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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 : 한국에스더기도회
기간 : 1999.8.6 ~ 8.13
필자 : 강석진목사
1. 복음의 닻을 내렸던 인천항을 떠나
금세기의 마지막이 되는 "백두산 구국기도회"를 위해 금년에는 배편을 이용해 압록강 하구에서부터 시작하여 백두산 천지에 올라 민족의 복음화와 통일을 위한 기도회의 일정을 세우고 인천항에서 닻을 올리고 출항하게 되었다. 인천항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이 선교적 의미을 더 해주는 것같았다.
지금으로부터 일백십오년 전 흑암과 혼돈 가운데 은둔의 땅이었던 조선 땅에 벽안의 미국인 청년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아펜셀러는 1885년 4월5일 복음을 싣고 인천 제물포항에 발을 디딤으로 2천만 한민족이 생명의 빛을 바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당시 아펜젤러선교사는 그 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우리는 부활주일에 여기 왔습니다. 이 날에 사망의 철정을 부수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매이고 있는 줄을 끊으시고 그들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얻는 빛과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
이들의 사역이 각국에 알려지면서 세계 각국의 선교사들이 4천명이상이 대부분 이 인천항 관문을 통해 몰려오게 되었다. 그러나 1세기가 지난 지금은 피선교국이 아닌 선교국으로 급 성장하여 이제는 복음을 싣고 5대양 6대주로 진출하고 있다.
탈냉전 시대를 맞이해 1992년10월에는 중국과 수교를 하므로 인천항은 중국 대륙을 향한 복음의 물결이 흘러나가는 출구가 되어 중국의 중요한 항구인 대련, 상해, 연대, 위해, 천진, 청도 등지로 수 많은 복음의 수출꾼들이 성경을 비롯한 전도 물품을 갖고 중국 각처로 민들레씨처럼 온 땅에 흩어져 나가고 있다.
인천이 항구로서 개항한지 1백년이 지난 지금 부두의 야적장에는 헤아릴 수 없는 수출용 자동차가 햇빛에 반사되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제는 세계에서 5대 자동차 생산국으로 자리를 굳히어 세계 130개국에 년간 40만대이상의 각종 차들을 수출하고 있다.
지난 날에는 외국의 문물과 기술을 받아 들이기만 했던 가장 낙후했던 나라가 자동차를 비롯한 선박과 첨단 상품인 컴퓨터 메모리칩 등을 일천억달러 이상을 수출을 하고 있다. 전쟁의 폐허속에서 불과 40여년만에 세계에서 11번째의 무역 대국으로 발돋음한 것이다. 이는 분명히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의 산물인 것이다. 외국의 어느 학자는 한국의 고도 성장에 대해 평가하기를 "한국인들의 근면과 하늘로부터 임한 하나님의 플러스 알파되는 힘이 분명히 있기에 가능하였다"고 하였다.
또 UN의 경제개발 기구에서 한국으로 파견되어 오랜 동안 자문 역할을 해왔던 어느 경제 전문가는 "한국의 고도 성장은 다른 나라가 모방할 수 없는 특이함을 갖고 있다"고 말한바가 있다. 이같은 경제의 고도 성장은 교회의 급성장에 큰 힘이 되어 선교의 Vision과 능력을 갖출 수 있게 하였다.
선교 2세기를 맞이하고 있는 한국 교회는 어느듯 세계에서 해외 선교사를 미국, 카나다에 이어 3번째로 5천명이상을 파송하는 선교국으로 입지를 굳히고 있으며, 매년 선교사 파송수가 IMF경제위기 가운데서도 줄어들지 않고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복음을 인천항을 통해 전해 받은지 1세기만에 이제는 선교지가 아닌 선교국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우리가 탄 배에는 우리 일행말고도 교회나 선교회에서 단기 선교나 백두산 기도회를 위해 여러팀들이 승선하고 있었다.
배는 갑문을 서서히 빠져나와 인천 앞 바다에 떠있는 섬들과 대기하고 있는 대형 선박 사이를 뱃고동을 울리면서 공해를 향해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우리는 중국 대륙을 향하는 뱃전에 나와 노을지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찬양을 시작하였다. 바다의 물살을 가르는 소리와 우리의 찬양이 어울려져 묘한 하모니를 이루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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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후 저녁 기도회를 드렸다. 본문 말씀은 사도행전 13장4절의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타고 구브로에 가서"였다. 이번의 백두산 구국 기도회도 성령께서 보내시어 이루어진 것이다. 아늑한 선실에서 찬양과 기도 소리가 울려퍼졌다.
"물건너 생명 줄 던지어라 누가 저 형제를 구원하랴 우리의 가까운 형제이니 이 생명줄 던지려나 생명줄 던져 생명줄 던져 물속에 빠져간다 생명줄 던져 새명줄 던져 지금 곧 건지어라 "(258장)
우리가 탄 배는 바람 한 점없는 밤 바다를 해치며 날이 새도록 달렸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눈부신 킙살을 느끼며 일어난 우리는 하나님께 먼저 예배를 드리고 선상으로 올라가 배전에서 기도 모임을 가졌다. 얼마후 눈 앞에 나타난 중국 육지를 볼 수 있었다. 배 우편으로는 멀리 북한의 산봉오리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잠시후 단동의 東港이 눈에 들어왔고, 예인선 두척이 나타나 큰 배에 접근하여 줄로 연결하더니 방향을 잡아가기 시작하여 조심스럽게 부두 선착지점에 접안시켰다.
이 항구가 바로 압록강이 황해와 합류하는 지점이다. 오른 편 섬에서는 썰물로 인해 드러난 북한쪽 갯벌에서 북한 사람들로 보이는 이들이 무엇인가를 열심히 줍고 있었다. 이항구는 북한의 남포항과도 연결되어 옥수수와 밀이 남포항으로 운반된다고 한다.
