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인재 활용이라는 면에서 서얼에 대한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조정에서도 일찍부터 제시되었다. 중종대에 조광조(趙光祖)가 이미 통용을 제안했다는 것이 후대의 허통론자(許通論者)들의 통설로 인식되었다. 명종대에는 서얼들 스스로 양첩손에게 문무과의 응시를 허용하라는 소를 올렸다.
1567년(선조 즉위년)에도 서얼 1,600여명이 허통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1583년(선조 16) 이탕개(尼蕩介)의 난이 일어났을 때 병조판서 이이(李珥)는 난을 평정할 인력확보책의 하나로, 서얼로서 6진 일대의 근무를 지원하는 자는 3년만에 허통해 과거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 제안은 직접 채택되지 않았지만, 임진왜란 중에 전시 재정난 타개의 한 방법으로 쌀을 받고 허통해 주거나 전공에 대한 포상으로 허통해 주는 예를 낳았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차별은 여전히 심해 광해군 때 ‘칠서지옥(七庶之獄)’이라 하여 박응서(朴應犀) 등 서얼 출신 7인이 관련된 역모 혐의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하였다.
서얼허통에 관한 조정의 논의는 인조 · 현종 · 숙종 연간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허통의 실적은 1597년(선조 30)부터 1735년(영조 11)까지 138년간 문과 급제자가 42인에 불과한 정도였다.
숙종대 이후로는 서얼들의 집단상소가 자주 있었다. 1695년(숙종 21) 영남 지방 서얼 988명, 1724년(영조 즉위년) 정진교(鄭震僑) 등 5,000인이 각각 상소한 것이 유명하다. 영조는 1772년 서얼을 청요직에도 등용한다는 통청윤음(通淸綸音)을 내리는 한편, 서얼도 아버지와 형을 아버지와 형이라 부를 수 있게 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역률로 다스린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학교에서 서얼들의 서열을 따로 두지 못하게 하는 서치법(序齒法)을 적용하고, 서얼도 일반 양반과 마찬가지로 향안(鄕案)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게 하는 문제 등에 부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청요직 가운데 서얼을 위해 가장령(假掌令) · 가지평(假持平) 각 한 자리를 더 마련하는 성과를 올리는데 그쳤다.
서얼허통 문제는 정조대에 큰 진전을 보았다. 정조는 영조대 조정의 노력에 비해 성과가 적었던 것을 직시하였다. 그리하여 1777년(정조 1) 3월에 이른바 정유절목(丁酉節目)을 통해 서얼이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다음과 같이 넓혔다.
즉, 문반의 분관(分館)이나 무반의 첫 천거는 이전과 같이 교서관에서 관장하는 부천(部薦)으로 하되, 요직 허용은 문반 가운데 호조 · 형조 · 공조의 참상, 음직으로는 판관 이하로 한정하였다.
외직에서는 문무당하관으로 부사, 당상관으로 목사를 허용하고, 음직으로 생원 · 진사 출신자는 군수를 허용해 치적이 있는 자는 부사로 승진시키며, 생원 · 진사 출신이 아닌 자는 현령을 허용해 군수까지 승진할 수 있게 하였다.
문신 분관은 예문관에 한정해 직강 이하직은 제한없이 처리하며, 무신은 중추부 · 오위장 등을 제한없이 하도록 한다는 것 등이었다.
이러한 문 · 무의 여러 관직에 대한 진출의 허용이 실제로 어느 정도 실행될 수 있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정조는 1779년 내각, 곧 규장각에 검서관(檢書官) 제도를 두어 학식있는 서얼들을 다수 이에 등용하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유득공(柳得恭) · 이덕무(李德懋) · 박제가(朴齊家) · 서이수(徐理修) 등은 4검서로 유명하다. 정조의 문치를 도운 이른바 초계(抄啓) 문신신 가운데도 서얼 출신들이 다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