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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하는 퇴계원교회(1988-1999년)
(1) 제1대 안영철 전도사 부임
퇴계원교회는 최성훈 전도사가 인사 발령된 1954년 4월 21일 이후로 34년 동안 목자 없이 방목 되어
왔었다. 드디어 1988년 3월 1일에 정식 목회자를 맞게 됨으로 안정되고 활동적인 성장을 거듭하였다. 3
월 5일에 이사한 퇴계원교회 정식 초대 담임 목회자는 안영철(교적 180번) 전도사였다. 안영철 전도사
는 “발로 뛰고 몸으로 부딪히자.”와 “사랑과 믿음으로 하나되자.”라는 목회 철학과 표어를 갖고 목회에
임하였다. 짧은 2년의 시무 기간 동안 중점적으로 활동한 분야와 부흥 방안은 교회의 기초를 다지는
일이었다.
첫째는 새벽기도회의 정착이었다. 새벽 3시 이후에, 할머니들이 교회에서 함께 기도함으로 기도의 분
위기가 교회 전체에 확산되었다. 둘째는 매 안식일마다 이사 오는 교인들로 성도들이 증가한 것이었다.
1988년에는 103명, 1989년에는 71명, 2년 동안 174명의 성도가 증가하였다. 교회는 침례교인 166명에 안
교생 243명으로 안식일에는 교인들로 교회가 가득하였다.
셋째는 어린이 부서 활동이 활발하였다. 1989년 8월에 어린이 성경학교가 끝난 후, 태강삼육초등학교
교사 이성근 집사(교적 191번, 현 퇴계원교회 출석, 퇴계원교회 60년사 편집위원장)가 개척대를 조직하
여 활동하였다. 또한 이때 마승락 장로, 양반호 집사(현 뉴질랜드 거주)와 여러 어린이 교사들이 함께
‘일요 성경학교’를 개최하여 어린이 사업에 활력을 더하였다. 어린이 부서는 당시 교회에서 가장 활발하
게 움직이던 부서로 출석 어린이 수가 120명에 이르렀다. 넷째는 안태규(현 내각교회 목사, 삼육대학원
에서 퇴계원교회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음, 이 논문을 바탕으로 퇴계원교회 60년사를 기록함) 학생전
도사의 지도로 학생과 청년 활동이 역동적이었다. 이때 열심을 보인 학생과 청년들은, 김영주, 전찬두,
배영권, 박일규, 박문규(교적 82, 98번, 두 형제는 박노선 아들로 현재 목사), 여인호(현 동중한합회 목
사), 태해봉, 김애자, 김애경, 여양희(김영두와 부부), 안영미 등 다수가 열심히 활동하였다. 태해봉과 안
영미(교적 197, 208번)는 부부가 되어 현재는 남수석집사와 피아노·전자 오르간 반주로 31년을 봉사하
고 있다. 학생회에서는 연말에 문학의 밤 발표회를 가졌으니, 지금도 계속되는 뜻 깊은 행사였다.
다섯째는 서중한합회에서 주최하는 찬양발표회에 참가하여 최우수상에 입상하였다. 1987년까지 찬
양대복이 없어 ‘찬양대복 마련을 위한 음악회’를 개최하였으며, 찬양을 준비하고 지휘하는데 박문규 형
제의 수고가 많았다. 여섯째는 침례자의 증가를 보였다. 삼육대학 신학과의 공중봉사대의 전도회를 마
치면서 전한봉 목사의 집례로 1988년 6월 25일에 임영자(교적 173번), 이점자, 전찬두 형제가 주님 안에
서 새롭게 거듭났다. 1989년에는 예식목사 남대극 목사의 집례로 침례를 받은 사람은 13명이었다. 4월
15일에 마정미, 장원, 우진명, 조국희(교적 190번, 조성기 장로 아들, 현재 의사)이며, 7월 15일에는 장정
숙, 한현숙, 강성열(교적 196번, 전 삼육대학교 중대장), 태해봉, 박은진, 마선미이며, 11월 25일에는 이
효직, 백병기, 김기용이 중생의 기쁨을 경험하였다.
