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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강. 5강. 신약성경 안에서의 마리아 최근에 성경이 마리아에 대해 침묵을 지킨다는 것이 여러 번 언급되었다. 일부의 책들에 대해서는 유효한 그러나 신약 전체에 대해서는 아닌, «집요하고 유해한 슬로건»의 문제이다. 신약은 마리아에 대해 153구절에서 말한다. 이것은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은 것이 아니라, 구원의 역사 안에서 마리아가 누구인지를 소개하는데 있어서 성령에 의해 충분하다고 간주된 것들이다. 어쨌든 양보다 질이 더 낫다. 예수님의 어머니에 관계된 이 성경의 본문들은 «읽고, 연구하고, 숙고할수록, 더욱더 그들의 근본적인 가치를 이해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정보의 풍요로움이 아니라, 내포되어 있는 심오함과 풍요로움이다». 마리아에 관한 성경의 계시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본문들을 신약 성경의 형성 과정 안에 (연대기적-통시적 기준) 그리고 동시에 개개의 저자들의 신학 안에 (공시적 기준) 삽입할 것이다. 이러한 기준들에 따른 마리아에 대한 주목은 침묵과 반유다이즘 논쟁, 신학적 발견 그리고 결론적인 종합이라는 세 시기들을 안다. |
1. 침묵과 반유다이즘 논쟁의 시기
유다이즘적 상황 안에서는 육과 피의 가치들의 고양이 하느님 나라에 대한 신앙의 요구에 훨씬 더 불리하게 해석되기 때문에, 케리그마의 선포 또는 첫 번째 복음 선포는 파스카의 그리스도께 집중되고 어머니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는다.
1.1. 그리스도에 대한 첫 번째 선포
베드로 (사도 2,14-39; 3,12-26; 4,9-12; 5,29-32; 10,34-46)와 바오로 (사도 13,16-30; 17,22-31)의 케리그마적 담화들에 의해 제공된 초기 그리스도교의 설교는 본질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선포.
그러한 담화들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a) 청중과의 연결, 즉 구원의 역사에 대한 환기 (히브리 청중)와 종교성에 대한 환기 (이교도 청중); b) 파스카 신비의 그리스도론적 선포; c) 근본적인 결과들 또는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과 회심.
이 케리그마적 담화들 안에서 파스카 신비에 대한 그리스도론적인 집중이 눈에 띈다. 단 한 번만 요한의 세례 후에 예수님의 치유와 구마활동에 대해 언급하고 (사도 10,38), 단 한 번만 다윗의 후손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한다: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구세주를 약속대로 보내셨습니다» (사도 13,23).
이 첫 번째 시기에 마리아는 결코 언급되지 않는다. 예수님의 어머니에 대한 이 침묵의 이유는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복음사가들에 의한 세심한 숙고의 대상일) 그리스도의 역사적 추이의 전체 주기에 대한 보다 커다란 침묵 안으로 다시 들어간다. 왜냐하면 복음사가들에게 있어서 관심의 핵심은 파스카 신비의 선포였기 때문이다.
그 후, 복음화로부터 교리교수에로 건너갈 때, 그리스도의 신비의 숙고는 바오로 안에서는 세상에 하느님의 아드님의 파견을 그리고 마르코 안에서는 세례로부터 시작하는 공생활을 포함하면서 넓어진다. 그러한 상황 안에서는 마리아에 대한 몇몇 언급들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긍정적인 빛 안에서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초기 그리스도교는 아브라함으로부터 내려온다는 사실로만 구원된다고 생각했던 유다인 그룹의 관점과 싸워야 할 필요성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반유다이즘 논쟁이 예수님의 어머니에 대한 충만한 강조를 방해했다.
1.2. 바오로 안에서의 하느님의 아드님의 파견
바오로는 갈라 4,4에서 신약의 마리아에 대한 첫 번째 본문을 제공하면서 마리아에 대한 침묵을 깬다. 갈라티아 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동기는 소 아시아에 있는 갈라티아 공동체 안에 유대교 풍습을 따르는 일부 그리스도인들의 침투이다. 이들은 그리스도에 의해 완전히 폐지된 유대 율법의 유효성을 가르쳤다. 이들에 반대해 바오로는 그의 복음, 즉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통한 구원을 가르친다.
그리스도와 율법 사이에 선택하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만일 구원이 율법으로부터 온다면,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헛되이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갈라 2,21).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자녀들은 그의 육체적인 자손이기 때문이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믿기 때문에 (갈라 3,7) 구원된다. 유대교 풍습을 따르는 이들에 대항하는 그러한 논쟁의 상황 안에서 바오로는 높은 그리스도론적인 관심을 지닌 본문을 도입한다. 여기서는 예수님을 낳은 «여인» (갈라 4,4)인 마리아에 대해 «접촉할 수 있게 그리고 익명으로» 언급한다.
때가 차자 | |
a) 하느님의 행위 |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다, |
b) 양태 | 여인으로부터 태어난, |
c) 양태 | 율법 아래 태어난, |
d) 목적 |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기 위하여 |
e) 목적 | 우리가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고 |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이것이 파견의 스케마에 따라 구조화되었다는 것을 의식해야만 한다. 문장의 주어는 성부이다. 성부는 때의 충만함을, 즉 예속과 성숙의 시기 후에 구원에 적합한 시기를 정하시고 (갈라 4,1-2), 당신 아들의 파견을 결정하신다. 파견될 수 있도록 선재하는 이 아들은 시간 안에서 내밀하게 일치하고 대립된 두 가지 양태 (b, c)와 두 가지 목적 (d, e)에 따라 온다:
연약함 (여인으로부터 태어난)과 노예상태 (율법 아래 태어난) 안에서 노예상태로부터의 해방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기 위하여)과 영에 의해 가능하게 된 (갈라 4,6)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의 선물을 위하여 (우리가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고) 태어난다. 이러한 상황 안에서 마리아는 하느님의 아드님을 낮춤의 조건 안에서 역사 안에 삽입시키는 여인이다. 마리아는 때의 충만함과 인간들의 하느님의 자녀로의 변화의 역사-구원적 계획안에 연결되어 있다.
바오로는 이 구절에서 대조적인 실재를 동시에 두면서 그에게 소중한 역설의 유형에 의지한다 (1코린 1,21-31; 2코린 5,21; 8,9; 로마 8,3-4): 노예상태-구원, 연약함-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 물음이 솟는다: 어떻게 율법의 노예가 해방되기를 기다리는 이들을 해방할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모든 인간들처럼 여인으로부터 태어난 이가 하느님의 자녀들이라는 품위를 줄 수 있는가? 바오로는 이 수수께끼를 푸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방식 (예를 들면, 유년기의 복음들이 명시하는 것처럼 동정적으로 그리고 성령의 힘으로) 또는 율법에 복종하는 방식 (즉 자발적으로, 강제됨 없이)에 대한 담화를 열린 채 놓아둔다.
1.3. 마르코 안에서의 하느님 나라의 수위권
마르코는 바오로와 같은 상황 안에서 움직인다. 우리는 교회 일치적 이유를 위해서도 마리아에 관한 이 첫 번째 복음적 증언에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사실 종교개혁의 많은 형제들은 어떤 마리아론도 거부하기 위해 마르코 복음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복음사가가 어머니를 포함한 예수님의 친척들의 예수님에 대한 초기의 불신의 «역사적 사실»을 확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 신자들도 마르코 복음의 구절을 «반마리아론적»이라고 간주했고, 그것을 루카와 요한에 의해 극복될 일시적이고 막연한 증언이라고 생각했다.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마르코의 신학의 상황 안에서 그리고 신약성경의 마리아에 관한 언급들의 발전이라는 전면적인 틀 안에서 해석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친척에 대한 두 번의 언급을 포함하고, 어머니에 대해서는 한 번 명백하게 말하는 마르코 복음 3장을 검토하자:
예수님께서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한편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 [...].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르 3,20-21.31-35).
