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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문답 (고대 - 서양)
Ⅱ. 서양 세계의 전개
23. 아테네(Athne) 민주 정치와 근대 민주 정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아테네(제한된 직접 민주정) : 시민이 직접 참여하여 자기 일 처리,
*) 한계 - 부녀자·노예·외국인은 참정권 없음(제한적 민주정)
근대(近代, 혼합 민주정 = 직접 + 간접) : 평등한 자격 소유, 대의 정치 발달
그리스 : 산악(山岳) 지대로 평야가 적어 올리브·포도 등 원예작물 재배, 리아스식 해안 → 해양 진출
24. 페르시아 전쟁 후에 아테네의 민주정치에 나타난 변화는 무엇인가?
1) 아테네를 맹주로 해상 동맹(델로스 동맹)을 맺음
→ 아테네는 차차 동맹국을 예속화함, 델로스 섬에 있던 금고를 아테네로 옮겨 옴 → 해상 제국이 됨
2) 수병(水兵)으로 복무한 가난한 시민의 발언권이 강해지면서 국정에 참여하게 됨(民會 참석)
3) 클레이스테네스 이래의 민주정치를 완성시키려는 개혁이 일어남
→ 페리클레스의 개혁(모든 성년 남자 시민들의 민회 참여, 관직의 추첨에 의한 임명 등)
그
25. 헬레니즘 문화의 특징과 후세에 끼친 영향은 무엇인가?
1) 특징 : 동·서 문화 융합(그리스+동방<페르시아>), 개인주의·세계 시민주의(COSMOPOLITANISM) 사상 유행,
자연 과학의 발달(에우클레이데스<평면 기하학>, 아르키메데스<수학/물리학>,아리스타르코스<지동설>,
에라토스테네스<지구 둘레 측정>), 스토아 철학(금욕주의)·에피쿠로스 학파(정신적 쾌락주의) 대립
* 한계점 : 관능미 추구, 도시 문화 중심
2) 영향 : 인도의 간다라 미술에 영향, 서양적 사고 방식의 토대(Christianity<동양적>와 함꼐)
그
26. 로마에서 평민 세력은 어떻게 신장되어 갔는가?
1) 호민관 제도 및 평민회 설치 (BC 494년 성산 사건을 계기로 설치)
* 호민관 : 정원 2명(후에 10명), 임기 1년, 평민 중에서 선출된 평민 대표자.
평민에게 불리한 원로원의 입법 사항과 행정 조치에 대한 거부권(Veto) 행사
2) 12표법(12동판법<최근 학설은 목판설이 유력함>, BC450) : 로마 최초의 성문법, 평민과 귀족의 동등권을 명문화
3)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법(BC 367) : 집정관(귀족 2명 : 정무·군사로 나뉘어 정책 집행 최고 책임자)
중 1명은 반드시 평민 중에서 선출하도록 함
4) 호르텐시우스법(BC 287) : 평민회에서 의결된 사항은 원로원의 동의 없이 국법(國法)으로 인정
⇒ 귀족과 평민의 실질적(참다운 의미의) 평등 / 로마 공화정의 완성
27.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의 사회·경제적 변화는 무엇인가?
1) 사회 : 신흥 귀족(벌족) 등장, 자영 농민 몰락, 노예제 발달(*노예 반란 ; 스파르타쿠스의 난
2) 경제 : 노예 노동에 의한 라티푼디움(대농장 경영 제도) 발생
* 유력자들의 평민파·벌족파 대립 ⇒ 군인들의 득세
28. 그락쿠스 형제(호민관)가 기도한 개혁의 내용은 무엇인가?
형(티베리우스 그락쿠스) : 자작농 보호 정치(자영농민 육성) → 원로원의 반대로 실패(원로원에서 암살)
동생(가이우스 그락쿠스) : 토지 재분배, 빈민 구제 곡물법, 원로원의 사법권 독립 타파 → 실패 후 자살
29. 로마 멸망의 원인은 무엇인가?
1) 도시와 상공업의 쇠퇴 → 화폐 경제의 쇠퇴 → 자연 경제 체제화
2) 라티푼디움 붕괴 → 콜로나투스(소작제) 보급 ; 자영농의 몰락
3) 인구 감소 및 게르만인(German) 증대로 시민의 자주성 상실
4) 정신적 부패와 사상적인 타락, 게르만족의 침입(서로마 멸망)
30. 그리스 문화와 로마 문화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리스 문화 : 독창적·심미적 정신 문화, 오늘날 서양 문화의 정수(철학·종교·문학)
로마 문화 : 실질적·실용적·모방적 문화로서 고전 문화 보전, 건축·법률 등에 탁월한 유산
31. 유대교와 크리스트교의 공통점·차이점은 무엇인가?
공통점 : 여호와(유일신) 신앙, 선민 사상, 구세주 강림
차이점 : 유대교(구약만 인정, 구세주 기다림)
크리스트교(신·구약 인정, 구세주 오셨음, 구세주의 재림을 기다림)
집정관(執政官) : ☞콘술 콘술(consul) : 로마 공화정(共和政) 시대의 최고 관직. 집정관 혹은 통령(統領)으로 번역된다. 행정 및 군사의 장이었으며 정원은 2명, 임기는 1년이었다. 민회(民會)의 하나인 병원회(兵員會)에서 선출하였다. 원래 귀족이 이 관직을 독점하고 있었는데 BC 367년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법에 의해 평민도 취임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이 자리는 일정한 가문(家門) 사람들에게 독점되어 신인이 취임할 여지가 거의 없었다. 제정기(帝政期)에도 관직으로서는 존속했으나 선출권은 원로원으로 옮겨져 직권과 관직을 분리하여 황제가 그 직권을 장악했다. 또한 프로콘술(전집정관)이란 원래 임기를 마친 콘술이 명령권을 계속 보유하고 있을 때 부여한 관직명인데 공화정 말기에는 문무(文武) 지상권(至上權)을 가지고 속주를 통치하였다. 그 권한은 거의 무제한이었으며 제정기에는 그 권능도 황제 권력의 한 요소가 되었고 또한 원로원령 속주의 통치자도 프로콘술의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
콘술라도(consulado) : 에스파냐 및 에스파냐령 신대륙 식민지에 설립된 상인 길드조직. 1494년에 부르고스의 상인이 양모거래와 플랑드르와의 무역독점을 목적으로 하여 설립한 이래, 에스파냐에서는 빌바오(1511), 세비야(39), 마드리드(1632)의 차례로 설립되어 18세기 말에는 14개가 조직되었다. 신대륙에서는 1594년 처음으로 멕시코 시에 설립되어 1613년에 설립한 리마의 콘술라도와 함께 신대륙의 상업을 독점하였다. 18세기 말 부르봉왕조에 의한 상업개혁을 통해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카라카스, 아바나, 카르타헤나, 베라크루스, 산티아고 등지에도 설립되었다. 각 콘술라도는 왕권에 의해 승인된 독자의 법규에 의해서 상거래의 통제, 성원간의 상호부조, 항만의 관리, 항해자의 양성 등을 실시한 외에 왕권으로부터 세관업무를 위탁받는 경우도 있었다. 세비야의 콘술라도는 1539∼89년과 1651∼62년 왕으로부터 신대륙과의 노예무역 독점권을 부여받았다. 이러한 상인의 상호부조, 상업독점권의 유지기관으로서의 기능과 병행해서 콘술라도에는 상거래상의 분쟁을 처리하기 위한 하급재판권도 인정되고 있었다. 이 법정으로서의 조직을 콘술라도라 불렀으며, 이익집단으로서의 콘술라도를 우니베르시다드(universidad)라 하여 구별해서 부르는 경우도 있다. 구성원에는 상인에 항해자가 포함되는 경우가 많고, 성원 중에서 프리오르(prior) 또는 피엘(fiel)로 불리는 통괄자 1명과 콘술(cousul)이라고 하는 수명의 집행위원이 선출되었다. 임원의 임기는 2년이고, 30세 이상의 기혼자인 에스파냐인이라야 하고, 일정액 이상의 재산소유자라야 하며, 소매점을 운영하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했다. 식민지 콘술라도의 경우, 재정(裁定)에 불복할 때는 최고사법행정기관인 아우디엔시아의 청소관(聽訴官)에 상소하는 길이 열려 있었다. 일반적으로 콘술라도는 자율성을 지닌 특권상인의 배타적 이익집단이다. |
