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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지금도 병을 고치는가?
맥아더 목사의 하나님은 지금도 병을 고치시는가 라는 그의 부제는 은사에 대한 조롱감마저 느끼게 한다. 여러 이론을 동원하여 하나님은 모든 질병을 다 고칠 수 있지만 초대교회 때와 같은 그러한 치유의 역사는 지금 현대에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으며 치유의 모든 원형을 예수님과 그의 사도시대로 한정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사실 현대 치유 은사자들을 통한 치유의 문제가 심각한 것은 사실이다. 비단 치유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은사적 차원에서도 그러하다는 사실은 여러 차례 말한 바 있다. 우리 기독교를 어떤 종합병원으로 이해하기에 충분한 그러면서도 치료하지 못하는 그런 잘못된 병원으로 인ㅅ오해하기에도 충분할 정도로 치유에 대한 문제는 심각함을 인정한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하여 그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 시달리고 있으며 이러한 질병을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 받으려는 성도들의 아픈 가슴을 맥아더 목사는 이해하고 있는지.
맥아더 목사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신유의 은사를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고 보람 있는 일이겠는지 생각해 보라! 병들어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가서 그저 만지기만 하면 그들이 낫는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놀랍겠는가! 신유 은사를 받은 사람들을 다 모아서 질병 투성이인 이 세상에 파송한다면 정말 기막힌 일이 아니겠는가. 그들이 사람들 사이를 다니면서 암환자, 결핵환자, 에이즈감염자, 그리고 그 외 여러 가지의 병에 걸린 사람들을 치료 할 수 있으련만. 왜 신유 은사 자들은 그런 시도를 하지 않는가? 신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정말 극심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것이 어떻겠는가. 먼저 가까운 병원과 요양소에 가서 이 일을 시작하고 점점 사방으로 퍼져 가면서 계속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만약 은사주의 자들이 종종 주장하는 것처럼 그런 기적들이 불신자들을 믿게 하기 위한 기사의 이적이라고 한다면 이 일이야 말로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있어서 최상의 방법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면서 치유에 대한 극단적 불쾌감과 치유 은사자에 대한 조소적인 말을 거침없이 쏟아 붓고 있다.
되묻고 싶은 사실이 있다. 예수님은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는 분이신가. 물론 그렇다고 대답 할 것이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시고 그 병의 나음을 본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를 믿었는가. 여기서는 아니다라는 답을 할 것이다. 오히려 예수를 믿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았으며 예수님의 기적을 심지어는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행하는 그러한 귀신의 사역으로 돌려버린 경우도 있었으며 예수님이 태어나서 자신이 살던 동네에서는 예수님의 기적 행하심을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 기이한 현상을 보고 그들의 교만함을 꾸짖고 거기서는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기도 하셨고 오히려 예수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책망하신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모든 병을 다 고친 것이 아니라 비록 그들이 예수님으로 부터 능력을 받았다 하더라도 치유시키지 못한 병이 있었다는 사실을 맥아더 목사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치유가 복음전달의 효과적인 보조 수단은 될 수 있다 하더라도 치유 그 자체가 복음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맥아더 목사의 말대로 만약 치유의 은사가 모든 병을 고치는 그리고 그러한 일이 발생한다면 오히려 우리 기독교는 더 많은 혼란으로 치 달리게 될 것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 뒷전이 될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치유의 은사만 간구 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의 순리 또한 파괴 될 것이다. 곳곳에서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목소리가 천지를 진동 할 것이다. 치유로 인한 복음전파가 완벽하게 일어났다면 지금쯤 온 이스라엘은 모두 예수를 믿어 완벽한 기독교 국가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신유은사자라 하여 모든 병을 고치며 그리고 항상 병을 위해 기도한다고 하여 병이 고쳐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 당시 치유의 은혜는 표적적 차원에서 불치병들에 대한 치유 사역이 중심이며 그 치유 또한 즉각적 반응을 보여야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 은사 차원에서의 신유는 완전히 예수님 당시의 시대와 달리한다. 지금은 표적적 차원에서의 신유가 아니라 교회의 덕과 유익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반드시 병이 낫고, 낫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라 비록 병이 낫지 않는다 하더라도 신유기도를 통한 교회와 개인에게 있어 충분한 유익이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말씀이 없는 그러한 시대와 장소(복음이 들어가지 못하거나 성경이 없는 나라 등을 의미한다.)에서는 하나님의 표적적 차원에서의 치유가 급속히 일어나는 선교사들의 보고를 우리는 수도 없이 많이 듣는다. 