우리가 탄 배는 여름에 한국의 관광객들로 붐비지만 그 이외에는 보따리 장사꾼들이 주로 사용하면서 한국의 의류와 잡화품들을 중국으로 가져오고 돌아 갈 때는 중국제 농산물 등을 가져간다고 한다. 우리는 번잡한 수속을 마치고 1시간 남짓한 시간을 뻐스로 한국의 농촌이나 다름없는 평화스런 풍경을 바라보면서 단동 시내로 들어갔다.
2. 信義州를 향한 압록강 선상 구국기도회
압록강변에 위치한 호텔에 짐을 풀고 식사를 마친다음 압록강의 선상 기도회를 갖기 위해 배를 대절하였다. 평안북도 신의주를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丹東市는 북한과 가장 많은 교역을 하는 곳으로 북한 경제의 젖줄이 되고 있다. 북한을 상대로 무역을 하는 중국 무역회사만 300개 이상이 된다고 한다.
북한은 농산물,약초,수산물,광산물을 수출하고 중국으로부터는 식량,유류 및 공산물 등을 거의 구상 무역 형태로 거래를 하고 있으나, 금년에는 북한 경제의 악화로 물류 거래가 약30%정도 감소되었다고 한다. 단동은 양국간의 무역을 통한 교류뿐만아니라 북한의 식량난을 세계가 돕기위해 WFP와 한국의 적십자사가 중국으로부터 밀,옥수수 등을 구매하여 신의주로 반출하는 양식의 공급처가 되고 있다.
신의주는 아직 개방되지 않은 도시이나 실질적으로는 가장 개방된 도시로 한국의 여러 소식을 신속하게 접하는 도시이기 때문에 통제와 감시가 매우 심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북한의 내지 어느 지방에서 신의주를 방문하려면 통행증 발급료로 북한 돈 1천원이상 지불해야 하며 신분이 확실하고 청년계층은 일체 허락이 안되며, 반면에 평양 통행증은 약7백원이면 가능하다고한다.
경제 개발특구인 나진.선봉보다 더 가기 힘든 지방이 신의주라고 한다. 북한이 신의주를 개방 못하는 이유가 평양과 약250km로 가장 가장 가까운 국경 도시이기 때문에 신의주가 개방되면 자본주의 사상과 문물이 평양과 여러 내지에 급속히 파급되기 때문에 개방을 단행치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강력한 통제와 감시의 높은 방파제를 쌓아 놓고 있는 것이다.
신의주의 도시명은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화 한후 중국 만주로 진출하기 위해 서울과 신의주간의 경의선을 조선총독부가 1911년에 부설하므로 원래 義州에 속한 행정구역이었으나 중국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의주라는 의미로 "新義州市"로 명명된것이라고 한다." 신의주는 한반도에서 중국 대륙으로 진출하는 진출구였다.
신의주는 일본시대 때 공업도시와 무역 도시로 발전하여 평양 다음가는 도시로 발전했다. 신의주는 타 지역에 비해 경제나 교육 수준이 높은 편이었으며 일찍이 만주를 통해 기독교가 전해져 교회도 16개가 세워졌고 교회의 규모도 1~2천명의 대형교회들도 있었다고 한다. 특히 "신의주 제2교회"는 한경직 목사님이 담임한 교회로서 "제1교회"가 부흥되어 분가된 교회였으며 그후에 계속적인 부흥이 이루어져 "제7교회"까지 세워지게 되었다.
그당시 신의주와 단동(옛 도시명은 安東)은 조선예수교장로교의 같은 노회로서 단동에도 중앙교회,제1,제2교회가 있었고 한경직목사님이 1933년에 "단동제1교회"에서 노회가 열릴 때 목사 안수를 받으셨다고 한다.
지난 날의 신의주에 무너진 성전의 터에 돌위에 돌이 언제 놓여질 것인가? 그날을 간절히 소망해 본다.
신의주를 출입하는 어느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지금도 어느 노인은 전쟁시 폭격을 맞아 교회건물 흔적이 하나도 없는 옛 날에 다녔던 교회터를 매 주일이 되면 예배 시간에 맞추어 홀로 빙빙돌면서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그 노인 성도에게는 예배당의 건물은 없어졌으나 그 마음 속에 성전이 그대로 남아있어 신령과 진정으로 주일을 성수하고 있는 것이다. 그 노인 성도는 흩어진 성도들이 다시 모여 그 터위에 성전이 세워질 그 날을 간절히 사모하며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족장들중에 여러 노인은 첫 성전을 보았던고로 이제 이전지대 놓임을 보고 대성 통곡하며 여러 사람들은 기뻐하여 즐거이 부르니 백성의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변치 못하였느니라"(느3:12,13)
우리는 2시간 동안 배를 빌려 압록강에 배를 띄우고 신의주 강변과 고려시대에 이성개가 회군한 위화도를 가까이 접근하여 착찹한 마음으로 한국의 요단강이라 할 수 있는 압록강 수상에서 예배를 드렸다. 서로가 합심하여 간구하기를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법궤를 메고 언약의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 요단강을 법궤를 메고 건너간 것과 같이 우리 민족도 속히 복음의 법궤를 메고 건너가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게 하옵소서"라고 힘써 기도하였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가니라"(수3:17)
압록강은 우리 한국 기독교 역사의 초창기에 상당한 영향을 준 사건이 둘있었다.