원로원(senatus, 元老院) : 고대 로마의 입법·자문기관. 로마 건국자 로물루스가 설치하여 로마 건국 때부터 존재하였다고 한다. 왕정(王政) 때 씨족(氏族)의 장로(長老)로 구성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공화정 때 의원수 300명, 뒤에 600명이 되었다(카이사르 때는 900명). 의원의 임기는 종신(終身)이었다. 처음에는 귀족(파트리키)만으로 구성되었으나 차차 평민(플레브스)도 참가하였으며, BC 3세기경부터는 임기 만료된 정무관(政務官)이 자동적으로 의원이 되었다. 의원은 점차 최상급 신분이 되었으며, 연령제한과 재산자격까지 생겼다. 또한 공화정 때 민회(民會)·정무관 등과 함께 로마를 지탱하는 3개 기둥이 되었다. 원래는 입법·행정 기관이 아니었으나, 최상급 신분의 종신의원에 의하여 구성되었기 때문에 그 권위는 매우 높아, 국정운영의 실질적인 중심기관이 되었고, 원로원 결의는 법률과 똑같은 효력을 가졌다. 제정 때 황제 권력과 대립, 또는 협조(五賢帝時代가 전형적임)를 나타냈으나,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적 구실은 하지 못하였고, 권한도 축소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제(帝)의 도미나투스[專制君主政] 성립 뒤 명예적인 칭호로 변하였다. |
평민회(comitia tributa, 平民會) : ☞코미티아 코미티아(comitia) : 고대 로마의 시민총회. 고대 로마의 입법·사법·선거기관으로서 3개의 민회(民會)가 있었으나 모두 로마시에서 개최되었으며 대의제(代議制)가 도입되지 않았다. 각 그룹 내의 다수 의견이 그룹의 투표를 결정했으며, 시민은 그것을 수정할 수 없었고 다만 찬부(贊否)의 의사만을 나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코미티아의 결정이 법적인 효력을 갖기 위해서는 원로원의 승인이 필요하였다. 3개의 민회는 다음과 같다. ① 코미티아 쿠리아타(comitia curiata:貴族會):씨족제적 사회조직인 쿠리아(curia)를 구성단위로 한 로마 최고(最古)의 민회이다. 왕정시대부터 있었으나 켄투리아회의 발전에 따라 그 권능이 점차 감소되어 다만 신관직(神官職)에 관한 일과 양자(養子)의 혼인관계 및 유언작성의 일 등을 심의하는 데 그쳤다. ② 코미티아 켄투리아타(comitia centuriata:兵員會):켄투리아(百人組)라는 군사상의 단위를 투표의 한 단위로 한 민회이다. 전승(傳承)된 바에 의하면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창설한 것이라 하는데, 일반적으로는 BC 5세기에 성립된 것으로 알고 있다. 병원회는 재산의 다소에 따라 시민의 병역의무에 차별을 두고 등급을 나누어 그것을 기준으로 구성되었다. 재산이 많은 순서에 따라 기사급(騎士級)은 18 켄투리아, 제1급은 80 켄투리아, 제2급은 20 켄투리아, 제5급은 30 켄투리아, 그 이하는 5 켄투리아로 나누어 모두 193 켄투리아로 구성되었다. 따라서 기사급과 제1급으로 과반수를 제압할 수 있었기 때문에 투표방식은 유산자(有産者)에게 유리하였다. 집정관 이하 고관(高官)의 선거, 전쟁과 화의(和議)에 대한 결정, 입법 및 사형(死刑)의 재판 등을 취급하였다. ③ 코미티아 트리부타(commitia tributa:平民會):행정단위의 지구(地區:tribus)를 구성 및 투표의 단위로 한 민회이다. 원래 평민만의 집회에서 비롯되었으나 후에는 로마 전시민의 민회가 되었다. 처음 이 민회의 의결은 국법으로서 인정하지 않았으나 귀족과의 신분투쟁 결과 BC 287년 호르텐시우스법에 의하여 이 민회의 의결도 전 로마시민을 구속할 수 있는 국법으로 인정되었으며 원로원의 부인권을 인정치 않고 즉시 국법으로 인정키로 하였다. 한편 평민회는 귀족도 입회시켰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시민총회가 되었다. 로마 시민은 본래 20 트리부스(田園 트리부스 16, 都市 트리부스 4)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아무리 사회가 발전하여도 그 구성과 운영방법은 변화하지 않았다. 이름뿐인 시민총회였으며, 모든 것은 유산시민(有産市民)에게 유리하게 꾸며져 있었다. 공화정 말기에는 유력한 정치가의 정쟁(政爭)의 장소로 되었으며, 제정(帝政)시대에는 형식적으로만 존속하였고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여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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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중심지였던 아크로폴리스의 북서쪽 기슭에 있는 아고라 유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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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의 수호여신 아테나에게 바친 파르테논신전 |
아테네(Athenae) : 그리스의 수도. 인구 75만(1991). 고대 그리스어(語)로는 아테나이(Athenai), 현대 그리스어(語)로는 아티나이(Athinai), 영어로는 애신스(Athens)이다. 이름은 시(市)의 수호신 아테나 여신과 관계가 있다. 아티카 반도 중앙 사로니크만(灣) 연안에 있는데 동쪽은 히메토스산(山), 북동쪽은 펜텔리콘산(山), 북서쪽은 파르니스산(山), 서쪽은 아이갈레오스산(山)에 둘러싸인 평야가 사로니크만으로 기우는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시는 키피소스강(江)과 그 지류인 일리소스강(江) 사이에 끼어 있으며, 아크로폴리스(해발고도 156 m)를 중심으로 몇 개의 작은 언덕이 있는데, 북동쪽에 있는 리카베토스 언덕이 가장 높아 해발고도 277 m이다. 남서쪽에는 필로파포스·프닉스·아레오파고스 등의 언덕이 있다. 아크로폴리스의 북동부가 시의 중심부이며, 왕궁·의사당·관청·대학 등이 있다. 