일곱째는 담임목회자의 사택을 마련하였다. 교회 건축에 대한 부담으로 사택을 마련하지 못하여
1988년 3월 5일에야 강명희 집사의 작은 방으로 입주하였다. 1988년 8월말에는 둘째 성전에 있는 건물
에 방을 들여서 사택으로 꾸몄으며, 1989년 11월 6일에 교회 옆에 있는 방경섭 집사의 건물 1층을 전세
1,300만원에 임대하여 입주하였다. 전세 자금은 농협 융자 500만원, 합회 500만원, 구교회 사택 전세
금 300만원으로 마련하였다. 구교회에는 홍대영(교적 164번) 장로와 장지일(교적 124번) 장로 두 가정이
살고 있었다.
(2) 제2대 정지호 목사 부임
1990년 3월 1일에 둘째 성전 건축 후 2년 동안 수고하던 안영철 전도사는 서중한합회의 인사 발령으
로 안중 교회로 전근하고, 후임으로 2대 담임 목회자로 정지호(교적 300번) 목사가 서울 남부교회에서
부임하였다. 정지호 목사는 남양주 지구장을 함께 역임하여 지구 교회와 유대를 갖고 많은 행사도 주
관하였다. 특히 남다른 추진력과 대외 활동의 폭이 넓어 지역사회 기관장과 유지들과 관계가 좋았다.
정지호 목사는 “마음에서 뜨겁게 우러나는 충성심”과 교회 연합을 강조하며 어려운 시기에 목회를 하
였다.
정지호 목사는 4년 동안 시무하면서 특히 현재의 교회 건축에 관련하여 어려움을 극복하며 정지 작
업을 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정지호 목사는 첫째 성전이 있던 퇴계원리 산 65번지의 보상 문제로 화
신백화점 박흥식 재단으로부터 공갈 협박을 받았다. 결국 1991년 11월 15일에 30여 년간 예배를 드렸던
구교회 건물을 5,500만원에 합의하여 매각하여 성전 건축자금을 마련하였다. 1991년 6월 14일에는 퇴
계원 107-5, 6번지의 둘째 성전(당시 예배 드리는 교회)의 건축자, 임동현씨가 2차에 걸쳐 난동을 부려
화요일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교회에서 법적으로 대응하였으나, 대법원 판결은 교회
에 불리하게 판결되었다. 그리하여 교회직원회에서는 퇴계원 8리 107-5, 6번지의 둘째 교회를 임동현씨
에게 돌려주고, 동북건재 고(故) 김세현 성도가 기증한 퇴계원 218-99번지 땅 104평을 교회가 다시 소
유하기로 결의하였다.
1992년 2월 15일에 교회직원회에서는 퇴계원 산 33번지(현재 교회 자리, 방경섭 집사 소유지였음)에
교회 신축할 것을 결의하였고, 2월 16일부터 모든 행정 문제를 단계적으로 시행하기로 직원회에서 결의
하였다. 건축 예상 평수는 지하 120평, 1층 120평, 본당 70평으로 하였다. 3월 7일에 건축 문제를 위한
금식 안식일을 하였다. 7월 7일에 퇴계원 산 33번지 임야 375평을 건축부지로 2억원에 매매계약을 하였
다. 현재의 성전 건물이 위치한 부지를 계약금 2천만원, 건축 헌금 2천만원, 십일금 2천만원을 공제하
고, 잔금 1억 4천만원은 추후 지급하기로 하였다. 이후에 기존의 묘지를 이장하고, 군부대와 정부로부
터 형질 변경 허가를 받는 모든 어려움을 성도들의 기도와 협력으로,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으로 이루
었다.
(3) 모범 성장 교회
퇴계원교회는 영혼 구원에 앞장을 섰으며, 매년 모범성장교회로 꾸준히 성장하였다. 1990년부터
1993년까지 퇴계원교회에서 침례를 받은 사람은 69명이며, 주님 안에서 거듭나는 경험을 하였다.
특히 1990년 5월 13일부터 19일까지 예언연구 대성회를 주영봉 목사를 강사로 개최하여 건강세미나와
함께 진행하였다. 고르지 못한 일기에도 불구하고 계속 50여 명의 구도자들이 참석하여 마치는 안식일
에 남양주지구 연합 야외예배 및 침례식을 삼육대학 호수에서 갖고 25명이 거듭나는 경험을 하였다.