첫째로, 한국에 선교사들이 들어 오기전에 지금의 요령성 심양(옛 이름은 奉天)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스코트랜드의 장로교 선교사가 조선의 선교를 정탐하기 위해 단동을 방문하여 그 당시의 정황을 살피고 갔으며, 그런 이후 의주 출신인 조선 청년 이성하,백홍준,이응찬,김진기,서상륜을 맞나 그들에게 조선말을 배우면서 그들을 제자 양육하여 세례를 베풀고 이들의 도움을 받아 한국 최초의 조선어로 된 쪽복음을(누가,마가,요한) 번역하여 문광서원 이름으로 인쇄하였고, 이들로 하여금 조국에 돌아가 복음을 조선인들에게 전하라고 하여 이성하 청년은 1883년 봄에 단동 압록강변에 도착하여 당시에 조선에서는 성경이 금서였기 때문에 비밀리에 가져가야 했다.
이성하는 봇짐처럼하여 압록강까지는 가져왔으나 지금의 세관을 무사히 통과하는 것이 어려운 문제였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문제를 알아보기 위해 주막집에 쪽복음 보따리를 풀어 놓고 잠시 외출한 사이에 그 주막 주인이 그 보따리를 풀어보고는 예수교 성경인 것을 알고 겁이나서 일부는 압록강에 던져버리고 남어지는 불에 태워버렸다. 잠시후 돌아온 그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 즉시 심양으로 돌아가 자신을 파송한 John Ross목사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자 그는 다음과 같은 예언을 하였다.
"성경이 던져진 압록강 물을 마시는 조선인들은 생명수를 마실것이요 성경이 탄 재는 조선교회를 자라나게 하는 밑 거름이 될 것이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 다음 해에 다시 백홍준청년의 시도로 마침내 성공하여 지금의 평북도 의주와 신의주 일대에 복음이 제일 먼저 전파하게 되었고 점차 이북 지방의 내지로 복음이 전파되었다. 한국의 복음화는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부터 조선인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복음이 전파되어 한국의 복음화에 밑거름이 된 것이다..
둘째로, 1885년 4월에 한국에 온 언더우드 선교사는 서울(漢城)을 중심으로 사역을 하였으나 이북 지방에도 복음이 들어가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선교 여행을 평양과 의주로 정하고 이곳에 왔다가 압록강 일대에는 이미 복음이 전파되어 기독교인들이 있음을 알고 몹시 놀랬다.
이때에 압록강변의 조선기독교인들은 미국의 선교사가 자신들의 지방에 왔다는 소문을 듣고 언드우드선교사에게 와서 우리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강청하여 언더우드는 그들을 배에 태우고 중국쪽 압록강에 데리고 와 약30여명에게 한국 최초의 집단 침례를 베풀었다. 이 침례 사건을 가르켜 일명 "한국의 요단강 침례"라고 한국 교회사에 기록하고 있다.
지금도 이 압록강은 한국의 복음화에 큰 역사적인 사실을 간직한채 변함없이 흐르고 있다. 그로부터 1세기가 지난 지금 압록강은 다시금 우리로 하여금 복음이 저 흑암의 땅에 전해져 생명수를 갈구하는 이북동포들이 다시 압록강에 몰려 나와 침례를 받는 그 날이 재현되기를 원하고 있을 것이다.
압록강의 역사적 사실을 간직하고 있는 유적물이라면 압록강 철교라 말 할수 있다. 신의주와 단동을 잇고 있는 철교가 두 개가 있다. 하나는 현재 철교로 사용되고 있는 것과 1951년 2월에 6.25전쟁 때 중공군의 도하를 막기 위해 유엔 공군기가 폭격하여 절반만 남아있는 구철교이다. 지금은 이 다리가 관광 명소로 이용되고 있다.
왜정시대 때 신의주와 단동에 사는 한인들은 국경의 번거로운 통행의 절차 없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주일이면 단동에 다니러 왔던 교인은 성경책을 들고 신의주에 예배드리러 간다고 하면 그냥 통과되었다고 한다.
이 압록강 철교는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일본 식민지화의 상징물이기도 하면서 중공군의 한반도 침략의 증거이기도 하다.
일본은 만주를 점령하고 이 광활한 대륙에 수 십만명의 조선 빈농들을 만주로 이주케하여 농토를 잃어버린 우리 동포들이 조상 대대로 지어온 농토와 친족들을 버리고 이 철교를 건너면서 통한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또 독립 운동을 하기 위해 상해나 북간도 등 각지로 향했던 애국 지사들도 비장한 각오로 언제 다시 살아 돌아올지 모르는 이 다리를 건넜을 것이다. 이렇게 건너간 우리 동포들 가운데 호남출신들은 대부분이 길림성의 "間島" 지역에 정착하였고 영남지역 출신은 흑룡강성의 할빈 등지로 이주하여 거칠고 추운 토지를 피땀으로 개간하여 논농사를 일구어 내었다.
그 후손들이 이제는 창대케 되어 약250만명의 민족을 이루어 자치구를 형성하여 한글로 후대들을 교육시키며 민족의 정체성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어서 일본 관동군이 1931년부터 1945년 쏘련에 항복할 때까지 수많은 조선의 청년들을 만주로 내몰았을 때도 한맺힌 이 철교를 건넜을 것이다. 같은 핏줄인 우리들은 그나마 역사의 현장인 이 다리에서 절반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지나가는 것이지만 그 흔적과 상처는 남아 무언으로 증거해 주고 있다.
또 하나의 다리는 한국 전쟁 이후 북한과 중국간에 합동으로 건설하여 사용되고 있다. 이 철교는 단동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이 다리를 통해 북경과 평양간 국제 열차가 일주일에 2번 통과하고 있으며 화물 열차와 트럭,승용차들이 겸하여 통행되고 있다. 앞으로 통일이 되면 지금처럼 중국을 비행기나 배가 아닌 열차와 승용차로 5~6시간이면 서울역을 떠나 이 철교를 지나 단동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이 나라 살리는 통일이여 어서 오라 !"