이곳에 ‘헌법광장(신타그마토스)’과 ‘오모니아 광장’이 있으며, 이들을 잇는 2개의 병행하는 거리, 즉 ‘스타디온 거리’와 ‘대학거리(또는 베니젤로스 거리)’를 따라 큰 호텔과 상점이 있다. 아크로폴리스의 북서부는 상업의 중심지이며, 길들이 뒤얽혀 있다. 시는 북동과 남동쪽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새 시가와 주거지가 만들어지고 있다. 고대에는 아크로폴리스 주변, 특히 북쪽이 시의 중심이었는데, 고대 그리스 시대의 ‘아고라’는 아크로폴리스의 북서쪽 기슭에 있었다. 로마 시대의 아고라는 지금보다 약간 동쪽에 있었다. 시는 정치와 소비의 중심지인 동시에 항공·항해 등 교통망의 기점이기도 하며, 근대적 신흥도시로서 활기가 있다. 외항인 피레에프스와 함께 그리스의 경제활동의 중심으로 직물·피혁제품·기계·화학약품·포도주·브랜디·가구 등을 생산하며, 그리스 공업생산액의 60∼70 %를 차지하고 있다. 시중에는 고대유적이 많고 박물관도 있기 때문에 관광도시로서 많은 관광객을 모으고 있다. 외항 피레에프스는 그리스 제일의 항구로서 번영을 누리고 있다. 【역사】 아테네는 고대 그리스 아티카 지방의 중심지였다. 고대 서양에서는 일반적으로 이 아티카 지방 전역을 포함한 도시국가(폴리스)를 ‘아테네’라고 칭했다. 고대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 중에서도 아테네는 특히 유력한 폴리스였다. 중심시(中心市) 아테네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아크로폴리스에서는 미케네·티린스에서와 같은 거석(巨石) 성벽의 유적이 발견되고 있어 먼 옛날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에게해(海)의 원주민이 살고 있는 곳에 그리스인(人)의 제1차 남하자인, 동부 그리스 방언군(方言群) 중 이오니아인(人)의 한 파가 들어와서 정착하였다. 그러나 고대 아테네인(人)들은 자신들이 이곳의 ‘본토박이(아우토크토네스)’라고 뽐내고 있었는데, 이는 그들이 제2차 남하자의 침입과 정복을 모면했기 때문이며, 아티카 반도가 자루 모양으로 에게해에 돌출해 있어 침입자의 통로에서 벗어나 있는데다가 그다지 비옥하지도 않아서 침입자가 매력을 느끼지 못한 탓이었다. 그리하여 이곳은 많은 제1차 남하자의 피난처가 되었는데, 많은 인구를 모두 포용할 수는 없어서 그들은 바다를 건너 소(小)아시아로 옮겨가 이오니아 식민시(市)를 건설하였다. 이러한 관계로 이오니아의 여러 도시는 아테네를 모시(母市)로 여겼다. 아테네가 폴리스의 중심이 된 것은, 전설에 의하면 테세우스로부터라고 한다. 테세우스는 아테네의 왕이었으며, 그의 아버지 아에게우스도 왕이었다고 한다. 아테네의 원시적인 왕제(王制)는 점차 귀족(Eupatridae)의 지배로 바뀌었으며, 귀족 중에서 복수(複數)의 장관(아르콘)이 나와 정치를 하였다. ‘아르콘’은 처음에는 종신관(終身官)이었으나, 나중에 10년 임기로 되었다가 1년 임기로 바뀌었다. 이들 아르콘 전임자(前任者)들은 ‘아레오파고스 회의’의 종신의원이 되었다. BC 7세기경부터 상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하고 화폐의 유통도 개시되었는데, 농민 중에는 토지와 자유를 상실하여 노예로 전락하는 사람이 급증하였다. 그리하여 대토지를 소유하는 귀족에 대해 불만이 많아졌으며, 귀족과 평민간의 불화가 심해졌다. 그러나 드라콘의 성문법 제정(BC 621), 솔론의 개혁(BC 594),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권 수립(BC 561),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BC 50) 등으로 양자간의 조정이 꾀해지고 아테네의 민주화가 진행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아테네의 상공업과 문화가 많이 발달하였으며, 도기 제조업에서 그리스의 중심지가 되었고, 뛰어난 조각작품이 만들어졌다. BC 5세기 초에 페르시아의 침략을 여러 차례 받았는데, BC 490년의 침공 때에는 아테네군이 혼자 힘으로 마라톤에서 싸워 이를 물리칠 수가 있었다. 또 BC 480∼BC 470년의 침공 때에는 스파르타도 잘 싸웠으나, 승패의 결정점이 된 살라미스 해전에서 BC 482년부터 급조(急造)된 아테네의 해군이 주력이 되어 싸웠다. 이 두 차례의 승리로 아테네는 자국의 민주정치에 자신을 가지게 되었으며, 또 살라미스 해전에서 활약한 일반대중의 정치적 발언권이 커진 끝에 그들에게까지 참정권이 확대되어 민주정치가 철저해졌다. 살라미스 해전 후에 아테네는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를 설득하여 ‘델로스 동맹’을 체결하고 그 맹주(盟主)가 되었다. 델로스 동맹의 체결(BC 478)부터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개시(BC 431)까지가 아테네의 황금시대였으며, 민주정치가 철저해지고 경제적 번영은 절정에 이르렀다. 문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그리스의 학문·예술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여러 나라로부터 학자와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아테네인 중에서도 소크라테스·플라톤 등의 학자와 아이스킬로스·소포클레스·에우리피데스·아리스토파네스 등의 극시인(劇詩人)이 배출되었다. 또 파르테논·에레크테이온 등의 신전 건조가 성행하고 조각·회화 등의 미술도 꽃을 피워 페이디아스 등의 예술가가 등장하였다. 아테네는 그리스 제1의 해군국으로서 델로스 동맹 도시들 사이에 위에 정치적·경제적·군사적으로 강력히 군림하였기 때문에 이 시대를 ‘아테네 제국시대’라고도 부른다. 또 이 때에 아테네에서 독재적인 권력을 가졌던 사람은 페리클레스였기 때문에 이 시대를 ‘페리클레스 시대’라고도 한다. 아테네의 횡포한 지배에 대한 여러 도시국가의 불만과, 스파르타의 질시·불안 등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것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다. 델로스 동맹을 거느리는 아테네와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맹주 스파르타 사이에 벌어진 이 전쟁은 27년 간 계속되었으며, 일시적인 화평이 이루어진 때도 있고 아테네가 우세한 때도 있었으나 결국 스파르타가 승리하였다(BC 404). 전쟁 말기 및 전후에는 한동안 민주정체 체제가 중단되고 과두정체(寡頭政體)가 수립되었으나, 이는 오래가지 못하고 민주정치로 되돌아갔으며 오히려 제도적으로는 전후에 더욱 철저해졌다. 델로스 동맹은 해산되고 함선은 몰수되었으며, 페이라이에우스와 아테네를 둘러싼 장성(長城)은 파괴되었다. 아테네는 그리스의 지배자 지위에서 물러나고 경제적으로도 한동안 곤궁하였으나 여전히 그리스의 유력한 폴리스의 하나였다. 