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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시작
구조를 말하다
1. 세상은 변화다. 변화는 격발자와 전달자가 있다. 구조론은 격발자를 다룬다.
2. 구조론은 사건의 닫힌계 안에서 일어나는 자발적인 변화를 추적한다. 그것은 사건의 최초 격발자다.
3. 인류는 지금까지 외부의 작용에 의한 변화를 추적했다. 그것은 사건의 전달자다. 격발한 다음 전달한다. 격발이 먼저다.
4. 인류문명을 떠받치는 두 기둥은 인과율과 원자론이다. 원자가 공간의 전달자라면 인과는 시간의 전달자다. 사건의 전달은 발생한 다음의 일이다. 사건의 최초 탄생에 대한 아이디어는 없다. 이 문명은 결함 있는 문명이다.
5. 외부 작용에 의한 변화는 원인과 결과만 보면 된다. 전달자는 중간에서 전달만 하기 때문이다. 자발적인 변화는 질, 입자, 힘, 운동, 량을 모두 봐야 한다. 격발자는 내부에서 의사결정을 하기 때문이다.
6. 격발자는 스스로 원인을 만들어내므로 계 내부에서 원인의 성립과정을 추적해야 한다. 변화는 계 내부의 에너지적 모순에 의한 밸런스의 붕괴와 코어의 이동에 의한 보다 낮은 단계에서의 밸런스 복원 형태로 일어난다.
7. 변화는 계 내부의 에너지적 모순을 해결하지만, 더 낮은 단위에서 복원된다는 것이 엔트로피의 증가다. 낮은 단계에서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며 비효율적인 형태로 복원된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은 그 복원의 순서다.
8. 궁극적으로는 우주 안에는 오직 변화와 안정이 있을 뿐이다. 변화는 안정을 낳지만, 안정은 변화를 만들어낼 수 없다. 변화는 안정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 변화하고 안정에 도달하여 멈춘다.
9. 안정은 두 변화가 상호작용하는 계에 잡혀 나란한 것이며 변화가 사라진 것은 아니고 계 내부에 숨은 것이다. 그것을 건드리면 내부에 숨은 변화가 관성력의 형태로 튀어나온다.
10. 존재는 짝짓기다. 짝짓기는 대칭이다. 대칭은 밸런스다. 우주 안의 모든 변화는 질, 입자, 힘, 운동, 량으로의 짝짓기 방식의 변화에 따른 자리바꿈이다. 에너지의 방향전환이 있을 뿐이다. 질량으로 명명된다.
11. 물질의 고유한 속성 따위는 없고 단지 짝짓기의 형태가 다를 뿐이다. 상호작용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짝짓기는 일정한 조건 안에서 일어나므로 추적된다. 그것은 변화가 나란한 것이다.
12. 모든 변화는 자리를 바꾸면서 대칭을 띤다. 대칭이 없는 경우는 없다. 코어는 비대칭이지만 외부에 대칭이 있다. 인간은 공간의 수평 대칭에 매몰되어 코어와 또 다른 코어를 연결하는 시간의 수직 대칭을 모른다.
13. 인간은 공간의 수평 대칭만 대칭으로 인식하므로 비대칭의 대칭을 찾지 못한다. 시간의 수직 대칭은 비대칭으로 보이지만 에너지로는 대칭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의 대칭이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이 그것이다.
14. 인간은 입자와 입자, 힘과 힘, 운동과 운동의 공간적 수평 대칭을 인식할 뿐 질과 입자, 입자와 힘, 힘과 운동, 운동과 량의 시간적 수직 대칭은 모른다. 각운동량을 보존하는 자기 자신과의 대칭을 인식하지 못한다.
15. 변화는 대칭의 축을 이동시켜 또 다른 대칭으로 갈아탄다. 격발자에 의해 일어나는 자발적 변화는 계 내부 모순에 의한 밸런스의 붕괴에 의해 일어나고 또 다른 밸런스에 도달하면 변화를 멈춘다.
