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외환위기를 다룬 영화 '국가부도의 날'이 흥행에 크게 성공하면서 사회적 논란도 이어지고 있다. 9일 만에 관객 200만을 돌파하는 파죽지세이다. 반면 "또 한 편의 혹세무민형 정치영화"이고 '팩트파산의 날'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지난 20여 년 동안 한국현대경제사를 연구해왔던 필자의 마음은 착잡할 뿐이다. 사실을 천착해서 내놓은 실제 이야기(history)보다 사실을 적당히 섞어서 가공한 팩션(faction)의 힘이 훨씬 강하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계기였기 때문이다. 역사가의 입장에서는 맥이 빠질 수밖에 없다.
마음이 착잡해지는 더 큰 이유는 이 영화의 성공이 던지는 메시지에 있다. 대기업이 사악한 존재라는 반(反)기업 정서가 더 강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국제통화기금(IMF) 프로그램에는 우파적 반재벌 이데올로기가 반영되어 있었다. 그 전에는 재벌이 경제 기적을 일군 효율적 조직이었지만 불평등을 불러왔다는 비판이 주류였다. 그러나 재벌이 비효율적이고 그래서 금융위기가 왔다는 비판으로 확장됐다. 극우라고 할 수 있는 IMF 프로그램에 재벌개혁이 들어간 근거였다.
필자의 연구는 재벌 비효율론의 사실 왜곡을 비판한 것이었다. 비효율적인데 과연 대기업이 될 수 있는가? 뭔가 효율적인 부분이 있으니까 대기업으로 크는 것이다. 재벌 비효율론은 한국 대기업들이 '협잡'으로만 컸다고 전제한다. 내수 기업이라면 그럴 여지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세계 무대에서 성공한 기업을 그렇게 단죄할 수는 없다.
당시 '중소기업 위주'의 대만을 부러워하는 분위기도 만들어졌다. 한 외국언론사 특파원은 필자와 저녁식사를 하며 "대만을 본받아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그는 경제전문이 아니었고 한국에 온 지도 얼마 안 됐지만 주요 방송에 초대됐다. 그러나 그 후 사실을 제대로 확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경제개발이 시작된 이후 1인당 국민소득에서 대만은 한국보다 항상 높았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부터 한국이 높아졌다. 당시 필자와 만난 대만 교수는 한국 경제를 굉장히 부러워하고 있었다.
IMF 프로그램에 재벌개혁이 들어간 것은 음모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낫다. 실제로 과거 IMF 프로그램에는 기업 구조조정이 없었다. 외국자본 입장에서 중남미의 경우는 구조조정시켜서 먹을 만한 큰 민간기업이 없기 때문에 국영기업 민영화만 집어넣으면 됐다. 반면 한국은 대기업을 구조조정 틀에 집어넣으면 먹을 것이 많았다. 이러한 외국자본의 이해관계는 '정권 교체'를 통해 탄생한 김대중 전 대통령 정부의 정치 기반과 맞아떨어져 '반재벌-친외자' 연합전선을 만들어냈다.
'국가부도의 날'에서 바뀐 것은 IMF 때의 외국자본 구세주론이다. 여기에서는 "외국자본도 나쁜 놈"이다. 한 평론가는 여기에 주목해서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이 영화를 읽어내는 가장 큰 포인트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필자에게는 "대기업 나쁜 놈" 메시지의 강화가 눈에 들어온다. 재벌에 '포획'된 재정국이 대기업에 유리하게 한국 경제를 개편하기 위해 IMF 구제금융으로 몰고 간다. 주인공은 이 음모를 저지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반재벌-반모피아-반외세' 구도이다. 이제는 좌파적 반기업 이데올로기가 사실을 왜곡한다.
영화나 팩션은 진위를 떠나 논란 자체가 흥행으로 이어진다. 정치인들 사이에서 "죽었다"는 것만 빼고 좋은 얘기든 나쁜 얘기든 언론에 많이 등장하는 것이 표 얻는 데 좋다는 속설과 일치한다. 이런 상황에서 팩션은 중우(衆愚)정치의 효과적 무기로 활용된다. 기업은 좌우 협공에 끼어 옴짝달싹하기 어려워진다. 깊이 있는 실사구시 논의가 벌어질 공간은 갈수록 협소해진다.
20여 년 전에 크게 왜곡된 한국현대경제사는 시정되기는커녕 왜곡이 거듭되고 있다. 먼 길을 돌고 돌아 과연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까. 아니면 왜곡의 진흙탕에 더 깊이 빠질 것인가. 관객들은 보는 순간 짜릿하고 즐거울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를 바라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공포감마저 밀려온다.