따라서 스파르타의 강압적인 지배에 불만을 품은 테베·코린토스 등의 폴리스들이 아테네를 앞세워 ‘코린토스 전쟁(BC 395∼BC 386)’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서 스파르타는 패배하였으며, 그 결과로 장성도 재건되고 아테네는 에게해의 여러 폴리스와 제2회 해상동맹을 체결하였다.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에서 실패한 경험을 살려 여러 시책을 취하였으나, 역시 동맹 도시들의 불만을 사서 ‘동맹시(同盟市) 전쟁(BC 357∼BC 355)’을 겪어야 했다. 이 무렵 북방에 마케도니아가 등장하여, 필요한 곡물의 태반을 흑해 연안에서 들여 오던 아테네로서는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데모스테네스 등의 반(反)마케도니아파(派)는 민회(民會)를 움직여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에게 선전포고하였으며, 아테네·테베 등의 그리스 연합군은 BC 338년에 카이로네아에서 분전하였으나 패배하고 말았다. 아테네는 패전 후에도 자치와 독립이 용인되었으며, ‘헬라스 연맹’에도 참가하였다. 그러나 완전한 자주독립을 누리는 폴리스로서의 아테네의 역사는 여기서 끝나고 말았다. 아테네는 마케도니아 왕 알렉산드로스가 죽자 한때 마케도니아에 대해 반기를 들었으나 실패하였다. 그후 로마가 동방을 향해 세력을 뻗치기 시작하였는데, 아테네는 로마에 대해 비교적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로마도 아테네의 역사와 문화를 존중하여 비록 명목적인 것이기는 하였으나 독립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BC 146년에는 그리스의 다른 도시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로마의 속주(屬州)의 하나가 되고 말았다. 이 시대에도 문화적으로는 아테네는 그리스 및 지중해 세계의 학문·예술의 중심지로서 계속 그 지위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화와 더불어 차츰 그 문화적 번영은 빛을 잃게 되었다. 서(西)로마의 몰락 후에는 동(東)로마 제국(비잔틴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13세기에는 프랑크 공국의 하나가 되었다. 15세기 중엽에는 오마르가 거느리는 투르크인(人)에게 점령당했으며, 그로부터 400년 동안 유럽사(史)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이 기간 중에 그리스도 교회로 사용되던 여러 신전은 이슬람교의 사원이 되었으며, 고대건축의 파괴가 진행되었다. 1687년에는 베네치아군(軍)이 아테네시(市)를 공격하여 화약고로 쓰이던 파르테논 신전을 포격하였기 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다. 그리스 독립전쟁(1822∼29) 때에는 독립군과 투르크군이 시의 쟁탈을 되풀이하였는데, 그리스의 독립이 인정된 후 수도가 되었다(1834). 고대의 유적으로 유명한 아테네에는 동로마 시대의 여러 교회와, 투르크 시대의 유물을 진열한 박물관 등이 있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 |
동맹시전쟁(Social War, 同盟市戰爭) : BC 91~BC 88년에 일어난 이탈리아 동맹시의 로마에 대한 반란. 원래 이탈리아 동맹시는 로마의 지배 확대를 위한 대외전쟁에 군대를 제공하는 등 친밀한 협력자였으나, 로마시민권을 갖지 못하고 정치적 권력이나 토지 배분에 차별을 받는 등 법적으로 매우 불리한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로마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다. BC 91년 이탈리아 동맹시민에 대한 로마시민권 부여법을 제안한 호민관 드루수스가 급사한 것이 암살된 것으로 소문이 나자, 이를 계기로 중·남부의 이탈리아인들이 무장 봉기하여 독자적인 국가건설을 실현하려고 하였다. 동맹시는 코르피니움을 거점으로 하여 로마 군대를 잇달아 격파하였고, 로마에서는 마리우스·술라 등을 출동시켰으나 진압하지 못하였다. 이에 로마는 BC 90년과 BC 89년에 무기를 버린 이탈리아인에게는 로마시민권을 부여한다고 공고하여 양보하였다. 그 사이 동방에서는 미트리다테스의 반란이 일어났고, 로마에서도 마리우스와 술라의 대립이 격화되었으며, 더욱이 이탈리아인의 트리부스(로마의 씨족제적 행정구획) 귀속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열하는 등 정정(政情)이 혼란을 거듭하였다. 이와 같은 상태로 인하여 결국 BC 87년 동맹시에 일괄하여 시민권을 부여할 것을 결정함으로써 타협이 이루어져 전쟁이 종식되었다. 이후 로마의 도시국가적 체제는 유명무실하게 되고, 이탈리아반도 전체에 로마 시민이 살게 되었다. 이 전쟁은 로마가 도시국가 체제로부터 영토국가 체제로 발전하기 위한 진통이었다. | |
아르콘(Archon) :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귀족정 시기의 최고 관리(단). 그리스어로 제1인자·지배자·고관을 뜻하는 말로 집정관(執政官)이라 번역된다. 폴리스의 성립과 함께 탄생하여 민주정 시대까지 이어졌다. 아테네에서는 민주정 시대에 9명의 아르콘이 있었는데 폴리스를 대표하여 주로 행정을 관장한 아르콘 에포니모스, 국가종교를 관장한 아르콘 바시레우스, 군사와 비시민 관계 사무를 관장한 아르콘 폴레마르코스 외에 사법을 취급하는 6명의 테스모테테스 등이다. 아르콘은 지원자들로부터 제비뽑기로 선출되어 취임했으나 정치상의 권리는 점차 10명의 스트라테고스(장군)의 손으로 옮겨졌다. | |
스트라테고스(strategos) : ‘장군’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語). BC 5세기 아테네에서는 군사·정치 양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직책이었다. BC 501~BC 500년 이후 각 종족에서 1명씩 모두 10명의 스트라테고스가 민회(民會)의 선거를 통해 선출되었는데, 임기는 1년이었고 중임(重任)이 허용되었다. 이들은 폴레마르코스(폴리스의 군사·외인관리를 관장하는 최고관리) 밑에서 자기 종족의 군단을 지휘하였다. BC 487~BC 486년 아르콘직(職)이 추첨제로 바뀌자 스트라테고스의 권위는 높아졌고 군사적 지휘만이 아니라 정치적 지도자의 역할도 담당하게 되었다. 데미스토클레스, 키몬 등은 그 초기의 예이며, 페리클레스는 BC 443년 이후 죽을 때까지 거의 매년 재선되었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아이톨리아·아카이아 동맹의 정치·군사 양면에 넓은 권한을 가진 직책의 명칭이 되었고, 헬레니즘 제왕조의 지방장관의 호칭이기도 하였다. | |