16. 격발자에 의한 변화는 하나의 플랫폼을 우주 전체가 공유한다. 격발자는 절대성을 따르므로 지식의 무한 복제가 가능하다. 반면 전달자에 의한 변화는 관측의 상대성에 의해 왜곡되므로 노이즈 캔슬링이 필요하다.
17. 모든 발생하는 것은 절대적이고 모든 전달하는 것은 상대적이다. 계를 이루는 자원은 내부의 코어를 바라보므로 힘을 전달하는 경계면에서 진행 방향이 꺾인다. 인간의 모든 착오가 여기서 비롯된다.
18. 전달자에 의한 변화는 원인과 결과만 보면 된다. 인간의 실패는 전달자만 보고 격발자에 의한 변화는 물질의 고유한 속성이라고 얼버무리며 내막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고 포기하는 데 있다.
19. 물질의 고유한 속성은 없다. 그것은 얼버무리는 말이다. 밸런스의 해체와 복원이 있을 뿐이다. 밸런스의 복원은 의사결정 비용의 손실만큼 보다 낮은 단계에서 일어나므로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것이 성질을 만든다.
20. 원인과 결과만 추적하는 전달자와 달리 격발자는 닫힌계, 동력원, 상호작용, 방향성, 밸런스, 코어, 메커니즘, 조절장치, 전달경로, 기능을 모두 체크해야 한다.
21. 격발자는 우주 전체가 같은 플랫폼을 공유하므로 하나의 의사결정 구조만 알면 무한히 복제할 수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다른 모든 분야에 덮어쓰기가 가능하다.
22. 인간은 자극과 반응의 상호작용 방법으로 지식을 구한다. 이때 관측자는 객체와의 연결을 유지해야 한다. 주체와 객체의 연결라인을 놓을 수 없으므로 객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격발자의 자체적인 변화를 추적하지 못한다.
23. 인간은 자극과 반응의 대칭성에 의존하므로 이원론적 사고, 이항 대립적 사고, 흑백논리에 갇힌다. 인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형상 이분법에 잡혀 있다. 원인과 결과를 하나의 상호작용으로 보는 일원론적 사고를 얻어야 한다.
24. 자극과 반응의 대칭성은 사물을 보는 방법이고 우리는 사건을 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사건은 에너지를 따르고 에너지는 유체의 성질을 가지고 유체는 큰수의 법칙을 따르므로 경로가 낱낱이 추적된다.
25. 사건이 격발자라면 사물은 전달자다. 사물은 항상 둘로 나눠지고 사건은 언제나 하나로 통일된다. 공격과 수비가 하나의 게임으로 통일되고 원인과 결과가 하나의 상호작용으로 통일된다.
26. 격발이 전달에 앞서고. 사건이 사물에 앞서고, 성질이 물질에 앞서고, 유가 강에 앞서고, 변화가 안정에 앞서고, 무형이 유형에 앞서고, 기능이 도구에 앞서고, 탄생이 존재에 앞서고, 전체가 부분에 앞선다. 우선순위가 중요하다.
27. 기능 중심, 성질 중심, 변화 중심, 상호작용 중심으로 보는 사고를 익혀야 한다. 물질과 원자와 사물은 상호작용이 쪼개진 파편이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 부분이 아닌 전제를 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28. 우주는 전방위로 대칭이지만 코어는 비대칭이다. 코어는 자기 자신과 대칭된다. 코어가 움직여 자신을 구성하는 부속품들에 기능을 부여한다. 부속품은 공간 수평 대칭이고 코어는 시간의 수직 대칭이다.
29. 인간은 대칭성에 주목하는 이원론에 매몰된다. 코어는 비대칭이며 비대칭은 외부 자궁과 대칭된다. 에너지는 어미의 자궁에서 아기로 가는 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30. 대칭의 교착에 따른 난맥상에서 탈출하여 어미에서 자식의 한 방향으로 계속 가는 일원론의 관점을 얻어야 한다. 우주는, 문명은, 진보는, 진화는, 힉스 보손은 자기 자신과 대칭되어 한 방향으로 계속 움직인다.