나는 그러한 보고가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최소한 목숨을 걸고 선교사역을 하는 선교사들의 그러한 간증과 보고가 거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만약 그러한 보고를 거짓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모든 표적적 기적은 끝났기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목숨 바쳐 충성하는 모든 선교사들에 대한 불명예라 생각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전파되고 성경이 널리 퍼져 있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표적적 차원에서의 놀라운 기적적 치유는 많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표적적 차원에서의 기적이 자주 일어 날만한 하등의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의사와 병원도 있으며 그리고 이미 말씀을 통한 성숙한 믿음위에 성도들이 놓여 있기 때문에 표적 그 자체가 성도들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진실 된 성도는 하나님께 자신의 질병을 위해 기도했을 때 그 질병을 하나님이 고쳐 주지 않으셨다고 하나님을 버릴 성도는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질병 가운데 더욱더 감사하는 경우가 많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성령께서 주시는 신유 은사는 모든 병을 고친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는다. 그리고 기도하였을 때 즉시로 고침 받게 된다는 것 또한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절대적으로 성령의 뜻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는 불신자들을 믿게 하는데 사용되어지는 것이 일차적 목적이 아니라 개인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 먼저 사용된다는 사실이다.
맥아더 목사는 치유에 대한 교회의 모든 기록이 초대교회 이후 사라졌다고 하였는데 자신이 인용하기도 하는 어거스틴에 있어 그가 만년에 쓴 책 신의 도성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얼마나 많은 기적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일어나고 있는가. 그러한 기적들은 과거에 일어났던 기적들과 거의 동일한 것들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의 경이들에 대한 기억을 우리 성도들의 마음속으로 사라지게 한다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라고 깨닫게 되자 기적이 일어났다”고 하면서 어거스틴이 당시에 수집한 70여 개의 기적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 한 눈먼 사람의 시력이 회복되었다.
2) 카르타고의 이노센트 주교는 직장의 누관을 치유 받았다.
3) 카르타고의 이너 센티아는 유방의 종양을 치유 받았다.
4) 카르타고의 한 의사는 응혈을 치유 받았다
5) 컬큐베스의 한 배우는 중풍과 탈장을 치유 받았다.
6) 어거스틴의 이웃사람인 헤스페리우스는 악령에 의해 생긴 병을 치유 받았다.
7) 귀신들려 눈의 혈관이 막셔 앞을 보지 못하던 소년의 눈이 치유 받았다.
8) 히포의 어린 소녀가 귀신으로부터 구출 받았다.
9) 히포의 눈 먼 여인이 치유 받았다.
10) 마차에 치인 한 소년은 치인 상처도 없이 치유 받았다.
어거스틴은 자신이 죽기 3년 전에 저술한 수정(Retrations)이라는 책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러한 기적들은 우리 시대에는 계속 허락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만 항상 요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고 그리고 사람들이 그러한 기적들에 익숙해지게 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색다른 경험을 주어 열광하게 만들었던 그러한 일에 냉담하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말이 그 어떤 기적들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해되어져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내가 이 책을 집필할 그 당시에 나는 이미 한 맹인이 밀라노의 두 순교자들의 시체에 가까이 감으로 그의 시력을 회복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리고 이와 같은 종류의 또 다른 일들이 너무나 많이, 심지어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라고 하였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도 1545년 자기가 죽기 바로 전 야고보서의 말씀에 기초하여 치유예배에 관한 지침을 썼다.
필자가 알기는 초대교회이후 교회 내에서의 치유형태는 어떤 식으로 행해 졌는지는 정확히 몰라도 분명히 치유는 있어 왔다고 믿는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와는 다르게 아주 자연스럽게 치유는 교회의 한 부분으로 진행이 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순교자 저스틴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친다”고 하였으며, 터툴리안은 병고침 받은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기까지도 하였다 한다. 심지어 리용의 감독이었던 이레니우스는 “이단은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기 때문에 치유를 하지 못한다”고 말하였으며, 오리겐은 “병을 고치는 주님의 능력은 계속 역사하고 있다”고 증거 하였고,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감독이었던 시프리안은 교회 안에서의 치유의 역사를 인정하면서 탄식하기를 “교회가 점차 세속화되어져서 적에게 능력을 넘겨주었기 때문에 기도의 힘을 상실하였다”고 했다. 터툴리안은 북아프리카의 총독에게 보낸 편지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귀신으로부터 구출을 받았으며, 질병으로부터 고침을 받았습니다. 안토니우스 황제의 아버지인 세르베투스도 성직자를 찾았으며, 기름을 발라 그의 병을 고쳐준 사람에게 감사를 표시했으며, 죽을 때까지 궁정에 남아 그의 곁에 머무르게 했습니다.”
