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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03 원복음
안녕하십니까 이틀째인데요. 여러분들 어떻게 보내고 계십니까?
https://youtu.be/Z4-yBy_6Mys
처음에는 생활이 제가 밖에서 생활하는 것과 너무나 달라서 맞춰 가는데 보통 저는 좀 늦게 자는데 이 여덟시, 아홉시만 되면 다 이렇게 이제 주무실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니까 자리에 누워도 잠이 안 오고 근데 말씀대로 살아야 되니까
누워 있다가 뒤척이다가 이렇게 이제 하는데 이틀째 되니까 조금 적응이 되는 것 같아요.
첫날에는 삼호도 꼬박 밤을 샜다가 너무 좋은 일 또 환경 하늘의 별도 보고 하니까 막 그러다가 어제부터는 이제 조금씩 잠을 자는 거 같아요.
우리도 처음에는 말씀대로 온전히 순종하는 게 다소 낯설고 불편하고 힘들지만 살아가면 우리 몸이 적응하게 돼 있겠죠 그죠? 그런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매일매일 저는 개인적으로 너무나 큰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매일 들려주시는 말씀이 어떻게 보면 계속 저한테 회개하라고 하는 말씀처럼 들려서 매일 매일 회개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정말 제 마음속에 딱 들어오는 말씀이 나는 나의 복음을 지금 말하고 있는지 한번 좀 생각을 해보세요.
그리고 정말 이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고 말씀대로 살게 해달라고 진심으로 기도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침마다 주시는 이 주옥 같은 말씀 하나하나마다 정말 마음에 새기며 듣고 있고 제가 전하는 말씀대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먼저는 제게 주시는 말씀으로 오늘도 여러분에게 전하고 있음을 꼭 기억해 주시고요.
저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시고 다 같이 몸부림 치면서 온전히 복음의 능력을 회복할 수 있는 그러한 지점까지 함께 나갈 수 있도록 그렇게 함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준비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창세기 삼장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에 하나님이 쫙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신문을 진행해요. 그리고 난 후에 이제 최종적으로 뱀을 저주하는데 그러면서 이어지는 이야기가 성경 전체의 성경절 중에서 가장 중요한 성경절인 창세기 삼장 십오 절이 이제 나옵니다.
우리가 원복음이라고 하고 있는데요 먼저 한 번 읽어볼까요?
이 원복음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어떤 의미인가 하면 이 복음 이야기는 이 성경절 이제 나중에 나오는 모든 복음 이야기를 이 성경절을 해석하며 만들어지는 이야기에요.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 창세기 삼장 십오 절을 이렇게 주석하는 분도 계세요.
창세기 1장 1절부터 십사절까지가 창세기 삼장 십오절의 서론이고
나머지는 창세기 삼장 십오절 이게 삼 창세기 삼장 십육 절부터 계시록 이십이장 이십일절까지의 모든 내용은 이 창세기 삼장 십오 절의 주석이라고 할 만큼 이 창세기 삼장 십오 절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이 한 절을 가지고 성경 전체를 풀어갈 수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제가 이제 그게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대한 부분들을 조금 설명해 드릴 거예요.
여기 내가 너로 여자로 원수가 되게 하고 하는데 이 말은 뱀과 하와가 뭐가 된다? 원수가 된다고 하는 거죠.
더하여서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원수가 될 것이라고 하는 거야.
근데 이 원수라고 하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에바라고 하는 이제 단어인데 이 의미는 어떤 의미인가 하면 증오심 적의, 적개심이에요.
이 말을 좀 더 쉽게 풀면 이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뱀과 원수가 될 수 있어요? 사단과 원수가 안 돼요.
우리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근데 이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뱀과 하와 사이에 서로 미워하는 적개심을 넣어주시겠다고 하는 거예요.
원수가 될 수 있는 마음을 넣어준다고 하는 거예요.
근데 이것을 예언적으로 해석하면 사단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또 사단의 사단을 따르는 무리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서로를 원수로 생각하는 이 적개심이 넣어진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그런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면 어떤 일이 벌어진다?
자연스럽게 핍박이 따라온다고 하는 게 성경의 말씀이죠.
그래서 이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은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근데 이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하나가 되어진 때가 있습니다.
그게 언젠가 하면 이렇게 쭉 올라가다 보면 노아 홍수 때 하나가 되어져요.
그게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원래는 하나님이 아름답게 보여주신 걸 아름답게 봐야 되는데 그게 아니라 세속적인 아름다움의 매혹이 되는 거야.
그러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아내를 삼고 세상과 하나가 되는 일이 벌어지면서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하나가 되어지고 이 종말이 오는 거예요.
여러분 이 둘 사이에 하나가 될 수 없게 하는 이 마음이 사라지면 안 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창세기 삼장 십오 절에 이 말씀이 어떻게 복음이 되는가 하면
오늘 우리가 이제 죄에 감염되어지면 나타나는 증상이 무엇인가 하면 첫째로 나타나는 게 뭔가 하면 그 죄가 더 이상 치명적으로 보이지 않게 돼요.
그러니까 죄에 감염되어지는 다시 말해 더 이상 죄가 흉악하게 보이지 않게 되는 거예요.
이것은 죄에 감염된 하와에게 나타났던 한 증상이에요.
