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0남매 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의사였고 엄마는 집에서 살림만 하는 주부였다. 아버지의 수입이 직업상 매달 때 맞춰 받는 월급이 아니라 들쭉날쭉 하였다. 아버지는 가정 생활에 필요한 돈 관리를 도맡아 하셨다. 어머니가 시장을 보는 것도 콩나물을 산다면 20원을 주고 사과를 산다면 50원을 주며 사오라 했다. 제사장을 볼 때도 아버지가 서문시장 지하 생선가게로 일층 건어물가게를 다니며 장을 봐왔다. 엄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쌀값과 연탄 값이 얼마인지 아셨다며 "생활비가 이렇게 많이 드는지 몰랐다"고 한숨 짓던 생각이 난다.
우리집은 안채는 살림집이고 바깥채는 한의원 자리여서 아버지께서 식사를 하러 안으로 들어오면 내가 약방을 지킬 때가 많았다. 그때 손님이 오면 모든손님이 나를 보고 "할아버지 안 계시냐" 고 묻는다. 난 아버지가 마흔아홉에 태어난 막둥이다. 아버지는 평소 한복차림에 외출 할 땐 두루마기를 입고 중절모를 쓰고 구두를 신었으니 누가 봐도 내가 손녀로 보였을것이다. 그때마다 난 할아버지 소리가 듣기 싫어 꼭 "아버지요" 하면서 반문하고 "아버지 지금 점심 드시는데 조금만 기다리이소" 한다. 그때서야 손님은 "아! 딸이구나 어린 딸이 있었네" 하며 멋쩍게 웃곤 했다.
10년 전 96세로 돌아가신 엄마는 나와 닮은 점이 많았다. 엄마는 성격이 유순했다. 덕분에 내가 자라면서 혼나거나 맞은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나도 우리 애들을 키울 때 별로 혼내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애들은 혼나면서 커야지 오냐오냐 하면 못 쓴다" 하며 나에게 애들 교육 좀 잘 하라 닦달 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 손녀였을텐데..... 엄마는 노래 부르는 것도 좋아했다. 생신 이나 명절때 식구들이 모이면 우린 늘 노래를 불렀다. 둘 이상이면 "자 우리 노래하자" 하고는 일일이 노래를 시켰다. 지명을 받고도 빨리 부르지 않으면 "안 할래? 그럼 내가 부른 데이" 하시며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 못 노나니..." 하며 음정도 박자도 없는 엄마만의 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래서 그런지 나도 요즘 틈만 나면 노래가락을 흥얼거리게 된다. 해당화 피고 지는 섬 마을에... 하며.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공부가 떠오르는데 공부를 잘해서가 아닌 너무 안했기 때문에 많이 생각나는 것이다. 내 위로 오빠 둘이 있고 그 위에 나보다 7살 많은 언니가 공부를 아주 잘했다. 그 당시 대구 최고의 명문인 경북여고에 합격을 하였지만 누구하나 축하 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여자가 공부 잘해서 뭐 하노? 팔자만 거시지" 하는 소리를 들어서일까? 아니면 우리 식구 중 아무도 "정희야 공부해라" 하는 사람이 없었고 내가 공부를 안 한다고 나무라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인지 어쨌든 난 공부를 해 본적이 없는 것 같다. 하물며 국민 학교 6년 동안 방학숙제를 한번 도 해 간적이 없다. 그 당시에는 체벌이 있어서 숙제를 안 하면 회초리로 손바닥을 맞고 종아리를 맞기도 했다. 어느해에는 수업을 다 마친 후 소위 나머지공부 같이 며칠을 남아서 못 한 숙제를 끝낸 적도 있다. 그쯤 되면 다음 부턴 방학 숙제를 착실히 해 가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난 무슨 베짱 이었는지 그 이후에도 여전히 숙제라고는 했는 적이 없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결혼을 하고 남매를 낳았는데 우리 애들 둘은 초등학교 6년을 다닐 동안 여름방학숙제 겨울방학숙제 상을 단 한번 도 빠뜨리지 않고 최우수상을 받았다.
아마도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정말 열심히 공부 할것 같고 공부를 아주 잘하는 학생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가끔씩 해본다.
첫댓글 첫 작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인터넷 뉴스보며 우울하고 복잡했던 기분이 덕분에 유쾌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