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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유래지의 기록을 보면서 어렷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몇 분들의 도움을 받아 일부 수정하거나 보충했습니다. 죽청리보다는 어렷을때 들었던 마을 이름이 친숙하여 대포리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으며 웃대포리와 아랫대포리를 하나로 묶었습니다. 그 것은 두 마을이 원래 광산이씨 자작일촌으로 마을의 형성과정이나 역사 입도조가 같은데 마을의 규모가 커지면서 위와 아래마을로 구분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통적인 역사는 하나로 묶었고 두 마을이 다른 부분은 마을을 밝혀서 구분하였습니다.
이 글을 보신 종친님들께서는 위의 내용 중 오류가 있거나 수정 보완이 필요한 내용에 대해서도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대포리마을(竹靑里)-웃대포리, 아랫대포리》
●지명유래
대포리마을은 처음 광산이씨 자작일촌으로 한 마을이었으나 마을이 커지면서 위쪽을 웃대포리, 아랫쪽을 아랫대포리로 나누었으나 같은 일가였으므로 통상 대포리라 불렀다. 그러나 1789년 호구 총수에는 죽청리(竹靑里)로 기록이 되어 있다. 이는 죽청마을 주위에 시누대가 많이 자라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대포리라는 이름은 그 이전부터 사용했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는데 처음 대푸른마을로 부르다가 대푸리로 줄여서 부르던 것이 대포리로 변했을 것이고 한자가 상용어인 당시 기록으로 남기려다 보니 대죽(竹)자와 푸를청(靑)자를 취하여 죽청리로 썼을 가능성이 있다. 그 이유는 자연마을 이름은 자연 발생적이므로 순우리말로 부르다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한자어를 취하게 되는 것이 통상 관례였다. 그런데 최근 50년 전까지도 마을 사람들은 물론 인근 지역에서도 죽청리라는 이름보다는 대포리라는 이름을 주로 사용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대포리는 큰 포구였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코부데기와 그 주변 바위에서 물고기를 낚았다고 전하며 우물에서 짠맛이 나 식수로 사용하지 못한 사례가 있다. 또한 화순군청 향토 사료 ‘마을의 형성’에서 상고시대 화순지역이 바다였을 증거로 바다와 관련된 마을과 지명들이 많음을 들고 있어 고증이 필요한 이름이다.
최초 죽청리로 기록된 사료를 보면 1789년 호구 총수에 능주목(綾州牧) 북면(北面) 죽청리(竹靑里)로 되어 있다. 1912년 지방 행정구역 명칭 일람에는 능주군(綾州郡) 오도면(吾道面) 죽청리(竹靑里), 1913년에는 화순군(和順郡) 오도면 죽청리로 편재만 바뀌었을 뿐 마을 이름은 변함이 없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대곡면, 오도면, 화남면을 합하여 화순군 도곡면으로 개편하면서 화순군 도곡면 죽청리(竹靑里)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 아랫대포리는 4개 반, 웃대포리는 2개 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산물(쌀), 특산물(참외, 토마토, 포도, 딸기, 메론), 주 소득원은 벼농사 외에 비닐하우스에 의한 특수작물 재배로 고소득을 얻고 있다.
●성씨(기존자료) : 웃대포리(上竹靑里) 광산 李(26), 광산 金(1), 전주 李(1)
아랫대포리(下竹靑里) 광산李(75), 김해金(3), 창녕曺(2), 제주梁(1)
<참고 자료>대포리마을 주민 현황(도곡면사무소 확인)
2023. 8. 23 현재
구 분 | 세대수 | 남 | 여 | 계 | |
아랫대포리 | 72 | 69 | 64 | 133 | |
윗대포리 | 26 | 22 | 16 | 38 | |
계 | 98 | 91 | 80 | 171 |
●마을 위치와 형성 과정
마을의 방향은 남동쪽을 향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화순천이 흐르고 능주면 백암리, 만수리와인접해 있으며 서쪽으로는 미곡리 구사마을, 남쪽으로는 화순천과 지석천이 만나는 두물머리가 있다. 이곳에서 만난 물은 지석천을 이루어 영산강으로 흐르고 두물머리 주변에는 너른 평야가 있다. 지석천 큰 다리(竹靑大橋)를 건너 들판을 지나면 대곡리가 있고, 북쪽으로는 화순읍 주도리와 접하고 있다. 동편에 있는 안산, 수게재를 넘으면 화순천과 자산들(잣들)이 있고, 서쪽으로는 뫼봉재에서 뻗은 산줄기가 윗대포리를 휘감아 돌아서 아랫대포리까지 감싸고 있다. 남쪽으로는 아래 대포리를 지나 죽청대교(양림보 위) 건너에 건넌들로 이어지고 북쪽으로는 뫼봉재 아래 선산이 있고 그 아래 저수지가 있다.
