본 4권 2책으로 「서문」은 김굉이 썼으며 이어 「연보」가 실려 있다. 권1과 권2에 157제 176수의 시가 실렸다. 권3에는 사․부․서․잠․명․전․봉안문․제문․상량문․책이 실렸다. 권4는 잡저․가․사우록․제문․봉안문․상향축문․고유문․증유시․습유․묘표․행장․가장이 실려 있다.
수서 시의 특징을 탐색하였다. 첫째, 수신과 근신을 통한 정심을 추구하는 시이다. 간신을 은유하며 경계하는가 하면 성리학 관련 서적을 읽은 후 소회를 정리하면서 수신과 정심의 미학을 반영하는 한편 평소 행동거지의 수신 철학을 반영했다. 둘째, 애민 정서를 담은 작품으로 가뭄이나 장마를 염려하며 농민의 농사 작황 애로점을 동일시한 시이다. 일상생활 가운데 농민들에 대한 애정 의식을 표현한 작품이나 춘궁기를 맞아 모맥이 채 익지도 전에 베어서 배를 채워야 하는 실상을 담거나 서북 지방 오랑캐의 창궐에도 무관심한 조정 관리들을 책망하면서 애민 정신을 드러내었다. 셋째, 추모심을 발휘한 작품이다. 선현이나 스승을 추모하며 유학적 유업을 지속해 나가길 다짐하거나 거국적 의리를 실천한 분에 대한 추모 정서를 통한 의리 숭상 의식을 발휘했는데 이 과정에서 우의 수법을 차용해 추모 의식을 반영했다. 넷째, 소회를 담은 서정 표현의 작품에서 병으로 괴롭거나 꿈에서 만난 인물을 그리워하며 계절감과 일상의 소회를 표현했다. 아울러 친분이 잦은 인물과 자연을 유람하기로 한 감회 서정 표현과 개인 서정을 반영한 작품 등이다.
다섯째, 다양한 인물과 교유한 시 작품이다. 특정 인물의 부임에 전별하며 전도양양을 축원하며 지어 주거나 화운하기도 하며 학문 교류를 강화하고, 수신과 권학을 강조하며 우의 증진과 성리학자로서 책무를 다짐하였다. 여섯째, 사실적 안목으로 자연 경물을 핍진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시간 추이에 따라 삼라만상의 변화 양태와 자연의 미적 감흥의 현장을 생생하게 묘파하였다. 일곱째, 자연 생태나 동식물을 의인화하여 우의적으로 표현하면서 고도의 작가 표현 수법이 발휘되어 작품의 내밀성을 이루었다. 경박한 세태에 대한 풍자와 유교 성리학 진작을 염원하는 작가 의식을 재치 있게 표현했다. 여덟째, 작시론에서 시 창작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시는 결코 안이한 태도에서 탄생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미적 대상을 시인의 감수성과 예리한 관찰력 및 문학 역량을 동원해 혼신의 열정으로 표현해 내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이러한 시인의 노력이 수반될 때 작품의 완성도가 높게 되며 감동을 주며 미학적 우수성이 제고된다고 했다.
시문학 분석 결과, ‘정심의 성정 미학’에서 심성 공부에 주력할 때 속세의 병폐와 내면에 침투된 물욕을 제거할 수 있다고 하였다. 간단없는 성리학 추구와 정심을 위한 수련 행위가 마음의 묵은 병폐를 제거하고 내면의 정화를 거쳐 성리학 사고 확립과 내면 청정의 세계로 전환될 수 있다고 신념하였다. ‘효우 실천의 수신’에서 가정에서 어버이에게 효도하며 형제 사이에 우애롭게 지내길 강조했고 수서는 실제 그러한 생활을 실천했다. 특히 자녀 교육에 엄히 절제하며 자기 근신과 관리에 임해 주길 당부하였다. 참다운 선비 정신으로 바람직한 군자의 도리를 실천하며 벼슬길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훈계와 교훈성을 제시한 가운데 수서의 성리학 이념 지향과 성리학 실천 의지가 투영되어 있으며 그는 철저한 자기 수양과 실천을 일삼은 전형 인물이다. ‘애민 정서의 형상화’를 통해 극난한 농민의 삶을 목도한 수서의 심정은 농민의 참상 못지않게 핍진하다. 사대부로서 이러한 시각을 확보한 것은 그가 투철한 연민 의식을 지녔기에 가능한 일이다. 수서의 수신과 정심의 성리학 이념 지향이 백성의 삶을 면밀히 관찰하고 그들의 고통과 어려운 현실을 그들의 시각으로 주목했다. 성리학 이념 지향이 애민 의식으로 발휘된 것이다.
‘충절 인물 형상과 의미’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고 충절을 바친 인물 선양을 통해 성리 질서의 확립과 윤리 강상 수립을 희망하였다. 이러한 작품에서 수서의 성리 미학 이념이 수준 높게 이룩되어 있다. 이들 작품에 수서의 성리학 문화 정착을 염원한 윤리 강상 재정립의 이념적 지향이 집약되어 있다. 이 작품의 의의는 결국 수서의 성리학적 문화 정착과 윤리 강상 정립 정신이 투영이라 할 수 있다. 이 역시 위에서 검토한 일련의 수서가 지향하는 성리학 관점에서 ‘수신을 통한 정심 지향’․‘효우 실천으로 성리 이념 실천’․‘애민 정서의 형상화’․‘충절 인물 형상과 의미’에 드러난 ‘성리 윤리 실천’까지 아우르는 ‘성리학 이념 지향의 문학적 형상’이라는데 그 의미를 둘 수 있다. ‘오륜가의 윤리 강상 정립 정신’ 개인 가정의 윤리 덕목인 ‘효’에서 이제 이 작품을 마무리하면서 ‘우리’ 라는 공동체 연대 의식 구도 속에서 ‘공동 번영’과 ‘공동 화합’의 결속을 다짐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개인과 가정에서 유교 성리학 질서의 구축과 이에 대한 완비는 종국적으로 사회 번영과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여 함께 번영하는 성리학 질서가 개화된 세상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한 세상의 도래를 염원하면서 수서는 생활 전반에 걸친 윤리 강상 회복을 통한 건전한 유교 성리학 문화가 이룩되길 염원했다.
