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의 공수낙하 사단, 5개의 해상상륙 사단, 1000 여대의 비행기, 300여대의 글라이더 그리고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배와
상륙보트들. 1944년 6월 6일의 아침은 그렇게 밝았다. 노르망디 전투에 투입된 군 병력만 4만 5천명이 넘고, 총 15개의 사단이 참가했다고
하니 과연 최대의 군사작전이라 할만하다.
연합군은 거짓 상륙지점을 사전에 고의로 유포함으로써 독일군을 교란시켰다.
거짓 상륙지점은 영국과 도버 해협을 마주보고 있는 프랑스 해안지역이었는데, 이곳은 영국과 최단거리의 지점 이이서 그럴싸해 보였던 것이다. 결국
독일군은 그 주변에 두터운 방어벽을 구축하였고, 노르망디 지역은 상대적으로 적은 방어벽을 구축하게 된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히틀러와 롬멜 장군은 노르망디가 상륙지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간파했다는 사실이다. 허나 군 수뇌부 다수의 의견은 이미 도버 해협 지역으로 가
있었다. 하지만 연합군에게도 문제는 있었으니, 바로 이 지역의 조수간만의 차가 살인적으로 크다는 것과 기상상태가 변화무쌍하다는 것이었다.
원래의 작전 개시일은 1944년 6월 4일. 하지만 악천후로 인해 작전은 무기한 연기되었고, 그 다음날에도 날씨는 여전히 좋지 않았다. 그러나
연합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 장군은 익일인 6일을 D-Day로 명명했다.
영국과 캐나다군 작전지역 Sword,
Juno, Gold Beach 약 35km에 걸쳐 펼쳐져 있는 이 해변에는 영국군, 캐나다군, 기타 영연방 소속의 연합군, 자유
프랑스군(나치 점령 후, 드골이 이끌었던 프랑스 독립군) 그리고 폴란드 군이 작전에 참여하였다. Sword Beach에서는 독일군의 저항은
비교적 간단히 제압되었고, Utah Beach와 마찬가지로 작전개시 2시간 후에 완전 함락되었다. Juno Beach에서는 캐나다 여단이 무려
15분만에 독일군을 제압하고 내륙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Golden Beach에서 영국군은 독일군의 격심한 저항을 받아야만 했다. 드디어 오전
9시 경, 해안선에 첫발을 디딘 영국군은 Juno Beach의 캐나다군과의 협공으로 독일군을 항복시키는 데에 성공한다. Sword,
Juno, Gold Beach에서는 영국의 호바트 장군이 제작한 "퍼니스(Funnies)"라는 수륙양용전차가 처음 사용되었다. 해안선의 지뢰나
철조망 제거뿐 아니라 상륙 보병의 엄폐물로 사용되기 위해 특수 제작된 이 새로운 전차는 상륙작전에서 그 진가를 발휘하여, 많은 사상자의 수를
줄일 수 있었다.
미군 작전지역 Omaha, Utah Beach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본
사람이라면 짐작했겠지만, Omaha Beach 상륙작전에서 엄청난 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미 1사단을 지휘하던 브래들리
장군은 영국이 개발한 "퍼니스"가 필요없다고 단언하였는데, 결국 장군의 위험한 발상은 엄청난 사상으로 이어졌다. 상륙 지점이 해변으로부터 너무
먼 거리에서 탱크를 내리는 바람에 무려 27대의 탱크가 물에 가라 앉고 말았고, 결국 보병들은 별다른 엄폐막 없이 드넓은 해변에 방치되었다.
보병을 싣고 갔던 상륙보트 역시 수심이 깊은 곳에 보병을 상륙시켜, 병사들은 무거운 군장을 맨 채 하늘로부터 날아오는 총알을 피하면서 동시에
발이 닫지 않는 깊은 바다에 빠지지 않기 위한 수영을 해야만 했다. 그야말로 초인적인 능력과 노력 없이는 살기 힘든 상황. 결국 Omaha
Beach에 모인 몇 안 되는 병사들은 독일군의 엄청난 화력을 몸바쳐 버텨내야 했는데, 기적이었던가? 결국 지원군이 도착하지 않았던 독일군은
해안전선에서 약간의 후퇴를 하였다. Omaha Beach에서만 약 1000 여명의 연합군이 D-Day 당일 사망하였다. 반면 독일군의
저항은 미미했던 Utah Beach는 상대적으로 쉽게 점령되었고, 상륙 2시간 만에 Utah Beach는 완전히 연합군의 수중에 놓이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단 12명의 사망자만이 발생했다고 한다.
노르망디 상륙은 총 76일간의 노르망디 전투로 이어졌다. 이 전투에서 연합군은
21만 명의 사상자를 냈고, 이 중 3만 7천명은 전사했다. 독일군 역시 20만 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약 20만 명의 병사가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다
Arromanches Bayeux로부터 북쪽에 있는 이 마을은, D-Day 영국군의 작전 지역이었던
Gold Beach 지역에 속해 있다. 연합군은 노르망디 해변을 장악한 이후, 광대한 분량의 군수물자 및 무기를 하적하기 위한 임시 항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들은 Mulberry(뽕나무) Harbors라고 명명한 두 개의 조립식 임시 항구를 건설하였는데, 그 중 하나는 강풍으로
D-Day로부터 2주 후에 전파되었고, 나머지인 Port William이 바로 이곳 Arromanches에
남아있다.