그 당시 교회 분위기는 성전 건축업자의 난동과 약속 불이행에 의한 법적 소송문제로 시끄러웠고, 교
회 지도자들 간의 소모적인 싸움이 계속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성도들의 선교 사
업에 대한 열성과 기도로 많은 영혼을 주께로 인도하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다.
1991년 1월에 서중한합회로부터 모범 성장 교회로 표창을 받았다. 1990년 한 해 동안 안교생, 침례자,
십일금 등 3개 부문에서 표준에 도달한 교회에 주는 표창을 받았다. 1993년 2월 27일에 서중한합회에
서 주최하는 찬양발표회에 참가하여, 퇴계원교회가 대상의 영예를 안게 되었다. 찬양지휘자로 음악교
육학과 김도명 학생(현재 임송교회 집사)이 수고하였다.
(4) 제3대 정양윤 목사 부임
정지호 목사의 갑작스런 미국 이민 관계로, 1993년 12월 1일에 서중한합회 사릉교회에서 시무하는 정
양윤 목사가 퇴계원교회 제3대 담임 목회자로 부임하였다. 정양윤 목사는 호남합회 교회전도부장을 역
임한 행정력이 탁월한 목사로서 성도들의 형편과 재능에 알맞은 봉사를 할 수 있도록 적절한 일감을 맡
길 줄 아는 지도자였다.
정양윤 목사는 “예수 안에서 하나됨”이라는 목회철학을 갖고, 당시 퇴계원교회에 팽배한 목사와 성도
들간의 갈등과 장로와 집사들간의 오해를 불식하고 교회의 안정을 통한 성장 기틀을 마련하고자 하였
다.‘목사와 성도가 하나가 되어야 교회가 안정되고 성장한다.’‘교회를 위해서 목사는 언제나 양보하고 다
양한 의견을 수렴하여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는 교훈을 실천하였다.
성도들을 한 마음으로 연합하도록 신년 수양회와 여름 수양회를 가졌으며, 현재에도 계속 실시하는
장로ㆍ집사 수련회와 여름철에 장막부흥회의 첫 걸음을 놓았다. 제1회 퇴계원교회 신년 수양회는 1994
년 1월 15, 16일 동안 수안보 조선 호텔에서 46명이 참여하여 실시하였다. 제2회 신년 수양회는 1995년
1월 11, 12일 동안 같은 장소에서 45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직들의 마음을 모았다. 제1회 여름 수양회는
1994년 7월 22일부터 24일까지 강원도 청농원에서 개최하였다. 자가용 29대가 동원되었고 119명이 참
석하여, 원치재 목사를 강사로 뜻 깊은 은혜의 시간을 가졌다. 제2회 여름 수양회는 1995년 7월 24일부
터 26일까지 강원도 정선 계곡에서 55명이 참석하여 하나되는 경험을 나누었다.
이러한 신년 수양회와 여름 수양회는 성도들의 마음을 모으는 동력을 제공하여 지역사회를 위한 구
호봉사에 눈을 돌리게 하였다. 1995년 3월 18일에 지역사회 구호봉사 헌금 모금에 73명이 참여하여
800만원을 돕도록 하였다. 9월 2일에는 KBS 방송국에 수해연금을 위탁하였으며, 연말마다 면사무소,
우체국, 방송국에 불우이웃돕기 자금을 기탁하였다.
(5) 구호 봉사와 국내외 선교
세계 선교를 위하여 운영되는 천명선교사 사업에 관심과 헌신이 이어졌다. 1993년 5월 15일에 역사
적인 부름에 부응하여 퇴계원교회 청년 방한규(방경섭 집사 동생)와 여인호 형제가 천명선교사로 지원
하였다. 퇴계원교회에서 파송한 두 선교사는 봉사 기간 동안 교회를 건축하는 축복을 경험하였으며,
교회에서는 필리핀 선교지역의 교회 건축을 위하여 헌금을 하였다. 또한 최경석 형제(최성훈 목사 둘
째 아들로 퇴계원교회 찬양지휘자였음)와 임유연 여청년이 천명선교사로 16개월을 열대야의 땅 필리핀
에서 봉사하였다. 이들 천명선교사 중에서 여인호, 방한규 형제는 목회자가 되어 성공적으로 봉사하고
있다.