우리가 대절한 배가 신의주 강변의 공원에 가까이 접근하여 다가 갔으나 긴장감만 더 할뿐 더욱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은 생기질 않는다. 같은 동포인 그들은 그저 무표정할 뿐이고 경계심으로 찬 눈 빛이다. 생김새는 분명 같은 민족이지만 우리와는 다른 심정일 것이다. 남루하고 거치른 자신들의 모습과 사상적으로 적대시하는 교육만 받아온 저들이 우리가 손을 내밀지라도 저들은 돌처럼 차갑고 거친 손길이기에 손을 내밀기에는 수 십년의 세월이 필요할 것이다.
야곱과 에서가 압복강가에서 20여년만에 맞나 서로 목을 끌어 안고 울며 화해했으나, 우리는 50여년이 지났고 저들은 너무도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흘릴 눈물마저 말라 버렸을 것이다. 저들의 가슴이 더워지기에는 많은 치유의 시간이 흘러야 될 것이다. 또 우리들도 저들을 이해하기 위한 많은 노력이 필요하며 서로 용납할 수 있을 때 우리 민족도 압복강가의 야곱과 에서의 화해가 가능해 질 것이다.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 하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 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창33:3~4)
1989년11월 동독과 서독의 시민들이 베르린장벽을 무너뜨리고 브렌덴브르크 광장에서 남남인 저들이 서로 얼싸안고 감격하던 그 통일의 모습을 T.V로 생생하게 보면서 우리 민족도 저들과 같은 통일의 날에는 남북간에 평양에서 서울에서 저런 감격스런 모습이 반듯이 올 것을 소망하면서 눈시울을 붉힌 적이 있었다.
불원간에 이루워 질 통일이겠지만 우리의 통일과 맞남의 모습은 독일인들과는 다른 모습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왜냐하면 저들은 갈라져있었어도 서로를 미워하지 않았고 적대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렁이 같은 야곱이 환도뼈가 위골되는 몸부림치는 회개가 있었기에 야곱도 변화되었고 복수하고자 칼을 품은 에서의 마음도 하나님께서 변화시켜주신 것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이러한 변화의 모습이 있을 때에 우리 민족이 하나가 되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것이다.
3. 고구려의 古都인 集安(國內城)을 찾아서
압록강 하구인 丹東市에서 8월8일 아침 6시에 주일 예배를 드리고 "에스더 구국기도회" 일행 9명과 출발하여 압록강변의 험산준령을 수 없이 넘고 넘어 약 7시간만에 길림성 通化市에 도착하여 역전의 조선족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옛날 고구려의 수도인 집안으로 향했다.
2년전만하여도 비포장이었던 도로가 말끔히 포장되었다. 구비구비 돌고돌며 오르고 내리는 산악길이지만 곳곳에 흐르는 맑은 냇물이 청량감을 더 해준다. 그렇게 달리고 달리기를 2시간이 지나자 마침내 주변의 산으로 둘러 쌓여진 포근한 안도감을 주는 평지가 나왔다. 멀리 건너편에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산들이 솟아 있었다. 북만주쪽과는 첩첩이 둘러져 있는 천혜의 요세 역할을 했던 지형의 잇점이 있었고 압록강이 있었기에 한 나라의 도읍으로서 조건을 갖추었던 것 같다.
지난 날 북방의 대륙을 700년 동안 호령했던 위대한 고구려의 군왕들이 묻혀있고 그 성터가 남아 있는 북만주 압록강변의 集安懸을 3번째로 방문하였다. 이 고토를 방문할 때마다 강하게 와닿는 북방 강국의 흔적과 웅비했던 민족의 혼을 가슴으로 느끼게 된다.
마침내 왼편에 우뚝 돌출된 석조물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의 고분인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입구를 찾아 마침내 당도하였다. 일명 장군총이라는 석조무덤이다. 마치 에집트의 피라밋처럼 1톤이상되는듯한 육중한 돌로 축조되었고 돌색은 연한 붉은 색을 띠고 있었다. 한국의 역대 왕들의 분묘에서 찾아 보기 힘든 피라밋형의 석조물일뿐만 아니라 중국의 황제 묘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의 축조 분묘인 것이다. 그 규모는 에집트의 파라오들의 피라밋과는 비교할 수는 없는 것이나, 북방의 기마민족이나 중국 황제들의 것과는 달리 독창적인 것이다.
각 면의 밑에는 황소보다 큰 넙적한 돌들을 기대어 놓았다. 안내인의 말에 의하면 상층 돌들의 하중으로 밑에 쌓아진 기초부분이 밖으로 밀려 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육중한 돌로 기대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그 높이가 약 4,5층 건물 높이 이기에 철조물로 되어 있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지난날 왕의 시신이 안치되었던 석실은 30도가 넘는 날씨에도 냉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안에는 두 개의 돌 침상이 있으나 하나는 높이와 크기가 조금 낮고 작았다. 그것이 왕비의 관이 안치되었던 곳이라고 한다.
꼭대기로 올라가 보니 흙으로 덮여있었다. 최상단의 사방에 축조된 돌에는 구멍이 나있었다. 금관총을 연구한 학자들에 의하면 이 구멍에 나무기둥을 박아 상단에 정자처럼 지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당시의 그 위용이 어떠했을까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그 위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니 발아래 압록강이 흐르고 있고 집안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이 古都邑이 고구려의 수도로서 그 당시에는 國內城이라는 이름으로 400여년동안 번성기를 누리다가 평양으로遷都 하였다.