구전에 의하면 고려말에 상곡 죽청제 저수지 자리에 양씨, 허씨, 김씨, 이씨가 거주하였다고 하는데 광산이씨가 터를 잡게 된 것은 1589년 경이다.
1589년경 광산이씨 李大立(1579~1636)이 기축사화를 피하여 남평에서 거주하다 입향하였다. 기축사화란 조선 선조 22년 서인 정철이 중심이 되어 정여립 장군에게 역모죄를 씌워 동인 영수인 이발을 함께 묶어 삼족을 멸한 옥사이다. 훗날 선조는 정철을 '독철(毒澈)'이라 부르며, 악독한 정철이 내 선량한 신하들을 다 죽였다(毒澈殺我良臣)며 정철은 동인들의 씨를 말리다시피 하였다며 동인백정(東人白丁)이라고까지 불렀다.(조선왕조실록 선조 23년 3월 1일 기사)
1650년경 국가의 명으로 여씨, 김씨, 이씨가 현재의 마을 터로 이거 입향하였다고 전한다.
1860년경 제주양씨가 월곡마을에서 입향하였다가 후손이 아랫대포리로 이거하였다.
1910년경 김해김씨 김성태(1880~1964) 가 한천에서 거주하다가 아랫대포리로 입향하였다.
1930년경 창녕조씨 曺成基(1907~1964)가 나주 다도에서 거주하다가 아랫대포리로 입향하였다.
1970년경 전주이씨 이영춘(1934~ )이 영암에서 거주하다가 웃대포리로 입향하였다.
이전에 광산김씨가 거주하다가 이거 하였다.
2020년대에는 도청 이전설과 함께 비봉포란형(飛鳳抱卵形) 명당 터로 인재가 많이 나오는 마을이라는 언론 보도 이후 외지인들이 들어와 살면서 여러 성씨들이 더불어 살고 있다.
●유물. 유적, 고문서
<웃대포리> 죽산사(竹山祠, 1946년 건립, 李先齊, 李亨元, 李達善, 李公仁, 李伯虎 등 음 9. 20 향사), 죽산강당(竹山講堂), 봉명재(鳳鳴齋)
<아랫대포리> 李京休 家屋 아랫대포리 마을 중앙부에 소재한 가옥으로 조선시대 후기(1775년)에 지은 'ㄷ'자형 집이다. 2004년 9월 20일 전라남도의 민속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되었다.(367번지, 1755년 춘3월 건립), 동백나무(367번지, 수령 2백년), 만괴정(晩槐亭, 1927년 건립 단층의 팔작지붕 골기와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1589년(선조 22)의 己丑獄事(鄭汝立謀逆事件)에 被禍된 光州李氏 李潑의 伯父 李伯虎의 孫인 竹溪 李大立이 13세에 이곳으로 피난 은둔하여 生命을 保全하고 崔希文의 女壻가 되어 정착하게 된 내력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9代孫 李京鎬가 건립한 것이다.), 북애정(北涯亭, 처음 龜沙里에 梁斗南 건립, 申酉年 후손 梁在鶴이 移建 재각으로 사용) 竹溪居士光山李公遺蹟碑(1960년 초건, 1989년 개건, 높이 250㎝, 폭 80, 두께 30, 李大立碑), 죽청제 저수지(1944년 축조), 죽청대교(1968년 건립),
●공공건물
죽청분교(1956. 7. 12 4년 제 분교로 개교, 1969. 3. 1 도곡동국교로 승격, 1992. 3. 1 죽청분교로 편입, 1997. 3. 1 죽청분교 폐지 본교로 통합 후 매각하여 현재 전기기술학원으로 운영)
●민속놀이. 전설. 민담
⊙원래 마을터는 죽청제 저수지 자리에 있었는데 1650년경에 지금의 마을터로 이거하였다.
⊙예로부터 시누대가 주변에 자라고 있어 이를 이용 능주 관아에 사용할 화살을 만들었다.