이러한 구호봉사와 헌신적인 성도들의 활동은 오늘날 중국 대륙을 향한 북방선교와 동남아 지역을
향한 남방 선교 활동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
1993년 11월에 정양윤 목사가 부임하여 2000년 3월 전임할 때까지 침례를 베푼 사람은 105명이 된다.
삼육교육을 위하여 몰려온 교우들의 자녀와 교인들의 전도와 사랑으로 개심한 영혼들이었다. 이들 모
두는 현재 교회의 청년들로 교회와 사회에서 퇴계원교회의 자랑스러운 자녀와 목회자, 교회 일꾼으로
봉사하고 있다.
(6) 셋째 성전 건축부지 마련
1995년 7월 1일에 직원회에서 퇴계원리 산 33번지 375평(방경섭 집사 소유지)을 교회 신축 부지로 선
정하고, 헌금하여 매입하기로 결의하였다. 교회직원회에서는 1992년 7월 7일 계약 당시로부터 1995년
현재까지 지불하지 않은 잔액 1억 4천만원과 은행 이자 연 12%로 계산하여 이자액 5천만원, 합계 1억 9
천만원을 지불하기로 결의하였다. 7월 22일에 직원들이 먼저 헌금 약정하였고, 7월 29일 안식일에는 설
교 후 성도들이 헌금을 약정하기로 결의하였다. 교회 신축부지 구입을 위한 헌금의 참여자는 80명이었
고 약정액은 1억 9,015만원이었다.
퇴계원 성도들의 눈물 어린 헌신에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서중한합회 지도자들도 감동이 되
어 성전 건축대지 구입을 위해 1995년 9월 15일에 1,500만원의 지원금을 보내왔다. 작정된 헌금은 성도
의 희생 어린 마음과 함께 순조롭게 진행되어, 12월에 방경섭 집사에게 1억원을 지불하였고, 1996년 1
월 30일에 9천만원을 김정희 집사(방경섭 집사 어머니)에게 지불하였다.
(7) 둘째 성전에서 이사함
1996년 3월 14일에 퇴계원 218-99(104평)을 홍기수 집사(현 장현교회 출석함)에게 4억 2천만원에 매
매계약을 체결하고, 7월에 잔금을 받았다. 이에 따라 3월 30일에 정기직원회에서 퇴계원리 산 33번지에
건축 허가를 득하는 대로 성전을 건축하기로 결의하였다. 교회 건축위원으로는 정양윤 담임목사, 박노
선 수석장로, 변종아 서기, 도승리 재무, 윤화현 남수석 집사, 김시연 여수석 집사, 차철진 장로(미국 올
림픽교회 출석함)가 선임되었다.
한편, 대법원 확정 판결로 그 동안 예배를 드렸던 퇴계원 107-5번지 둘째 교회 건물은 더 이상 사용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를 건축하는 동안 학생 교육관과 어린이 예배 장소는 매각한 교육관을
홍기수 집사의 배려로 1997년 3월까지 무료로 사용하도록 승낙을 받았다. 장년 예배 장소는 김창훈 성
도가 소유하는 상가건물 사무실(2층 약 50평)을 무료로 대여받게 되었다.
4월 20일 안식일은 손님의 날로 운영하여 모든 성도들에게 알리고 마지막 예배를 드림으로 퇴계원
107-5, 6번지의 둘째 교회에서 8년 10개월의 생활을 마쳤다. 1986년 7월 27일 첫 삽을 뜨고, 1987년 6
월 13일에 새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여 1996년 4월 20일까지 둘째 성전의 생활을 마감하였다.
이날 마지막 집회에 참석한 모든 성도들은 눈물과 회개와 재결심의 시간을 가졌다. 1996년 4월 21일 일
요일에 이사하여, 4월 23일 화요일부터 임시 집회소에서 예배를 드렸다.
(8) 성전 건축 준비 과정
4월 27일 정기 직원회에서 신축 성전 규모를 비밀 무기명 투표로 결정하였다. 결정 사항은 지하 1층,
지상 2층, 본당 중 2층 30평으로 100평씩 3층, 총 330평으로 하고, 사택은 25평 정도로 건물 안에 함
께 건축하며, 냉난방 시설도 본당 및 필요한 공간에 설치하기로 하였다. 5월 25일 교회직원회에서는 본
당을 마름모형으로 하고, 예인 건축설계사무소에 평당 5만원에 의뢰하기로 결의하였다. 5월 27일 남양
주군으로부터 건축예정부지가 산림지역에서 일반주거지역으로 도시 계획이 변경되었다. 이때 모든 성도
들은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에 깊은 감사를 드렸다.