동적 세계관
동적 세계관이 필요하다. 일찍이 헤라클레이토스가 갈파한 바 있다. 세상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누구든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
변화는 스스로 불변을 설명할 수 있지만 불변은 변화를 설명할 수 없다. 같은 패턴의 변화가 제자리에서 반복되면 그것이 불변이다. 그러나 불변은 계속 불변에 머물러 있다.
하나로 두 가지를 설명하는 것이 일원론이다. 인간은 이원론적 사유에 매몰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형상이 대표적이다. 씨앗이 질료라면 나무는 형상이다. 나무가 질료라면 나무로 만든 책상은 형상이다. 그러한 변화 그 자체가 질료이자 동시에 형상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씨앗과 나무와 책상은 모두 눈에 보이는 것이다. 즉 변하지 않는 것이다. 씨앗을 놔두면 계속 씨앗에 머물러 있다. 나무를 놔두면 계속 나무에 머물러 있다. 책상을 놔두면 계속 책상에 머물러 있다. 우리는 그러한 불변 중심의 사유에 익숙하다.
인간의 사유는 짝짓기 기술을 쓴다. 객체를 관측자인 자기 자신과 대칭시킨다. 이때 한꺼번에 둘을 대칭시키지 못한다. 이쪽으로 연결된 끈을 잡으면 저쪽으로 연결된 끈을 놓아버린다. 인간 자신과 객체를 연결하므로 객체 내부에서 서로를 붙잡고 있는 질서를 보지 못한다. 인간의 사유에는 극복해야 할 맹점이 있다.
우주에는 변하는 것과 정지해 있는 것이 있다. 아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변화다. 정지한 것은 변화가 내부에서 교착된 것이다. 이 경우는 변화가 상호작용하는 계 내부로 숨었을 뿐 사라진 것이 아니다. 구조론은 상호작용의 교착상태가 풀리면서 내부에 숨은 변화가 겉으로 드러나는 과정을 해명한다.
양자역학의 최신 성과는 동적 세계관을 뒷받침한다. 우리가 유물론, 원자론, 결정론으로 나타나는 정적 세계관을 극복해야 한다. 인류는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인류는 문명을 통째로 다시 설계해야 한다. 거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의사결정원리
인간은 둘을 비교해서 판단한다. 비교에는 척도가 있다. 수학의 척도는 1이다. 물리의 척도는 원자다. 그것은 믿을 수 있는 것인가? 척도는 자의적이다. 대개 관측자 자신이 척도가 된다. 절대적인 척도는? 의사결정 단위다. 관측의 상대성에 따른 오염을 배제하고 객체 내부에서 척도를 찾아야 한다.
원자는 내부가 없으므로 쪼갤 수 없다. 인간은 외부의 작용에 의해 변화가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변화는 내부에서도 일어나고 외부에서도 일어난다. 인류는 사건 내부에서 일어난 자발적 변화를 추적한 적이 없다. 인류는 지금까지 우주의 절반만 본 것이다. 나머지 절반의 진실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모르는 척한다.
변하는 것이 내부에서 나란하면 머무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변화의 교착상태는 풀릴 수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변화는 언제나 내부의 이유로 일어난다. 내부에 밸런스 형태로 조절장치가 있기 때문이다. 내부의 기능이 변화의 원인이다.
