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퍼슨, 몬티첼로, 버지니아대학, 그리고 와인 (Jefferson, Monticello, Univ of Virginia & Wine)
정시련 명예교수(약학대학)
오래 전, 정년퇴임을 몇 해 앞두고, 와인 공부를 위해 프랑스 보르도(Bordeaux)를 갔을 때의 첫 느낌: 한강만큼이나 넓은 지롱드(Gironde)강을 따라 펼쳐진 광활한 들판, 그리고 수채화처럼 멀리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 너머까지 끝없이 이어진 포도밭. 여기 저기에 보이는 고색창연하거나 혹은 현대식 창고 같거나 매우 다양한 샤또(chateau, 프랑스어로 성城이란 뜻이지만 보르도에서는 포도밭과 양조시설을 갖고 있는 winery), 그리고 그 곳 각각에서 만들어 지는 수많은 와인들! 이 모두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아니 오히려 감탄스러웠고, 이런 세상도 있구나 하고 느낀 때가 있었다.
벌써 20여년 전이었다. 지금도 새삼 놀라운 건 1960년대 후반에 유럽유학을 하였던 내가(사실 그때 나는 와인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었다) 그로부터 약 40년이 지나 보르도에서 새로이 와인 공부를 하며 감격했던 일이다. 이후로 프랑스 보르도를 위시하여 부르고뉴(Bourgogne), 론(Rhone) 등 각지와 이태리, 스페인, 독일, 그리고 헝가리의 토까이(Tokaji) 와인까지 여러 곳을 둘러보며 비슷하면서도 다른, 또 다른 가 하면 비슷한 묘미를 느꼈다.
와인의 성지 보르도에서 언젠가 먼지 묻고 빛 바랜 상표위에 TJ 라는 약자가 적혀 있는 오래된 와인병이 전시된 것을 본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저 역사적 인물의 싸인 이려니 했다.
세월이 흘러 2022년 봄에 미국 버지니아주 샬럿츠빌(Charlottesville) 지역의 몬티첼로(Monticello)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때는 아직 코로나-19 가 완전히 끝나지 않아 모든 것이 불편한 시기였고 더욱이 일정이 촉박하여 주마간산격으로 다녀온 것이 못내 아쉬워 2023년 여름에 다시 일정을 잡아 소상히 둘러보았다.
Monticello! “작은 산”이란 뜻이지만 사방이 끝없이 넓게 트인 광활한 지역 중심에 위치한 산 위에 만들어진 걸작품. Thomas Jefferson(1743~1826)이 수년에 걸쳐 직접설계하고 지은 사저로서, 이곳에서 미국독립선언문을 작성했다. 그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라는 말을 그 자신의 정부정책 기조로 하였고 이는 미국인의 자유는 물론 전 세계 사람들에게도 호소한 고무적인 표현이 되었다.
몬티첼로는 거대한 농장으로 제퍼슨 생애에 630명의 노예가 이곳에서 노역을 했고, 그와 노예 신분인 Sally와의 사이에 태어난 6남매 중 2명의 남자(아들)를 포함하여 450여명의 노예가 집단 거주하며 일 했던 생생한 현장 모습들이 박물관처럼 전시되어 있다 (이 여인 Sally는 어린 나이에 제퍼슨 부인의 시종으로 함께 제퍼슨 가문에 따라온 노예였다.
그녀는 사실 제퍼슨 부인의 이복 여동생이었지만 흑인 노예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노예의 신분이었다. 제퍼슨 부인이 일찍이 세상을 떠나자 10대 어린 나이에 30년 연상인 제퍼슨의 여자가 되어 많은 자녀를 출산했다. 그때 노예는 그 주인이 성행위를 원하면 이를 거부할 권리가 없었다. 그녀는 제퍼슨의 손발이 되었고, 제퍼슨이 프랑스 대사로 갔을 때는 조수 겸 부인대리 역할을 하며 함께 파리에서 살았다. 그후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었지만 그녀는 몬티첼로로 돌아와 여생을 마친 특별한 여인이었다).
