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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믿기만 하면 의롭게 될까 - 로마서 3:21-31 - 로마서 강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3장 21절부터 31절까지의 말씀입니다.
“[21]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한 것입니다. [22] 그런데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오는 것인데, 모든 믿는 사람에게 미칩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이 없습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못 미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24]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는 선고를 받습니다. [25]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속죄제물로 내주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피를 믿을 때에 유효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지은 죄를 너그럽게 보아주심으로써 자기의 의를 나타내시려는 것이었습니다. [26]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다가 지금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신 것은,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라는 것과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의롭다고 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27] 그렇다면 사람이 자랑할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무슨 법으로 의롭게 됩니까? 행위의 법으로 됩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법으로 됩니다. [28] 사람이 율법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29] 하나님은 유대 사람만의 하나님이십니까? 이방 사람의 하나님도 되시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방 사람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30] 참으로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받은 사람도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시고,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도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십니다. [31] 그러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율법을 폐합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웁니다.”(롬 3:21-31)새번역
저는 어릴 때부터 들은 말이 행복은 성적순이다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실제로 고등학교 다닐 때 3년 동안 열심히 고생하면 30년 동안 편안하다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진짜인 줄 알았습니다.
막상 정말 살아보니까 다 거짓말이었습니다.
열심히 3년 동안 공부한 애나 3년 동안 열심히 논 애나 다 힘들기는 마찬가지.
삶을 사는 것을 보면서 행복은 정말 성적순 아니다 하는 것 깨달았습니다.
저는 사람이 착한 사람부터 악한 사람까지 이렇게 쭉 구분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정말 천국에 갈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렇게 선한 사람이 있고,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악한 사람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있는 줄 알았습니다.
좋은 나라 나쁜 나라 있는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 믿고 난 다음에 그 생각이 다 무너졌습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 아닌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고상하고 아주 수준 높은 교양 있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더 나쁜 죄인일 수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이 믿고서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저는 그전에는 공부 많이 하고 고상하고 경건하고 교양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수준이 높은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이 세리보다도 더 죄인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윤리적인 죄보다 더 큰 죄가 영적인 죄, 교만의 죄라는 겁니다.
그래서 고상하고 교양 있는 사람이 아주 세상에 파렴치한 사람들보다도 더 죄인일 수 있는 겁니다.
그게 교만죄 때문입니다.
지난 주간에 헌법재판소에서 우리나라에는 더 이상 간통죄라는 게 없다는 판정을 내렸습니다.
마음이 참 안타까웠습니다. 물론 간통죄라는 죄가 있기 때문에 사람이 간음을 하지 않는 일은 아닙니다.
사람을 간음하지 않게 하는 효과가 없어요.
그렇지만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간음한 것이 죄다 그걸 이해하는 게, 그걸 정하는 게 그렇게 힘든 문제일까? 이제는 더 이상 그게 죄가 아니라고 해버리면 그러면 그 뒤에 더 엄청난 일이 벌어지는 것을 어떻게 하려나 하는 걱정이 되더라고요.
근데 어떤 분이 거기에 이런 글을 쓰셨어요.
예수님께서도 간음이 죄가 아니라고 이야기하셨다는 것 이건 정말 정말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혀 온 그 여인에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해서 그 여자를 풀어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간음해도 죄가 아니라고 말씀한 게 아닙니다.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핵심은 다른 사람의 죄를 향하여 도를 드는 정지하는 죄가 실제로 간음한 죄보다 더 큰 죄들, 영적으로 교만한 죄,
실제로 간음한 여자보다 더 큰 죄라는 사실을 예수님이 지적하시려고 하신 것이지 간음 자체가 죄가 아니라고 말씀한 게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흔히 어떤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은 범죄 형인 것 같아 이런 말 정말 하면 안 됩니다.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죄라는 것입니다.
다 같은 죄인이 다른 사람을 죄인 형이다. 저 사람은 얼굴이 범죄형 같아 이렇게 말하는 것이 무서운 일입니다.
여러분 곱상한 범죄형이 더 무서운 거 아십니까?
차라리 범죄형인 사람은 경계라도 하지요.
여러분 우리가 이미 로마서 1장 2장을 읽어가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서는 의로워질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다 들었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서 다 죄인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하나님의 율법을 좀 더 잘 지키고 못 지키고의 차이는 있습니다만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다 죄인입니다.