이때 치유의 수단으로 기도, 기름 바름, 그리고 안수 등의 방법을 사용했다고 하였다.
교회에서 치유의 모습이 사라진 것은 우리 기독교의 원 교회 모습이 아니라 로마 카톨릭이 교회를 지배하면서부터 나타난 현상이다. 로마가 복음화 되면서 성도들의 수가 급속히 증가되었다. 성도의 증가는 결국 교회의 세속화를 가져온다. 교회가 세속화되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무관심이 결국 교회의 치유사역을 단절시키게 되었으며 약 10세기 이상을 지배한 로마 카톨릭은 질병 그 자체를 하나님의 축복의 수단으로 강조하였기 때문에 치유에 대한 관심은 더더욱 멀어 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치유에 대한 단절이 종교개혁이라는 놀라운 사건을 통해 다시 새롭게 재조명되기 시작하였으며 여러 가지 많은 문제점들을 가지고는 있으나 오늘날 치유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 것은 오히려 성경적이며 자연스러운 신앙의 한 형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 교회에 유입이 된 이단적이거나 사탄적인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그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올바른 행위이다. 건전한 치유사역은 교회를 유익하게 하고 성도들에게 큰 힘과 소망을 주는데 있어 그 귀중함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종교 개혁자 칼빈은 치유사역을 부정하고 인정하지 않았다. 오늘날 대부분 치유사역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은 성경의 바른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칼빈의 사상을 따르고 있을 뿐이다. 칼빈의 치유사역이나 성령의 은사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그가 저술한 기독교 강요에서 분명히 입장을 밝히고 있다.
칼빈은 치유나, 은사뿐만 아니라 다양한 기적까지도 사탄의 한 역사로 치부하고 있다. 물론 그 당시 칼빈은 칼빈의 대적자들이 기적이나 치유 등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에 대한 경고와 경계로 이렇게 주장하기도 했지만 이러한 그의 주장은 결국 성령의 기적이나 은사 등의 여러 기적적 능력들이 성경이 완성된 이 후 모두 사라 졌다라는 그의 사상을 입증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한 한 예로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기적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치유에 대해 침묵하거나 거부하지 않는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 할 찌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 찌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 하는 힘이 많으니라”(약5:14-16)
본인은 극단적으로 성령의 은사를 거부하고 성령의 다양한 나타나심에 대한 기적적 역사들을 인정하지 않는 몇몇의 실 예들을 맥아더 목사의 저술을 반박하면서 결코 그러한 주장들이 성경적이지 않음을 밝혀 보려고 노력해 보았다. 물론 본인이 잘못 성경을 이해한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본인도 성경에 나타난 여러 기적적 은사나 역사들을 거의 체험해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때론 나의 생각이 틀렸으면 좋곘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나 본인의 신앙양심상 결코 그럴 수 없었고 사탄의 역사는 이렇게 지금까지 역사하며 나타나고 있는데 하나님의 성령의 모든 역사나 기적이 성경이 완성되면서 같이 끝났다는 것은 상식선에서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필자는 극단적으로 은사중단 및 모든 하나님의 기적에 대한 종결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문제점을 살펴보면서, 그들이 인용하는 성경에 있어서 해석상의 심각한 문제를 범하고 있음을 발견 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기적과 표적 그리고 성령의 여러 은사에 관련된 부분의 성경구절들은 단지 성경이 완성되기 전까지의 사건에만 적용 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여러 표적적 기사와 성령의 은사들도 그때 당시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또한 그렇게 해석을 한다. 이들이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주장하는 이론에 대한 정당성을 주기 위해서 이다. 그러다 보니 이들의 해석은 어떤 면에 있어서는 전혀 이해하기 힘들고 그리고 이해 해 줄 수도 없는, 전혀 문맥상 연결되지 않는 해석을 시도하곤 한다. 그리고 그 해석에 대해 분명함을 증명하기위해 억지를 쓰는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면 성경에서는 전혀 은사를 구하라는 말이 없다라든가, 아니면 성령을 받기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은 한군데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성경은 기적을 구하라는 말씀도 없다. 그리고 사도들이 기적을 위해 기도를 했다거나 성령 받기를 위해 기도하였는가. 하는 등의 내용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맥아더 목사의 은사라는 책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언급을 한 내용들이다. 만약 이러한 이들의 주장이 정말 성경적이라 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찬송을 불러선 안될 것이다. “성령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화하시고”(177장), “빈들에 마른풀 같이 시들은 나의 영혼 주님의 허락한 성령 간절히 기다리네”(172장), “불길 같은 성신이여 간구하는 나에게”(173장) “성령의 은사를 나에게 채우사”(174장),“은혜가 풍서한 하나님은”(178장),“은혜구한 내게 은혜의 주님”(498장) 등등의 찬송들이며 기타 여러 복음 성가들도 여기에 해당이 될 것이다.