이곳에 유골을 묻은 왕은 왜 이 언덕에 묘를 세웠을까? 하는 이유를 내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다. 그 묘의 정면은 끊임없이 고구려 세력에 도전해오는 중국 대륙을 파수대의 모습으로 응시할 수 있었을 것이고, 뒤로는 압록강을 배수진으로 삼아 고구려의 강토를 사수하며, 살아 생전에 호령했던 북방 대륙을 지켜내는 수호신이 되겠다는 의지가 강했기에 그 후손이 그 유지를 따라 이곳에 웅대한 석조묘로 축조된 것이 아닌가 상각해 보았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문무왕도 자신이 왕으로 있을 때에 끊임없는 왜구의 침입으로 해안 지역의 많은 백성들이 노예로 잡혀가고 약탈을 당하였으므로 유언하기를 "내가 죽거든 나의 시신을 땅에 장사지내지말고 동해 바다에 장사하여 왜구들의 침입을 막아내는 수호신이 되겠다" 고 하여 사후에 세계에서 유일한 해저묘를 만든 유적이 현재에도 남아있다. 과거에 우리 왕들은 사후에도 나라를 사랑하고 구국하겠다는 신념이 강했던 것같다.
착찹한 마음으로 압록강 넘어 나무가 없는 민둥산과 같은 만포(북한)쪽의 산세를 바라보다가 우리 일행 중 누군가가 무지개가 떠오른다고 외치기에 오른 쪽을 바라보니 산봉우리 뒤에 활모양의 무지개가 선명히 보였다. 탄성이 절로 나왔다. 얼이 빠진 듯 바라보는 가운데 다시 그 무지개위에 또 다른 무지개가 나타났다.
이 신비로운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의 징표처럼 보여졌다.
다음관람지인 "廣開土大王碑"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중국에서는 이 비를 "好太王碑"라고 한다. 이 뜻은 가장 위대한 왕중왕으로 제국의 황제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우리 나라 4천여년의 역사중 대부분이 중국과는 君臣 관계였다. 중국을 천하 통일한 왕은 황제였고 우리 나라 왕들은 분봉왕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고구려의 왕은 이처럼 위대한 칭호를 자주적으로 사용했고 대외적으로도 인정을 받았었다. 고구려 역사 가운데 당나라와 수나라 황제들의 백만대군과도 일당백으로 싸워 승리한 기록이 중국 역사에서도 증거하고 있다.
광개토대왕비 앞에 설 때마다 그 고구려의 위용과 대륙적인 기개에 압도감을 금할 수 없다. 위대한 우리 조상의 역사 기념비가 서있는 이 땅이 다른 나라의 영토가 되어 그 후손인 우리는 외국 관광객이 되어 이 자리에 서있다는 사실이 서글프기만하다.
이 기념석이 발견된 것은 청나라 말기에 어느 농부가 잡초속에서 발견하여 청나라의 이곳 관리에게 신고하므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광개토대왕비의 높이는 약 6.4m이고 글자 크기 하나가 약 15cm로 각인되었고 무게는 약40여톤이나 된다고 한다. 그당시의 고구려인들의 사고의 스케일이 매우 대륙적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기념비라 할 수 있다.
일본이 조선의 식민지화를 역사적으로 정당화 하기 위해 이곳에 일본 현역군인인 밀사를 보내어 과거에 고대 일본이 그 당시에 강대국으로 한반도를 점령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도록 광개토왕비의 글자를 변조하여 놓았던 숨겨진 이야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개토대왕비는 약 1600년의 풍상을 이겨왔으며 고구려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고대사에 자부심을 줄 수 있는 중요한 역사의 사실을 돌판으로 증언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 기념비는 고구려 20대 장수왕(414년)이 그의 아버지인 19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비면에는 모두 44행에 1775자가 새겨져 있다. 그 업적의 요약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왕께서는 재위20년 동안에 64개의 성과 1천4백의 촌락을 정복하였으며 서쪽으로는 료하를 넘어 료서 지방을 공략하고 북으로는 잔존 촌락들을 모두다 통합하였다. 남으로는 백제를 공격하여 남녀 노예 1천명과 세돈 1천필을 조공받았으며 한강 경계선의 백제 영토를 점령하였다.
한편 동남으로는 신라를 위압하여 그의 왕자를 인질로하고 또한 조공을 바치게 하였으며 낙동강 하류 지방의 가야족에 침입해온 왜적들을 격퇴하였다".
이 당시 고구려의 영토는 북으로는 지금의 러시아 연해주와 서로는 만주와 몽고지역과 지금의 심양,대련,할빈과 북경의 화북성 일대까지 광활한 대륙 제국을 세웠고 한반도에서는 한강 이남까지 확보하였다. 이 시대에 고구려는 신라가 왜구의 침략을 받을 때는 지원군을 파견해 몰아내므로 동족애를 발휘하기도 했다.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중심의 축을 이루고 그 주도권을 행사하며 극동을 평정한 제국으로서 "팍스고구려"의 위세를 향유했었다. 그러나 지금 이시대에 우리는 작은 반도국가요 그나마 절반으로 갈라져 있기에 고구려대국의 향수를 더욱 갈구하는지도 모른다. 고구려는 우리 민족의 역사중 700여년(BC 37~AD 668)을 누리면서 북방의 이족들을 몰아내고 중국과 자웅을 겨루는 대륙 국가의 위용을 떨쳤었다.
1천3백년전 대륙 국가로서 기상을 뿜었던 고구려 대국과 분단된 한반도의 모습이 Overlap되면서 다시 한번 우리 민족에게 "Revival Korea"가 이루어지기를 고토의 도읍에서 간절히 기도해 본다.
4. 滿浦앞 압록강 기도와 무지개 언약
우리는 해지기 직전 집안의 건너편인 양강도 만포시가 바라보이는 선착장에 도착하여 배를 타고 중국의 집안과 북한의 만포를 잇는 만포대교까지 이르러 각자가 황폐해진 북한 땅을 보면서 황무한 땅이 하나님의 긍휼과 도우심으로 회복되며 저 땅의 마을마다 예배당이 세워져 굶주리고 헐벗은 동포들이 다 구원받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강변에 비추어진 북한 만포의 모습은 사람이 더 이상 살지 못하는 폐허나 다름없었다. 아파트같은 주택들은 유리창도 보이지 않고 버려진 폐가의 모습이었다. 공장들은 녹슬어 버린 고철더미나 다름없었다.
