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미래의 생각과 감정이라는 심리적 시간으로 '나는'이라는 상상의 이야기를 만들 때는 저장된 기억을 재생하는 것에 기초한다. 그리고 상황이 종결된 후 그 내용을 다시 장기기억 속으로 되돌릴 때는 항상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 당시 자신의 상황과 처지 그리고 환경등에 기초하여 그 내용을 왜곡, 축소, 확대 등 다양한 기제를 사용하여 변질시킨다. 그리고 자기 방식대로 상상한 그 내용(부정적, 긍정적 합리화시킨 내용)을 저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에 어떤 자극이 왔을 때는 이미 변질된 내용을 기억 속에서 다시 끄집어낸다. 그것으로 '나는'이라는 상상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심리적 상상으로 만들어진 거짓자아이다.
우리의 삶을 다시 생각해보라. 우리는 과거의 어떤 문제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하고 되씹고 해석하고 판단하고 후회한다. '내가 왜 이러지? 이러면 안 되는데' 라고 하지만 늘 그렇게 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더 주의 깊게 생각해보라. 사실은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르면서 '이러면 안 되는데'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그 모든 생각들이 언제 일어나는 것인가?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다. 그런데 우리는 그 내용물에 사로잡혀서 그것이 언제 일어나는 일인지를 잊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이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일어나고 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인식하는 자는 누구인가? 그게 바로 인식하는 주체인 의식, 즉 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거짓자아의 모순
혼이 어떤 대상에 대한 생각을 자신과 동일시함으로써 내 생각이 되고, 그 결과로 거짓자아가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대상에 대한 지식의 생각에 자아의식의 옷을 입힘으로써 (동일시함으로써) 그 대상으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다른 말로 그 대상에 나의 자아의식을 부여함으로써, 그 대상이 나의 정체성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결국 핵심은 그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혼이 생각을 통해 그 대상과 동일시하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강박심리이다. 왜냐하면 몸을 가진 존재는 "나는" , "내가"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유지해야 살아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타락 후 유사 이래로 마귀의 영향을 받은 인간이 끊임없이 해온 일이다(반대로 마귀가 끊임없이 우리를 속여 온 일이기도 하다). 거짓자아는 혼이 어떤 대상의 가치에 기초한 동일시가 아니라 그 대상이 들어가 있는 '나' , '나를' , '나의 것'이라는 생각에 집착하는 것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혼이 대상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자신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본래는 혼이 하나님의 영에 속하여 그 영(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내어야 하는데, 거짓자아는 자신의 생각( 뇌와 심중에 기록된 지식와 정보)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모든 것의 출발을 우리 신체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온 정보에 기초하기 때문에, 좀 더 넓게 생각하면 내 몸에 기초하여, "내가" 또는 "나는" 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거짓자아가 몸을 기초하여 자신과 세상을 분리시키고 있는 것이다. 즉 나는 몸 안에 있고 나머지 모든 것은 몸 밖에 있다는 사고방식을 가진다. 그 결과로 모든 행위와 경험의 주체를 '나'로 여기게 된다. 즉, 자기중심적 사고를 가지게 되고, 내가 삶을 경험한다는 식으로 믿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영을 나타내는 영적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재를 시공간 안에 있는 몸으로 제한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를 자아독립적 개체로 여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거짓자아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지금 이 땅에서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동안에는 우리의 혼이 더 이상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 안에 주의 말씀을 선택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다르게 표현하면 말씀대로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에 기초한 모든 생강를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켜야 한다(고후 10:4-5). 거짓자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마 16:24-25]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른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헬, 프쉬케:혼)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자기를 부인한다는 생각은 뇌의 활동으로 나타난 현상일 뿐이며 단지 개념이나 관념이며 실재도 아니고 진리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혼과 생각이 만든 거짓자아도 역시 허상이고 현상일 뿐임을 깨닫는 것이다.
보통 우리가 해석할 때, 목숨의 본래 헬라어의 뜻은 혼이데, 이것을 목숨으로 번역해놓았기 때문에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라는 용어가 육체의 죽음을 연상시키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두려움과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 말씀의 본질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서 "육체를 죽여라" 또는 "죽기까지 충성하라"(죽으라고 말하는데 우리는 안 죽고 충성하고자 한다)는 뜻이 아니다. 좀 더 근본적인 뜻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핵심이 바로 '혼의 구원'에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생기가 우리 코네 불어 넣어졌을 때 우리는 생혼이 되었다. 즉 숨을 쉬며 생명 활동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가 된 것이다.(창 2:7 ; 행 17:28). 25절의 말씀은 24절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거짓자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혼의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혼이 거짓자아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각을 선택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영 안에 거할 때, 즉 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몸의 종노릇에서 벗어날 때,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헬, 프쉬케 : 혼)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이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베드로전서 2장 25절의 말씀을 보자.
[벧전 2: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헬, 프쉬케)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여기에 나오는 영혼을 헬라어 원어대로 번역하면 혼이여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 혼의 목자와 감독이시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자에게는 주님께서 영의 목자와 감독이 되실 수 없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6장 17절에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성령님으로 오셔서 우리의 영과 온전한 연합을 이루셨기 때문이다. 또한, 베드로전서 4장 19절도 마찬가지이다. 구원받은 자가 그 영을 하나님께 의탁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거듭났다면 우리의 영은 이미 하나님의 영과 온전한 연합을 이룬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혼이 하나님의 영에 속하여 그리스도를 나타낼 수 있도록 신실하신 창조주께 의탁하는 것이 필요하다.
[벧전 4: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헬, 프쉬케)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은 자는 자신의 타락한 혼이 거짓자아을 만들고자 하는 것을 포기함으로(제 목숨을 잃으며), 그 혼이 성령님 안에 거하게 되고, 비로소 영이요 생명인 말씀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속고 살아왔지만, 허상이 허상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면, 즉 거짓자아가 단지 혼과 몸이 만든 현상이라는 것을 알면, 소멸되기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진리를 아는 것이고, 깨어나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그것이 가능한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심으로 인하여 우리의 혼이 하나님의 영 안에 거하기 때문이고, 그 결과로 거짓자아로부터 신성이 깨어나기 때문이다.
[ 엡 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고전 4: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헬, 카르디아 : 심중)에 비추셨느니라
'무엇이 내가 아닌가'를 아는 순간 '나는 누구인가'의 실체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혼이 자신의 존재를 의식할 때 과거처럼 거짓자아를 만들기 위해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선택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허용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삶에도 그렇게 적용해보라. 진정한 자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따라서 우리의 혼은 과거처럼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선택함으로써 거짓자아를 만들고, 그 거짓자아가 나인 줄 알고, 슬프고 두렵고, 괴롭고, 부족하고, 죽을 것 같은 느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요동함 없이 그리스도의 현존 안에서 그리스도의 의식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는 그의 고백처럼, 날마다 거짓자아의 죽음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고전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린도전서 15장 31절의 말씀이 바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삶을 살아내는 핵심 열쇠이며, 그것이 바로 마태복은 16장 24절에서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말씀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그럴 때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원복을 우리 몸이 체험하도록 역사하신다. 그것이 바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게서 사시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우리의 혼이 하나님의 영 안에서 그리스도 의식으로 몸이 하나님의 생명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 몸을 통하여 그분을 나타내시는 삶을 말한다. 타락 이전 상태와 동일하게 형상을 따라 모양대로 살아가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출판사 : 규장 지은이 : 손기철
첫댓글
주님께서 하십니다!!
주님께 영광!!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아멘 주님께 영광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의 영 안에서 나는 날마다 죽고 주님께서 하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