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새 삯
이주연
촉촉이 내린 봄비의 끝자락에서
성스러운 바위의 밤에 산을 오르며
초저녘 맑은 공기를 마셔본다
캄캄한 밤하늘 별빛도
보이지 않는 가로등 불빛사이로
자연속에서 오르막을 오르며
숨가프게 포옹을 해본다
자연의 입맞춤이 새 삯을
돋게 하고 그 새 삯 꽃 필땐
우린 멀리서 친숙이 무르익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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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무는
이주연
나뭇잎이 흔들릴 때
가만히 그 속으로 따라가 본다
이파리가 흔들리기까지
가지가 줄기가 뿌리 묻고 있는
저 땅이 얼마나 많은
날을 삭아내려야 했는지
가볍게 흔들리는 것 뒤에는
언제나 아프게 견딘 세월이
푸르게 날 세우고 있다고
외로움이 없었겠는가
허공으로 길 하나 내기 위해
초승달 돋은 하늘에 가슴을 풀어놓고
얼마나 몸서리를 쳤는지
돌아앉아 숨 고르는 소리 그러면서
나무는 제 한숨을 나이테 속에
꼭꼭 태워 넣고 섰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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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솎음 질
씨앗 껍질 머리에 인 채
대지 뚫고 올라온 생명체들
자신의 놀라운 힘 자랑한다
따뜻한 햇볕 시원한 바람 아래
배추밭 기름진 푸른 물결
튼실한 몸매로 좁아진 공간
지난 밤 가만히 왔다 간
봄비로 훌쩍 자란 저들
가깝타 아우성이다
솎음 당함도 남겨짐도
오직 님의 뜻에 따라
살고 죽음이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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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새해
붉은 해가 돋습니다
바다를 뚫고 나온
착한 마음 가득 담은 신의 선물입니다
해를 섬기는 이유로
누리엔 차곡차곡 햇살이 자랍니다
익어가는 곡식처럼
아름다운 시간
눈물 속에서 핀 얼음덩이 열고
살아가는 이유도 흙에 묻어 두라했습니다
다만
아침 이슬에 빛나는 찬란한 말들을
꽃으로 심어두라 했습니다
이별이 아쉬워도
봄이 오는 길목에 필
목련 한 그루로 자라라 했습니다
실하게 꿈꾸는 동안
첫 날이 숭숭 뚫린 가슴에
알알이 들어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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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생명
귀를 대 보세요
숨소리가 들리는가
불러보세요
다정한 목소리로
만져보세요
따뜻한 손길로
바라보세요
사랑스런 눈빛으로
이 세상 모든 생명은
한없이 고귀한 목숨,
그들이 지구에서 살아갈
신성한 권리가 있다지요
저도 사람들과 같이
행복을 누리며 살고 싶어요
저는 버려진 아기 고양이.
6. 봄
당신은 해마다 꽃을 기약하지만
나는 날마다 속없이 웃겠습니다.
당신은 겨울 내내 꽃을 벼르지만
나는 오늘의 햇빛 오늘 누리겠습니다.
당신은 해마다 꽃등 내걸겠지만
나는 날마다 내 생에 감사하겠습니다.
해마다 당신은 꽃으로 돌아오겠지만
나는 제자리에서 한 치씩 깊어지겠습니다.
7. 가 을
조롱조롱 매달려
여름내 익어가던 은행
높고 푸른 하늘아래
가을색으로 탐스럽다
풀벌레 울음소리 커가고
아침 저녁 서늘한 바람속
은행잎은 생(生)의 마지막
거룩한 의식인 양 우아한 춤추며
사뿐히 땅위에 내려 앉는다
앙상한 나목 치장하는 눈꽃
봄은 어김없이 찾아와
연록색 잎을 재촉하겠지
시작과 마침은
태초부터 동일점 인것을
이제사 새삼스레 아파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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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멈추고 싶은 시간
낮과 밤이 비켜서는 해거름
무거운 사연들에 짓눌려
바람 안고 마중 나온 강변에 서면
가슴엔 파란별이 뜬다
낙조에 걸린 초승달 굽은 잔등
무심한 세월 업혀가
캄캄한 터널 속 실연의 날들
슬픔은 독초로 무성이 자라
한없이 황폐해진 삶
철들어 눈물 가득 쏟지만
바람도 잡지 못한 세월은 고개만 절레절레
불로초 어디 없을까, 진정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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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비가 되어
이주연
비 오는 날에는 비가 된다.
