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박영애(김세원 목사 사모)
김창훈 삼육교육
초등학생인 김창훈을 삼육초등학교로 전학하였다. 김세원 목사와 나의 간절한 권고를 받고, 마포구에서 서울삼육초등학교 근처로 이사하여 청파초등학교로 학교를 다녔다. 자녀의 인성교육을 위하여 김세현 사장은 작업복 차림으로 삼육초등학교 정문에 가서 등교 시각부터 하교 때까지 살펴보았다. 학생들의 모습, 말씨, 인사하는 것과 선생님들의 태도를 살펴보았다. 하교가 마친 뒤 김사장은 행정실을 찾아가서 전입 상담을 하였다. “어떻게 하면 내 자녀를 이 학교에 다닐 수 있느냐?” “교인이 아니시면 기부금을 내면 되는데 액수가 많습니다.” 당시로 몇십 만원(1965년도 짜장면이 60원, 돈암동 8평 아파트가 36만원임)이 드는 기부금을 요구하였다. 김사장은 호주머니에서 기부금을 꺼내서 전입 절차를 밟았다. 아들 김창훈과 김명순(도현석 목사의 사모가 됨)이 서울삼육초등학교, 서울삼육중고등학교와 삼육대학교까지 삼육교육을 받는 길이 열렸던 것이다.
104평의 헌납
50대도 안되던 김세현 사장은 시멘트와 석회 등 건축자재 운반으로 폐가 나빠져 건강이 좋지 않았다. 김세원 목사와의 성경 공부로 퇴계원교회에 출석을 하였으나 부부가 분망한 사업으로 교회 출석을 등한시하였다. 폐기종이 너무 심하여 수원교회에 시무하는 김세원 목사댁을 찾아와서 요양하면서 지냈다. 성경 공부를 하고 용인교회 이강천 전도사를 찾아가서 성경공부와 기도를 하였다. 건강이 회복되자 퇴계원으로 돌아와서 건축자재상 운영을 계속하였다. 결국 폐기종이 악화되어 경희의료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김세원 목사와 나는 병간호와 성경공부가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되어 김창훈을 설득하여 서울위생병원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내가 24 시간 간병을 하면서 찬미를 불러주었다.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주 내게 순풍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내 걱정 근심을 없게 하시고 내 주여 잠든 내 영혼을 곧 깨게 합소서 이 세상 고락 간 주 뜻을 본받고 내 몸이 의지 없을 때 큰 믿음 줍소서” 김사장은 건강 회복은 체념하였고 영원한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갖고 살았다. 김사장은 “나는 생전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이래도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하면 좋을까?” “김 사장이 할 일은 퇴계원교회를 건축할 수 있도록 교회에 부지를 헌납하면 아니되겠습니까?” “아 참, 은배 엄마가 말하는 대로 하면 하나님 앞에 뜻 있는 예물이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퇴계원역 앞에 700평의 땅 중에서 가장 좋은 구역 104평을 하나님께 헌납하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다음날 나는 수원에 가서 옷가지를 가지러 가고, 이성숙 조카가 간병하게 되어, 밤샘 간호는 처음으로 하는 셈이었다. 그때 이성숙 조카가 출석하는 장로교회 목사와 장로들이 병문안을 왔는데, 104평을 장로교회에 헌납하기로 약속을 번복하였다.
저녁에 내가 병실에 들어서자, 김 사장 부인은 내게 말하기를 “아주미, 우리 땅 104평을 장로교회에 기증하기로 했소.”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기가 막혀서 “창훈이 아버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제 퇴계원 안식일 교회 건축을 위해 헌납하기로 약속했지 않습니까? 하시려면 안식일 교회에 헌납해야지 어찌 장로교회입니까? 아이들이 다 삼육학교에서 공부하고 있고, 외삼촌이 안식일 교회 목사이고, 그분의 인도를 받아 창훈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 안식일 교회에서 침례(1980년 1월 16일)를 받았는데 왜 장로교회입니까?” 강직한 김 사장은 난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김 사장은 “은배 엄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나는 “좋습니다. 이제 모든 일은 나에게 맡기세요. 내일 장로교회 목사와 장로와 교인들이 오면 내가 말할 터이니 모든 것을 나에게 맡기십시오.”하고 말했다. 간호를 하면서 다음 날을 기다렸다. 그날 밤 안식일 교회의 특성을 알려주고, “교단 본부의 재단 사무실에서 실장님이 오셔서 정식으로 헌납 증서를 작성할 것이다.”라고 말해주었다. 김 사장 부인 이성숙은 일시적인 충동에 큰 장로교회에 미혹되었지만, 다시 생각하니 아주미가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모르겠소. 아주미가 하라는 대로 따르겠소.”라고 말했다.
