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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성 사람입니다
1. 불시에 고향 개성을 떠나다
서울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경기도 개성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이전에는 대한민국 경기도 개성시로 엄연한 대한민국 땅이었으나 1951년 7월에 시작된 정전회담 이후 잘못된 회담으로 북한 땅이 되어버린 아주 별난 고장이다. 서울에서 57.6km 거리에 있고 같은 경기도에 위치한 수원은 34.4km 거리로서 대단한 차이는 없지만 수원은 서울에서 하루에 여러 번씩 왕래할 수 있는데 개성은 불편하고 제한된 개성 관광과 철저히 통제된 방문을 제외하고 70여년이 되도록 자유롭게 다녀오지 못하는 황지(荒地)가 되어 버렸다.
필자인 나 박광현朴光鉉도 1951년 4월에 잠시 피난 간다며, 아무 준비도 없이 부모님과 고향땅 개성을 떠난 이후 2022년이 되도록 고향을 자유롭게 방문 못하는 이상한 타지(他地)가 되었다. 외국인들에게 나의 기막힌 처지를 한탄하면 왜 한번 편지나 전보를 보내고 가보지 않았냐는 지적을 하고 지금이라도 가보라는 말을 하며 이해를 못하는 그런 곳이 죽어도 잊지 못할 나의 고향 개성이다.
6.25전에는 38도선이 걸쳐있던 송악산에서 수시로 남북 충돌이 있어 개성시내에서는 총성이 끝이지 않았으며 1949년 5월 4일의 전투에서는 자랑스러운 우리 국군 영웅들의 “육탄 10용사”가 장렬하게 전사 하였다. 6.25 한국전쟁이 발생한 6월 25일 일요일 새벽에 많은 총, 포성이 계속되며 북한 인민군은 개성의 북쪽에 위치하였던 38도 분단선을 돌파하고 순식간에 개성을 통과 남진을 시작하며 낙동강가에 이르렀다.
유엔군과 미군의 도움으로 역전되어 북진을 계속 압록강에 이르렀지만 중공군의 참전으로 다시 1.4후퇴로 반전되었다. 한국군, U.N과 미군의 혈투로 다시 서울을 회복하고 중부전선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1951년 7월 8일부터 정전 회담이 시작되었지만 지지 부진하다가 1953년 7월27일 겨우 휴전협정이 조인되었으나 유엔군측은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을 범하게 되었다. 북한측은 서울에서 가급적 가까운 곳에 휴전선을 설치하려 무진 애를 썼고 처음 정전 회담은 예성강가 경의선 역인 여현(礪峴)에서 개성 시내로 그리고 판문점으로 옮기며 휴전선을 남진시켜 개성주위 일대를 북한의 속지로 만들었다. 휴전회담을 진행하던 미국 정부와 미군들에게 섭섭하고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과정에 1951년 전후 봄, 여름에 걸쳐 많은 개성 젊은이들은 잠시 피난 간다는 생각으로 부모님 곁을 떠났고 전쟁이 끝나면 즉시 귀향하게 되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70여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까지도 개성이 못 가는 험지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하였다.
개성 옛 한옥가들
개성을 떠난 후 대한민국 육군 제1사단(사단장 백선엽 장군)소속 유격대 제5816부대에 입대하여 몇일간의 총포 사용법과 군대 기강에 관한 교육을 받고 전선의 긴박함에 쫒겨 실전에 참전 하였다.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 미군에 쫒겨 북한 인민군은 거의 지리멸렬 하였으나 참전한 무수한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혹독한 사투를 겪게 되었다.
당시 나의 나이 17세, 우리 부대에는 나보다 어린 `16세 소년도 적지 않았다. 기억에 남는 (고)안광일군은 16세로 중공군과의 전투지 였던 개성주위 개풍군에서 내가 보는 앞에서 전사하던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육군1사단 방어선이 있는 임진강 이북에서 서울 방어에 사투를 버릴 때가 바로 중공군 춘계 2차, 3차 공세가 있을 때였다.
500년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에는 많은 고적이 있다. 충혼을 그리는 선죽교를 위시하여 화려하고 아름다웠던 옛 궁전터 만월대, 남쪽에서 들어오는 입구로 남대문이 있고 옛 유생(儒生)들이 공부하던 성균관이 있으며 그 외 많은 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다.