어느 길거리 우산을 받쳐든
그대 위로 뛰어내려 옷자락
끝을 적시며 함께 걷고 싶다.
비 오는 날에는 빗물이 된다.
그 어느 곳 그대 집 위로
떨어져 처마끝을 타고
내려 땅속으로 파고들어
어느 바람 좋고 햇살 좋은 날
이름 모를 꽃을 피워 그대의
눈길을 잠시 머물게 하고 싶다.
비 오는 날에는 그대
인냥 여기며 그냥 내리는
빗방울을 바라다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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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나무에 기대어
나무야 네게 기댄다
오늘도 너무 많은 곳을 헤맸고
많은 이들 사이를 지나왔으나
기댈 사람 없었다
네 그림자에게 몸을 숨기게 해다오
네 뒤에 잠시만 등을 기대게 해다오
날은 이미 어두워졌는데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왔다는 걸 안다
네 푸른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잠시만 눈을 감고 있게 해다오
나무야 이 넓은 세상에서
네게 기대야 하는 이 순간을 용서해다오
용서해다오 상처 많은 영혼을
11. 애호박
이주연
슬금슬금
담벼락기는
길고 가는 손가락
옆구리에 혹 달고
애동이
거북처럼 엉금엉금 담장 넘어
초록 주먹 쥐고서
하늘 향해 오르다
커다란 나팔 배꼽에 매달고
서두르며 악동 따라 잡는다
쉬어가자, 쉬어가
지짐한 절음 먹고 떠나자
12. 비
이주연
고개 들어 느껴보자
무수한 별들이 쏟아지는 것처럼
조각난 방울들이 모이더니
정수리를 겨냥하여 차츰 가슴으로 젖어들 듯
쏜살같이 내게로 달려든다
물비린내와
온몸으로 스미는
축축함과 싸늘함
고개를 접지말자, 받아들여라
돌발적 난타, 반란의 종착
알짝지근한 이 느낌
좋다!!
알큰한 인생이 좋다
13. 산 세(山勢)
이주연
출렁이는 것은 물결만이 아니다
등성에 흐르는 푸른 흔들림
콧등 씻기는 바람 유정有情
굽은 허리 휘돌아 칠 때 쯤
휘파람 소리내며 걷던
시어미 잦은 발자국은
가슴 태우던 날의 모정母情
양분 빼앗긴 강 건너 검은 토양이
쇳소리로 흐느끼던 밤에도
도도히 눈감아 버린 무정無情
속곳마저 벗어버린 가녀린 가슴에
다시 거두어질 아픔같은
그대 손길 애정曖情
14. 억새꽃
이주연
바람이 일면 이는 쪽으로 하얗게 무리지어
일렁이는 하얀 꽃 너울처럼 나풀거리며
꽃잎이 바스스 부서지고 바람 따라
가을여행 이라도 떠나려는지
빛 바랜 억새꽃이 어스럼 하늘가에 떠있는
달빛보다 더 고운 은은한 은회색의 꽃으로
아름다운 들녘을 수놓으며 바람을 등지고 부서졌다
일어나고 일어났다 부서짐을 반복하며
가을 저녁을 색칠하고 불어오는 바람에 휘날리는
눈꽃처럼 너울너울 춤을 추며 떠나는 가을
여행이라도 떠나려는지
출렁이는 은빛의 바다에 바람 아씨 심술로
못다 핀 갈대꽃의 애절한 몸부림으로
삶을 정리하는 작은 그림자 너훌너훌 춤을 추며
희미해진 들녁에 가을이 자리하고 곱게 피운
갈대 꽃 의 애절한 몸부림에 가을밤이 깊어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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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배추벌레
네모난 도마 위에 풋배추를 썬다
맵찬 푸른 물이 썰리면서
뭉툭 잘려나간 벌레 한 마리
놀라 팽개치고 돌아보니
아, 너도 숨기고 싶은
징그러운 아픔이 있었구나
네 몸통만 한 구멍 하나 내기 위해
엎드리고 엎드려 밀고 왔을 세상
지하도 입구에서 너를 보았다
세상의 무관심으로 너는 담대해졌고
건드려서는 안 되는 징그러움만
배짱으로 남아 꿈틀거렸다
애초에 너와 나 먹고 먹힐 관계도
아니면서 하필 칼 앞에서 만나
한번 외면이 치명적이었던 그 사람처럼
네 앞길이 절단나고 말았구나
저녁 시간은 다가오는데
도마를 벗어나지 못한 토막 난 너를