당구공을 친다면 변화는 당구공 밖에서 시작되지만, 더 큰 단위로 보면 당구경기라는 게임 안에서 일어난다. 한 단계 단위를 높여서 보면 언제나 원인은 사건 내부에 있다. 우리가 단위를 높여서 사건 전체를 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
어떤 사람의 어떤 행동은 대부분 그 사람이 소속된 집단으로부터 암묵적인 합의와 암시와 심리적인 압박을 받아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한 집단의 무의식을 파헤치는 사람은 없다. 배후의 교사범은 놔두고 현장의 실행범만 족친다. 많은 경우 집단의 구성원 모두가 암묵적인 교사범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일이 커진다. 모두가 공범이면? 곤란하다. 문제를 축소하고 왜곡한다.
인간은 되도록 문제를 축소하려고 한다. 실행범 한 사람이 나쁜 사람이며 그 사람의 신체 내부에 악의 원소가 가득 들어차 있다는 식으로 생각한다. 이는 비겁한 심리적 도피다. 해결하기 힘든 집단의 큰 문제를 개인의 작은 문제로 바꿔치기한다. 만만한 놈을 족치려는 비겁한 태도다. 집단의 약자나 소수자에게 독박을 씌워 쉽게 가자는 거다. 그 한 명을 제거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듯이 보이지만 금세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악순환은 계속되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 한 명의 실행범은 전달자에 불과하고 격발자는 따로 있다. 실행범은 깃털에 불과하고 몸통은 따로 있다.
사건은 크고 사물은 작다. 인간은 사물로 보는 관점에 매몰되어 있다. 되도록 일을 키우지 않으려고 한다. 쉬쉬하고 덮어놓으려고 한다. 사건의 폭발력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치는 이렇게 할 수 있는데 과학을 이렇게 하면 망한다. 에너지는 큰 것이 이긴다. 사건의 닫힌계 안에서 원인은 언제나 결과보다 크다. 큰 놈을 잡아야 해결된다.
사건 단위로 보면 변화는 내부에서 일어난다. 내부에서 격발하는 변화는 법칙이 있다. 상호작용의 밸런스가 계를 통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내부를 들여다보지 않고 포기한다. 관측자가 외부에 있기 때문이다. 내부의 속사정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지적 태만이다. 용기를 내야 한다.
질 입자 힘 운동 량
세상은 변화인데 인류가 알고 있는 변화를 해명하는 논리는 인과율뿐이다. 세상은 복잡하게 돌아가는데 아는 단어가 둘밖에 없다니 말이 되는가?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 그 사이에 의사결정이 있다는 사실은 모른다. 계 내부에서 밸런스의 붕괴에 의해 일어나는 자발적인 변화는 새로운 밸런스를 찾을 때까지 단계적으로 일어난다. 그러므로 원인의 원인이 있고 결과의 결과가 있다.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에너지다. 계 내부에 에너지의 입력과 출력이 있고 그사이에 의사결정이 있다.
입력 - 질
원인 - 입자
의사결정 - 힘
결과 - 운동
출력 - 량
우리가 아는 원인과 결과는 변화를 밖에서 본 것이다. 공을 차면 굴러간다. 차는 것도 보이고 굴러가는 것도 보인다. 원인은 공을 차는 것이고 결과는 공이 굴러가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공은 회전이 걸려서 휘어서 간다. 공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진로를 결정한 것이다. 공 내부를 들여다봐야 한다. 인류는 사건 내부를 들여다보지 않는다. 겁을 집어먹고 판도라의 상자를 닫아버렸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이 모두 원인이 될 수 있고 모두 결과가 될 수 있다. 사건은 단계적으로 일어난다. 하나의 사건에는 다섯 가지 중간 원인이 있고 동시에 다섯 가지 중간 결과가 있다.
원인과 결과 두 단어만으로 이 거대한 우주를 설명하려고 한다면 터무니 없다. 막연히 변화가 외부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므로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전제가 틀렸다. 변화는 내부에서 일어나므로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
자동차가 가다가 멈췄다. 외부에서 다른 차가 박았을 수 있고 내부에서 고장 났을 수도 있다. 외부 충격이 원인이면 간단하다. 범인은 보나마나 뒷차다. 앞차는 내가 감시하고 있으니까. 내부에서 고장이 났다면 복잡하다. 어디가 끊어졌다면 그것이 끊어지게 한 작용이 또 있다. 고장은 특정 부품에서 일어나지만, 원인은 잘못된 운전 습관 때문일 수도 있고 도로에 문제가 있었을 수도 있다.