개성의 중심부에는 지남산이 있는데 이 산 뒤에 고리고개라는 고개가 있다. 나는 이 고개 밑 고려동에서 태어났고 내가 군에 있을 때인 1951년 5월말에 이산에서 중공군과 전투가 있었는데 그들의 인해전술에 아군의 피해가 적지 않았던 곳이다. 당시 중공군 춘계 제2차 공세이후 후퇴하던 중공군과 시가전을 치를 때 남대문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시가전을 치룬 곳이다. 그때 남대문에 있던 종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17살에 개성을 떠난 이후 70여년이 지나 이제는 두루 고향을 기억할 수가 없다. 북부에서 태어났고 그곳 근처와 학교 주위는 그런대로 눈에 어린다. 군인으로 1951년 5월에 개성에 진주 하였을 때 개성 동부로 진입하여 자남산 주위에서 방어진을 구축하고 있을 때 둘러보고 실제 전투하였던 상황은 눈에 선하다. 남대문에서 북부대로로 북쪽으로 들어오면 오른쪽에 유명한 아메리카 빵집이 있다. 이 빵집은 친구의 부모가 운영하던 곳이고 맞은편에 내가 다니던 영생 유치원이 위치해 있다. 곧장 더 올라가면 널리 알려졌고 역사적으로 유명한, 역시 내가 다니던 개성 송도중학교가 있다. 영생 유치원에서 옆으로 가파른 언덕길이 있는데 이 언덕길은 개성뿐 아니라 주위 지역에 널리 알려진 개성 호수돈 여학교 즉, 명덕明德학교로 올라가는 길이다.
이 언덕길에서 나는 한국군으로 참전하고 있을 때 중공군과 조우하여 처음으로 적군을 직접 사살 하였던 곳이다. 자남산에서 잠복 경비중이던 때 중공군 제2차 춘계 공세에서 패한 중공군이 후퇴 중 인해전술로 공격해 오는 바람에 혹독한 전투를 치르고 개성 남쪽에 위치한 고남문 고개를 넘어 강화도로 후퇴하였던 기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총을 메고 둘러본 개성 시내는 아군 폭격으로 폐허와 다름없었다. 북부 만월대에서 남대문으로 향하는 개천 변은 톤급 시한폭탄으로 많은 웅덩이가 생겼고 남대문 옆은 청년회관을 위시하여 건물들이 완전 파괴 되었다. 남부는 성한 집이 거의 없는 건물 조각이 널려있는 벌판이 되어 있었다.
2. 개성 땅과 개성인
선죽교
성균관
박연폭포
개성은 지리적으로 매우 깨끗한 도시이다. 토질은 모래사장과 같으며 진흙탕이 거의 없다. 공기는 북쪽에 위치한 송악산松嶽山의 영향으로 항상 깨끗하며 이산에서 내려오는 개천 물은 맑고 시원하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은 구도舊都이지만 산뜻한 산천이 한참 자라나는 신흥 도시 같았다. 고려 시절에 건축되어 여러 차례 수리는 있었지만 고색창연한 남대문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을 가르는 대로가 뻗쳐 있고 동부, 서부, 남부, 북부로 도시가 뻗쳐 있다.
이러한 아름다운 고도古都이자 전통의 왕도王都에 살고 있는 개성인의 정체성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개성 사람들은 모든 것이 분명하여 움직임도 똑바르고 사리가 밝고 주체성이 강하며 절약, 검소, 저축을 생활신조로 삼고 있다. 신용이 철저하며 자립정신이 강하다. 상호 협력과 교육열이 철저하고 자력 신조가 강하다. 자유주의 정신이 투철하여 거의 전 시민이 보수 성향이 강하다.
나의 부모님은 순 개성사람이며 나는 개성에서 태어났고 개성에서 자랐다. 어떤 개성출신이 되지도 못한 일본말을 써가며 “가이죠” (개성의 일본식 발음)라면 이가 갈린다는 말을 듣고 분개한 적도 있지만 나는 정말로 개성사람인 것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세계지도를 펴놓고 우리나라를 찾아보면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이러 작은 땅덩이 안에서 어느 지방을 떼어놓고 이야기한다는 것이 우스운 일일지 모르나, 개성이라는 한정된 지역과 이곳에서 낳고 자란 개성 사람은 그 자질과 특성에 있이 너무나도 유별한 것이 사실이다. 서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면시도 전혀 이에 영항을 받지 않았으며, 황해도에 인접하여 있으면서도 그 곳과 유사한 점을 찾아보기 힘들다.