둘째 자신들이 인용한 성경 해석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이들의 시도는, 성경으로서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나타나는 표적과 은사에 대한 부정적 사례들을 제시함으로 그 정당성을 인정 받으려한다.
성경을 잘 모르는 성도들은 성경의 가르침과 관계없이 부정적 사실들을 증명하고 부각시키면 그것이 진리로 착각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정상적으로 성경해석에 대한 공부를 하지 못한 사람들은 앞 뒤 문맥과 전혀 상관없이 성경을 인용하고 그 인용한 성경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킨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된다. 특히 은사반대론자들의 성경인용이나 해석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고, 지성적으로 다가 오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추종세력을 얻게 된다. 이들 중 상당수의 학자들이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위대한 개혁자들의 계보를 따르기 때문에 성경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맹종의 형태로 그들의 해석을 따르며 그대로 수용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셋째 이들이 인용한 성경 해석원리는, 성경의 참뜻을 정확하게 밝히기 위해 시도하는 기초적 해석원리들을 배제시키고 단지 자신들의 추론과 유추적 해석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어느 한 부분도 정확하게 성경을 인용하여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경우가 없다.
예를 들면 히브리서 1장 1-2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의 종결성을 주장하며 그에 적당한 이론으로 해석을 시도하고 있는데 과연 이 말씀이 100% 정확하게 하나님의 계시의 종결성을 뒷받침하는 다른 어떤 성경의 지지가 있는가. 단지 구약의 여러 사건과 예언적 해석들을 종합하여 생각해 볼 때 그러한 말씀이 틀림이 없는 것 같다라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고린도 전서 14장 19절의 말씀을 보고 사도바울이 방언 받는 것을 금하고 있으며 성경도 방언 받는 것을 금하고 있다라는 해석을 시도하는데 성경 어디에 방언 받는 것을 금하고 있으며 방언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주장을 하는가. 성경 어디에 하나님의 기적과 성령의 은사가 끝이 났다고 기록하고 있는가. 모두 자신들의 이론적 추론이 아닌가.
극단적 무 은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경을 인용해야 하며 그리고 성경적 지지와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보니 유추 혹은 추론적 해석을 시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때로는 많은 세속적 학문을 인용하기도 하고 여러 이론적 근거로서 다양한 도구를 사용하다 보니 이들이 성경을 바르게 아는 사람이요, 아주 논리적이고 이론적이다 보니 성경전문가 인 것처럼 사람들이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기적과 성령의 은사가 초대교회 후 완전히 끝났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지금도 수많은 하나님의 기적과 성령의 은사를 통한 하나님의 영광이 계속 나타나고 있다. 본인은 지금도 성령으로 능력주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린다.
필자는 맥아더 목사의 은사에 대한 견해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그의 책을 통해 부분적으로 반박을 하였지만 사실 극단적 무 은사 주의자들의 문제점을 지적함에 있어 여러 부분에 있어 더욱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함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장에서는 어느 정도 이해차원에서 마무리 하는 것은 자칫 뒤에서 계속 다루게 될 여러 내용과의 중복 우려와 좀 더 성경적 접근을 따로 후반부에서 자세히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끝까지 잘 읽어 주길 당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