일반적으로 이 단락에서 하나의 샌드위치 구조를 보게 된다. 이 구조에 따라 마르코는 이야기를 시작하고, 다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야기를 중단하고, 그리고 나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한다.
처음의 두 부분은 주제로 두 가지 형태의 예수님에 대한 몰이해를 지닌다. 무엇보다도 먼저 음식을 먹는 것을 소홀히 할 정도로 (이러한 의미에서의 «미쳤다»이다) 자신의 사명에 완전히 몰두한 예수님의 행동에 대해 걱정하는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을 붙잡으러 간다. 이들은 몰이해를 나타낸다. 그러나 그들의 입장은 예수님을 마귀들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그리고 예수님에 의해 단죄되는 율법학자들의 적대적 입장과는 다르다. 마리아는 이 친척들 사이에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르코는 마리아를 명백하게 말하지는 않는다.
세 번째 부분은 예수님의 친척들에 대한 담화를 재개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보다 구체적인 형태로 한다: 어머니, 형제들과 누이들. 여기서 주제는 혈연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대한 충실로 이루어지는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이다. 이 단락이 논쟁적이라기보다는 더 신학적일지라도, 이 부분은 가문으로부터 예수님의 거리의 강조를 드러낸다. 사실 마르코의 신학은 예수님을 친척들이 배제되지 않은 모든 범주의 사람들 (율법학자들, 바리사이, 군중, 제자들...)로부터 «몰이해된» 메시아로 소개하는데 정향되어 있다. 그러한 신학적인 상황 안에서 예수님의 어머니의 신앙에 특권을 주는 것은 역효과일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혈연으로 충분하다는 착각을 암시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마르코는 예수님의 친척들을 부정적인 열쇠로 소개한다: 이들은 제자들의 무리 «밖»에 있고, 그래서 불신의 울타리에 속한다 (참조. 마르 6,6). 요한은 «예수님의 형제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 (요한 7,5)는 것을 반복하면서 이 입장을 확고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신앙의 없음이 아니라, 불완전한 신앙의 문제이다. 사실 요한은 카나의 표징 이후에 예수님을 믿는 새로운 공동체 안에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 (요한 2,12)을 놓는다. 아니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를 믿음에서 제자들을 앞서고 예수님에게 믿음을 두도록 그들을 초대하는 분으로 소개한다. 반면에 루카는 마리아가 그녀의 모범적인 신앙으로 찬미 받았다는 것을 정확하게 한다 (루카 1,45).
2. 마리아에 대한 신학적 발견의 시기
반유다이즘 논쟁이 완화되고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그리스도 신비에 대해 심사숙고하고, 그리스도의 현세적 기원 (마태와 루카의 유년기 복음들)과 그리스도의 신적 기원 (요한복음)에 대한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해 숙고하는데 도달하면서 그것을 심화한다. 그러한 정황 안에서 마리아의 역사-구원적 사명 안에서 긍정적으로 보여진 마리아를 위한 특별한 관심이 일어난다.
2.1. 마태오: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의 마리아
«마르코의 간결함에 비하여, 마태오 복음은 마리아의 역할의 감지에 있어서 중요한 발전을 증언한다». 그것은 유년기 복음들이라고 불리는 첫 두 장에서 일어난다. 유년기의 복음들은 –미드라쉬 양식에 따라 쓰여졌을지라도- 예수님의 정체성과 사명에 대한 성숙한 신학적 증언을 나타낸다. 여기에 어머니가 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
마태오는 마르코처럼 세례로부터 승천까지의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기원의 탐구에로 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마태 1,18). 그러한 탄생은 우연이 아니라 예언자들에 의해 예고된 동정녀-어머니인 마리아의 현존을 함축한다: 마리아는 백성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의 신비로운 계획안에 들어오고, 그리스도의 족보와 약속-성취의 스케마 안에 삽입된다.
1) 미드라시라는 말은 성서 본문을 축어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그 안에 담긴 정신을 집중적으로 연구·조사함을 가리킨다. 이러한 조사가 필요하게 된 이유는 모세 오경에 '기록된 율법'을 후대의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 다시 해석할 필요가 생겼고, 또한 구전율법의 자리를 놓고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 사이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드라시는 성서의 모순들을 없애고 새로운 법률에 성서적인 근거를 세우며, 성서 본문에 새로운 뜻을 제시하는 등의 용도에 쓰이는 복합적인 해석체계로 발전했다. 미드라시 모음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할라카 미드라시는 기록된 율법으로부터 학문적인 방법으로 추론한 구전율법이라 규정할 수 있다. 하가다 미드라시는 입법보다는 교화에 목적을 둔 설교들로 구성되었다 |
2.1.1. 예수님의 족보 안에서의 마리아
현대의 사회가 조상들에 대해 일반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데 반해 (아버지와 어머니를 아는 것으로 만족한다), «개인이 한 가정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가치를 지녔던 부족 사회에서는 족보가 말하자면 “신분증”이 되었다. 족보는 개인이 그룹의 삶 안에서 인식되고 조직적으로 그 안에 삽입되도록 했다». 마태오는 «다윗의 자손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마태 1,1) 예수님의 정체성을 나타내기 위해 예수님의 족보에 의지한다. 그러나 하나의 단순한 탄생 문서의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족보는 예측할 수 없는 길들을 통해서 그의 구원 목적에 도달하시는 역사 안에서의 하느님의 행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사실, 낳음을 받은 이와 낳는 이의 14+14+14의 기억의 고리 안에서, 정상적인 연속을 변경하는 두 요소들이 눈에 띈다: 마리아의 역할을 선취하고 준비하는 네 여인들의 현존과, 낳음을 받았지만 그리스도를 낳지는 않는 요셉의 변칙적인 입장.
이상하게 마태오는 족보에서 이스라엘의 위대한 어머니들 (사라, 레베카, 레아, 라헬...)이 아니라, 덜 알려진 네 명의 여인들 (타마르, 라합, 룻 그리고 우리야의 아내 (밧 세바))을 언급한다. 엄밀히 말하면, 마태오는 예수님의 탄생이 필연적으로 거치는 마리아에 대해서만 말해야 했다. 만일 족보에서 언급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네 여인들에게 거슬러 올라간다면 (사실 루카의 족보는 이 여인들을 생략한다), 그것들을 명시하는데 있어서 주석가들은 일치하지 않을지라도, 정확한 이유로 그것을 했다.
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예로니모) 죄 있는 여인들의 문제이다. 이 죄 있는 여인들은 예수님이 구원하러 올 (마태 1,21) 백성의 죄를 예시한다. 루터에게 있어서는 외국 여인들이고, 그래서 이들은 이방인들의 구세주 메시아를 예고한다. 보다 최근의 주석은 (L. Sabourin, R.E. Brown, R.Fabris,
J. -P. Michaud...) 이 두 설명들을 그만둔다. 왜냐하면 다섯 번째 여인인 마리아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것도 마리아를 죄인이나 외국인으로 보는 것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마리아와의 연결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특별한 상황 안에서 실현된, 조사 ek (da) 안에서 명시된 모성 안에 있다: «이 여인들은 불규칙적인 방식으로, 일상적인 길을 벗어난 결합 또는 종결된 혼인의 힘으로 모두 낳았다. 족보 안에 마치 단절을 위해 들어온 이 여인들은 마리아라는 다른 예외를 준비한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구원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예측할 수 없는 행위의 표징과 이콘»이 된다: «마리아 앞에 무엇도 막을 수 없는 하느님의 흠숭과 몰이해의 길들로 인한 놀라움이 일어난다».