쓰레기통에 넣을 일만 난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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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돌고 돌아가는 길
이주연
산을 넘고 넘어 돌고 돌아
그 뫼에 오르려니 그 뫼는 어드메뇨
내 발만 돌고 도네
강 건너고 건너 흘러 흘러
그 물에 적시려니 그 물은 어드메뇨
내 몸만 흘러 흘러 발만 돌아
발밑에는 동그라미 수북하니 몸 흘러도
이 내 몸은 그 안에서 흘르가네
동그라미 돌더라도 빨리 가면 어이하나
그 물 좋고 그 뫼 좋아 어이 해도 가야겠네
산 넘어 넘어 돌고 돌아가는 길에
뱅글뱅글 돌더라도 어이 아니 흐를쏘냐
흘러흘러 세월 가듯 내 푸름도 한 때인데
돌더라도 가야겠네, 내 꿈 찾아 가야겠네,
산 넘어넘어 돌고 돌아 그 뫼에 오르려니
그 뫼는 어드메뇨 내 발만 돌고 도네
강 건너건너 흘러흘러 그 물에 적시려니
그 물은 어드메뇨 내 몸만 흘러 흘러 가네
17 달팽이가 사는 법
이주연
나는 한때는 눈물 많은 짐승이었다.
이슬 한 방울도 누군가의
눈물인 것 같아 쉬이 핥지 못했다.
하지만 난 햇살이 떠오르면
숨어야만 하는 존재로 태어났다.
어둠 속에 갇혀 홀로 세상을 그려야 하고,
때론 고개를 파묻고 깊숙이 울어야만 한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
그런 천형의 삶을 살고있는 것인가.
등에 진 집이 너무도 무겁다.
음지에서, 뒤편에서 몰래몰래 움직이다보면
괜시리 서럽다는 생각이 들고,
괜시리 또 세상에 복수하고 싶어진다.
난 지금 폐허를 만들고 싶어
당신들의 풋풋한 살을 야금야금 베어 먹는다.
18 꿩 울음소리
이주연
꿩꿩 꿩들이 울며
산속으로 날아오른다
보리밭 너머 하늘
펼쳐놓은 광목이 찢어지고
빛은 무더기로 쏟아져내린다
꿩꿩 꿩들이 울며
산속으로 날아오른 뒤
감꽃이 활짝 웃고
이 빠진 아이들의
바지가 짧아지고
젖무덤
봉긋해진 계집애들
하릴없이 쏘다니며
재잘거린다
19 종각에 매달린 종
이주연
무거우면 무겁다며
진즉에 말씀을 하시지 않으시고
이제 그만 이 짐 내려달라
하시지 않고 그러셨어요
내가 이만큼 이고 왔으니
이제부터는 너희들이 좀
나누어 지라고 하시지 그러셨어요
쉬엄쉬엄 한숨도 쉬고
곁눈도 팔고 주절주절
신세타령도 하며
오시지 않고 그러셨어요
등골 휘도록
사지 뒤틀리도록
져다 나른 종소리
지금 한눈팔지 않고
저 먼 천리를
달려가고 있습니다
뒤틀린 사지로 저리도
바쁘게 달려가는 당신 앞에서
어찌 이승의 삶이 무겁다 하리까
고작 일흔 세월을 지고 온
이 육신의 짐을 어찌 이제
그만 내려달라 하겠습니까
20 쑥국
이주연
쑥국이 올라온 저녁 밥상
국물 한 방울도 아껴 먹는다
밥 두 숟갈에 국물 한 숟갈
식도를 타고
짜르르르 내리는 더운 맛
소름이 돋는다
감기에 막힌 코가 뚫리고
낮에 다퉜던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21 잡초가 사는 법
이주연
쉴 새 없이 올라오는 풀
뽑다가 뽑다가
풀들에게 한 수 배운다
올라오는 족족
대가리 분지르고
뿌리까지 뽑는 나에게
품었을 시퍼런 원한 같은 거
까맣게 잊고 모른 체
아무렇지도 않게
또 얼굴 내밀었네
작년에 핀 것 잊고
엊그제 핀 것 잊고
호미 들고 기다리는 내 앞에
오늘 또 꽃까지 피워 올려
빙그레 웃고만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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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회
이주연 시인 작품
김판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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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07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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