이것을 팀 켈러 목사님은 비유로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만약에 헤엄을 쳐서 태평양을 건너가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세 부류의 사람이 있을 수 있겠죠 수영도 못하는 사람, 수영을 좋아하고 꽤 잘하는 사람, 수영 국가대표 선수 이 세 사람이 수영을 해서 태평양을 건너갑니다.
수영 못하는 사람은 물속에 들어가면 죽지요.
수영을 꽤 잘하는 사람은 한참을 수영하다가 빠져 죽겠지.
수영 국가대표 선수는 한 4kg 정도 가다가 지치고 한 6kg 정도 가다가 탈진하고 8kg 정도 가다가 빠져 죽겠지.
결국은 결과는 똑같습니다.
수영을 해서 태평양을 건너가겠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 수용을 잘하든 못하든 아무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고 무모한 일이라는 것은 한 사람도 그렇게 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율법을 가진 사람이든 율법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든 우리 모두는 그런 점에서 하나님 앞에서
다 똑같은 죄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지키지 않고도 의롭다고 인정받는 놀라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십자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으면 그러면 그 모든 죄가 사함을 받고 의로워지는 놀라운 구원을 하나님이 열어주셨습니다.
그 말씀이 21절, 22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오는 것인데 모든 믿는 사람에게 미칩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이
여러분 믿음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의롭다 하고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고 되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이 쉬운 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은혜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길이니까 그것을 은혜를 받았다고 말을 하옵니다.
23절 말씀에 23절, 24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이 미치는 처지에 못 미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는 선고를 받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의로워지는 이런 놀라운 구원의 축복은 이미
구약에 약속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21절 말씀에 그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한 것입니다.
이건 구약의 제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 제사는 하나님이 죄를 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깨끗함을 받을 수 있는지를 하나님께서 제사를 통하여 그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속죄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옵니다.
그리고 그 속죄 재물에 머리에 손을 얹습니다.
그러면 이 죄인과 속죄 재물이 하나가 되도록 동일하게 하나님이 받아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죄인을 대신해서 속죄의 제물이 거기서 목에 칼이 찔려서 피를 쏟아 죽습니다.
그러면 이 죄인이 죽은 것이라고 하나님이 인정해 주십니다.
그 피 흘리는 것을 보고 이 죄인은 그것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죽었다고 인정하시는구나.
나도 저 죄물이 피 흘린 것처럼 죽은 것이구나.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다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기회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이죠.
이것이 구약의 속죄 제사입니다. 그런데 이 구약의 속죄 제사는 모형입니다.
어떤 원형이 있는데 그 원형을 그냥 모형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원형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속죄 재물이 되셨다고 그랬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속죄 제물이 되셨다고 그랬습니다.
25절 말씀에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속죄 제물로 내주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피를 믿을 때에 유효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속죄 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죄인인데 예수님은 속죄 제물이시고 그런데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그러면 내가 죽은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나는 죽었다고 고백을 합니다.
많은 분들이 그 점에 대해서 아직 선뜻 담대한 고백을 못 하고 있습니다.
나는 죽었다고
여러분 여러분이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는 예수님이 죽으셨는지 안 죽으셨는지를 보시면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그렇지 분명히 죽으셨지.
그러면 나도 죽은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죄인과 속죄 제물을 하나로 보신다고 하셨기 때문입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담대하게 나는 죽었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셨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그의 피를 믿을 때에 유효합니다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나는 그것을 믿습니다. 그러면 내가 죽은 것이라고 하나님이 받아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가 깨끗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의롭다고 하나님이 이제 인정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놀라우신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다 허락된 것입니다.
율법을 가진 사람이든 율법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든 동일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그러면 그는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30절 말씀에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받은 사람도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하시고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도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주시는 이유는
자랑하지 않게 하려고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27절에 그렇다면 사람이 자랑할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여러분 율법 생활과 은혜 생활의 차이에 대표적인 것이 자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교회 생활 열심히 하고 신앙생활 열심히 하는 것 같아도 마음에 은근히 자랑하고
내가 열심히 신앙생활했다고 드러내고 내가 직분이 높다고 자랑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무시하고 하면 그 사람은 실제로는 율법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랑할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니까. 그래서 은혜 생활하는 사람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사람들 중에도 자랑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이 참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다.
믿음을 자랑하는 거예요. 이제는 믿음을 여러분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을까 봐 걱정이 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다음부터는 믿음을 자랑하는 겁니다.