①타마르: 창세기 38장-시아버지 유다의 아이를 낳음; ②라합: 여호수아 2장-여호수아가 예리코에 정탐꾼을 보냈을 때 창녀 라합이 이들을 숨겨줌; ③룻: 룻 4,13.17-나오미의 이방인 며느리; ④밧 세바: 2사무 11장. |
2.1.2. 동정녀-어머니의 신비
마태오는 요셉과 마리아가 산 구체적인 추이의 미드라쉬 하가다 (midrashico haggadico) 이야기와 더불어 예수님이 태어난 보기 드문 방식의 설명에로 내려간다.
마태 1,18-25은 다섯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교차 형태로: A-B-C-B’-A’). 무엇보다도 먼저 마리아의 임신 앞에 요셉의 어려운 입장이 나타난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1,19). 요셉의 결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만일 그가 적법한 정의를 지닌 의로운 사람이었다면, 법적으로 그의 아내이며 간통의 혐의가 있는 마리아를 율법의 엄격한 절차에 넘겨야만 했을 것이다 (신명 22,20-21: 돌로 쳐 죽임). 법적인 시각에서 비밀스런 이혼은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반면에 요셉의 정의는 마리아 안에서 이루어진 신비 앞에서 외경으로 이루어진다.
요셉은 하느님에 의한 명확한 부르심이 없어서, 마리아로부터 멀어져 아기를 아들로 인식하지 않도록 결심한다. 하느님에 의한 명확한 부르심은 꿈에 천사의 발현과 함께 일어난 것이고, 천사의 말은 –X. Léon-Dufour의 해석 안에서- 의미한다: «다윗의 자손인 요셉아, 너의 신부 마리아를 맞아들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 안에서 태어나는 분은 사실 성령으로부터 오신다. 그녀는 한 아들을 낳을 것이고 너는 그를 예수라고 부를 것이다» (마태 1,20.21). 마리아를 맞아들이고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 되게 하면서 예수님을 양육하는 요셉의 사명이 이렇게 명시되었다.
이 점에서 마태오는 성령에 의해 일어난 그리고 사람의 개입이 없는 예수님의 동정적 잉태 안에서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를 본다: «보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는 임마누엘이라고 불릴 것이다» (이사 7,14). 임마누엘은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동정적 잉태의 사실로부터 랍비들이 메시아적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거기서 동정녀로 머물면서 출산하는 한 젊은 여인도 알아보지 못했던 성경 본문에로 거슬러 올라가는 그리스도교적 독서이다.
마태오는 동정녀를 그리스도교 공동체로부터 전해진 사건으로부터 출발하면서 엄격한 의미로 해석한다. 이러한 방식 안에서 마태오는 예수님의 불법적인 탄생에 관한 뜬소문을 부인한다. 예수님의 불법적인 탄생에 관한 뜬소문은 Historia fabri lignarii의 고대 전설 (2세기)과 함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히브리인들 사이에서 자리잡을 것이다.
2.2. 루카: 구원의 역사 안에서의 마리아
루카는 구원의 역사의 신학자이다. 구원의 역사는 세 시기로 구별된다: 이스라엘의 시대, 그리스도의 시대 그리고 교회의 시대 (참조. 루카 16,16). 루카는 잉태로부터 공생활에 이르는 예수님의 기원과 추이들도 포함하는 역사적 탐구의 결실인 결정적인 복음을 전하고자 한다 (유년기의 복음). 그러한 상황 안에서 예수님의 어머니의 모습이 그녀의 동정적 모성 안에서 그리고 그녀의 모범적인 신앙의 응답 안에서 나타난다.
2.2.1. 마리아에게 한 천사의 알림 (루카 1,26-38)
알림의 장면을 이해하기 위해 그것을 직접적으로 앞서는 즈카르야에게 한 알림과 비교하는 것이 필요하다 (루카 1,5-25). 병행을 통해서 루카는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그리고 엘리사벳과 즈카르야에 대한 마리아의 우월을 분명하게 하고자 한다. 사실 요한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어머니로부터 (1,5.24)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로 (1,76) 잉태되었는데 반해, 예수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로 (1,32) 동정녀 어머니로부터 (1,27.35) 잉태되었다.
세례자 요한의 부모가 의롭고 율법을 지키는 이들인데 반해 (1,5), 마리아는 하느님의 호의의 대상이다 (1,28). 즈카르야는 하느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벙어리가 되는 벌을 받는데 (1,20), 마리아는 반대로 하느님이 말씀을 믿고 (1,38) 신앙으로 찬미를 받는다 (1,45).
주석가들은 주님탄생예고가 몇몇 이해의 스케마에 따라 구조화되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 이해의 스케마들은 주님탄생예고의 신학적 의미를 분명하게 한다:
a) 놀라운 탄생의 알림. 아브라함에게 한 (창세 18,1-15), 마노아와 부인에게 한 (판관 13,3-22), 즈카르야에게 한 (루카 1,5-25) 다른 알림들과 같이 마리아에게 한 천사의 알림 (루카 1,26-38)은 다섯 가지 요소들을 포함한다: 발현, 당황, 메시지, 이의제기 그리고 표징. 이 구조는 마리아에게 한 알림의 그리스도론적인 의미를 분명하게 하는 장점이 있다.
그의 핵심 내용은 틀림없이 모든 복음의 대상인 예수님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두 시기 안에서 알려졌다: 무엇보다도 먼저 영원히 다스릴 다윗의 메시아로서 (루카 1,31-33), 그리고 성령을 통하여 마리아의 태중에서 동정적으로 태어난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루카 1,35-37). 앞선 알림들 안에서 하느님은 여인의 아이 못 낳음을 극복하시는데 반해, 마리아 안에서는 성령에 의한 동정적 잉태라는 완전히 새로운 일이 일어난다. 마리아에게 한 알림 안에서 몇몇 묵시적 요소들이 발견된다.
묵시적 요소들은 태어나는 아기의 정체성을 설명한다: 높은 데로부터의 쇄도, 메시아적인 이름들... 그러나 이 핵심 내용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탄생의 알림의 스케마는 마리아에게 한 알림의 모든 요소들을 포함하지는 못한다. 특히 이 스케마 안에는 동정녀 안에서 강조된 수취인의 응답이 없다.
b) 부르심의 알림. 실제로 구조적인 관점에서, 마리아에게 한 알림과 기드온에게 한 알림 사이에 더 나은 일치가 있다. 기드온에게 한 알림에서는 탄생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을 위한 사명의 문제이다:
기드온에게 한 알림 판관 6,11-24 | 마리아에게 한 알림 루카 1,26-38 | |
1. 인사 | 11. 힘센 용사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 28.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
2. 당황 | 13.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계시다면, 어째서 저희가 이 모든 일을 겪고 있단 말입니까? | 29.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
3. 첫 번째메시지 | 14. 너의 그 힘을 지니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족의 손아귀에서 구원하여라 | 31.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32. 주 하느님께서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실 것이다 |
4. 어려움 | 15. 제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단 말입니까? 보십시오, 저의 씨족은 가장 약합니다 | 34.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
5. 두 번째메시지 | 16.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겠다. 그리하여 너는 미디안족을 칠 것이다 | 35.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
6. 표징 | 17. 저와 이 말씀을 하시는 분이 당신이시라는 표징을 보여 주십시오 | 35. 네 친척 엘리사벳도 그 늙은 나이에 아들을 잉태하였다 |
7. 동의 | 24. 기드온은 그곳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았다 | 38.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
그리스도론적인 메시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부르심의 스케마는 인간의 조건 안에서 하느님의 아드님의 탄생을 위한 동의와 모성적인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마리아의 인격을 강조한다.
