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명기 황진이
조선시대의 시인 ·명기(名妓).
일명 진랑(眞娘). 기명(妓名) 명월(明月). 개성(開城) 출생. 중종 때 진사(進士)의 서녀(庶女)로 태어났으나,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고 시(詩) ·서(書) ·음률(音律)에 뛰어났으며, 출중한 용모로 더욱 유명하였다. 15세 무렵에 동네 총각이 자기를 연모하다가 상사병(相思病)으로 죽자 기계(妓界)에 투신, 문인(文人) ·석유(碩儒)들과 교유하며 탁월한 시재(詩才)와 용모로 그들을 매혹시켰다. 당시 10년 동안 수도(修道)에 정진하여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천마산(天馬山) 지족암(知足庵)의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유혹하여 파계(破戒)시켰고, 당대의 대학자 서경덕(徐敬德)을 유혹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 사제관계(師弟關係)를 맺었다.
당대의 일류 명사들과 정을 나누고 벽계수(碧溪守)와 깊은 애정을 나누며 난숙한 시작(詩作)을 통하여 독특한 애정관(愛情觀)을 표현했다. ‘동지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를 둘에 내어’는 그의 가장 대표적 시조이다. 서경덕 ·박연폭포(朴淵瀑布)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렸다. 작품으로 《만월대 회고시(滿月臺懷古詩)》《박연폭포시(朴淵瀑布詩)》《봉별소양곡시(奉別蘇陽谷詩)》《영초월시(咏初月詩)》 등이 있다.
황진이는 도대체 누구이길래 그렇게 잘 알려져 있고 유명한가? 지금부터 한번 살펴보자.
일단 황진이에 대해서 알아보기 이전에 시대적 상황에 대해서 알아 보아야 한다.
조선시대,고려시대 말기부터 받아 들여진 성리학이 조선시대에는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여짐으로써 남자를 중요시 여기던 성리학의 영향으로 여자들의 위치는 점점 떨어졌다. 그 대표적인 예로 남존여비 사상(남자는 귀하고 여자는 천하다.) 삼종의 도(결혼하기 전에는 아버지를 따르고 결혼하고 나서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은 후에는 아들을 따른다.)등이 있다. 이걸 보면 조선시대 여자들이 얼마나 천대 받았는지 알 수 있다. 여자들은 태어나면서 부터 차별대우를 받아 남자아이들은 글을 가르치고 여자 아이들은 바늘을 가르쳤다 한다. 또한 여자는 결혼하면 홍역을 하는것과 같다고 할 정도로 힘든 결혼생활을 했다. 한번 살펴보면은 남자는 여러 첩을 거느릴 수 있으나 여자는 질투를 하는 것조차 금기였다. 결혼하면 항상 남자의 말에 복종해야 하며 독수공방하기 일수 였다.
뿐만 아니라 몸과 마음이 피곤하였으며 경제적 고통까지 격어야 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자살하는 여인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면 조선시대 기생의 삶은 어떠하였을지 알아보자(황진이가 기생이니 당연히 알아보는게 좋겠다.)
기생은 조선 8천중의 하나로 천민계급이다. 하지만 대하는 사람들은 고관대작이기때문에 여러 방면에 능통하여야 한다. 시, 산문, 노래, 가야금, 거문고, 그림, 춤등 고관 대작들을 대하기 위해서 매우 많은 것들을 배웠다. 그중에서도 그 실력이 아주 뛰어나 이름이 알려진 기생을 명기라고 했는데 쉽게 말하면 초 앨리트 기생이라고 할 수 있다. (황진이는 조선의 명기로 유명하다. 명기중의 명기 앨리트 중의 초 앨리트 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황진이에 대해서 알아보자.
본명은 진 기명은 명월이다. 조선 중기 개성(송도)의 명기로 유명하다.
1520년대부터 ~ 1560년대쯤 살았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고 정확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황진이는 용모가 출중하고 예민하였으면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그의 어머니 진현금은 개성의 병부교 아래서 빨래를 하다가 황진이의 아버지 황진사를 만나서 그의 첩이 됐다고 한다.
황진이는 많은 남자를 쉽게말하면 후렸다. 그 명단을 공개해보자.
황진이가 10대일때부터 외모가 출중하여 여러사람에게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옆집 총각이 황진이를 짝사랑 하여 상사병에 걸렸다고 한다. 그런데 황진이의 어머니는 그 총각을 절대로 만날 수 없게 하여서 그 옆집 총각은 그만 상사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상여가 황진이의 집 앞을 지나다가 땅에 붙어서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황진이의 속저고리를 덮어주었더니 움직여서 갈 수 있었다고 한다. 황진이는 왜 자신때문에 그 나자가 죽었을까를 생각하며 기생이 됐다는 말이 있다.
두번째 남자는 개성 유수 송공이다. 대부인 연회석에 황진이를 초대 하였는데 그때 여러 사람들이 황진이의 빼어난 모습을 보고 반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황진이가 유명해 지게 된다. 황진이는 송공과 그전부터 함께 지낸 사이라고 한다.
세번째 남자는 선전관 이사종이다. 사신으로 송도를 지나다가 천사원 냇가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그 노래가 아주 출중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황진이가 그 노래에 빠져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황진이가 "개성에 이사종이라는 사람이 노래를 잘 부른다는데 그사람인가 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알아보게 하였는데 정말 이사종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황진이가 찾아가 서로 마음속에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는 이사종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여러밤을 함께 지냈다고 한다. 그러던중 마음에 들었는지 이사종에게 "내 마땅히 당신과 6년을 살아야 겠소"라고 말하고는 이사종에 집에 3년동안 먹고 살 돈을 가져 가서 살고 3년후 이사종을 자신의 집으로 대려와 살았으며 6년이 지난 후에는 깨끗이 헤어졌다고 한다. 이걸 보면 황진이가 얼마나 자존심이 강했으며 당당한 여자인지 알 수 있다.
네번째 남자는 양곡 소세양이다. 그 남자는 "남자가 여색에 혹함은 남자가 아니다!" 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황진이와 30일을 지내고 깨끝이 끝내겠다라고 큰소리 쳤다고 한다. 황진이와 30일을 지낸후 황진이가 송별소양곡을 불렀다. 그걸 듣고 소세양은 나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황진이와 함께 몇일을 더 살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