이런 것들을 보면 그의 독립선언문에 언급한 평등과 자유의 사상과는 역설적인 현장이라고 느껴지는 곳이다. 그러나 한편 다르게 생각하면 그 시대에는 노예제도가 보편 상식적이던 시대였으니 당연시되기도 하였다. 결국 그는 노예들을 해방시켜준 역사의 증인으로 남아있다. 미국 3대 대통령이 살았고 그가 영원히 잠들어 있는 이곳, 생명(인생)과 자유와 행복추구의 진정한 의미를 찾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감동을 주는 걸작품이다.
또 하나 제퍼슨의 숭고한 업적은 그가 미국 제3대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이곳에 내려와 살며 버지니아 주립대학(University of Virginia)을 설립하여 초대 총장직을 수행한 것이다. 그 당시 부유한 집안 자녀들 만이 동부의 비싼 사립대학을 다닐 수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누구에게나 대학 교육의 기회를 줄 수 있는 주립대학을 설립한 것이다. 그가 설립한 버지니아대학 당시 본관 건물은 그가 직접 설계한 것으로 그 앞에 그의 동상이 있다. 놀랍게도 이 주변에는 이 본관건물보다 높은 건물이 없는데, 이는 제퍼슨을 존경하는 의미라 한다. 미국처럼 민주주의, 보편 평등의 가치를 존중하는 나라에서 선뜻 의아함마저 느끼게 한다.
지금 현재 몬티첼로와 더불어 버지니아대학이 UNESCO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역사문화 기념물이라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토머스 제퍼슨, 너무나 유명한 인사라 그분을 더 이상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같다. 다만 필자가 좀 더 이야기하고 싶은 건 그와 wine에 관련한 것이다. 그는 1784년부터 5년간 미국대사로 파리에 가 있는 동안 프랑스 와인에 매료되어 보르도 지역을 수없이 방문하며 그때 기념으로 와인병에 TJ라는 서명을 남긴 것이 지금도 가끔 나타난다. 이 시기부터 그는 수많은 프랑스 고급 와인을 미국으로 수입했지만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프랑스 포도 품종 여러 종을 버지니아주 그의 몬티첼로에 옮겨왔다.
이제 제퍼슨의 몬티첼로를 답사해 보고자 한다:
앞에서도 언급한 그의 사저 몬티첼로, 결코 화려하거나 웅장하지는 않았지만 역사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곳으로 의미가 크다. 먼저 주차장에서 안내실로, 그곳서 적지 않은 42$ 입장료를 내고 티켓을 받아(사진 1) 산 위에 있는 몬티첼로에 가기 위해 셔틀 승강장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제퍼슨 실물크기의 동상이 방문객을 맞이해 주었다(사진 2).
방문객을 태운 버스는 잠시 산속 울창한 숲길을 올라 산 위의 저택입구에 도착했다. 나지막한 2층 본관 입구에서 안내판 그림(사진 3) 설명을 숙지하고, 동편 입구로(사진 4) 들어갔다. 그리 넓지 않은(20여평?) 현관 대기실이 2층위 하늘까지 통하게 한 밝은 채광이 인상적이었고, 벽에는 그가 사냥한 여러 흔적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어서 250여년전 그가 애용했던 유물들로 가득한 좁은 접견실, 그가 독립선언문을 작성했던 서재, 와인과 음식을 즐겼던 식탁, 그리고 조그만 침실, .. 등을 둘러보며 오래된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침실은 조그만 싱글 침대라 이상 했고, 식탁도 아주 조그마했다. 대략 이렇게 보고 서편 후문으로 나가니 축구장 정도의 넓고 아름다운 잔디 정원이 펼쳐졌다(사진 5).
