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 리버모어는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개인투자자, 증시를 뒤흔든 투기꾼, 추세매매의 아버지, 월가의 '큰 곰' 등 무수히 많은 수식어로 불리는 전설적인 트레이더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투자자를 꼽으라면 당연 워렌버핏을 꼽을 것입니다.
하지만, 트레이딩에 초점을 맞춘다면 이 세상에서 제시 리버모어를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제시 리버모어는 투자계의 발을 들여놓으면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정말 스펙타클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농사꾼으로는 미래가 없다는 것이라 짐작하고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0대에 어머니가 마련한 5달러(현재가치 13~15만 원)를 들고서 보스턴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보스턴에 위치한 증권부로커회사인 페인웨버에서 주식호가판을 정리하는 사환으로 취직하고 유사 증권회사인 버컷샵에서 돈을 벌게 된 것을 계기로 15세가 되던 해에 1000달러를 벌어들입니다.
제시 리보모어는 사설 거래소를 통해 주식과 상품거래를 하면서 '올인'을 자주 하면서 수익을 거뒀는데, 업계에서는 그를 '몰빵 꼬마'라고 부르며 출입을 금지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투자자'로서의 눈을 뜨게 된 리보모어는 전업투자자로 활동하면서 1897년 20세 즈음에 1만 달러(약 2억 원)의 돈을 벌어들이게 됩니다.
그러나 몰빵이라는 리스크와 투기가 합쳐지면 언제 폐가망신당할지 모르는 것처럼 리버모어는 21살 때, 뉴욕 증권거래소를 중심으로 투자를 이어나갔지만 실패라는 쓴맛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빠르게 대처하지 못했다는 것이 실패의 원인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500달러를 빌려 세인트루이스의 사설 거래소로 갑니다.
리버모어는 다시 몰빵하여 2500달러를 만들어 뉴욕으로 돌아와 주식거래에 몰두했지만, 1901년 5월 3일 노던 퍼시픽 철도(NPR)의 매수, 매도 포지션을 잘못 잡은 리버모어는 5만 달러를 잃으면서 파산을 맛봅니다.
1902년 파산에서 견뎌낸 리버모어는 다시 사설 거래소에서 돈을 모아서 뉴욕 증권거래소로 돌아옵니다.
1906년 4월에 유니온퍼시픽 주식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주가가 하락할 것을 예견한 리버모어는 공매도를 통해 25만 달러의 수익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갑작스레 다가온 1907년 10월 24일 경제 공황으로 인한 주식시장 대폭락이 리버모어를 부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지속적인 공매도로 약세 포지션을 쌓고 있었는데, 단기간에 1백만 달러라는 수익을 기록합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음날 아침 시가에 공매도를 시작하여 투매를 불러일으켰고 공매도 포지션 청산하고 상승을 유도하여 다른 종목을 매수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물량을 넘기면서 3백만의 수익을 달성하였습니다.
오죽했으면 당대 최고의 은행가였던 J.P. 모건까지 나서 그에게 공매도 자제를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다음 해인 1908년 자신의 원칙을 어기고 전문가의 조언을 따르면서 면화와 밀 상품 거래에서 큰 손실을 입었고 2만 5천 달러의 자금을 융통하여 다시 사설 거래소로 돌아가 3달 만에 11만 2천 달러의 수익을 올리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지고 있는 부채가 1백만 달러를 넘어서면서 파산에 위기에 처합니다.
리버모어는 다시 트레이딩을 시작해나가면서 1917년 모든 빚을 청산하였고, 가족들이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보장연금과 신탁자산을 확보하고 1925년 밀 상품시장에서 1천만 달러는 큰 수익을 거둡니다.
1929년 강세장의 흐름 속에서 리버모어는 보합 상태의 증시를 파악하고 추세 전환을 예감하면서 조금씩 공매도 포지션을 취하면서 완벽하게 자신의 예상이 들어맞을 시점에 매수 포지션을 모두 청산하고 공매도 포지션으로 바꾸면서 1억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수익을 거둡니다.
이는 주식시장에서 단기간에 올린 수익 중 절대적인 수치의 기록입니다.
당시 언론에서는 리버모어가 시장의 끌어내렸다고 했지만, 리버모어는 "내가 하던 일은 개인 수준이었다"라고 전했습니다.
대공황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던 리버모어의 앞날은 창창할 것 같았지만, 그는 우울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자녀들과 만나지도 못하고 이혼과 재혼을 반복하며 향락과 사치에 빠져 지인들과 교류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트레이딩에서 멀어졌으며 우울 증세에 시달리며 1934년 5월에 또다시 파산신청을 하게 됩니다.
긴 우울증에 시달렸던 리버모어는 1940년 11월 28일 오후 4시경 셰리-네덜란드 호텔로 가서 32구경 콜트 자동권총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리버모어는 철저히 시장의 추세에 따라 매수하거나 공매도하고 과감하게 거래량을 늘려나가는 트레이딩 기법으로 유명했으며, 결정적인 순간 대중들의 정서와 거스르는 포지션을 취했고, 피라미딩 방식으로 포지션을 쌓아가 수익은 크게 하고 손실은 작게 가져갔습니다.
비록 10배의 레버리지를 통해 엄청난 수익을 기록하고 손실과 파산을 보기도 했지만, 그가 엄청난 투자자라는 것은 변명할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다만, 여기서 제시 리버모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가진 자본에 비해 막대한 레버리지를 끌어다 사용할 경우 순식간에 큰 쓴맛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인내심을 가지고 자신의 판단을 확실하게 하고 투자에 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