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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강태규 / 하눌님은 먼 곳에
32 권천학 / 소나무
34 권혁재 / 419호 강의실
36 권형하 / 귀산(歸山)
37 김다솜 / 시장이야기
38 김만수 / 들불이 되어
40 김소영 / 아홉살의 사랑
42 김연복 / The Conscience
45 김요아킴 / 순장녀
47 김위숙 / 늙은 오후
49 김은령 / 화전민
51 김이숙 / MAID IN CHINA
53 김인구 / 후숙
54 김재순 / 축제문
56 김주애 / 행렬
57 김진문 / 피리를 불다
59 김춘자 / 마당에서
60 김현만 / 무명초
61 나병서 / 아 처인성
63 남태식 / 밥
67 노정희 / 유월 한낮
69 민병덕 / 가을 오후
70 박공수 / 커피를 타며
72 박규해 / 앵두
74 박순덕 / 마늘밭
76 박은숙 / 부재
78 박찬선 / 깨어 있는 집
80 박해자 / 투명한 벽
81 박희용 / 남북
84 송은영 / 돌멩이국 끓이기
85 신성철 / 괘종시계
87 신순말 / 저기, 덩굴 풀같이
88 양해극 / 동학
89 오형근 / 환한 빈자리
90 유재호 / 푸른 감
91 유준화 / 갈대는 혼자서
92 윤현순 / 석류꽃 지는
93 이미령 / 네 죄를 네가 알렸다
94 이설야 / 풍란
95 이순영 / 곶감철
97 이승진 / 돌아가는 이유
98 이승후 / 지류에서 10
100 이영옥 / 당신
102 이종암 / 해월
103 이창한 / 절규
105 임수랑 / 백 개의 계단이 떨어진다
107 장원달 / 어버이날 선물
109 정동재 / 하늘의 끝
112 정의선 / 녹두새
114 제미정 / 사람은 누구나 꽃이었다
115 조영옥 / 머리무덤 앞에서
118 조재학 / 대낮, 한울님들
120 조정숙 / 이팝나무꽃
121 최기종 / 사과도 노동한다
122 최성익 / 하루
123 최순섭 / 산
125 최형심 / 죽음의 계곡에서 온 편지
127 황숙 / 이 땅에 “동학은 무엇으로” 왔는가
《시》
하눌님은 먼 곳에 / 강태규
한 때, 해 뜨는 동쪽이 세상의 중심이었다는데나는 지금 길을 잃었다동쪽을 기리며 섬기며 살던 東學仙人에 길을 묻고 있는데나는 지금 오른 귀를 후빈다서역으로 길을 구하던 이는 지금 어디에 있나밑천은 다하여 개평을 구걸하는 환난을 평화라 부르라니새 세상이 오기까지는 하늘과 땅이 새로 나야한다면나는 지금 낡은 하늘과 땅을 섬기고 있다태양을 중심이라하고 빛바라기하거나보이지 않는 우주의 또 다른 빛을 쫓아보거나영생을 위해 바퀴벌레를 섬기거나미륵불이나 박정희나 김일성을 섬기거나누르고 겁박하는 것들이 저를 섬기라한다도적을 도적이라 부르지 못하고귀신을 귀신이라 부르지도 못 한다대저 선인들은 굴로 숨어들었을 것이다대저 미륵들은 하늘에서 내려오지도 않을 것이다동인으로 다시 나야미륵으로 다시 나야바뀐 세상에 살 수 있다면그냥 속은 척 눈감는 거야막 지은 고슬 밥과, 갓구워 논 피자와바나나와 해변 그리고 군사기지*를맛있게 펼쳐 보는 거야
*신시아 인로의 책제목
서울 출생, 2003년 산문집『평창이야기』,2009년 시집『늙은 대추나무를 위하여』로 등단.
소나무 / 권천학
노상 푸른 것만은 아니다
잠 아니 오는 밤
숱한 고뇌의 인두질
속껍질 벗겨
민족의 허기를 채우고
옹골찬 끈기로 내뻗는
옹이
허기보다 더한
아린 순수로 서는
한반도의 언덕
어두운 기억 저편에
칼날에 베이던 역사의 한나절
무서리 칼바람 속에
무명(無名)으로 사는
넋
노상 푸른 것만은 아니다
잠 아니 오는 밤
시퍼렇게 돋아나는 절망 하나쯤 도려내고
살 속에 박힌 파편마다
인내의 슬기로 타오르는
불꽃횃불
캐나다 토론토 거주,《여원》,《여성중앙》에 소설 등단,《현대문학》 시 등단, 시집『그물에 갇힌 은빛 물고기』등 9권.
419호 강의실/권혁재
복도 끝 419호 강의실로 향할 때마다
심장이 거세게 뛰는 혁명을 꿈꾼다
발걸음도 들떠 보채는 419호 강의실
벌써 혁명은 시작되었는지
함성과 구호로 아우성이다
때늦은 대오결성에 미안해하며
투석을 하듯 힘껏 문을 열어젖히니
학생들의 혁명은 비참하게 끝이 난다
몇은 스타벅스 커피를 먹다
몇은 명품가방 자랑을 하다가
예고 없이 날아든 최루탄에
눈치 빠르게 책상으로 몸을 가린다
강의 중간중간에 어쩌다 나오는
청춘과 절망의 등가방식에 관한 애원도
부끄러운 한계로 그들에게 먹히지 않는다
절망을 이야기하는데 고개를 돌려
책상에 엎드리는 학생에게서
나는 다시 절망한다
이제 더 이상 혁명은 없다
학생들에게 혁명은 스펙이나 취업 같은
기호식품으로, 스마트폰으로도 길들여지지 않는
낡은 유품인지도 모른다
이제 더 이상 혁명의 날은 오지 않으리
투사 같은 대자보도 붙지 않으리
현실의 이상에 영혼마저 주눅 든
아, 419호 강의실.
경기도 평택 출생, 2004년〈서울신문〉신춘문예로 등단.
귀산(歸山)/권형하
버릴 게 더 없어서 막막하게 돌아볼 때
저 청송 하늘빛이 푸르게 만져졌다
첩첩이 밀려오는 파도
푸근한 숨소리.
동해도 오고 싶을 때 비워놓은 저 바다
보름사리 멸치 떼가 희번덕이는 오월 쯤
산마을 젓갈 한 독을 박꽃 꺾어 담겠다.
다람쥐 몇 번이나 나뭇가지 툭툭 찢어 내고
늦가을 다 마른 삭정이 낮달로 떨어져
눈 내린 꼭두방재 넘으면
진동하는 수박냄새.
경북 상주 출생, <매일신문>, <중앙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새는 날면서도 노래한다』외 다수. 경북문화상 수상.
시장 이야기
- 이웃 /김다솜
‘예쁜 아줌마’ 불러주던 연이 민이 보고 싶다.
형제보다 더 정겹게 지냈던 고운 매듭, 동네 아이들에게 골목대장으로 지냈던 그곳은 나의 삶의 텃밭, 길손들이 쉬어가던 원두막, 그곳으로 인해 내가 살아 움직이는 마네킹이였지. 서있던 또 다른 형상, 이제 그녀와 별거다. 빈부는 어제의 이야기 빈곤이 찾아와도 커피 값 밀고 당기는 곳은 ‘남성도 4번지 그곳밖에 없다’ 며 길다방* 마담이 말했다. 포항죽도 시장으로 간 연이 민이 잘 있는지 가게 이마에 ‘점포 세놓은’ 바람에 흔들리는 수건 한 장 데어가지 않은 주인 원망 할 수 없다. 가게 들릴 때마다 소매 붙잡는 옷들이 전화와 메일을 보낸다. 가게 앞에서 움츠리던 좌판 길에서 춤을 춘다.
*끌고 다니면서 커피, 녹차 파는 리어카
경북 문경 출생,《상주문학》으로 작품 활동, 상주문협 회원.