원래 죄를 짓기 전에 하와에게 선악과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아야 할 만큼 무서운 것이었어요.
그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처음에는 이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심지어는 뭐도 하지 말라 만지지도 말 만큼 이거 건들면 죽을 정도로 위험한 것이라고 하는 게 하나님 말씀이었고 이 말씀이 처음에는 그 마음을 주장했을 때는 이거를 진짜 건들 생각이 전혀 없는 거예요.
근데 사단의 말을 받아들이고 난 후에
다시 말해 하와가 죄에 감염되었을 때 이 제 사상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 다음에는 이 선악과가 어떻게 보입니까? 더 이상 치명적이지 보이지 않는 거예요.
그리고 어떻게 보였는가 하면 이게 아름답게 보이는 거예요.
어떻게 보인다고 하죠? 먹음직도 하고 구함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실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 확인해야 될 중요한 사실은 뭔가 하면 죄에 감염된 인간은 사단과 한 편이지 절대 사단과 원수가 될 수 없다고 하는 사단이 원하는 대로 끌려가는 거예요.
죄를 저항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근데 하나님은 창세기 13장 15절의 말씀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가 하면, 오늘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아담과 하야 너희들 절대 그렇게 두지 않을 거라는 거야.
너희가 진짜 원하기만 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마련된 이 구원의계획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하고, 어저께 말씀 드린 것처럼 이 복음 앞에 자복하고 굴복하고 회개하여 다시금 주님을 그 마음의 주인으로 모시기로 다시금 선택하고
그렇게 살기로 결정하면 주님은 우리 마음속에 어떻게 하셔서 들어오셔서 다시금 들어오시는 거예요.
그 주인으로 들어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사단의 제안에 저항하고 반대하면서 사단과 우리 사이에 뭐가 일어나게 만들어주신다 투쟁이 일어나게 만들어주신다고 하는 거예요.
예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단과 우리 사이에 넣어주겠다고 하시는 이 증오심이라고 하는 것은, 좀 더 실제적으로 말하면 어저께도 제가 말씀을 드렸는데 사단을 반대하는 거예요.
우리가 원래는 하나님께 반대했잖아요.
그래서 사단이 되고 그 다음에 죄인이 됐잖아요.
사단을 반대할 수 있는 마음이에요. 이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하면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 또 다르게 말하면 이 마음은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고,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이 마음이 들어와야지만 우리의 죄된 마음에 회화와 갈등이 일어나는 거예요.
아 내가 왜 이렇게 살았지 그전에 살았던 것들을 막
그 후회하고 회개하는 그런 마음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이전에 단절된 삶으로 살아가는 이전과 단절된 사람, 삶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고, 그리고 우리 마음에 이 사단과의 투쟁이 일어나게 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이제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이 로마서 7장에 보면 이런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어떤 경험이죠? 내 마음속에 한편에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마음이 있는데 또 어떤 마음이 있어요? 내 본성은
이 죄의 법을 즐거워하는 그런 마음이 막 사로잡아 오는 거예요.
둘 사이에 벌어지는 이 내적 투쟁을 말하는 것이죠.
이 투쟁이 벌어지는 게 바로 뭔가 하면 거듭난 사람의 마음속에 벌어지는 거예요.
저는 로마서 칠장은 회개하기 이전이 아니라 회심하고 난 이후에 벌어지는 거예요.
창세기 삼장 십오 절의 말씀을 통해서 본다.
그러면 다르게 보는 사람들도 있는데 저는 그렇게 봅니다.
근데 이 내적 투쟁으로 끝나는 게 아니죠.
이게 어떻게 가는가 하면 로마서 8장에서는 어떻게 되죠?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어떻게 한다? 너희를 해방시켜주는 약속도 주어져 있는 게 바로 뭔가 하면 창세기 삼장 십오 절에서 나온 이 복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은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고 그리고 십자가의 희생을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이 마음을 부어주셔서 사단의 세력을 대항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는 것 이것이 첫 번째 복음의 약속이에요.
이걸 기억해야 돼요.
그래서 창세기 삼장 십오 절에 약속된 이 복음을 이 새로운 마음을 주시겠다는 이 약속이 바로 그 후에 에스겔서 삼십육장 이십육절부터 이십칠 절에서는 에스겔은 이렇게 이걸 설명하고 있어요.
이게 다 이걸로 설명되어지는 거예요.
부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마음을 너희 속에도
예 이 새로운 마음이 들어오면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하는 그래서 복음은 구세주의 희생을 통한 속죄의 약속뿐 아니라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다는 약속뿐 아니라 더하여서 십자가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자에게 약속하신 이 새로운 마음, 새 영, 이 새로운 하늘의 생명을 약속한 거예요.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 안에 누가 계신 증거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하는
그래서 이 마음이 들어간 사람들은 죄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갖게 돼요.
본성은 그대로 있지만 새로운 마음이 들어온 거예요.
근데 하나 깨달아야 할 중요한 것은 뭔가 하면 이 마음이 들어왔다 하더라도 바로 본성이 바뀌나요? 안 바뀌죠.
옛 본성은 그대로인데 새로운 마음이 하나 우리 마음속에 들어온 거예요.