⊙일본인 자산이와 설정이가 자산보와 설정보를 막아 밭농사 위주의 생활을 논농사 위주로 전환시켰다고 한다.
⊙아홉바위 전설 : 비봉포란 형국중 봉이 알을 품고 있는 형세라 말하는데 아홉 개의 바위를 봉의 알이라 부른다. 전설에 의하면 언젠가는 이곳에서 고위 관료 9명이 나올 것이라 하여 1955년에는 마을에 분교장을 세우는 등 주민들의 교육열이 대단히 높았다.
⊙예지몽 : 마을의 어르신 꿈에 종괘산에서 뻗은 박넝쿨이 온 마을을 덮었는데 박 열네 덩이가 열려 있었다. 그것은 이 마을에서 고위 관료가 나올 꿈으로 그중 하나는 타성의 것이라 하였는데 1961년 아랫마을 양씨 집안에서 양회경 대법관이 나왔다.
⊙농악 : 정월 대보름이면 시암굿, 마당 밟기를 하였다. 상쇠로는 이천석이 잘 하였다.
⊙강강수월래 : 정월 대보름 또는 추석날 밤에 부녀자들이 하였다.
⊙줄다리기 : 정월 대보름이면 위, 아래 마을 주민이 모두 모여 남, 여별로 각각 두 편을 나누어 줄다리기를 하였다.
⊙기우제 : 가뭄이 극심하면 안산 용봉(구랭이산)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아랫대포리의 풍수지리 및 주요 지명
⊙비봉포란형 명당 : 북쪽 아릿산 뫼봉재로 흘러내린 산새가 봉황이 알을 품고 나는 듯한 형국이라는 뜻
⊙화다산 : 봄이면 산과 주변에 진달래와 철쭉, 복숭아꽃이 피는 모습이 아름다워 부른 이름으로 진등이라고도 불렀다.
⊙아홉 바위(고인돌) : 작은 뒤까끔(뒷동산)에서 서편 고샅 이경휴 가옥에 이르는 아홉 개의 바위를 봉의 알이라 부른다. 언젠가는 이곳에서 고위 관료 9명이 나올 것이라 하여 1955년에는 마을에 분교장을 세우는 등 주민들의 교육열이 대단히 높았다.
⊙잠두봉 : 안산(내산)의 봉우리가 동내에서 볼 때 누에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용봉 : 안산(내산)의 봉우리가 만수리 수동에서 볼 때 용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잿등 : 만괴정 정각이 있던 작은 동산의 꼭대기로 큰대밭에서 코부댁에에 이르는 능선을 말하며 서편 고샅 웃터에서 둔전들과 새들로 넘어가는 지름길이었다.
⊙두레등 : 코부데기와 큰뒤까끔(뒷동산)에서 두레박 줄을 잡고 물을 퍼서 화닥실로 넘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전한다.
⊙건장등(굴) : 화다산 서쪽 저수지 아래로 이어지는 양씨 문중 산자락을 말한다.
⊙코부데기 : 거르목(거리목)에서 서편 고샅 가기 전 만괴정 정각으로 이어지는 골목 정상의 코처럼 나와 있는 바위를 이르며 옛날 낚시를 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화다실 : 진등(화다산) 동서쪽을 이르는 말로 꽃이 만발한 산골짜기라는 뜻으로 지금은 화닥실이라고 부르는데 화다실에서 변형된 이름으로 추정한다.
⊙고라실 : 웃대포리에서 아랫대포리로 내려오는 논에 항상 물이 고여 있어 붙여진 이름
⊙절골 : 아랫대포리 화닥실 저수지 위쪽 골짜기로 절이 있었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큰 뒤까끔 : 안 고샅 북쪽 끝 박씨 문중 벌이 있는 뒷동산
⊙작은 뒤까끔 : 서편 고샅 북쪽 끝으로 고인돌이 있는 작은 뒷동산
⊙거르목(거리목) : 마을 앞 삼거리로 인근 마을 사람들이 지나는 길목을 말함
⊙동편 고샅 : 고라실로 이어지는 골목길로 중간에 큰 뒤까금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안 고샅 : 세 고샅 중 가운데 골목으로 중간에서 큰 뒤까끔과 작은 뒤까끔으로 갈라진다. ⊙서편 고샅 : 서쪽 골목으로 중간에서 웃태(웃터)와 만괴정 정각길로 갈라진다.
