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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의 유래와 현대적 의미>
1.성과 본관의 역사 우리나라의 모든 사람은 성과 이름을 가지고 있다. 성과 본관은 가문을 나타내며, 이름은 가문의 대수를 나타내는 항렬을 따라 짖고 있다. 물론 항렬을 무시하고 한글로써만 이름을 짖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성을 바꾸지는 않는다. 김`이박 등의 성은 출생의 계통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며, 경주 전주 밀양 등의 본관은 개인의 시조가 난 곳을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성관이란 의미는 각 개인의 지역적 혈연적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용어이다. 전근대사회에서 이러한 성과 본관문제는 신분사회에 있어 혈통의 귀천과 집안 품격의 높고 낮음을 판정하는 기준이 되었다. 그리하여 과거시험에 응시하거나 관리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크게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혼인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1) 성관의 기원 우리나라 성관의 구체적인 모습은 {세종실록지리지}의 성씨조에 잘 나타나 있다.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중국의 성씨제도 영향을 받아 왕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수용되었다. 그러나 신라가 삼국통일을 함으로써 고구려와 백제계의 성씨는 계승되지 못하였고, 후삼국시대에는 지방호족들에 의해 신라계 성씨를 중심으로 중국식 성씨가 적극적으로 보급되었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는 각지의 호족들에게 그 지역을 근거로 하는 성씨를 나누어줌으로써, 성과 본관을 토대로 한 성관체제가 본격적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의 각 읍 성씨조에 의하여 15세기 초에 존재했던 전국 성씨의 종류와 본관 수의 성종별 통계자료를 제시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본관상의 성씨가 기재된 현 이상 주 부 군 현(속현 폐현 포함)은 모두 544읍, 부곡은 110개, 향 48개, 소 49개, 장 9개, 처 5개, 역 7개, 수 3개소이다. 향 소 부곡 등은 벌써 고려후기 이래 소멸의 과정을 밟아 15세기 초에 와서는 거의 혁파되어 토착 성씨들이 유망했기 때문에 기재된 성관이 얼마되지 않았으나, 임내로 존속했던 고려 말 이전에는 각기 토성이민이 있었던 것이다. 둘째, 성 수는 대략 250성 안팎이며, 성관 수는 토성이 2,079 망성이 565, 래성이 381, 속성이 565, 촌성이 122, 입진성이 404, 입성이 332, 사성 투화성이 29, 합계 4,477본이었다.
각 성이 가지고 있는 본관은 어느 구획을 막론하고 기본적인 구성단위가 촌이다. 그 촌은 다시 읍치(치소 읍내)를 중심으로 내촌과 주위의 외곽촌 및 관내의 각종 임내로 구분된다. 각 읍별로 나누어진 토성들은 세력의 확장에 따라 읍치에서 외곽의 직촌 또는 해당읍의 소속 임내로 확산하면서 분관 분파 작용을 일으켰다. 이러한 성관의 분포와 이동은 활발히 진행되어 당초의 토성이 다른 성으로 흡수되기도 하고, 새로운 촌성이나 향 소 부곡성이 생기기도 하였다.
(2) 고려시대의 성관 후삼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지배계층인 호족은 사성· 모성· 자칭성 등의 수단을 통하여 성씨를 취득하게 되었다. 통일신라의 군현 조직체계와 후삼국시대 호족의 군현 지배기구를 이어받은 태조 왕건은 후삼국 통일 사업을 완수한 다음 전국 군현의 개편작업과 함께 전국 군현별로 각기 토성을 분정(分定)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성씨체계가 비로소 확립되었다. 이를 계기로 성씨가 귀족·관료에서 점차 양민층으로 확대되어갔으며, 천민층의 양민화에 따라 성씨를 새로 취득한 계층이 후대에 올수록 늘어갔다. 한자성화 그 자체가 중국 성씨제도의 모방인 이상 고려왕조의 전국적 성씨 분정책도 중국의 성족분정, 씨족지· 성씨록의 편찬·반포 및‘천하군망표(天下郡望表)’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한편 고려초기 이래 지역을 세분하여 파악되었던 성관체제는 여말선초의 시대적 사회적 변동에 따라 지역적인 편제와 신분구조에 획기적인 변화를 초래하였다. 즉 군현 구획의 개편과 병합, 폐합 등 각성이 딛고 선 본관의 개편과 변질로 인해 종래의 세분화 되었던 본관이 점차 주읍을 중심으로 통합되어가는 추세로 바뀌었다. 다시 말하면 속현과 촌 및 향 소 부곡 등이 소속 군현에 통합되었듯이, 종래의 속현성과 촌성 및 향 소 부곡성이 군현성에 흡수되거나 동화되어 갔다.