들불이 되어 /김만수
저기 착한 불이
장검(長劍)에 베이지 않는 푸른 종양이
마북에서 영해까지 번지고 있다
유망(流亡)하던 발자국
깊이 패인 그늘 지우며 일어서고 있다
관노문서도
피역과 도망자의 수배 문건도
공명첩도 더러운 족보도 활활 태우며
착하디착한 불 번져가고 있다
어둠 문질러 통문(通文)을 돌리던 그림자들
댓잎소리에 묻어오던 신호 신호들
사람 사람들
무명적삼 쓸어안고 새벽으로 스미던
흰 고무신들 불이 되어
끝끝내 나라가 되어
이 들 저 들 옮겨 붙고 있다
들불이 되어
경북 포항 출생, 1987년《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소리내기』등 8권. 한국해양문학상 수상. gangmura@hanmail.net
아홉살의 사랑/김소영
앞산이 눈을 비벼
막 기지개를 펴고
안개 사이로 빼꼼히 얼굴 내밀 때쯤
아홉살 꼬마는 앞마당을 돈다
자두가 얼마나 익었나,
고추가 하나쯤 달렸나,
이 새벽 벌레들은 뭘 하나
두 눈 초롱초롱 빛내며 지켜보다가
손가락 한 마디만한 딸기 몇 알
하나, 두울, 세엣 헤아리며
손바닥에 올려놓고
엄마, 아빠, 형, 동생을 그리고
그러다 벌레 먹은 딸기 보면
이건 벌레 것,
배고픈 애벌레를 떠올리기도 하고
아기에게 물어다 주는 엄마벌레가 되어보기도 하면서
제 세상을 돌보는
아홉살 꼬마의 분주한 발자국 소리
자박 자박
아침을 깨운다
경북 상주 출생, 상주들문학 회원, peacenow@hanmail.net
The Conscience/김연복
I don't know who he is or where he's from
but I think he dwelts in every fair heart
whether living or breathless.
I often feel him glowing in my heart,
but I realize who he is only when
he eluded me.
He dwelt in my father's heart for a long time
for I could see him shining there
from father's head to toe,
in his steps so lightly walking,
even in the breath he breathed.
Now, abiding over my head,
he threatens me with a fearful eye
but he never forgets his reward,
the songs which I long to breathe.
-- For my father Wi-Jin Kim, 1910. 음 2.14--1971 음9. 9
양심
그 분이 누구시며 어디서 오셨는지 모르지만
그 분은 모든 선(善)한 가슴 안에 살고 있으리라
살아있는 것 속에나 숨이 없는 것 속에도.
그 분은 가끔 내 가슴에 섬광처럼 번쩍이지만
언제나 나를 버리고 떠나가셨을 때
그 분이 누구신가를 알게 된다.
그 분은 내 아버님의 가슴속에 더욱 오래 계셨으리라,
아버님의 발끝에서 머리 위까지에,
가볍게 걸으시는 그 발길에서도,
당신이 내 쉬던 그 숨결 속에 마저도
그 분이 번쩍이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이제 그 분은 내 머리 위에 앉으셔서
무서운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시지만
상(賞)주심도 잊지 않으시니
그것은 내 즐겨 부를 노래이어라.
경북 상주 출생, 시집『진리의 본성』외 6권 한영시집, 미국 월트휘트먼 시협상(1986년), 동리문학상 수상, 한국문인협회 외국문학분과회장.
순장녀/김요아킴
대성동 고분에서 한 여인이 발견되었다
반듯하게 누운 채로
태어나야 할 다음 세상을 위해
머리는 동쪽으로 향해 있었다
늘 부리던 오른손 부근엔
깨진 그릇 몇 조각이 흩어져 있었고
살아온 생만큼의 체구에 비해
도드라진 종아리 근육은
그녀의 신분을 말해주는 듯 하였다
골반을 진맥한 결과 두 명의 아이를
갓 낳은 새댁이었지만
그녀가 모셔야 할 분은 이미
토지신에게 덩이쇠를 지불한 상태였다
덧널 사이에 냇돌은
두고 온 이승에의 미련만큼이나 깔려
수천 년으로 발효되어 왔고
주인과의 지독한 연을 끊으며, 마침내
한 여인이 새로운 희망으로 출토되었다
85호 고공 크레인,
스스로 자기 생의 결정권을 움켜쥐며
만 309일 만에 당당히
무덤에서 걸어 나왔다
1969년 경남 마산 출생, 2003년 계간《시의나라》, 2010년 계간《문학청춘》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가야산 호랑이』『어느 시낭송』『왼손잡이 투수』kjhchds@hanmail.net
늙은 오후/김위숙
칠 벗겨진 외벽은
광대뼈 드러나도록 문드러지는 우주다
외벽 앞 빨랫줄에
호박오가리 말라가고
책꽂이 한구석 빛바랜 오후가
길게 늘어진 가을 위로
바쁘게 매달린다
점박이날개나비
묵언처럼 말아 쥐고.
저 산을 건너왔을 늘어진 빛이여
말라죽은 딱정벌레
입에 착착 감기는 감칠맛에 홀린 걸까
늘어졌던 몸통
칭칭 걸어 말린
저 문드러지도록 깃들었던
간절함도
우주의 그늘처럼 깊어진다
경북 경산 출생, 1999년《불교문예》신인상, 2002년《현대시》등단, 시집『내 남편 김의부씨의 인생궤적』,계간《낯선시》편집위원. kyungyun45@hanmail.net
화전민/김은령
저 울울창창은 잡목, 이거니
오래전 내 아비와 어미는
잡목 무성한 곳에 불길을 놓아
밭을 일구었느니
그때엔 불길 참 활활 타올라
그것들의 뿌리까지 태워,
태워〮〮〮〮〮……
그 땅에서 알곡을 거두었느니
갈 곳 없는 이들 종균처럼 번져
매캐한 냄새로 팽창된 구역
AD 2013-서울,
이 폐허에 서서 무얼 또 기다리며 기약할 것이냐
그대 아직 버리지 못한 순정한 불씨하나 있다면
확! 불길 한번 당겨보지 않을래?
옥토로 가는 출구마다 검은 뿌리 내린
잡목(雜木), 깡그리 태울 수 있다면
우리들은 오래 엉키어 온 것들과 비로소 단절하고
뜨거운 그 땅에 씨 뿌릴 수 있으리
거룩한 알곡 거둘 수 있으리
경북 고령 출생, 1998년《불교문예》등단, 시집『통조림』『차경』, 제2회 백신애창작기금 수혜. 대구작가회의 부회장.
MAID IN CHINA/김이숙
언제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중국 어디선가 주홍날개 팔랑이며
화물 따라 바다를 건너왔을
꽃매미들에겐 천적이 없다
무심한 눈길에
그저 미미하게만 보였을 그들은
줄 지어 기어오르고
까맣게 달라붙어 수액을 빨아 먹는다
한 쌍이면 일 년에 오백 마리
이 년이면 십만 마리
나무마다 깨어났음을 알리는 낙인
선명히 남기고 조금씩 조금씩
잎을 까맣게, 종내
고사시킨다
살충제 뿌려도 대엿새 후면 다시 날아다니는
부화하기 전에 막는 것이 최선이라는
곳곳에서 들리는 주홍 날갯짓
시나브로 관악구만한 땅을 빼앗겼다
언제부턴가
MAID IN CHINA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벽부터 밤까지
곳곳에 그들이 있다
경북 상주 출생, 시동인《느티나무시》로 작품활동, hosoo71@hanmail.net
후숙/김인구
노란 빛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보여주고 있는
바나나는 지금 기도 중이다
적도에 두고 온 뿌리의 간절함을 향해
오체투지 중이다
아무리 먼 곳에 몸 있어도 서로를 나누는
마음 주고 받듯 먼 이국 시멘트 바닥의 차가운
냉기에도 남극을 향한 마음 놓지 않고
그리움 견디고 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적도의 햇볕
굽은 가슴으로 받아 마시며
등허리로 쏟아져 내리던
낯 따갑던 사랑의 말들
눈감아 주워 담고 있는 것이다
쉿, 바나나는 묵언수행 중이다.
전북 남원출생, 1991년 시집『꽃으로 다시 태어나는 너에게』로 등단, 시집 『신림동 연가』 『아름다운 비밀』외 다수 공저.
