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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5. 04
“내가 당한 일 다시는 남들이 겪지 않게” 피해자 단체 만들어 수십 년 진실 투쟁
영국에서 오래 살다 보면 사람들의 융통성 없음에 속이 뒤집히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적응이 안 된다. 얼마 전 부활절을 맞아 이웃에 선물할 케이크를 사러 슈퍼마켓에 갔다. 케이크를 사갖고 나와 차에 넣으려다 보니 케이크의 한쪽 모서리가 찌그러져 있었다. 조금 망설이다 바꾸러 갔다. 내가 먹을 것이면 문제없는데 선물용이라 바꿔야 할 것 같았다. 망설인 이유는 이 멀쩡한 식품을 반환하면 고지식하기 짝이 없는 영국 판매원들이 그냥 버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영국 슈퍼마켓 식품 판매 매뉴얼에는 식품이 반품되면 무조건 폐기처분하도록 되어 있다.
손상된 케이크를 반품받고 새것을 내줄 판매원은 해당 코너 담당이 아니었다. 담당이 자리를 비워서 옆의 육류 저장식품 담당 판매원이 처리를 해주려고 나섰다. 이때부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판매대 뒤로 들어간 판매원은 자신이 입고 있던 흰색의 위생복을 벗고 새 옷과 모자 그리고 마스크에 장갑까지 끼고 나왔다. 그리고는 천천히 모자를 고쳐 쓰고 위아래 옷에 달린 열 개도 넘는 단추를 천천히 하나하나 끼우는 것이 아닌가.
육류 취급 시 입었던 복장으로는 빵과 케이크류를 취급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는 듯했다. 직접 식품을 만지는 것도 아니고 포장된 케이크 박스를 꺼내 오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모자를 고쳐 쓰고 마스크도 단단히 여민 뒤 식품창고로 들어가 새로운 포장의 케이크를 가져다 건네주었다. 간단한 케이크 교환에 거의 20분이 걸렸다. 성질 급한 사람 같았으면 보다 못해 고함이 몇 번은 나왔을 시간이었다. 영국인의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이 매뉴얼을 따르는 전형을 본 듯했다.
이런 일은 은행에서도, 슈퍼마켓 계산대에서도, 공항 체크인 카운터에서도 비일비재하게 벌어진다. 내가 왜 이렇게 장황하게 영국의 사례를 늘어놓는지를 이제 설명해야 할 듯하다. 영국인은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서두르거나 대충하지 않는다. 거쳐야 할 절차는 반드시 매뉴얼대로 다 밟아야 하고, 따질 것은 다 챙기고 나서야 다음 일로 넘어간다. ‘대충해라!’ ‘융통성이 그렇게 없어서 세상을 어떻게 살려고 그러냐?’ ‘요령껏 해라!’ ‘저러다가 날 새겠다!’ ‘원칙 규칙 다 따져서 되는 일이 세상에 어디 있어!’ ‘좋은 게 좋은 것이야!’…. 이런 얘기가 영국 사회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영국인들이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다 보니 일 처리 속도가 느리고, 그래서 영국이 ‘해가 지는 제국’이라고 해도 별로 논쟁을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작은 일부터 큰일까지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영국을 이끌어 가고 지탱하는 힘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최소한 영국에서는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 ‘꽉 막힌 벽창호’라는 비판은 없다. 이런 원칙 고수 덕분에 자주 답답해서 뒤집어질 정도이지만 그래도 영국이 안전하고 믿음직스럽긴 하다.
물론 영국이라고 대형사고 한 번 나지 않는 완벽하게 안전한 곳은 아니다. 영국도 과거에 수많은 대형사고가 있었다. 단지 영국이 한국과 다른 점은 대형사고나 사회정의가 흔들리는 일이 발생하면 그로부터 뼈아픈 교훈을 얻어 다시는 그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게 제도를 보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우직할 정도로 원칙을 지켜 나가기 때문에 거의 같은 사고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뼈아픈 교훈을 얻어내는 과정은 대개 비슷하다. 사고가 나면 몇 년이 걸리더라도, 어떤 어려움을 겪더라도 철저한 사고 조사 보고서가 만들어진다. 보고서는 사고 원인은 물론 어떤 보완조치를 해야 그런 사고가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는 각종 개선 권고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보고서가 발표되면 철저한 사회적 검증을 거쳐 차근차근하게, 그리고 반드시 문제점들이 개선된다. 때에 따라 보고서가 완벽하지 않고 사실을 왜곡한 경우 피해자 가족들이나 각종 사회단체가 압력 그룹을 만들어 오랜 시간을 두고 꾸준하게 합법적인 캠페인을 벌여 사회정의가 이루어지도록 한다. 그렇게 해서 영국 사회는 천천히, 그러나 바른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이제 그런 예를 몇 개 들어 보자.