또한 속현 향 소 부곡과 독자적인 촌이 소멸되듯이 그곳을 본관으로 했던 성씨가 이제는 당초의 본관을 버리고 소속 군현성에 흡수되거나 그 주읍을 그들의 새 본관으로 정했던 것이다. 그 결과 15세기 초까지 성관체제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반영했던 {세종실록지리지} 소재 속현 향 소 부곡 처 장 역 수 촌을 본관으로 했던 성씨 대부분이 그 소속 읍을 세 본관으로 하게되자 15세기까지 존속했던 각종 임내성이나 촌성은 거의 사문화 되어버렸다. 이러한 사문화는 본관을 고침으로 인한 현상이지 그 성 자체가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3) 조선시대의 성관 한편 양반사회의 발달에 따라 문벌의식이 고조되자 미처 현명하고 덕망을 갖춘 조상을 배출하지 못한 한미한 가문은 명문거족에 동화되기 위하여 본관을 바꾸는 행위를 자행한 데서 재래 성관의 대대적인 통폐합이 이루어졌다. 또한 천민층의 양인화에 따라 유인층이 격증하게 되었는가 하면, 일반 서민층은 각기 거주지에서 편호됨으로써 새로운 본관이 생겨났다. 이들 성이 없던 천민층이 점차 성을 갖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성씨의 출현은 거의 없었다. 그것은 이들이 기존의 유명성씨를 선택함으로써 김 이 박 최 정씨 등이 각지에 산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17세기에 이르면 희귀한 성과 유명하지 못한 본관을 멸시하는 관념이 만연되어 갔고, 성보다는 본관에 따라 성망의 우열과 집안 품격의 차등이 정해진다는 의식이 따라서 성을 바꾸는 것보다는 본관의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경우가 많았다. 16세기이래 사족들은 본관이 다르다 해도 동성이라면 그것은 당초 같은 조상에서 나왔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다소 한미한 가문이 명문가문으로 본관을 고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이와 같이 본관을 바꾸는 행위는 분관 전의 원 본관으로 회복한다는 의미를 갖기 때문에 처벌의 대상은 되지 않았다.
이에 반해 성은 부계혈통을 의미하기 때문에 성을 바꾸는 것은 곧 아버지와 조상을 바꾸는 행위로 간주되어 죄악시되었기 때문에 극히 드물었다고 추측된다. 조선후기 각 읍 호적 대장상에 나타났던 무명의 본관들은 주로 현 거주지와 일치하는 본관들이었다. 이 본관들은 19세기이래 그들의 양반화에 따라 본관을 바꾸면서 서서히 소멸되어 갔다. 이러한 사정에서 조선초기에 4,500개가 넘던 성관이 오늘날에는 도리어 1,000여개가 줄어든 3,400여개에 이르게 되었다.
2. 족보의 편찬과 변천 족보란 한 가문의 내력과 씨성의 계보를 밝혀 놓은 말하자면 일종의 氏姓史 내지 가문의 역사이다. 직계조상의 계보만 간단하게 기록한 휴대용의 작은 가승에서부터 시조와 그 아래 생존하는 수천 수만의 자손을 세대의 차례에 따라 모두 기재하는 대동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와 같이 오늘날 대다수 가정에서 보유하고 있는 족보는 비록 형태는 각기 다르지만 조상 대대로의 계보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러한 족보는 과연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우리나라에서 혈연을 중심으로 하는 가계의식이 형성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가계기록이 만들어진 것은 아주 오랜 전통이다.
특히 고려시대 지배계층인 귀족집단은 자신들의 특권의식을 고취하기 위하여 직계조상을 주로 적는 독자적인 가계기록을 만들었다. 고려후기에는 자신의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조상의 계보를 멀리 끌어올리는 한편 모계와 처계 및 사위와 며느리의 가계를 종합한 가계기록물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 이래 내외조상의 세계와 족파를 증빙하는 자료인 호적과 호구단자 등이 고문서의 형태로 전래되었고, 이것들이 조선시대에 세보 또는 족보라는 용어로 일반화되었다.