마리아는 모범적인 신앙의 응답을 드리면서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 안에 들어간다. 그러나 루카의 이야기 안에서는 명확한 바로 이 동의가 기드온에게 한 알림 안에서는 함축적으로밖에 나타나지 않는다. 수취인의 응답이 명확하게 표현된 다른 스케마에로의 길이 열려 있다.
c) 계약의 스케마. 주님탄생예고 안에서 하나의 계약이라는 양식을 알아보는 제안은 주석가인 세라 A. Serra에 의해 연구되었다. 사실 이야기는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체결된 계약의 문학적인 모델을 따라간다. 이 두 장면 안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⓵중재자의 담화, ⓶순종과 섬김의 용어로 하는 백성의 응답, ⓷하느님께 중재자가 돌아감:
시나이에서의 계약 탈출 19,3-8 | 마리아에게 한 알림 루카 1,26-38 | |
중재자의 담화 | 5.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 | 31.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
계약에 대한응답 | 8a. 백성이 다 함께, “주님께서 이르신 모든 것을 우리가 실천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 38a.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
하느님께 중재자가 돌아감 | 8b. 모세는 주님께 돌아가 백성의 말을 아뢰었다 | 38b.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
마리아의 응답 안에는 백성이 계약에 동의했던 정식문구의 반복이 있다. «이스라엘의 신앙은 이제 마리아의 입술 위에서 무르익는다. 마리아는 “시온의 딸”이다! 계약에 나아가는 문제였을 때, 천사 앞에서의 그녀의 행동 안에서 선택된 백성과 그의 중재자들 사이의 요구들의 역동성이 살아난다».
결론적으로, 제안된 세 스케마들은 함께 배합되어야만 한다: 이들 하나하나는 참된 무엇을 말하지만, 모든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마리아에 대한 알림은 혼합된 형태로 세밀하게 완성되어 나타난다: «두 문학 양식들 (놀라운 탄생의 알림, 부르심의 알림)의 독창적인 종합, 그러나 동시에 마리아가 하느님이 원하시는 구원 계획의 실현에 참가하도록 초대된 마리아의 부르심을 무엇보다 먼저 강조하는 종합».
2.2.2. 마니피캇의 원마리아론
마리아에게 예고된 동정 잉태는 마리아의 엘리사벳과의 만남 안에서 세 가지 차원으로 신학적으로 해석되었다: ⓵이야기, ⓶영송 그리고 ⓷노래.
⓵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이야기 (루카 1,39-46)는 바알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궤의 이전이라는 구약의 단락 (2사무 6,2-16)에 따라 만들어졌다.
궤의 이전 2사무 6,2-16 | 마리아의 방문 루카 1,39-46 | |
유다 지방에서 | 2. 다윗은 유다 바알라에서 하느님의 궤를 모셔 오려고, 그곳으로 떠났다 | 39.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
2. 기쁨의 표현 | 5. 다윗과 이스라엘 온 집안은 주님 앞에서 춤추었다 | 41. 아기가 어머니의 태 안에서 뛰놀았다 |
14. 다윗은 온 힘을 다하여 주님 앞에서 춤을 추었다 |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 |
3. 경건한 두려움 | 9. “이래서야 어떻게 주님의 궤를 내가 있는 곳으로 옮겨 갈 수 있겠는가?” 하고 다윗은 말하였다 |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4. 축복 | 12. 주님께서 하느님의 궤 때문에 오벳 에돔의 집안에 복을 내리셨다 | 42.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
5. 석 달 동안 | 11. 주님의 궤가 오벳 에돔의 집에서 석 달을 머물렀다 | 56.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냈다 |
이 문학적인 전개와 함께 루카는 이제 새로운 계약의 궤는 살아계신 하느님이 현존하시는 마리아라는 것을 암시하고자 했다.
⓶ 성령 안에서 마리아와 마리아 안에서 일어난 것에 대한 식별을 이루는 엘리사벳의 영송적 고백은 마리아에게 역사-구원적 질서에 속하는 중요한 세 가지 이름들을 부여한다:
-a. «여인중에 복되신 분» (루카 1,42)은 가장 복되신 분이라는 최상급을 표현하는 히브리어법이다. 엘리사벳은 마리아 안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에게로 내려오는 그리고 마리아에게 생명, 생명을 지탱하기 위한 수단들 [...] 그리고 생명을 전파하는 능력을 전하는 축복을 인식한다». 마리아의 축복이 다른 여인들의 축복과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구약은, 예를 들면, 야엘 (판관 5,24)과 유딧 (유딧 13,18)의 축복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들의 축복으로부터도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루카 1,42). 왜냐하면 «마리아는 당신 태중의 아기 때문에 복되기 때문이다».
-b. «내 주님의 어머니» (루카 1,43). «주님»이 단순하게 메시아가 아니라, 그의 영광스러운 상태 안에서, 그의 «메시아-왕의 신분, 구원론적-신적 신분» 안에서 부활한 예수님이라는 사실로부터 (B. Forte), 이 표현은 파스카의 어조를 취한다. 아마도 엘리사벳은 메시아적 의미로 정식문구를 의도했는데 반해, 루카는 그의 편집 안에서 정식문구에 파스카적 색채를 주었다.
-c. «믿으신 분» (루카 1,45). 루카 복음의 첫 번째 지복 (beatitudine)은 최고로 «믿으신 분»으로서 마리아에게 속하는 행복과 구원을 말한다. 복에 상응하는 이유가 덧붙여진다: «하느님께서 그녀에게 하신 말씀들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루카 1,45). 엘리사벳은 이렇게 천사에게 한 마리아의 응답을 동정녀가 하느님의 약속들에 자신을 열고 하느님의 약속들이 성취되도록 하는 하나의 신앙 행위로 해석하다.
⓷ 엘리사벳이 한 마리아에 대한 찬미 이후에, 루카는 마리아의 입술에 마니피캇을 놓는다. 그것은 마리아가 구약의 다른 여인들의 자취에 따라 노래했다는 것을 의미하거나 (이것은 R. Laurentin의 입장이다), 또는 적어도 이것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루카 자신에 의해 세밀하게 완성되었을지라도, 예수님의 어머니의 영성에 응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질적으로 마리아의 사고들을 담고 있다». 사실 시편과 한나의 노래의 문장들로 구성된 이 노래는 경건한 사람들과 «주님의 가난한 이들»의 영적 태도를 드러낸다: 하느님께서 자비롭고, 힘 있고, 거룩하고, 충실한 당신의 모습, 백성과의 연대 (처음의 ‘나’로부터 궁극적인 ‘우리’로 가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들의 성취에 대한 희망을 드러내시는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행위로 인한 기쁨.