가파른 산등성이에는 옥수수가 심어져있었고 금년에는 기상 조건이 좋았던지 상당히 푸르고 높이 자란 모습이었다. 산악 지방이라 저 강냉이가 저들의 유일한 1년 양식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저 옥수수들이 알차게 무르익어 강냉이 밥으로 굶주림이 없는 겨울이 되기를 기도했다.
배를 운전하는 기사들이 우리로 하여금 충분한 시간을 갖고 바라보고 기도할 수 있도록 엔진을 끄고 물흐름에 따라 흘러가도록 하여 그 쪽을 향해 잠시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건너 편 강가에는 벌고 벗고 물놀이를 하는 천진스런 아이들은 우리들이 남에서 온 같은 동포인지를 아는지 모른는지 열심히 손을 흔들어 주었다.
기도하기를 원했했던 곳에 와 기도는 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착찹하기만 하였다. 아마 더 이상 가까이 갈 수 없는 금단의 땅이기에 그런 기분인줄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께서 남북의 형제들이 압록강가에서 자유롭게 함께 어우러져 뱃놀이를 할 수 있는 화평의 날을 언제 주실까? 비록 바다건너 험산 준령을 넘어 이곳까지 와 북한 땅을 바라보면서 기도하고 있다는 자체가 통일의 날이 아주 가까이 오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백두산에서 흘러내린 압록강물이 이 강토를 적시듯이 통일의 날에 감격의 눈물이 이 강토를 적실 그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기사가 시동을 다시 걸고 선착장으로 향했다. 내년에 다시 이곳에 오게 될지 아쉬운 마음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우리를 향해 작별의 손을 흔들어 주는 사람이라도 의식하듯이 그렇게 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광경이 만포쪽 산위에 나타났다. 불과 한두시간 전에 나타났던 무지개가 다시 너무도 확연하게 강냉이가 심기워진 산위로 그 땅에서 솟아 나듯이 영롱한 무지개가 아치를 그리면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북녘 하늘을 무지개로 채우는 것같은 장관을 보여 주었다. 그 모습은 정말 하나님께서 북녘의 강토와 우리 민족을 향하신 치유와 통일의 언약을 무지개로 보여주시는 것같은 강한 느낌을 받았다. 모두가 이런 신비스런 모습에 감탄하였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범죄한 인류에게 다시는 물로 심판하시지 않겠다는 언약의 징표로 무지개를 보여주셨듯이 분단되고 고통당하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 더 이상 갈라지지 않고 치유해 주시겠다는 새로운무지개 언약으로 보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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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이제는 우리 민족이 더 이상 둘로 나누어지지 않게 하시고 한민족끼리 6.25와 같은 동족 상잔의 비극이 없게 하옵소서 !
저 무지개가 남북을 잇는 통일의 다리가 되게하여 서로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
무지개로 둘러져 있는 저 북녘 땅이 굶주림의 재앙이 없게 하옵시고 저 땅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요케 하옵소서 !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으로 이제는 징계받는 고난의 민족이 아닌 긍휼함을 받고 위로받는 하나님의 소유된 민족으로 하나님만 경배하는 민족이 되게 하옵소서 !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의 언약이 이 땅위에 속히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로 백성의 언약을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로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케하리라 내가 잡혀 있는 자에게 이르기를 "나오라" 하며, 흑암에 있는 자에게 "나타나라" 하리라
그들이 길에서 먹겠고 모든 자산에도 그들의 풀밭이 있을 것인즉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자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니라 내가 나의 모든 산을 길로 삼고 나의 대로를 돋우리니 혹자는 원방에서, 혹자는 북방과 서방에서, 혹자는 시님 땅에서 오리라
하늘이여 노래하라 !
땅이여 기뻐하라 !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
여호와가 그 백성을 위로하였은 즉 그 고난당한 자를 긍휼히 여김이니라."(사49:8,13)
5. 민족의 성산 白頭山을 향하여
이번 기도회의 정점인 백두산을 향해 길림성 집안현에서 아침 5시에 새벽 기도회를 마친다음 목적지를 향해 출발하였다. 일행을 실은 차는 다시 통화로 나와 백산으로 진입하여 백두산의 입구인 백하로 향했다. 포장도로를 벗어나 비포장도로로 들어서면서 길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트럭이 아닌 일반 차량은 다니기 어려운 상태였다.
너무도 험하고 거친 비포장 상태인지라 새 뻐스이지만 몇 시간만에 더 이상 운행이 불가능할 정도의 고장이 나 부득불 다른 차로 교체를 해야했다. 바꾸어 탄 뻐스는 폐차 직전의 상태였다. 이차로 험한 길을 달릴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곳곳이 도로 공사 구간이었고 다른 차들이 지나갈 때마다 먼지가 앞을 가리웠다. 예상보다 많은 시간이 경과하였다. 그래도 굴러가는 차인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다.
이 도로는 지도에도 표시되어있지 않았고 도로 표시판도 없어 헤메이기도 했으며 타이어도 폐타이어 상태인지라 두 차례에 걸쳐 펑크도 났다. 얼마후 3번째로 펑크가 나 예비 타이어도 더 이상 없었다. 이 도로에는 사람이나 차도 드문드문 보일뿐이었다. 어디를 보아도 첩첩산중이었다. 산중의 해는 이미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타이어 수리점이 이근처에 있을리만무다. 주변은 이미 어두어지기 시작했고 우리 일행만 아니라 기사2명도 난감해했다.