인과율은 시간에 대한 해명이다. 공간은? 우리는 인과율에 매몰되어 시간의 변화만 추적하므로 집단이 개인에게 가하는 무형의 압박을 놓친다. 실행범만 잡고 교사범은 놓친다. 몸통은 놔주고 깃털만 잡는다. 닫힌계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언제나 전체에서 부분으로 간다. 공간의 전체를 보지 않게 된다. 대부분을 놓치고 있다.
자극과 반응
닫힌계 안에서 일어나는 격발자의 변화는 추적할 수 있다. 외부 요인에 의한 간섭이 없기 때문이다. 같은 원인이 들어가면 같은 결과가 나온다. 우주 안의 모든 변화는 같은 플랫폼을 공유한다. 진리는 있고 예외는 없다.
닫힌계 밖에서 일어나는 전달자의 변화도 추적할 수 있다. 닫힌계를 지정하면 된다. 대신 큰 틀에서 거시적인 부분만 파악된다. 개별적인 사건은 중구난방이지만 문명 단위로 모아놓으면 일제히 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격발자는 꽤 복잡하다. 그러나 우주 안에 의사결정 구조는 하나밖에 없으므로 알고 보면 간단하다. 변화의 시스템과 메커니즘과 구조를 구성하는 닫힌계와 계 내부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과 의사결정이 촉발되는 코어와 연쇄적으로 치고 나가는 방향성과 그것을 결정하는 밸런스와 그 모든 것의 배후에 있는 동력원과 중간을 연결하는 전달경로와 핵심이 되는 조절장치를 모두 알아야 한다. 복잡하지만 그래봤자 대칭과 비대칭이다. 변화는 상호작용의 밸런스와 코어의 이동이다. 결국 세상은 짝짓기다. 자리바꿈이다. 방향전환이다. 그 외에 아무 것도 없다. 질량으로 나타나는 방향전환 총량은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
외부에서 보면 원인과 결과가 있을 뿐이지만 내부에서는 짝짓기 절차가 복잡하다. 그냥 사랑한다, 결혼한다, 끝. 이렇게 되지 않는다. 일단 움직이는 것을 멈춰 세워야 하고, 둘을 하나의 공간에 가두어야 하고, 공간의 각도와 시간의 순서를 맞추어야 한다.
컵을 쥐는 것과 같은 간단한 임무도 아기는 무게중심을 놓친다. 컵을 떨어뜨린다. 우리는 숙달되어 있다. 그게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어렵지만 쉽다. 원리만 알면 복제하여 덮어씌우기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인간이다. 우주가 대칭이듯이 인간도 대칭이다. 인간의 생각하는 방법은 자극과 반응의 짝짓기 방법이다. 이는 동물적 본능이다. 자극과 반응은 객체와 연결되어야 한다. 그 연결의 끈을 놓지 못하므로 객체 내부에 숨은 자체의 연결을 찾지 못한다.
개가 어떻게 다른 개와 사귀는지 알아내려면 개의 목줄을 놓아야 한다. 인간의 관점을 내려놓아야 한다. 인간은 손에 쥔 것을 놓지 못한다. 눈에 꽂힌 것을 떼지 못한다. 인간의 자기소개 버릇을 극복해야 한다.
자기소개 행동은 객체를 갑으로 놓고 자신을 을로 놓는 것이다. 객체를 능동으로 놓고 자신을 수동으로 놓는다. 상대방에게 공격자 포지션을 부여하고 자신에게는 방어자 포지션을 부여한다. 이래서는 진리를 알아낼 수 없다. 당신은 을이 아니다.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려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객체가 자기들끼리 자극하고 반응하는 구조를 알아내야 한다.