마니피캇 (루카 1,46-55) | 구약의 본문들 |
46.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 제 마음이 주님 안에서 기뻐 뛰고 (1사무 2,1) |
47.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 내 구세주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리라 (하바 3,18) |
4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 이 여종의 가련한 모습을 기억하신다면 (1사무 1,11) |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 여인들이 나를 행복하다고 할 것이니 (창세 30,13) |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을 거룩하고 | 너희가 두 눈으로 본 대로, 너희를 위하여 이렇게 크고 두려운 일을 하셨다 (신명 10,21) 주님께서 우리에게 큰일을 하셨기에 (시편 126,3) |
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 그분의 자애는 당신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크다 (시편 103,11) |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 당신의 그 힘찬 팔로 당신 원수들을 흩으셨습니다 (시편 89,12) |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 주님께서 통치자들의 권좌를 무너뜨리시고 그들의 자리에 비천한 이들을 앉히신다 (집회 10,14) |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 주님은 가난하게도 가멸게도 하시는 분 (1사무 2,7) 사자들도 궁색해져 굶주리게 되지만 주님을 찾는 이는 좋은 것 하나도 모자라지 않으리라 (시편 34,11) |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 이스라엘 집안을 위하여 당신의 자애와 성실을 기억하셨다 (시편 98,3) |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 먼 옛날 당신께서 저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을 성실히 대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자애를 베풀어 주십시오 (미카 7,20) |
어쨌든, 마니피캇은 마리아에게 일어난 사건들 (주님탄생예고와 방문)에 대한 «영적인 해석», 그러니까 영송의 형태로 «가장 오래된 마리아 신학»을 이루기 때문에 교회적인 큰 가치를 지닌다.
실제로 마니피캇은 낮춤-고양의 역사-구원적 스케마를 마리아의 추이에 적용한다. 낮춤-고양의 스케마에 따르면, 하느님은 비천한 이들을 높이신다: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루카 1,48-49).
이 스케마에 따르면 마리아의 존재의 두 시기가 구별된다: 낮춤의 시기와 하느님께서 하신 큰일과 연결된 고양의 시기. 낮춤의 시기는 자기 비움의 시기, 즉 가난하고, 멸시받고, 당대의 정치 사회적이며 종교적인 지형 안에서 존중받지 못하는, 나자렛 여인의 낮고 비천한 사회적 지위이다.
마리아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야훼의 가난한 이들의 영성에 따라 산다:
마리아는 자신을 «주님의 여종»이라고 공언하고, 주님의 여종의 신앙의 태도들, 내어맡김, 하느님께 대한 찬미, 하느님의 약속들의 성취의 기다림 그리고 숙고적 침묵을 표현한다 (루카 1,38; 1,46-55; 1,45; 2,19.51).
상승의 시기가 이어진다. 상승의 시기에 나자렛의 동정녀는 모든 세대에 칭찬받을 만한 사람이 되고, 영광에로 고양된다. 낮춤에서 영광에로의 이행을 표시하는 분수령은 마리아 안에서 «큰일»을 하신 하느님의 개입에 의한 «상황의 변화»로 형성되었다. 표현은 이집트 (탈출) 또는 바빌로니아의 노예살이로부터 이스라엘의 해방 또는 억압받은 가난한 이의 구원을 불러일으킨다. 마리아에게 있어서 «큰일»은 천사와 엘리사벳이 말했던 신앙심 있는 동정적 모성이다. 하느님은 이번에는 하느님 곁으로 이전된 의인에 대한 구약성경의 스케마에 따라 (지혜 4,10) 그리고 그리스도의 추이와 유사하게 (필리 2,6-11), 하늘로의 승천, 하느님 나라에서의 즉위, 몸의 영광스럽게 됨을 통해, 마리아를 그녀의 삶의 끝에 들어 높인다. 이 시기부터 어머니와 믿는 이로서의 마리아도 하느님과 관계하는 찬미와 축복의 움직임이 강화된다 (루카 1,42.45).
2.2.3. 마리아에게 한 두 번째 알림
예수님 탄생 40일 후에 마리아와 요셉은 주님께 장자를 봉헌하는 예식을 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간다 (탈출 3,1.11ss). 마리아에게는 예수님과 자신의 사명에 관계있는 두 번째 알림의 때이다. 이번에는 천사가 아니라, 이사야에 정통하고 위로자이신 메시아를 기다리는 평신도 노인인 시메온에 의한 알림이다.
랍비들 사이에 익숙한 행위인 팔에 아기를 안은 시메온은 찬가와 신탁을 동반한 두 가지 축복을 한다. 그의 말은 마리아와 요셉을 «놀라게» 하는 하나의 진정한 계시가 된다 (루카 2,33). 찬가인 시므온의 노래 (루카 2,29-32)는 메시아사상을 세계적인 크기로 확장한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영광»일뿐만 아니라, 이사야가 예언했던 대로 «이민족들의 빛»이기도 하다 (42,6; 49,6).
때때로 그리스어 본문에 충실하지 않게 표현된 시메온의 신탁은 «반대받는 표징»인 예수님의 상황 안에서 마리아의 영혼에 하나의 칼을 예고한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이르면서 예수님을 거슬러 세워질 반대는 어머니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어머니의 영혼에 고통이 커다란 칼처럼 급습할 것이다. 이제 아기의 미래는 끝없는 나라의 영광스러운 것일 뿐만 아니라, 반대와 적대로 가득 차 있는 것으로 어렴풋이 나타난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비참한 운명에 내밀하게 참여하는 분으로 예수님 편에 서 있다.
2.2.4. 예수님을 되찾음과 마리아의 숙고적 태도 (루카 2,41-52)
이 이야기는 유년기의 복음을 완결하고 루카의 첫 두 장의 그리스도론의 정점이 된다. 왜냐하면 성부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교리교수적인 이야기이고,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예수님의 파스카 신비를 예고하는 이야기 신학이다.
이야기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나타난다: ⓵ 예루살렘으로 올라감 (고양된 장소), ⓶ 예수님이 하신 계시의 말씀 (예수님의 첫 번째 말씀)과 마리아의 깜짝 놀람/숙고의 태도, ⓷ 자신의 사명을 알아보게 하고 난 이후에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기 위해 나자렛으로 내려감 (루카 2,51a).
a) 예루살렘으로 올라감. 이 단락의 주어는 부모들일지라도, 장면의 주인공은 예수님이다. 열두 살이 된 예수님은 파스카 때 성도에 매년 순례하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 부모들과 함께 간다. 부모님 모르게 예루살렘에 머무는 결단을 취하는 것은 예수님이다 (43절). 그것은 삼일 동안의 찾음, «너의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48절)라는 어머니의 말이 강조하는 것처럼 하나의 깊은 고뇌의 체험을 일으켰다. 이 고뇌는 저승의 불꽃 속에서 있었던 부자의 고통 안에서 병행을 가진다 (같은 단어인 odunámai, 고통을 겪다: 루카 16,24).
b) 계시의 말씀. 예수님은 성전에서 제자로서가 아니라 지혜의 스승으로서 율법 교사들 사이에 머물러 있다 (R.E. Brown): 모든 이의 놀라움을 그리고 나중에는 부모님의 놀라움을 일으키면서 (48절) 율법 교사들의 발치가 아니라 그들의 한 가운데 앉는다.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는 예수님의 응답은 알 수 없고 마리아도 이해하지 못한다.