아레오파고스회의(Areopagos Council, -會議) : 고대 아테네에서 귀족정치 초기에 존재한 평의회. 회의 명칭은 군신(軍神) 아레스의 언덕에서 회의를 개최한 데에 유래한다. 임기 1년의 아르콘직을 마친 다음 다시 신분심사에 통과해야 의원이 될 수 있었으므로 명문 중의 명문 출신이 모이고 종신제였다. 법질서의 총감독으로서 광범위한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여러 권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은 이 기구에 하등의 변경도 가하지 않았으나 BC 462년의 에피알테스의 개혁에 따라 살인죄에 관한 재판권 이외의 권한을 거의 전면적으로 빼앗겼으며 이 실권은 500인평의회·민회(民會)·민중재판소로 옮겨지고, 보수세력의 아성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였다. | |
민회(民會) : 고대 그리스·로마시대 도시국가의 시민총회. 호메로스의 서사시(敍事詩)에서는 아고라(agora), 아테네에서는 에클레시아(ekklesia), 스파르타에서는 아펠라(apella), 그 밖의 고린투스의 폴리스에서는 할리아(halia), 또는 할리아이아(haliaia)라고도 한다. 왕정(王政)·귀족정치·과두(寡頭)정치·민주정치 시대를 통하여 BC 3세기 마케도니아의 지배시대까지, 그리스사(史)의 전기간을 통하여 존재하였다. 참정권(參政權)과 참전(參戰)의 의무가 표리일체(表裏一體)를 이룬 고대 그리스에서는, 전시의 민회는 병원회(兵員會)가 되었고, 화전(和戰)·역병(疫病)대책·신탁(神託)대책 등을 토의하였다. 원시적인 왕정에서 왕은 민회의 결의를 무시할 수도 있었으나, 권리를 가진 사람(에콜레토이)들의 총회가 존재하면서 왕의 절대권은 제한되었다. 귀족정치·과두정치의 민회에서는 출생·부(富)에 따라 출석자는 제한되었다. 아테네의 민주정치 기간에는 가장 실력 있는 국사(國事)의 최고·최종 결정기관으로, 완전한 시민권을 가진 남자는 모두 출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족수(定足數:약 6,000명)에 달하지 않은 경우도 많아서, 페리클레스는 민회 출석자에게 일당을 지급하였다. 추천으로 선출되는 이외의 관리를 임면하고, 화평 및 그 밖의 모든 행정처리, 입법·사법·재정, 기타 거의 모든 국사 처리를 맡았다. 처리사항이 매우 많았기에 의안을 평의회(評議會)에서 사전에 정리한 뒤 민회에 돌리도록 하였지만, 민회는 수정안을 제출할 수는 있었다. 결정은 다수결로서, 거수 혹은 항아리 속에 투표용 조가비를 넣었다. 아테네의 민회는 처음에는 아고라에서, 다음에는 푸니쿠스 언덕에서, BC 4세기 이후에는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개최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개회하여 보통 연 40회(그 밖에 임시회도 있었다) 열렸다. | |
아고라(agora) :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폴리스)의 중심시(市)에 있는 광장. 정치적인 광장과 시장을 겸한 독특한 것으로 그 주변에는 관청과 신전(神殿) 등 공공건물이 많이 세워져 있었다. 어원은 아고라조(모이다)로서, 사람들의 모임이나 모이는 장소를 의미하였다. 헤로도토스는 아고라의 유무(有無)가 그리스인과 비그리스인을 구별한다고 하였다. 폴리스의 시민은 집 밖의 공공생활을 즐겼으며 하루의 대부분을 아고라에 모여 정치와 사상 등을 토론하는 등 아고라는 일상생활의 중심이었다. 로마에도 포룸(forum)이라고 부르는 아고라에 해당하는 것이 있다. | |
포룸(forum) : 고대 로마 도시의 공공광장(公共廣場). 공공 건축물에 둘러싸여 그리스의 아고라와 같이 집회장이나 시장으로 사용되었다.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카피톨리누스의 언덕 가까이에 있던 포룸 로마눔이다. 일반적으로 주위의 신전·교회당·도서관·목욕탕 등과 함께 도시의 중심적 시설을 형성하여 광장에 면해서 주랑(柱廊)이 둘려지고, 중앙에는 전승기념비 등이 세워졌다. 따라서 이들 시설 전체를 포룸이라 지칭하는 경우가 많으며, 가축전용·야채전용의 포룸 등 전적으로 시장으로서 사용되던 포룸도 있었다. | |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 BC 600 ?~BC 527) : 아테네의 참주(僭主). 명문 출신으로 메가라와의 싸움(BC 565경)에서 명성을 날렸다. 디아크리오이[山地黨]의 지도자가 되어 BC 561년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한 후 참주가 되었다. 그 후 반대파인 리쿠르고스(페디아코이[平野黨]의 지도자)와 메가클레스(파라리오이[海岸黨]의 지도자) 등에게 쫓겨 한두 번 국외로 망명하였으나 트라키아에서 부를 축적하여 용병을 거느리고 귀국하여 무력으로 참주정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그는 솔론의 국법을 준수하여 온화하고도 훌륭한 정치를 하였다. 농민보호, 농업장려, 1/10(1/20이라고도 전한다)세의 징수, 제우스·올림포스 신전과 수도(水道) 등의 대토목공사 등이 그의 업적이었다. 그의 시대에는 상공업도 크게 발달하였다. 또한 호메로스의 시편정본(詩篇定本)의 제작, 연극흥행 등 문화적인 정책도 폈다. 이 때문에 그의 치세는 ‘황금시대’로 불리었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아들 히피아스가 뒤를 이어 참주가 되었다. | |
히피아스(Hippias, BC 560 ?~BC 490) : 아테네의 제2대 참주(재위 BC 527∼BC 510).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장남이며 그 후계자로서, 아버지의 정책을 계승하여 아테네를 경제적·문화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BC 514년 아우 히파르코스가 암살되자 폭정으로 변하였고, BC 510년 알크메온가(家)의 설득을 받아들인 스파르타의 무력으로 아테네에서 추방되었다. 나중에 소아시아로 건너가 페르시아 왕의 보호를 받게 되었으며, BC 490년 다리우스 1세의 그리스 원정 때에는 그 길잡이가 되었다. 아테네로 돌아가 다시 정권을 잡는 날을 꿈꾸면서 페르시아군을 마라톤의 들판으로 상륙시켰으나 참패하였고, 그 직후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 |