이게 그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가 우리 마음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뭐다? 그 마음속에 심어진 겨자씨 하나로 비유하기도 하고
누룩 하나로 비유하기도 하죠. 이게 점점점점 커지면서 어떻게 할까요? 우리 마음을 지배하는 식으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지는 걸 설명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죗된 본성 안에 새로운 거룩한 마음이 들어온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투쟁이 일어나는 거예요 투쟁이.
예 그래서 오늘 우리 안에 이러한 죄에 대한 증오심과 적의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오늘 우리가 진정으로 창세기 3장 십오절에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하는 것이고 우리가 진정 거듭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증명하는 거예요.
근데 오늘 우리가 반대로 죄를 밥 먹듯 짓고 살아가고 있는데도 전혀 양심에 불편함이 없고 사단이 좋아하는 것을 나도 좋아하고 그냥 같은 죄를 또 짓고 또 짓고 하면서도 늘 죄에 파묻혀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가 전혀 거기에 대한 갈등이 일어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전혀 마음에 이제 이상이 없다고 하면 우리가 서 있는 영적인 주소가 정말 그리스도가 계신 생명의 땅이 아니라 사단과 함께 하는 사망의 땅일 수 있다고 하는 것을 꼭 깨달아야 된다고 하는 사실이에요.
예 여러분 이 경험을 사도 베드로라는 사람은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심으로 말하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편이
이 본문에서 베드로는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선한 양심 이것은 물로 침례를 받은 사람, 거듭난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한다고 하고 있고 이것을 로마서 육장 사절에서는 이것을 진정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 지낸 자에게 주신다고 허락하신 무엇이다? 새 생명이라고 하는 거예요.
새 생명. 그래서 참된 그리스도인은 주님이 주시는 새 마음을 받아서 새 생명 가운데 행하는 사람들이에요.
참된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주님이 주시는 이 새로운 마음을 받아서 어떻게 해야 한다?
새로운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사람들이에요.
살아가는 사람들이에요. 실제 이 마음을 가진 자만이 복음을 받아들인 자이고 이 사람들이 누구다? 여자의 후손이라고 하는 거예요.
심지어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십삼장 오 절에서 이런 말씀까지 하고 있어요.
제가 성경제를 좀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단 피피티로 제가 준비해 왔거든요.
이 말씀은 정말 중요한 거니까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어떻게 알아? 시험하고 삶 속에서 확정해보라고 하는 거예요.
근데 확정해보는 게 전부 이런 말씀들이죠 그렇죠? 내가 이런 말씀 속에서 내가 살아가고 있는지 만약 그게 안되면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잘 확인이 안 된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다? 우리는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이라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그래서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이론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어떤 관념과 어떤 한 사상을 받아들였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 나의 삶에 그 약속하신 복음의 능력을 우리의 삶 속에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셨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은 현재 나의 삶에 나타날 수 있고 경험되어질 수 있는 실제적인 능력이고 무엇이다? 파워라고 하는 거예요.
예 사도 바울이 이것을 경험하고 난 다음에 말하기를 뭐라고 하는가 하면 로마서 1장 십육 절에서는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무엇이다?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그래서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하는 거예요.
내가 예수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가는 삶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하는 거 그리고
이 고린도전서 사장 십구절 이십 절 말씀은 정말 제가 좋아하는 말씀이에요.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예 이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넌 사도가 아니야 가짜 사도야 하고 막 비난합니다.
그리고 다른 복음을 전해요. 너희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나는 너희들이 하는 그 화려한 말들이 아니라 무엇을 보겠다.
이 여자의 후손은 반드시 뭐예요? 그 복음의 능력이 나타난다고 하는 그래서 내가 볼 때는 너희들이 하는 그 말이 아니라 그 능력을 통해서 너희들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보겠다고 하는 그러면서 심지어 무슨 말까지 하고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오직 무엇에 있다? 능력에 있다고 하는 오직 이 파워를 통해서 바울은 오늘 우리 마음에 그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하는 거.
이런 얘기들이 무수히 많이 나옵니다.
네 마태복음 십이장 이십팔 절.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이게 무슨 말이에요? 복음을 받아들인 자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이죠.
그렇죠? 이것을 힘입어 무엇을 쫓아내는 것이면
귀신은 뭐예요? 실제적으로 오늘날의 삶 속에 적용하면 사단의 능력이에요.
이것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죄된 욕망과 모든 우리 마음에 사단이 던지는 모든 죗된 영향력으로 나타나는 염려와 불안과 불평과 근심과 증오와 불행한 감정까지 다 포함하는 거예요.
이것을 성령을 힘입어서 내가 몰아낼 수 있다면 그렇다면 너희 마음에는 무엇이 임했다?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고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복음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다고 하는 거예요.
로마서 사장 십칠절.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맛있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편관과 희락이다.
이 먹는 것과 맛있는 것은 우상 숭배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거지 오늘 우리가 가르치는 이런 논쟁이 아니에요.
당시에 이제 분위기를 보면 근데 사도 바울은 뭐라고 하는가 하면 하나님 나라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경험하는 것이 바로 무엇이다?
하나님 나라 다시 말하면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전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면 어떤 이론이 아니라 경험을 말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은 창세기 3장 십오절에 복음의 능력을 받아들였다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이 말씀을 오늘 아침에 새롭게 좀 보게 된 말씀인데요.