▲ 2011년 4월 영국 리버풀에서 열린 ‘힐스버러 축구장 압사 사건’ 22주년 추도식. / ⓒ AP
지금 영국 사회를 다시 들끓게 하고 있는 ‘힐스버러 축구장 압사 사건’(1989년 4월 15일)을 보자.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 클럽 간의 영국 축구협회컵(FA Cup) 준결승전이 셰필드의 힐스버러 축구장에서 열렸다. 경기 시작에 맞춰 몰려든 리버풀 클럽 응원단이 입석 경기장 안으로 몰려들어 96명 사망, 766명이 중경상을 입은 세계 축구 역사상 가장 참혹한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경찰은 이미 발 디딜 틈도 없이 서 있던 스타디움 안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출입구를 개방해 버렸다. 그 결과 이미 들어가 있던 입석 좌석의 팬들이 압사당한 것이다. 현장을 관리하던 경찰과 경기장을 소유하고 있던 셰필드 웬스데이 축구클럽이 사태를 안이하게 판단해 군중 관리를 제대로 못해서 생겨난 대형 비극이었다. 그런데도 사고 후 1년 뒤인 1990년에 나온 ‘테일러 보고서’는 사고에 특별히 책임질 사람이나 기관은 없고 ‘음주한 리버풀 팬들의 횡포가 사고의 가장 큰 원인’이라는 결론을 냈다. 더욱이 당시 타블로이드 신문 ‘선(Sun)’은 ‘술 취한 리버풀 팬들이 횡포를 부렸고 심지어 시체에서 지갑을 빼내고 그 위에 방뇨를 하고 구조활동을 벌이던 경찰을 폭행했다’는 헛소문을 기사로 실었다. 오랫동안 이런 헛소문이 영국에서는 진실로 받아들여졌다. 테일러 보고서와 경찰이 제출한 증거로 열린 재판에서도 ‘사건은 피할 수 없었던 사고였고 일부 경찰의 판단착오도 있었지만 처벌을 받을 정도는 아닌 것’으로 결론이 났다. 사건은 아무도 제대로 책임지는 사람이나 기관이 없이 끝나는 듯했다.
그런데 문제는 ‘사고 원흉’으로 지목된 리버풀 팬 유족들이었다. 당시 리버풀 응원단 쪽에서 사고가 나서 사망자의 대다수는 리버풀 팬들이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이 억울하게 죽고, 거기에 더해 근거 없는 오명까지 덮어쓴 가족들은 ‘힐스버러 가족 지원그룹’을 만들었다. 이후 23년간 힐스버러그룹은 테일러 보고서가 진실을 오도하고 있다면서 재조사를 꾸준하게 요구했다. 그들은 경찰, 앰뷸런스, 셰필드 시청, 셰필드 웬스데이 클럽 등에서 나온 서류의 완전 공개를 요구하면서 투쟁을 했다. 힐스버러그룹의 압력에 못 이긴 노동당 정부는 1997년 재조사를 시도했으나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고 발견될 것 같지도 않다”는 이유를 들면서 1998년 사건을 마감하려고 했다.
하지만 힐스버러그룹은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언론을 통해, 자신들의 지역구 의원들을 통해, 각종 여론단체들을 이용해 정부에 압력을 계속 가했다. 결국 2009년 12월 당시 노동당 정부는 힐스러버 독립조사위원회를 구성하도록 명령했다. 위원회는 리버풀 성공회 대주교를 의장으로 인권변호사, 서류검사 전문가, 탐사 언론인, 보건부 의료청장, 전 북아일랜드 경찰청 부청장, 범죄전문학자, 방송인, 국가자료청장 등을 위원으로 구성되었다. 위원회는 80개 기관으로부터 넘겨받은 45만쪽의 서류들을 조사했다. 보통 정부 서류는 30년이 되어야 공개가 되는데 거의 10년을 앞당겨서 공개를 한 것이다.