(1) 족보의 출현 족보가 처음 출현한 것은 1423년(세종5년)으로 이때 간행된 문화유씨의 {영락보}가 최초의 족보로 알려져 있다. 이 외에 문헌상으로 볼 때 1441년에 {남양홍씨정통보}가, 1451년(문종 원) {진주하씨경태보}가 각각 만들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현재 남아있지가 않다. 현재 남아있는 족보로서 가장 오래된 것은 규장각에 있는 1476년에 간행된 안동 권씨의 {성화보}이다. 결국 15세기에 처음으로 족보가 만들어진 이래 조선 후기로 내려올수록 종족에 따라 각기 족보를 간행하여 왔다.
그리고 족보의 종류도 매우 다양하다. 가계의 기록 혹은 가족계보에 관한 글이라는 점에서 보면 개별적인 가계 기록인 가첩이나 가승·내외보·팔고조도 등도 족보의 범주에 포함되어야 한다. 가첩이나 가승은 동족 전부가 아닌 자기 일가의 직계에 한하여 발췌, 초록한 세계표를 지시하는 것으로 구분하기도 하나 대체적으로 족보와 같은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족보의 일반적인 명칭은 세보·족보·파보·가승·대동보·가보·가승보 등 약 60여종에 달한다.
(2) 족보편찬의 목적 한편 족보 편찬의 목적은 어디에 있었을까. 일차적으로는 종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그 친목활동을 활발히 하며, 동족 내부의 질서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즉 조상의 좋은 가풍을 이어 받고 조상의 유덕을 추모하는 소위 尊祖와 친척간의 촌수를 밝혀 멀고 가까운 것을 알게 하며, 씨성 내부의 상하질서를 확립함으로써 화목을 돈독하게 하는 소위 收族이 족보 간행의 직접적인 취지이다.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사회현실이 족보를 기준으로 사회계층을 구분하고, 구분된 사회계층에 따라 각종의 특권과 지위가 달라지는 양반사회였기 때문에 족보의 소유여부는 대단히 중요하였다. 결국 당시의 사회체제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떠한 형태를 취하는 족보를 소유하여야만 하였다. 이와 관련되는 보첩류가 17세기 이후로 내려올수록 쏟아져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3) 족보의 구성요소 족보의 편찬체제에 있어서 그 구성요소는 대체적으로 일정한 원칙을 가지고 있다. 먼저 서문과 발문이 실려있고, 記 또는 誌, 도표, 편수자의 이름, 범례, 계보표 등의 순서로 편제되어 있다. 서문에서는 족보 일반의 의의와 동족의 연원 및 내력, 족보 편성의 차례 등을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발문은 대체적으로 서문과 비슷하나 족보편찬의 경위가 좀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직계후손 가운데 학식있는 사람이 집필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記 또는 誌에서는 시조나 중시조의 전기와 묘지문·제문·행장·언행록·연보 등을 기록하며, 도표에서는 시조의 분묘도·시조 발상지에 해당하는 향리의 지도 등이 삽입된다. 이어 족보 편찬작업을 담당한 편수자의 이름이 기록되고, 기록의 차례를 밝히는 범례가 있다. 이어 계보도는 족보의 중심부분으로서 시조로부터 편찬자에 이르기까지의 가계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각각의 사람에 대하여 이름 ·자호·시호·생몰연대·관직·과거시험성적·덕행·충효·문장·저술·묘지의 위치 등 일체의 신분관계를 기입한다.
(4) 족보내용의 변화 한편 족보에 기록되는 내용이나 형식은 조선전기와 후기가 완전히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대체적으로 수록 자손의 범위, 남녀 서열의 차이, 양자에 대한 변화, 항렬의 사용 등에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먼저 수록 자손의 범위와 관련하여 전기에는 외손과 친손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동등한 자격으로 기록하였으나 조선후기에는 외손의 기록이 사라지고 사위의 이름만을 기록하고 있다.