이를 둘러가며 세계 각지의 관상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고, 담배, 양귀비(사진 6) 등이 특히 약학을 전공한 필자의 눈에 띄었다. 정원 외곽엔 수 백 년이 된 버들참나무(willow oak, 우리나라에는 없음. 사진 7,8)가 마치 몬티첼로를 지켜주듯 웅장하게 서서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정원을 나와 남쪽 아래편에 길게 이어진 별관을 둘러보았다. 이곳들은 제퍼슨을 위해 일한 노예들의 작업장으로 음식물 저장, 가공, 보관창고, 세탁장, 등이 있고, 이곳에 Sally가 살았던 많은 흔적을 회상하는 방도 있었다. 그 아래에는 철물 제작, 직물공작장, 그리고 넓은 농장 등이 박물관처럼 보존되어 역사의 산 증거로 남아있었다. 여기서 다시 북쪽으로 본관 지하를 관통하는 긴 통로로 들어갔다. 놀랍게도 그곳은 맥주와 와인 저장고였다(사진 9,10).
그는 이 저장고(wine cellar, 사진 9)에서 그의 식탁까지 와인병이 흔들리지 않고 빠르게 바로 배달되도록 운반 장치도 특별히 고안해 설치했다 한다. 지하 통로 끝부분에는 직경 10m 보다 더 크 보이는 얼음저장고가 있어 그 당시 냉장고가 없던 여름철에도 이곳의 호사스러운 식생활상을 짐작케 하였다. 이렇게 산 위의 관람을 마치고 다시 셔틀을 타고 몬티첼로 산을 돌아 내려오는 길 왼편에 그가 생전에 설계하고, 조성하고, 사후에 잠들어 있는 그의 무덤까지 보며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토머스 제퍼슨, 그는 당대 미국 최고의 와인지식을 가진 전문가(connoisseur)였고, 프랑스 와인을 미국 버지니아에 전파시킨 장본인이었다. 그로부터 버지니아주는 물론 미국 각지로 프랑스 와인 품종이 확산되었다. 버지니아주는 가는 곳 마다 와이너리가 있고, 그곳 마다 그의 이야기가 남아있다.
많은 사람들이 캘리포니아의 소노마(Sonoma)와 나파벨리(Napa Valley)등이 미국 와인의 중심이라 알고 있다. 그러나 미국 와인의 본고장은 버지니아의 몬티첼로를 중심으로 샬럿츠빌 일대라는 것을 근래에 새삼 알게 되었다.
지구촌 전체가 한없이 암울했던 Covid-19 공백 3년을 넘어 이번에 이 지방(Virginia)의 무려 3,500여개 와이너리 중 역사적인 몇 곳(2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와이너리는 모두 Jefferson과 관련 있는 곳이었다)을 답사하며 오묘한 와인을 음미할 기회를 가졌었다(사진 11,12,13, 사진 13의 제퍼슨 포도원 표지판에 “Good wine is a necessity of life for me”. Thomas Jefferson 이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이를 통해 내가 모르는 와인의 세계가 아직 이렇게도 많구나! 새삼 신세계를 공부하게 됨에 한없이 감사하게 되었다. 공부는 끝이 없고 아는 것만큼 보이고, 보인 것만큼 알게 된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또 한편, 상대적으로 값비싼 프랑스와인 보다 이곳 버지니아의 저렴하고 품질 좋은 와인을 즐기게 됨에 한없이 감사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는 동안은 희喜노怒우憂사思비悲공恐경驚, 이 일곱가지 온갖 감정(七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마음을 달래주는 수단으로 와인이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에게 기여해 왔다. 정녕, “인생을 즐겁게 해 주는 와인의 향기”라 할 수 있고, 플라톤(Plato)의 “와인은 신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라는 말을 새삼 실감한다. 독자중에 앞으로 미국 버지니아주를 방문하는 기회가 있으면 꼭 Monticello를 방문하고, 와인도 음미해 보시기를 권유하며 이 글을 마무리한다.
2023. 6. 정시련 (영남대 약대 명예교수, 와인문화평론가)
(첨부사진)
사진 1. 몬티첼로 입장권
사진 2. 토머스 제퍼슨 동상 (실물크기)
사진 3. 몬티첼로 안내판
사진 4. 본관 동편 입구 쪽
사진 5. 본관 서편 잔디정원
사진 6. 잔디정원의 양귀비
사진 7,8. 본관 주변의 수 백 년 된 참나무
사진 9,10. 본관 지하 와인저장고
사진 11,12,13. 와이너리와 와인시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