우주는 대칭이다. 대칭은 연결이다. 인간의 사유에는 근본적인 맹점이 있다. 인간은 한꺼번에 두 가지 생각을 못 한다. 이것을 잡으면 저것을 놓친다. 이것과 연결하면 저것과 단절된다. 인간은 자극과 반응이라는 상호작용 구조에 붙잡혀 있다. 외부의 객체에 자극하고 반응을 끌어내려는 동물적 본능 때문에 겉핥기로 될 뿐 사건 내부를 들여다보지 못한다.
저글링은 한꺼번에 두 가지 동작을 한다. 처음에는 두 손을 각각 움직이지만 익숙해지면 두 손을 한 손처럼 움직인다. 뇌 안에서는 하나의 동작으로 인식한다. 뛰어난 피아니스트가 1초에 스무 개의 음을 쳐도 뇌 안에서는 하나의 명령이 떨어진다. 저글링은 훈련해야 가능하다. 움직이는 것의 내막을 알아보려면 특별한 훈련이 필요하다.
인류는 변화를 보는 사람과 보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누어졌다. 문명인과 야만인, 근대인과 중세인은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다. 그 둘은 만나지 못하며 서로 대화할 수 없다. 야만인이 문명인으로 올라서는 수는 있어도 그 역의 경우는 없다. 변화를 따라오지 못하면 낙오된다. 의사결정권자의 지위를 빼앗긴다. 조절하는 자의 포지션을 놓치고 조절 당한다.
동적 세계관, 연결의 세계관, 변화의 세계관, 상호작용의 세계관, 구조의 세계관을 얻어야 한다. 뭐든 뒤집어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림자를 보고 세상이 변한다고 탄식하지 말고 그림자의 맞은편에서 변하지 않는 빛을 발견해야 한다.
인문학의 타락
과학은 선배의 어깨를 밟고 지나가는데 인문학은 선배의 등을 밟고 지나가지 못한다. 유시민이 한 말이다. 인문학은 스승이 만들어 놓은 가두리 양식장에서 탈출하지 못한다. 인문학 특유의 인맥 놀음 때문이다. 인문학의 목적은 평등한 동료를 얻어서 집단 내부에 의사결정의 코어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려면 무리가 같은 스승을 섬겨야 한다. 이념적 동질성이 필요하다.
인문학에는 얼마간 종교의 속성이 있다. 종교는 교주가 있어야 평등하다. 한 부모에게서 난 자녀가 평등하듯이, 한 스승에서 배운 제자가 평등하고, 같은 신을 섬기는 무리가 평등하다. 집단은 동질성을 얻어야 의사결정이 가능한 구조가 된다. 거기에 인간의 사유에 족쇄를 채우는 프레임이 있다. 패거리 내부의 평등을 추구하며 사유를 제한하는 이념의 족쇄에 갇힌다.
과학은 실력대로 차별한다. 노벨상 가지고 와야 인정받는다. 장단점이 있다. 과학자는 고집만 부리고 인문학자는 눈치만 본다. 집단은 인문학의 이념적 동질성을 얻어 의사결정의 코어를 만들고 과학자의 실력으로 외연을 확장해야 한다. 우두머리는 양쪽 세계를 다 경험해 본 열린 사람이라야 한다. 한쪽 세계에 갇힌 사람이 상대편의 반응을 끌어내려고 자극하므로 세상이 망한다.
서양의 좋은 것은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나왔고 나쁜 것도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나왔다. 동양은 공자를 넘지 못했고 서양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넘지 못했다. 다른 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건드린 분야가 광범위하다는 것이다. 공자는 고작 육예를 말했을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 중에 맞는 것은 하나도 없지만 그가 손을 대지 않은 분야도 없다.
동양의 선비는 도덕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는 중세인의 사고다. 인류가 과학에 방정식을 써먹은 것은 케플러의 법칙이 처음이라고 한다. 과학의 역사는 불과 500년 안팎이다. 인류가 스승을 뛰어넘기 시작한 역사는 길지 않다.