즉 조선초기에 남아있는 족보에는 사위뿐만 아니라 다른 성씨를 가진 이름이 자주 나오고 있으며 이들은 외가쪽임을 보여주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시기를 나눈다면, 16세기까지는 대체로 외손과 친손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족보에 이름을 기재하였으나, 17세기에 이르면 일부 종족에서 외손의 범위를 3대로 한정하여 등재하였고, 18세기에는 대다수의 종족이 외손을 3대로 한정하여 기록하였다.
이것은 당시의 사회분위기가 외가나 친가를 모두 동등한 상태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조선후기에 이르러 이른바 성리학이 가치규범으로 뿌리를 확립하면서 남성위주의 사회체계로 변화되어 친족만을 대상으로 족보에 기록하였던 것이다.
둘째로 조선초기의 족보에는 아들과 딸을 구별하지 않고 출생의 순서에 따라 차례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아들만을 먼저 출생 순서에 따라 기록하고 딸은 맨뒤로 기록하였다. 이 기록 순서의 변화 역시 부계위주의 사회체제를 선호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라 할 것이다.
셋째로 조선초기에는 장남이 아들이 없을 경우 차남이나 그 이외의 아들이 가계를 계승하였고, 모두가 아들이 없을 경우에는 양자를 들여서 가계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장남만이 가계를 계승하는 형태로 변화되었다. 그리하여 장남이 아들이 없을 경우 동생들의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을 장남에게 입적하여 가계를 잇도록 하였으며, 전부가 아들이 없을 경우 먼 친척의 자손 가운데서 입양하는 방법을 사용하여 반드시 가계를 계승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종가의 대가 끊겨서는 안 된다는 강한 의식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남아선호사상의 한 원인이 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넷째로 항렬자의 경우 조선전기에는 형제나 4촌간에만 항렬자를 썼으나 조선후기에 이르러 8촌 이상으로 확대되었다. 항렬은 오행의 원리를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서 20세기에 와서 가문의 항렬을 결정한 예도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항렬의 확대적용은 동족간의 조직성과 통제성을 보다 확고하게 함으로써 다지고자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3. 족보의 위조 조선시대는 신분제사회였으며 지배계층인 양반을 증명하는 하나의 도구가 족보였다. 따라서 양반과 중인은 대부분 족보가 있었으나 대다수 농민이나 천민은 족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심지어 천민의 경우에는 성씨도 없이 이름만 '개똥이' '돌쇠'등으로 불리웠던 시대였다. 농민과 천민들은 시조로 삼을 만한 인물은 물론이고 직접적인 조상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뿐만 아니라 족보를 편찬할 만한 경제적인 기반이나 혈연적 기반도 갖추고 있지 못하였다. 이들이 양반으로 신분을 상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족보가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돈이 있는 집은 돈을 주고 족보를 샀고, 경제력이 없는 집은 몰래 남의 족보를 훔쳐 다른 곳으로 이사가 양반 행세를 하곤 하였다. 일부 양반의 경우도 한미한 가문은 자신의 본관과 성씨를 바꾸면서까지 족보를 위조하였다. 여기에는 최하층인 노비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들은 자신의 거주지에서 도망하여 의복을 농민이나 혹은 양반으로 위장하고 남의 족보를 훔쳐 자신의 이름을 만들어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아무도 알지 않는 낯선 곳으로 이주하여 정착생활을 하다가 자신의 신분이 탄로 나면 다시 다른 곳으로 도망하곤 하였다. 어찌되었든 오늘날 우리나라의 모든 사람가운데 자신의 조상이 노비라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두가 이름이 있고 성관을 가지고 있으며, 그에 따라 대다수가 족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현재는 양반이라고 하는 의미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이다.
그러나 그 역사적 근원을 따져 올라가면 많은 수의 족보가 위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위조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이후 조선사회는 전통적인 명문들의 몰락과 침체, 신흥세력의 등장과 같은 신구세력의 흥망성쇠가 거듭되었다. 종래의 명문들은 조상의 영광과 가문의 명예를 지키고자 노력하였고, 반면에 한미한 출신에서 성장한 신흥세력들은 미천한 조상세계를 은폐하고 혈통과 가문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 본관을 바꾸거나 심지어 조상의 세계를 적당히 조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16세기 말이래 사족이 이족을 멸시하는 풍조가 만연되자 고려시대 향리의 후예로 사족이 된 성관들은 조상들의 향역에 대해 구차스러운 변명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고려사}나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석문 및 문집과 같은 공간된 자료상에 나타나는 조상의 직역은 손대지 못한 반면, 공간되지 않은 자료(가첩호구단자행장비문)에 나타나는 향리 관련자료는 대부분 그 후손에 의해 개변되거나 삭제되었다.