임진강과 예성강의 사이에 위치한 개성은 경계에 성을 쌓아 독특한 개성과 특이한 본질을 독립적으로 지켜왔다. 일찍이 장사에 눈을 돌려 국내 방방곡곡을 누비었고 예성강을 관문으로 하여 그 세력을 중국에 까지 뻗치고 바다 건너 일본까지 넘보아 왔다. 국내 곳곳을 다니고 외국과 거래하는 중에 개성사람들은 각지의 좋은 점을 배우고 나쁜 점을 가려내어 어느 지방 사람보다도 앞선 훌륭한 자질을 기르고 특성을 살려왔던 것이다.
특이한 점으로는 중국인들의 근면 성실한 성품과 일본인들의 깔끔하고 확실한 마음가짐을 우리 개성사람은 고루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다음과 같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지금과 같은 세계적인 불확실성의 시대에, 처절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치열한 국제경제 상황에서일지라도 바로 우리의 개성인 정신과 자세로 대처한다면 아무런 어려움도 없다는 것을 왜정 때 일본인이 개성에 발을 못 붙인 점, 절약하고 검소하고 또 비축하는 습관 등, 이러한 개성인 특성을 온 국민이 배운다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으리라.
3. 박완서의 장편소설 “미망未忘”에 그려진 개성
친우이자 한독약품의 대표이사인 김조형의 격찬과 권고가 있어 박완서씨의 장편소설 “미망未忘”을 읽었다(1992년). 이 책은 고향 개성에 관해 역사적이고도 향토적인 서사를 아름답게 풀어내고 있다. 소설은 작가가 자신의 출생지인 개풍군 청교면에서 체험한 바를 바탕으로 하여 지금은 가볼 수 없는 고향 산천 및 미망의 세월에 대한 내용을 붓에다 쏟아 부었다. 나의 입장에서는 잊혀져 가는 고향의 모습과 그 흙 내음을 되살려 준 점에 대해 고마움을 어찌 표현하여야 할지 모르겠다.
그는 모래땅이 빛나는 깨끗한 개성 시가지를 묘사하였고, 신선하고 상쾌한 송악산 바람이 충만한 이 동네 저 동네들과, 작가가 태어난 청교면을 가려면 넘어야 하는 고남문 고개, 그리고 그 옆에 그려지는 용수산의 자태등을 그윽하게 그려내고 있다.
소설 속에 나오는 지명들이 너무나 친숙하다. 동해랑, 서해랑, 가주물다리, 사직단, 황학정, 인삼장, 부산동, 자하동, 채화동, 백수동, 천동, 남성병원 등이 나를 소설 속에 깊이 빠져들게 한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나의 동네 이름들이 희미한 기억 속에 뒤를 잇는다. 고리고개, 노적봉, 구남골, 보수골, 당성다리, 노군다리, 음지고개 등 끝이 없다.
구정 초나 추석 때 나는 문산의 임진각, 강화의 북문, 김포의 애기봉을 찾아가곤 하였다. 꿈에도 잊지 못하는 고향땅, 조상이 묻혀있는 그 곳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서 참배도 하고, 먼발치로 송악산도 쳐다보고 향수도 달랠 겸해서. 그러나 나는 이 책 미망未忘에서 더욱 가깝게 고향땅에 접할 수 있었고 항수도 달랠 수 있었다. 미처 몰랐던 사실事實, 사실史實들을 이 소설 속에서 알게 되었으며 다음과 같은 작가의 언급에 많은 부분 동감하였다.
- 개성사람은 흰쌀(白米)을 이(李)쌀이라고 불렀다는 사실,
- 서울로 내려가고 개성으로 올라온다는 개성사람의 철저한 고집,
- 개성전기 주식회사는 전국에서 일본인이 개입하지 아니한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최
초의 전기회사였다는 사실,
- 해방 직후 미·소군이 진주하던 초기에는 미 · 소의 점령경계가 야다리였다는 것,
- 개성여인들은 치마를 오른쪽으로 여민다는 특이한 관습,
- 별다른 개성의 혼인예식과 큰머리, 머리어멈에 관한 설명,
- 아이를 낳으면 인줄은 걸지 않고 아들인 경우는 유산경기부정有産慶忌不淨, 딸인 경우 유산기부정有産忌不淨이라고 대문에 써 붙인다는 사실,
작가는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가 전부 특성상 개성이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나도 이에 전적으로 찬동한다. 작가는 실명 또는 유사한 가명의 인물들을 등장시켜 우리에게 더욱 실감나게 한다. 개성의 거인이셨던 공성학孔聖學 그리고 공진항孔鎭恒 부자父子와 그들이 1936년에 설립하신 만몽산업주식회사滿蒙産業株式會社에 관한 역사가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개성의 옛 혼인예식에 대한 흥미 있는 소개를 읽으면서 50년 전 신구식으로 올리던 내종사촌형內從四寸兄 홍종규洪鍾奎형님(공진항 씨 사위) 결혼식과 집안잔지 광경이 아련히 기억 속에 떠오른다. 기차가 개통된 후 개성에서 서울까지의 기차여행 이야기 중 역 이름도 쭈욱 나열된다(개성, 봉동, 장단, 문산, 금촌, 일산, 능곡, 수색, 신촌, 서울).