클레이스테네스(Kleisthenes, BC 570 ?~BC 508 ?) : 고대 그리스의 정치가. 아테네의 명문인 알크마이온가(家)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메가클레스는 아테네의 참주(僭主)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정적(政敵)으로서 일족은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지배하는 동안 추방당해 있었다. BC 510년 페이시스트라토스가(家)의 지배가 무너진 후 귀국하여 이사고라스와의 정권투쟁에서 승리하고(BC 508),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씨족제적인 4부족을 해체하고, 새로운 정치·군사적 단위로서 10부족을 만들었다. 그 때문에 ‘구(區:데모스)’를 제정하고, 시민을 각기 자기가 사는 구에 등록시켰다. 이 개혁에 의해 귀족은 그 권력의 지반을 잃었고, 아테네에서는 중장보병시민(重裝步兵市民)의 민주정치가 확립되었다. 이 개혁의 효과는 ‘마라톤 전투’의 승리로 나타났다. 또 참주의 재현을 막기 위해 ‘오스트라키스모스(陶片追放)’의 제도를 제정하였다고도 전한다. | |
오스트라키스모스(ostrakismos) : 고대 그리스 민주정(民主政) 시대에 위험인물을 전 시민에 의한 비밀투표로 10년 간 국외(國外)로 추방한 제도. 도편추방(陶片追放)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 추방은 당사자의 명예나 시민권·재산권과는 상관없이 시효(時效) 기간만 지나면 귀국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원래 참주(僭主)의 재현을 막기 위해 실시한 것으로, 평민 지도자이며 장군인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참주가 되었을 때 클레이스테네스가 설치하여 BC 487∼BC 485년에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이 제도는 아르고스에서도 실시되었고, 시라쿠사에서도 똑같은 목적으로 엽편추방(葉片追放)이 실시되었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아테네의 오스트라키스모스였다. 추방자 결정방식은 이른 봄 민회(民會)에서 오스트라키스모스 시행의 가부(可否)를 거수로 결정하고, 아고라에서 국가에 해를 끼칠 위험한 인물의 이름을 도편(陶片:오스트라콘)에 기입하는 비밀투표를 하였다. 총 투표자수가 6,000명을 넘으면 유효 투표가 되어, 단순다수결 방식으로 추방자가 결정되었다고도 하고, 6,000표 이상의 최고 득표자가 추방되었다고도 전하나 확실한 정설(定說)은 없다. 이 제도는 민주적 대개혁의 하나로 시작되었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참주와는 관계도 없는 유력한 정치가를 추방하기 위한 정쟁(政爭)의 도구로 이용되었다. 페르시아전쟁에서 유명한 장군 아리스테이데스, 테미스토클레스, 키몬 등도 그 희생자가 되었다. 그러나 BC 417년 히페르보로스를 마지막으로 이 제도는 사라졌다. 근래에, 아테네의 아고라에서 투표에 사용된 인명(人名)을 기입한 도편이 다수 출토되었는데, 그 중 테미스토클레스의 것이 가장 많으며, 말리쿠세스라는 인물의 이름을 기입한 것도 250장 발견되었다. | |
페리클레스(Perikles, BC 495 ?~BC 429) : 고대 아테네의 정치가·군인. 아버지는 크산티포스, 어머니는 아가리스테(클레이스테네스의 질녀). 소피스트적인 교육을 받았으며, 대단히 웅변적이었다. 철학자 아낙사고라스와 예술가인 소포클레스, 피디아스 등과의 교분이 두터웠다. 유소년기의 일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이름이 나오는 것은 BC 472년 아이스킬로스의 《페르시아인》이 상연되었을 때, 그 비용을 부담하는 코레고스(합창대 봉사자)가 되었을 때이다. 최고의 명문 출신이었으나 키몬에 대항하기 위하여 귀족파가 아닌 민주파의 지도자가 되어 BC 462년 에피알테스와 함께 귀족세력의 거점인 아레오스파고스 회의의 권리를 박탈, 평의회·민중재판소·민회에 실권을 가지도록 하는 법안을 민회에 제출하였다. 이듬해 에피알테스가 정적에게 살해당하고, 키몬이 도편추방되자, 정계에서 그의 지도권은 확고하게 되었다. 그 결과 제3신분에 있던 자들까지도 최고관인 아르콘에 취임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배심관·관리의 일급(日給), 연극관람수당을 비롯하여, 관리를 희망자 중에서 추첨으로 선출하는 등 민주정치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또 BC 447년부터는 파르테논신전의 건조를 시작하였고, 아테네 시가의 미화(美化)에도 힘썼다. 외교상으로는 페르시아와 ‘카리아스의 화약(和約)’을 맺고, BC 446년 스파르타와 향후 30년간의 화약을 맺는 등, 강국과는 평화를 유지하는 한편, 델로스동맹의 지배를 강화하였다. BC 454년 그의 제안으로 델로스동맹의 기금을 델로스섬에서 아테네로 옮겼는데, 이때부터 동맹의 여러 도시는 거의 모두 아테네의 속국(屬國)이 되었고, 아테네는 제국(帝國)으로 불리게 되었다. BC 443년에는 정적인 투키디데스(역사가와는 다른 사람)도 추방, 그 후 죽을 때까지 매년(만년의 극히 단기간 제외) 스토라테고스(장군직)에 선출되어 ‘지상의 제우스’라 불리게 되어 이름은 민주정(民主政)이나 사실은 1인 지배라 할 만큼 페리클레스의 시대를 구가하였으며, 또 이것은 아테네의 최성기이기도 하였다. BC 431년 펠로폰네소스전쟁이 시작되자 굳게 농성(籠城)하는 한편, 해군으로 하여금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위협하는 전술을 취하였다. 그 무렵 그를 권력으로부터 추방하려는 음모가 있어, 아낙사고라스·피디아스 등 그의 측근들이 기소당하였으나 그를 실각시키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전쟁과 때를 같이하여 아테네에 유행한 질병에 걸려 병사하였다. | |
소피스트(Sophist) : BC 5세기 무렵부터 BC 4세기에 걸쳐 그리스에서 활약한 지식인들의 호칭. 아테네를 중심으로 당시의 그리스 전역을 편력하면서 변론술과 입신출세에 필요한 백과사전적 지식을 가르쳐, 많은 보수를 받았다. 아브데라의 프로타고라스, 레온티니의 고르기아스, 엘리스의 히피아스, 케오스의 프로디쿠스 등이 유명하다. 소피스트란 원래 ‘현인(賢人)’ 또는 ‘지자(知者)’를 의미하였다. 그들은 거의가 지방출신 학자들로, 각기 자부하는 지식과 기술을 갖고 있어 개인이나 국가에서 돈을 받고 그것을 제공하였다. 민주주의 사회의 시대적 요청에 따라 가장 중요한 과목은 변론술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일신(一身)을 위해서나 국가를 위해서 선(善)을 도모하고, 언론이나 행위에서도 유능한 사람이 되는 길’을 청년들에게 가르친다고 자부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가르친 것은, 개인이나 국가에 대해 선이란 이런 것이라는 지혜가 아니라, 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선한 자인 체하는 기술만을 가진 데 불과하였다. 이 같은 사실을 밝힌 것이 철학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다. 이후 ‘소피스트’란 말은 ‘궤변을 일삼는 무리’를 의미하게 되었고, 궤변학파라고도 불리었다. | |