사도행전 1장 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난 이후에
부활하시고 난 부활하셔서 사십일 동안 제자들에게 진짜 남아있는 그 소중한 시간 동안 집중적으로 가르친 게 뭔가 하면 뭘 가르쳤죠?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쳤다고 하는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그들에게 확실한 만인 증거로 친이 살아계심을 나타내사 사십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무엇을 가르쳤는가 하면 하나님 나라의 일이에요.
이게 무엇인가? 갑작스럽게 뚱딴지같이 등장한 하나님 나라가 아니에요.
이 하나님 나라 일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창세기 삼장 십오 절에 우리가 어떻게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인 자가 무엇을 경험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필요한 믿음에 대한 것 우리가 어제 공부했던 것처럼 자복과 굴복과 회계의 과정이라고 하는 거를 집중적으로 말씀하신 거예요.
근데 이 과정이 제자들에게 다 실천되어지죠 그죠? 사도행전이 나오잖아요.
그들이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 후에 10일 동안 뭘 했죠? 자복하고 굴복하고 얼마나 회개했는지 몰라요.
예 얼마나 자복하고 굴복하고 기도했는지 그 내용이 나오잖아요.
그죠? 사도 행적에도 나와요. 그리고 더하여서 그들이 창세기 삼장 십오 절에 나오는 이 십자가를 경험합니다.
십자가를 기고
그리고 난 후에 그들이 전부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이 경험하는 능력 있는 삶 성령의 권능을 경험하게 되는 거예요.
그 결과 그들이 실제 사도행전이라고 하는 엄청난 역사를 이루어내는 그 경험들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단지 우리가 무엇을 배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이냐고 하면 이 복음이 우리의 머리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받아들여져서 실제 우리 삶의 능력으로 나타나고 있는 나타나는 체험이고 경험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그 예수님을 눈에 보는 것처럼 경험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원래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무엇인가 하면 무엇을 알고 깨닫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초기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무엇인가 하면 나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실제적으로 그 구원의 능력을 가지고 내 삶에 들어오셔서 예수님이 구원자이잖아요 실제 복음에서 말하는 그 구원의 능력을 가지고 내 삶 속에 들어오셔서
내 삶에 나타나고 있는 총체적인 문제, 죄로 말미암아 벌어지고 있는 총체적인 삶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시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체험한 사람들이 바로 종교 개혁을 일으켰던 사도행전의 초기 개혁 기독교회의 모습이에요.
유대교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로마 전체를 다 뒤집어 엎어버리는 엄청난 복음의 능력을 경험했던 것이 바로 이 창세기 삼장 십오 절에 이 복음을 실제적으로 다시금 그들의 삶 속에서 경험하는 그런 일들이 벌어졌다고 하는 것이다.
여러분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일까요? 우리가 알고 깨닫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조목조목마다 실천함으로 말미암아 오늘 우리 삶 속에 혁명이 일어나고, 이 혁명이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와 한국 농원을 변화시킬 수 있는 그런 바람이 이 다니엘 빌리지에서 벌어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이것을 경험하게 되면 우리는 무엇을 고백할 수 있는가 하면 우리는 죄를 이길 수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것이 바로 창세기 삼장 십오 절의 약속입니다.
요한일서 오장 사절 말씀이에요.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예 무릎 하나님께서 난 자마다 창세기 삼장 십오 절을 이야기하는 거죠 그 복음으로 거듭나는 거예요.
그렇죠? 그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한다? 세상과의 싸움에서 이긴다고 하는 거예요.
그 이기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 승리는 무엇인가 하면 우리의 믿음이다 이 믿음이라고 하는 건 무엇이다? 생각해야 될 게 항상 자복과 굴복과 회계예요.
이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 거예요.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이 죄는 우리 삶 속에서 옛 하나님을 끌어내리고 내가 내 주인이 된 거예요.
그걸 내려고 자복하고 굴복하고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다시금 돌아가는 거예요.
그럴 때마다 하나님이 무엇을 주신다? 복음의 능력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이기게 만들어 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의 능력을 회복해야지만 당시 창세기를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진정으로 출애굽, 영적인 출애굽이 가능해지는 거예요.
그래야지만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면서 참되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 건설하고 확장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들이 이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는데 실패하면서 어떤 일이 벌어지죠? 광야를 지나지 못하는 거예요.
다 죽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또 하나 창세기 삼장 십오절을 보면 이 여자의 후손에 여자의 후손이 등장해서
이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한다고 하는 이 부분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근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이렇게 설명하고 끝마친 게 아니라 어떻게 하셨는가 하면 그 이후의 내용을 오늘 제가 할지 안할지를 지금 제가 고민하고 있는데요 가죽옷에 대한 이야기를 제가 원래는 이제 다 강의를 했는데 이것을 하게 되면 몇 가지를 빼야 돼서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모르고 있는데 실제 예수님께서 이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된다고 하는 이 이야기를 하고 난 후에 실제적으로 어떻게 하시는가 하면 이 이야기를 십자가 이야기를 딱 설명하고 맞힌 게 아니라 가죽 옷을 지어 입히면서 아담과 하와에게 그 죄의 대가로 치러지는 그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을 상징하는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을 통해서 그 무제한 양이 아담과 하와를 대신해서 참혹하게 죽는 모습을 하나하나 다 보여주는 거예요.