나는 믿었어
나는 믿어서 구원받았다고 너는 믿었니? 너는 어떻게 그렇게 믿음이 없니? 이제는 믿음을 가지고 서로 판단하고 자랑하고 믿음을 내세우는 이런 기가 막힌 이들이 있습니다.
이 극단이 구원파 이단입니다. 그들은 구원을 믿음으로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틀린 말이 아닌 것 같죠?
믿음은 예수님과 구분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율법으로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새로운 은혜의 구원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냥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믿음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믿음이 따로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마치 나를 구원해 주는 것처럼 이렇게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 믿음을 강조하는 이단이 생기게 된 거죠.
여러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항상 바라보는 것이고 예수님을 항상 주님으로 왕으로 그렇게 섬기는 것이고 예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고
항상 예수님과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게 믿음입니다.
그걸 믿음이라고 하는 것 그러므로 이 믿음은 자랑할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믿음에 대한 큰 오해 중에 또 하나가 있는 것이 믿는 사람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오해가 있습니다.
믿기만 하면 된다고 그랬으니까 이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니냐 이건 믿음을 완전히 오해하는 것입니다.
31절 말씀에 사도바울이 안타깝게 반문합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율법을 패합니까?
이제는 믿기만 하면 되니까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 지키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닙니까? 이런 질문입니다.
사도바울이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웁니다. 여러분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의롭다 함을 받는다 그랬는데 어떻게 믿음이 율법을 다시 굳게 세웁니까? 우리가 믿음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믿음 그 자체로만 따로 있다고 생각하니까 이런 문제가 생기게 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게 하려고 설득한다고 한번 생각해 봅시다.
당신이 거짓말 한 적 있습니까? 저 여러 번 했던 적 있지 그러면 그건 죄지요.
그러니 당신이 죄인이지 않습니까? 그러네요.
듣고 보니까 내가 죄인이 맞네요.
이 사람이 죄인인 것을 인정했습니다.
자기가. 그러면 그것을 죄인이라고 믿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죄인이라고 들어서 인정을 한 거지 아직까지 믿는다고 말할 수 없어요.
예수를 믿을 때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이런 믿음이 아닙니다.
왜 그런가 하면 애통함이 없기 때문에 나도 거짓말 좀 해봤어요.
나도 부모님 말씀 어긴 적 많습니다.
사람 다 그렇지 뭐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는 것 같은데 애통함이 없습니다.
이 사람은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머리로 그냥 인정한 거지 실제로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자기가 깨닫고 믿은 게 아니에요.
우리가 어떤 사람을 전도할 때 그때 그 사람에게 믿음을 설득하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당신이 지금 죽으면 지옥에 갑니다. 죄인이니까.
그러나 지금 당신이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고 당신이 예수님을 입으로 주님이라고 시인하면
지금 당신은 모든 죄가 사함을 받고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에 가게 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 그렇습니까? 그렇게 구원받을 수 있는 겁니까? 그러면 제가 예수님을 믿겠습니다.
천국에 가야지요. 할렐루야 당신이 이제 예수님을 영접했군요.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됐습니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여러분 전도할 때 흔히 이런 분위기를 다 경험하셨을 겁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이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것일까요? 아직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분명히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그랬습니다.
믿는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들어서 내가 인정을 한 거지
믿었다고 말하기가 아직은 어렵습니다.
왜? 믿음은 삶을 완전히 바꾸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삶이 완전히 바꾸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믿었다고 하는 내용은 그는 아는 거지 실제로 믿은 게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에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그런 성경 구절들을 잘 압니다.
근데 그 내용을 정확히 아셔야 됩니다.
로마서 10장 9절에 유명한 복음이 나옵니다.
내가 만일 내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여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내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분명히 입으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그랬습니다.
얼마나 간단한 일입니까? 아니 이렇게 되면 예수 안 믿을 사람 구원 못 받을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말씀은 그때 당시에 시대 배경을 알아야 됩니다.
이 말씀을 할 당시 때 시대 배경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할지 로마 황제를 주님이라고 할지에 따라서 살고 죽는 게 갈라지는 때입니다.
만약에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가 주님이라고 입으로 시인하면 그러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사자굴에 던짐을 받습니다.
각오가 되신다
정말 죽을 각오가 되었냐는 겁니다. 실제로 그래서 순교자가 엄청나게 낫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내가 마음으로 믿으면 내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목숨을 내놔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믿는다는 이야기는 목숨을 거는 겁니다.