밤새 잠을 자지 못한 채, 새벽에 교회를 찾아가서 기도를 하였다. 약속한 시간에 장로교회 목사와 장로와 집사들이 병실 안에 가득히 서서 땅 헌납 예배와 동시에 법적 조치를 위한 유언과 공증 서류를 가지고 왔다. 이때에 나는 그들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 말하였다. “저는 김세현 사장의 외숙모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어서 “저는 지금까지 환자의 간병을 맡아 수고하였습니다. 특히 김세현 사장은 나와 외삼촌인 안식일교회의 김세원 목사에게 이미 땅을 안식일 교회에 헌납하기로 약속하고 오늘 오후에 본 교단 법인실에서 나와서 법적 인수 절차를 하기로 되었습니다. 그런데 김세현 사장님의 부인께서는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귀 교회에 헌납하겠다고 언질을 준 것은 실수요 대단히 미안한 일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김 사장 가족들은 이미 안식일 교회에서 침례를 받은 교인으로 등록된 신자들이고, 이성숙 사모의 외삼촌은 현직 안식일 교회의 김세원 목사입니다. 이러한 관계로 오늘 본 교단 본부 재단실에서 인수 절차를 위하여 김세현 사장을 만나기 위해 목사님과 직원들이 오실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그들은 유구무언으로 너무나 큰 실망 가운데 돌아갔다.
성도 김세원 장례식
병은 갈수록 악화되어 임종이 차츰 다가왔다. 그날은 찬미를 불러주는데, “은배 엄마, 왜 찬미를 불러? 저것이 안보여? 길이 세 갈레로 나누어 있는데---” 나는 즉각적으로 임종이 다가온다고 느끼고 김봉호 목사와 조카 이성숙, 아들 김창훈 등 가족을 불러모았다. 찬미를 불러주었다. 가족들이 다 모이자, 김세현 사장은 “여보, 창훈아, 은배 엄마 가족을 본 따라 신앙으로 살아라. 형님, 하나님을 믿으세요.”하고 유언과 같이 말하였다. 임종은 집에서 해야 한다는 당시의 관습에 따라 오전 11시 30분에 산소호흡기를 부착한대로 집으로 퇴원을 하였다. 집에 도착하여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가족들의 통곡과 함께 김세원 성도는 주안에서 잠이 들었다. 1980년 2월 28일 목요일 오후였다. 큰 아빠와 이성숙, 다른 가족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김창훈을 내세우고 5일장을 고집하여 장례를 치루었다. 3일장을 하면 토요일에 발인과 하관식을 하여야 하기에 5일장을 주장하였다. 퇴계원교회의 교적이 있고 출석을 한 김세원 사장이지만 교회의 교인이 많지 않아서 장례식을 주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우필원 목사가 시무하는 천성교회에 도움을 요청하여 많은 교인들이 찾아오고 발인하는 장례식에는 유형환 한국연합회장까지 참석하여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루었다. 십자가 형상으로 꽃상여를 만들고 수많은 교우들의 동행속에 퇴계원을 한 바퀴를 돌고 장지로 향하였다.
김세원 성도가 죽기 전에 기증한 104평의 판매대금으로 현재의 성전을 건축하게 되었다. 교회의 입구에 위탁기념패가 성도 김세원의 헌납 기념을 말해주고 있다. 이제 더 바라기는 김창훈이가 퇴계원교회에 출석하면서 교회의 일꾼으로 살아가는 것을 바랄 뿐이다.
김창훈이 보낸 문자
마지막으로 김창훈이가 보낸 문자를 올린다. “할아버지 할머니! 평안 하신지요? 제가 먼저 안부를 여쭤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저희 가정을 위해 베풀어 주신 염려와 기도 덕분에 저희는 모두 잘 지냅니다. 어제가 아버지 생신이셨습니다. 살아 계시면 94세입니다. 저의 기억은 항상 50세의 아버지 모습에 멈춰 있습니다. 세월은 시위 떠난 화살 같아, 제가 벌써 67세를 바라봅니다. 엄마는 기억의 저편을 왕래하며 사랑하는 남편을 만날 준비로 행복해하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께 못한 효도를 엄마에게 몇배로 해드려야 했지만, 이제 철이 들고 보니 후회의 눈물만 흐릅니다. ‘어버이 봉양 하려하니 가고 아니 계시더라.’는 옛말을 떠올리며 산소를 맴돌다 옵니다. 수많은 꽃들이 불효의 아픈 마음을 위로 합니다. 한 세대는 가고 또 한 세대는 옵니다. 자연의 이치대로... 할머니, 할아버지! 저희 가족을 위한 기도에 항상 감사드립니다. 봄철 환절기에 건강 조심하시고, 쉬 뵙겠습니다. 김창훈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