이게 원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 보면서 매
제사 때마다 느껴야 되는 것이었어요.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그 죄를 얼마나 우리가 미워해야 되는지, 얼마나 우리가 치열하게 사단의 어떤 그런 유혹에 맞서 싸워야 되고, 저항하고 싫어해야 되는지 그런 걸 다 보여주는 거예요.
그리고 그 아담과 하와를 위해서 그 무제한 자양이 참혹하게 죽고 난 후에 그 대신에 어떻게 하는가 하면, 그 희생되어진 그 양의 가죽들을 다 벗겨서
그것을 아담과 하와가 뒤집어쓰고 살아나는 사건이 바로 뭔가 하면 창세기 삼장 십오절에 담겨있는 이 어마어마한 복음의 이야기라고 하는 거예요.
이거를 쭉 설명했을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막 울면서 그걸 다 들었겠죠 이런 일이 이렇게 해서 벌어졌군요 제가 이런 행동들이 이것을 야기하게 만들었군요 하면서 엄청나게 회개하라는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자기 밑바닥 속에서부터 홀로 나오는 그 회개를 하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들은 그들을 그 죄에서 치료하기 위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에덴 동산에서 내보내시는 그 하나님을 보았을 거예요.
너희들의 죄를 치료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된다 고난이라고 하는 이 과정을 통해서 너희들의 죄를 치료하기 위해서 이런 모든 과정들이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을 쭉 설명하시고 내보내시는 거예요.
여러분, 오늘 우리는 뱀의 씨앗을 받았던지, 예수 그리스도의 씨앗을 받았든지 둘 중 하나의 씨앗을 분명히 받고 있어요.
중립은 없습니다. 분명히 둘 중에 하나의 씨앗을 오늘 받고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근데 이 창세기 삼장 십오 절에 이 선언을 가만히 살펴보면, 이 말씀은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인류가 두 무리로 나누어 질 것을 예언하고 있는 거예요.
정말 중요합니다. 한 무리는 여자의 후손이고 또 한 무리는 뱀의 후손으로 인류가 두 머리로 나누어질 것을 선언하고 예언하는 성경적이에요.
예 다시 말해서 창세기 3장 십오 절에 이 복음이 오늘 우리 속에 들려질 때 나중에는 셋째 천사의 기회를 통해서 온 세상에 들려지겠죠 이 영원한 복음이 그렇죠 이게 들려질 때 이 복음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서 인류는 두 무리로 나누어진다고 하는 선언입니다.
근데 창세기 사장의 그 선언의 결과처럼
두 인물에 대한 기사가 나오는데 한 사람은 가인이고 또 한 사람은 아벨이에요.
예 그리고 이 그다음에 이 두 사람이 신앙하는 모습에 따라서 그다음에 펼쳐지는 역사가 뭔가 하면 인류가 두 무리로 나누어지는 이야기가 창세기 사장 후반부부터 시작해서 오장까지 쭉 이어지다가 이 두 무리 중에 한 무리를 구원하는 이야기와 한 무리를 심판하는 이야기가 육장부터 구장까지 이어지는 뭘까요? 노아 홍수예요.
이렇게 끝나는 거예요. 이 이게 이 사이클이 그다음에 똑같이 또 돌아가는 거예요.
재림 때까지 이 똑같은 역사가 전개되어 쭉 전개되어지다가 재림 전에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오늘날 그래서 세상에 수많은 종교가 있고 수많은 종파가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무엇이다? 두 무리에요.
두 무리로 좋느냐 하는 한 무리는 복음을 받아들인 자 또 한 무리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독립 선언을 하고 살아가는 자에요.
그게 바로 창세기에서는 셋의 후손과 가인의 후손으로 나타나고 종말에 가면 어떻게 나타나죠? 종말에 가면 종말에 가면 계시록의 용어로 하면 여자의 남은자손과 바벨론이에요.
여자의 남은자손과 바벨론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한 무리는 하나님의 인을 받고 오늘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으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거예요.
그리고 그 반대의 사람들은 뭘 받는다? 짐승의 표를 받게 되는 거예요.
그 모습이 안식일을 지키는 자와 일요일을 예배하는 자로 드러나게 된다고 하는 근데 실제로 창세기 삼장 십오 절에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희생을 통해서 우리에게 베풀어준 그 하나님의 구원의 기쁜 소식에 대해서 오늘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고 살아가고 있는가에 두 무리 중에 한 무리가 되어진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오늘 그래서
여러분과 저의 마음속에 이 복음이 받아들여진 사람인지를 꼭 살펴야 돼요.
그리고 성경에서 그것을 확정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상황들이 오늘 우리 삶 속에 나타나고 있는가 오늘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가 오늘 우리 마음속에 내적인 투쟁이 일어나고 있는가 오늘 우리가 정말 회개하고 살아가고 있는가 이것은 오늘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점검해야 될 상황이라고 상황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 모두가 잊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창세기 사장에
가인과 아벨의 탄생 이야기가 나오고 그리고 삼절에 보면 세월이 지난 후에 이 두 아들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모습이 바로 뭔가 하면 젊은 시절 어린 시절 어떤 모습이 다 생겨나고 가장 중요한 모습만 딱 딱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어떤 장면이죠? 제사 지내는 장면, 예배를 드리는 장면이 딱 나옵니다.