(9) 교회 건축의 걸림돌
1996년 6월 18일 도로 현황 측량 결과 성전 건축부지와 접한 도로가 없는 맹지(盲地)로 확인됨에 따
라, 건축이 불가능하여 설계 및 건축 계획이 잠시 중단되었다. 7월 19일 국방부 장관 앞으로 산 29-5의
약 40평에 대하여 도로부지로‘대지 불하 및 도로 사용 청원서’를 민원으로 제출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교회는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였고, 특별심야 기도회를 개최하였다.
9월 13일에는 의정부에 위치한 육군 제2167 부대장으로부터 1차 회신으로 고려 사항이 많아 불가함
을 통보 받았다. 10월 10일에 성도들의 끈질긴 기도에 응답이 이루어졌다.‘군수 37480-311호 통지문’으
로 민원 처리 결과에 대한 회신을 받았다. ‘당 부대에서는 교회의 신축과 관련 부대 차량의 통행이 제한
받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교회 신축간 사용되는 공사 차량의 진입과 공사 완료 후 목회자용 및 소수의 교
회 실무자의 차량은 허용하되, 일반 신도의 차량 주차가 불가능하니 일반 신도의 경우는 진입로 외의
주차장을 사용하도록 하는 조건 하에서 부대 진입로 사용이 가능함을 통보 합니다.’(정양윤 목사의 글
에 자세히 기록됨).
이 소식을 목마르게 기다려 온 교회는 온 성도들과 함께 “할렐루야, 아멘. 주님, 감사합니다.”를 반복
하면서 교우들의 기도에 응답하신 주님을 목소리 높여 찬양하였다. 중단되었던 토목 설계와 건축 설계
를 10월 16일에 계약하였다. 토목 설계비는 380만원으로 ‘삼화 토목 설계’에, 건축 설계비는 평당 5만원
으로 ‘예인 건축사무소’에 의뢰하였다. 10월 26일 안식일에는 전교인을 대상으로 성전 건축 설명회를 가
졌다. 정기 직원회에서는 성전 건축을 습기와 자연배수 등 자연환경을 고려하여 지하층이 없이 지상으
로 건축하기로 결의하였다. 12월 27일에 남양주시청으로부터 토목 형질 변경 공사를 포함하여 건축 허
가서를 받았다.
1997년 2월 5일 수요일에 직원회에서는 견적서를 검토한 결과 시공업자로 정원개발 박노중 집사를 선
정하였다. 건축비는 6억 4,600만원으로 하고, 전기 공사는 유만종 장로가 하며, 감독은 오남리교회 안
대식 장로가 하기로 결의하였다.
(10) 2, 3차 건축헌금과 셋째 교회 헌당예배
1997년 2월 17일부터 22일까지 한 주일 동안 박영호 목사를 강사로 사경회를 갖고, 22일 마치는 안식
일에 성전건축 서약을 하여, 2차 헌금으로 성도 171명이 3억 680만원을 약정하였다. 초등학생 1,300원
으로부터 최고액 1,500만원에 이르는 모든 성도들의 헌신과 기도가 성전의 건축 자금으로 부어지고 쌓
아졌다.
3월 1일에 서중한합회장 김동준목사, 합회 임원과 성도 70여명이 모여 뜻 깊은 성전건축 기공예배를
드렸다. 10월 11일에 성전건축 및 성구마련을 위한 3차 건축헌금 약정을 하였다. 11월말까지 완납하는
조건으로 성도 82명이 참여하여 6,937만원을 약정 하였다. 강대상, 앰프, 스피커, 전동 스크린, 본당 의
자들 모든 성구와 비품이 완비되어 헌당예배를 드리도록 모든 성도가 헌신 봉사하였다. 특히 미국에 이
민한 전상호(교적 166번) 장로는 1,000만원 헌금을 하여, 사랑의 기념물로 본당에 오르내리는 계단의
유리창과 설교단 위 삼각형 유리창에 스테인드 글라스(stained glass·색유리창)를 설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