‘수서 시문학의 함의’를 검토한 결과, 수서의 성리학 사유가 관련 작품에 오롯이 녹아 있었다. 수서는 그러한 성리학 실천과 윤리 강상 질서 확립을 통해 성리 질서의 재정립과 성리 문화 토양을 마련하기를 소망하였다. 수서는 유교적 실천 윤리를 조목조목 설명하면서 그러한 윤리와 도덕이 회복된 선비의 나라를 기원했다. 실제로 그는 이러한 실천 덕목을 근거로 실천하며 교화와 도덕적 회복과 양심의 실천을 위해 솔선했다. 그런 점에서 수서는 단아한 선비요 성리학을 실천하며 토착화를 위해 헌신했던 인물로 평가된다. 수서는 시종 성리 이념의 재무장을 통 온 고을과 나라 민심을 통합해 성리 이념 토착화와 성리 문화의 만개가 이루어진 선비의 나라 조선의 건설을 염원했다. 그런 데서 수서 시문학의 고유한 의의를 찾아내야 하고 그러한 수서의 내면 심리 정서를 파악해 내는 것이 수서 시문학 이해의 관건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수서 시문학의 함의는 결국 ‘성리 실천 의식의 문학적 형상’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수서의 시문학 표현 미학으로 ‘시 창작 정신’에서 자연스럽게 인간의 성정이 표현되고 진솔한 문학적 정감이 표현될 때 우수한 시 작품이라고 평가된다고 하였다. 이 시에 수서의 시문학 정신이 집약되어 있다. 첫째 ‘치열한 시 창작 과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투철한 작가 정신의 반영과 함께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시구 안배 과정에서 ‘진부한 표현을 벗어나 참신한 표현’ 추구를 통해 시의 생명력을 살려내야 한다고 했다. 셋째 ‘수식과 과장의 꾸밈이 없는 자연스러운 성정과 정감의 표현’이 절실하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처럼 수서는 ‘시론’을 통해 치열한 창작 정신 발휘’에 근거한 ‘참신한 표현’을 통해 ‘자연스런 음률의 시가 탄생된다고 하였다. ‘농촌 서정의 표현’에서 수서의 산수 자연 심미감을 엿볼 수 있다. 자연 대상을 핍진하게 그려내되 자연의 생동성을 곁들임으로써 자연을 ‘화석’처럼 피상으로 인식하는 게 아니라 자연의 생명력을 시에 그대로 담아 독자로 하여금 ‘자연의 숨결과 동태’를 체감할 수 있게 했다. 수서의 투철한 시 창작 정신이 작품에 녹아 작품에 생명을 부여하여 살아 있는 시를 창작했다. ‘서경 묘사의 미학’ 수서는 예리한 필치로 ‘생명력 있는 자연 경관 묘사’․‘시각과 청각적 배합을 통한 작품 구성도 제고’와 ‘사실적 묘사’․‘시간 추이에 따른 치밀 묘사’로 문학성과 작품의 내밀성을 강화시켰다.
‘풍유를 통한 우의’ 풍자와 우의 표현을 통해 유교 성리학에 위반되는 행위나 인물에 대한 경계 의식을 드러내는가 하면 성리학 실천과 근신을 강조하고 군자형 도덕성이 확립된 인간 형성을 권고하였다. 그는 이처럼 우수한 문학 창작 역량을 토대로 정감과 미학적 조응을 이룬 표현을 통해 작품의 내밀성 강화와 미학 제고를 가쳐 우수한 시문학 작품을 생산했다. 섬세한 묘파력과 사실적 안목을 통해 개관 사실을 정확하게 그려내는 문예 역량을 갖추었다. 그러면서 살아 있는 자연의 숨결과 동태 양상을 담아내었다.
그런 점에서 수서는 철저하게 성리 이념을 실천한 선비 학자이며 탁월한 문예 역량을 구비한 시인으로 평가된다. 그의 성리 이념 지향과 시문학은 상호 유기적 관계망을 형성한다. 수서의 성리 이념이 시문학으로 형상된 것이다. 수서는 성리 이념의 재무장을 통해 성리 이념 정착과 성리 문화의 실현을 꿈꾸었다. 그러한 이념 실현의 통로가 시문학 표현이었다. 그런 데서 수서 시문학의 고유한 의의를 찾아내야 한다. 때문에 수서의 시문학 전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서의 정신 지향을 정확히 파악해 내야 한다. 이는 수서 시문학 이해의 관건이다. 그런 점에서 수서 시문학의 의의는 ‘성리 실천 의식의 문학적 형상이라 하겠다. 이후 당대 봉화 선비 문인들과의 문예 활동을 면밀히 추적하여 성리 문화 실천 운동 양상을 검토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연구라 생각한다.
[참고 문헌]
論語
孟子
詩經
書經
莊子
聾巖集
退溪集
懶隱集
杜陵集
訥隱集
江左集
博物志
憲宗實錄
古文眞寶
三國遺事
三國史記
紹修書院誌
增補文獻備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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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이원걸, '수서 박선장의 생애와 시문학 정신', [봉화문화] 제 24집, 봉화문화원, 2016.
사진 출처 : http://blog.daum.net/kil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