축제문(祝祭文)/김재순
당신들이 설령 머리 풀어 헤치고
창백한 얼굴 검은 입술 긴 손톱으로
내 목을 조인다 해도
나 이제 두렵지 않습니다
무지렁이 당신들의 꿈은
고관대작보다도 크고 높아
태풍이 되는 것이었지요, 태풍이 되어
새로운 하늘을 펼치는 것이었지요
찢긴 육신이 검은 흙속에 던져졌지만
그 꿈은
당신들을 닮은 우리들 가슴에 뿌리내려
칠월의 나무처럼 하늘을 향합니다
오늘, 넉넉한 상을 차리고
분향을 합니다
선녀보살이 흰 명주수건을 감았다 풀면서
길을 안내합니다
이제
달을 안고 별을 안고 깊은 잠에 드십시오
망초꽃들도 저렇게 손을 흔듭니다
경북 상주 출생, 1996년《들문학》으로 작품 활동, 경북작가 회원. 상주작가 회원.
행렬/김주애
곧 닥칠 태풍 소식에 연신 속보를 쏟아내는 날
뒷산 오솔길 가로질러 개미떼 이사를 간다 저마다 한 개의 알을 받쳐 들고 무슨 대단한 이야기나 하는 듯이 구불렁구불렁 저들은 타고난 몫이 작아서 가는 길마다 구렁일 텐데 부른 튼 발은 그래도 쉼 없이 간다
밑천도 없이 시작한 살림 맨손으로 일궈 떵떵거리며 논에 물꼬를 보러 다니던 그가 쏟아지는 빗줄기 둑이 터진 물살에 쓸려 그만 목숨을 잃었을 때 개미처럼 일을 해서 뒤꿈치 퉁퉁 불어 갈라진 맨발이 허옇다고 뒷축이 꺾인 신발은 집 앞에 남았다
그날 밤 뉴스는 안전 대책을 자꾸만 보여주는데
다만 먹구름 잔뜩 몰고 온 하늘이 비를 내릴 시간을 가늠 중이다
경북 상주 출생, 시동인《느티나무시》로 작품활동.
shower72@hanmail.net
버들피리 불다 /김진문
대운하 반대 100일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이들을 맞이하기 위한 행사가 열린 보신각종 앞마당, 누군가 만들어 온 버들피리, 나도 하나 얻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버들피리가 되었다. 여기저기에서 버들피리 소리가 들렸다. 가늘고 엷은 소리부터 굵고 둔탁한 소리. 갑자기 보신각종 앞마당은 버들피리소리에 봄바람이 넘실댔다. 순례단 깃발들이 물오른 버들개지로 휘날렸다. 나도 오랜만에 원님 덕에 나팔 불 듯 버들피리를 불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불어본다. 삘리리리리리 삘리리리리, 그 가늘고 당찬 소리에 내 고향, 언덕배기가 누런 보리밭 넘실대고, 터밭 무우 장다리꽃 피어 배추흰나비 아롱지어 다니고, 파꽃 벙글어 벌들이 붕붕거리고 , 뒷산 소나무들은 저마다 순 하나씩 솟아 녹색 봉우리 되었다. 아련한 추억의 시간들, 강물이 흐르고, 산이 내달리고, 구름이 떠간다.
삘리리리리리리삘, 삐리리리리리, 버들피리소리 살아오는가!
다슬기, 우렁이, 메기, 붕어, 실뱀장어, 꺾지, 피라미, 은어, 황어떼들이 파르르르르 여울물에 살아오네. 버들피리 소리에 살아서 오네. 내 고향 여울 따라 하늘로 날아오르네. 나는 봄이 오면 언제나 버들피리 하나 불어야겠다.
그러니
구름아!
물아!
불아!
산아!
버들피리 소리야!
너는 너 가는대로 흘러가거라.
이 강산 낙화유수(落花流水)
자유를 향하여!
경북 울진 거주, 1985년《어린이문학》등단, 2008년 동시 우수작품 선정 문화관광부 창작지원금 받음. kim7095@chollian.net
마당에서/김춘자
멍석에 널어놓은 들깨
허리 아파 다리 아파
깨알 같은 글귀들
고개 아무리 숙여도
다 읽어내지 못하는
어머니의 시
경북 상주 출생, 시동인《느티나무시》로 작품 활동.
cjk651@hanmail.net
무명초
- 상주동학농민혁명/김현만
둥둥둥…
진혼의 북소리 장엄하다
짓밟힌 민초들의 아우성이
장내리 너른 뜰을 요동치지 않았던가
초록빛 꿈이 영그는가 싶었다
그러나 무자비한 장검에 무너져
일장춘몽인 줄 알았다
아니다, 연년세세 기나긴 삭풍에도
억수 같은 장맛비에도 이 강산에
이름 없는 무명초로 저리 강건하지 않느냐
보라, 저 아름다운 강토에 휘날리는
자랑스러운 농군의 하얀 깃발을
그래서, 본시 농자천하지대본이라 하지 않았느냐.
인천거주, 시집『하늘로 가는 소리』외 다수, 국제PEN클럽 회원.
아 처인성
나병서
오백칠십 걸음 둘레 열 걸음 구릉을 가지고
맞서 싸웠다
산 채로 껍질을 벗긴다는
뱃속의 내 아이들을 끄집어내고
내 누이의 가슴살을 도려내 먹는다는
제국의 공포에
나는 도리어 웃어버렸다
내가 지킨 것은
내년 봄 저 아래 들판에 뿌릴
볍씨 한 움큼
이 한 움큼의 볍씨에서
또다시
천 년의 생명이 시작될 것이어서
아비와 어미가 찢겨져 죽고
누이의 배가 갈리우는 모습을
한줌 씨앗과 바꾸어 버렸다
오백칠십 걸음의 둘레를
제국은 넘을 수 없었고
또다시 천년이 시작되었다
경기 고양 거주, 노동자, nabyungseo@naver.com
밥/남 태 식
1.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이생에서는 끝내 오직 군인이셔서 이런저런 일로 때때로 어린 우리들의 군기를 잡으셨으나, 주체 못할 방랑기로 초등학생 때도 하루나 이틀, 가끔은 사나흘쯤 탈영했다 귀대하고는 했던, 또 어린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다른 여느 어버이들처럼 애틋하기도 하시어서, 문간에서 마주칠 때마다 늘 물으시던 첫 마디는,
때가 아침이면,
아침 먹었냐?
때가 점심이면,
점심 먹었냐?
때가 저녁이면,
저녁 먹었냐?
그래 밥은 먹었냐?
2.
이는 서울대 생활과학연구소, 질병관리본부, 대한소아과학회 등에서 밝히거나, 방한한 유니세프 평양사무소장이 남한 인사들에게 알린 내용이다.
북한 동북지역 한 고아원의 중학교 5학년인 만15세 통일기둥군은 키132㎝에 몸무게30㎏으로 남한 초등학교 3학년 만9세 통일기둥군 수준이고, 이 고아원의 초등학교 4학년인 만10세 통일들보양은 키117.2㎝에 몸무게22㎏으로 남한의 만6세 유치원생 통일들보양 정도이다.
남한의 만11세 통일기둥군들의 키는 145.3㎝ 몸무게는 40.3㎏이나, 북한 동북부의 만11세 통일기둥군들의 키는 125.4㎝ 몸무게는 23.6㎏이고, 남한의 만11세 통일들보양들의 표준치 키는 146.7㎝ 몸무게는 39.2㎏인데 비해, 북한 동북부의 만11세 통일들보양들의 키는 126㎝ 몸무게는 25.2㎏으로, 북한의 통일기둥군들과 통일들보양들의 성장지연비율은 최소 83% 이상이다.
또 소변검사를 한 북한의 통일기둥군들과 통일들보양들 중 결핍이 장기화되면 갑상선 기능이 떨어져 몸이 붓고 키가 잘 안 크고, 심하면 지능지수(IQ)가 80~90으로까지 떨어진다고 알려진 요오드결핍증 통일기둥군들과 통일들보양들은 약70%이다.
3.
하니
밥은 먹이면서 하자.
그들의 없는 인권에 대하여,
세습에 대하여,
누리지 못하는 자유에 대하여,
핵에 대하여,
또,
날밤을 새며 이야기 하자.
목에 핏대를 세우자.
하나 영양결핍으로 통일한국의
반쪽의 기둥 반쪽의 들보가 무너지고 있으니,
밥은 먹이면서 하자.
약은 먹이면서 하자.
아아, 마침내 뚫려 막힘없을 한 하늘 아래,
온전하게 하나로 일어설 통일의 기둥,
건강하게 하나로 떠받칠 통일의 들보를 위하여,
우선,
밥은 먹이자.