17세기 말이래 현조를 확보하지 못한 신흥세력들은 기존의 명문거족과 연결시키기 위하여 본관을 바꾸거나 투탁하기도 하며, 동성이라도 파계에 따라 현조가 없는 계열은 현조가 있는 계열과 세대를 적당히 연접하여 족보를 합하는 예가 많았다. 특히 17세기이래 성관에 대한 우열관념이 만연되면서 개관과 세계조작이 많아졌다. 즉 국가의 褒忠奬節策의 장려로 조상세계를 신라 말 또는 고려 말의 충절인사, 왜란 호란 때의 의병장 순절인, 포은 목은 퇴계 남명 율곡 우계와 같은 유현의 문인과 연결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세계가 제대로 연접되지 않은 파계는 '별보'로 처리하였다. 특히 18세기부터 족보 편찬을 둘러싸고 적서간 또는 사이족 간의 갈등이 심각하게 드러나는가 하면, 신흥세력들은 명문거족에 투탁 연접하려는 움직임이 집요하게 나타났는데 그러한 것에는 가첩가보호구분재기입양문서 등을 위조하거나, 가짜 지석을 발굴하거나, 명문족보의 先代無後系와 연결하거나, 형제 수를 늘려 끼우거나, 한 대수를 삽입해서 연접하는 등의 협잡이 자행되었다.
그러한 협잡 외에도 벽관들은 아예 개관하여 기존의 명족파계에 연접하는 경우, 동성동본의 여러 파들 가운데 명조가 없는 파계들은 명조가 있는 일족의 세계에 연접하여 합보하는 경우, 비양반이 일정한 부를 갖고 가난한 기성사족을 찾아서 족보 편찬 경비를 부담함으로써 합보하는 경우 등이 있었다.
조선왕조의 집권세력이 16세기에 이르러 훈구파에서 사림파로 넘어가자 의리와 명분론 및 벽이사상(闢異思想)이 강조되어 두 왕조를 섬긴 정도전·권근·하륜 등과 불교를 단호하게 배척하지 못한 이제현·이색 등이 비판의 대상이 되고, 그 대신 두 왕조를 섬기지 않은 정몽주·길재 등 절의 인사가 숭앙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관념은 15세기 후반 세조의 왕위찬탈 후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구도로 더욱 구분되어갔다. 사림파 세력의 성장 추세에 비례하여 의리와 명분 문제가 더욱 숭상되자 한미한 가계나 신흥세력들은 자기 조상을 여말의 수절 인사와 단종 충신과 결부시켜 조상세계를 정리하고자 하였다. 차씨 인사에 의해 {車原雪寃記}가 편찬되었고, 선산 김씨 인사에 의해 고려 말 김주의 충절 사실이 조작된 예가 그것이다. 또한 인조반정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의리 명분과 존주사상이 고조되고 숙종조 단종복위와 사육신 등의 신원, 영조의 개성행차 때 부조현 입비와 두문동 72현 추숭과 같은 국가적인 포충장절책에 편승한 신흥세력의 조상세계 조작과 함께 위보가 속출하기도 하였다.
양반들 사이에서는 명조현조를 확보해야 한다는 집념이 작용하여 조상세계를 조작 소급하는 풍조가 만연되어 갔다. 18세기이래 박씨는 혁거세, 김씨는 알지나 경순왕 또는 수로왕, 이·최·정·손씨 등 신라 6성에, 조·강·홍·임씨 등은 중국의 유명 성에 소급 연접시키는 현상이 나타났다. 한·기·선우씨는 마한 내지 기자까지, 민족의 시조인 단군까지 소급 계보화하려는 데서 조상세계가 지나치게 소급한 제성 족보와 함께 {환단고기}{규원사화}등의 위서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조선초기 또는 중기에 중간 정리단계를 거친 조선전기 족보는 대체로 사실에 충실한 반면 18세기와 19세기 이후에 창간된 족보는 당대인들의 수록에는 큰 문제가 없었으나 그 성관의 유래와 선대 세계에 관한 서술은 크게 사실과 어긋나 있다. 한말과 일제 때는 조선전기부터 족보를 편간했던 명문거족들의 족보 속간이 더욱 활발했는가 하면 북한지방과 신흥세력들에 의한 족보의 창간도 많았다.