근데 이들의 예배가 달랐어요.
이 두 가지 예배의 모습은 이들이 어떤 믿음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기사에요.
창세기 사장 이 절부터 사절 말씀을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이 구절은
여기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뭔가 하면 이 성경 구절 이 내용도 창세기 삼장 십오 절에 적용하는 거예요.
인류는 두 무리로 나누어진다. 여기에 등장하는 가이는 어떤 사람이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이에요.
제사를 지내고 교회에 참석하고 그리고 모든 일들을 다 해요.
우리가 신앙인으로 하는 모습은 다 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 마음 속에는 전적으로 주님 앞에 굴복하고 자복하는 게 아니라 내가 여전히 나의 인생의 주인이에요.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회계의 가장 중요한 과정인 자복과 굴복이 일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말씀이 계속 아담을 통해 들려지고 있는데도 그 사람은 그 말씀에 따라 반응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서 내가 하고 싶은 범위까지만 신앙적으로 헌신해 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정말 이 장면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은 가인도 예배를 떠난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그니까 겉으로는 예배에 참석하고 예배를 드리고 있어요.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이 두 사람은 다 매 안식일마다 성경책을 들고 교회를 향해 걸어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근데 오절 이후의 이야기는 예배 후에 벌어진 상황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예배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한 사람은
가인이 어떻게 하죠? 안색이 안색이 변해요.
예배 후에 예배를 드리는데 안색이 변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마음이 분노로 가득 차게 되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하면 예배의 실패를 의미하고 있는 거죠.
여러분 요즘 종말이라고 하는데 뉴스 기사에 보면 진짜 잔인하고 무서운 범죄의 기사를 보게 되는데 근데 놀라운 것은 그런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 포함되어져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렇죠? 근데 그 그리스도인들은 전부 다 어떤 사람인가 하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자기들이 교회를 다니고 항상 그런 일들을 하는 사람들이 오늘 이 본문을 보면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삶이 달라지거나 변화되기는 커녕 오히려
더 악해질 수 있다고도 하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창세기 사장에 가인의 이 제사들이는 모습이라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 두 사람의 차이가 뭐죠? 차이가 뭔가 하면 재물에도 차이가 있고 또 하나는 또 반복해서 얘기하지만 이 사람들이 예배 드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담겨진 씨앗에 차이가 있다고 하는 거예요.
한 사람은 복음의 씨앗을 담고 있고,
또 한 사람은 사단의 씨앗을 담고 있는 거예요.
창세기 3장 십오 절에 여자의 후손 뱀의 후손할 때 그 후손이라고 하는 단어가 히브리어로는 뭔가 하면 이 제라라고 하는 단어를 쓰는 전부 다 씨앗을 의미하는 단어예요.
이 씨앗이라고 하는 건 뭐예요? 그 속에 담겨지면 자라나는 거예요 자라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단의 씨앗이나 또는 하나님의 씨앗이 우리 속에 담겨지면 재림의 때 어떻게 될까요? 이게 쭉쭉 자라나죠 알곡과 가라지가 쭉 자라나는 것이 자라나서 어떻게 될까요? 열매를 맺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우리의 마음에는 또 다시 이야기하지만 복음의 씨앗이나 뱀의 씨앗 둘 중에 하나가 어떻게 돼 있다? 숨겨져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후에 이 두 사람이 수많은 예배가 드려지는 같은 자리에 있었지만 후에 결과는 전혀 달랐다고 하는 거예요.
한 사람은 의를 위해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고 한 사람은 예배 후에 분노로 가득 차서 동생을 살해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한 사람은 날마다 날마다 변화를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었고 또 한 사람은 날마다 날마다 더 악해져 가고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의 씨앗도 자라나지만 뱀의 후손의 씨앗도 어떻게 된다? 자라난다고 하는 거예요.
이걸 기억해야 돼요. 그래서 나중에 종말에 그 자라나고 나타난 열매 맺는 날이 어떤 날이다? 여호와의 날, 재림의 날이라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교회를 다니지만 심지어 예배를 드리지만 오늘 내 안에 복음이 담겨져 있지 않다면 우리는 어떤 길을 걸어간다?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가인의 길을 걸어간다고 하는 걸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예 다시 말해 점점 더 잔인해져 가고 점점 더 악해져 갈 수 있다고 하는 거예요.
나는 원하지 않지만 자꾸 자꾸 왜 내가 이렇게 되어 가고 있지? 그거를 여러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거는 바로 바로 뭔가 하면 우리 안에 복음이 자리 잡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다시금 회개하고 돌아가야 돼요. 다시금 주님을 찾아야 되는 거예요.
예 여러분 그래서 우리가 예배드리는 그 자리에 피동적으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하면 그 말씀 앞에 말씀이 제시될 때마다 어떻게 해야 된다? 자아를 굴복하고 만약에 말씀대로 살지 못했다면 회개하는 가운데 그 복음의 씨앗이고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줄 수 있는 그리스도를 다시 그 마음에 모셔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변화된 마음을 받아야 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야 우리가 주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 아벨처럼 사도행전에 나오는 찬 그리스도인들처럼 생명을 바치는 헌신을 드릴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근데 창세기 사장 오장 창세기 사장 오 절에 보면 이 가인이 드리는 제사에는 하나 하나님이 가압하셨다는 증거가 없었어요.
