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인도 순례를 다녀온 도반님의 보따리가 오픈된다는 공지를 듣고 절을 향하며 문득..
인도는 나와 우리에게 어떤 이미지로 머물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하나는 수행과 부처님의 나라라는 영적으로 숭고한 느낌으로 곳곳이 영감을 불러 일어키는 수행자를 만날 듯한 느낌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보다도 인구는 많지만 물질적 빈곤의 불결한 느낌을 떨치지 못한다.
<반야심경> 불자라면 깨끗하다거나 불결하다는 느낌에서 벗어난다[불구부정]
하지만..
그것에 매이는 게 인지상정이니..
불자는 인도성지에 가야만 할 것 같은데.. 왠지 가지 말아야 할 곳 같은 나라가 인도 아닌가..
이번 인도순례에는 일곱 도반
김성호 거사님, 최한규 거사님, 이영숙 보살님, 임현광 거사님, 임정화 보살님, 원혜지 보살님, 무상각 보살님은
주지 일만 스님의 순례 팀에 합류하여
마하보리 에너지를 듬뿍 담뿍 듬담뿍^^ 받고..
오늘 일요 법회 시간에 임현광 회장님이 대표로 순례길 감상을 사진과 비디오(?^^)로 보여주어..
참석한 신도님들이 환희심을 일으켰으니..
마침 메릴랜드 지역에서 올라온 보살거사님도 함께 하고
그것으로 2024년 1월 인도성지순례 회향을 마쳤다.().
임 거사님의 첫번째 여정은..
1. 룸비니, 부처님 탄생[음 4월 초파일] 장소
부처님의 출생지인 룸비니는 인도와 내팔 국경 근처로 네팔에 있다.
불교와 석가모니 부처님이 유럽에 소개되었을 때..석가 부처님이 실존 인물인지에 대한 논쟁이 심각했다고.
그때 독일의 고고학자 휘러가 룸비니에서 아쇼카 왕(272-232 BC) 석주를 발견하고 문자를 해독해
바로 이곳 Lumbini가 석가 부처님 탄생지 임을 밝혀내니
석가모니 실존에 대한 논란은 그 한방에 눈녹듯 사라지며 실존 인물로 존경 대상이 되었다고..
임 거사님 왈.. 룸비니가 가까운 인도 공항에 내리니 안개처럼 뿌연 공기 속에 숨을 제대로 쉬기가 곤란할 정도였다.
공해가 정말 심각함을 온 몸으로 경험하는 순간이었으며.. 날씨는 이곳 뉴저지보다 약간 따뜻했다고..
부처님이 사시던 그때도 지금처럼 공해가 심했을까?.
천만이지! 그때는 공해가 무언지도 모르는 정말 사람살기 좋은 아름답고 비옥한 땅이었기에 강대국이 호심탐탐 노리는 나라로..
석가모니께서는 카필라 성이 코살라에 침략당하는 것을 온몸으로 보고 계셨다.
약육강식은 사람이 사는 곳에서는 쉼 없이 일어나고 있으니..
룸비니는 사진에서 보듯 아름답게 지어져 잘 관리 유지되고 있다는 느낌에 편안함을 주었는데..
한편에서 보면 그것은 불교에 대한 네팔의 인식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석가모니는 룸비니에서 태어났지만 왕자로 태어난 카필라 성에서 자랐고, 카필라 성에서 출가를 단행한다.
그 카필라 성 위치가 지금 인도인지 네팔에 있었는지 아직까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단다.
2. 보드가야, 성도[음 12.15일] 장소
임 거사님의 설명에 의하면..
보디가야 보리나무 아래 길상초를 깔고 앉으며.. "이 자리에서 나의 육체가 소멸되어도 좋다. 일체 지혜를 얻지 못하면 나는 결코 이 자리를 뜨지 않을 것이다." 하며 선정에 들어 음 12월 15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셨다고..().