⊙물방거리 : 현 죽청 표지석 근처 새들 수로 건널목 위쪽에 물레방앗간이 있었던 삼거리
⊙비석거리 : 안산 잠두봉 아래 산자락을 돌아들어 오는 길로 1, 2구로 갈리는 비석 앞 삼거리
⊙종터 : 안산 중턱에 청상과수 어르신이 살던 오두막 옆에 종을 달았던 터를 말하는데 지금은 죽청광림교회가 세워져 종소리 대신 십자가가 불을 밝히고 있다.
⊙바위꿈터 : 승환 종친의 조부님 꿈에 아홉 바위를 잘 보존해야 아홉 고관이 나온다는 꿈을 꾸었다는 집터
⊙자산들 : 만수리 수동에서 잣들 다리로 이어지는 농로 남쪽에 위치한 들로 자산이라는 일본인에 의해 개간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잣들이라고 부른다.
⊙둔전들 : 이전에 군사들이 주둔하면서 경작하던 들이라는 이름으로 아랫대포리에서 건넌들로 나가는 도로 우측 들판을 이른다.
⊙새들 : 지석천 변을 개간하여 새로 만든 들이라는 뜻으로 모래땅이었으며 둔전들보다 약 1m 정도 낮은 위치에 있었으나 현재는 경지정리로 언덕이 없어지고 같은 평지가 되었다.
⊙거넌들(건넌들) : 지석천 건너에 있는 들로 죽청대교가 없던 옛날에는 매년 외나무다리를 만들어서 건넜다.
⊙둔전보 : 둔전들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보로 화순천 새보 위 수개재 밑에 있으며 바윗돌로 막았다.
⊙자산보 : 잣들(자산들)의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보로 둔전보와 새보 중간에 있다.
⊙새보 : 새들의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화순천 맨 아래에 만들었으며 시멘트로 만들었다.
⊙양림보 : 건넌들의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지석천에 만들었는데 수로 중간 소금쟁이(남정리 2구)에 설치한 정미소에서 물레방아를 돌렸으며 현재는 죽청대교 밑에 보를 막았던 돌이 남아있다.
⊙말 무덤 : 경지정리가 되지 않았던 80년대까지만 해도 둔전들 중간에 말 무덤이라 불렀던 길이와 높이가 약 5m, 2m 정도의 길쭉한 동산 2기가 있었는데 뾰족한 큰 바위가 하나씩 올려있는 모양이 멀리서 보면 말귀를 닮았다.
⊙주내 툼벙 : 현재 하수종말처리장 앞으로 삼각지 지점에 생긴 물웅덩이를 말하며 능주에서 흐르는 냇물(주내)이 고인 웅덩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거르묵시암(거리목샘) : 거리목 앞 회관 동편에 있는 우물로 동편 고샅 중 고라실을 제외한 주민의 유일한 공동 우물로 간이상수원으로 사용하다 현재는 터만 남음
⊙서당시암(샘) : 화닥실 골짜기 위쪽 샘으로 서편 고샅 웃태(윗터)에 살던 사람들의 식수원이었는데 매년 겨울에 양씨 제각에서 서당을 열어서 이용했기 때문으로 추정함
⊙도내기시암(샘) : 지석천 준설과 제방 축조 전 하천부지 사이를 흐르는 작은 개울 중간에서 온수가 솟아났는데 현재 건넌들 방향 죽청대교 밑 하천 약 10m 정도로 추정한다.
⊙여시뱀이 : 둔전들 서쪽 건장굴 산마루에 있는 논으로 여우가 넘나드는 길목의 논이라는 뜻
⊙복새뱀이 : 새들을 개간하기 전 둔전 언덕 아래 새들 위쪽에 있는 사이의 논
⊙황새뱀이 : 잣들(자산들)에 농지정리가 되기 전 논 모양이 황새 꼬리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큰대밭 : 서편 고샅 웃태(웃터) 뒤까금에서 정각까지 이어지는 대나무 숲
●웃대포리의 풍수지리 및 주요 지명
⊙아릿산 : 마을 북쪽에 있는 문중산으로 산줄기가 주봉에서 마을을 좌우로 감싸고 뻗어 내렸다.