그래서 가인이 분노하면 안색이 변합니다.
이게 이제 실제적으로 표현하면 굉장히 분노하면서 하나님의 처사에 대해서 견딜 수 없다고 하는 이야기를 막 하는 거예요.
그러자 육절에 하나님과 가인이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지막 성경절이에요.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내가 분하여 하면 어찌 되이냐 안색이 변하면 어찌 되이냐하고 묻습니다.
다시 말해 이 말은 뭐예요? 너가 지금 내게 이렇게 그 한다고 해서 이렇게 내가 이렇게 내게 한다고 해서 니가 분노할 이유가 없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계속 하나님은 지금 이 잘못하고 있는 가위가 어떻게 하고 있어요? 대화를 하고 있어요.
이건 오늘날로 적용하면 끝없이 끝없이
어떤 말씀을 통해서 어떤 누군가의 설교를 통해서 계속 계속 우리와 대화하는 거예요.
복음을 받아들이라고 모든 매체를 동원해서 하나님께서 비록 가인의 제사를 거절하면서 그 가인의 재물을 가압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가인 자체를 영원히 버린 건 아니라고 하는 걸 보여주고 있어요.
그래서 칠절에 보면 이제 아주 중요한 성경철이 등장하는데 이 말씀은 가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려야 될 가장 중요한 성경철 중에 하나에요.
칠절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예 하나님은 가인에게 너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는 일이 있겠느냐라고 물으시고 있는데 이 낯을 들다고 하는 의미는요 성경에서 무죄하다고 하는 히브리서 표현이라고 합니다.
무죄하면 얼굴을 드는 거예요. 이렇게 하나님은 지금 만일 가인이 자신의 길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교훈을 따라 살 것 같으면 하나님이 불쾌함을 나타낼 이유가 더 이상 없을 것이며
너가 실망하고 분노한 얼굴을 보일 이유가 없다고 지금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이 뭐예요? 가이나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가이는 알고 있어요. 다 알고 있어요.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거 다 알고 있어요.
복음의 이론도 알까요? 알고 있어요.
아담을 통해 수도 없이 들었을 테니까 이게 부조화 선자에 보면 그런 내용이 쭉 나오잖아요.
아담이 계속 가르치는 거예요. 사람들한테 복음이 뭔지 내가 들은 게 뭔지
실제로 옆에서 이 복음을 통해 변화되어지고 있는 아벨의 모습도 보고 있었을 거예요.
그 복음이 들어갈 때 계속 계속 더 선해지고 내가 아무리 막 그 학대하고 막 이렇게 함부로 해도 끝까지 선을 잃지 않는 그런 아벨의 모습을 봤을 거예요.
그래서 그런데 이 사람이 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거예요.
왜냐 그러면 자기가 행하고 있는 그 일을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이 마지막 최후의 경고를 해요.
이게 최후의 경고에요. 셋째 천사의 기별이라고 할 수 있겠죠.
예 만일 가인이 끝까지 계속 악의 길을 고집한다면 본문에 보면 죄가 문에 엎드리냐 엎드리느냐라고 하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이 어떤 의미인가 하면 이건 문학적 표현이에요.
마치 죄가
먹이를 노리고 있는 먹이를 노리고 문 앞에 딱 엎드려 웅크리고 있는 야수처럼 그렇게 죄를 묘사하고 있는 거예요.
그니까 다시 말하면 죄가 야수처럼 지금 너를 지배하기 위해서 너를 집어삼키기 위해서 이제는 완전히 정복하기 위해서 이 말은 뭔가 하면 양심이 완전히 화인 맞아 가는 거죠.
더 이상 하나님이 어떻게 알 수 없는 그런 상황이 되기 직전까지 지금 왔다고 하는 거예요.
너가 에 그렇게 지금 죄를 묘사하고 있어요.
거의 너가 지금 죄가 너를 정복하기 직전까지 가고 있다고
근데 이런 표현이 신약 성경에도 등장하죠.
베드로전서 오장 팔 절에 보면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뭐 같이 울은 사자같이 들어 다니며 삼길차를 찾고 있다고 하는 말씀처럼 사단은 마치 맹수처럼 우리를 삼키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고 하는 거예요.
어떻게 노리고 있는가? 우리가 계속 선을 행하지 않고 악을 고집하다가 마침내 하나님과 분리되어져서 하나님이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지점까지 나아가는 때를 어떻게 하고 있다? 노리고 있다고 하는 거예요.
예
그래서 하나님이 가인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죄의 소원은 내게 있으나 어떻게 하라 너는 어떻게 알아 죄를 어떻게 알아? 다스리라고 하는 이 말이 무슨 말일까요? 죄의 욕망이 우리에게 있어서 그 욕망이 계속 너를 이끌고 가려고 하고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죄가 너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알아?
너가 죄를 다스리고 지배하라고 하는 거예요.
이 말이 무슨 말일까요? 여러분 가인이 어떻게 죄를 지배하고 죄를 다스릴 수 있나요? 절대 없어요.
이걸 창세기 3장 십오절과 연결시키지 않으면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로 이렇게 적용할 수 있어요.