약은 먹이자.
경북 포항 거주, 2003년《리토피아》등단, 시집『속살 드러낸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내 슬픈 전설의 그 뱀』, 리토피아문학상 수상.
유월 한낮/노정희
산복숭아 나무
아파트 입구 시멘트 바닥에
기우뚱 휘어진 몸으로
꽃피워 열매 맺는 몸짓이
17층 할머니를 닮았다
촌살림 접고 아들네 아파트로 왔다는
17층 허리 굽은 할머니
엘리베이터에 어지럼증이더니
경로당에 다문다문 다니더니
며칠 전 요양원 가셨다는
오늘의 소식은 아픔이다
산복숭 다 여물면
기침소리 멎을거라 더니
먼 산 장끼소리에
툭툭 떨어지는 열매
치마 앞섶 가득 주워 오시려나
비워내고 싶은 유월 한낮인데
하루하루 다리는 편히 뻗고 계시는지
경북 상주 출생, 수필집『빨간수필』, 계간《문장》편집위원, 대구작가회의 회원.
가을 오후/민병덕
빨간 감빛 아래
아버님 기침소리
굵고 큰 무-배추
문득 어머님 손맛
그리움
새파란 하늘엔
잠자리 떼만 떠돈다
경북 상주 출생, 1987년〈매일신문〉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저녁노을』, 상주문협 회원.
커피를 타며/박공수
마알간 한 컵 물의 나라에한 스푼의 커피가 침투합니다.까매집니다.바닥조차 보이잖게 캄캄합니다.모든 걸 철저히 제 색깔로 틀어쥐고 맙니다.권력도 이런 권력이 없습니다.녹차나 꽃차라면 이렇게까진 못합니다.대단한 커피.빌딩에서, 거리에서우리들 일상에서, 언제
어떤 세계라도 완전 장악해버리는 그 속, 커피 알갱이
질량 1%밖에 안 된다는데그게 조용히 99%의마알간 세상을 점령해 버렸습니다.석불도 미혹될 강한 향기에 홀려언제나 취중에 있는 우리.
높이 치켜든1:99란 피켓마저도 같이맛있게 먹어야 되는
경기 안양 거주, 《문예운동》시 등단, 시집『대륙의 손잡이』외 공저 다수, wheemory@hanmail.net
앵두/박규해
우리 집 뒤뜰에는 빠알간 앵두 익어
어린 손자 온다더니 오지 않아 다 땄네.
그 어린
그때 모습이
아련히 떠오르네.
중학생 되었다고 교복 정장 갈아입고
의젓한 그 모습이 보고 싶어 하지만
공부에
시달린다고
전화 한 번 없다네
빨간 앵두 나뭇가지 없어지니 푸름만
유월의 태양이 더 뜨겁게 느껴지고
오늘도
전화 한 통화
걸려 오려나 기다려지네.
만주 신경 출생,《현대시조》등단, 시집『희망의 횃불』, 한국문인협회 회원.
마늘밭 /박순덕
김제 마늘밭에 숨겨둔
거액이 나왔다고 온통 시끄럽다
칠십 평생 마늘 농사지으신 엄마
거액은커녕 무럭무럭 크는 새끼 입에
넣어도 넣어도 모자라기만 했던 세월이었다
엉덩이 다리 삼아 마늘을 심어
보드라운 흙 이불 덮어 주고
비닐로 집까지 지어 겨울 내도록 들락날락
그렇게 수확한 마늘로 새끼들은 엄마보다 커졌다
청명 지나고
마늘밭 눈이 시린데
벽 모서리 마늘 한 다발 걸려 있다
물기 하나 없이 가벼워진 엄마
거기 매달려 있다
경북 상주 출생, 시동인《느티나무시》로 작품활동. qkrtnsejr@hanmail.net
부재/박은숙
논머리 우거진 풀 섶
녹 슬은 탈곡기
패대기 처 놓고
농부는 어디 갔을까
깊게 고개 떨 군 저 알곡들
벼 포기 허리 꺾이고 있는데
농부는 어디 갔을까
가라지 통, 통, 영글어
영토인양 핏대 세우고 사는데
저것들 뽑아내지 않고
농부는 어디 갔을까
질메흙, 흙속으로 녹아드는
남루의 허수아비
그 마음 누가 알까
이보시오 사람들
팔 걷어 부치세
우리 팔 걷어 부치고
목숨 줄, 저 알곡들 거두어들이세
자네 일이 내 일이고
내 일이 자네 일 아닌가
찬바람 휘 몰아 치는데
농부는 어디 갔을까
경북 구미 거주, 경북작가회의 회원, eunsook0106@hanmail.net
깨어 있는 집
- 상주 은척 동학 교당 /박찬선
살아있는 자들은 집이 있습니다.
죽은 자들도 집이 있습니다.
풀쐐기가 야문 각질의 집을 짓듯이
굳고 단단한 성 같은 집을 짓고 삽니다.
방랑자와 방황하는 자는 집이 없습니다.
가는 길이 집이요 머문 하늘이 집입니다.
산에 집을 짓기도 하고
바위 속에 집을 짓기도 합니다.
미로의 중심에 지은 정신의 집 네 채
낮이 없던 깊은 밤 잠자지 않고 깨어있는
집안에 집이 있는 음양의 조화
집을 두고도 집이 그리워서
사경(寫經)을 하듯 한울님의 집짓기를 거듭해온 개벽
서러움이 받치면 집이 됩니다.
눈물이 마르면 집이 됩니다.
물결에 바람결에 허물어지는 보루
가라앉은 주춧돌만이라도 지키려는 어기찬 행진
굴욕의 끝에 자리 잡은 교당(敎堂)
고문 받는 신음소리 사이사이
경 읽는 소리, 주문 외는 소리, 먹 가는 소리
뒷담 위 하늘수박 익는 소리가 들리는
열린 하늘 집
가난한 자의 집은 대낮같이 밝습니다.
집안에 없는 자의 고독이 켜켜이 쌓여
밤에도 빛나는 구슬처럼 혼이 나르는 반딧불처럼
빛을 나투는 집이 됩니다.
경북 상주 출생, 1976년《현대시학》등단, 시집『상주』외 저서 다수, 제3회 흙의 문학상 외 수상 다수, 상주동학100주년기념사업회장, 한국문인협회 경상북도지회장 외 다수 역임.
투명한 벽/ 박해자
1
달리는 차창에 달라붙은 청개구리
있는 힘 죄다 모아 앙버티고 있습니다.
가쁜 숨 내몰아 쉬며, 겁먹은 눈빛으로
무심코 앉은 자리가 투명한 벽일 줄이야
짓누르는 바람이며 반사되는 햇살하며
한 발짝 떼지 못하고 온 몸으로 버팁니다.
2
후회 하지 않으려고 갈고 닦는 나날인데
입김불어 닦아도 반쯤 남은 지문 있어
지나온 길의 그림자 실개천의 몸짓 같은
내일은 비가와도 오체투지 낮은 자세로
말갛게 맺힌 응어리 시원하게 풀어놓고
가없는 내안의 빈집 창문 활짝 열고 싶다
경북 상주 출생,《나래시조》신인상, 숲문학회 회장 역임.