큰 형님께서 서울대학교를 매일 통학하시던 그 가까운 곳이 70여 년 동안이나 갈 수 없는 먼 곳이 되었다니, 소학생시절 친구 이우천李愚天과 처음 서울나들이 하던 때 지나던 정거장들, 아버님께서 1930년대에 고려시보高麗時報에 연재한 금강산관참기金剛山觀參記에서 개성을 떠나 지나는 기차역들의 모습을 그리셨는데 거기에도 이 정거장들이 생생이 열거되었다. 서울 행 기차 속에서의 순박한 시골 분들의 개화기 대화도 감명 깊게 한다.
“저 일반 저승도 기차 타고 가라면 얼씨구 가겠네.”
“두고 보시구려, 머지않아 상여도 기계로 끄는 세상이 올 테니.”
상여를 기계로 끄는 영구차를 예언한 것이 되었다. 아버님이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1935년에 처음으로 개성에서 영구차를 썼다는 옛 이야기가 생각난다.
작가는 소설 속에서 개성인開城人을 묘사하고 부각시키는데 나의 개성인 자랑과 많은 부분 부합되었다.
삼포와 장삿길을 설명하면서 특이한 기질을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고, 개성인의 생활 특성을 자상하게 소개하고 있다. 외빈내부外賓內富의 개성인, 안채는 기와집 바깥채(사랑채)는 초가로, 잔치는 풍요하게, 상하 구별 없고 귀찮은 격식 없는 화목한 잔치 풍경, 있는 집안 살림의 알뜰함과 드난살이의 곧은 행동거지, 개성여자의 알뜰하고 짜임새있는 안방살림, 나는 요새도 개성여자에 대한 칭찬을 들을 때면 항상 으쓱한다. 장 닦고 집 잘 치는 내성적인 여인상을 그리는 한편 남편을 타향으로 장사 보내놓고 큰 집안 살림을 잘 꾸려가는 강인한 정신력 및 고생하는 남편을 보필하고 스스로 해결하려는 수리에 밝은 여장부상의 개성여자가 크게 부각된다. 작가가 소망하는 개성 여인상인 듯도 하지만.
일본인 상품의 불매운동이 남녀의 구별이 없었고, 있는 자, 없는 자의 차이 없이 합심된 작품이었다던가. 앞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지원하던 개성인의 독립운동, 친일로 위장하여 경제활동을 지속하고 아낌없이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으며, 해방 후 공치사 한 번 아니하고 오히려 친일파란 수모까지 감수하는 개성인 기질, 개성사람중에는 역사에 부끄러울 철저한 친일 반민족적인 사람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은 나도 동감하고 항상 자랑스러워하는 사실들이다.
조합이라는 집합체의 형성과 활동, 삼포의 운영방식 등 개성인의 신의 있는 협조정신을 이 소설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외국자본과 타협하거나 또는 종속되면서까지 사업에 집착하는 것은 그다지 떳떳치 못하다고 생각하고 오히려 그것을 멸시하고 배척하는 개성상인의 주장이 곧 나의 지론이며 지표이다. 이것이야말로 개성인의 자랑스러운 결벽성이며 요즘의 난국이 배워야할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고려왕국高麗王國이 멸망한 후 개성사람들은 관官을 멀리하고 오직 상商에만 전념하였다. 그 특성은 오늘날까지 후예들에게 전수되고 있다. 권력에 아부도 아니하고 편승하지도 않으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깔끔한 상인으로 남기를 원한다.