펠로폰네소스전쟁(Peloponnesian War, -戰爭) : BC 431∼BC 404년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각각 자기 편 동맹시(同盟市)들을 거느리고 싸운 전쟁.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났으나, 고대 그리스 쇠망의 원인(遠因)이 되었다. 아테네는 민주정치를, 스파르타는 과두정치(寡頭政治)를 각각 대표한 폴리스였다. 따라서 이 전쟁은 두 정치체제의 싸움이기도 하였고, 각 폴리스 내부에서도 두 정치체제의 싸움이 계속되었다. 【원인】 델로스동맹을 지배하는 아테네가 횡포를 부려 제시(諸市)의 자치를 범하고 위협한 때문이며, 또한 스파르타가 아테네의 번영을 시기하고 두려워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직접적인 원인은 케르키라(코르푸섬)와 코린토스의 싸움에 아테네가 끼어든 데 있었다. 상업무역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던 코린토스는 아테네의 해상진출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케르키라와 코린토스의 싸움에 아테네가 케르키라의 편을 들어(BC 433) 양자의 관계는 험악해졌다. 이 밖에도 메가라 등 아테네에 불만을 품고 있는 도시들이 있었다. 코린토스·메가라 등은 펠로폰네소스 동맹회의를 열고 아테네와의 전쟁을 결의, 스파르타를 부추겨 개전(開戰)하게 하였다. 【경과】 전쟁은 3기(期)로 나눌 수 있다. ① 제1기(BC 431∼BC 421):10년전쟁 또는 아르키다모스전쟁이라고도 한다. ② 제2기(BC 421∼BC 413):휴전기간. ③ 제3기(BC 413∼BC 404):데켈레아전쟁이라고도 한다. 제1기 전쟁을 아르키다모스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스파르타 왕 아르키다모스가 육군을 거느리고 자주 아테네 원정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장군 페리클레스는 농성전술(籠城戰術)을 택하여 최강의 육군을 자랑하는 스파르타와 정면으로 싸우지 않음으로써 불필요한 소모를 피하였다. 그리고 해군으로 펠로폰네소스 해군을 습격하여 스파르타군에 타격을 줌으로써 승리를 획득하려고 하였다. 이 전술은 성공하는 듯하였으나, 개전 후 얼마 되지 않아 아테네에 페스트가 유행하여 많은 인명을 빼앗고 페리클레스도 이때 병사(病死)하였다. 화평의 기운은 자주 보였으나 아테네의 지도자가 호전파(好戰派)인 클레온인 점도 있고 하여 전쟁은 계속되었으며, 클레온의 전사(戰死)로 BC 421년에야 겨우 니키아스의 화약이 체결되어 전쟁은 일단 끝났다. 제2기의 휴전기간 중에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직접적인 전쟁은 없었으나, 서로가 세력범위의 유지 확대를 꾀한 이른바 냉전(冷戰)의 기간이었다. 이것이 다시 ‘뜨거운 전쟁’으로 변한 것은 아테네가 시칠리아 원정을 시도하였을 때 스파르타가 이를 간섭한 때문이었다. 아테네는 시칠리아 원정에서 무참히 패하여 그 후 군의 재정비를 꾀하였으나,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데켈레아를 점령, 요새(要塞)를 구축하여 아테네를 괴롭혔다. BC 405년 아테네 해군은 아이고스포타미전투에서 패하고, 또한 델로스 동맹도시들은 점차 아테네로부터 떨어져 나가 아테네는 식량난으로 시달렸다. 또한 과두파(寡頭派)에 의한 정변이 일어나는 등, 아테네는 갈수록 불리하게 되어 BC 404년 마침내 스파르타에 항복하고 말았다. 【결과】 아테네는 함대를 스파르타에 인도하고 장성(長城)을 헐었으며, 델로스동맹을 해산하고 과두정부를 만들었다. 패권을 잃은 아테네는 기울고 그 후로는 그리스의 정치적·경제적 중심이 아니라 문화적 중심이 되었다. 한편 스파르타는 패권을 장악하였으나 그것이 쇠망의 원인(遠因)이 되었다. ☞델로스동맹 ☞펠로폰네소스동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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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도 : 아테네 아고라박물관 | |
델포이(Delphoe) : 신탁(神託)으로 유명한 아폴론의 신전이 있던 고대도시. 파르나소스 산계(山系)의 파이도리아데스 산괴(山塊)가 형성하는 단애(斷崖) 중턱, 해발고도 500 m 지점에 위치하며, 남쪽 프레이스토스강(江)의 협곡에는 올리브의 수림(樹林)이 펼쳐진다. BC 8∼6세기 폴리스 성립기에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神殿), 델로스의 아폴론 신전과 함께 그리스의 종교적 중심지가 되었다. BC 5세기 민주주의의 전성기에는 신전의 보고(寶庫)가 아테네의 아테네 신전과 함께 상업활동의 기금으로 큰 구실을 하였고, 헬레니즘 시대에는 아이톨리아 동맹의 이데올로기적 중심지로서의 구실을 하였다. BC 2000년대부터 지모신(地母神)의 성소(聖所)가 있었으나, 역사시대로 접어들면서 아폴로신으로 대치되었다. BC 7세기에는 신탁의 중요성이 커지자 중부 그리스 제국이 구성하는 인보동맹(隣保同盟)의 중심이 되었다. BC 6세기 초 제1차 신성전쟁(神聖戰爭)으로 델포이의 중립과 독립이 보장되어, 4년마다 제전적(祭典的)인 피디아 경기가 개최되었다. 신탁은 식민(植民)이나 정치적인 결정 등에 관해서 조언을 하고,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는 것으로 숭배되었으며, 신역(神域)은 보고와 기념비로 가득 찼다. 이 곳이 대지의 중앙에 위치한다고 여겨 아폴론 신전의 1실(室)에는 ‘세계의 배꼽(Omphalos)’이 놓여 있었다. 390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하고 이교도 금지령을 내림으로써 델포이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1892년 이후 프랑스 고고학회가 발굴을 시작하여 큰 성과를 올렸다. 대량의 노예해방 비문(碑文)은 사회경제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며, 최근에는 5세기 때의 그리스도 교회 유적이 발견되었다. ☞신성전쟁 | |