남북/박희용
호국 인물 이일영(李日泳) 공군 중위는 1928년 8월 선비의 고장 안동에서 예안이씨 36대손으로 태어나시다. 1942년 3월에 예안 심상소학교를 졸업하였고, 특히 그림과 산수에 뛰어난 소질을 가졌으며, 1943년 1월 일본 소년비행병학교에 입학하여 2년 과정을 마쳤다. 1948년 9월 육군 항공과에 입대하여 6.25 사변이 일어나자 초기 L-4 연락기로 적정 정찰, 연락 비행, 전단 살포 등 임무를 수행하고, 1950년 9월 1일 대구 영천 일원에 은신 중인 수백명의 적 병력을 색출 격멸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1951년 10월 25일부터 F-51 전폭기로 동해안 적진에 출격하여 많은 전공을 세우고 1952년 1월 9일 금성 북방 창도리 상공에서 적 대공포에 피탄되어 24세의 젊은 나이로 장렬히 전사하셨다. 고향땅, 성선산 남은 자락에서 고향과 조국 대한민국의 안녕과 번영을 이루시는 영원한 수호신이 되소서! 이천일년 시월 일 호국 인물 이일영 흉상 건립추진위원회
보고 십다. 정숙아 오레동안, 얼마나 고생하면 얼마나 집에 식구들 보고싶흐겐는가. 놈들의, 공습에, 얼마나 고통이 지나느냐. 과이 놀내지마러라. 평양소식 알인다. 九月十六日에 놈들의 공습에 무사이 지나든, 우리사는, 사택에다가 (수백알) 八十개폭탄을, 던지여, 수백명 사람죽고 하는 중에 우리의 두집식구는, 천명으로 사라낫다. 자근어먼님집도, 폭탄에치여, 형편이업고 물거지는, 집속에서, 사라나고, 우리집 식구는 집안에, 있다가, 폭탄,파편에 겨우 몸을 빠저서, 사라낫다. 나는 현장에, 갔다가, 연기가 매우 나서, 집에 도라온즉, 식구들은 울고인는 현상이다. 그리고 매일갗이, 일하든, 완수리, 아버지는, 그날 일 안이나가고있다가, 그만, 압집 치는 파편에, 편소에서, 그만 세상을, 떠나고마럿다. 살기위하여, 연옥이와, 너의 �빠는 비행기를, 머리에 두고, 매일 같이 현장으로, 나가는길이다. 1950년 10월 5일 평양사동에서 백인하
제일전선에서 씨우는 인민군대아저씨 앞. 전선에서, 싸우는, 인민군, 아저씨, 들이여 얼마나, 수고하십니까. 전쟁이, 6월 25일, 이른, 새벽에, 리,승만, 밑에있던, 「국방군」, 놈들이, 38선이북에, 1k내지, 2k로를, 쳐들어와서, 내,무성이 보로하였다. 물리치기하였을부터 미군놈들이, 7월5일부터 비행기로와서 진남포,원산,평양,청진,함흥 같은 큰 도시들을 폭격하였고 흥남 같은 큰 바로공장 같은 것도 하 퍼하고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바삐 우리들은 공부 할것이면 인민군 아저씨들은 하루바삐 그■놈들을 물치기로 하여야하겄습니다 나의 말은 이만 끝이겄습니다 원산제二인민학교 제4학년2반 임만수
1) 안동시 도산면 동부리 「이일영 공군 중위 기념비」
2) 1950년 10월 미군 노획 북한 편지집 『조선인민군우편함 4640호』(도서출판 상인. 2012) 208p
3) 상동 247p
경북 봉화 출생, 2000년 시집『霜寒圖』, 2010년『양백집春』,『양백집夏』,『양백집秋』,『양백집冬』발간. 한국작가회의 회원.
돌멩이국 끓이기 /송은영
시냇물이 소리를 내는 것은 물속에 돌멩이가 있기 때문이다 먹고 사는 게 씨알도 안 먹힐 때 돌멩이 국을 끓여 본다 어디서 굴러 먹는지 묻지도 말고 먼저 한 말들이 그릇에 아홉 되쯤 되는 돌멩이를 냄비에 붓는다 서로에게 기댄 고만고만한 돌멩이들이 군홧발에 밟히고 방패에 채인다 돌멩이가 돌멩이의 소리를 듣지 않는 귀머거리 나라 바위처럼 딱딱한 침묵이 거친 물대포를 쏠 때마다 돌멩이들은 더 둥글고 단단해진다 반 동가리 반도 땅 팽팽해진 귓바퀴를 타고 막힌 속을 뚫으려 어둠 속 촛불을 밝히는 돌멩이들의 마음이 때글때글 영근 불땀을 흘린다
경북 포항 거주, 2007년《시와 상상》등단, 시집 『별것 아니었다』, 경북작가 회원. jayou7453@daum.net
괘종시계신성철간다.칼이 간다.순간을 잘라 먹으러세월이라 불리우고,역사라고 이름 붙은 길을언젠가는 마주칠 찰나의 표적을 향해일정한 보폭으로 걷다보면가끔은 일탈도 하고 싶지만그것은 규칙위반이야.쑥 개떡 한 조각에 무악재 너머주먹밥 하나 먹고 아리랑고개 넘다가종다리 등에 얹혀 보릿고개 넘었다.무작정 상경한 어린 보퉁이서울역 시계탑을 쓸어안다가판자촌 구공탄 검은손 되어복순이 모가지 찍어 누르다서울제비 등에 얹혀 강남으로 가는데오늘도 칼은 피를 먹지 않았다.칠십을 넘긴 우리 할아버지숱한 세월이 앉아 놀던 삐걱거리는 의자 위에 올라서서느슨해진 추를 다시 조이고한세상 살아버린 태엽을 감는데푸르륵 정맥혈에 숨이 가쁘다.땡!하고 바늘이 칼이 되어 목을 겨누면우리 할아버진 제 시간을 껴안고 시계 속으로 들어가끝없는 외길을 걷고 있을 게다.
서울 거주, 2004년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대상 수상,2004년 전국근로자문화제 은상 수상,2010년《열린시학》등단, 2011년 백교문학상 수상.
저기, 덩굴 풀같이/신순말
가다가다 못가면 쉬엄쉬엄 가자 한다
쉬엄쉬엄 가다가 한 자락씩 얹은 노래
옹이진 가슴사이로 꽃봉우리 피어나고
가다가 발 지치면 마음 먼저 보내란다
허공 걷는 새순처럼 마음은 눈이 밝아
쉼 없이 매듭을 풀며 디딤돌을 놓는다
경북 상주 출생, 상주들문학 회원, 경북작가 회원.
dolcong-i@hanmail.net
동학/양해극
보이소, 저 선한 눈 등 굽은 워낭소리
올 여름 폭염 속에 들끓다 부러졌나
시방도 아물지 못해 녹두꽃은 피는데
경북 상주 거주, yankas1@naver.com
환한 빈자리/오형근
내린 눈이 며칠째 꽝꽝 녹지 않고 있는 날, 아파트 주차장 어느 나무 밑에 작년부터 고양이 밥을 사서 떨어뜨려 놓고 있는데, 오늘도 나무 밑에는 어떤 놈이 먹었는지 살아 있다는 표시로 환한 빈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서울 거주, 1988년《불교문학》신인상, 2004년《불교문예》신인상으로 등단. 시집『나무껍질 속은 따뜻하다』,『환한 빈자리』.
푸른 감 /유재호
찌는 듯한 삼복더위 이글대는 뙤약볕에
푸른
감들은
무선충전 중이다
올 가을
서늘한 태양빛을
내 걸 것이다, 가지가지
경북 상주 출생, 1999년《시조문학》신인상 등단, 상주들문학 회원, 경북작가회의 감사, yoo3499@hanmail.net
갈대는 혼자서/유준화
갈대의 몸에는 울림통이 있어서
현악기와 목관악기로 목을 놓는다
칼바람이 구멍마다 파고드는 밤이면
지르르 찌르르 떠는 것이다
그 동내에는 귀뚜라미들이 살고 있어서
바람이 칼날을 휘두르면
갈대 잎을 비벼대며 쨔르르 쨔르르 운다
베옷에 갈대꽃을 넣어 모진 세월 이겨내던
백제유민과 동학군들의 넋이
동짓날 밤 금강변 곰탑 아래서
바람에 흔들리고 더러는 꺾여서
피 맺힌 허리로 피르르 피르르 운다
습지에서 살다가 다시 태어나
아픈 마음 보듬어 달라고
파르르 파르르 떨면서 몸으로 운다
세상 구멍들이 울림통이라는 걸 알았다
충남 공주 거주, 2003년《불교문예》등단, 시집『초저녁 빗소리 울안에 서성대는 밤』,한국시인협회 회원, 현대불교문인협회 회원.
석류꽃 지는/윤현순
북천변 나무들 사이로
그늘이 붉은 나무가 있네
멀리로 번져 희미해지는 꽃빛 말고
어미에게 공양하듯
제자리 다투어 흙으로 낙화하는
극진한 꽃을 보네
이승과 저승이 부딪치며 단 한번 토해놓는
툭,
저토록 아무 미련도 없는 소리를 듣네
경북 상주 거주, 상주들문학 회원, soon1500@hanmail.net
네 죄를 네가 알렸다/이미령
꼬꾸래미 스무 마리 줄줄이 포승줄에 묶여 장발 아래 머리 조아리고 있다
허리 부러진 놈, 입 튀어나온 놈, 머리 빠개진 놈··· ···
그 중 한 놈이 핏빛 선명한 눈알 부라리며 날 째려보고 있다
경북 상주 출생,《상주문학》으로 작품 활동. 상주문협 회원. 느티나무시 동인.