이 임시 항구는 영국으로부터 운반된 총 146개의 거대한 시멘트 케이슨으로 구성, 선박의 정박 등에
이용되었던 반원형의 방파제를 형성하고 있다. D-Day 3개월 이후, 약 2만 5천명의 병력과 4백만 통의 군수장비, 50만대의 군수 차량 등이
이곳 항구를 통해 하적되었다. 썰물 때에는 시멘트 케이슨 위를 걸어 다닐 수도 있다. 언덕 위로 올라가는 수고까지 한다면 Port
William의 조경을 한 눈에 관찰할 수 있다.
Omaha Beach D-Day에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그곳이다. 전투의 격렬함은 이미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보았던 분이라면 다 아실 것이다. 요즘은 여름이면 주로 휴양객들이
몰려 오는 곳이라고 하니, 격세지감이다. 그런 탓인지 이곳이 격전의 장소였다는 증거는 크게 많지는 않다. 주변을 돌아다니다 보면(혹은 D-Day
6.6.44 Jour J를 참고하면), 독일군 벙커나 탄약고 등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군인
묘지들 이곳에는 몇 개의 군인 묘지들이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미군 묘지. Colleville-sur-Mer에 위치한
이곳은, 총 9,386명의 전사자와 1,557명의 시신을 찾지 못 한 병사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규모면에서도 상당한 크기이며, 4월 중순부터
10월 중순 사이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그리고 나머지 때에는 오전 8시부터 5시까지 문을 연다고 한다. 입장은 물론
무료이다
전통적으로 영연방(Commonwealth) 국가의 군인들은 그들이 숨진 곳에 묻힌다고 한다. 그 결과
노르망디 지역에는 총 18개의 영연방 군인 묘지가 있다. La Cambe에는 독일군 묘지가 있다. 독일군의 일부는 영연방 묘지에도 묻혀 있다고
한다.
Pointe du Hoc Ranger Momument 1944년 6월 6일 오전 7시 10분. 225명의
미군 유격대(레인저)가 Pointe du Hoc의 30m 높이의 절벽을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독일군의 거대한 대포가 집중되어 있어,
상륙할 연합군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엄청난 희생 끝에 레인저들은 독일군 진지를 제압하나, 이미 독일군은 대포를 다른 곳으로
옮긴 후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곳에는 독일군 사령본부 등이 있어 연합군으로서는 값진 수확이었다. 레인저들은 작전 투입 이틀 후에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는데, 이미 81명의 사망자와 58명의 부상자를 낸 후였다.
Utah Beach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이곳은, 상시 개방되어 있어, 과거 독일군 진지나 사령본부 등을 맘대로 거닐 수 있다.
이렇게 D-Day Beaches에 대한
이야기를 주욱 적어 나가다 보니, 역사는 승자의 전유물인가하는 씁쓸함이 남는 듯 하다. 노르망디 전투에 참가한 수 많은 군인들 중, 과연 이념과
사상,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고 투철하게 생각했던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들은 살기 위해, 돌아가 고향의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상대방에게 총과 칼을 들이 댄 또 다른 역사의 희생양들은 아니었을까? 엄청난 살육의 현장에서 "v자"를 그리며 사진을 찍는
것도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까 하는 마음도 든다. 만약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승리했다면 이곳은 어떤 모습으로 지금 남아 있을까? 어쨌든 이
무자비하고, 또 잔혹했던 전투에서 죽어간 수 많은 영혼에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묵념한다. 그리고 내가 비록 미스 월드의 후보는 아니지만,
진심된 마음에서 세계평화와 전쟁의 종식을 꿈꾼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하루전인
1944년 6월 5일 美 제101공정사단 506연대 2대대 `이지 중대`(Easy Company)소속의 대원들을 격려하는 아이젠하워의
모습.
아이젠하워는 2 차 대전의 결정적인 분기점이 됐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수립과 집행을 1943년 지중해의 말타(Malta)
섬에서 비밀리에 준비했다. 상륙작전이 있기 며칠 전 그는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산언덕에 올라 작전수행을 준비하고 있는 군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아이젠하워는 무릎을 꿇고 모자를 벗었다. 그리고 무엇인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이를 지켜보던 지휘관들은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다. 기도를 마친 아이젠하워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우리의 모든 지식과 훈련받은 것을 동원할
시간이 다가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하나님 손에 모든 것을 맡겼으니 우리는 행동으로
들어갑시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전개도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사상 최대의 작전’이었다.
D-데이 하루 동안 연합군은 병력 8만 7000명, 각종차량 7000량, 보급물자 3,500만 톤을 상륙시켰고 7월말까지 그 수량은 156만
7000명, 33만 3000량, 160만 톤에 달했다. 특히 상륙 후 첫 3주 동안 연합군의 손실은 막대했다. 공식적으로 사망자 8,975명,
부상자 51,796명에 달했고 작전 과정에서 독일군 41,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아이젠하워를 포함한 연합군 수뇌부가 1년 넘도록 전략을
수립한 이 작전은 결국 나치 독일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으며 결국 패배를 인정한 히틀러가 1945년 4월 29일 총통관저에서 에바 브라운과
결혼하고 그 이튿날 함께 자살함으로써 전쟁은 막을 내렸다. 전쟁이 끝난 후 알려진 사실이지만 연합군의 판단과는 달리 당시 독일군
기상장교는 6일에도 악천후가 계속될 것이라고 보고했고 이에 독일군의 경계는 소홀해져 결과적으로 상륙작전의 성공에 큰 도움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