목숨을 이걸 믿는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예수님과 온전히 연합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온전히 연합하게 만들어주는 게 믿음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복음이죠.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믿는 자마다라고 그랬어. 그런데 여러분 이 믿는 자마다라고 하는 이 말씀은 헬라어 성경 원어에 보면 그냥 빌리브가 아니고 빌리브 인이라고 전치사가 하나 붙어 있습니다.
그냥 믿는 게 아닙니다. 내가 믿는 대상인 예수님에게 내 삶 전체를 맡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내 인생의 왕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과 온전히 연합하고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만 의지하고 예수님에게만 순종하는 것을 빌리브 인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는 사람마다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소위 중생하는 겁니다.
이제는 내가 예수님과 온전히 연합해서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겁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사람은 의롭게 살게 됩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냥 빌리브 하는 게 아닙니다.
페이스북에 어느 교우가 안타까운 글을 지난 명절 때 올리셨어요.
이번 명절에 구순이 되신 시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사위를 용서하게 되기를 그렇게 기도하셨답니다.
그런데 그 시어머님이 사위를 용서하고 받아들이지 못하신다는 겁니다.
사위는 10년 전에 딸에게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돌아온 그 사위를 그 시어머니가 도무지 용서를 못 하시는 거예요.
시어머님은 집안에서 정말 신앙 좋은 분, 기도 많이 하는 분, 감사로 사시는 분으로 알고 있는데 누굴 용서하지 않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가시면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사람이 될까 두렵습니다.
어머님 가슴에 손을 얹고 어머님 여기에 예수님 계신가요라고 물었더니 계신다고 믿는다라고 대답하셨어요.
깜짝 놀랐습니다. 내 마음이 계시다 하고 분명히 대답하지 못하시고 계시다고 믿는다 애매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원은요
어머님이 받으신 그 구원, 그 용서는 사위를 용서할 만큼 크지 않나요? 그 잘못을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하찮은 거예요.
했더니 구원은 예전에 받았잖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걸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원은 이미 받았잖아요
여러분이 정말 구원받을 믿음을 가졌는지 안 가졌는지는 여러분이 알고 있는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여러분이 그것 때문에 의롭게 살며 사랑하며 사는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빌리브 인 하지 않고 그냥 빌리브 하는 것의 차이점에 대해서 야고보 사도가 지적했습니다.
야고보 2장 17절에 보면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행함이 없는 믿음, 죽은 믿음이 있다는 거예요.
이 믿음이 어떤 믿음이냐면 그냥 빌리브하는 믿음입니다.
지식으로만 알고 있는 믿음이에요. 이런 믿음은 귀신도 믿는 믿음입니다.
야고보서 2장 19절에 내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여기서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 믿느냐라고 하는 이 구절에는 인이 없어 빌리브 인이라고 쓰지 않았습니다.
그냥 빌리브라고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 믿느냐? 귀신도 그걸 믿어요.
귀신도 그걸 믿고 뗍니다.
근데 그 믿음이 구원받을 믿음이겠습니까? 아니 믿음이 구원을 준다고요? 그러면 귀신도 다 구원받게요.
귀신이 가지고 있는 이런 믿음 그냥 알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떠는 거 믿으니까 그런 거죠.
그러나 이 믿음은 절대로 그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제일 먼저 알아본 사람은 침례요한입니다.
두 번째 알아본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거라사 광인 귀신 들려 미친 사람이었어요.
마가복음 5장 6절, 7절에 보면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데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이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믿음입니까? 아무도 그때 당시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줄 모르는 그때 그는 알아보았어요.
귀신이니까.
근데 그가 구원받았습니까? 이런 믿음 가지고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믿음은 순종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로 묶어주는 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믿음은 우리를 예수님과 하나로 묶어주는 끈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고 항상 예수님을 의지하게 하고 항상 예수님께 순종하게 하는 것이 믿음이니까요.
그래서 믿음과 순종은 항상 같이 갑니다.
로마서 1장 5절에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님
믿으면 순종하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안 믿으니까 그런 걸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렇다고 그랬습니다.
요한복음 3장 36절에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과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은 성경은 같은 내용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빌리브 인하는 것은 여러분 우리에게는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고 함을 받는 길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롭다 하는 새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겁니다.
