⑴ 시대 변화의 추이 무신란 이후 문학은 이전보다 더욱 활기를 띠었는데 한 시대의 문학이 파괴되면서 새로운 문학의 담당층인 신흥사대부가 대두되었다. 몽고가 침략하자 최씨 정권은 몽고에 항쟁하였고 사대부들은 최씨 정권의 항쟁을 지지했는데 이는 새로운 문학이 진취적이고 민중적인 입장을 지닐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무신란 이후에 나타난 고려 후기 문학은 중세적 가치관을 현실에 맞게 재편성하였고 이는 조선 전기까지 이어지게 된다.
⑵ 김극기가 택한 길 김극기는 벼슬을 크게 하지는 못했지만 산림에서 노래하며 문인으로서의 이름은 높았다. 그는 자신의 재능에 대한 자부심 때문에 내심의 갈등으로 번민한 李仁老와는 달리 농촌 생활의 모습을 가가이서 표현했다. 과장과 수식이 없이 생동감 있게 농민의 정서를 표출했다.
⑶ 죽림고회의 문학 무신란 후, 산수를 찾아 고결한 문학을 표방하던 吳世才, 林椿, 李仁老 등 7명이 竹林高會를 열었다. 오세재는 상당한 집안의 선비였으나 일거에 몰락하여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신세를 한탄하고 과거에 급하기를 바랐다. 임춘은 가장 불행했던 문인으로 30대에 요절했다. 이인로가 편찬한 '西河先生集'이 오늘날까지 전한다. 몰락한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고 갈등과 충격을 생동감 있게 드러내어 문학사의 전환에 기여했으며 '孔方傳', '麴醇傳' 등의 가전체 소설도 지었다. 이인로는 죽림고회의 중심 인물이었으면서도 벼슬이 정4품에 이르는 등, 홀로 성공했다. 그럼에도 영화를 누리지 못하는데 불만을 품고 좌절된 의지를 문학에서 살리고자 하였다. 최초의 詩話集인 '破閑集'을 지어 문학은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표현을 공교롭게 다듬는 것이 가치를 발휘하는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던 죽림고회의 다른 시인들과는 조금 다른 문학관을 지녔다. 그의 글은 用事를 중시한 까닭에 현실의 문제와 만나는 것을 피했다.
⑷ 최씨 정권의 문인들 琴儀는 최씨 정권의 문인들 가운데 좌장 격의 인물로 최충헌이 문인들을 기용하도록 하는데 상당한 구실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하는 작품은 없는 것으로 보아 대단한 문인은 아니었던 듯하다. 兪升旦은 '翰林別曲'에 나오는 元淳文의 주인공으로 詩보다는 文에 능했다. '동문선'에 전하는 그의 시는 고려 사회의 모순을 노래하고 있다. 金仁鏡은 시와 부에 능했고, 근체시를 공교롭게 지었다. 은근한 풍자를 지닌 시가 전한다. 陳 는 詩作에 능통했던 인물로 '梅湖遺稿'가 남아 있다. 세상의 모순을 바로 잡으려는 뜻과 민족적 긍지가 엿보이는 작품이다.
⑸ 이규보의 경우 李奎報는 무신란 덕에 정계에 진출한 신흥 사대부의 선두 주자격인 인물로 죽림고회에의 참여 권유를 뿌리치고 벼슬길에 나아갔다. 문학에서는 옛사람의 표현보다 새로운 착상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하여 문학적 평가의 기준을 바꾸어 놓고자 했는데, '東國李相國集'에서 그는 문학 이론과 창작의 여러 면을 보여주고 있어 다방면에 걸친 그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그의 작품에서는 자신이 느끼는 바를 여러모로 천착한 흔적이 나타나 있으며, 사소한 소재도 문학론의 문제 의식과 결부된 표현을 했다. 그는 많은 작품을 썼으나 그 지향하는 바는 몇 가지로 집약된다. 하나는 '東明王篇'에서 보여주는 주체적 역사 의식을 표현하면서 민족 정신을 고취하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몽고에 대한 저항 문학으로 이어진다. 다른 하나는 만년에 농민시를 이룩한 것이다. 그는 대몽항쟁 기간 동안 고난을 겪는 농민의 편에 서서 그들의 어려움을 시로 남겼다. 농촌을 소재로 삼은 시는 그 전에도 있었지만, 이규보처럼 농민의 항변을 격렬하게 보인 것은 없었다.
⑹ 대몽 항쟁의 문학 崔滋는 몽고와 싸우기 위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三都賦'를 지어 강화에의 천도가 정당함을 주장하였다. 三別抄를 마지막으로 무력 항쟁은 끝났으나 문인들은 지난날의 투쟁을 찬양하는 시를 지었다. 金坵는 그러한 대표적 인물로 그의 문집인 '止浦集'에는 '過鐵州'를 비롯한 항쟁의 시들이 있다. 止, 李穀은 원나라의 가혹한 수탈로 인한 백성의 희생을 처절하게 그렸고, 李承休는 '帝王韻記'를, 一然은 '三國遺事'를 지어 민족 의식을 고취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