서구 문명은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분법에 갇혀 있다. 탈레스는 물 일원론을 제안했고 헤라클레이토스는 불 일원론을 주장했다. 주역은 역易 일원론이다. 플라톤은 이데아 일원론이다. 모든 사상의 시조는 일원론 혹은 일신론이다. 일원론이 옳다는 사실은 누구나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인류에게는 변화와 안정이 필요한데 변화는 변화하여 안정될 수 있지만 안정은 안정되어 변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변질된다. 머리 속 생각으로는 일원론이 맞는데 현장에서 부딪혀 보면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인간들이 도무지 말을 들어 먹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각을 바꾸려면 대가를 줘야 하는데 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도 인문학을 배워서 할 수 있는 게 대학교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극소수는 교수가 되고 나머지는 룸펜 인텔리겐치아가 된다. 교수 자리라도 알아보려면 스승에게 잘 보여야 한다. 스승이 제자를 복종하게 만들려면 차별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신분 상승 외에 제자에게 줄 수 있는 게 없다. 스승이 제자에게 줄 것이 없다는 게 비극의 원인이다.
모든 사상은 출발점에서 일원론이고 이원론은 타락이다. 그들은 제자에게 뭔가를 줘서 복종시키려고 현실과 타협한 것이다. 기독교가 특히 소수자 차별에 분주한 이유는 헌금을 바치는 신도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사람을 차별하는 권력뿐이기 때문이다. 일원론은 양심을 주고 이원론은 차별하는 권력을 준다. 이원론이 번성한다. 그렇게 망한다.
이원론의 오염
자라투스트라는 선의 상징 아후라 마즈다를 섬기는 일신론자인데 점차 앙그라 마이뉴의 힘이 세져서 선악 이신론으로 변질하였다.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대중이 가세하면서 교회 안에서 역할을 요구하므로 점차 집단의 롤 플레잉 게임으로 변질한다. 주자와 퇴계의 이원론도 마찬가지다. 오랑캐의 침략에 맞서 대중을 동원할 목적으로 역할을 나눠준다.
슈퍼 히어로물이라도 히어로와 빌런의 밸런스를 맞추어야 흥행한다. 여기에는 집단을 격동시키려는 의도가 있다. 광장에 모아놓은 군대가 히어로의 활약을 믿고 무기를 내려놓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정치는 얼마간 종교다. 정치와 종교는 집단을 격동시켜 긴장이라는 울타리에 가둔다. 그 방법으로 서로를 긴밀하게 연결한다. 이는 집단의 정체성을 획득하는 장치다. 우리는 그러한 동물의 한계를 넘어야 한다.
서양은 여전히 조로아스터교의 선악 이분법에 갇혀 있다. 인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형상 이분법에서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했다. 마르크스의 계급 이분법도 마찬가지다. 근래의 탈근대사상이나 생태주의 놀음도 그 아류다. 그들은 입으로 변화를 떠들지만, 본질에서는 변화를 부정한다. 한 번의 혁명으로 변화를 끝내고 이상에 도달하여 안주하려고 한다.
질료와 형상은 원인과 결과를 다르게 말한 것이다. 질료와 형상을 연결하는 라인은 하나다. 우리는 그 하나의 라인에 주목해야 한다. 원인과 결과는 둘이라도 변화는 하나다. 사건은 하나다. 하나는 자기 자신을 복제한다. 궁극적인 진리는 복제원리 하나다. 나머지는 모두 중간단계의 끼어들기다. 원줄기에서 갈라져 나와 따로 가지를 치고 별도로 지점을 낸 것이다.