우리 모두는 산중에서 밤을 지새야 할 형편이 되었다. 모두가 답답하여 차밖으로 나왔으나 우리를 반기는 것은 모기 떼였다. 우리는 모기향을 꺼내어 하나씩 들고 있었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얼마후 어디선가 경운기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면서 한 가닥 희망을 가져보았다. 이 경운기는 근처 벌목장에서 일하는 인부들이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차였다.
기사가 차를 세우고 도움을 청했으나 거절되었다. 더욱 난감해졌다. 잠시후 다시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 경운기를 세워 다시 도움을 청하여 상대에서 허락하므로 그 기사는 펑크난 타이어를 싣고 어둠속으로 어디론가 사라졌다.
우리 주변은 한치의 앞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이 되었다. 타이어가 수리되어 오늘중이라도 올것이라는 가느다란 희망에 메달릴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왠지 마음은 편했다. 다리도 아파 길바닥에 주저앉아 있으니 모기가 모질게 달려들었다.
도저히 앉아있을 수 없어 걷기 시작한 것이 자연스럽게 땅 밟기 기도가 되었다. 한 사람이 시작된 것이 모두가 참여하여 모기향을 손에 든채 모기불 기도행진이 자연스럽게 백두산 땅밟기 기도회로 이루어 진 것이다. 서로의 모습도 어두움에 가려 누가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깊은 산중에 보이는 것은 하늘에 별들만이 보이고 있었다.
우리는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왜 이와같이 합심으로 산중 기도를 시키시는지를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차를 통해 역사하신 것이었다. 어떤 분들은 땅바닥에 앉아 손을 들고 회개 기도를 하였다. 내 자신도 인천을 출발하여 몇 칠동안의 과정을 생각하면서 회개 기도를 하였다. 또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도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하였다. 이제는 다리도 아프고 배도 覬았고 모두가 지쳐 땅 바닥에 둘러 앉았다.
어느 분이 북한 선교의 간증을 해달라고 하여 실례들어 간증을 하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이 하나로 모아졌고 찬송도 함께 불렀다. 처량한 처지였지만 어느 때 보다도 은혜스러웠다. 뿐만아니라 탈북자들이 압록강을 건너와 내지로 들어 가기위해 이같은 산중에 캄캄한 밤에도 살길을 걸어 발에 피가 나고 굶주림으로 기진할 수 밖에 없는 그들의 고통스런 처지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체험의 시간이 되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많은 것을 깨닳게 되었고 평생 잊을 수 없는 밤이된 것이다. 하늘에는 무수히 많은 뭇 별들로 차있었고 은하수도 볼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밤하늘의 뭇별들을 통해 친히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것같이 우리들에게도 말씀해 주신 것이었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같으리라 ~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창15:5,7)
아부라함이 나그네의 고달픈 외방 생활에 지쳐있고 약속받은 아들도 없기에 낙심되어 있을 때 장막에 거하는 아브라함에게 깊은 밤에 그를 밖으로 불러내어 그에게 지난 날의 언약하신 것을 다시 말씀하시면서 짐승을 잡아 제물을 드릴 것을 말씀하신다. 이에 순종한 아브라함은 그 짐승들을 잡아 쪼개었다.
이 쪼개진 제물은 곧 하나님 앞에 그 자신을 희생시킨 쪼갠 모습이었다. 쪼개지 않은 제물은 하나님 앞에 열납되지 않는 것이다. "99년 백두산 구국기도" 길을 행하는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직 쪼개지지 않은 모습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음 날 백두산에 올라 구국기도하기 전에 우리의 쪼갠 모습을 갖고 오르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지도 못했다. 한참후 멀리서 경운기 발동소리가 들리고 불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잠시후 모습을 드러낸 경운기에 타이어가 실려있었다. 아마 산중 어느 마을에 타이어 수리점이 있었나보다.
우리는 마치 조난당해 무인도에서 구조선을 맞난 것 처럼 기뻤다. 즉시 타이어를 갈아끼고 달리기 시작했다. 다시 기도했다. "이제는 펑크나지 않고 무사히 가게 하옵소서!" 한참후 불빛이 보이는 산중의 마을이 나타났다. 차는 다시 타이어 수리점에 멈추어 이번에는 아에 튜브를 새 것으로 갈아 끼었다. 시계를 보니 10시가 넘어있었다. 다시 불빛이 보이지 않는 산길을 달렸다. 갑자기 갈림길이 나타났는데 도로 표시판이 없었다.
어디로 가야할 지 알 수가 없었다. 운전사는 대충 감각으로 판단하여 다시 차를 몰았다. 그렇게 달리기를 약4시간 이상을 달렸다. 마침내 오늘의 목적지인 "白河"라는 도로 표시가 나타났다. 얼마후 백하의 허름한 숙소에 도착하였다. 도착 시간은 새벽 2시쯤되었다. 전날 새벽 5시에 출발하여 약 22시간 만에 도착한 것이다.
우리는 그저 안전 사고없이 도착한 것만으로도 감사하였다. 백두산을 향하는 길이 이렇게 멀고도 험할 줄이야 그동안 여러 차례 백두산을 등정했으나 이번은 호된 훈련을 받았다. 온 몸에 흙 먼지를 뒤집어 썼으나 숙소에는 물이 잘 나오질 않아 아래층에 내려가 물을 길어다가 세수만 하고 잠을 청했다.
6. 민족의 성산 "白頭山 天池 구국기도회"
어제 하루 온 종일 집안으로부터 백두산 입구인 白河까지 달려온 여독으로 늦은 잠을 자고 아침겸 점심 식사를 하고 렌트한 찝차로 천지를 향해 출발하였다. 잘 닦여진 비포장 길을 시속 100km이상 달렸다. 전 날의 차에 비하면 달리는 차가 아니라 날라가는 비행기와 같았다.