신성전쟁(Sacred Wars, 神聖戰爭) : 고대 그리스에서 아폴론신(神)에 대한 모독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인보동맹(隣保同盟)이 델포이 신전령(神殿領)을 침범한 도시들과 세 차례에 걸쳐 싸운 전쟁. 제1차전쟁은 로크리스인(人)들이 델포이 신전 지배와 순례자들에 대한 과세(課稅)를 주장하자 델포이와 로크리스 간에 일어난 전쟁으로, 인보동맹측은 테살리아가 중심이 되어 시키온·아테네의 협력으로 BC 590년, 로크리스의 항복을 받아 델포이의 독립을 인정시켰다. 제2차전쟁은 포키스인들이 델포이를 점령하자 스파르타는 이들과 싸워 델포이를 구원하였는데, BC 448년 아테네는 델포이를 포키스령으로 인정하였다가 니키아스 화약으로 델포이의 독립을 재확인하였다. 제3차전쟁은 인보동맹의 맹주인 테베가 포키스를 탄압하자 포키스인들은 BC 354년, 델포이를 점령하고 그 세력을 코린토스만(灣)에서 테살리아에까지 뻗쳤으므로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 2세가 개입하여 포키스의 항복을 받았다. 이 전쟁에는 그리스의 폴리스가 대부분 참가하였고, 이 전쟁 결과 마케도니아는 포키스의 인보동맹 참여를 금지시키고 BC 346년 포키스의 선거 투표수 2표를 몰수하여 그리스에서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 |
델로스동맹(Delian League, -同盟) : 페르시아 전쟁 후인 BC 478∼BC 477년 아테네의 아리스티데스가 제창하여 결성된 그리스 도시국가(都市國家)들의 해군동맹. 아테네를 중심으로 주로 소아시아 연안의 그리스 도시와 에게해(海)의 섬들로 구성되었다. 명목은 페르시아의 내습에 대비하고 그 지배하에 있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독립시키는 것이었으나, 이 목적을 달성한 후에도 해산하지 않고 아테네의 제국주의적인 지배도구가 되었다. 본래 제1차 아테네 해상동맹으로 일컬어졌으나, 그 본부 및 동맹기금을 수납하는 금고가 델로스섬에 있었기 때문에 후에 델로스 동맹이라 하였다. 동맹 전반의 정책은 델로스섬에 있는 재무국에서 개최하는 정기회의에서 결정하였다. 동맹가입 도시는 원칙적으로 동맹함대를 위한 함선을 내놓을 의무를 지고 있었으나, 회의의 결정에 따라 돈으로 대납할 수도 있었다. 결성 초기에는 정책 결정에 가맹도시들이 각기 평등한 투표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BC 454년 동맹본부와 금고가 아테네로 옮겨지고, BC 448년 아테네가 페르시아와 평화조약(칼리아스 화약)을 체결하자 동맹에 대한 아테네의 제국주의적 지배력이 확대·강화되었다. BC 440년대 후반부터 아테네의 지배에 대한 불만이 동맹 도시들 사이에 높아지고, BC 431년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서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항복함으로써 동맹은 해산되었다. 그 후 다시 스파르타의 지배에 대한 반감으로 아테네 중심의 제2차 해상동맹이 성립하였다. 그러나 가맹도시 사이의 단결이 강력하지 못하여 BC 357년 동맹시전쟁(同盟市戰爭)이 일어나고, BC 338년 동맹이 최종적으로 해체되었다. | |
펠로폰네소스동맹(Peloponnesian League, -同盟) : 고대 그리스의 스파르타를 맹주(盟主)로 하는 펠로폰네소스반도 도시국가들의 공수동맹(攻守同盟). BC 6세기 스파르타가 무력으로써 개별적으로 여러 도시국가와 군사조약을 체결하여 BC 500년까지 아르고스를 제외한 전펠로폰네소스를 통합하는 도시동맹으로 조직되었다. 본질적으로는 방위적인 군사동맹으로, 스파르타는 전장(戰場)에서의 동맹군 지휘와 동맹회의의 소집권을 보유한 맹주였으나, 동맹의 교전권(交戰權)은 동맹회의에서 결정하였다.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서 아테네를 눌러 승리를 거두자 그 제국화(帝國化)가 시작되었으나 BC 366년 스파르타의 전통적 정치체제가 무너지자 동맹도 해체되었다. | |
펠로폰네소스반도(Peloponnesos Pen. -半島) : 그리스 본토 남부를 구성하는 반도. 면적 약 2만 1500 km2. 중세에는 모레아(Morea)라고 불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영웅(Pelops)의 섬(nesos)’이라고 말했다. 동서·남북의 길이는 다같이 230 km. 섬 부분을 제외한 그리스 본토 면적의 20 %에 해당한다. 파트레만(灣)·코린트만·살로니카만에 의하여 그리스 본토와 떨어져 있으며, 너비 불과 7∼8 km의 코린트 지협(地峽)으로 연결되어 있다. 행정상 아르골리스·아르카디아·아카이아·일리아·코린티아·라코니아·메시니아의 7개 주(州)로 이루어져 있다. 반도의 모양은 거의 네모꼴이지만, 남쪽 해안은 메시니아만과 라코니아만에 의해 3개의 작은 반도로 나누어지며 북동부에도 아르골리스 반도가 돌출해 있다. 지형은 산이 많고, 강수량은 적으며, 포도·올리브·잎담배 등 지중해성 작물이 재배되고, 포도주가 만들어진다. 또한 중앙부와 동부의 산지에서는 양과 산양이 사육되며 해안에서는 어업도 행하여진다. BC 13세기 무렵부터 이오니아인(人)이 들어왔고, 뒤를 이어 도리스인이 점령하였으며, BC 8세기∼BC 5세기에는 스파르타 등의 도시국가가 번영을 누렸다. BC 431∼BC 404년에는 스파르타와 아테네 사이에 펠로폰네소스전쟁이 벌어졌다. | |
아크로폴리스(acropolis) : 그리스 도시국가(都市國家)의 중심지에 있는 언덕.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대부분은 중심지에 약간 높은 언덕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을 폴리스라고 불렀다. 그러나 시대가 지남에 따라 도시국가가 폴리스로 불리게 되어 본래 폴리스였던 작은 언덕은 ‘akros(높은)’라는 형용사를 붙여 아크로폴리스라고 부르게 되었다. 아크로폴리스는 수비하기 알맞은 곳이 선정되고 거기에는 성벽을 쌓았다. 그리스의 도시국가는 본래 전사계층(戰士階層)의 사회였으므로 자연히 방어에 적합한 지점이 선택되었다. 아크로폴리스 위에는 폴리스의 수호신 등을 모시는 여러 신전(神殿)이 세워져 도시국가의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다. 각 폴리스에는 원칙적으로 아크로폴리스가 있었지만 오늘날 아크로폴리스라고 할 때에는 아테네시를 가리킨다. 아테네시의 아크로폴리스는 동서 약 270 m, 남북 약 150 m로 서쪽의 올라가는 입구를 제외하고 다른 3방향은 가파른 절벽으로 되어 있으며 여기에 다시 성벽을 쌓고 인공을 가해 방비의 거점으로 삼았다. 이미 미케네시대부터 중요한 거점이었고, 페이시스트라토스·페리클레스 시대에 파르테논 등의 신전과 현문(玄門)이 세워졌으며 언덕이 미화되어 아테네의 영광의 상징이 되었다. 그 후 로마와 터키인 등의 지배를 받은 시대에는 언덕이 고쳐지거나 강화되기도 하였다. 19세기에는 중세 이후에 고쳐진 부분은 제거되고 언덕의 발굴도 행하여졌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