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제16회 오늘의시조시인상 수상작>
푸른 입술
김덕남
다 헐은 보트 하나 파도에 출렁인다
부표도 등대도 없는 캄캄한 바다 복판
물집이 터질 때마다 소금물이 덮친다
꿈을 놓친 푸른 입술 허기를 물고 있다
첨버덩 울음 하나 별똥별로 떨어져도
혼신의 생을 저으면 슬픔 너머 닿을까
움푹한 동공에는 달빛이 소복하다
턱밑에 부서지는 물살에도 꽃이 피듯
한 끼니 정찬을 찾아 시리아를 넘는다
<제16회 오늘의시조시인상 수상소감>
시조가 웃을 때, 웃겠습니다
김덕남
꿈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텃밭의 농막에서 김장용 배추를 절이고 있는데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고무장갑을 벗어 던지고 텃밭 언덕을 거닐었습니다. 제게 이런 순간이 오다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코로나로 세상이 어두운데 저만이 환하고 밝은 것 같아 민망하고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곰곰 생각해보니 지난날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칩니다. 어느 날 시리아의 보트피플과 해변으로 밀려온 아기 ‘쿠르디’의 모습이 뉴스에 보도되었습니다. 아, 탄식과 함께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에선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 한 조각 보트에 몸을 맡기는 난민이 있겠지요. 그들을 소재로 글을 써 상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글 쓰는 게 사치인 것 같기도 하고요.
6.25가 남긴 상처, 이산가족 만남의 TV 프로그램 생방송을 보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 때가 생각납니다. 시리아 난민들의 일이 남의 일 같지 않았습니다.
항상 오늘을 지향하는 오늘의시조시인회의 이름으로 주는 이 상의 의미가 너무나 크다는 것을 알기에 어깨가 무거워집니다. 그러나 제 어깨엔 제가 감당할 만큼의 짐을 지고 가겠습니다. 시조로 다가오는 만물에 감사함을 가지겠습니다. 만물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얘기에 귀 기울이겠습니다. 그리하여 시조가 웃을 때 저도 따라 웃겠습니다.
겸허히 상을 받들며, 쟁쟁한 작품들 중에서 제 시조를 눈여겨 선해 주신 1차, 2차 심사위원님들께 감사의 절을 올립니다.
<제16회 오늘의시조시인상 심사평>
오늘의시조시인상 시상이 16회를 맞는다. 이 상은 선배시인들의 추천을 통한 선정으로 각별한 의미를 더해왔다. 특히 시인의 이름을 가린 미발표 신작을 후보로 올리는 과정의 공정성과 선정 방식에서 위의를 달리한다.
이번에도 2022 『오늘의시조』에 실릴 신작(등단 15년 이내의 시인)을대상으로 추천과 심사에 들어갔다. 먼저 이름을 지운 90명의 180편을 2회의 추천과 합산을 거쳐 선정하는 방식이다. 1차 심사에서는 이사 총 34명 중 28명이 1편씩 추천(선고)한 작품으로 28편(중복 포함)이 가려졌다. 28편을 다시 고문 · 의장 · 부의장 · 특위 위원장들에게 보내 22명이 2편씩 추천(투표)하는 방식으로 2차 심사를 마쳤다. 그 결과 9표를 받은 김덕남의「푸른 입술」이 16회 오늘의시인상 수상작으로 결정됐다. 그 다음으로 「쥘부채 너름새」(이순권), 「옹이를 말하다」 (박복영)가 각각 1표 차로 이어졌으니, 이번에는 한 작품으로 몰리기보다는 분산된 평가를 보여줬다.
「푸른 입술」은 오늘날 세계적 고민으로 떠오른 난민 문제를 다룬 점에서 인정을 더 받은 작품이다. 주지하다시피 난민(refugee, 難民)은 '인종, 종교 또는 정치적, 사상적 차이로 인한 박해를 피해 외국이나 다른 지방으로 탈출하는 사람'을 이른다. 갈수록 많은 난민이 지구 곳곳에서 발생하며 국경이 맞닿거나 인접한 국가 사이에는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로 극심한 갈등 요소가 되고 있다. 정치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난민이 이후 세계의 가장 큰 문제로 커질 것이라는데, 난민 인구가 계속 늘고 있는 현실 또한 위협적인 측면이다.
김덕남 시인은 난민 중에도 "시리아를 넘는 사람들 즉 시리아 난민의 목숨을 건 탈출에 주목한다. 내전으로 시작된 시리아 난민은 "다 헐은 보트 하나에 몸을 싣고 "혼신의 생을" 젓는 탈출의 역사가 십년을 넘고 있다. 다만 목숨이라도 보장받는 삶을 위해 어린 자녀들을 업고 안고 바다를 건너며 험난한 탈출에 생을 건다. 도중에 사망자도 속출하지만 그래도 "슬픔 너머" 조금이라도 나은 곳에 닿고자 죽음을 무릅쓰는 것이다. “한끼니 정찬을 넘어 목숨의 부지조차 시급하므로 나고 자란 터전을 떠날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런 난민의 아픔에 시선을 돌린 "푸른 입술"의 미덕은 시적 대상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푸른 입술”은 인간 이하의 삶으로 내몰린 사람들의 굶고, 지치고, 두렵고, 의지가지없이 바닥을 끌고 가는 난민의 환기로 인상적이다.
「푸른 입술」에 이어 추천을 많이 받은 「쥘부채 너름새」와 「옹이를 말하다」는 각기 다른 개성이 눈에 띈다. 쥘부채 너름새」는 활달한 리듬으로 펼쳐가는 시조의 걸음새와 표현의 너름새가 시원시원하다. 거기에 “우르릉" 쏟아내는 흥에 춤을 덩실 얹는 가락들도 흡입력을 이끌어낸 힘으로 보인다. 이와 대조적인 면에서 「옹이를 말하다」는 내면으로 파고 들어가는 밀도 있는 성찰이 돋보인다. "옹이가 되기까지의 시간을 돌아보는 “상처를 얻었으나 모서리를 잃었으니" 같은 빛나는 구절과 대조적으로 이완이 나타나는 종장에서 조금 밀린 듯하다.
이러한 소견은 오늘의시조시인상의 추천과 심사 과정에서 나온 의견에 평가를 붙인 것이다. 여기에 더하면, 전반적으로 시적 대상이나 발상 등의 낯익음은 물론 인식의 평이함이라는 지적이 있었고, 새로운 세계를 개진하는 탐험보다 기존의 시조에 편히 머문다는 의견이 있었다. 오늘의 시조시인회의 회원 중에서도 신예라면 '오늘'에 걸맞은 아니 그 이상의 세계를 헤쳐내야 '내일'의 시조를 열어내지 않을까? 이런 진단과 고민 그리고 고언苦言이 있었음을 심사평에 얹는다.
대표집필 : 정수자(발전 · 심의위원장)
- 《오늘의시조》 2022. 제1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