백두산 천지의 일기는 변화 무쌍하여 천지의 모습을 온전히 본다는 것은 하늘에 맞겨야 한다. 1년중 맑은 날은 약 50여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2년전에는 두 번이나 등정했으나 안개로 인해 전혀 보지 못하고 기도만 하고 내려온 적이 있었다. 올라가는 도중에 좋은 일기 속에 기도회를 갖을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까지 하였다.
천지를 오르는 입구에는 한국인 관광객으로 일대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사륜 구동인 일제 찝차는 씨멘트로 포장된 가파른 천지도로를 거침없이 달렸다. 차가 구비구비 커브를 틀 때 마다 좌로 우로 쏠렸다. 고산 지대라 나무도 없는 고산대 식물과 이끼류가 덮여있어 마치 잘 다듬어진 골프장을 연상케했다. 수 천년을 정결한 푸른 초장의 모습을 지녀온 것이다. 군데군데 골짜기마다 구름이 몰려 있기도 하고 높은 산기슭의 응달 지역은 아직도 두터운 잔설의 이불을 덮고 있었다.
백두산은 높기도 하지만 그 분화구인 천지를 중심으로 균형있는 산줄기의 흐름과 다향하고 위엄있는 산세가 수려하다. 분화구 봉들이 바로 앞에 나타난 듯 하더니 다시금 나선형 도로가 나오며 마치 숨바꼭질 하듯 이리돌고 저리돌면서 요동치듯 돌고 돌아 정상을 향해 치달았다. 쉽사리 그 위용을 드러내지 않았던 천지 봉우리가 마침우리 눈에 들어왔다. 금년이 6번째이나 올 때마다 새로움과 경이로움을 자아낸다. 외국의 높은 봉우리들이 단순한 위압감을 주는 것과는 달리 친근감으로 다가오는 정감은 우리 한민족의 성산이기 때문일 것이다.
더 이상 차가 올라 갈 수 없는 장소에 주차를 하고 모래 언덕을 향해 급히 올라갔다. 천지 봉우리 정상에는 이미 수 백명의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구름 한 점없이 깨끗한 천지의 모습은 태고의 신비로운 신선감 마저 자아냈다. 천지 수면의 가장자리는 더 없는 옥빛으로 비쳐보였고 마치 천지 창조 때 탄생된 듯 신성스러움과 그윽한 신비감을 품고 있었다. 하늘과 맞닿은 백두산 천지의 봉우리들은 한반도와 만주 대륙을 굽어보는 파수대며 한민족을 지키는 수호봉처럼 보였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토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천지의 규모는 둘레가 13km, 남북의 길이가 4.85km, 동서로는 3.35km, 그 최고 수심은 373m이다. 천지의 물은 빗물과 눈이 녹은 물과 지하에서 솟아나는 지하수로 채워져 있으며 어느 지점에서는 뜨거운 온천이 솟구치고 있다고 한다. 천지의 수면이 완전히 해빙되는 시기는 8,9월정도이며 9월중순이 되면 영하로 내려간다.
천지의 물은 한 겨울에도 암반 수맥을 통해 끊임없이 분출되고 여름철에 강우량이 많아도 중국쪽으로 흘러내리는 출구가 있어 장백폭포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계절과 관계없이 항상 일정한 수위를 유지하므로 그 아름다운 비경을 늘 유지 할 수 있다고 한다. 천지의 맑은 정기를 호흡하면서 지금까지의 수고로움과 피곤이 천지를 휘감는 차가운 바람에 다 날라가 버리는 듯했다.
천지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서 가장 높은 천상의 호수이며 이곳에서 발원된 물이 장백폭포를 이루고 냇물을 이루어 만주 길림성쪽으로 흘러 내리면서 다른 지류와 합류되기도 하면서 송화강을 이루면서 구비구비 흘러 만주 벌판을 적시며 흑룡강성 할빈시를 가르는 강으로 흑룡강과(아므르강)과 합류되어 다시 연해주의 평원을 풍요롭게 한다.
북한쪽 백두산에서 발원되는 압록강은 양강도 혜산으로 내를 이루어 흘러 서서히 강의 모습으로 변하여 집안과 단동으로 흘러내려 서해 바다로 빠져나간다. 두만강 역시 백두산에서 발원되어 함경북도 무산으로 흘러 도문과 러시아와 접하고 있는 훈춘을 끼고 흘러내려 마침내 동해와 합류한다. 즉 백두산에서 3개의 강줄기는 중국 대륙과 서해와 동해로 흘러 나가고 있다.
지난 날 고구려의 고토는 타국의 영토가 되었으나, 백두산에서 발원되는 강에 의해 지금도 변함없이 그 고토를 적시면서 도도히 흐르고 있다. 새 천년을 맞이하는 21세기에는 통일된 우리 민족과 교회를 통한 복음의 생수가 백두산에서 흘러내리는 강물과 같이 북방의 대륙과, 동해로, 서해로 흘러 오대양 육대주의 온 세계 만민에게 전파될 것을 확신한다.
우리는 천지에서 금세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99 백두산 산상기도회"를 하기 위해 한 곳에 모여 합심하여 간절히 통성 기도를 하였다.
"우리 민족의 성산인 백두의 산상봉에 올라 하나님께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이 나라의 유구한 역사 반만년 가운데 단일 민족으로 오랜 고난 속에서도 지켜주신 하나님 아직도 분단된 우리 민족을 이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유하여 주셔서 하나된 민족이 백두산 천지에 올라 하나님 앞에 소리 높여 찬양케 하옵소서 !
새로운 세기에는 복음으로 통일된 민족으로 열방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제사장 민족이 되게 하옵시고 하나님의 소유된 거룩한 민족이 되게 하옵소서 !
우리 민족을 택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슥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