조사위원회는 웹사이트를 통해 앞으로 위원회가 조사할 모든 서류를 남김 없이 공개하는 것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당시 20개씩 열거된 서류 목록만 1296쪽이나 된다. 영국 국민들은 누구나 들어가서 서류를 열람할 수 있었다. 위원회는 공개, 비공개를 따지지 않고 관련 서류들을 있는 그대로 다 내놓았다. 이 서류 공개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모든 서류를 먼저 공개해 놓고 위원회가 이런 서류를 조사하고 있다는 점을 국민에게 숨김없이 떳떳이 알리고자 했고, 자료를 본 대중들이 서류의 오류나 문제점을 지적해 주길 바랐다는 점이다. 국민들이 사건 관련 제보를 해주길 바랐던 점도 있었다. 나중에 위원회는 “이런 방식으로 대단히 특별한 효과를 보았다”고 평했다. 관민 합동의 대중 조사(클라우드 인베스티게이션)가 이뤄진 셈이다. 당시 서류를 제출한 80개 기관은 공개되면 자신들에게 불리할 서류까지 훼손 없이 보관하고 있다가 위원회에 순순히 제출했다는 점도 대단했다.
결국 이렇게 해서 위원회는 2년9개월에 걸친 조사 끝에 2012년 9월 최종 보고서를 내놓았다. 공개된 보고서로 영국은 다시 뒤집어졌다. 지금까지 믿어 왔던 사고 원인 중 제일 큰 요인이었다는 리버풀 팬들의 행동은 전혀 근거 없는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요크셔 경찰이 리버풀 팬들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려고 164개의 경찰 보고서 중 116군데를 수정하거나 삭제했음이 드러났다. 경찰에 대한 악평은 제거되거나 지워졌다. 증인들의 증언을 막고 증언을 바꾸거나 취소하라는 압력을 가했음도 드러났다. 당시 경찰이 희생자 모두를 대상으로 음주검사를 했고, 심지어 아이들까지 음주검사를 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경찰 내부 데이터 베이스를 통해 희생자의 전과나 사건 기록을 뒤진 흔적까지 드러났다. 희생자들에게 책임을 미루려는 경찰의 각종 시도가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다.
최종 보고서는 긴급구조 전화 내용도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CCTV 기록과 검시 결과 등에 의하면 사망자 96명 중 제대로 치료를 받았으면 최소한 41명은 구할 수 있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심장과 허파가 정상으로 작동하고 있었고 기절했을 뿐인데도 그냥 몸을 뒤집어 방치해 사망에 이른 사람들이 있었음도 밝혀졌다. 당시 경찰은 두 클럽 팬들의 충돌을 걱정해 부상자를 치료하고 실어 나르기 위해 경기장으로 온 앰뷸런스 44대 중 1대만 그라운드에 들어오게 했다. 그 결과 96명의 사망자 중 14명만 병원에 갈 수 있었다.
보고서를 본 유족들로서는 땅을 치고 기절할 일이었다. 최종 보고서는 요크셔 경찰이 현장 판단을 잘못해 갑자기 관중석으로 너무 많은 사람을 들여보내서 참사가 일어났고 현장지도력 부재, 위기대처 기관 사이의 긴밀한 협조 결여, 부상자들의 우선처리 혼선 등으로 허무하게 귀한 생명을 잃어버렸다고 결론지었다. 결국 캐머런 수상, 요크셔 경찰서장, 영국 축구협회 회장, ‘선’지 편집국장 등이 공식 사과를 했으나 유족들의 분노를 잠재울 수는 없었다. 일부 유족들은 “사고 당시 수상이었던 마거릿 대처의 사과를 받아야 하는데 이미 고인이 되어 버려 천추의 한으로 남는다”는 소회를 토로하기도 했다.
힐스버러 가족지원 그룹은 위계에 의한 간접살인, 업무상 과실치사, 업무태만, 증거조작과 위증에 대한 공무집행 방해 등의 혐의로 요크셔 경찰, 셰필드 웬스데이 축구클럽, 영국 축구협회, 셰필드 시청의 관련자 모두를 법정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압력 끝에 당시 셰필드클럽 사장이었던 EPL 데이비드 리처드 회장은 모든 직책에서 사임했고 귀족 칭호도 반납했다. 내무장관은 “모든 권한을 사용해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지게 하겠다”며 “개별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도 전부 조사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경찰 고충처리 독립위원회(Independent Police Complaints Commission)는 역사상 최고의 조사를 했다. 1444명의 전·현직 경찰이 당시 사고와 관련해 조사를 받았다.