⊙내산 : 안산이라 부르며 마을 동쪽에 있는 산으로 주봉에서 남쪽 들판을 향해 아랫대포리 물방거리에 이르고 있다.
⊙공동산 : 고려시대 양씨가 일가를 이루고 살았던 곳으로 현재 죽청저수지 서쪽 공동묘지가 있는 산
⊙사모자리 : 공동산과 동쪽으로 연결된 참모정터가 있던 산을 말한다.
⊙뒷산 : 웃대포리 뒤에 있는 산이라는 뜻으로 불렀다.
⊙종괘산 : 마을 북서쪽 원화리 뒤에 있는 산으로 우리 마을을 감싼 듯하고 '종괘산에서 뻗어 내린 박넝쿨이 마을을 덮었는데 열다섯 덩이의 탐스러운 박이 열려 있어서 고관이 나올 것이라는 종친의 예지몽에 나오는 산
⊙진등 : 장발재에서 죽청저수지로 내려온 산줄기로 낮고 긴 능선을 이루고 있다.
⊙외등(외와등) : 뫼봉재에서 내려온 동편 줄기로 수개제로 넘어가는 길 왼쪽 산등성이를 말한다.
⊙뫼봉재 : 아릿산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주봉 다음으로 높은 능선 봉우리로 그 줄기가 서남쪽으로 마을을 감싸고 뻗어 내려 아랫대포리 잿등까지 이르고 있다.
⊙장발재 : 죽청저수지(죽청제)에서 주도리로 넘어가는 재로 누에의 발 모습을 닮아서 잠발재라는 설이 있으나 지도상 지명으로 볼 때 긴 능선으로 이루어진 재라는 뜻으로 추정한다.
⊙음장발재 : 장발재에서 주도리로 넘어가다가 서쪽으로 뻗은 응달진 능선을 말한다.
⊙송골재 : 장발재와 음장발재가 만나는 능선을 말한다.
⊙다래골재 : 송골재에서 신덕리로 넘어가는 높은 능선으로 아랫대포리 뒤까끔에서부터 이어지는 길과 만난다.
⊙잠발골(장발골) : 고려시대 김씨가 일가를 이루고 살았던 죽청저수지 위 장발재로 넘어가는 골짜기를 말한다.
⊙성적골 : 죽청 저수지 우측 골짜기에서 장발재로 가는 중간에 있는 마지막 골짜기를 말한다.
⊙웃굴(윗골) : 아랫대포리 윗샘에서 죽청저수지 아래까지의 골짜기를 말한다.
⊙도래솔밭 : 죽청저수지 위 왼쪽에 있는 네모진 밭 한가운데 묘지 둘레에 심어진 벌송으로 지금은 묘지만 남있다.
⊙바람불이 : 수게재를 내려가는 중간에서 둔전보로 가는 산길을 말하며 화순천과 들판에서 몰아치는 바람이 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설정들 : 설정이라는 일본인에 의해 개간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둔전보 위쪽 들을 말한다.
⊙설정보 : 설정들의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보로 웃대포리에서 수게재를 넘어 서태리 앞 화순천에 바윗돌로 막았다.
⊙웃시암(샘), 아랫시암(샘) : 웃대포리에 2개의 샘이 있었는데 여름에는 주전자에 이슬이 맺힐 정도로 시원했으며 넘치는 물로 옷을 빠는 빨래터로도 이용하였다.
⊙허장자샘 : 고려시대 현 죽청저수지 위에 허씨가 일가를 이루고 살았는데 저수지 안에 허장자라고 하는 부자의 샘이 있었다고 전한다.
⊙참모정터 : 고려시대에 공동산에 양씨가 일가를 이루고 살았는데 바로 옆 사모자리에 정자가 있었다고 전한다.
⊙박꿈터 : 서촌 고샅 병희 종친 증조부께서 고관이 나올 박넝쿨 꿈을 꾸었다는 집터
⊙거리목 : 현재 마을 회관 앞 삼거리를 말하며 다른 골목으로 가는 길목이라는 뜻
⊙웃고샅 : 윗샘 옆으로 북쪽으로 이어지는 골목으로 뒷산까지 연결된다.
⊙안고샅 : 회관 앞에서 북서쪽으로 갈라지는 길로 안 깊숙한 골목이라는 뜻
⊙서촌 고샅 : 거리목에서 논두렁을 타고 서쪽으로 이어지는 길로 아랫대포리와 경계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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