풍란(風蘭)/이설야
바람을 먹고 산다
습기를 먹고 산다
태생부터 서러운 것
속으로만 우는 것
허공에 드러낸 무상심(無常心)
물 한 모금도 구걸 않는다
경북 경주 출생, 2006년《불교문예》등단, 현대불교문인협회 회원, moon2312@hanmail.net
곶감철/이순영
상주에 곶감철이 오면
시가지는 긴 긴 휴가에 들어간다
시장 골목 정적마저 감돌고
쓰레기통 뒤지던 고양이도 얌전해진다
박시글박시글 하던 김정희머리방
미용사 팔짱 끼고 거리 구경한다
관절염 다리 할매도 시청 과장 사모님도
마스크, 모자 눌러 쓰고 감 깎으러 간다 간다
까만 차광막 씌운 감타래마다
번갯불에 콩을 볶는다 주황색 손들 춤을 춘다
할매 걸쭉한 Y담에 키득키득
여주인 눈동자 바쁘다
공판장 늦은 밤까지 경매 소리
왈랑~왈랑~왈랑~왈랑
시가지 감물 들이고
감 실은 트럭 출하 방향 표시 따라
새벽까지 줄 서 있다
장대로 찔러 보고 싶은 발가벗은 하늘
감나무잎 부끄러워 홍조 띄우고
골짜기로 붉게 흐르는 석양을 받아
서곡 동네 감은 익어간다
시가지는 감타래를 다 채울 때까지
조용히 엎드려 기다린다
경북 상주 출생, 시동인《느티나무시》로 작품 활동.
selimyoung@hanmail.net
돌아가는 이유/이승진
남의 머리 물그릇으로 사용했던 그 분은 주인에게 얼마나 미안 했겠어?
돌아갈 수밖에는……
게딱지에 밥 비벼먹다가 문득 그 분 생각하노니
남의 머리 밥그릇으로 사용한 나는 도대체 얼마나 오래 미안해야 하는지
돌아서서 훌쩍이는 한 여인을 보았네.
돌아서서 훌쩍이는 바다의 등을 오래 바라보았네.
경북 상주 출생, 시집『사랑 박물관』, 상주문협 회원.
지류에서 10
이승후
봉우리가 봉우리에 화답하여 높이 솟아 흐르고
저녁 새들이 모여든 나뭇가지마다
따뜻한 기운이 느껴진다,
한 운명의 길을 걸어간 농부의 죽음이
이토록 풍요로운 것은 어찌된 일인가
일찍이 나는 농부의 생을
인간이 걸어야 할 최고의 삶이라고 생각했다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손수 수확의 기쁨을 만져보는 일이야말로
진실로 자연에 맞서지 않으면 맛볼 수 없는
진한 고통 뒤에 만나는 샘과 같은 것
누군가 멋지게 일군 그의 논밭에 대하여
기억을 떠올려 주리라
태양 아래서 거짓 없는 땀을 흘려
생의 전부를 바쳤던 그대의 들판,
내 이런 고운 손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얼큰하게 취한 눈빛들 사이로 비집고 앉아
그의 생을 듣는다 지그시 눈을 감고
어두워오는 밤의 어느 기슭에서.
강원도 춘천 출생, 2003년《제3의문학》등단, 시집『겨울 한탄강에서』,『무도회의 수첩』. nacham1@hanmail.net
당신/이영옥
아침에
나를 깨우는 당신의 목소리
오늘도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당신이 만든 사랑의 끈 때문 이지요
겨울바람 속으로 다가서는
당신의 따뜻한 손길
계절이 바뀌어도
내 곁을 지키는 당신의 향기
열정으로 채워 주는
소리 없는 향기는
당신이 만든 사랑의 끈 때문입니다
경북 상주 거주, 사)환경미술협회 상주지부장, 사)대한시조협회 상주시 지회장.
해월/이종암
흥해들 지나 신광 깊은 산골짝
검등골에서
세상 밖으로 걸어나갔네
스승 수운(水雲)의 가르침 두 손으로 받아들고
험한 길 해월(海月)이 걸어갔네
관군에게 쫓기며 36년간
낮게 더 낮게 걸어간 그 발걸음
죽어가는 조선의 땅에
스승의 말씀 씨앗 뿌려 생명 모시는,
생명 길어 올리는
숨찬 길이었네
조선의 헐벗은 사람들 속으로
온전히 들어가서 그는 끝내 죽고
깜깜한 바다
하늘 높이 뜬 달이 되었네
경북 청도 출생, 1993년《포항문학》으로 등단,
시집『물이 살다 간 자리』,『저, 쉼표들』,『몸꽃』.
절규/이창한
가늘게 뜬 눈으로
하늘의 뜻과
땅의 운명을 가늠하며
숨을 모으고
덫에 걸리지 않으려
새까만 시간을 더듬고 있다
천하다는 것은
운명이라고 치자
밟혀서 짓누르며 옥죄이는 고통
저승이 더 편할까
보이는 것 들리는 것도 빼앗긴 채
깃발은 절규하는
천민의 소리를 내걸고
죽어서 원귀가 된
망령 일지언정
꽃으로 향기로
승리의 함성으로
한꺼번에 일어선다.
경북 상주 출생, 2010년《문예사조》등단, 상주문협회원.
saman01@hanmail.net
백 개의 계단이 떨어진다/임수랑
팔지 못하는 백 개의 계단
그런 소문이 공공연한 세상
철탑 위에서
백 개의 계단이 떨어진다
남을 짓밟고 뺏은 재물로 제사상을 차리지 마세요
그게 어디 보통 영혼입니까?
싸움을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어디 통조림 공장처럼 한 줄로 서서
보통 영혼들은 밥을 주는 대로 받아먹으라는
동일한 제사상입니까?
아래로 떨어진 백 개의 계단은 시지프스의 돌멩이
목숨을 사지 못하는 백 개의 계단은
하얗게 펼쳐진 눈밭에 붉은 피를 뿌릴지언정
빨간 잉크로 쓴 편지는 도착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여기, 부조리와 공포와 허위 속에서
아래로 떨어진 백 개의 계단은 특별했다
바다로 가지 못한 진흙과 모래들은
구름의 인질이 되어 엇박자로 공중에 떠다니고
백 개의 계단이 보이지 않는 자본의 세상
아래로 떨어진 백 개의 계단은 재물을 재현시킨다
그리고 자본, 당신들은
특별한 것이 특별하지 않게 될 때까지
스스로 하늘의 대장장이가 되어
이미 녹슬어 버린
백 개의 건반을 두드리고 쓰다듬는다
스스로 명목을 버리지 않으면
소음뿐입니다
소름뿐입니다
거기, 멈추세요
서울 출생, 2006년《월간문학》등단, 5.18문학상 수상(2011년). susuha3@hanmail.net
어버이날 선물/장원달
한의사 아들이 아버지 팔십 세 기념으로
천육백만 원 기아 승용차 사 주고
우리 집 보배 큰딸이 엄마 화장품 선물하고
작은딸 내외가 상주 와서 소고기 구워먹고
상주보 구경시켜주고 즐겁게 보내고 갔다.
효자 효부의 자녀들 둔 것에 감사한다.
내 아내는 고급스런 빨간색 자가용이 너무 예쁘다며
닦고 또 닦으며 어린아이같이 즐거워한다.
사랑이 담뿍 담긴 화장품 덕분에 젊어졌다며
신나게 유치원에 나간다.
사랑스런 자녀들 덕분에 금년 '어버이날'은 유난히
풍성하고 행복하다.
부모들 기분이 좋다.
나의 자녀들이여
효심 다 하는 모습에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리
이 세상에 살고 있음에 만족하다.
이 세상사는 동안 기쁘고 즐거워하리
어버이날 선물
하나님께 감사기도 드린다.
경북 상주 출생, 시집『사랑은 꽃수레를 타고』,『서로를 위하여』,『어머니』등 다수, 상주문협 회원.
