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틈, 그 사이로 얼비치는 부재
염창권
틈
......전략
어머니의 몸을 “젖꽃판”이라는 역사적 대상으로 환치했던 시인이, 이번에는 〈요양원 일기>를 통해 어머니의 현존을 기록한다. “젖꽃판,/ 갈비뼈 위에 낙화인을 찍고 있다(<젖꽃판〉에서)"고 했을 때, “젖"을 물렸던 시간과 "낙화인을 찍"는 시간 간의 거리가 몸의 역사를 통해 통합된다. 과거의 시간이 현재 시간에 중첩되는 것이다. 이 것은 주체나 관찰자나 간에 통일된 기억의 자장 내에 머무름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러나 기억의 날줄을 놓아버린 이상, 이와 같은 통합적 주체 인식은 자꾸 중심을 벗어 나게 된다.
거울 속 분칠하는 한 여자가 그를 본다
웃자란 눈썹 자르다 송두리째 파낸 기억
흐릿한 눈동자에 갇힌
새 한마리 파닥인다
외계인이 찾아왔나, 어느 별을 헤맸더냐
눈시울에 얹혀 있던 낯선 자식 바라보다
기억 속 창밖을 향해 더듬더듬는다
꽃신을 신던 발이 자꾸만 재촉한다
뒷산의 뻐꾹새가 저리 운 지 오래라고
철침대 난간을 잡고
허물 벗는 꿈을 꾼다
- 김덕남 <요양원 일기>(<서정과현실》 상반기호)
시적 대상은 요양원에서 살아가는 한 여자이고, 분(粉)칠 혹은 분(糞)칠 하는 여자이다. 세상에 대한 분별이 사라진 것은 "웃자란 눈썹 자르다 송두리째 파낸 기억이나 "기억 속 창밖을 향해 더듬더듬 읊는다”에서 볼 수 있듯, 기억에 틈이 생기고 갈라지면서 무수한 공란(空欄)을 만들었기 때 문이다. 실상 '나'라고 하는 주체에 대한 인식은 내가 가진 기억의 총량을 통해서만 확인될 수 있다. 물론 내가 가진 기억은 삭제, 왜곡, 망각, 창안된 상태로써 기억하는 것들이고, 이들이 다시 나의 의지에 따라 조합, 의미화된 상태가 정체성이다. 시조에서 “흐릿한 눈동자에 갇힌 새 한 마리 파닥인다”고 했을 때, 자식에 대한 본능적인 추구를 암시하지만, 정작 눈앞에 있는 자식도 “더듬더듬" 기억을 회복해야 하는 “낯선" 사람이 되고 말았다. "꽃신을 신던 발"의 시간과 “뒷산의 뻐꾹새”가 우는 시간 사이에 끼어 있는 한 인간의 역사가 공란화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종장에서 "철침대 난간을 잡고 허물 벗는 꿈을 꾼다"고 했을 때, 그 기억의 망실이 결코 손상이 아니라 현생을 벗고 재생의 길로 들어서는 몸 바뀜의 과정으로 파악된다. 이 시조가 쉽사리 비관적 정서에 물들지 않은 것은 존재의 틈을 벌리는 기억의 망실이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허물을 벗고 새 생명으로 이전될 수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피관증(避觀症)'이라는 조어(造語)를 만들어 볼 수 있겠다. 우리가 원하지 않은 것을 애써 외면하는 상태, 죄책감을 동반한 무관심의 상태가 그와 같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두려움 속에서 외면하는 현실이 ‘피관증'으로 나타날 것이나, 그와 같은 일이 우리에게도 언젠가는 들이닥칠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기억
"역사는 기억을 통해서만 성립할 수 있다.”는 리쾨르의 말을 전제 삼는다면, 개인의 역사 또한 기억을 통해서만 성립된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생생한 현실은 곧장 현재 의 지평 밖으로 사라지면서 과거가 된다. 나의 정체성을 보호하고 담보해주는 것이 기억의 힘이다. 기억의 온전한 유지는 내 정신의 올바름을 바탕으로 가족과 친구들 이 나의 기억을 확장시키고 보호해 줄 때라야 가능한 일이다. 친구와의 우정이나 가족간의 연대가 노년의 고독을 해소하고 방어하는 데 가장 값진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기억의 유형에 있어, 베르그송은 순간적이고 자발적인 기억과 힘들게 얻어낸 기억을 구분한다. 이에 대해 리쾨르는 떠오름(Evokation)과 찾아감(Suche)의 대립으로 정리한다. 영화 <메멘토>에서 보여준 것처럼 몸에 남기는 기록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몸에 남겨진 기록은 생의 매 순간 참조되면서, 현실이 결국 과거의 지속임을 끊임없이 일깨운다. “갈비뼈 위에 낙화인을 찍는" 노쇠한 신체는 절대 수치스럽지 않다. 출생과 양육의 역사적인 장면, 즉 모성적인 꽃으로 피어난 시간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몸의 아름다움을 '섹슈얼리티를 가진 대상'으로 한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몸의 역사를 오래 기록해 온 노년의 신체에 대한 탐구와 예찬이 필요하다. 몸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늙은 몸/신체'에 대한 응시의 방법이 그다지 발견되지 못한 것은 우리의 무관심 때문이라기보다는, 젊은 몸을 상품화시키는 상업주의에 경사(傾斜)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인들이여, 단백질이 뭉쳐진 식스 팩에서 시선을 거두고 몸의 주름을 사랑하시라. 직선으로 뚫린 평지보다는 완만하 게 구릉진 둔덕을 따라가는 길에서 시적 몽상이 한껏 부풀어 오를 것임을.
염창권 gilgagi@hanmail.net / 시인, 1990년 <동아일보>(시조), 1996년 <서울신문>(시)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 시 집으로 <그리움이 때로 힘이 된다면> <햇살의 길> <일상들> 등과 평론집 《집 없는 시대의 길가기>가 있다. 한국시 조시인협회상 수상. 현재 광주교대 교수.
- 《유심》 2014. 8월호. '월평 · 時調'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