기원전 250 년경 아쇼카 왕은 석가모니 성취를 기리려 마하보디 사원과 대탑과 석주를 세웠고..
그 안에 본존불이 모셔져 있다.
부처님은 카필라 성에서 출가하여 다섯 사문과 고행 숲에서 6년 동안 고행을 하다.. 고행림을 벗어나
지금 보드가야[보리가야]에 있는 보리수 아래에서 드디어 깨침을 성취하니.. 부처님이라 불린다.().
보드, 보디, 보리는 모두 같은 말로 깨침이란 뜻이다. 그러니
우리 절인 보리사란 곧 깨치는 절이며.. 한편으로는 석가모니 부처님 뜻이
인도에서 태어나.. 한반도를 거쳐.. 성철큰스님에 이르고.. 원영 큰스님은 미국 뉴저지에 전한 것이다.
임 거사님은 마하보디 사원 안에 있는 본존불상을
우러러보는데..
어느 순간 마치 불상이 너무 친절하게 느껴져 꼬옥 감싸주고픈 마음으로 한참을.. 바라보았다고..
흔히 대웅전에 있는 불상은 인자하시지만 근엄하게 느껴져 고개를 숙이게 되는 데..
이 불상은 보통 젊은이 같은 인상으로 생기와 친근함을 주면서 부처님 길로 인도하는 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임 거사님은 근본 불교와 대승불교 차이를 불상에서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석가 부처님의 열반만이 참모습이 아니라 갓 성도한 젊은 모습 역시 불교에 녹아있다.
우리 보리사는 그것을 밝게 보고 지금 여기서 펼쳐야 하는 게 아닌가!
나무관세음보살.().
원영 큰스님은 덧붙여서 녹야원의 불상과 석굴암 불상 모양과 크기가 똑같다고 하시며..
석굴암을 지을 당시인 8세기 신라와 인도 간의 왕래가 얼마나 잘 이루어졌는지 짐작하게 한다고 하셨다.
가야의 맥을 이은 신라는 바다를 통해 인도는 물론 중동과 무역을 했고, 인도인과 중동인이 신라를 방문할 정도였다.
그 말은 신라는 한반도 코너에 쳐박힌 은둔의 나라가 아닌 바다를 통해 웅지를 펼치던 큰 나라[마하 대국]였다는 것.
21세기 대한민국이 K-문화라 하여 세계에 전해지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닌 이미 오랜 과거 고구려, 백제, 신라 시대에 그렇게 했던 것으로 그 DNA가 오늘날 꽃을 피우고 있을 뿐이다.
3. 사르나트[녹야원], 처음으로 법을 굴린 곳
만일 부처님께서 다섯 사문에게 법을 설하셨는데..
그 법을 들은 다섯 사문이 깨닫지 못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불법은 거기서 조용히 사라 지지지 않았을까.. 나무관세음보살.().
그리고 다섯 사문이 부처님을 맞이한 곳에 영불탑이 세워져 있다.
4. 쿠시나가르, 열반[음 12월15일] 장소
45년 동안 법을 전하시다 80세 쿠시나가르에 이르니..
"아난다야, 내 몸은 늙어 낡은 수레처럼 되었다. 태어나는 것과 죽는 것은 때가 있으니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는 것"
"비구니들이여, 모든 것은 사라진다. 게으름없이 정진하여라"
석가 부처님은 룸비니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법을 펼치시고 쿠시나가르 길에서 열반에 드셨으니..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살다 길에서 돌아가셨다.
불교는 길이다.
불자 또한 길이 되어야 한다.
그것을 중도라 한다.().
임 회장님은 "내(석가모니 부처님) 몸은 늙어 낡은 수레처럼 되었구나" 하는 내용에 대해..
석가모니는 신이 아닌 우리와 같은 감정을 가진 인간의 음성으로 듣고..
우리도 새롭게 발심해야 하는 이심전심을 느낀 것으로 보여 가슴이 저렸다.