하늘의 끝/정동재
나의 신념은 확고해졌다
나는 믿는다
모든 부모가 그렇듯
하늘의 무위는 무위자연은 한해 풀은 씨앗을 남긴다
씨앗은 이듬해를 열어나간다
물도 고이면 썩는다고 했다
겨울에 동사 당한 종자들 썩어진다
흐르는 사계를, 내일을, 넘보지 못 한다 모든 살아있음은
과히 천성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아들에게 나는 으레 의식주를 제공한다
부모면 누구나 하는 것 아니냐고 너스레를 떨 뿐이다
넙죽넙죽 이놈 잘도 받아먹는다
하지만 아들의 뇌리에 내가 오래 기억되어 장애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억 조 전 천지개벽에도 인간세계의 평화는 아직도 기저귀를 찬 얼라다
시간은 변화의 약속일 뿐 원래 없지 않았던가!
나는 믿는다
신은 죽었다고 말한 니체의 진심을 믿는다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을 믿으며
헤겔의 절대정신을 믿고 맹자의 성선설을 믿고 주자의 성리학을 믿는다
특히 밑줄 그어놓은 대학의
물유본말사유종시지소선후즉근도의 한 구절에선
우주라는 물고기도 예외 없다 내일의 그물망을 벗어나지 못한다
사과 열매는 사과 꽃을 피웠으므로 단기와 불기와 서기를 믿는다
오곡백과 달궈지는 천지역사의 흐름을 믿는다
인류의 오랜 불면증인,
비유하면 모래알이며 티끌이며 찰나에 불과하며 하루살이이기도 한 것이
또한 천지개벽 아니던가
하루란 상대적일 때 얼마나 큰 상반된 장단이던가!
높고 높은 하늘의 함부로 벌인 하룻밤 불장난이 아님을 믿는다
피와 살과 삶을 뚝 떼어 나눈 호미든 어머니 미소에 떠오르는
자식들의 안심을 빗대어 읽어 보시라 다른 한편으로
이마의 땀 구슬이 몸에는 진주 구슬임을 느껴 보시라 적어도
해와 달이 공치사로 하루도 쉬는 것을 나는 보지 못했다
하늘은 먼저 할복하듯 배를 갈라 오대양 육대주 쓸개까지 내어주며 남녀 분별을 틔워
내일이 열려가는 것을 보시라
그래도 많이 밝아진 사람 사는 세상 법이야 시간문제지만
남녀 사이 연애 문제며 변덕이 죽 끓듯 하는 마음이며 그리하여 달라지는 잣대며
문제의 답은 항상 사람이다
이쯤에선 느슨해진 벼락의 흐름도 다시 살펴 볼일이다
개똥도 약에 쓸려면 없다고
벼락 맞아 뒈질 놈도 따지고 보면 다 귀하디귀한가 보다
그분들 덕택에 천사는 결국 악마가 낳는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이준 열사의 할복에서 이순신 장군 유관순누나에게서 죽고도 사는 영원한 경지를 보았다
사람의 눈에도 명백한 하늘의 끝이 보였다
경기 김포 거주, 2012년《애지》등단,
qufdlthsus@naver.com
녹두새
- 동학농민혁명 백주년을 맞으며 /정의선
여기 있어도
여기 없는 사람마냥
늘 나의 자리는 빈자리다.
파랑새 앉지 않아도
수시로
녹두꽃 떨어지는 삶터에서
청포장사 울지 말라고
두 주먹 불끈 쥐어 봐도
늘상
하루살이 같이 스러지는 이승의 끄트머리에서,
그저 주홍글씨처럼 새겨진
천형(天刑)의 멍에 가슴에 묻고,
여기 있어도
여기 없는 사람 마냥
늘 머물고 있을 뿐이다.
경북 상주 출생, 상주《들문학》으로 작품활동, 시집『포도향기 가득한』, 성덕대학 바이오실용과학계열 교수.
사람은 누구나 꽃이었다 /제미정
사람은 원래 꽃이었다.
캄캄한 자궁 안을 비추는 환한 탯줄
두려움을 모르는 모성(母性)의 줄기로부터
잉태된 한 송이의 꽃
좁은 문으로 들어가 사랑의 형상으로 자라기까지
지독한 어둠 속에서 싹틔우는 법을 배우고,
긴 날 동안 줄기의 숨을 꼼틀꼼틀 받아먹으며
살구꽃처럼 뽀얀 꽃잎 그렇게 살이 되는 것.
사람은 새싹으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모태의 땅속에서부터 한 송이 꽃으로 완성되어
저 혼자 굳은 땅을 힘껏 박차고 나와
줄기가 잘려나가도 아픔 없이,
눈부시게 피어나는 그런 꽃이다.
저마다 다른 모양, 다른 색깔이어도
우린 모두 꽃으로 태어났다.
두려움을 희망으로 이겨낸 깊은 뿌리로부터.
경기 시흥 거주, 2006년《문학바탕》등단, 2010년 평론가가 뽑은 100대 작가. pinkbiru@naver.com
머리무덤 앞에서/조영옥
도로에서도 한참
제방을 타고 내려가 넓은 공터 지나
풀 나무 우거진 곳
길도 없이 내려가니 개울가
비석이 없다면 알아볼 수 없는
그의 무덤
누구에게 들킬까 마음 쫒기면서
여기 와서 한숨 돌렸구나
피 묻은 치마폭에 싸인
아들의 머리
어둑한 골짝
졸졸 흐르는 개울물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아들의 얼굴 바라보다
부릅뜬 눈 쓸어내리고
깨끗하게 얼굴 씻겨
조심조심 묻었구나
가슴에 묻었구나
이놈아 양반놈이 무어 하러
거기 어울려...
착한 내 자슥이 왜 그랬어?
사람은 공평하게 살아야 된다고
외적에게서 나라를 찾아야 된다고
그래 그래 다 옳은데...
근데 왜 니가 해야 하냐?
젖은 흙무덤에 엎어져
백발의 노모가 울었다
궁궁을을 궁궁을을
그래 그래 아들아
네가 바라던 세상
나도 이제 믿을란다
네가 옳으니 너의 세상도 옳은 세상이다
궁궁을을 궁궁을을
그의 목소리
오늘도 물소리로 흐른다.
* 머리무덤은 화남 임곡에 있는 강선보의 무덤을 말한다. 강선보는 양반출신이지만 동학교도가 되어 상주읍성 공격시 크게 활약을 하다 체포되어 효수당했다. 백발 노모가 몰래 머리만 치마폭에 싸서 돌아와 동리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개울가에 급히 묻었다한다.
부산 출생, 시집『해직일기』,『멀어지지 않으면 닿지도 않는다』,『꽃의 황홀』등 다수, 한국작가회의 회원.
대낮, 한울님들 /조재학
짧은 원피스 한울님이 붉은 꽃무늬 양산을 쓰고 갑니다
반바지에 구두를 신은 한울님이 쇼윈도우를 등지고 쪼그려 앉습니다
일하던 한울님이 모래 묻은 팔을 늘어뜨리고 폭염의 태양을 쳐다봅니다
신분증을 목에 건 한울님 두 분 냉커피를 들고 웃으며 갑니다
검은 양복을 입은 반백의 한울님이 서류가방을 들고 갑니다
하이힐을 신은 한울님이 백을 어깨에 걸고 스마트 폰을 보며 갑니다
유리창 안의 한울님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커피를 마십니다
머리카락은 엉겨 붙고 얼굴엔 땟국이 졸졸한 한울님이 지나 갑니다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한울님이 골목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습니다
사내애 손을 잡은 긴 머리 한울님은 큰소리로 통화를 하며 갑니다
치마는 땅에 닿고 허리는 굽은 한울님이 리어카에 폐지를 싣고 갑니다
회색 교복치마 한울님은 등에 가방을 지고 손엔 물병을 들고 갑니다
청바지에 배낭을 멘 다운펌 머리 한울님은 귀에 리시버를 꽂고 갑니다
군복 입은 한울님이 민소매 여자와 손을 꼭 잡고 갑니다
아랫배가 툭 튀어나온 꽁지머리 한울님이 얼굴의 땀을 닦으며 갑니다
한 울을 넘지 못한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대낮입니다
경남 마산 출생, 1998년《시대문학》등단, 시집『굴참나무의 사랑 이야기』,『강 저 너머』등, 상주문협 지부장 역임.