예수님은 요셉이 아닌 다른 아버지, 즉 성전이 그의 집인 그의 유일한 성부의 아들이라는 그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하기 위해 «너의 아버지와 내가»라는 말로부터 실마리를 얻는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마리아와 요셉은 그를 알아야만 했다. 그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다음의 일람표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이야기의 어휘 안에 있는 파스카 신비의 감추어진 예고이다:
예수님을 되찾음 | 파스카 | |
예루살렘에 올라감 |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루카 2,41-42) |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루카 18,31) |
2. 파스카 축제 | 파스카 축제 때(루카 2,41) | 가서 우리가 먹을 파스카 음식을 차려라 (루카 22,8) |
3. 삼일 | 사흘 뒤에야 그를 성전에서 찾아냈다 (루카 2,46) |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루카 24,7) |
4. 당연하다 |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루카 2,49) |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루카 24,26) |
5. 왜 찾으셨습니까? |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루카 2,49) | 어찌하여 살아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루카 24,5) |
6. 몰이해 | 그들은 알아듣지 못하였다 (루카 2,50) | 어리석은 자들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루카 24,25) |
이러한 전망 안에서 성전에서 예수님을 잃어버림/되찾음은 «유형론적인 의미가 강렬한 하나의 행위»를 나타낸다. 예수님의 행위와 말씀들은 수난과 부활이라는 그의 미래에 대한 하나의 예언이다.
c) 나자렛으로 내려감. 계시 이후에, 예수님은 나자렛으로 내려가 마리아와 요셉에게 복종하면서 그리고 «지혜와 키와 총애» (루카 2,52)가 자라면서 숨겨진 삶을 재개한다. 루카는 마리아의 영적 태도에 관한 한 부분을 주해한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루카 2,51). 보았던 것을 잊지 말라고 모세가 명했었던 이스라엘 백성의 자취에 따라, 마리아는 마음속에, 즉 그녀의 인격의 내적이고 주요한 중심에, 기억의 행사와 함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들과 사건들을 간직한다 (= 적극적으로 생각한다).
같은 반복구가 하나의 상황을 해석하기 위해 상황의 여러 요소들을 비교하면서, 아기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을 마리아가 간직했던 방식인 «곰곰이 되새기면서» (symbállousa=함께 놓으면서, 검토하면서)를 덧붙이면서, 베들레헴에 목자들의 방문 이후에 있다. 현자의 태도이다. 현자는 하느님의 논리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율법의 가르침에 대해 숙고한다 (참조. 집회 50,27-29).
3. 결론적 종합의 시기
마리아라는 이름으로가 아니라 항상 예수님의 어머니로 명시된 (요한 2,1.5.12; 19,25.26) 마리아에 관한 하나의 신학적 종합을 소개하는 것은 사도 요한의 영향 아래 에페소 주변에서 발전된 «요한의 집단» 또는 교회 공동체의 저술들에 속한다 (요한복음, 요한의 세 개의 편지 그리고 묵시록). 그것은 요한 교회의 영역 안에서 마리아가 예수님과의 그리고 그러니까 제자들과의 모성적인 관계로 중요성을 지닌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리아는 «어머니»이다 (요한 2,5; 19,26).
3.1. 예수님의 어머니와 요한 교회의 그리스도론적인 체험
요한은 그의 복음에서 두 번 마리아에 대해 명백하게 말하지만, 서언과 태양으로 둘러싸인 여인 (묵시 12) 안에서는 나타나지 않게 그녀에 대해 언급한다. 그러나 만일 마리아가 사랑받은 제자의 자취에 따라 어머니로 그녀를 받아들이는 요한 교회에 속한다면, 마리아는 그러한 교회의 나타남인 우리에게 관계된다. 우리의 인성 안에 육화하신 말씀에 대한 언급인 두 구절들 안에 마리아의 삽입은 특별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육화에 대한 요한의 체험에 더 충만함을 주기 때문이다.
첫 번째 본문은 서언의 끝에 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요한 1,14.16). 요한의 전례 모임에서 노래된 찬가의 «우리» 안에 육화의 첫 번째 증인인 예수님의 어머니가 포함된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카나에서 신앙에 있어서 그리고 아들에게서 드러난 영광의 체험에 있어서 제자들을 앞선다 (요한 2,11).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요한 1,14)라는 표현은, 그것을 알리는 교회의 일치 안에 마리아의 현존이 포함된다면 충만한 의미를 얻는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어머니의 포함은 그의 충만함에서 «은총에 은총»을, 즉 그의 자애의 충만함을 받는 «우리 모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여기서도 마리아는 공동체를 앞선다. 왜냐하면 주님탄생예고에서 «하느님의 호의의 대상», 즉 «넘치는 은총과 자애의» 대상으로서 인사를 받았기 때문이다 (U. Vanni). 이 인사는 그리스도론적인 의도를 지닌다. 신자들이 무한히 퍼 올릴 수 있는 «자애의 충만함» (요한 1,14)이 있는 그리스도의 곁에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본문은 요한의 첫 번째 편지에 속하고, 전례 공동체에 의한 예수님에 대한 구체적이고 영적인 체험에 관한 것이다: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1요한 1,1-4).
두 가지의 다른 체험들의 문제이다: ⓵ 예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에 의해 명확해진 만질 수 있는 것과 ⓶ 살펴봄을 통해 도달한 영적인 것. 둘은 루카의 증언과 일치하여 마리아를 감싼다. 루카는 «아기를 포대기로 싸서 구유에 눕힐» (루카 2,7) 때 아들과의 육체적인 관계에서, 그리고 마리아가 마음속에 간직했던 예수님에 관한 말씀과 사건들의 숙고 안에서 (루카 2,19.51) 마리아를 소개한다. 제자들 이전에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마리아는 온갖 종류의 가현주의에 반대되는 육화의 사실을 증언한다. 게다가 «하느님의 호의,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능력, 탁월한 신앙은 그녀에게 예수님의 “영광”을 특별히 강하게 살펴보도록 그리고 그녀가 살았던 교회의 영역 안에서 그것을 발산하도록 했다. 마리아는 예수님에 대한 전문가이다».
3.2. 요한복음의 서언 안에서 마리아의 동정성
요한이 예수님의 동정 잉태를 전하는 마태오와 루카 이후에 오는데, 그의 복음에서는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해 보일 것이다. 실제로 많은 연구자들이 서언의 13절에서, 단수로 읽는다는 조건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데 있어서의 마리아의 동정성에 대한 귀한 증언을 알아보았다.
본문 비평의 관점에서 저자들 사이에 일치는 없다. 일반적으로 저자들은 알렉산드리아 지역에서 나오는 그리스어 사본 (2-3세기의 파피루스 Bodmer P 66과 75가 포함된)의 충실함에 바탕을 두고서 복수로 번역한다.
다른 저자들은 (M.-É. Boismard, J. Galot, Hofrichter, McHugh, I. de la Potterie...) 본래의 표현이 온 지중해 지역 안에서 2-3세기의 교부들, 즉 이레네오 (Gallia), 오리게네스와 떼르뚤리아노 (북아프리카), 유스티노 (로마), 이냐시오, 사도들의 편지 (시리아와 팔레스티나)가 증언했던 단수라고 언급한다. 아니 떼르뚤리아노는 단수에서 복수로의 변화를 «선택된 영적인 이들의 신비스런 씨»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발렌티노주의자들 탓으로 돌린다.
복수 | 단수 |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요한 1,12-13) |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그분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분이다(요한 1,12-13) |
내부의 비판은 단수에 우호적일 것이다. 왜냐하면 세 가지의 부정은 믿는 이들에게서는 정당화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자신의 자연적인 탄생을 부정하는 위험을 지니면서, 그들의 영적인 탄생으로부터 육적인 탄생과의 모든 유비를 배제하는 강한 주장을 하는가? 정반대로, «세 가지의 부정은 그리스도의 경우에는 논리적이다; 하나의 “초자연적인 육체적 탄생이 일상적인 탄생에” 대립할 것이다».