5. 상카시아, 도리천 하강지
부처님 어머니이신 마야 왕비는 아기 싯달타를 낳고 돌아가시어 도리천에 머물고 계셨다.
석가모니는 성불 후 도리천에 올라가 어머니와 하늘 신들에게 법을 설하시고 내려온 곳이 성카시아로
이곳은 인간계와 천신계를 연결하는 중요한 성지인데.. 그 중요성에 비해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임 회장님은 이번 순례에서 느낀 것 가운데 신도님들에게 전하고픈 것은 참 많은데..
시간에 쫓기어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것에 아쉬움과 미안함이 섞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쩜 그 아쉬운 내용은 임 거사님이 아닌 우리 스스로 성지를 밟으며.. 온몸으로 발견해야 하는 게 아닌지 하는 생각이..
아무리 들어도 한 번 본것만 못하고,
백번 보아도 한번 접촉한 것만 못하다.
그러니 보리사에서는 인도성지순례 길을 정기 행사처럼 계획해야 하는 게 아닐까?.
원영 큰스님과 함께 하는 순례 길은? ㅎㅎㅎ^^
설마 원영스님도..
"일만아, 내 몸은 늙어 낡은 수레가 되었구나" 하실런지요?^^
첫댓글 순례길은 고행길이고 수행자는 고행의 길이라 했는데
아무나 순례자나 수행자가 되는건 아니라 생각됩니다.
그래도 부러운맘 감추지 않으렵니다.
어제 못다본 영상과 설명 올려주신 님께
감사드리며..
고맙습니다🙏
lahula 님의 답글은
이 방이 생기고
첫번째 답글입니다.()^^.
첫번째는 항상 놀랍고
여기서는 참 고마움 그 자체지요^^
감사합니다🙏😊
다만 라훌라님의 질문이
너무 송곳처럼 찔러오니
저는 답하기가 참..()..
lahula님의 글을 보며 생각해 봅니다.
우선 '순례길은 고행길이다' 라는 말씀에 깊은 공감을 합니다.().
그러면서 순례길에 대한 다른 관점이 있다고 봅니다.
바로 이웃 종교인들의 순례가 그것이죠.
기독교인이나 천주교인의 순례길이 고행인가?.
제가 보기에 그들의 순례는 명상의 시간이거나 성지를 만나는 황홀의 시간으로 보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의 순례길이 그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날 동참하신 원영 큰스님은 "계를 받고 순례길에 오르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셨는데.
그 뜻 역시 순럐길이 고행길만은 아닌 것으로 들었습니다.
2. 그러면 순례길이 왜 고행길처럼 보여야 할까?.
순례는 어느 여행처럼 즐기려고만 떠나는 게 아니지요.
불자에게 순례는.. 삼사 순례를 포함해.. 수행길과 연관시키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순례 장소와 시간을..
자기 본연의 모습을 마주하는 인연으로 삼지 않으면
불자의 순례라 이름하기가 곤란하다는 겁니다.
3. 단지 순례길을 불자에게 고행길이라 이름하는 것은 타당한가?.
초전볍륜 시작은 중도입니다. 곧 고락중도가 그것이지요.
불교는 쾌락의 길이 아니요, 고행의 길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순례길을 고행길이라 하면.. 중도에 어긋나는 게 아닌지요..
티벳불자님들의 오체투지하며 성지로 다가가는 모습은 분명 고행이 아닐 수 없는데..
저는 단견으로 보면 고행이 틀림없지만.. 보다 크게 넓게 보면 고행이 아니라 행복한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자기가 하는 이 몸짓으로 성스러운 님을 뵙는다는 마음보다 더 행복한 마음이 있습니까?.
몸은 고달프지만 마음에 정말 이익이 되는 행동이라면
함부로 고행이라 이름하면 아니되는 게 아닌지요..()^^.
고락중도 내용도..
아무런 이익이 없는 고행은 하지말라는 것이지..
이익이 분명히 있는 고행을 하지말리는 게 아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