6·25 이후 어렵게 종삼種蔘을 월남시키는 내용 또한 이 소설에서 알려주고 있다. 이렇게 옮겨진 종삼은 송도 전래의 특산물을 끊이지 않게 하였을 뿐 아니라 남한 곳곳에서 더욱 발전되어 고된 피난살이를 극복케 하여 주었고 재력의 부흥을 가져다 주었다. 화단을 가꾸고 화초를 키우는 개성 가정의 아름다운 정경, 나는 어린 옛적, 화사하던 나의 집 화초들을 그려본다. 매화나무, 석류, 유도화, 치자나무, 무화과 곱게 다듬어진 아름다운 화단. 옛날부터 자식 가르치는 복잡한 송방松房의 관습, 이렇게 단련되고 성장한 다음 세대들의 틀림없는 답습 또한 소설에서 잘 반영되고 있다. 한영서원을 위시한 신교육기관의 설립과 이곳에서 다른 지방보다 앞서 애국심, 독립운동, 배일사상 및 민족정신을 일깨워 주었다는 사실도 빼놓지 않았다.
한편 개성 사람들의 결점도 준열하게 지적하고 있다. 불의를 용납하지 않고 또 불의를 용서하지 않는 결벽성이 지나쳐 아집이 되고 타협을 모르게 만든다. 이것저것 재는 것이 지나쳐 사회에 기여되고 보람 있는 사업보다는 소규모의 알찬 금융업, 부동산에 치중한다는 점, 사회활동의 지나친 자제로 적극적인 사회진출이 없다. 적극적인 일반인 독립운동이 다른 고장에 못 미친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남에게 신세지지 않는다는 지나친 자존심과 그에 의한 고립은 결국 인간미를 상실하였다. 절약이 지나쳐 구두쇠가 되었다. 인도의 유명한 철학자가 말하였다. “구두쇠가 자기가 죽은 후 자기 재산을 자선기관에 기부한다는 유언을 남기는 것보다는 아껴 벌면서 살아 생전에 좋은 일에 사용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고.
소실小室을 두는 이중 살림이 지나쳤다고 본다. 소설에서도 이 점을 적나라하게 파헤쳤는데, 개성 사람은 첩을 잘 둔다는 농담을 들을 때 매우 수치심을 느낀다. 이유와 핑계는 많겠지만 미신을 섬기고 믿는 것이 개성에서는 매우 극성이었다. 이 결점들은 옥에 티가 되었다.
4. 나는 자랑스러운 개성사람입니다.
현대적인 시가지 모습
고향 개성에 대한 나의 몸과 마음은 늘 수구초심이다. 그러나 개성은 지척에 두고도 가보지 못하는 한 많은 분단의 땅이다. 엄혹한 전란의 청소년기 짧은 시기를 보낸 고향이지만, 그리고 지금은 갈수 없는 고향이지만 나는 내가 자랑스러운 개성인이라는 사실에 무한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진다.
전통적으로 개성 사람들을 평하여 ‘개성인은 모든 것이 분명하여, 움직임도 똑바르고, 사리가 밝고, 주체성이 강하며, 절약과 검소, 저축을 생활신조로 삼고 있다. 신용이 철저하며 자립정신이 강하다. 상호 협력과 교육열이 철저하고, 자력 신조가 강하다. 자유주의 정신이 투철하여 거의 전 시민이 보수 성향이 강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조금 달리 다음과 같이 개성사람 자랑을 열 가지 열거해 볼까 한다.
1. 뚜렷한 주체성主體性 2. 절약과 검소 3. 비축과 저축 4. 신용과 신의 5. 밝은 사리 6. 철저한 자립정신 7. 청교도적 결벽성 8. 협동정신과 상호협력 9. 정도正道와 교육열 10. 자유주의自由主義 정신
이러한 개성인의 특성과 자랑스러운 덕목은 필자가 월남하여 경제인 및 사회사업가로 큰 성공을 거두는데 귀한 자양분과 격언이 되었다.
나의 부족한 지식과 식견 때문에 엮어가는 글 중에서 혹시 결례가 되었다거나 부정확하다거나 또는 개성사람 본질에 누가 되었더라도 본심은 아니니 깊이 관용하여 주시기 바란다. 그리고 지척의 고향을 가지 못하고 애타게 그리워하는 개성사람들에게 그리고 많은 실향민들에게 조그만 위로와 향수를 달래고자 이렇게 긴 말을 하게 되었음을 양해 바란다.
2022년 1월 13일 박광현 (제일항역 주식회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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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을 참 잘쓰셨네요.
그리운 고향 개성이 많이 그리우시겠어요.
우리들도 서울과 가까운 개성이 우리 한국땅이엇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