남자의 개입 없이 하느님에 의해 태어난 그리스도에 대하여, 요한은 세 가지 것을 명확히 할 것이다: 그의 탄생은 어머니 안에서 피 흘림을 야기하지 않았다 (참조. 레위 12,4-7). 그래서 그의 탄생은 하나의 일상적인 출산을 지니지 않았다; 예수님의 잉태는 남자와 여자의 주도로도, 육적인 결합으로도 일어나지 않았다. 실제로 마리아를 말하지는 않지만, 요한은 예수님을 잉태하고 출산하는데 마리아의 동정성을 이야기할 것이다.
3.3. 카나에서 계약의 여인인 마리아의 현존 (요한 2,1-12)
설화적 관점에서 이 이야기는 세 부분으로 나뉜다.
a) 설명 (2,1-2). 갈릴래아 카나의 혼인잔치의 문제이다. 거기에 두 그룹이 모인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친척들, 예수님과 제자들.
b) 교착 (2,3-8). 포도주가 떨어지게 된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그것에 대해 말하고 종들에게 그의 명령에 따르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종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그리고 그것을 상에 가져가라고 명령한다.
c) 해결과 최종적 요약 (2,9-12). 물은 포도주로 변화되었고, 과방장의 칭찬을 받는다. 최종적인 결과는 제자들의 믿음과 카파르나움으로 내려가는 첫 번째 믿는 이들의 공동체의 형성이다: 예수님의 어머니, 친척들 그리고 제자들이 여기에 가입된다.
설화신학의 관점에서 카나의 이야기는 시나이와 십자가 없이는 이해될 수 없는 과거와 미래라는 두 극점을 언급한다.
3.3.1. 계약의 새로운 시나이인 카나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복음사가가 원한 일련의 병행들은 카나를 시나이산과의 관계 안에 놓는다. 시나이산에서 모세를 통해 백성과 하느님의 계약이 발생되었다.
시나이 | 카나 | |
사흘 | 셋째 날 주님이 내릴 것이다 (탈출 19,11) | 사흘째 되는 날 혼인 잔치가 있었다 (요한 2,1) |
중재자 | 모세가 말씀을 아뢰자 하느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탈출 19,19) 모세가 백성에게 내려가 말하였다 (탈출 19,25) 내가 주님과 너희 사이에 서서 (신명 5,5) |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요한 2,3) 그분의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말하였다 (요한 2,5) |
계약의 선물 | 너희가 내 계약을 지키면 (탈출 19,5) 모세는 계약의 책을 들고 백성들에게 읽어 주었다 (탈출 24,7) | 포도주가 된 물은 [...] 좋은 포도주였다 (요한 2,9-10) |
응답 | 주님께서 이르신 모든 것을 우리가 실천하겠습니다 (탈출 19,8)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실행하겠습니다! (탈출 24,3)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실행하고 따르겠습니다! (탈출 24,7) |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요한 2,5) |
시나이산에서 일어난 것이 이제 다른 인물들과 새로운 양태로 카나에서 실현된다: 중재자의 역할은 예수님의 어머니에 의해 실행된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예수님과 그리고 일꾼들과 말한다; 야훼의 자리에, 탁월한 포도주로 상징된 새로운 계약의 창시자인 예수님이 있다; 계약에 대한 응답은 일꾼들에 의해 예수님의 어머니의 말을 그대로 하도록 하는 초대로서 예수님의 어머니의 입술에 놓여졌다. 중재자 (mediatrice)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하느님과의 계약을 고백하는 첫 번째 사람이다. 구약에서 여성적인 표상 아래 나타난 백성과 마리아의 이러한 일치 때문에,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여인»이라는 일상적이지 않은 이름을 말한다.
3.3.2. 카나와 때의 신비
두 이야기들 사이의 연결은 몇몇 중심 말의 용법으로부터 주어졌다:
카나 | 십자가 | |
예수님의 어머니 | 예수님의 어머니도 계셨다 (요한 2,1) |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가 서 있었다 (요한 19,25) |
여인 |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요한 2,4) |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요한 19,26) |
때 |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요한 2,4) |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요한 19,27) |
이야기의 역동성이 이해가 필요한 수수께끼 같은 표현들을 만난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요한 2,4)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의 놀람과 견해의 차이를 명시하는 구약과 신약에서 잘 알려진 형식을 따라가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예를 들면, 판관 11,12; 1열왕 17,18).
예수님과 마리아 사이의 거리와 분리를 알아보는 이론은 아드님이 어머니의 요청에 따라 개입하고, 이야기 후에 카파르나움으로 함께 내려간다는 사실로 인해 부정되었다. 결과는 예수님이 성부와 상의하고 나서 어머니에게 동의하고, 마리아는 일꾼들을 아들에게로 이끌면서 아들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가지고 행동한다.
그러나 한 차원으로부터 더 높은 다른 차원에로의 이행이, «하느님의 반어»에 대한 요한의 과정에 따르면,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요한 2,4) 라는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는 고유한 것이다. 예수님이 투사되고, 어머니에게 약속하는 때는 기적의 때가 아니라 (마리아가 이해할 수 있었던 것처럼), 수난-영광스럽게 됨의 때이다 (요한복음 안에 있는 8번의 때는 수난-성부께로 되돌아감의 때이다). 카나에서 예수님은 마리아를 골고타 언덕을 향해 정향시킨다. 골고타 언덕에서 마리아에게 그녀의 사명이 계시될 것이다.
3.4. 십자가에서 마리아의 정체성의 계시 (요한 19,25-27)
골고타의 위대한 장면 안에서 어머니와 사랑하는 제자에게 하신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의 말씀들의 이야기가 구별된다. 자녀의 효성스런 행위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야기는 «모두 성경이 알려준 구원계획의 실현에 대해 우리에게 말하는 상황 안에 (요한 19,17-37) 삽입된다». 최고의 신학자인 복음사가 요한은 형이하학적인 사건들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구절의 주석들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그것들의 신학적이며 영성적인 의미를 소개한다.
3.4.1. 계시의 스케마
십자가 아래에 있는 마리아에 관한 이야기는 드 고에트 M. De Goedt에 의해 발견된 계시의 스케마에 따라 구성되었다. 계시의 스케마는 요한복음 안에 4번 있는데, 세 가지 요소를 수반한다: A가 B를 보고 말한다: 보라 B’를, 즉 감추어져 있지만 참인 특성을 지닌 그의 정체성 안에서의 B를 보라.
요한 1,29-36 | 요한 1,47 | 요한 19,25-26 | |
보면서 |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을 보시고 |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와 제자를 보시고 |
말했다 | 말하였다 |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 말씀하셨다 |
보라 |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 보라, 참으로 거짓이 없는 이스라엘 사람이다 | 보십시오,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보라, 네 어머니시다 |
세례자 요한의 계시에 따르면, 예수님이 정말로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것처럼, 그리고 나타나엘이 거짓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계시적 말씀에 따라 정말로 사랑하는 제자의 어머니이다. 사랑하는 제자의 어머니가 되는 것은 구원의 역사 안에서 마리아의 정체성이다.
마리아의 이 모성이 무엇으로 되어 있는지가 아니라, 참이기 위해서는 마리아의 모성이 생명의 전달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이 명시된다: 마리아의 모성은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는 요한의 상황 안에서 이해된다 (요한 3,3-7). 이 때문에 예수님은 최초의 여인이며 살아있는 이들의 어머니인 하와와 관련을 가지면서, 또는 동정녀이며 어머니(2열왕 19,21; 이사 37,22; 애가 2,13; 시편 86,5), 하느님 백성의 인격화인 시온의 딸과 관련을 가지면서 어머니를 «여인»이라고 부른다.