예수님
여러분이 이제 진짜 은혜 생활에 들어가셔야 됩니다.
어제 영성일기 증인 모임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어느 집사님이 간증을 하셨는데 교우들에게 꼭 소개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올해 1월 2일 목사님께서 이제 순종만 하며 살라고 하는 제목으로 신년 집회 말씀을 전하실 때
영성일기를 순종 일기가 되게 해보자 주님을 생각하고 바라보는 데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무엇을 순종했나 기록만이라도 한번 해보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다음 날부터 몇 월 며칠 순종 일기라는 제목을 붙여서 순종 일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그로 인하여 주님은 자녀 양육에 있어서 제게 변화를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3년 전 일기를 예를 드셨어요.
2012년 6월 9일 더 많이 주님께 여쭤봐야 할 텐데 아직도 내가 알아서 혼자 처리해 버리는 일이 너무 많다.
오늘 큰 아이를 훈계하는 일에 있어서도 그랬다.
참 유창한 말로 그럴 듯하게 아이의 잘못을 지적했고 아이에게 잘못된 행동을 수정하겠노라 다짐도 받아내었다.
그러나
마음은 개운치 않다. 하나님의 온전한 그 사랑으로 아이를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주님 근데 이 집사님이 올해 2월 5일 일기는 이렇게 썼습니다.
큰 아이로 인해 마음이 잠시 요동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잘못을 알고 있는 아이를 더 이상 야단치지 말라는 마음을 주셔서 그렇게 되기를 원했더니 순종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순종한 후 돌아보니 정말 잘했다 싶습니다.
계속 멈추지 못하고 똑같은 소리를 또 하고 또 하며 아이를 혼냈다면 엄마하고의 관계에서조차 사랑과 은혜를 경험치 못한 아이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죄를 도말하시고 더 이상 기억지 않으시는 그분의 은혜를 과연 믿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오, 주님 감사합니다. 이렇듯 주님은 부족한 엄마인 저를, 주의 사랑과 은혜를 자녀에게 흘려보내는 통로로 온전히 사용하시려고 저를 변화시켜가고 계십니다.
또 주님은 시댁 부모님과의 관계에서도 변화를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3년 전 일기를 예를 드셨어요.
2012년 7월 17일 매일 아침 남편 편에 어머님 드실 과일 챙겨서 보내고 퇴근하며 아이들 데리고 병원 가서 어머니께 인사 먼저 드리고 집에 오는데, 어머니께서는 편찮으셔서 그런지 고맙다, 애쓴다 소리 한마디 없으시니 참 서운해요.
재활치료를 위해서 모신 지금의 병원도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지 불편하다 소리만 하시니 어찌 모셔드리고 어찌 그 마음을 헤아려 드려야 할지 주님 힘들어요 주님 자신 없어요.
그런데 올해 1월 25일 일기입니다.
양평시댁에 늦은 시간에 도착했습니다.
저녁을 해드리러 간 건데 5시 30분이 넘어서야 도착하니 이미 시부모님들께서는 저녁을 다 드셨다고 하십니다.
몸이 불편하신 부모님 찾아뵙고 밥 한 끼 해서 같이 먹으려고 오는 일인데, 죄송한 마음으로 어머님을 봬서 그런지 서운한 마음에 언짢으신 듯 보이셔서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기 전 언제나처럼 어머님을 위해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주님 어머님 손을 붙잡고 기도하는데 눈물이 주르르 흐릅니다.
기도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어머님이 좋아하시는 드라마가 시작된 듯 싶어 기도를 급히 마무리하려는데 어머님께서 tv 볼륨을 줄이실 줄이야.
주님
주님이십니다. 가끔 아직도 저는 문득문득 어머님께 나아가기가 어려울 때가 있어서 나도 모르게 피하고 싶어 도망갈 때도 있지만 주님 바라보고 나아가면 늘 한결같이 주 안에서 영으로 교통케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주님이셨습니다. 이 모든 변화의 주인공은
여러분 믿음은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정말 마음에 왕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전적으로 믿고 걱정과 근심을 주님께 다 맡겨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주님께 순종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롭다고 인정받는 길
주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이 그 십자가의 피로 증거를 삼으시고 우리가 깨끗하다 내 자녀다 너는 나의 축복의 사람이야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의롭게 살게 하시고
그리고 사랑하며 살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들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복음 안에서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으시는 그런 은혜의 삶을 사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