▲ 1999년 10월 발생한 패딩턴 열차 충돌 사건. / ⓒ 연합
2012년 9월 영국 고등법원은 새롭게 제출된 증거로 재판을 다시 시작했고 그해 12월 이전 재판 결과를 ‘증거 조작’을 이유로 무효 판결했다. 현재 영국에서는 사고 관련 재판이 아직도 한창 진행되고 있다. 영국 검찰은 이 사건과 관련이 있거나 당시 요크셔 경찰서에 근무한 직원 전원에 대해 증거 은폐와 위증을 통한 공무집행 방해뿐만 아니라 간접살인 혐의로 소추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 결과 유족들은 ‘관계자들로부터의 정식 사과, 관련자들의 법적 조치, 리버풀 팬들에게 씌워진 오명, 이전 재판 결과의 번복’ 등 자신들이 원하던 것을 모두 다 이루었다. 유족들은 이제 ‘정의가 이루어졌다(justice is done)’고 만족해 한다. 물론 이런 정의는 결코 그냥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유족들이 불굴의 정신으로 쟁취한 것이다.
유족들은 조사를 이어가기 위해 경찰 개인들을 상대로 소송을 벌였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기각되는 일을 무수히 당하면서도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들은 2000년 경찰서장 등 개인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으나 “이미 피소자들은 대중으로부터 모욕을 당했고 이로 인해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가 없다”는 이유로 기각했다. 2006년에는 유가족 일부가 “아들은 사고 시간 이후에도 상당 시간 살아 있었다. 질식사한 게 아니다. 해당 기관들의 태만으로 인한 사망이다”며 유럽 인권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했으나 공소유효기간을 넘겼다는 이유로 기각되기도 했다. 이렇게 유족들은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시차를 두고 합법적인 압력을 지속했다. 힐스버러그룹은 재조사 청원을 위해 13만9000명의 서명을 받기도 했다. 반드시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길거리로 나가는 일은 자제하고 합법적 범위 내에서 활동을 끊임없이 펼쳐나갔다. 결국 불꽃을 꺼뜨리지 않는 끈기와 노력이 승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제 다른 예를 들어보자. 반대 방향에서 오던 열차가 정면충돌해서 31명 사망, 523명의 중경상을 낸 ‘패딩턴 열차 충돌사고’(1999년 10월 5일)다. 이 사건은 힐스버러 사건보다는 좀 단순하다. 조작이나 은폐가 별로 없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사건 당사자들도 몇 안 되어 간단했다.
하지만 패딩턴 열차 사고는 이미 예견된 사고였다. 사고가 나기 전 6년 동안 적색신호를 열차가 8번이나 지나쳤는데도 민영화된 철도회사가 즉각 개선을 안 하고 미적거리다가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쿨른 조사보고서’는 사전에 이미 위험을 감지하고 각종 위원회와 기관이 대책을 마련하는 중에 사고가 났음을 밝혀냈다. 철도 매니저가 조사 과정에서 “그렇게 많은 유능한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을 하지 않기도 힘들었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사각형 막대를 둥근 구멍 안으로 밀어넣고 ‘이 정도면 괜찮아!’라는 자기도취(complacency)와 나태무위(inaction)가 제일 문제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국영 영국철도회사(BR)의 관료주의와 무사안일 문화가 민영화 후에도 계속되고 있었다는 게 보고서의 지적이었다. 기술자 훈련도 제대로 안 되어 있었고, 취업한 지 2주밖에 안 되는 기관사가 기차를 몰았음도 밝혀졌다. 열차보호경고 시스템은 당시 금액으로 10만파운드(2억원)밖에 안 드는 공사였지만 미루다가 공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이런저런 요인들이 합쳐져 대형 사고가 난 것이다. 보고서는 295개의 개선사항을 제시했다. 보고서 발간 5년 뒤 사고 유족과 부상자들의 단체 ‘패딩턴 생존자 그룹’은 개선사항 중 가장 중요한 27개가 시행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뒤집어보면 이미 268개의 개선은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영국에서는 그 이후 더 이상 열차 대형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패딩턴 생존자 그룹은 사건 피해자를 돕고 영국 철도 안전 기준 설정에 큰 도움을 줬다. 패딩턴 열차 사건은 민영화된 철도회사의 업무태만과 직무유기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여론에 의해 기업 과실치사 혐의를 처음 적용했고 결국 법제화가 되었다.