마리아는 비교가 직접적으로 적용되는 사도들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해 (요한 16,21-23), 그러나 또한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에 대해서도 고통으로부터 모성의 기쁨에로 건너가는 출산하는 여인이다.
3.4.2. 제자의 맞아들임
본문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선언 이후에 마리아의 응답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제자의 행동을 강조한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요한 19,27). 이 글자 그대로의 번역은 몇 가지 해설을 요구한다.
때가 이제 분명해 진다: 예수님의 장엄한 때이고, 예수님의 수난/영광스럽게 됨의 때이다. 마리아는 여기에 그녀에게 선언된 모성을 지니고 참여한다.
사랑하는 제자는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의 품에 기대어 앉고 (요한 13,25), 부활 후에는 예수님을 알아보는 (요한 20,8; 21,7) 절친한 친구이기도 하지만, 요한 공동체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은 모든 공동체를 위한 유산이다.
제자에 의한 마리아의 맞아들임은 개방, 수락, 인격적인 관계, 적극적인 사랑을 가리킨다. 요한의 복음 안에서 예수님께만 유보되었던 신앙에 유사한 영적인 태도의 문제이다 (요한 1,11-12; 5,43-44; 13,20).
자기 집에 (eis ta ídia = 자신의 것들 사이에)는 집 (Lagrange)이나 내밀함 (de la Potterie)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특징적인 환경, 즉 공동체, 교회 (Vanni)를 의미한다. 그러한 환경은 예수님에 의해 전해진 선물들이나 가치들인 은총, 말씀, 성령, 성체성사 (요한 1,16; 12,48; 7,39; 6,32-58)로 이루어진다. 예수님과의 친교로 이루어지는 이러한 고유한 가치들 가운데 사랑하는 제자가 맞아들이고 공동체에 넘겨준 어머니라는 선물이 있다.
3.5. 묵시록의 태양을 입은 여인 (묵시 12,1-18)
신약의 마지막 책의 중심에 태양을 입고 (하느님의 사랑스런 돌봄의 대상), 발밑에 달을 두고 (변화하는 시간의 음력을 넘어서기 때문에) 그리고 머리에 열두 개의 별 (지파들 또는/그리고 사도들의 상징)로 된 관을 쓴 여인에 의해 표현된 «위대한 표징»이 놓여진다. 누가 영광스럽게 된 그러나 출산의 고통을 겪는 이 여인인가?
주석가들은 이 여인 안에서 구약에 예고된 (이사 13,8; 66,7; 호세 13,13) 하느님 백성을 알아보는데 동의한다. 하느님 백성은 고통 중에 새로운 사람을 출산한다 (요한 16,19-22).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지속되는 사도 공동체의, 보다 정확하게는 요한 공동체의 문제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악의 상징인 용과의 만남으로 인해 극적이 되어버린 출산에 전념한다. 출산의 열매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탄생으로 해석되었다 (참조. 요한 16,21-22).
이러한 교회적인 차원을 유지하면서도, 주석가들은 묵시록의 여인 안에서 예수님의 어머니의 모습을 알아본다. 세 가지 특징이 둘의 모습 묶는다:
모두 집요하게 여인이라고 불린다 | 묵시 12,1.6.13-17 | 요한2,4; 19,26 |
2. 둘 다 예수님 이외에 다른 자녀들이 있다 | 묵시 12,17 | 요한 19,26 |
3. 그들의 모성은 십자가의 고통에 연결되어 있다 | 묵시 12,2 | 요한 19,26 |
묵시록의 여인은 마리아적 유형론에 따라 상징되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게다가 마리아는 그녀의 모성을 사랑하는 제자에게 확장하면서 하느님 백성을 인격화한다는 점에서, 파스카 신비의 거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다른 병행인 묵시 12와 창세 3,15 사이의 병행은 마리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창세기 | 묵시록 | |
여인 | 나는 너와 여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3,15) | 한 여인이 [...] 나타났습니다 (12,1) |
2. 뱀 | 하느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다 (3,14) | 그 큰 용, 그 옛날의 뱀 (12,9) |
3. 후손 |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3,15) | 용은 여인의 나머지 후손들과 싸우려고 그곳을 떠나갔습니다 (12,17) |
4. 출산의 고통 | 너는 괴로움 속에서 자식들을 낳으리라 (3,16) | 출산이 진통과 괴로움으로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12,2) |
묵시록 12장 전체는 «창세 3,15에 대한 하나의 해설, 하나의 그리스도교적 미드라쉬이다». 뱀이 사탄이고 여인의 후손 또는 씨가 그리스도라면, 여인은 실질적인 또는 유형론적인 의미 안에서 마리아 이외에 다른 이들일 수 없다. 이것이 타락과 구원에서의 하느님 계획의 조화에 따르는 유스티노와 이레네오의 명확한 결론일 것이다.
4. 궁극적인 중요성들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계시의 충만함, 구원의 유일한 중재자, 선포의 핵심이며 신앙의 직접적인 목표인 그리스도의 인격 앞에 우리를 놓는다. 이것으로부터 마리아가 그리스도교의 중심이 아니고, 그래서 어떤 식으로도 그리스도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마리아가 점차적으로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고 «명백히 한 부분으로 놓여진다» (K. Barth)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성경학자 앙드레 푀예 André Feuillet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마리아의 모습을 심화하기 위해서 구원의 역사를 조사하는 것이 필요하고, 반대로 구원의 역사를 철저히 연구하는 이는 필연적으로 구세주에게 풀 수 없는 끈으로 결합된 구세주의 어머니를 만난다.
인성에 따라 하느님의 말씀을 낳았기 때문에 구원의 역사 안에서 그녀의 임무는 유일하고, 그녀의 모성적 역할에 대한 찬미와 신앙의 맞아들임 안에서 그녀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요구한다.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신비의 심화에 속하고, 교회 안에서 찬미를 받아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구원의 역사 안에 삽입된 마리아는 충실하게 그녀의 임무를 수행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신약성경은 다른 신학적인 각도들과 다른 문화적인 자극들이 마리아를 익명 안에 놓으면서 (바오로), 마리아를 불신앙의 가문과 혼합하면서 (마르코), 마리아에 대해 완전한 침묵을 지키면서 (사도들의 편지들), 끝으로 그리스도론적이며 교회적인 빛 안에서 마리아의 역할과 특성을 발견하면서 (마태오, 루카 그리고 요한) 마리아의 모습을 얼마나 좌우할 수 있는지를 가르친다.
앞선 그러나 결정적은 아닌 시기에 자신을 고정시키는 것은 계시 안에서 진보를 감지하지 못하는 것을, 마리아에 대한 더 깊은 시각을 빼앗긴 것을, 성인전기 작가들의 여러 시각들을 해소할 수 없는 대조 안에 놓는 위험을 무릅쓰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으로, 신약성경에 따르면, 마리아는 구원 계획안에 하나의 단순한 출현이 아니라, 특별한 주목을 받을만한 하나의 «신학적인 주제»가 된다. 동정녀는 그리스도의 축복받은 태로, 아들의 초월에 대한 경외 안에서 아들의 신비에 결합된 신앙의 여인으로, 하느님의 흩어진 자녀들을 그리스도의 성전 안으로 다시 모으는 시온 어머니로 나타난다. 그러나 모든 극대주의와 극소주의를 거슬러, 구세주 그리스도께 대한, 그녀가 노래했던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에 대한, 하느님의 아드님을 동정적으로 잉태하기 위해 그리고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아드님의 복음을 살기 위해 그녀가 받은 성령에 대한 마리아의 구성적 관계성을 인식하는 것은 본질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