일제 때 편간된 족보는 그 견본이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있는데 각 성관의 득성 유래와 조상세계관직 등은 사실의 고증 없이 조작되어 있다. 1930년을 기준으로 당시 한국인 성의 총 수는 250종이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 약 절반인 125성이 일제강점기에 족보를 간행하였다고 한다. 광복 이후에 간행된 족보들은 현재 대전시의 회상사 족보도서관을 비롯하여 각 시도의 공공도서관 족보실에 소장되어 있다.
그 내용은 일제 때의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이러한 족보들은 구보를 영인하여 게재하거나 구보의 서발문범례, 또는 조상들의 호구단자교지행장비문 등 원자료를 등재하여 신분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족보는 충분한 고증을 하지 않고 원형이 변질된 것과 성관조상세계가 조작된 그런 것들이 범람하고 있다.
4. 족보의 가치와 현대적 의미 이상에서와 같이 비록 많은 족보가 위조되었다고 할지라도 족보의 역사적 가치는 다양한 관점에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족보는 조선시대 가족생활사의 변천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사료이다. 조선초기의 족보체제가 부모와 자식으로 이어지는 직계의 계보에서부터 아들의 아들로 이어지는 것, 딸의 딸만으로 이어지는 것, 딸과 아들이 다양하게 들어가는 것 등 총계적이고 양측적인 계보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하던 것이 조선후기에는 오로지 부계위주로만 가계가 이어가는 것으로 변모하고 있고 오늘날까지 이러한 사상은 우리에게 정형화되어 있다.
이러한 변화상을 통해 우리는 조선초기의 가족 생활사에서 남녀가 어느 정도의 균형적 대우와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는가를 족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족보에 기록되어 있는 각종 고문서들의 자료도 매우 귀중한 것이다. 조상 가운데 뛰어난 덕행과 학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경우 그의 문집이나 공신록·교서·묘지명 등을 기록하는데 이들은 당시의 정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들이다.
나아가 조선시대 가족제도에 있어서 양자제도의 변화와 종가제의 출현 및 활성화 과정에 관한 기초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 족보이다. 그리고 친족제도의 거주율 연구나 인구사의 변화, 성씨별 문중조직의 성립, 혼인제도의 실상 등에 있어서도 족보는 그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것이다.
19세기 이후 위조된 족보가 많으며, 자신의 가문을 위대하게 포장하는 것이 무조건 좋은 것으로 잘못 인식하여 정확한 사실에 바탕을 두지 않고 허위를 기록한 사례가 나타나고 있음은 족보의 가치성을 떨어뜨리는 일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족보를 손쉽게 역사적 사료로 이용하는 데 주저하도록 만드는 요인이다. 그러나 역사 사료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양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따라서 정확한 고증과 분석을 통해 족보의 가치성을 밝혀내고 오류를 바로잡을 때 그 가치는 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현존하는 족보의 세밀한 목록과 함께 많은 자료를 발굴하여 전산화하는 것이 시급하다.
한편 현대에 있어서 족보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비록 조선시대의 양반들이 추구했던 족보의 용도는 아닐지라도 아직까지 몇몇 소수의 계층에서는 가문을 따지면서 혼인을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결혼은 개인과 개인이 하는 것이 아니라 가문과 가문이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심지어 상대방의 족보를 보자는 요구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럴 경우 족보가 없는 집안은 혼인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분명 현대 민주사회가 지향하는 직업선택의 자유나 결혼의 자유에 위배되는 것이다. 심지어 국제적인 결혼도 이루어지는 세상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족보는 필요 없는 존재라고 하는 것도 잘못이다. 족보란 가문의 역사이듯이 개개인이 출생과 죽음을 기록하면서 자손과 조상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다. 그러한 면에서 "가문의 높고 낮음을 가리는 척도로써가 아니라" 선조들이 오늘의 우리에게 베풀어준 은덕을 마음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그 정신을 이어가는 촉매제로써 족보 의미를 되새겨야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출처] [본문스크랩] 족보의 유래와 현대적 의미|작성자 소백산농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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