1993년 4월 22일 당시 18세였던 흑인 학생 스티븐 로렌스 살인사건도 끈질긴 투쟁 끝에 사회정의를 이룬 사례다. 당시 사건 관련 재판은 영국 사회의 인종 편견을 획기적으로 바꿀 정도로 세인의 관심을 끌었고 살인사건의 경우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면 일사부재리법 원칙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법례도 세웠다. 이 사건으로 영국에서 제도적인 인종차별 관행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평가가 나왔고, 로렌스 사건을 조사한 맥퍼슨 보고서 발표를 ‘현대 영국 범죄재판 사상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고 칭한 언론도 있었다.
1999년 2월 발표된 맥퍼슨 보고서는 10만쪽 이상의 자료를 검토해서 결론을 낸 것이었다. 이 보고서는 경찰 초동수사 결여로 시작해 거의 모든 단계에서 제대로 된 수사를 하지 않았다는 점을 밝혀냈다. 일부 수사 담당 경찰이 살인범의 마약상 아버지로부터 금품을 받은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보고서는 영국 경찰, 검찰, 공공기관, 지방정부, 국민건강보험, 학교, 심지어는 재판정에서조차 팽배했던 인종차별 관행에 대해 신랄한 지적을 가했다. 특히 검찰과 경찰의 인종 편견은 제도적인 인종차별주의자(institutional racist) 수준이라고 까지 혹평했다. 맥퍼슨 보고서는 70가지 개선점을 제시했고 대부분 시정되었다.
로렌스가 살해된 지 20년 만에 정의도 실현되었다. 2012년 1월 주범 2명이 종신형을 받았고 2013년 3월에 형이 확정되었다. 수차례의 재판과 조사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빠져나가던 범인들이 1996년 이후에 개발된 DNA테스트 결과에 의해 덜미가 잡힌 것이다. 범인 옷에 남은 피해자 혈흔, 범인 가방에서 찾은 피해자 옷의 실 조각 등이 재판에서 주요 증거로 채택되었다. 이런 결과는 로렌스의 어머니 도린 로렌스가 아들을 잃고 20년간 펼친 캠페인 덕분이었다. 평범한 은행원이었던 도린은 자식의 죽음으로 비로소 제대로 눈을 뜨고 세상을 봤다. 그가 본 세상은 인종 편견과 소수민족 차별의 천지였다. 이후 도린은 초인적 힘으로 끊임없이 활동했다. 스테판 로렌스 자선재단을 만들어서 로렌스 재판 비용뿐만 아니라 영국 내의 인종차별과 관련된 범죄 피해자를 도왔다. 영국 경찰 개혁에도 큰 역할을 했다. 결국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내고 2012년 ‘자랑스러운 영국인’ 상을 받았다. 2013년에는 남작 작위를 받고 인종 문제와 다양성 담당 직능직 대표로 상원의원이 되었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함께 올림픽기를 잡기도 했다.
도린의 예에서 보듯 영국인들은 자신에게 닥친 운명에 쉽게 체념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당한 일을 다시는 다른 사람이 겪지 않게 함으로써 위안을 얻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영국에는 범죄나 재난 피해자들이 만든 단체가 많다. 위에서 든 세 단체 말고도 런던 폭탄테러 사건의 피해자 그룹(London Recover Group·2005년 7월 7일), 런던 지하철 킹스크로스역 화재 피해자 그룹(King’s Cross United Survivor·1987년 11월 18일), 총기사건 피해자 그룹(Mother Against Guns), 포터스 바 열차 사건 피해자 그룹(Potters Bar Group)’ 등 수도 없이 많다. 이런 단체의 멤버들은 자신이 피해자이거나 피해자 가족, 혹은 피해자들의 취지에 찬동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단체의 활동 목적은 대동소이하다. △사건 피해자와 가족이 뭉쳐 권익을 찾고 정의가 실현되게 함으로써 한도 풀고 △자신에게 일어난 불행이 다른 사람에게는 다시 안 일어나도록 하고 △같은 피해자들끼리 동병상련으로 돕고 △다른 사건 피해자들을 도움으로써 자신의 상처도 치유하고 △이런 활동을 통해 삶의 의미를 다시 찾자는 것 등이다.
결국 사회시스템이 제대로 작동을 못하면 피해자를 비롯한 당사자 모두가 나서서 권익을 찾고 정의를 지켜나갈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영국인은 진작 알고 행하고 있다. 영국의 안전수준이나 사회정의가 다른 나라보다 조금 낫다면 그건 영국인들이 부단하게 투쟁해서 얻어진 것이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이다.
권석하 / 재영칼럼니스트·‘영국인 재발견’ 저자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