이팝나무꽃 /조정숙
시어머니 내어주신 두릅튀김이 딱 저랬다
하이얀 튀김가루 뒤집어쓴 그것은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와사삭 입안에서 녹았다
고소하고 향긋했다
이미 떠난 인연 그리는 이를 위해
눈길을 밟고 저 너머에서 건너온 편지인듯
올해도 어김없이
이팝나무 꽃 피었다
편지를 읽는 동안 침이 고인다
입안 가득 어쩔 수 없는 그리움이 고인다
경북 상주 출생, 상주들문학 회원. pure9378@hanmail.net
사과도 노동한다/최기종
사과 한 입 물었더니
몸이 움찔한다.
그것, 머리가 기억하기 전에
몸이 먼저 '딩'하고 운다.
스펀지처럼 온몸이 벌겋게 물든다.
머리가 아니라
몸이 맺은 결실이기 때문이다.
혹한도
봄날 아픔도
여름 땡볕도
가뭄도 태풍도 모두 몸으로 받아서
노동이 '툭'하고 떨어진 것이다.
이건 기름밥이다.
노동이 지어낸 것이다.
전북 부안 출생, 시집『나무 위의 여자』,『만다라화』, 『어머니 나라』,『나쁜 사과』등, 한국작가회의 목포지부장.
하루/최성익
본능적으로
빛보다 빠르게
혈관을 관통하는 독니여
그 속도로
그 치명적으로
나는 오늘도 죽어간다
살아낸다
경북 상주 출생, 상주《들문학》으로 작품활동, 2012 충북작가 신인상 수상. chs620101@daum.net
산 / 최순섭
산에 들면 세상 다 잊을까
이른 아침 배낭을 멘다.
탁 트인 하늘만 뵈는 산속에서 푹 쉴 거라고
산 나무가 수액 떨구며 안간힘을 쓰다가
가파른 능선 오른다는 걸
오늘도 까무룩 잊고 살아가는 산 아래 사람들
어디 앞산만 산인가
칼국수 먹고 자고나면 오르는 물가
막막함도 산이다.
그대와 내가
날마다 오르는 산 넘어 산
대전 출생, 1978년《시밭》동인, 2007년《작가연대》등단, 창작21작가회장.
죽음의 계곡에서 온 편지
- 김 알렉산드리아에게 /최형심
밀서를 받아든 자작나무숲, 이방의 여인은 하얀 장갑을 낀 팔로 빛바랜 목조 지붕을 건너서 왔습니다. 대장장이의 지붕 아래로 밀약들 모여들고 표정을 바꾼 바람의 행방을 물었습니다.
식탁 위에는 일곱 개의 요일이 놓이고, 화롯불 아래 벨리알*의 나라에선 산맥의 그림자가 불타고 있었습니다. 12월의 하루는 북쪽을 향하겠다는 전언이 그네를 흔들고 가고 미로 위로 햇살이 꽂힙니다.
빛의 산란을 꿈꾸는 모슬린 치맛자락이 검은 활주로를 따라 날아오르고, 처형식에 가는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서 녹슨 철 냄새가 났습니다. 지천에는 그림자를 먼저 보낸 꽃들의 이름이 가득했습니다. 도처에 태양이 무성해지고 있었습니다.
여인들은 저녁의 문을 열고 회전목마를 타러 갔습니다. 무릎을 세운 자들은 화약 냄새에 기침을 할 것입니다. 불 꺼진 필라멘트의 눈알이 여명을 보고 있습니다. 백야에도 횃불을 밝히는 이 누구입니까.
여기는 숨의 정원, 무정부주의자가 된 문지기들은 한겨울 순록 떼를 따라 떠났습니다. 적막의 국경을 넘어 어깨를 떠는 새의 무게가 숲을 흔들고 있습니다.
어제 처형된 입술에 대한 소문을 오늘의 벽시계가 엿듣고 있습니다. 검은 궤도를 태엽처럼 감으며 해바라기를 가득 실은 화물열차가 줄지어 지나갑니다. 손풍금을 타는 사람들의 손끝으로 붉게 전해오는 저편이 있습니다. 침묵을 떠넘기는 투명한 입술들은 이내 우리의 심장을 겨냥할 것입니다. 죽음의 골짜기를 향하는 여인의 발톱이 반짝, 붉었습니다.
* 벨리알 : 타락천사 중 한 명
서울 거주, 2008년《현대시》등단, 2009년《아동문예》문학상 수상, 2012년《한국소설》신인상 수상. elqut@hanmail.net
이 땅에 “동학은 무엇으로” 왔는가 /황숙
고독한
철저하게 외면당한
억장이 무너지는 한의 덩어리
동학을 하고 있으면서
누가 물으면
핏기 어린 대답일 뿐이다
왜
무엇 때문에
세월의 철퇴를 맞아야 했는가
이토록
사무치는
가슴 절절함은 그 무엇이었나요
너무나 간결하고
쉽고도 간단한 살아 지상 천국의 도
너가 한울님인줄을 진정 몰랐을까요
한 이치로 돌아옴이
이토록
왜.. 사람을 미치게 한답디까
때가 되면
손바닥에 시/천/주. 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
써달라고 방방곡곡 모여 든다고 하는데
흘린 피 너무나 많아
서슬 퍼런 원혼의 사무침이
대도의 앞날을 막는 탓일까요
노력 없이
받아먹은 게으런 주문일까요
굽어지고 병약해진 만고 진리를 어이 할꼬
일어서서 가기 어려우면
네 발로 기어서라도 오르고
너무 멀어 못가면 썩어 거름될 생각을 하라
한울 종자 한울 사람
마음의 기름종지에 돋우는 심지
돌아누운 자 누구이며 앞으로 나아가는 자는 누구인가
그냥 있어도 저절로 오는가
초가삼간 다 타도 하늘에 비 떨어지기만
기다리는 것이 용시 용활인가요
지키지도 못하였고
퍼주지도 못한 교육의 부재라
여기에 무슨 도통을 바라겠습니까
매미가 허물을 벗고
바다가 뒤집힐지라도
오고 가는 이가 없으면 도저히 불감당이라
개 같은 왜적놈 철천지원수놈 능욕의 36년에
종자 싹을 짓뭉게 버린 미완의 동학 혁명
피눈물 나는 산고의 고통이 너무 긴 탓도 있으리
너무 허기지고 뒤틀린 창자
어쩌지 못해서 훔쳐 먹은 밥일지라도
정신이 들면 참으로 돌아가야 하는 법
어찌 이리 되었는지
어찌 이렇게 되었는지
앞도 뒤도 먹장구름 사방이 눈뜬장님이다
쇠하면 성운이 온다지만
바라고 바란다고 공꺼로 주실까요
사람세상 칠십평생 닦아도 어려울 일을
그간에 우리 동학은
어떤 판을 꿈꾸어 왔으며
능히 받아들일 준비를 하였었나요
혹여
아니 오실지라도
한울님 모실 빈방이라도 마련 하셨나요
사람이 한울이라
더 이상
그 무엇으로 현세에 나타나리까
결단코
참회함이 있어야 하고
작금의 분명함이 있어야 살아납니다
마음공부 잘하였다면
선생님 분부 말씀 시킨데로 따라만 하였어도
이런 낭패 후회막급은 없었을 텐데
오지그릇 막사발 하나 만드는 일
어디 그냥 홀대해서 만드는 일이 있드뇨
하물며 민족대도 보국안민 포덕천하 광제창생의 길
이제라도
깨치시어 일어나소서
훌훌 털고 단디 부둥켜 안으소서
춘삼월 호시절에 태평가 부를 그날이 올 때까지
썩어 문드러지고 없을 육신을 불 태우소서
늦둥이 하나 키우는 재미처럼 살겨이 날아 오르소서
막힌 문
꼬인 마음
무극 대도 큰 강물에 뿌려 주시오면
부디.. 살아 지상천국 불 보듯 뻔 하옵니다
서면 백산
앉으면 백산
골백번 죽어도 잊지 마세나
한시 바삐 일어서서
춘삼월 호시절
광제창생 평화통일 대업을 이루십시오
때여
때여
한시바삐 동학의 큰 이치로 돌아오시라
경북 상주 출생, 상주꽃동네화원 운영, 천도교상주교구장. http://cafe.daum.net/sangju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