어떻게 이 분노와 이 증오심에 끌려가고 있는 이 연약한 가인이 어떻게 이 죄약적 감정에 지배되지 않고 어떻게 이것을 지배할 수 있나요?
이 말은 창세기 3장 15절의 복음을 아직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가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지막 경고이자 하나님의 마지막 호소라고 생각하면 돼요.
이 말은 가인아 이대로 가면 너는 정말 위험한 일을 저지를 수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이제 마지막 경계선을 넘어가려고 하는 가인을 붙드시며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호소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지금 가인을 붙드시고 이런 말씀을 하고 있는 거예요.
복음을 믿으라고 왜 이걸 믿지 못하고 있냐고
너의 마음을 평안하고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다고 제발 이 약속을 믿고 이 은혜와 은총을 받아들이라고 하는 거예.
이 선물을 받아들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 능력으로 살아가라고 하는 거예요.
복음으로 너의 죄악적 마음을 다스리고 그 죄를 지배하는 능력을 경험하라고 하는 거예요.
저는 이 가인을 예수하시는 이 하나님의 모습을 보면서 유다를 향한 마지막으로 유다를 붙드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제가 보았어요.
끝까지 주님 곁에 있지만
복음의 참 능력을 온전히 경험하지 못하고 주님의 주변만 서성이다가 마침내 사단이 그의 마음속에 들어가서 그를 지배하려고 할 때, 주님이 마지막으로 유다의 발을 시키시면서 그가 이제 주님이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달려나가려고 할 때 어떻게 하셨죠? 그의 발을 막 붙드시고 그게 사랑으로 막 예수하시는 장면이 있잖아요.
똑같은 모습이에요. 같은 하나님이 이 가인과 유다를 그렇게 붙들고 있는 거예요.
근데 팔 절에 보면 끝내 가인은 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팔 절에 보면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했다고 하는데, 가인이 아벨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잘 모르지만 아마 하나님이 자기를 그렇게 취급하는 것은 불리하다고 비난을 하면서 하나님을 막 비난했을 거예요.
이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를 떠나겠다고 할 거예요.
근데 아벨은 끝까지 가인을 설득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분이고, 그리고 복음은 진실하고 형 나는 그 복음으로 이렇게 변화되고 있다고 형도 이 복음을 받아들이라고 아마 마지막으로 호소했을 거예요.
끝까지 온유하게, 그러나 두려움 없이 복음을 확신시키려고 계속 했을 거예요.
그러자 형이 한 번만 더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겠죠 그러나 아벨은 형에게 진심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요청하다가 그러다가 어떻게 됐습니까? 팔 절에 보면 가인이 아벨을 쳐 죽였다고 하는
순교했다고 하는 거죠. 여러분 이거는 창세기 삼장 십오절의 예언이 예언대로 이루어진 장면이에요.
하나님의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에 무엇이 있다? 적개심이 있다 한 길을 갈 수 하나가 될 수 없는 거 우리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교회는 절대 하나가 될 수 없어요.
여러분 오늘 우리가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을 소유하지 못하면 우리는 언젠가 이렇게 선하고 착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무고하고 비난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복음의 원수가 될 수 있다고 아주 아주 강력하게 경고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게 이 창세기 3장 15절의 말씀이고
창세기 사장의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장면은 수도 없이 성경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 의로운 다윗을 그 사울이 같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잖아요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야 할 그 두 백성이 그 그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가 하면 이 사울은 죽을 때까지 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다윗을 죽을 때까지 있는 힘을 다해서 자기의 모든 능력을 다 발휘해서 오직 다윗 하나를 죽이려고 하는데 그의 생을 다 바쳤다고 하는 거예요.
누가? 하나님 나라의 왕이
여러분 오늘 우리가 교회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안전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곳에 온 것으로만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주시는 그 구원의 선물을 받으시고 여러분의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맡기는 자복과 굴복이 반드시 이곳에서 일어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그리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그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그러한 놀라운 회복이 여러분의 삶 속에 반드시 벌어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여러분 그 일을 위해서 오늘 또다시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자복하고 굴복하고 오늘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한 모든 것을 진심으로 회개함으로 말미암아 창세기 삼장 십오절의 그 말씀처럼 하나님의 이 복음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은혜가 제한 없이 여러분의 삶 속에 흘러넘치는 이 특별한 기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말씀을 드리도록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하늘 아버지 오늘 창세기 삼장 십오절의 말씀을 통해서 저와 우리 모두에게 예수 하시듯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가 들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정말 겸손하게 하나님 말씀을 받게 하시고,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우리의 자아와 또 우리의 불안정한 감정을 따라 우리가 흔들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 이 특별한 기회에 우리 모두를 이 한적한 곳으로 불러주셨싸움에 주께서 바라시고 원하시는 그 뜻이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펼쳐지게 하여 주시고, 오늘 이곳에서 벌어지는 이 일들이 여기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정과 교회에서도 확산되어 질 수 있는
복음의 능력을 다시금 회복하여 주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이 마지막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우리가 변화되어질 수 있도록 주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잠시 기도하는 자리에 주님 우리의 마음 속에 그 기도에 기도를 성령으로 이끌어 주셔서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하나님께 구해야 되고 어떤 기도를 드려야 될지 가르쳐주시고 인도하여 주셔서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는 기도의 시간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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