생물은 원래 단성생식을 한다. 자궁에서 아기가 나오는 게 아니라 자궁에서 자궁이 나온다. 양성생식의 역사는 불과 5억 년이고 생명은 30억 년 동안 단성생식을 해왔다. 질료에서 질료가 나오고, 형상에서 형상이 나오고, 변화에서 변화가 나온다. 탈레스의 물이 계속 흐르고, 헤라클레이토스의 불이 계속 타오르고, 주역의 역易이 계속 조화하는 것이다. 멈추지 않는다.
그리스인의 순수
이원의 둘은 감시하는 사람과 감시당하는 사람이다. 혼자 고독하게 진리를 찾으려고 하므로 일원론이 되고 세력이 커진 후에 사람을 부려 먹으려고 하므로 이원론이 된다. 인간들이 워낙 말을 들어 먹지 않기 때문이다. '말 좀 들어라! 인간들아. 내가 따로 줄 것은 없고 허울 좋은 계급을 올려줄게.' 이러는 것이다.
국군의 20개나 되는 계급은 인간들이 스무 가지 방식으로 말을 듣지 않는 핑계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죽어보자고 애를 먹이는 게 인간이다. 하여간 꼴통은 조져야 한다. 방법이 없다.
석가는 사성 계급을 타파하고 계율을 없애려고 했다. 계급과 계율은 깨달음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석가는 결혼도 했고 자식도 있고 고기도 먹었다. 그런데 실패했다. 계율을 없애려고 하니 500명의 무리가 도망가고 두 명이 남았다. 엄격한 계율을 주장하는 데바닷타가 이긴 것이다. 적당히 타협한 결과 계율은 점차 늘어나서 오늘날 비구의 250계와 비구니의 348계로 복제했다. 쓸데없는 잔소리가 그만큼 늘어난 것이다. 석가모니가 잘못했다.
뭐든 하다 보면 이렇게 된다. 공자의 가르침도 마찬가지다. 괴력난신 술이부작은 허튼짓을 삼가라는 의미다. 반대로 허세만 늘었다. 노자도 마찬가지다. 고제 유방이 진나라 법을 폐지하고 약법 3장을 남긴 것은 노자의 무위를 따른 것이다. 그러나 법은 부활하였다. 부하 장수가 술에 취해서 궁궐에서 칼을 휘두르는 등의 소동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어느 종교든 근본주의가 득세하고 있다. 극단주의가 판치는 정치판도 마찬가지고 괴력난신이 판치는 인터넷 게시판도 마찬가지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고 거짓이 진실을 이긴다. 거짓은 뭐라도 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거짓은 자의적인 잣대로 타인을 심판하는 권력을 준다. 그게 범죄라는 사실을 모르고 말이다.
생각하면 그리스 시대가 좋았다. 그때는 벌거숭이 임금님을 보고 벌거숭이라고 말하는 시대였다. 종교가 득세하면서 인간의 사유는 대중의 평균에 맞추어 하향평준화 되었다. 대중은 권력을 원했고 정치와 종교와 인문학은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했다.
지구가 둥근 것은 그냥 보면 보인다. 지구만 둥글겠는가? 바다도 둥글고, 하늘도 둥글고, 별자리도 둥글고, 구름의 층도 둥글다. 그리스 시대는 지구가 둥글다고 말해도 되는 시대였다. 6천 개의 섬으로 나누어져 인구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모든 인간을 설득하지 못하면 입도 뻥긋하지 말아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대중의 입맛에 맞는 개소리가 득세하는 시대가 되었다.
데바닷타를 물리치고 석가는 말했다. '비구들아, 자기의 이익을 바라고 규칙을 정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그들의 어리석음은 기둥감을 베러 숲에 들어갔다가 나무가지만을 가지고 돌아오는 꼴이다.' 일원론이 기둥이라면 이원론은 나뭇가지다.
도시의 공기가 자유를 만든다는 말이 있다. 지식의 공기가 자유를 만든다. 진리의 공기가 자유를 만든다. 그 자유가 필요한 사람은 계속 가도 좋다. 권력이 필요한 사람은 버리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